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9)
최연소 은퇴 희망자 (4)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은 많았지만, 어쨌든 학사 일정은 무리 없이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캠프에서의 야생 생활과, 아카데미에서의 학사 생활을 병행해가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 보다 두 배는 더 바빴고, 시간도 두 배로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하루 일과랄 것도 대개는 천편일률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캠프를 점검하고, 식량을 다듬고, 일찍 일어난 로르텔과 담소를 나눈다.
나도 아침이 굉장히 빠른 편인데, 로르텔은 한 술 더 떠서 거의 새벽에 일어나 상회로 향한다. 새벽 일찍부터 납품 들어오는 품목에 대한 검수 서류를 체크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가에 앉아서 잠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있으면, 예니카가 부스스한 눈으로 잠옷을 입고 나와서 아침 준비를 한다. 겸사겸사 내 식사도 같이 준비해주는데, 그 동안 나는 장작을 패거나 도구들을 수리하는 둥 힘 쓰는 일을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짧은 아침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와 예니카는 3학년 학사동 쪽으로 등교를 한다. 수업도 대부분 겹치는 게 많은지라 어지간하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있는 편이다. 심지어 나 또한 칼레이드 교수의 A반 수업에 참가하게 되면서, 마법부 심화 수업 일정까지도 완전히 겹쳤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수업이 갈리기도 하고, 학사 일정 외에 다른 계획이 잡히면 별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예니카는 주로 정령 연구 학회 쪽 일이고, 나는 학년 수석 소집 같은 일이 있을 때 자주 따로 행동하곤 했다. 다만, 엘테 상회 쪽에 생존 도구나 내 스킬 숙련을 위한 재료들을 구매하러 갈 때마다 심기가 불편한 듯 볼을 부풀리곤 하는데, 이 쪽도 썩 편치는 않은 기분이라 매번 달래주는 느낌이다.
어쨌든 학사 일정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면 여전히 할 일은 산더미다.
캠프는 단 하루 이틀만 가만히 놔둬도 유지보수 해야할 것들이 생긴다. 대부분 섬세한 손재주들이 필요한 것들이라 내가 하는 편이다.
생선을 잡는 그물망을 점검하고, 숲 여기저기에 뿌린 덫들을 점검하고, 지인들한테 받은 식자재들을 정리하는 게 내 일이라면,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저녁 준비와 세탁, 캠프 내부 청소 따위를 예니카가 도맡아 한다.
이쯤되면 로르텔도 돌아와 별장에서 서류 업무를 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셋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에 썩 분위기가 좋지는 않은 편이다.
그리고 야밤이 되면 그 날 학사에서 받은 과제 혹은 개인 공부를 하거나, 내 스탯 상승을 위해 단련을 하곤 한다. 로르텔 같은 경우에는 별장에서 서류들을 처리하고, 예니카는 메릴다의 수호목 쪽에서 정령 감응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마찬가지로 과제를 한다.
그러다가 달이 중천에 뜰 때 쯤 모두 잠에 든다. 보통 내가 제일 늦게 자는 편이다.
야심한 시각에 홀로 밤의 캠프에 앉아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풀벌레 소리나 바람에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를 듣다가, 내일 일정,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조용히 오두막에 들어가 잠든다.
그런 일정의 반복이… 약 한 달 동안 이어졌다. 큰 기류 없이 무난하게 흘러간 1개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별 다른 기복없이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던 이 일상이 가장 귀중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큰 기복이 없었을 뿐 크고 작은 사건이나 변화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 달이라는 긴 기간동안… 딱 이거라고 특기할만한 일은 세가지 정도 밖에 없었다.
“…견해는 흥미로운데 근거가 빈약하네. 실측 가능한 수치는 하나도 제시 안하고, 그냥 주장에 대한 증거를 또 다른 주장으로 제시할 뿐이잖아. 이런 초보적인 순환 논증은 나도 할 수 있는걸…”
[ 견해의 제시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일 때가 꽤 많아. 봐, 이 사람은 화폐 유통의 경로나 추세를 시장에 도는 현금만으로 단정지어선 안된다고 이야기 하잖아. 눈에 보이는 돈 보다, 사실 눈에 안 보이는 돈이 더 많다는거지. 제법 흥미로운 견해야. 확대 발전시키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지. ]첫 번째는 루시가 유독 메릴다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메릴다로 말할 것 같으면 항상 캠프 구석에서 여러 책들을 쌓아놓고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슥슥 읽어내려가는 게 취미인 정령이다.
