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6)
최연소 은퇴 희망자 (1)
?로스테일러의 위광은 클로엘 제국이 빛나는 한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으리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문구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시조 볼셰르 로스테일러가 그 빛나는 가문의 깃발을 들어올리며 제국의 중심에서 외쳤던 말이다.
이제 겨우 어린 아이 티를 벗고, 드디어 드레스다운 드레스를 두른 채 종종걸음으로 홀에 나온 어리숙한 타냐 로스테일러. 그녀는 기억 속 로스테일러 홀의 위엄 넘치던 광경을 언제나 가슴에 안고 살았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그 가슴이 벅차오르는 시대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받은 일인가.
이 로스테일러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아리땁고 강인한 영애로서, 로스테일러를 대표하는 얼굴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리라.
꿈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그릇을 증명해 이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세상에 드높이는 것이다.
이 로스테일러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비로소 자신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아름답고 숭고한 여정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아리따운 공작 영애, 타냐 로스테일러. 언젠가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듣거든 가슴을 떨며 존경의 인사를 보내는 그런 존재가 되리라.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달고, 권력을 쥐고, 명예를 안고, 모두를 이끄는 사람이 되리라.
소녀가 품은 야망이 횃불처럼 화르륵 타오른다.
영원불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위인으로 평생을 살겠다는 그 의지.
그 커다란 야망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가 품을만한 크기의 야망이 아니다.
그렇게 소녀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누구보다도 빛나는 야망을 품게된 것이었다.
*
“죽고 싶다…”
학생광장에 붙어있는 오벨관, 학생회장 집무실.
위엄 넘쳐보이는 학생회장 집무석에 파묻히듯 앉아서, 퀭한 표정으로 책상에 얼굴을 올려놓고 있던 타냐가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시기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에드 로스테일러가 클레드릭 수도원으로 떠난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였다.
“…”
학생회 행동위원 직스 에펠슈타인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그녀를 보면서,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연금부 소속의 여러 동아리들에서 보고한 연구용 약초와 시약재료들. 그 재고가 현장 답사 때 학생회 실행 위원들이 확인했던 재고랑 숫자가 맞질 않는다.
그래서 재확인이 필요하다고 학생 감찰 위원들이 보고를 올려온 상황이었다.
직스는 그 보고 서류를 타냐에게 검토받고 있었던 차였으나, 문득 바람빠진 풍선처럼 침몰해버린 타냐의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하는 와중이었다.
“타냐 회장님… 일단 서류부터 검토 해주시면 안됩니까.”
하급생이지만 학생회장의 직위를 달고 있는 자다. 깍듯이 존대를 해주는 직스를 타냐는 잠시간 눈을 부릅뜬 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직스 선배님. 사람은 왜 일을 해야하는 걸까요.”
“그런 철학적인 사유는 일을 마무리 하고 나서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애초에 사회가 만든 편견에 우리는 휘둘리고 있을 뿐인지도 몰라요.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에는 좀 더 가치있는 의도가 숨어있을 게 분명하잖아요.”
“회장님. 검토 후 결재해주십시오. 학생 감찰 위원들이 일처리를 못하고 있잖습니까…”
“지금 이런… 동아리 활동에 쓴 연금술 용품의 재고 확인 업무가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연금부는 사고뭉치들이 많아서, 연구 재료들 빼돌려서 또 묘한 물건을 만들다 무슨 일을 칠지도 모르니까요. 미연에 방지해야죠.”
“… 확실히, 중요하긴 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타냐는 보고 서류에 쓰여있는 재고 대조표를 깃펜으로 줄을 쳐가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헙, 하고 숨을 몰아 삼킨다.
“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업무를 처리하고 말았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하는 게 그렇게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지을 일입니까.”
직스는 죽상을 쓰고 있는 타냐를 바라보다가, 문득 아련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처음 실베니아에 왔을 때의 타냐 로스테일러는 뭐라고 해야할까, 눈에 촉기가 살아 있었다.
