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5)
의미 부여 (8)
이튿날 아침.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경위에 대한 사실들이 수도녀들 사이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노화로 인한 자연사. 기도회 준비로 며칠동안 지나치게 과로하고, 심지어 한 밤 중에 수도원 옥상을 뛰어다니기까지 해서 과하게 혈류가 돌아, 심장 마비로 인해 급사했다.
실제로는 타살 경위가 명확했지만, 공표는 그렇게 난 것이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나이를 생각해봤을 때, 갑작스러운 급사라 할지라도 자연사라는 핑계를 댈 수는 있었다. 일반 수도녀들 사이에서도 딱히 의심하는 기색이 돌지는 않았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별세라는 비극적인 소식에 수도원 내부는 슬픔과 실의에 빠졌을 뿐이다.
타살이란 사실을 아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아는 멜리니르 보좌주교는 당연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페르시카 황녀 또한 자연사로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클라리스 성녀는 내가 직접 설득했다. 죽은 오스틴 수도원장 또한 일이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을 바랄 것이기 때문에, 클라리스 성녀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건 진행을 주도하는 3명의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 했으므로, 나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타살 경위를 알고 있는 귀빈 방문자들도 괜시리 자기한테 의심의 불꽃이 튀어선 좋을 게 없으므로 타살을 공론화 시키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일이 커지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자신들도 필요 이상으로 엮여들어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사는 물밑에서 조용하게 진행한다는 성녀 클라리스와 황녀 페르시카의 말에 일동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아인족에 대한 진실은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수도원 입구에 오스틴 수도원장의 추모대가 마련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수도원의 일상은 아침이 빠르다. 밤새서 조사를 받고 증언을 하느라 피곤했지만, 다른 수도녀들도 모두 오스틴 수도원장을 추모하러 갔는데 나만 방에 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창밖에서부터 들어오는 파도소리에 눈을 부릅 뜨자, 온 몸에서 피곤이 밀려올라온다.
오늘은 실베니아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마차를 타야하는데, 벌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썩 걱정이 된다. 그래도 오스틴 수도원장의 추모행렬에 참가할 수 있을만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어날 거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몸에서 이렇게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질 일인가.
캠프 생활에 비하면 그리 무리한다고 할 정도도 아닐텐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것인가.
그런 위화감을 느끼며 이불을 걷어올렸더니, 루시가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자고 있었다.
“…”
언제 어디서나 몸에서 떼어놓는 일이 없는 마녀모자는 베개 옆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게 복선이었나..
어제 눈에 띄게 우울해져 있는 상태였기에 혼자 내버려두기도 애매해서 데리고 들어왔던 기억은 난다.
구구절절 괜찮다 괜찮다 이야기 해주는 것도 그리 큰 위로가 될 것 같진 않기에, 그냥 옆에 있어줬던 게 전부다.
원래 사람이 정말 힘들고 고민이 될 때는, 그냥 옆에 누구 하나가 벽처럼 있어주는 게 가장 의미가 큰 법이다.
“야, 루시.”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하는 상황이다.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러서 루시를 몇 번 깨우자, 감겨있던 눈꺼풀이 휙 올라갔다. 루시 특유의 그 멍하고 기복없는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나를 마주하더니, 갑자기 내 명치 언저리를 휙 누르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자기도 언제부터 잠들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스읍 거리면서 옷소매로 입가의 침을 휙 닦더니, 동공을 미약하게나마 넓히며 평소보다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잠든지 몰랐어.”
“어제 여러모로 힘들었을테니, 이해는 한다…”
굳이 어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수였을까.
내 팔에 어깨를 휘감긴 채 큼지막한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린 기억에 뒤늦게 수치심이 올라온 것인지, 루시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황할 필요도 없다. 살다보면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라 말 못하고 쭈뼛대고 있는 모습이, 뭐 지난 밤에 큰 사고라도 친 것 같은 기색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루시 메이릴은 그냥 울다 지쳐서 잠들었을 뿐이다.
그 장소가 내 품 안이라는 건 본인한테는 수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위로를 해 줄 입장은 아니었다.
루시는 뒤늦게 옷소매로 눈꺼풀을 슥슥 닦아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려 했다. 허나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나름 신선하다고 해야할까. 하여튼 세상 만사를 신선처럼 관조하는 듯한 그녀의 평소 모습을 생각해보면 썩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슬슬 일어나야지. 오늘은 실베니아로 돌아갈 거니까 그 채비를 해야되고… 무엇보다, 그 할멈의 추모회에 나가야지. 지금 이미 시작했을 거야. 수도원은 아침이 엄청 빠르니까.”
