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11)
자제하세요, 예니카 씨 (2)
?이튿날 아침, 예니카가 거주하는 오두막은 정령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자고 일어나면 페니아 황녀가 머무르고 있는 황족 숙소에 같이 가야하니 몸 단장을 제대로 하고 나와라.
그리 말한 것은 분명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몸치장에 시간을 쓸 줄은 몰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입는 셔츠에다가 적갈색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을 뿐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꽤 고급품인지라 어디가서 자리에 안 맞는다는 소리를 들을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평민인 예니카에게는 황족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어울리는 복식이라는 게 썩 부담스러운 것인지 아침 내내 거울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구구절절 이야기 해봤자 크 의미는 없을 듯 했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서 멍하니 활을 더 다듬고 있노라면 오두막 안 쪽에서 어떤 색깔 스커트가 더 나을지, 머리핀은 어느게 나을지 정령들과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다 대고 닦달을 하는 것도 본인한테는 부담일테니 나는 시간이 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이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15분 쯤은 더 지나서야, 예니카는 평소와는 다른 푸르스름한 스커트에 호박색 블라우스를 걸쳐입고 나온 것이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코스모스 무늬가 새겨진 숄이 가냘픈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감꽃 머리핀과 더불어서, 예쁘게 땋아내린 머리칼이 인상깊다. 굳이 메이드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니카는 뒷머리를 좌우 대칭이 딱 맞도록 반묶음으로 올려 정리하고, 옆머리도 깔끔하게 땋을 줄 알았다.
사실 손재주는 어디가서 꿀릴 소녀가 아니다. 치장 또한 마찬가지다.
“어, 어때 에드?! 검사해줘!”
“…검사?”
“이 차림이면 황족 숙소에 가더라도 문전박대 당하진 않겠지?! 거, 거기는 드레스 코드가 어떤 느낌이야?! 이건 너무 힘준 것 같아? 여, 역시 머리 장식 같은 건 빼버릴까?!”
아무래도 좋다, 그냥 대충 입고 가자.
라는 말은 오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검사라고 말하자니 좀 이상하긴 한데… 뭐 어쨌든 잘 어울린다. 귀부인 같네, 예니카.”
“귀부인!”
그 석자 단어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인지, 예니카는 문득 히끅대고서는 조신하게 팔을 앞에 모으고 얼른 목소리 톤을 확 낮췄다.
“그, 그래애. 맞아. 황족 숙소 같은 곳을 갈 거면 이렇게 경박하게 방방 뛰는 듯한 목소리를 내면 안되겠지…”
“예니카…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구는 게 제일 문제야.. 목소리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니야. 이렇게 뭐라고 해야할까, 차분하게 한 톤 낮춘 목소리로 이야기 할게.”
뭔가 팍 가라앉은 것이 평소 예니카와는 많이 다른 듯한 느낌이 났다.
“역시 지팡이는 두고 가는 게 맞을까?!”
단 두 마디만에 톤이 휙휙 높아지는 것을 보아하면 부질 없는 일이긴 했지만…
*황족 숙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생활동이나 교수동과는 달리 꽤 멀리 떨어져있다. 아켄섬 서쪽 해안 절벽지대에 별세계처럼 꾸며놓은 공간인데다, 평소에 입장이 허용된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한 장소이니만큼 의문에 휩싸인 곳이다.
생활동 마법용품 거래지구 끄트머리에서 서쪽을 멀찍이 바라보면 황족 숙소 건물의 끄트머리가 저 멀리 슬쩍 보이긴 하는데, 일반 학생들이 볼 수 있는 이 건물의 모습은 그게 전부다.
가끔 운동하려고 섬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거나, 산책하는 학생들이 길을 잘못들어서 황족 숙소 쪽으로 접근하면 그 뒤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선다. 덕분에 이 황족 숙소는 소문만 무성한 것이다.
나는 물론 이 황족 숙소에 꽤 많이 방문해 보았다. 페니아 황녀가 사적으로 불러낸 전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니카 입장에서는 소문의 황족 숙소를 방문한다는 것이 썩 긴장되는 일인 것인지, 숙소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고 있으면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다.
