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2)
의미 부여 (5)
?로르텔의 별장을 청소하기 위해 오두막에 들렀을 때, 벨은 생각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클레드릭 수도원의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지도 벌써 닷새가 넘었다.
야생에서 닷새란 시간은, 잡초가 자라고 식량이 부패하며 식수가 말라가는 시간이다. 하루하루를 귀중하게 써야하는 야생 생활은 아무나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기에 평소 캠프 일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하는 에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예니카가 고생을 좀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잘 유지되고 있는 캠프는, 웬걸 에드가 주도적으로 관리할 때랑은 다른 방향으로 깔끔해져 있었다.
에드 보다는 좀 더 섬세한 성격의 예니카 답게, 여기저기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도구들과 식자재들, 장작 따위가 보기 좋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앞에서 책을 읽던 예니카는 벨이 와서 놀라는 표정을 짓자 엣헴, 하며 양팔을 허리에 올리고는 위풍당당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생각보다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캠프 유지보수에 굉장히 능숙해지셨군요.”
“내가 캠프 생활 시작한지 몇 개월인데 이 정도는 하지!”
그러고서는 엣헴 엣헴 거리며 의기양양한 자태를 보여주는데, 솔직히 멋지다기보단 기특하다는 느낌이 먼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예니카 또한 에드 옆에서 캠프 생활을 이어온만큼 기본적인 관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만한 요령이 쌓였다.
힘 쓰는 일은 주로 정령들이 도맡아 했겠지만, 섬세하거나 요령이 필요한 일은 맡길 수 없지 않나.
“오늘 에드가 돌아온다고 하니까. 별 문제 없이 잘 있었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
원래 에드의 일정대로라면 오늘 클레드릭 수도원의 기도회를 마치고, 밤 중에 귀가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예니카가 힘써서 한층 더 캠프를 깔끔하게 한 것도, 돌아온 에드가 놀란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도원 내에서 급박한 일이 생겨서, 귀교 일정이 밀리셨습니다. 저도 방금 연락받은 참이라 전해드리러 온 겁니다.”
“….으응? 그, 급박한 일?”
“복잡한 일에 휘말리신 모양입니다. 잘 해결하고 돌아오실 거란 생각은 듭니다만… 걱정은 되는군요.”
“그, 그렇구나… 에드… 걱정이네. 최근들어 그다지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그렇습니까? 저는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만.”
“저번에 이상한 약기운에 휘둘렸을 때 이후로, 생각이 많아진 느낌이었거든.”
예니카는 무릎 위에 얹어놓고 있던 커다란 정령학 마도서를 탁 덮고, 옆 쪽 등걸 위에 올려놓았다. 문득 마도서가 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는데, 예니카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정령들이 현현해서 마도서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역시 많이 힘들었던걸까…?”
“그렇다기보단… 제가 쓸 데 없이 생각이 많아지는 말을 해드리긴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지랖이었던 것 같군요.”
“쓸 데 없는 말이라니…?”
“그냥… 에드 도련님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제 과거사를 좀 털었을 뿐입니다.”
예니카의 눈빛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그 에드가 듣고 뒤숭숭해졌던 이야기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 벨 마이아의 과거이야기가 섞여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온전히 말씀 드리지 않은 부분도 있고. 에드 도련님의 개인사가 섞여있는 내용도 있으니… 함부로 공유해드리기는 좀…”
하여튼 입이 방정이다.
매사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오필리스관에서는 이런 말실수를 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건만, 캠프에만 오면 한층 어깨에 힘이 풀려서 실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늦었다.
예니카는 이미 머리 끝까지 호기심을 자극당한 상태였다.
볼 멘 소리를 내며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예니카는 이대로 놔둬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꾹꾹 쥐는 것 말고는 별다른 해를 입히진 않는다. 초식동물은 화를 내봐야 초식동물이다.