에드를 잡아서 치워버리겠다느니 하는 묘한 소리도 일삼고, 학생회장이 되어 로스테일러의 위광을 하늘 높이 만들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해댔던 것이다.
뭐 목표가 뭐였든 간에, 그 나잇대 소녀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야심과 향상심이 어찌나 기특한지… 직스도 선배된 입장으로서 박수를 보내주곤 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야심가 기질을 타고났을 뿐인 그 어리숙한 소녀도, 현실의 풍파를 몇 번 쬐고 나면 좀 더 노련한 타협가가 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종착지점은… 직스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있잖아요. 직스 선배님. 퓰란의 산맥 지방을 따라 좀 더 오른쪽으로 가면 예전에 클렉턴 남작이 썼던 저택이 있대요. 지금 매물로 나와있다던데, 세상에… 황도에서는 허름한 건물 한 채 겨우 살만한 금액이더라고요. 그 정도 금액으로 새 저택을 구매할 수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요.”
저택이나 건물의 매물에 대한 소식은 어디서 물어오는 것인지, 그런 묘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퓰란 쪽에 있는 여러 시골마을과도 가깝고,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한산한 초원 바람 맞으면서 심심하면 근처 강에 물놀이도 갈 수 있고, 또 제가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취미를 좀 가지고 싶은데… 그런 곳은 풍경화도 예쁘게 잘 나오겠죠.”
“타냐 회장님…”
“한 번씩 마을에 장 보러 가서 평소에 못보던 식자재가 있으면, 안 해본 요리도 잔뜩 해보는 거에요. 항상 메이드한테 맡기기만 해서 요리는 서툰 편인데, 그래도 제대로 손재주를 단련해보고 싶은 걸요.
이왕이면 자수도 좀 배우면 좋겠고요. 그렇다고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되어버릴테니까, 퓰란 지방의 친목회나 독서회, 혹은 봉사회 같은 게 있으면 참석하면 좋겠죠.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많으니까 한달에 두어번 정도면 될까요.
”
“생각보다 구체적이시군요.”
“사용인은 너무 많이 쓸 필요는 없겠죠. 괜시리 위엄 챙길 필요도 없으니까. 실속 있는 메이드 한 둘이랑 하하호호 하며 가족처럼 살면 더 할 나위 없겠네요.
내가 정말 잘 챙겨줄 수 있거든요. 여름 밤에는 마법으로 불꽃놀이 같은 것도 좀 하고… 날씨 좋은 날엔 야외에서 식사하는 것도 좋을테고…. 또 주변에 산책하기 좋은 곳도 많으니까… 운동도 할 겸 돌아다니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저택이… 겨우 그 정도 금액이라니…
”
하는 말만 들으면 당장 내일 모래 은퇴하는 황혼기 할머니 같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타냐 로스테일러는 아직 살아갈 날이 아득하게 많이 남은, 창창한 전성기 소녀인 것이다.
문득 혼자서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두런두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타냐는, 표정을 싹 굳히고 이야기 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정말 너무 불안해서 그런데 혹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은퇴 계획을 수립할 거에요.”
“아직 회장직 역임하신지 반년도 안 지났습니다.”
학생 회장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기 가주 자리는 관두고 싶다고 해서 휙 관둬버릴 수도 없는 자리다. 그 쪽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로스테일러 잔존 세력들, 특히 황실 쪽에 붙어있던 가신들이나 먼 친척들에게 타냐 로스테일러의 존재는 마지막 남은 구심점이다. 이런 자들까지 전부 나몰라라 버리고 잠적해버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 전에 인간성의 문제다.
타냐가 가문을 내치면, 로스테일러 가문은 진짜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로 인해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질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른다. 그 사실이 일단 어떻게든 타냐를 차기 가주의 자리에 억지로라도 앉혀놓고 있는 것이다.
