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4)
의미 부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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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플란첼 남작가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캠프파이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예니카 페일로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울상이 된 모습으로 벨의 얼굴을 마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벨은 역시 괜히 이야기 했나 싶은 마음이 들고 말았다.
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누가 봐도 벨의 개인사는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마음이 강인한 벨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건이다.
사생아이긴 하나, 그래도 제 핏줄을 타고 태어난 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플란첼 남작.
결국 자기 딸을 탐욕스런 귀족의 손아귀에 넘기지 않을 수 있었으나… 본인은 그 대가로 목숨을 버려야만 했다.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이야기인지라, 예니카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벨. 그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들려달라고 보채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상대입장에선 이런 이야기 들어도 난처하기만 하기 때문에, 보통은 잘 안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딱히 상처로 남은 일도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벨 입장이었으면 큰 상처였을 것 같은데…”
“뭐, 당시에는 크게 충격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듯이 이 이야기는 에드 도련님께는 해드리지 않은 부분이 좀 남아있습니다. 일부러 누락시킨 부분이지요.”
벨은 캠프파이어에 장작을 몇 개 더 밀어넣고선, 마력을 발해서 불을 더 강하게 일으켰다. 아직은 밤이 한창이라 불씨가 더 오래 가도록 유지해야만 했다.
“일부러 누락시켰다고…? 왜 굳이? 에드한테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섞여있었어?”
“이야기의 메시지가 바뀌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예니카에게, 벨은 굳이 보충 설명을 덧붙여주진 않았다.
벨이 굳이 에드에게 과거사를 털어 놓은 이유는, 혹시라도 두 번 다시는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일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빛 볼 날이 온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지긋지긋한 세상에 낙은 없고, 눈앞에 득시글 거리는 시련만이 가득해보일지라도.
두 다리 붙들고, 이를 바득바득 악물고, 어떻게든 굳건히 서서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삶을 쭉 이어간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요. 다만, 세상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별로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플란첼 남작은 이미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굳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어도, 얼마 가지 않아서 별세하셨겠지요.”
그 말에 예니카는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그게 바로 벨이 에드에게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플란첼 남작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사람이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회고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음을 목전에 두면, 누가 되었든 자기가 걸어온 삶을 반추하게 됩니다.”
“벨…”
“플란첼 남작은 아마도, 자기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플란첼 남작의 수명에 대한 전제가 바뀌는 것만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주는 인상도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예니카는 왜 벨이 에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벨이 왜 슬퍼하지 않고, 멀쩡한 상태로 이런 비극을 이야기 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가 갔다.
벨에게 있어서 플란첼 남작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비극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묫자리를 직접 정해서, 제 의지를 관철하고 떠난 숭고한 자의 영웅담이었던 것이다.
벨 마이아의 방에는 아직도 살쾡이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장식되어있다.
아버지 발미드 플란첼이 떠나려 한 날, 인자하게 웃으며 벨의 손에 유품삼아 쥐어준 플란첼 가문의 단검이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소금 같은 별들이 가득 박혀있었다.
*
“오스틴 수도원장이… 자살이라고…?”
듣는 귀는 없다.
그래도 누가 우연히라도 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위험하다.
페르시카의 마음에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허나 정작 에드 로스테일러는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스틴 수도원장이 아인족의 아이를 숨기고 있단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도를 하던 에드 로스테일러는, 곧바로 직구를 꽂아넣었다. 페르시카 황녀와 튜네는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그러나 대처는 매끄럽다. 말을 더듬지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절단자 젤란과 어떤 식으로든 접점이 있으십니까? 그가 아닌 이상 클레드릭 수도원이 감춘 비밀은 아무도 모를텐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솔직히 다 터놓고 이야기 하셔도 됩니다. 예배당 안에 아무도 없는 걸 이미 확인하고 왔습니다.”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소문은 잔뜩 들었다.
어쨌든 신비롭고, 기묘할 정도로 예리한 인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첫대면에서부터 폐부를 찌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페르시카 황녀는 숨을 한껏 집어삼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함정에 빠져계시는 군요. 페르시카 황녀님.”
“…”
“오스틴 수도원장이 만들어둔 함정에 빠져서,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힘을 쓰고 계십니까?”