그래도 저렇게 가만히 놔두는 것도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아서, 벨은 한숨을 푹 쉬고 예니카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에드 도련님은, 한 때 삶에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이 있습니다.”
벨이 자세를 잡고 사정을 설명해주려 하자 아이처럼 화색이 된 예니카의 얼굴.
그러나 첫 문장을 듣자마자 곧바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여주던 인간이라,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을거라고 생각해본 적 조차 없다.
허나, 에드는 과거사를 생각해보면 언제든지 삶을 비관해도 이상하지 않은 배경을 타고난 인간인 것이다.
“저, 전혀 몰랐어…”
“지금은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좋은 일입니다. 단지… 다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서 꺼낸 말일 뿐입니다.”
“그렇구나아… 그럼 벨의 과거란 건 뭔데?”
벨은 어디까지 이야기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후련한 얼굴을 내비쳤다.
“사실, 에드 도련님에게 모든 걸 다 말씀 드린 건 아닙니다.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쏙 빼놓긴 했지요.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부여되니까요.”
“…그래?”
“…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수도녀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중앙 회랑 쪽으로 나아가는 목제 관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화관이 잔뜩 쌓여있다. 향년 109세. 앞으로 최소 100년은 더 살겠다고 말도 안되는 허풍을 내뱉던 노인은, 그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텔로스 교단에만 80년을 귀의했던 큰 어르신의 죽음. 심지어 클레드릭 수도원을 담당하는 수도원장의 사망이었다.
제 아무리 클레드릭 수도원의 기도회가 귀빈들이 모여든 중요 연례 행사라 할지라도, 오스틴 수도원장의 죽음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교인의 존경을 두루 받으며 언제나 숭고하게 신앙을 지켜온 자다.
성인의 반열에 올라 성황도에서 떵떵거리며 고위 성직자 노릇을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수도원의 최전선에서 각자 사정을 품은 수도녀들을 제 딸처럼 키워냈다.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린 고위 수도복을 입은 적도 없다. 현장에서 일하다보면 금세 더러워지기 때문에 고급 의류를 걸치는 법이 없었다.
옷 소매는 언제나 걷어붙인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쭈글쭈글 해져있었다. 방에는 가구라고는 책상, 의자, 침대, 책장, 옷장 뿐이고 전부 허름해져 있었다.
사유 재산이라고 해봐야 여벌용 수도복 몇 개, 성서, 기도용 황동 그릇 정도 밖에 없었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았던 인간 치고는 지나치게 검소했다.
그렇게, 성인(聖人)의 유해를 담은 관이 천천히 회랑 밖으로 나갔다.
관을 끌고 있는 수도녀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도녀들도 모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
“타살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보좌주교 멜리니르의 보고였다.
단정하고 점잖은 머리칼을 한, 실무담당 수도녀 멜리니르는 그렇게 연단 위에서 짧고 굵게 말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성녀 클라리스는 귀빈들과 고위 수도녀들, 그리고 외부 방문자들을 모두 수도원 중심부의 예배당으로 소집시켰다.
으리으리한 규모의 예배당에 들어서자, 귀빈들의 기도회를 위해 온갖 탁자와 성유물, 기도용품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성대한 기도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모든 일정은 취소된 상태였다.
“이건… 수도녀들 사이에 절대로 퍼져나가선 안되는 일급 비밀입니다.”
예배당의 연단. 원래라면 고위 성직인들이 기도회를 주재하기 위해 자리해야 하는 곳에는 외부인들이 와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수도원장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퍼져나갔지만, 정확한 사인이나 정황은 공표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주도해서 조사하고, 발표해야할 의무는 이 수도원을 포함한 해안지역을 관리하는 교구장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 수도원 특수지구에 대한 교구장 또한 오스틴 수도원장이 담당하고 있었다. 당사자의 죽음에 대해서 당사자가 직접 브리핑 할 수는 없으니… 이 수도원의 관리 체계에도 다소 간의 혼선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수습하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력을 가진 자는 딱 정해져 있었다.