창밖을 보면 아침 안개가 아스라이 남아있다. 채비하고 나가면 안개는 사라져 있겠지만, 그래도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 마무리 지어야지.”
오스틴 수도원장의 이름이 나오자, 루시는 나름대로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치고는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이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내 옷소매를 꽉 잡은 채 따라오는 루시와 함께 1층의 세면 시설에 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간단한 세신을 마치고 올라와서 나는 외투와 가죽 바지, 마법사 로브를 챙겨입었다. 그리고는 대충 걸쳐서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루시의 교복을 이리저리 만져주었다. 옷소매가 여전히 남아 도는 것은 어떻게 단정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뒤 루시가 무릎 위에 올라앉기에 뭘 원하나 했더니, 머리를 묶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수도녀가 준비해준 빗으로 루시의 백발 머리칼을 휙휙 쓸어내리고선 머리끈으로 루시의 머리를 적당한 지점에서 묶어주었다.
그리고 나풀대는 넥타이에 핀을 잘 채워서 고정시켜주고, 단추가 엇나가 있는 셔츠도 다시 깔끔하게 잘 체결해주었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나가던 수도녀들은 의아한 눈동자로 쳐다봤지만… 사실 오늘 보고 이제 더 이상 안볼 사이여서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 뒤로는 옷 소매를 꽉 잡은 채 따라오는 루시를 이끌고 수도원 1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루시는 아침에 약한 것인지, 나풀대는 종이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래도 이른 아침의 수도원 정문에 펼쳐진 정경을 보자, 묘하게 다부진 마음이 들었는지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
오스틴의 초상화와 함께 수북히 쌓인 헌화들. 동쪽 하늘에서부터 떠오르는 아침해.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 사이에서 엄숙하게 기도하고 있는 수도녀들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해서…
나와 루시는 한동안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
“에일렌을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방에서 잘 쉬고 있습니다. 밤이 되기 전에 저희 쪽에서 잘 조치를 취해두겠습니다.”
루시가 잡아서 데리고 있던 소녀 에일렌은 보좌 주교 멜리니르에게로 넘겼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 후, 사실상 이 지역의 부 교구장인 그녀에게로 수도원 관리 권한도 넘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아인족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수도원 내부 관계자도 몇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위자인 그녀이기에, 에일렌을 맡기기엔 그녀만한 사람이 없었다.
추도회 메인 기도가 끝난 후, 각자 자리에 앉아 오스틴 수도원장을 위해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슬슬 자리를 떠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건만, 수도원장의 초상화 앞에는 수많은 수도녀들이 가만히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업무가 끝난 보좌주교 멜리니르는 그 때를 틈타 내게 말을 건네왔다. 추모회 현장 맨 뒤에서 돌벽에 기대있는 나를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크게 상심한 듯 한데… 만월에 취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니까 다른 아인족 동료들은 이해해줄 겁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경과를 이야기하고 있는 멜리니르는 이미 수도원장 복을 입고 있었다.
성황 엘데인으로부터 이른 아침 일찍 소식이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성황 엘데인은 간밤에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에 대한 보고 사항을 듣자마자 바로 추모의 뜻부터 전해온 것이다.
그리고는 부교구장인 그녀에게 곧바로 수도원장의 직위를 허락하고, 사태를 잘 마무리 할 것을 지시해왔다.
“다른 아인족 아이들도 모두 잘 이해하고 있거든요. 그 피에 취해 잘못된 곳으로 손톱이 나가는 일은… 비단 에일렌 뿐만 아니라 자기들한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요.”
“…적어도 그 아이는, 오스틴 수도원장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해코지 당할 일은 없겠군요.”
“예. 다들 이해할 겁니다. 다만…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지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지요.”
에일렌을 발견 했을 때,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피묻은 손으로 펑펑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아직 채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녀에게는 너무 큰 마음의 상처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이 이상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건 오지랖이다.
그녀 스스로가 이겨낼 일이다.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내는 것 정도면 충분한 일이었다.
“기도를 올리시겠습니까? 지금이라면 수도원 내부인이 아니더라도 헌화를 올리실 수 있습니다.”