“평소에는 못가는 곳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뭐랄까… 엄청 일탈을 하는 것 같아.”
머뭇거리면서 진입로를 걷는 모습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가만히 나둬도 재밌는 일이겠지만, 사람이 곤란해하는 걸 보면서 시시덕 대는 악취미는 없다.
허나, 긴장을 풀어줄만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므로… 나는 지금 시간을 틈타 어제 결심해 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예니카. 그러고보면 너한테 꼭 알려줘야 할 게 있었지.”
“응? 나?”
“응. 내가 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유 말이다.”
나는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별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듯한 자세로 이야기 했다.
사실은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티를 팍팍 내면서 이야기하면 예니카는 또 경청하겠답시고 경건하게 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나치게 의미 부여해 가며 무겁게 논하고 싶진 않으므로, 황족 숙소로 향하는 길에 은근하게 이야기해줄 요량이었다.
별 대단한 것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지는 듯한 어조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다 죽거든.”
“…”
“…”
…사실 부질 없는 노력이긴 하다.
아무리 부담주고 싶지 않다고 몸을 비틀어댄들, 아무런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을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심적 부담감 같은 것 운운하며 상대를 배려할만한 상황도 아니다.
하루 하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끝에 참사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한적한 캠프의 불 옆에 앉아, 평화로운 북쪽숲의 향취에 취해있다보면 잊어버릴 뻔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미래가 성큼성큼 다가 오고 있음을 주지해야만 한다.
하늘을 뒤덮으며 포효하던 용의 형상을 기억한다.
특히 예니카는 벨브로크의 어금니를 아켄섬 밖으로 운반하기 위해 도와줬던 소녀다. 함께 텔로스의 사도와 치고박고 싸우고, 그 대가로 며칠동안 시력을 잃은 채 며칠동안 앓아누웠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 날 치고박고 싸웠던 이유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예니카를 납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족 숙소로 향하는 고즈넉한 길.
나와 예니카가 주고 받는 대화는, 그 평화로워 보이는 오솔길과는 다르게 꽤나 살벌했던 것이다.
죽음과 미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억지로 밝게 해보려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 있습니까?”
호위대장 클레르가 황족 숙소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황가의 사람이 머무는 황족 숙소는 오필리스관만큼 거대하진 않다. 다만, 오필리스관은 귀빈 수십명이 다같이 쓰는 공동 숙소고, 황족 숙소는 단 한 명만을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제 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귀빈이라 할지라도 그 자에게 허락된 공간은 오필리스관의 개인실 하나일 뿐이다.
성녀 클라리스조차도 가장 좋은 방이긴 하지만, 거처로서는 딱 하나의 방만 허락되었다.
아예 호화로운 건물 하나를 새로 지어서 생활하고 있는 페니아 황녀가 얼마나 특별대우 받고 있는 것인지 여실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아, 아뇨…”
클레르는 예니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울먹울먹 거리는 느낌이 남아있는 듯한 얼굴에 클레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오면서 우울한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클레르를 만류하고, 길을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다. 클레르는 고개를 끄덕인 채로 우리를 황녀의 방까지 안내했다.
기본적으로 가운데 정원을 끼고 두 개의 동으로 되어 있는 황족 숙소는, 왼쪽 건물은 사용인들이 쓰고 오른쪽 건물을 페니아 황녀가 쓴다.
절벽 쪽에 붙어있는 형태로 깔끔하게 올라선 대리석 건물. 1층 로비를 지나 저번에 왔던 접견실 쪽으로 향할 줄 알았으나, 클레르는 그 문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 커다란 목재문 앞까지 우리를 데려갔다.
페니아 황녀가 쓰고 있는 개인실이다. 그 입구부터가 화려하고 굳건하다.
에서는 개별 이벤트 같은 것으로 페니아 황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몇 번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정말 아켄섬 구석에, 비밀스러운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입장 조건도 워낙 복잡한 곳이었다.
“그런데… 에드는 엮인 일이 많다고 생각하더라도… 저는 왜 부르신 걸까요?”