가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 구심점이 사라져선 안된다. 그 전까지는 타냐도 은퇴할 수가 없다.
결국 위기를 맞은 로스테일러 가문을 다시 안정기로 돌리려거든,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세력의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셀라하는 적대 중이고, 페르시카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며, 결국 페니아 황녀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페니아 황녀의 경쟁 세력을 미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타냐 나름대로 일단 셀라하 황녀에게 대처하기 위한 계획을 좀 수립하고 있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이렇게 바쁘게 살 필요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 모든 건 로스테일러의 차기 가주로서 움직이고 있는 일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으로서 가지는 위엄 정도는, 내려놔도 괜찮은 것 아닐까.
학생회 권력도 적지 않은 규모고, 필요할 때가 올 거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생각보다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닌 듯 하다.
“생각해보니 저 같이 부족함 많고 어리숙한 사람에게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라는 중직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많이 배워야 하고… 생각도 짧고…! 그렇게 위엄있지도 않아요!”
“회장님…”
“직스 선배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제 의견을 따지기 이전에, 애초에 한 번 회장직에 당선 됐으면 학칙에 규정된 사퇴 사유를 만족하지 않으면 멋대로 관둘 수도 없습니다.”
그 말에 타냐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네?! 제가 안 하겠다는데 왜요?!”
“애초에 선출직이잖습니까. 대리자를 다시 뽑는 데에도 엄청난 행정 인력이 들어가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부회장이 쭉 회장직을 역임할 수도 없으니까요. 학생들이 직접 뽑은 자라는 대표성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썩어가는 동태 같은 눈을 한 채 금발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타냐. 그 모습을 보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작년의 모습을 겹쳐지니 한숨이 나오고 만다.
1년 만에 얼마나 마음이 삭아버린 것이냐… 아무리 고생을 많이 했어도 그렇지.
직스는 그런 독백을 하며, 타냐에게 현실을 가감없이 이야기했다.
“그냥 빠릿하게 임기를 다 채우시는 게 나을겁니다?”
“그러다 저 죽어요!”
“새삼스러운 말입니다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타냐는 자기 양 눈을 꾹꾹 누르며 세상 좌절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자진 사퇴가 안 된다면, 찬탈 당하면 되겠죠. 아니면 탄핵이라도 당하든가…”
“또 무슨 묘한 생각을 하고 계신겁니까.”
“제가 일을 안하겠다고 발 뻗고 나자빠져 있으면 학사에서 어쩌겠어요?! 울며 겨자먹기로 대리자라도 세워야죠!”
타냐는 회장석에 잔뜩 쌓여있는 서류들을 올려다 보았다. 어찌나 그 양이 막대한지, 솔직히 대각선으로 슥슥 속독해도 오늘 내로 다 읽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거 내가 다 처리 안하겠다! 난 모른다! 배를 째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드러누우면, 학사 행정도 아수라장이 될테니 징계를 줘서라도 끌어내리든 말든 하겠죠! 모르겠다! 일 안할래요…!”
“… 뭐, 그런 판단이시라면야… 회장님 마음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만…”
직스는 잠깐 턱을 괴고 고민하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쉬고서는 집무실 구석에 있는 목재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많은 안건이 회장님께 전달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회장님의 업무가 학사 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겠죠.”
“…으윽.”
“그럼 회장님이 일을 안하시고 드러 누워계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일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회장님의 결재 도장 하나만 기다리는 사람이 잔뜩인데.”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책임감!
직스 에펠슈타인은 알고 있다.
타냐 로스테일러라는 소녀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타고난 책임감 하나만큼은 절대로 내칠 수가 없는 소녀다…!
“나한테도… 나의 사정이… 있는 거에요…”
그러나, 고통스러운 얼굴로 어떻게든 저항해보였다. 과연… 확실히 의지력만큼은 성장했다…
“…엘카의 천식이 심해져서, 저 또한 요즘 고민입니다.”