연단 위에는 대표격인 세 사람이 올라와 앉아 있었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밑에서 수도녀들을 관리하던 보좌주교이자 수도원의 실무자 멜리니르.
황실의 공권력을 이양받아 직접적으로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제 2황녀 페르시카.
그리고, 텔로스 교단의 모든 일에 대해 최종 결재권에 준하는 권한을 지닌 성녀 클라리스.
이미 자훌 변경백 쪽에 수도원 내부의 사망 사건에 대한 보고가 들어갔다.
곧 있으면 황실에서도 추가적인 조사 인력을 파견할 것이다. 그 전까지 이 수도원 내부의 상황에 대한 통제권은… 저 세 사람이 나눠서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내부자들이 당황하지 않게 잘 진정시키고 있다가, 황실의 조사 인력이 오면 그들에게 권한을 넘겨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성녀 클라리스는 굳이 외부인들만 딱 찝어서 예배당으로 집합시켰다. 멜리니르의 보고를 듣고 그래야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스틴 수도원장님의 유해에 남은 상흔을 체크해 보았습니다. 단검에 찔린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사인도 과다 출혈이고, 현장에 고통에 몸부림 치던 흔적도 남아 있던 걸 보면… 도저히 자연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109세의 나이다. 방 안에서 숨졌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은 자연사였다.
그러나 보좌주교 멜리니르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수도원장님은 언제나 완벽하게 자기 관리를 하시고, 건강을 챙기시던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며, 매일 같이 몸상태를 체크 하던 제 입장에서도 이렇다 할 이상을 못 느꼈습니다.”
보좌주교 멜리니르는 이 다음 나올 말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알고 있음에도, 이를 꽉 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수도원에 거주하고 있는 수도녀들은 모두 오스틴 수도원장님에게 신세를 진 어린양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수도원장님께 해를 가할 이유도 동기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잠시 숨을 머금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쭉 나열해나간다.
“심지어 운명하신 시점도 외부인들이 잔뜩 드나드는 기도회 기간입니다. 몇 년간 수도녀들과 부대껴 왔을 때에는 정정하시던 분이, 외부인들이 방문하는 기간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정황상 너무 절묘합니다…”
그 뒤, 멜리니르는 신중히 단어를 선택하려고 잠시 말문을 흐렸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미 충분하리만치 잘 전달되었다.
예배당의 기도석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귀빈과 영애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백작가, 자작가 영애들은 기본이요, 톨레스 상회의 후계자, 황실 재상의 외동딸, 이름난 마도구 장인의 제자들까지.
텔로스 교단에 귀의해, 그 신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먼 길을 직접 행차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멜리니르는 말한다.
“아마, 여러 분들이… 정황상의 용의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필요한 의심입니다.”
– 쾅!
그 말에 로케스트 자작가 영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덩달아 다른 귀족가 영애가 하나도 벌떡 일어섰다.
“지금 뭐라고?! 텔로스 교단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는데, 살인 용의자 대우를 받으라는 거야 지금?!”
“지금 장난하고 있는게냐?! 수도원 내부인이라 할지라도, 수도원장에게 앙심을 품지 않을거란 보장이 대체 어디에 있지?!”
“본가에 서신을 넣을 것이다! 이런 곳까지 와서 살인범 취급을 받을 순 없지!”
“진정하십시오. 성녀님과 황녀님의 면전입니다.”
그 말에 귀족 영애들은 모두 숨을 집어삼켰다. 나이도 어리고 판단이 미숙하여 잠시 잊고 말았다.
멜리니르 뒤 쪽, 양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두 소녀. 2황녀 페르시카와 성녀 클라리스.
두 사람의 권위를 합치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가 영애의 권위를 다 합치더라도 비벼볼 수 조차 없다.