루시 메이릴이 당장 살인범으로 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페르시카는 이미 궁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든 생각이 정리된 시점에서는 완전히 명확해져 있었다.
“애초에 이 기도회에 참석한 이유도, 아인족을 숨긴 것을 명분 삼아서 오스틴 수도원장을 회유하기 위함 아닙니까? 곧 예정된 황실 회동에서, 정식으로 자신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요.”
오스틴 수도원장에게 있어서 클레드릭 수도원의 수도녀들은 모두 제 딸 같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아인족의 아이일지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비밀로 부치고, 황권을 잡은 뒤로도 눈 감아 줄테니 정식으로 자신을 지지하라고 설득하면… 제 아무리 페니아 황녀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오스틴 수도원장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페르시카 황녀는 여유롭게 대처했으나, 속으로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시점에서 이런 것들을 유추해낼 수 있을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가.
적어도 이 수도원 안에서 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튜네 뿐이었다. 허나, 튜네가 배반 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배반으로 인한 이점이 전혀 없고, 무엇보다 항상 페르시카의 옆에서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먼 길을 달려올만한 이유입니다. 그 오스틴 수도원장을 제 편에 들일 수 있다면, 텔로스 교단 내에서도 페르시카 황녀님을 지지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제법 커지겠지요.”
그러나, 상황은 페르시카 황녀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회유의 대상인 오스틴 수도원장이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페르시카 황녀가 클레드릭 수도원에 방문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회유 계획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 날 모독하고 능멸하려 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여기가 비록 황궁은 아니나… 내 권위가 로스테일러 공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터.”
“권위를 능멸하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기도하던 에드 로스테일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듯한 모습도, 여유로운 모습도, 그렇다고 조롱하는 것 같은 기색도 없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이야기 할 뿐이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자의 실체는… 페르시카 황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절대로 당황하는 법이 없다. 세속적인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페르시카 황녀의 면전에서조차.
“이 모든 상황을 늘어놓고 보면, 오스틴 수도원장은 페르시카 황녀님의 협박에 대한 대답으로서 자살을 했구나, 라는 정황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비약된 논리다.”
“글쎄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스틴 수도원장은 페르시카 황녀님이 황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해서 황실에 휘둘려야만 할겁니다.”
황제를 시해하기 직전까지 갔던 아인족의 반란은 아직도 제국민의 가슴에 상처로 남아있다.
이제는 제국의 적이 되어버린 아인족을 지키고 있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 클레드릭 수도원은 페르시카 황녀가 죽는 그 날까지 그녀의 말에 휘둘려야만 한다.
젤란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 오로지 그 수도원장 개인의 일탈만으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오스틴 수도원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택했다.
“페르시카 황녀님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닐겁니다.”
“튜네!”
– 사악!
튜네가 칼을 뽑아들어서 에드 로스테일러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 댔다.
서슬퍼런 그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운 분위기가 예배당에 감돌았다. 튜네의 칼날은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이 에드 로스테일러의 목을 향하고 있건만, 에드는 여전히 미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페르시카 황녀님. 무력 다툼으로 상황이 넘어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언제나,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 할 뿐이다.
“제가 당신의 그 호위기사 보다, 몇 배는 더 강합니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정중한 자세로 연단의 성상을 올려다보며, 에드 로스테일러는 담담히 이야기했다.
튜네는 황실 기사단에서도 이름난 실력자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의 길을 걸어온 검술의 귀재다.
그러나, 넌지시 이르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있다. 자신감의 표현이나 자만심의 발로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읊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루시 메이릴을 체포하는데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페르시카 황녀의 눈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른 수도녀들은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장미궁에서 루시의 모습을 보셨을 페르시카 황녀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루시 메이릴은 그런 식으로 체포 당할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손짓 한 번이면 이 수도원을 통째로 박살 낼 수도 있는 마법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카 황녀는 당당히 루시 메이릴을 체포할 것을 명했다.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지시인지 알면서도.
“루시 메이릴이 저항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기묘할정도로 자기 변호를 하지 않는 루시의 모습.
페르시카의 입장에서도 루시의 그런 대처를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녀의 행동엔 일말의 망설임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가 결백을 호소하며 진실을 드러내버리면, 수도원장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니까.”