“…에엑… 갑자기요…?”
“제 평생의 벗이나 다름 없는 소녀입니다만… 날이 갈수록 지병이 심해져가는 데에도 학업을 멈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통에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그건 갑자기 왜…”
“그래도,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려고 실베니아에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 학생회 차원에서 질환이 있는 학생들에게 수업에 우선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거나, 요양을 위해 좋은 방을 우선 배정해주는 방안을 밀고 있었잖습니까.”
직스는 헛헛한 표정으로 쌓여있는 서류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이 어딘가에 그 결재안이 섞여있겠군요.”
“그… 그런 건 진작 말해줬어야죠…! 해당 안건부터 내가 먼저 처리해주면 되잖아요! 왜 이제 말하는 거에요!”
“학생회 소속이라는 이유로 그런 특별대우를 받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묵언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는 공정해야하는 입장이잖습니까.”
직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는 똑바로 이야기했다.
“이 서류 탑에 쌓인 안건들 하나 하나가, 누군가한테는 큰 의미로 다가올수도 있고, 저처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안건일 수도 있는 겁니다. 회장님께는 일상처럼 처리하는 업무일지도 모르겠으나, 누구한테는 간절한 바램 하나 하나가 쌓인 결과물일테니까요.”
“…으윽, 큭…..”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제가 바라는 안건만 먼저 우선 순위를 둬서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드릴 순 없었습니다.”
이 안건들의 처리 기한이 밀려나가기 시작하면,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학사 내의 누군가는 또 다시 한탄의 한숨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계속 일처리가 지지부진해진다면, 그런 안건들도 계속해서 쌓여나가겠죠. 대답조차 듣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타냐 또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정말로 긴급한 안건은 최우선순위로 올라오긴 하지만, 다른 안건들이라 할지라도 쉬이 미룰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중직에 앉아 있는지 또한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직스는 알고 있다.
타냐는 여기서 나몰라라 배째라며 드러누울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절대 못된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가 흔들릴 것 같아요?!”
“…”
“으음… 으윽…………”
“…”
“윽………… 으흐윽………… 알았어요….”
타냐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서는… 입을 앙다물고… 천천히 결재 서류에 밑줄을 쳐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로… 내가… 으윽…. 끄으으윽……………..”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한 얼굴이지만, 결국 제 선택인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도저히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소녀다…
결국에는 늘 제 발로 다시 업무의 늪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눈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
“타냐 회장이 엊그저께 찾아왔었거든요. 에드 선배님께서 수도원에 계셨을 때에요. 여러모로 의외의 일이었어요.”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돌아온지 만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쌓아둔 게 있어서인지 수업에 참석해도 딱히 뒤처지는 감각은 없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맘 놓고 놀고 있었던 건 절대 아니다.
수도원에서부터 계속해서 수선 숙련도를 단련해왔던 나다. 드디어 제대로 활 제작 스킬을 다룰 수 있게 되어서, 내 몸에 딱 맞는 활을 제작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엘테 상회를 찾아온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로르텔보다 좋은 재료를 구해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실베니아 내부에는 없기 때문이다.
“저는 지난 학생회장 선거에서 타냐 회장과는 완전히 대립하던 입장이었잖아요? 학사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고요. 그런데 학생회장이 직접 엘테 상회까지 찾아오니까… 다소 당황스럽더라구요.”
로르텔을 통해 좋은 재료들을 매입하려던 차.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집무실에 앉아 있던 로르텔이 할 말이 있다면서 타냐에 대한 화두를 꺼냈다.
“그래? 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좀… 다소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하고 갔어요.”
사람의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읽는 로르텔 아니던가. 그런 그녀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면 대체 타냐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
“엘테 상회의 비리로 인한 구설수는 모두 잘 들었다느니, 학사 차원에서 감찰을 하겠다느니, 그런 권한도 없는 소리를 하더라구요.”