예니카는 페니아 황녀를 접견하기 전에 클레르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건…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 이야기하고, 클레르가 문을 열어주자 페니아 황녀의 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테라스 쪽에 이 방의 주인이 보였다.
교수동에서 수업을 받을 때와는 역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교수동 내부에서는 배움의 땅 실베니아의 뜻에 따라 되도록 특별 대우 받는 일 없이 생활하는 그녀지만… 교수동 밖으로 나오면 그녀는 고귀한 황녀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휘항찬란한 방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있던 페니아 황녀는… 나와 예니카의 얼굴을 보자 넌지시 인사를 보냈다.
“어서오세요, 에드. 그리고 예니카.”
페니아 황녀는 테라스 쪽에 넓게 펼쳐진 목재 테이블에 앉아, 볕을 쬐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그시 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이야기 했다.
“앉으세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요. 아마도 두 분도 관심이 있으실 거에요.”
“…”
“슬슬 황권 경쟁에 대해 진지하게 논해야할 때가 되었거든요.”
*
“셀라하 언니가 집권하면 로스테일러 가문은 무사하지 못할 거에요. 운이 좋으면 변방 귀족으로 물러나서 천천히 몰락해갈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죄인 딱지를 단 채로 멸문 당할지도 모를 일이죠.”
고풍스러운 백금발을 늘어뜨리고, 편안한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채로 페니아 황녀는 넌지시 이야기 했다.
“학생회장 타냐와는 이야기가 끝났어요. 저는 로스테일러 가문을 옹호하기로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타냐 회장과는 면식이 꽤 오래 전부터 있었거든요. 학생회장이 되기도 전부터 황족 숙소에 머무르기도 했고, 애초에 그녀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어요.”
사용인들이 차를 내오자, 예니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대며 받아들려고 하기에 내가 만류했다.
이럴 때에는 가만히 있어주는게 상대 입장에서도 더 편하다.
거의 대접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예니카는 불편한 듯이 휙휙 몸을 돌렸지만, 나는 예니카의 어깨를 눌러주는 것으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도요.”
“…”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는 이야기 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로스테일러 가문은 오랫동안 황실 내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던 곳이니, 그 잔류 세력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고… 또, 아직은 그나마 기득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어요.”
페니아 황녀는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거국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무른 인간은 아니다.
“로스테일러의 이름이 아직 남아 있는 한, 그 잔류 세력을 그대로 흡수하면 내정 지식이 남아 있는 관료들까지 흡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로스테일러 가문을 옹호하는 거에요.”
페니아 황녀는 확실하게 이야기 해두었다.
오히려 그렇게 꿀리는 부분 없이 확실하게 이야기 해두는 것이, 그녀 다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당신들 로스테일러 남매가… 크레핀과 같은 미치광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요. 이 실베니아에 와서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에요. 당신들이 가문의 방향타를 쥐게 되면, 적어도 크레핀이 이끌던 때와는 많이 다르겠죠.”
허나, 오로지 그런 타산적인 이유만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게 페니아 황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자애의 황녀라는 이명이 붙어있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정치적 이득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면 취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람을 가늠하는 것은 직접 이 두눈으로 마주 보는 게 아니면 힘들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취하려거든 결국 발로 뛰는 수밖에 없죠.”
셀라하 황녀, 페르시카 황녀와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부분이었다.
셀라하 황녀는 신분과 권위를 본다.
페르시카 황녀는 능력과 실리를 본다.
그리고 페니아 황녀는… 사람을 본다.
페니아 황녀가 우리를 불러내서 하고 싶은 말은 이제야 튀어나왔다.
“크레스톨 대축제 결투회에서 다이크 엘펠란을 이겨주세요.”
페니아 황녀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차분하게 이야기 했다.
거기서 튀어나온 인물의 이름은 의외의 것이었다.
“다이크 선배님 말입니까? 둘이 맞붙게 될 거란 소식은 이미 전해들었습니다. 본인도 몇 번 만나 보았고요.”