책을 넘기기 힘들다는 이유로 늑대 형상도 취하질 않고, 흰색 머리칼을 뒤로 올려묶은 소녀의 모습으로 항상 캠프 구석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던 녀석이다.
루시는 그런 메릴다의 옆에서 같이 책을 슥슥 훑어 읽으며, 마치 머리에 든 지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려는 듯 굴었다.
메릴다는 독서 동료가 늘었다는 사실이 기쁜지, 틈만 나면 이런 저런 화두를 던지며 루시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옆에서 듣고 있자면 다소 난해한 이야기도 많아서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뭐, 여전히 루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낮잠으로 보내고, 틈만 나면 캠프 일을 하고 있는 나한테 다가와서 추근덕 대거나 근처 적당한 나무 등걸에 앉아서 발을 휘적거리는 건 마찬가지다. 사람 본성,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원에서의 일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단순한 무력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힘을 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해질녘에 홀로 높다란 나무에 앉아 저무는 태양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정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타냐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옷장 좀 빌릴게요.”
한 번씩 심심하면 옷장 속에서 무릎을 안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는 타냐는, 학생회 업무가 과중될 때마다 집무실을 탈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 옷장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기 방에 있으면 금방 들키니 캠프로 도망오는 듯 했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허나,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제끼는 옷장이다. 그 속에 들어가 있다가 발견되는 일이 반복되자, 본인도 슬슬 멋쩍은 느낌이 들었는지 이리 저리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침대 밑에서 발견되거나, 2층 공방 탁자 밑, 목재 창고 구석 등… 뭔가 어둡고 음슴한 곳에서 발견되는 빈도가 높다.
그럴거면 그냥 당당히 모닥불 옆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더니 그 대답도 가관이다.
“그러면 금방 들켜서 잡혀 가… 아니, 뭐, 어쨌든요. 전 편해서 여기에 있는 거거든요. 그… 생각을 정리한다고 해야할까.”
“…”
“그리고 말했잖아요. 어둡고 차분하게 착 가라 앉은 공간에 있으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할까… 가슴이 상쾌해지니까…!”
하나 뿐인 동생이 어둠에 스며들어가고 있는데, 이대로 괜찮은가.
뭐, 사실 잠깐의 도피일 뿐이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없다. 대개는 해가 지기도 전에 직스가 찾아와서 거의 납치하다시피 타냐를 데려간다.
직스에게 잡혀갈 때에도 초탈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애시당초 잠깐 머리를 식히고 싶었을 뿐인 경우가 많은 듯 했다.
직스도 그 사실을 아는 듯 하니, 별다른 불만도 없이 타냐를 잡아가는 일의 반복을 할 뿐이다.
파란만장하구나… 학생회.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생각보다도 더 의외의 인물이 방문한 것이다.
“성창룡 벨브로크와 대현자 실베니아에 대한 정보를 지난 몇주 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찾아봤어요.”
찾아온 시각은 야심한 밤이었다.
예니카조차도 자러 들어가고, 홀로 모닥불을 지피며 앉아 있는 밤늦은 때였다.
난데 없이 나타난 그 소녀의 이름은… 아일라 트리스다.
의 메인 얼굴 마담으로 등장해, 주인공 테일리 맥로어의 옆에서 언제나 그를 지지해주던 소녀.
후일, 그 학술 의지와 배경 지식으로 벨브로크 토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대현자 실베니아의 뜻과 의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계승해 역사적으로 길이 이름이 남을 인물이 되는 소녀.
“에드 선배님.”
지난 번 엘테 상회 사건 때 난리를 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나는 사건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클레드릭 수도원에 갔으니, 당분간은 얼굴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일라가 모닥불 건너편에 와서 앉자, 그녀의 밤색 머리칼은 모닥불의 붉은 빛에 섞여 은은한 갈빛이 되었다.
아일라는 잠시 불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우리… 대화 좀 할까요.”