수도원장의 계획은 간단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인족의 아이들을 담보잡아 수도원을 휘두르려 드는 페르시카의 계획을 저지한다.
자기가 사라져버리면, 페르시카의 목적도 사라져버리고 마니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텔로스 교단의 성인, 오스틴이 페르시카 황녀의 정치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은, 페르시카에게 말도 안될 정도로 큰 정치적 압박으로 다가온다.
모두의 존경을 두루 받는 그 어르신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자가 페르시카라는 것이 표면에 드러난다면… 그로 인해 돌아올 정치적 여파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일단, 텔로스 교단은 반드시 적이 된다. 황실 내 텔로스 교도들도 모두 돌아선다. 귀족 가문 중에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은 가문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한낱 수도녀에 불과한 오스틴일지라도 함부로 건들일 순 없다. 페르시카 황녀 본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한 말이다.
그 말이 주박처럼 본인의 몸을 감는다.
이미 오스틴 수도원장은 죽고 없다. 그 늙은이는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쭈글쭈글하고 힘도 없는 그 늙은이의 손이 페르시카 황녀의 어깨를 휘감는다.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안는 감각. 소름이 돋아 올라 돌아보면, 수도복을 입은 해골이 그녀의 등을 짓누르고 있다.
“오스틴 수도원장은 이 모든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겠지요. 모든 진실이 드러나면, 필시 수도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인족에 대한 진실도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루시가 생전 오스틴 수도원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허나, 루시는 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입을 다문 것이다.
오스틴 수도원장이 원했던 것은 결국 하나 뿐이다.
“현상 유지.”
아인족의 아이들이 지금까지처럼 수도원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페르시카를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어놓는 것.
판돈은 자기 목숨이다. 그리고, 확실하고 깔끔하게 유효타로 들어갔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세상에 절대 드러나서는 안된다.
그것이 페르시카에게도, 죽은 오스틴 수도원장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페르시카는 원치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도 오스틴과 한 배에 올라타서, 꽁꽁 묶여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망자가 퍼뜨려놓은 늪에 빠지고 말았다는 걸 눈치 챘을 때엔, 이미 허리춤까지 몸이 빨려들어가고 난 다음이다.
그저 페르시카 황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 뿐이다.
페르시카 황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저 또한 모른 체 하겠습니다. 오로지 이 기도를 들으신 신만이 아시겠지요. 신이 있다면 말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말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협상을 위해서라고.
“황실 기사단을 장악하고 계시지요. 혹시라도 제가 요구 한다면, 일정 수 이상의 황실 기사단을 아켄섬으로 파견해주십시오. 딱 한 번이면 됩니다. 이게 제 요구조건입니다.”
황실 기사단장은 페르시카에게 붙어있다.
그렇기에, 기사단의 운용 권한은 페르시카가 간접적으로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성창룡 벨브로크가 강림하는 날, 어쨌든 기사단이 아켄섬에 주둔해있으면 되는 일이다.
“또,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루시 메이릴의 무죄 입증을 보장해주십시오. 저는 그 두 개면 됩니다. 그 두 개만 보장되면, 오늘 제가 떠올린 모든 가능성들은 저 성상만이 알고 있겠지요. …성상에 귀가 달려있다면 말입니다.”
힘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는 상대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고위 정령을 다루고, 조건부로 최고위 정령의 힘까지 불러낼 수 있는 사내다.
지금 이 폐쇄된 클레드릭 수도원에서는,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힘만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힘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신분의 차이가 막대함에도 페르시카에게 대등하게 협상을 걸어 올 수 있는 것도, 결국 무력의 균형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협상 테이블이란 결국 힘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처세하는 자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 사내는 필요 이상의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기도석에 앉아 연단 위 스테인드 글래스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감정의 미동조차도 없는 그 사내의 내면은 심해처럼 깊고도 어둡다.
페르시카 황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천천히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부득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덩달아 들려왔다.
“그래… 이번엔 그대가 이겼다.”
페르시카 황녀는 이 시점에서 직감했다.
앞으로 치러질 황권 쟁탈전에 있어서, 이 사내야말로 특히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해안가에 조사대가 와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예정보다도 더 늦어져 완전히 해가 진 시간이었다.