“응.”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루시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니르 보좌주교가 흠칫 몸을 떨더니 루시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넌지시 감고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시는 나와 마찬가지로, 신 같은 것에 신앙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악신을 상대로 마법을 쏟아낸 전적이 있는 소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오스틴에 대한 예의인지… 그녀는 새하얀 장미를 헌화하고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아무데서나 늘어져서 낮잠을 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제야 루시라는 소녀는, 진지해질 때는 진지해질 수 있는 소녀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오늘 실베니아로 떠나시지요?”
“네. 있다가 밤 늦게 간조시간이 되면 마차가 오기로 되어있습니다. 밤이 될 때까지는 추모회 자리 지키다 가겠습니다.”
“적당히 쉬어가면서 하셔도 괜찮습니다. 헌화할 사람들은 이미 다 했고, 사실 남은 절차도 얼마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자리 지키겠습니다.”
수도원 정문 측에 마련된 추모회는 시간이 흘러도 수도녀들로 붐볐다.
슬퍼하는 수도녀들 사이에 하루종일 서있는 것도 우중충한 일이지만, 나는 딱히 마다하진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자리를 끔찍이 싫어하는 루시다. 허나 그녀도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쭉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면식이 있는 수도녀가 지나가면 위로의 말을 건네고, 또 생전 오스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수도녀들의 행렬이 한 차례 지나가자, 이번엔 외부 방문객들의 행렬이 왔다.
대부분 오스틴의 타살 경위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이었으므로 표정은 싱숭생숭했다. 그래도 고귀한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서는 떠났다.
사실 저렇게 묘하고 죄의식이 감도는 얼굴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결말 자체가 생전 오스틴이 가장 바랬을 상황일테니까.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직감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호탕하게 웃으며 세상을 떴으리라.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귀빈들을 보냈다. 그 다음으로는 성녀 클라리스가 직접 행차해서 헌화했다.
세상을 떠날 때, 텔로스 교단의 정신적 지주인 클라리스 성녀의 추모를 직접 받는 것은 최고의 영예로 친다.
오스틴 수도원장은 누가 뭐라해도 그 영예로운 추모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로 통했다.
이어서 페르시카 황녀의 헌화도 이어졌다. 그녀는 진중한 자세로 다가와서 복잡한 얼굴로 그녀의 추모대에 헌화했다.
황녀와 성녀.
속세에서 가장 고귀한 혈족을 타고난 소녀와, 내세의 신에게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소녀.
두 사람의 애도를 동시에 받으며, 그렇게 오스틴 수도원장은 세상을 떴다.
109년의 인생을 한 줄로 축약하기는 힘들겠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할 수 있겠다.
*
“해안 쪽에 실베니아 쪽의 마차가 도착해있다고 합니다. 성녀님도 출타 준비를 마치셨다고 하니, 슬슬 정문 쪽으로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끝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교구장 대리의 입장으로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에드 로스테일러 공자님.”
“…”
“저희 클레드릭 수도원은, 이번 일을 큰 무리 없이 넘길 수 있도록 가감 없이 힘을 빌려주신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을 잊지 않고 있겠습니다.”
멜리니르 보좌주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 이상의 감사였으므로, 적당히 손을 휘저어서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수도녀들이 일과를 하러 떠나고, 귀빈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빠지고 나서도 나와 루시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어주었다.
이윽고 추모회 자리를 정리해야할 때, 루시는 마법을 써서 뒷정리를 깔끔하게 끝내주었고, 나 또한 힘이 필요한 이런 저런 일들에 가감없이 일손을 내주었다.
그 결과, 해가 질 때 즈음엔 모든 일정이 깔끔하게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호탕하게 웃고 있는 오스틴의 초상화, 그리고 헌화들이 잔뜩 올라와있는 추모대를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한참 지나서 간조 때가 되어 있었다. 은근히 정신이 없어서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
문득, 루시가 눈을 치켜뜨고는 주변을 휙 돌아보았다. 이변을 느낀 것일까.
몇 번이고 말했듯, 수도원은 아침이 빠른 만큼 밤 또한 빠르다.
대충 달이 중천에 떠 있을 때 즈음이 되면 반절이 넘는 수도녀들은 벌써 잠자리에 든다.
거기다가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수도원 정문 방향까지 내려와 있는 수도녀들은 거의 없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까지 나와 있으면 취침 시간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덕에 추모대 근처는 완전히 조용해져 있었다. 외벽으로 이어지는 중간 문도 닫혀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만한 여건도 안되어 있었다.