이날 밤, 아일라 트리스와 나누었던 대화는… 그나마 평화로웠던 이 한 달동안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엔딩 컷씬에서는 실베니아의 유지를 이은 대현자로서 학사에 인정을 받는 그녀다.
대현자 아일라 트리스. 언젠가 그 이름을 받아 학술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어찌됐건 학술 분야에서는 쉽게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야밤의 모닥불이 바람에 흔들리자, 나와 아일라의 그림자도 덩달아 일렁이고 있었다.
*― 쾅!
그렇게, 학사는 본격적으로 크레스톨 대축제의 준비 기간에 돌입했다. 축제 시작 한달 전의 일이었다.
제국 역사에서 가장 이름난 재상의 이름을 본따 만든 이 축제는 이 나라의 경사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이었다. 사실상 클로엘 1세 때부터 이어져온 축제이니만큼, 그 역사에 걸맞게 성대하게 열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클로엘 황제가 제국의 여러 기반 시설들을 돌며 격려하고, 각 영지나 시설에서 준비한 행사를 참관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경사이니만큼 당연히 어딜가나 시끌벅적하다.
“이번 크레스톨 대축제는 4년 전 축제와는 완전히 그 의미가 다르지. 황권 교체 시기에 벌어진 축제인데, 이 시기에 클로엘 황제께서 직접 각 영지와 시설들을 시찰하게 된다는 거야.”
마법부 소속인 내가 전투부의 훈련장까지 나온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큰 변동 없는 일과를 마친 뒤, 캠프로 향하는 동선을 평소랑 달리 잡았을 뿐이다.
원래 같으면 학사동을 쭉 가로질러 북쪽 대로로 진입한 다음, 북쪽숲 방향으로 뻗어있는 오솔길을 따라 가는 게 내 평소 동선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트릭스관 쪽에 들러서 학사 장학금 갱신을 해야 했으므로, 북동쪽 길을 따라 좀 돌아가는 루트를 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쭉 따라 돌다보면 보이는 곳이 야외에 준비된 전투부 A반 학생들의 개인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대련을 붙게 되었으니, 나도 양보할 마음은 없다.”
전투부 4학년 수석, 다이크 엘펠란.
사실상 민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쳐낸 머리는 날렵해 보인다.
허나,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통과 척 봐도 둔중한 야수가 떠오르는 몸집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든다. 구릿빛으로 탄 피부는 사람의 살갗인 주제에 강철처럼 단단해보였다.
매일 같이 개인 훈련장에서 단련을 반복하는 다이크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지 오래였다.
손에 휘감고 있는 붕대는 이미 너덜너덜 해져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몇 번을 반복해서 다시 갈아끼운 것인지, 조각난 붕대 조각이 훈련장 바닥에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바닥을 뒹구는 샌드백용 허수아비들은, 본디 저렇게 바닥을 뒹굴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다.
학생들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도록 몇 겹의 보호 마법을 덧대서 튼튼하게 만든 것이다. 무 뿌리 뽑히듯 자연스럽게 뽑혀나와 박살이 나 있는 상태로 나뒹굴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전력으로 내지른 주먹 한 방에 공기가 진동하고, 고함을 내지르며 내려친 발길질 한 번에 대지가 흔들린다.
어지간히 단련된 전투부 학생들조차도, 4학년 전체수석 다이크 엘펠란을 마주하고 있으면 다리를 떨고 만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야수를 마주한 기분.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마주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에 대해선 이야기 많이 들었다. 저번에 학기말 시험 때 내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도 했고 말이다. 필시 너도 피를 깎는 노력과 불타는 의지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겠지. 나는 너의 그 피나는 의지와 굳건한 정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만남은 우연이었다.
전투부 훈련장에서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그와 마주친 것도, 트릭스관으로 향하는 동선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이크 엘펠란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내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상의는 완전히 탈의한 상태다. 땀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대로 굳건하게 서서 팔짱을 낀 채, 다이크 엘펠란은 푹 고개를 숙이고서 이야기했다.
“허나,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있다. 대련장 위에서 만나게 된다면, 혹시라도 피차 간에 손대중을 해서 서로를 모욕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결투란 것은 숭고한 법이니까.”