“그건… 좀 타냐 답지 않네.”
“그렇죠? 굳이 엘테 상회를 상대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었는데, 좀 의아한 일이었어요.”
타냐는 바쁜 입장이다. 굳이 엘테 상회 본관까지 찾아왔을 정도면 꼭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학생회장으로서 엘테 상회를 언제나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학생 회장자리에 앉아 있는 한, 엘테 상회는 절대로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지 못 할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라구요.”
“저런… 기분이 좀 나빴냐, 로르텔?”
“네? 글쎄요. 애초에 에드 선배님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데에는 의도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막 감정적인 동요는 없었어요.”
해질녘 집무실. 으리으리한 집무용 책상에 걸터 앉아서 적갈색 머리칼을 한 쪽으로 늘어뜨린 로르텔은, 붉은 기운이 가득한 늦저녁 하늘의 빛을 등지고 있었다.
나풀대는 커튼에서는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어들어온다. 평화로운 한 때의 모습이다.
타냐가 들이닥쳐서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음에도,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애초에 그 정도로 당황할만한 인간도 아니다.
“그런데 그 의도가 전혀 읽히지 않아서 좀 의아하긴 했죠. 애시당초 학사와 저희 상회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왜 굳이 나타나서 들쑤시고 간 걸까요? 아, 리엔나. 재고 목록 좀 챙겨다 주시겠어요. 활 제작 재료로 쓸만한 것들요.”
“네, 넵…!”
다시금 로르텔의 수석 비서 자리에 오른 리엔나 비서지만 그 쭈뼛거리는 태도가 여전했다.
매사 행동에 자신감 없어 보이는 것이 여전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일처리는 더 빠릿해졌다. 애초에 이 엘테 상회의 왕이나 다름없는 로르텔을 뒷배로 두고 있으니… 딱히 거리 낄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타냐 회장에 대해 이런저런 뒷조사를 해봤는데요. 저희 상회에서만 그런 기묘한 일을 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
“네.. 학사 본부 쪽이랑도 마찰이 있었다고 하고, 학생 기강을 잡겠다며 학생 회관 앞에서 구구절절 복장 지시를 하거나, 괜시리 학생 동아리 쪽에 감찰 압박을 넣기도 하고… 어쨌든 요즘들어 그런 대외 활동이 많아졌더라고요.”
로르텔은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슥슥 쓸어내리면서, 갸우뚱 거리며 이야기했다.
“누가보면 자기한테 불만을 좀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녀요.”
“확실히… 엘테 상회 입장에서도 이렇게 갑자기 감찰 운운하면 당황스럽긴 하겠네.”
“그 쪽에서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하질 않으니 이 쪽도 좀 답답한 와중이긴 하죠.”
로르텔의 집무실은 예전보다도 뭔가 잡동사니가 더 많아졌다. 이제 이 지부는 완전히 그녀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방증하듯이, 그녀의 사적인 물건이나 생활용품까지도 왕왕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이번 학기에는 통합 대련회가 있잖아요. 클로엘 황제님까지 행차하시는 큰 행사인데, 그거 준비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을까요? 이런 움직임을 보일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걸까 싶네요.”
“걔도 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저번에 만났을 땐 좀 힘들어보이긴 하더라.”
클레드릭 수도원에 가기 전에 타냐를 한 번 보긴 했다. 이러니저러니 불만 사항을 잔뜩 말하곤 있었지만, 어쨌든 로스테일러 가문의 미래와 학생회 업무에 대한 비전 같은 것은 확실하게 품고 있었다.
“그럼 학생 여론도 별로 안 좋아졌겠네. 멘탈은 괜찮을까 싶구만.”
“아니요. 지금 타냐 회장에 대한 학생 지지는 역대 회장 중에서도 비할 자가 없는 수준이에요.”
“…뭐?”