“그 다이크를 배출한 엘펠란 가문은 셀라하 언니를 가장 깊게 믿고 따르는 곳이에요. 사실 셀라하 언니가 회유 하려고 힘쓰지 않았어도, 셀라하 언니 쪽으로 붙었을 세력이죠.”
다이크 본인은 엘펠란 가문에 그렇게 큰 정을 두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적어도 자기를 먹여주고 키워준 곳이기에, 최소한의 예를 다하고 있는 것 뿐.
권왕 다이크 엘펠란은 어쨌든 가문의 뜻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받은 것을 잊지않는 성격 탓이다.
“대축제 결투회를 우승하고, 그 영광을 셀라하 언니에게 돌림으로써 그 관계를 굳건히 할 생각이겠죠. 축제 때가 되면 아바마마께서도 아켄섬에 와계실테고, 페르시카 언니는 잘 모르겠지만… 셀라하 언니는 이런 자리엔 절대 빠지지 않으니까요.”
“그렇게까지 중요한 자리일거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애초에 4년에 한 번 밖에 안 열리는 국가적 경사니까요. 여러 영지를 돌겠지만, 그래도 제국의 미래 인재가 모여 있는 이 실베니아에 들르지 않을 순 없겠죠.”
페니아 황녀는 백금발 머리칼을 스윽 쓸어내렸다. 점잖게 내려오는 머리칼 사이로 빠져나온 손가락 마디가 하얗다 못해 창백할 수준이었다.
“결투회에서 우승하고 저를 추켜세워달란 말은 하지도 않을게요. 적어도 셀라하 언니와 엘펠란 가문이 더 굳건해지지 않도록 저지해주세요.”
“그게 그렇게까지 황권 경쟁에 영향이 큰 변수입니까?”
“세워놓은 계획이 있어요. 엘펠란 가문은… 셀라하 언니를 무너뜨리는 초석이 될 거에요.”
페니아 황녀는 어딘가 당당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온갖 협잡질과 물밑싸움.
이제는, 본인도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펠란 가문과 셀라하 언니 사이를 찢어놓아야 해요. 그 시작이.. 이번 결투회고요.”
그러나, 억지로 정당화 하지는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발을 담글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타냐가 셀라하 황녀의 목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페니아 황녀 또한 셀라하 황녀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알고 계시군요.”
“절 도와주세요. 셀라하 언니의 집권은, 로스테일러 가문 입장에서도 좋을 게 전혀 없는 일이니까.”
“그… 다이크 선배님이라면… 4학년 전투부 수석이시잖아요?”
예니카가 걱정스러운 듯이 이야기 했다.
괜시리 부담스러운 것인지, 사용인들이 내와준 다과를 한 입도 먹지 않은 그 소녀는… 불안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소문은 들었어요. 4학년 선배들은 모두 다이크 선배님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요.”
“맞아요, 예니카 페일로버. 당신이 수석이던 시절에도 3학년 학생들의 존경을 두루 받았지만, 다이크 엘펠란은 그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기운이 있어요. 아예… 정신적 지주에 가까운 느낌이죠.”
소문은 이미 무성했다.
다이크 엘펠란은 천재들 사이에서 홀로서기한 둔재다.
전투부 소속 학생들 중에서도 거의 꼴찌로 입학해서, 그 어떠한 재능도 없이 근성과 노력만으로 수석에 오른 자다.
빛 보지 못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자들이 다이크에게 경의를 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벽에 부딪혀서 낙오되어 본 경험이 있는 모든 자들의 구세주이다. 그의 존재가 곧 절망감으로부터 정신을 지지해주는 위로인 것이다.
혹자들은 수석의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천부적인 재능의 상징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허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다이크 엘펠란이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한 가지 제가 확신을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 해두었다.
“…제가 이깁니다.”
확신을 넘어선 당연시.
페니아는 단언하듯이 내뱉는 내 말에, 잠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수습했다.
“원하신다면, 아예 압도적인 차이로 이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 학년의 수석 자리를 차지한 자다. 그것도 가장 고학년이다.
그리 쉽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나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페니아 황녀를 보며, 나는 넌지시 이야기 했다.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 제게도 일러 주십시오.”