“물론입니다. 다이크 선배님.”
졸업을 앞둔 최고 학년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실력을 인정 받은 자.
뿐만 아니라 4학년 사이에서도 두루 존경을 받는 자였다.
고위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마법부 수석 트레이시아나, ‘절삭의 시약’을 처음으로 조합해낸 연금부 수석 도로시… 그들조차도 다이크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다이크 엘펠란의 이름값은 드높았다.
해질녘의 대련장 구석에서, 우리는 그렇게 마주본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샐쭉거리며 웃음을 먼저 흘린 것은, 다이크 엘펠란이었다.
“크큭… 뭐 너무 진지하게 굴어서 좋을 것도 없을 일이지. 다만, 타냐 회장님의 오라비 되는 사람이라고 하길래 이 쪽에서도 그냥 보내기는 좀 그랬다. 갑작스럽게 아는 체 해서 미안하게 됐군, 에드 로스테일러. 그래도 인사는 나누는 게 피차 간의 예의에 맞겠지.”
“아닙니다. 제 동생이 학생회에서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쎄. 신세는 학생회 소속인 내가 더 많이 지고 있지. 네가 학생회 세력의 굳건함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거기다가, 항상 죽을 상에 온갖 싫은 소리는 다 하는 회장님일지언정, 막상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다 처리해내거든. 학생회 소속인 내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
학생회 소속 수석 행동위원 다이크 엘펠란.
주먹질 한 번에 돌벽을 부수고, 발길질 한 번으로 사람 뼈를 으깨버린다는 다이크조차도… 일단은 학생회원이니 타냐 로스테일러의 휘하에 있는 자였다.
틈만 나면 영혼 빠진 얼굴로 음습한 곳에 처박혀 있어서 뭔가 나사 빠진 소녀처럼 보이지만, 타냐도 일단은 그 정도 위치에 오른 실권자인 것이다.
“다만, 타냐 회장님이 좀 걱정되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야.”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제 축제 준비 기간에 돌입하면 학생회 업무도 배가될 거거든. 솔직히 타냐 회장님이 혼자서 감당할만한 업무량이 아니라고 본다.”
“학생회에 인력이 꽤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학생회장이 직접 판단하고, 결재를 내려줘야 할 일들이 워낙 많으니까… 보고 서류나 검토 서류의 양이 줄어들 일은 없을테지. 사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이크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제스처만으로 물어본 것이다.
직접적으로 학생회에 소속되어 일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다이크다. 거기다가, 나이도 좀 붙었고 성향도 외관과는 달리 차분해서… 문제의 원인을 직관적으로 통찰해낼 안목정도는 있는 느낌이다.
“제대로 된 행정 인력이 없어. 행동 위원이나 실측 위원, 진행 위원 같은 것이야 노련함이나 경험 같은 건 필요가 없지. 대부분은 지시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하니까.”
다이크는 자기가 박살낸 허수아비들을 정리하면서 이야기 했다.
“허나, 이런 관료 체계에서 정립되어 있는 보고 계통을 따라가면서도,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해줄 행정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사실 이건 어느 대를 불문하고 학생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렇습니까?”
“그래. 학생회 특성상 학생 신분이 아니면 가입할 수 없는데, 제 아무리 고위 교육을 받은 명문가 자제라 할지라도 현실 행정에 빠삭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 제 나름대로 노력하겠지만, 일원화된 보고 계통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기초적인 서류조차 범주별로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 행정 위원으로 자리를 꿰차고 있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생된 신분에 너무 많은 걸 요구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리 말하며, 다이크는 씁쓸한 듯 웃었다.
“그렇게 산처럼 쌓인 일거리도 결국 체계적이지 못한 일처리 과정의 결과물이다. 좀 더 체계적인 행정 위원을 데리고 있다면 업무 부담도 많이 줄어들겠지. 직스가 힘내주고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다.”
“학사에는 고위직 관료의 아들 딸들도 좀 있지 않습니까? 그런 학생들한테 접촉해보진 않으셨습니까?”
“행정 처리를 할 줄 아는 학생이라는 게 얼마나 귀한 몸인지 알고 있나? 어지간하면 다들 교수진이 데리고 있지. 학생회 쪽으로 넘겨 주진 않아.”