외벽과 수도원 내부 문 사이의 추모 공간. 철창으로 격리되어 있지만… 외벽을 타고 오른 몇몇 수도녀들이 있었다. 루시는 그 수도녀들의 인기척을 눈치 챈 것이다.
철창과 벽을 휙 뛰어넘어서 안착한 열댓명의 소녀들. 하나 같이 짐승의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모습은 기묘하지만, 딱히 만월의 광기에 취한 것 같지는 않다.
이따금식 크르르 거리는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 소리는 공격성의 발로는 아니었다.
아인족의 피에 흐르는 힘은 때때로 이성을 잃게 만들지만, 그것 이상으로 비참한 기분이 그녀들의 이성을 유지시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은인의 죽음이다.
아인족 아이들은 하루 종일 주변에 숨어서, 인기척이 사라지는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들은 일제히 추모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어지간한 추모 시설들은 다 빠지고, 단출하게 추모대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녀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모여들어서 기도한다. 이 추모회의 마지막 추모객들이었다.
몇몇은 근처의 바위 위에서, 몇몇은 흙바닥에 앉아서 조용히 꼬리를 늘어뜨리고 기도를 이어간다.
그 맨 앞에는, 아직도 눈물자욱이 남아있는 에일렌이 앉아 있었다.
풍성한 금발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흙투성이가 된 수도복을 입은 채로 달빛을 받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소녀는 과연…
비록 짐승의 피가 섞여 있었으나… 신을 섬기는 신실한 종복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 늦으면 곤란하실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완전히 물이 빠져서 슬슬 해안 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소녀들이 달빛을 받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난 내 길을 갈 시간이었다.
지금 타이밍에 떠나지 않으면, 얄짤 없이 내일까지 계속 이 수도원에 묵어야 한다.
그리 큰 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가 학업에 힘을 쓰고 싶다. 제 아무리 공결을 냈어도 수업 일정에서 더 뒤처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멜리니르 보좌주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웃었다.
“슬슬, 일상으로 복귀해야지요. 다들.”
떠날 사람이 떠나고 나면, 다시금 일상은 찾아온다. 마치 그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시계침은 째깍째깍 앞으로 나아가고, 해는 떴다가 지고, 어느샌가 달이 중천에 떠있는 일과의 반복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암전되듯, 삶은 끝이 난다.
누군가는 그런 생애의 흐름에 허무를 느끼고, 무의미하다 규정할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는 그런 단조롭고 반복된 삶 속에서도 의미라는 것을 찾아내 부여할 줄 안다.
오스틴이 없는 클레드릭 수도원에도 해는 뜬다. 망자는 침묵할지라도, 살아있는 자의 삶은 이어져야한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대충 그런 일이 있었어.”
“으으, 정말 고생했겠네.”
“내가 뭐 고생까지 한 건 없긴 하지. 거의 대부분 가만히 앉아 있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좀 놀랍네…”
수도원에서 캠프로 돌아왔을 땐 자지러질 정도로 놀랐다.
캠프에서 떠나기 전부터 꾸준히 오두막 증축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와보니 외부 공사가 거의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료가 되는 통나무들을 다듬고 잘 가공하는 과정이 제일 손속이 많이 들어갈 뿐이지… 구축 공사 자체는 정령들의 힘을 빌리면 그리 어렵지 않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수도원에 머물렀던 열흘 남짓한 시간에 전부 예니카가 끝내버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생각해보니… 예니카 본인의 오두막도 정령들의 강행군으로 5일만에 세워진 것이다.
타칸의 리더십…… 리더십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타칸의 리더십 덕분에 일사불란해진 정령들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뛰어난 효율을 자랑하는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밖에… 타칸의 사고 방식이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으니까.
정령 감응을 이용해 캠프의 전경을 보니, 기진맥진해진 하위 정령들이 시체처럼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와 함께 클레드릭 수도원에 향해있었던 머그는 복잡한 눈으로 널브러진 하위 정령들을 보았다.
바로 몇 년 전 자신의 모습이 저기에 있었다. 이제는 중위 정령으로 위상도 올라서 그 정도로 고생하진 않았겠지만, 이 캠프에 남겨져 있었다면 머그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 저, 에드 도련님과 계약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평생 갑시다… 이 불초 머그, 평생토록 충성하겠습니다….!!! ]느끼는 바가 많은 모양이다.
“이걸… 정말 다 지었다고…?”