간조 시간도 예상보다 더 늦춰져서, 벌써 달이 중천에 떠있건만 아직 바닷물은 높다. 아무래도 조사대가 진입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 하다. 루시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이다.
어차피 페르시카 황녀가 직접 루시 메이릴의 무죄를 보장한 이상, 좀 조사 받다가 풀려날 것이다. 황실 조사대라면 페르시카 황녀의 목소리가 깊이 닿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해지다가, 이윽고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는 것이 베스트다.
나는 하늘 높게 뻗은 수도원의 첨탑을 오르고 또 올랐다. 성녀 클라리스의 방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계단의 폭은 갈수록 좁아지더니, 이내 끄트머리 다락방에 가까워지자 나 하나만 지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나무문을 열고서 먼지가 가득한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
루시 메이릴은 그 자리에 없었다. 벽에 마법으로 낸 듯한 구멍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 휘이잉
외풍이 들어오는 소리만 허무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천천히 구멍 쪽을 바라보니, 수도원 지붕 쪽으로 바로 이어져 있다. 이쪽을 이용해 탈출한 것이다.
사실 진심으로 탈출할 마음은 없을테니, 그냥 산책을 나간 것에 가깝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나는 지붕을 벗어나서, 수도원의 비틀어진 지붕을 요령좋게 타고 내려갔다. 옷이 먼지에 더러워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미끄러져서 지붕 외곽을 밟으니, 과연 아찔한 풍경이다. 해안선을 넘어서 자훌 변경백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까지 보일 정도다.
반대편을 보면 쭉쭉 뻗어있는 밤바다가 보인다. 대부분은 어둠 밖에 없어서 으스스할 뿐이지만, 해안선은 조사단이 주둔해 있느라 여기저기 캠프파이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썰물이 되면 저 조사단들이 슬슬 수도원 안으로 들어오겠지.
“…”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래쪽으로 확장된 지붕으로 몸을 던졌다.
– 타악!
그리고, 착지 후 뒤를 돌아보자… 예상 외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당황하는 기색을 비치진 않았지만, 곧바로 말문이 트이진 않았다.
“…왔네.”
넉살 좋게 바닷 바람을 맞으며, 자기 무릎을 안고 별을 보고 있는 루시 메이릴.
그녀의 뒤편으로 처마처럼 뻗어나온 첨탑의 윗지붕 아래에, 빛으로 된 검자루 몇 개가 창살처럼 박혀 있었다.
고위 빛 마법, 휘광의 검자루. 특정 공간을 봉인하거나, 접근을 차단하기 하는데 사용하는 마법이다.
그리고 확장된 지붕 아래 공간에서 빛의 검에 막혀서 갇힌 채… 자기 무릎을 안은 채 울고 있는 소녀가 하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수도복에,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예리한 손톱은 만월이 되는 날에 솟아오르는 아인족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옆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짐승의 귀. 상심한 듯 울고 있는 모습.
─멜리니르 보좌주교가 이야기 했던, 탈출한 아인족 소녀 에일렌이었다. 이불솜처럼 풍성한 금발 머리칼과 새하얗고 가는 손목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네가 보호하고 있었구나.”
“아무 말도 안 해. 상처 받았나봐. 그리고 이따금씩 야수처럼 변해서 덤벼들려고 해서 가둬놔야 했어.”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과 더불어서, 손에 가득한 핏자국.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았다.
검자루 안쪽 공간을 보면 음식 따위가 늘어져있다. 루시가 직접 본관 1층 식당에서 훔쳐다가 에일렌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아마 밤 늦은 시간에 이동했겠지. 이로써 유령에 대한 소문의 정체도 명확해졌다.
수도원 본관을 도는 유령에 대한 소문은… 반은 에일렌이고, 반은 루시였던 셈이다.
중간부터 에일렌을 포획해서 보호하고 있던 루시. 그녀는 애초부터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잠시간 올려다보고, 그대로 루시의 옆에 가서 앉았다.
조사대가 주둔해있는 해안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과 더불어서, 캠프파이어의 불빛 또한 둥둥 떠있는 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한테는 전말을 좀 이야기해주지 그랬어.”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어. 나도 생각을 많이 정리했었어야 했거든.”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냥.. 그 할멈은… 글록트 할아범이랑 아는 사이였었어… 그래서 생각이 많이 복잡해져 있었어.”