가문에서부터 이런 저런 관료 사회의 업무 처리를 어깨 너머로 배운 자들은 모두 자기 휘하에 꽉 잡아둔 채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내각을 구성해야 했던 학생회 입장에서는 늘 골치를 썩는 문제인 것이다.
“흐음…”
내가 문득 턱을 쓸며 고민에 빠져있자, 다이크가 재밌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 했다.
“왜? 괜찮은 사람이라도 소개시켜줄 의향이 있나?”
“떠오르는 사람은 몇 있긴 합니다만…”
“관둬. 어지간한 사람은 다 학생회 차원에서 접근해봤어.”
“흠….”
나는 그렇게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었다.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
“이, 이게 다 뭐야… 에드…?”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 소속된 이름난 수석 조교.
고풍스러운 연회색 머리칼과, 귀족적인 외관 때문에 학사 학생들은 그녀를 귀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는 명실상부한 평민이다.
학비가 없어 학사 장학생을 하고, 식비가 모자라 야채 껍질을 뜯어먹는 궁상 맞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찌됐든 외관 만큼은 깔끔하고 품위있게 유지해내고 있는 소녀인 것이다.
“보고 있는 그대로다…”
“이게 다… 업무 보고 서류라고…?”
멋쩍은 얼굴로 회장석에 앉아 있는 타냐와, 집무실 구석에서 롱소드를 닦고 있는 직스.
그 앞에서 높디 높은 서류의 탑을 보고 있던 아니스 헤일란은…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스 선배님. 내각 구성 때는 몇 번이고 부탁 드려도 거절 하셨는데, 이렇게 오벨관까지 찾아와주실 줄은 몰랐네요.”
“아, 아니요… 타냐 회장님… 저… 사실… 제대로 한 번 더 거절하려고 온 거긴 한데…”
덱스관까지 쳐들어가서 아니스를 데려온 것이 방금 전 일이다.
학생 식당에서 풀을 씹어먹으면서 생활비를 계산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갑작스럽게 팔을 휙휙 잡아 끌면서 부탁이 있다고 하자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학생회 차원에서 몇 번이고 그녀를 영입하려 했지만, 학사 장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녀는 계속 거절 의사만 내비쳤다고 한다.
보아하니 서면으로만 의견을 주고 받았던 모양이지만, 직접 현장에 데려와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학사 장학생 활동을 오래 해봐서 알고 있다.
수석 조교 아니스 헤일란은… 일단 분위기로 밀어 붙이는 데에 약하다…! 그냥 밀어붙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나저나, 서류 범주화 작업은… 왜 안한 거죠…? 회장님.”
“네에…?”
“아니, 그… 이렇게 일괄적으로 회장님께 서류를 전달하는 식으로 업무 체계를 형성해놓는 것보다는, 각 요일 별로 일자를 맞춰서 처리할 업무의 범주를 정해놓는 게 더 효율적이잖아요? 예를 들면 월요일에는 세관 업무, 화요일에는 의전 업무, 수요일에는 학생 복지 업무… 이런 식으로…”
“…”
“그러면 업무 처리를 기다리는 보고자 입장에서도 자기가 올린 서류에 대한 결재가 언제 내려올지 예측하기가 편해지니까, 업무가 더 효율화 되지 않을까요…?”
“……”
타냐는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사실 애초에 그런 건 타냐의 업무가 아니다.
타냐는 조직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운전자의 입장이지, 자동차의 부품 하나 하나를 갈고 닦는 엔지니어의 입장은 아니다.
“그리고… 왜 서류 전체에 대한 결재 권한을 회장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거에요?”
“네에…? 그야… 제가 학생회 모든 일의 최종 결재권자니까…”
“예산 편성안이나 방침 설정 같은 중요한 일은 회장님의 검토가 필수지만… 단순한 비품 매입이나 활동비 산정 같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안건은 회장님한테 오기 전에 중간 관리자가 일을 종결지을 수 있도록 전결(專決) 권한을 주는 게 나아요… 안 그러면, 업무량이 감당이 안되실텐데…”
“허억…”
“중간 관리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고, 서류는 범주화해서 뭉퉁그려서 처리하시는 게 좋아요. 특히 비슷한 안건은 하루만에 모아서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고, 지시 받는 입장에서도 직관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에요.”