그렇기에 영애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정적이 감돌고, 이윽고 클라리스 성녀가 연단 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단순히 동기만을 가지고 용의자를 특정하기는 힘들어요. 왜냐하면, 오스틴 수도원장님은 만인에게 베풀고, 만인에게 자비로운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수도원 내에서 조용히 기도만 올리며 사시던 분이셨죠.”
클라리스의 이야기는 맹점을 찌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분한테 앙심을 품을 수 있죠? 적어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 원한은 없을 거에요. 그런 분이니 만큼 살해 동기 같은 걸 찾기는… 힘들 거고요…”
감정에 의한 충동 살인의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없다. 그렇다면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이유인가.
이 자리에서 오스틴 수도원장의 죽음으로 득을 볼 자는 단 한명 밖에 없다.
페니아 황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수도원장. 그런 자가 세상에서 사라져 준다면, 그녀의 경쟁자인 페르시카 황녀는 황권 경쟁에서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몇몇 귀족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마른 침을 삼키며 연단 위 페르시카 황녀를 보았다.
고고한 자태로 앉아있던 페르시카 황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불손한 생각을 하고 날 바라보는 영애들이 있구나. 로케스트 자작가, 플로신 백작가, 켈커스 남작가의 영애인가. 내 기억하고 있으마.”
눈빛만으로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렇게 으름장을 놓는 페르시카 황녀.
그 말만으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귀족가 영애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페르시카 황녀는 됐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중을 장악하는 법을 아는 소녀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높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나간다.
“내가 황권을 위해 부던히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오스틴 수도원장을 살해한다는… 그런 멍청한 수를 둘 사람으로 보이더냐?”
좌중엔 정적이 감돌았다.
“내 동생 페니아를 지지하는 유력자 하나를 줄이겠다고, 텔로스 교단의 큰 어르신의 목숨에 손을 대다니. 그 정도 손익 판단도 못할 정도로 우둔해 보였다면, 어찌보면 내 잘못이구나. 그렇게 얕은 군주로 보였다고 하니.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군!”
황권에 눈이 멀어 오스틴 수도원장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냥 텔로스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적어도 그런 짓을 하려거든, 이렇게 대놓고 용의선상에 들 수밖에 없는 시기를 노리진 않았을 터.
“애초에 사람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가면서까지 얻은 권력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도의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이란다. 나를 모욕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그 와중에 도덕적 정당성을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페르시카 황녀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황권 경쟁 구도에 있어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나 뿐만이 아닐 거다. 여기 모여든 귀빈들은… 말은 안하지만 모두 마음 속에 품어둔 황권 주자들이 하나씩은 있겠지? 누가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르냐에 따라 가문의 흥망성쇠와 정쟁 구도가 엮여 있는 자들도 많을테고 말이다. 오직 나만이 황권 구도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구나.”
그렇게 이야기하며, 페르시카는 천천히 다음 이야기로 나아갔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동향에 대한 보고는 이미 다 받았다. 어젯밤 간조 때에 백작가 영애들을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와서, 기본 절차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는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
그 뒤로 페르시카는 자기가 보고 받은 사항들을 정리해서 확실하게 공표했다.
마지막 목격 증언은 어제 늦은 밤 화장실을 향하던 수도녀에게서 나왔다. ‘유령을 잡으러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수도원 회랑을 걸어 나가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이었다.
즉, 어제 늦은 밤까지만 해도 오스틴 수도원장은 살아있었다.
“유령을 잡으러 간다고요?”
클라리스의 질문에, 페르시카 황녀가 대답했다.
“수도녀들 사이에서 최근 회랑 근처에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더군. 뭐, 단순히 야생 동물이 소리를 낸 것일 수도 있고, 어리숙한 수도녀의 밤 산책 같은 일탈일지도 모를 일이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쨌든 이런 외부인이 많은 시기에 그런 뒤숭숭한 일이 있어선 안되니, 수도원장은 유령의 정체를 확인하러 간 것이겠지.”