대마법사 글록트의 옛 지인.
그렇기에 루시는 그젯밤 오스틴 수도원장과 마주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사망에 대한 진실은 페르시카 황녀에게 이야기한 것과는 묘하게 달랐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 원인은 타살이다.
페르시카 황녀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은, 그녀의 오해를 부추겨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전부 벨브로크 토벌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는 설명해줄 수 있겠냐?”
묘하게 우울하고 기운빠진 모습으로 자기 무릎을 안고 있는 루시.
실의에 빠진 소녀를 등진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밤 바다, 그리고 별 바다다.
달빛을 머금어 선선해진 바닷바람이 날아와 예쁘게 정돈된 루시의 머리칼을 휘날린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캠프파이어 불빛의 행렬. 그 평화로운 광경에 묘하게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그제야 루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께 여기서, 그 할멈을 만났어.”
*루시 메이릴이 수도원 지붕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는 오스틴 수도원장을 발견한 것도, 지금처럼 별이 가득한 밤이었다.
“호오… 이 시간에 불청객이라니… 거기다가 재미있는 손님이구나.”
밤의 도시를 거니는 길고양이처럼, 수도원의 지붕을 가볍게 휙휙 쏘다니던 루시는 흠칫 몸을 떨었다.
외벽과 지붕 사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는 수도원장 주변에는 이미 핏자국이 가득한 상태였다.
노인이 버텨낼 수 있는 출혈의 양이 아니다. 이제와서 뒤늦게라도 지혈을 해보려 마력을 모아보았지만, 오히려 오스틴 수도원장이 루시의 치료 행위를 저지했다.
“이미 치료 시기는 지난 것 같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몸이니까 잘 알지. 크큭…”
“…”
“100살 넘게 한 몸뚱아리로 살다보면, 슬슬 내가 헤까닥 하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 때가 있는 법이거든.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아무리 본인이 그리 말해도, 루시 입장에서는 또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루시는 모자를 꽉 움켜쥔 채로 도약해서 쓰러져 있는 오스틴 수도원장 앞에 착지했다.
그대로 상처를 확인하자마자, 루시는 잠시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복부 쪽, 짐승의 손톱 같은 것에 작게 꿰뚫린 자리. 생각보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꽤 깊었다.
건장한 남성이었다면 치명상까지 가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으나, 100살 넘은 노파의 몸에는 이 정도 상처와 출혈량은 곧바로 목숨의 위협으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다가 이 상태로 지붕 위에 한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면, 더더욱 위험하다.
제 아무리 마법의 귀재라 할지라도 이미 다 흘린 피를 다시 몸 속으로 집어 넣을 순 없다.
창백해져 가는 오스틴 수도원장의 표정은, 루시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제일 당혹스러운 것은 그 다음 이어지는 오스틴의 말이었다.
“글록트 영감탱이가 제자를 들였다고 했을 땐 못 믿었는데, 과연… 척봐도 그 영감탱이 못지 않은 괴짜구나.”
오스틴은 루시를 알아본 것이다.
제 아무리 살아있는 역사책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 눈에 루시 메이릴이라는 소녀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터.
최근들어 제국 중앙부에도 이름을 날리고, 또 실베니아 수석으로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루시를 알아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마법사 글록트 엘더베인의 지인.
그것만으로도 루시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 영감탱이는… 마법을 가르치는 재주는 없었을텐데 말이다… 아이야, 너도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그것도 꽤나 막역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루시는 어떻게든 오스틴을 살려보겠답시고 마력을 끌어모아서 상처를 동여매 보았지만, 109살 노인의 몸엔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치명타가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도 그 영감탱이의 제자가 내 삶의 끝자락에 이렇게 나타나주니, 주신 텔로스님께서도 내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야.”
“…너무 말 많이 하지 마. 피가… 계속 나오려고 해…”
“아이야. 혹시 글록트 영감탱이와 나의 옛정을 봐서라도,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을 딱 두가지만 들어줄 수 있겠니…?”
이미 살아남을 것이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차분하고 자애로운 어조가 이어진다. 과연, 연륜이라는 것이다.