쌓여 있는 서류 중 대충 튀어나온 몇 개만 보고도 아니스는 휙휙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이 폐부를 찌르는 것들이라, 타냐는 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조직을 이끄는 것과, 조직 체계를 관리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허억…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습관적으로 그만…”
“아니스 선배님.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신 거에요!”
타냐는 눈물이 글썽이면서 아니스의 양손을 확 맞잡았다.
그 위엄 넘치고 이름난 학생회장이라는 작자가 이런 꼴을 보이니, 아니스도 썩 당황스러웠는지 식은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 아니. 타냐 회장님. 저는 학사 장학생 일이…”
“글록트 장학 재단에 학생 회장 이름으로 추천서 넣어드릴게요!”
“그래도 생활비 생각하면 차라리 학사 쪽 소속으로 있는게…”
“로스테일러 기금에서 사적으로 따로 빼서 생활비 지원도 해드릴게요!”
“사적인 지원금을 보고 소속을 옮기는 건 너무 불안정한 선택이잖아요…!”
아니스의 말은 정확했다. 그러나, 타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깃펜을 들어서 서류에 슥슥 글씨를 써내려갔다.
“액수는… 이 정도…!”
“…”
“…”
아니스는 문득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속삭이듯 이야기 했다.
“거… 거절할만한 액수가 아니잖아…! 이게 뭐야, 에드!”
“일거리를 물어다 줘도 불만이냐…”
“아, 아니… 그렇긴 한데…”
타냐가 써내려간 숫자의 길이가 심상치 않다.
아니스는 혼미한 표정으로, 길게 이어진 잉크의 행렬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학생 회동의 연단에 나온 타냐의 얼굴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뭔가 이전보다 흐물흐물해진 인상으로, 세상 행복하다는 듯이 반짝반짝 미소를 빛내고 있는 모습. 주변에는 화사한 꽃이라도 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걸어다니던 시체 같은 타냐 학생회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혹 연애라도 시작하셨나.
그런 핑크빛 구설수가 여학생들 사이에 돌았지만…
진실은… 좀 더 현실에 찌들어 있는 것이었다.
*오필리스관 메이드에게 외투를 건네고, 다이크 엘펠란은 개인실에 들어와 앉았다.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기숙사인 만큼 공간 활용도 널찍하게 잘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벽에 걸린 풍경화들. 그 사이를 거닐고 들어와 탁자에 앉은 뒤, 길게 한숨을 푹 쉬었다.
어두운 개인실에 거구의 사내가 내뱉은 한숨이 깔린다. 오늘 훈련도 힘들었지만, 이대로 나태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본다.
벽에는 본가인 엘펠란 가문에서 보낸, 셀라하 황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꼭 방에 걸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학생회와 황실, 그리고 가문.
얽히고 설킨 의견 대립의 한 가운데에서, 다이크 엘펠란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하나. 끝 없는 단련 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단련 밖에 모르는 바보로 살 수는 없다.
다이크는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현 실베니아 아카데미 4학년은, 그야말로 최악의 세대로 정평이 난 곳이다.
온갖 천재들이 난무하는 다른 학년들 때문에, 다이크의 세대는 ‘노력하는 둔재들’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노력하는 둔재들.
칭찬과 욕이 절반씩 섞여있는 그 평가가 떠오르면, 다이크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바닥을 기는 재능을 이끌고, 어떻게든 뼈를 깎는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 노력이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러웠던 것인지를 4학년 학생들은 모두 안다. 그래서 다이크 엘펠란에게 모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렇다할 천부적인 능력 없이, 오로지 뼈를 깎는 의지 하나만으로 정점의 자리에 오른 다이크를 그렇게 불렀다. ‘둔재들의 왕’이라고.
왕이라는 호칭이 이리 불명예스러울 수 있을까. 허나, 다이크는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왕좌에 앉은 것처럼, 방 구석의 목재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그가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 본다.
셀라하 황녀가 온다.
엘펠란 가문이 섬기는 그 고귀한 황녀…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 실베니아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