“로스테일러 가문이 휘청이는 악재 속에서도 꿋꿋이 업무를 이어나가고 있는 점. 1학년 신분으로서 선배들 예우에 착실한 점. 막대한 업무량을 감당하면서도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는 점. 동아리 의견이나 각 반 의견을 두루 청취해서 반영한다는 점 등… 솔직히 지지 세력이 확실해서 저희 상회 쪽에서도 견제하기가 부담스러운 수준이에요. 애초에 견제할 마음도 없지만.”
나는 리엔나 비서가 내다 준 차를 한 입 머금고는, 어리둥절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방금은 온갖 비호감 행보를 다 저지르고 다닌다면서?”
“원래 같은 행동이라도 시선이 호의적이냐 적대적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법이죠.”
“그럼…?”
“학생 기강 잡겠다고 날뛰는 행위는, 과연 규율에 엄격하고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멋진 우리 학생회장님… 이라는 시선으로 해석되고 있는 모양이네요.”
“…”
회장실에 앉아서 썩은 동태 같은 눈으로 서류를 쳐다보던 타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새로운 차와 함께 매물 일람이 적힌 표를 가져온 리엔나 비서가 거들었다.
“타냐 학생회장님은… 객관적으로 봐도 멋지시잖아요? 1학년이시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고학년 같은 아우라가 흐르시고요…”
“그래…?”
“얼마나 학생을 위해 힘쓰고 계시는지 다들 알고 있기에, 타냐 회장님을 배려하고 있는거죠. 학생 동아리 쪽에서도 자진해서 누락된 신고 자금들을 가져다 바치고 있다고 들었어요.”
확실히, 타냐는 매사에 열심인 소녀다.
학생회장직에 오르고 나서도 그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는지, 툴툴거리면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로스테일러 밖에 모르던 소녀에게도 새로운 신념이라는 것이 피어오르고, 급기야 제 뜻으로 회장직에 오르기까지 하지 않았나.
과연…. 기특하다….!
그래, 기특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이렇게 공격적인 행보를 하고 다니는 것도, 혹시 모를 학생 권리 침해에 미연에 대처하기 위함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의도는 정확히 안 읽히지만… 회장님이라면 뜻이 있겠죠.”
리엔나 비서는 확언에 가까운 말로 타냐에 대해 그리 평했다.
“확실히… 타냐는 믿을만한 애긴 하지.”
나 역시 그리 이야기 했다.
심정적으로 많은 성장을 거친 타냐는, 이제 어엿한 로스테일러의 차기 가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뭐, 나야 빙의해온 입장이니, 진정한 남매 관계에 있다고 보기는 좀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넓디 넓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혈연 아니던가.
밀어줄 수 있을 때 밀어주는 것이… 확실히 맞다…!
타냐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살았으니, 슬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아 빛을 봐도 괜찮은 아이다…!
“타냐의 언동이 불쾌했다면, 오라비 된 입장에서 내가 사과하마. 로르텔.”
“어, 어머… 에드 선배님이 사과하시는 게 훨씬 더 당황스러워요.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래도, 나는 걔를 믿고 밀어주고 싶다.”
나는 확실하게 이야기 했다.
“이왕이면, 내년에도 걔가 학생회장으로 연임할 수 있도록… 우리가 온 힘을 다했으면 좋겠다…! 로르텔, 너도 부디 걔를 믿어줘라!”
나는 로르텔의 양손을 꽉 잡아쥐고, 결심하듯 뜻을 전했다.
갑작스럽게 의지를 전하는 모습에 로르텔도 퍽 당황스러웠는지, 쭈뼛거리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서, 선배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신다면, 저야 뭐 굳이 반대할 맘은 없어요. 뭐어, 마음만 먹으면 회장직 연임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고… 저번에도 한 번 성공했으니까…”
“그래. 믿어줘서 고맙다. 로르텔.”
“이, 이게 뭐 별 거라고요…”
로르텔은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이 한숨을 휘익 내쉬고서는, 이윽고 천천히 이야기했다.