“내게 이 상처를 입힌 아이가 아직 수도원 지붕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단다. ‘유령’이라는 소문으로 어떻게든 얼버무려지고 있지만… 오래 가진 못하겠지. 그 전에 네가 잡아서, 그 아이를 수습해줄 수 있겠니?”
언제나 멍한 얼굴을 하던 루시가 불안한 듯 미간을 좁혔다. 무뚝뚝한 루시가 그런 감정을 내비치는 건 1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그건 쉬워.”
“그래, 고맙구나.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내 방 의자에 편히 앉아서 눈을 감고 싶구나. 날 좀 방으로 옮겨줄 수 있겠니…?”
“방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해.”
“부탁이란다. 지금부터 방에서 꼭 해야할 일이 있어서 그렇단다.”
“말해주면 내가 대신 해줄게.”
“슬프지만, 이 늙은이가 직접 가야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
그렇게 실랑이를 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오스틴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발현해서, 공간계 마력을 발현해 오스틴 수도원장의 몸을 방으로 옮겨다 주었다.
허름하고 검소한 방. 달빛이 아름답게 들어오는 것 말고는 이렇다할 자랑거리가 없는 그 쪽방에, 오스틴 수도원장의 몸이 자리했다.
기도를 할 때 자주 앉아있던 목재 의자에 몸을 뉘인채로, 그와 중에도 컬컬대며 호탕하게 웃으려했다.
“크큭, 크카칵.”
세상 좋다는 듯이 웃고있는 오스틴 수도원장은 이윽고 어렵사리 숨을 몰아쉬었다.
방 책상에는 페르시카 황녀가 보낸 서신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인족에 대한 이야기와, 향후 황권 분쟁에 있어서 오스틴 수도원장의 협조 여부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시는 그 내용을 훑어읽고 나서는, 다시 오스틴 쪽을 쳐다보았다.
마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추욱 늘어져 있던 오스틴이 이야기 한다.
“이제… 나가렴. 여기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단다.”
“방에서 뭐 하려고…?”
그 말에 오스틴은 빙그레 웃고서 말을 덧붙였다.
“내 딸들을 지켜야지.”
루시는 이 시점에서 오스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눈치챘다.
야수의 손톱으로 인한 상흔을 가진 변사체가 발견되는 순간, 수도원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하다. 바위섬 위에 인공적으로 지어진 이 수도원에 맹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므로, 아인족의 소행으로 단정되는데 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수도원의 지하에는 아인족을 위한 참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작정하고 황실군이 수색하면 짐승 귀를 가진 수도녀 무리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공론화 자체를 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왕 대안을 마련할 거면, 페르시카 황녀가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구속까지 하면 더 좋다.
그 방법은… 뻔히 정해져있다.
어렵사리 책상 쪽으로 손을 뻗은 오스틴은, 페르시카 황녀가 보내주었던 서신을 모두 그 옆 커다란 촛대에 불태워버렸다.
“아이야. 이제 가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루시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이내 아랫 입술을 꽉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틴은 이 이후에 일어날 일을 루시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루시가 창문 쪽으로 몸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너도, 젊을 적의 글록트 영감탱이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겠지.”
걸걸해져가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꺼낸 이야기지만, 오스틴의 말은 정확하게 루시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이윽고 네 삶에 찾아올 공허가 무섭고, 의미 없이 이어지기만 할 뿐인 삶의 반복이 두려운게지?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삶 그 자체에 권태감만 남았을 때가 두려울테고.”
클클 거리며 웃는 오스틴 쪽을, 루시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보려 하거나, 찾아 헤매진 말거라. …삶의 의미라는 건 찾아내는 게 아니라, 네가 부여하는 거란다. 그래, 네가 의미를 부여하라 이 말이야.”
“…그건 무슨…”
“실베니아의 짐 마차를 타고 들어온 거면, 결국 그 공작가 도련님을 쫓아온 것이겠지…?”
애초에 짐마차에 숨어들어 있었단 것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보면 해안가에 마중 나왔을 때, 유독 오스틴은 에드의 짐마차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질 않았다.
마차 내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에드의 사람 됨됨이를 가늠해보고 별 문제는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속 깊은 늙은이다.