미리 설계해둔 계획대로 완전히 구현된 오두막이 눈앞에 도래해 있었다.
캠프 옆에 커다랗게 가지를 펼치고 있는 느티나무. 그 줄기를 축으로 해서, 커다란 1층 오두막을 세우고, 2층에는 줄기의 높다란 부분에 잘 지지해서 커다란 보조 기둥도 하나 받쳐두었다.
깔끔하고 완벽한 결과에 나는 목공 수련을 해야 한다는 명분조차도 잊고 말았다. 이 정도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못 만드는 퀄리티였다. 각 층마다 깔끔하게 달려 있는 창문도, 짜임새있게 잘 쌓여있는 통나무도 감동의 영역이었다.
지지대가 이어지는 부분은 쇠철봉을 사와서 박은 것 같고, 삐져나온 부분은 전부 깎아낸 듯한 흔적도 남아있다. 세심한 작업엔 재주가 없는 정령들을 데리고 이 정도까지 한 건 가히 놀라울 수준이다.
“에헤헤~.”
베시시 웃으며 손으로 V자를 표시해보이다가, 문득 예니카는 멋쩍은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절반 정도 뼈대만 잡아놓으려고 했는데, 내가 학사 수업 받으러 다니는 사이에 타칸이 주도해서 전부 끝내버렸지 뭐야…”
“…다른 정령들 상태는 괜찮대?”
“애초에 공사 자체를 나 몰래 밤까지 진행했나봐… 내가 수업 나가 있을 동안 추가 작업도 진행하기도 하고… 내가 한 소리 할까봐 숨겼던 모양이야… 뒤늦게 알아채고 타칸을 혼내긴 했는데…”
예니카는 손가락 끄트머리를 멋쩍은 듯이 만지작 거리며삐질댔다. 명백히 정령들의 과잉 충성이었다.
하여튼 정령들의 사랑을 두루 받는 것은 좋지만, 저렇게 기진맥진 해질 때까지 구르고 있으면 예니카 본인의 마음도 썩 좋진 않은 것이다.
그 와중에도 흡족한 듯 오두막을 보고 웃고 있을 타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필시 그러고 있을 것이다.
“어, 어쨌든 정령들 사후 관리는 내가 힘쓰면 되는 거니까! 에드는 그냥 기뻐하면 되는 거 아닐까?! 와아! 와아!”
“네가 만세 삼창 한다고 해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선 기쁜 일이긴 하지.”
나는 한층 더 커진 오두막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캠프 한 켠에 만들어진 목제 쉼터 쪽으로도 시선을 돌렸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쉼터이자, 첫날 추운 밤바람과 벌레들 사이에서 잠들었던 곳이다.
그 크기의 차이가 압도적인 것을 보고나니, 묘한 감정이 올라와 미간을 꾹꾹 눌렀다.
과연… 이게 감동의 물결이라는 것일까.
“내부는 아직 텅 비어있어. 가구 배치는 잘 모르겠어서 에드가 직접 편한대로 해야될 거 같아!”
“…그래.”
그깟 가구 배치정도야 백번이라도 혼자 도맡아 해주마. 오히려 실실 웃으면서 할 수도 있다.
2층은 서고이자 마공학 공방으로 쓸 것이고, 1층은 생활공간으로 쓴다 치면… 민감하고 섬세한 장비들은 모두 2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동 계획에 대해 고민하면서, 가구를 어떻게 배치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건 그렇고, 에드 내일부터 다시 수업나가야 되잖아…?”
“응? 그렇지.”
“그럼… 이제 막 학사에 도착한 참이니까 그 소식 모르겠네.”
예니카는 모닥불에 지핀 불에 식사 준비를 위한 냄비를 걸쳐서 올려놓고선 팔을 걷어붙였다.
“에드 동생 타냐 말이야… 이번에 학생 회동을 새로 연다던데… 에드도 그 쪽으로 부를 생각인가봐. 일종의 회의 소집 같은 개념으로 말야.”
학생들끼리 회동을 소집하는 것이야 회장의 당연한 권한이다.
다만, 예니카는 신경쓰이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이야기 한다.
“근데 그 회동 명분도 좀 묘하고… 부르는 구성원들도, 이름난 명문가 아이들밖에 없어서 여러 소문이 돌더라구…”
“…무슨 소문?”
“학생 회장이… 실베니아 내부 뿐만이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독자세력을 형성하려 한다고….”
그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댈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타냐가 무엇인가 설계도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직접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