“이번에 타냐 회장이 이름난 귀족가 학생들만 골라서 회동을 소집한 걸 아시죠? 에드 선배님도 아마 포함되셨을테고.”
“그렇지. 아마 학사 내의 문제라기 보단, 앞으로 일어날 황실 정국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 같던데.”
“그 쪽에서 확실하게 타냐 회장한테 힘을 실어줘야 할 거에요. 저는 평민 신분이라 참석하진 못 할테지만… 에드 선배님은 입장이 다르잖아요?”
로르텔은 물밑에서 활동하는 편이지, 그런 회동 자리에 참석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소집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다 생각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단 밀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그래. 그 동안 잘 부탁한다.”
“물론이에요. 저희 엘테 상회는, 학생회 측이랑은 쭉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게요.”
로르텔은 능구렁이처럼 빙긋 웃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아무런 의심 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신뢰 관계라는 것 자체가, 로르텔에게는 큰 흥겨움인 듯 했다.
*- ‘학생 실권을 위해 항상 애써주시는 타냐 학생회장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오벨관에서 새로 쓸만한 고급 목재 가구 80 개, 황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장식용 산양 조각상, 학생회원들이 1년간 이용할 수 있도록 선결제된 라플라스 베이커리 연간 회원권을 선물로 보냅니다.’
– ‘늘 정의를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학생회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 회주대리 로르텔 케헬른 보냄.’
학생회원들이 이용하는 오벨관 앞에 온갖 고구 가구들과, 보기만 해도 위엄 넘치는 장식용 조각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학생회원들은 입을 떡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활동에서도 가장 이름 난 라플라스 베이커리의 연간 회원권을 무상으로 지급 받은 학생들도 잔뜩 있었다. 모두 행복에 겨워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이었다.
“야, 이쪽부터~! 여기부터 짐을 빼야지 내부에 다 들어가겠다! 일단 업무실부터 채워넣자! 예전에 쓰던 가구들은 다 빼와 그냥!”
이미 실행 위원들은 선물로 들어온 가구들을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일제히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뒤늦게 나온 타냐 로스테일러 본인도, 오벨관 앞 풍경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회장님…”
4학년 전투부 수석이자 전체 수석, 짧게 깎은 머리에 둔중한 육체를 가진 학생회원 다이크 엘펠란이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테 상회 쪽이면, 학사 본부에서도 회유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인간들인데… 무슨 술수를 쓰신 겁니까…?”
타냐는 퀭한 눈으로 다이크를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말 없이 다시 짐을 나르는 풍경으로 시선을 보냈다.
타냐는 분명, 에라 모르겠다 무슨 수를 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좀 탄핵시켜달라, 라는 마인드로 학사 내에서도 가장 요주의 집단인 엘테 상회까지 가서 난리를 피웠댔다. 반 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그 대가로 어떤 단죄를 받을 것인가. 타냐도 긴장된 기색으로 대기하고 있었으나, 예상치도 못한 끔찍한 방식으로 단죄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우, 우와아… 진짜로 이걸 다 엘테 상회 쪽에서 보낸 거야?!”
“나, 엘테 상회가 학사에 이렇게까지 우호적으로 움직이는 거 처음 봐…”
“저번에 타냐 회장님께서 상회 건물까지 담판을 지으러 가셨다던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고 오신거지…?”
“그 능구렁이 같은 로르텔 케헬른이 이렇게까지 학사 측을 존중하고 배려해준다고…?”
“여.. 역시 타냐 회장님인가…”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잔뜩 쌓인 선물들로 가득한 오벨관 앞마당에서, 학생회원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학생들까지 화들짝 놀라 수근대고 있었다.
“이거 진짜… 내년까지 연임하시겠는데…?”
불현 듯 타냐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 푸른 하늘 위, 믿음직한 에드 로스테일러가 보란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흡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