오래된 세월동안 축적해온 지혜의 칼날은 이렇게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 정도 사내면, 삶의 의미로서는 꽤 괜찮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씨익 여유롭게 웃어보이는 모습이, 참으로 오스틴다운 작별인사였다.
그렇게, 노파는 소녀를 내보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닫고, 흐릿해져가는 시야를 겨우 다잡아서 서랍 맨 아랫칸을 연다.
안에는 예식용 단검이 하나 들려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쥔다.
목표 지점은 상처가 나있는 하복부다.
다행스럽게도 가해자의 손이 작은 터라, 상처의 면적도 작다. 그 깊이가 깊을 뿐.
그 위로 단검을 박아넣는 것으로, ‘야수에게 습격받은 흔적’은 사라지고, ‘단검에 찔린 상처’만 남는다.
용의자도 단검을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인간으로 그 범주가 넓어진다.
문득 창 밖의 별빛이 눈에 들어온다.
늘 방에 혼자 앉아 기도할 때마다 보던 광경이 오늘따라 더 각별해, 오스틴 수도원장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단검을 들어올린 손목을 보아하니, 앙상하고 삐쩍 말라 있다. 한 때는 백옥처럼 뽀얗던 시절도 있었는데,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색하다 싶다.
그럼에도, 그 마무리를 맞이하는 시점에, 가슴 당당히 펴고 내 딸들을 지켜냈노라 선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장수하는 바람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들은 다들 천당으로 먼저 떠난지 한참이다.
좀 지각했지만, 이 정도면 호탕하게 웃으며 그들의 면전에 대고 난 잘 살았노라 외쳐볼 수 있을 듯 하다.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스틴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꽉 넣었다.
*
“아무것도 못 했어.”
무릎을 안고, 밤바다를 내려다 보던 루시의 머리칼이 볼 언저리에서 흩날린다.
고개를 그대로 무릎 위에 얹은 채 멍하니 있던 루시는…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말야. 마음만 먹으면 이 수도원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어.”
“그렇겠지.”
“마력을 다 동원하면… 마차로 한참 달려가야할 거리도 대번에 이동할 수 있고, 고위 마법진 수십개를 한 번에 다룰 수도 있어.”
“그래, 놀라운 일이다.”
“근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루시 메이릴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강대한 마력과 막대한 힘을 가졌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함부로 나서서 일을 공론화 했다간 오스틴의 모든 고생과 노력,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수도원의 아인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드러난다면, 오스틴의 죽음은 개죽음이 되고 마니까.
그렇기에, 용의자로 지목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루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자기 발언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상황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오스틴이 의도한대로 흘러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놔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만났던 글록트 할아범의 지인이었는데… 별로 이야기도 못해봤어.”
“안타깝게 됐네.”
“…살리고 싶었는데.”
“노력해도 안됐는데, 어쩔 수 없지.”
꾸준히 맞장구를 쳐주며, 나도 루시와 나란히 앉아서 밤바다를 보았다.
어느덧 썰물 시간이 되었다. 해안선의 병사들도 한두명씩 캠프파이어를 정리하고, 수도원 쪽으로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보니 병사들이 하나둘씩 횃불을 들어올리는 광경이 웅장하다. 횃불의 무리가 수면 위로 드러난 모래사장을 따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은 꼭 바다 위로 불이 번지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며, 한참 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욱, 흐윽.”
– 뚝, 뚝.
이윽고, 루시의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망울져 흘러나오는 눈물이 뭉쳐져서 꾹꾹 흘러내리는 모습. 나는 그걸 보고 굳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진 않았다.
“세상엔…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
정치적으로 얽히고, 이념과 사상이 대립하고, 선의와 악의가 소용돌이 치는 세상사는 힘만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인간은 복잡하고, 사람의 마음은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세상 나들이를 시작한 소녀에게, 그런 것들이 얽힌 세상의 이야기들은 너무 어렵다.
소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다들 겪는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루시의 머리를 꾹꾹 눌러서 쓰다듬어주면서, 망울져 흐르는 눈물이 흘러내리게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루시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한참동안 밤바다를 함께 바라봐주었다.
으리으리한 수도원의 첨탑 꼭대기답다. 밤의 풍경도 꽤나 절경이었다.
하늘에는 꽤 많은 별똥별들이, 제법 긴 꼬리를 남기며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