그 다음 방에서 변사체로 발견.
나는 이 시점에서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다.
‘유령’이 화두에 올랐다면, 여기서 언급되지 않을 수가 없는 인물이 있다.
“나도 입장상 이런 의심을 받을까봐 미리 호위기사를 통해 정황을 조사해보았지. 그러나 왠 걸, 수도원에 방문한 외부인들은 모두 호위 인력을 대동하고 있거나, 개인실의 위치가 명확해서 동선을 파악하기 쉬웠지만… 이 수도원에 섞여든 ‘불청객’은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더구나.”
“…불청객?”
웅성대는 소리가 좌중 사이로 퍼져나갔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 당시, 정확한 동선도 파악이 안되고, 심지어 이 수도원에 들어와 있는지조차 미처 알 수 없었던,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페르시카는 뜸들이는 일도 없이, 곧바로 그 이름을 불렀다.
“루시 메이릴.”
그 이름을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 마법부 전체 수석이자, 희대의 천재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고… 최근에는 악신 메뷸러를 패퇴시키면서 제국 중앙부까지도 그 이름이 퍼져나간 대마법사였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정황 조사에서 그녀의 존재가 확인되었지. 듣자하니, 멋대로 마차에 섞여들어와 수도원을 거닐고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 이 자리에 있나?”
웅성거리던 인파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희대의 천재 마법사 루시 메이릴이 이 수도원에 와있다는 이야기가 믿기질 않아하는 눈치다.
설마 이 인파에 섞여 있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 휘이익.
자그마한 체구와 졸린듯한 눈. 커다란 마녀모자와 더불어 사이즈에 맞지도 않는 아카데미 교복.
이제는 익숙한 그 모습의 소녀가, 구석진 기도석에서 몸을 일으킨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뛰듯이 기도석에서 내려와 똑바로 섰다.
좌중의 모든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루시는 천천히 걸어나온다. 기도석 정 중앙, 연단 위로 뻗어있는 붉은 카펫을 밟은 채… 페르시카를 무심한 눈으로 올려다 본다.
“현실적으로, 외부인 중에 가장 오스틴 수도원장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완벽하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던 사람은 그대 밖에 없구나.”
페르시카 황녀의 목소리가 조용한 예배당에 퍼져나갔다.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는 루시 메이릴은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다.
살해 용의자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뭐 어떻냐는 듯 무심한 태도에… 좌중은 위화감마저 느낀다.
그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 클라리스 성녀였다. 페르시카 황녀에게 권위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잠시만요! 루시 메이릴은 오스틴 수도원장에게 해를 가할 이유가 없어요!”
“동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까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까. 성녀님. 애시당초 오스틴 수도원장에게 해를 가할만한 동기를 가진 인물을 찾아내기가 더 힘들지요. 이럴 때에는, 일단 소거법으로 줄여가면서 남은 용의자 중에 가장 유력한 자를 특정해내야 합니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루시 메이릴이 오스틴 수도원장에게 해를 가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는 백번 동감한다.
그러나, 혹시나 백 보 양보해서 루시가 오스틴 수도원장을 공격했다고 한들…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는 또 뭔가?
가만히 있으면 범인으로 몰릴 것이 뻔한데, 굳이 왜 이 수도원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냐는 것이다.
“적어도 그대는 조사에 협조해주어야겠구나.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수도원을 탈출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행위는 오히려 그대의 범행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겠지.”
연단 위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대 따위야, 루시가 팔 한 번 휘적이면 모두 나가 떨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루시는 저항하지 않는다. 조용히 양팔을 얹어서, 구속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를 변호해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말했듯, 루시 메이릴은 마음만 먹으면 수도원장을 살해하고 그대로 도주해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카데미에서 함께 부대낀 나와 클라리스는 알 수 있다.
강하다 강하다 소문이 자자하지만, 루시 메이릴의 강대한 힘은 아예 상상의 영역을 넘어선 수준이다.
솔직히 수도원과 해안선 사이의 긴 바닷길조차도, 고위 공간계 마법으로 대번에 건너 뛰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작은 소음이나 빛 하나 내지 않고서 말이다.
천문학적인 양의 마력이 필요한 수단이기에, 일반적인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방법이겠지만.
간조 때에만 들어올 수 있는 폐쇄된 수도원. 잔뜩 쌓인 목격 증언과 동선을 전부 체크 당한 귀빈들. 공동 생활이 전제된 곳인 만큼 함부로 살해 계획을 수립하기는 힘든 환경.
이 모든 배경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무대 뒤의 기계 장치 위를 노니는 예외적 존재.
그런 자가 굳이 이 자리에 남아 용의자로 몰린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면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력한 용의자라는 허물을 벗을 순 없지만, 적어도 죄인 취급을 당하며 구속받진 않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클라리스 또한 그 사실이 의아했는지, 연단 위에서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그 가능성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잔잔한 호수의 물처럼 평온한 루시의 표정에서… 뭔가 의도가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내게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으로 구속구를 받아들이더니, 루시는 그대로 병사의 손에 이끌려 연단 너머로 걸어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영애들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놀라운 시선이 감돌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희대의 그 천재 마법사가 유력한 살해 용의자란 사실이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본인은 자신을 변호하는 말조차도 내뱉지 않는다. 심드렁한 표정만 유지하고 있을 뿐.
나는 귀빈석 사이에 섞여 앉아서, 연단을 올려다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실베니아를 대표하던 희대의 천재 마법사는, 허락조차 받지 않고 수도원에 숨어들어 오스틴 수도원장을 살해한 혐의를 가진채 황실 호위대에 구속되었다.
다음 날이 되면 황실에서 파견한 조사대 쪽으로 신병이 넘어갈 것이다.
애초에 구속한다고 해서 제어할 수도 없는 소녀지만, 죄인된 신분이 된 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 똑, 똑.
예배당 회의가 해산된 후에 귀빈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있을 것을 성녀 클라리스에게 명 받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동선 체크를 확실히 하고, 조사단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각자의 안전에 유의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각 가문을 대표해서 올 정도의 귀빈 쯤 되면 호위인력 한 둘은 붙어있었다.
나 또한 허름한 개인실에 가만히 앉아,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밤 늦은 시간이 되었을 때 쯤… 누군가가 방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시점에서 외부인에게 찾아들 수도녀도 없을텐데… 의아해 하며 문을 열어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에드 로스테일러 공자님.”
어둑어둑한 복도에 서있는 자는, 방금 낮에 연단 위에서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 정황에 대해 보고하던 성직자였다.
보좌주교 멜리니르. 생전 오스틴 수도원장의 최측근이자, 사실상 수도원의 실무를 도맡아 관리하던 자.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사리 내 방문을 두들긴 듯 긴장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꼭, 에드 공자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밤 늦은 시간에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다.
그 사실을 멜리니르가 모를 리가 없건만, 꼭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찾아오고 싶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스틴 수도원장님을 죽인 범인이… 루시 메이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
내가 가만히 멜리니르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진범이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분명… 내부에 있는 자들 중 하나입니다… 다만… 다만…. 이걸 공론화해도 될지… 텔로스 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판단이 잘 서질 않습니다…”
문득 멜리니르의 팔뚝을 보니 미세하게 떨림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침착하게 이야기 하십시오. 천천히 호흡하셔도 됩니다.”
“….오스틴 수도원장님께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비밀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클레드릭 수도원의 존폐와도 관련될 정도로 큰 비밀이지요… 이제 수도녀 중에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저 밖에 없습니다..”
멜리니르의 떨림은 팔뚝을 넘어서 목소리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부디… 제가 어떻게 되기 전에… 성녀님께 제 이야기를 보고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이어지는 멜리니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