*이 조막만한 아켄섬에 천재가 너무 많다.
오벨관의 대련장에 가만히 앉아, 다이크 엘펠란은 피식 웃으며 그런 독백을 했다.
이 아카데미에도 거의 4년이나 다녔다.
슬슬 졸업을 앞둔 나이가 되었음에도, 제대로 된 경지에 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북이처럼 전사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보면, 제 등을 치고 추월해 나가는 천재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은 쭉쭉 뻗은 길을 땀을 뻘뻘 흘리고 겨우 걷고 있건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쑥쑥 뻗어나가는 그들의 천부적인 능력엔 불합리함 마저도 느껴지고 만다.
모두 먼저 보내준다. 앞질러 나가는 자들의 속도에 허탈감이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다이크 엘펠란은 그냥 그들의 꽁무니를 쳐다보며 걸어나간다.
그렇게 거북이처럼 지지부진 나아가고 있다보면, 길가에 지쳐서 쓰러져 있는 천재들의 모습이 보인다.
벽을 만나서 부딪히고, 쓰러져서, 여기가 제 능력의 끝이라고 비탄한 끝에 다른 길을 찾아 벗어나는 자들이 한가득이다.
다이크 엘펠란은 그런 천재들의 등을 밟아가며, 기어이 수석의 자리에 까지 올라왔다.
남들보단 늦을지언정, 막힌 벽은 모두 뚫어내며 왕좌에 앉았다.
기본적인 마력 감응 능력도 부실하다. 근력이나 골격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이름난 가문의 출신이긴 하나, 그 무능 때문에 수석 자리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았다.
교육조차도 거의 받지 못해, 글자를 뗀 건 열 살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가신들의 책을 하나 하나 읽어가며 밤새 독학으로 문자를 익혀낸 것이다.
실베니아에 와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마력감응을 밤을 새워가며 단련했다. 4학년이 되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버텨내며 마력을 단련했지만, 현재 시점에서도 일반적인 마법부 학생이 가지는 감응 능력의 십분의 일조차 손에 넣지 못했다.
적어도, 육체 전투에 써먹을 마력만큼은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거면 됐다.
그렇다고해서 신체적인 능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육중한 몸집에 우락부락한 근육이 잔뜩 솟아올라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극한까지 몸을 혹사시켜가며 단련을 한 결과물이다.
그가 쓰는 너클은 매번 피에 절여질 때까지 혹사당했다.
4년 동안 부서져서 새로 구해야만 하는 주먹 너클과 건틀릿의 개수가 200개가 넘어간다.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력과 단련만이 계속되는 삶이었을 터다.
결국 이 몸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후천적으로 취해낸 신체다. 강인한 근력과 거대한 몸집을 가지게 되었지만, 타고난 전투감각 만큼은 노력으로 취해낼 수 없었다.
몇 년을 단련한 다이크보다도, 단 1년간 체계적으로 전투를 배운 직스 에펠슈타인의 실전 감각이 훨씬 더 날카롭다.
느리고, 둔하고, 육중하다.
그것이 다이크 엘펠란이란 사내의 성장사였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다이크 선배님.”
그 피땀어린 노력은 학사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인정 받았다.
그 거만했던 1학년 전투부의 수석, 웨이드 캘러모어 마저도 한 번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실베니아 전투부 소속 학생들의 교류 대련회.
각 학년의 전투부 수석들이 모여, 학생들 앞에서 가볍게 대련을 한 번 치르는 작은 행사였다.
다이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련장에 나와 있는 수석 학생들을 보았다.
전투부의 1학년 수석 웨이드 캘러모어.
검술 명문가 캘러모어 가문의 지원을 잔뜩 받고 단련한데다, 구사하는 기술들은 이미 1학년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이 1학년일 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수석은커녕, 주먹을 제대로 내지르는 법조차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2학년 수석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그 소년은, 이미 지금 시점에서 다이크보다도 훨씬 강하다.
타고난 재능은 이미 신의 축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클레비어스 본인은 저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3학년 수석 드레이크 레이거스.
그 역시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천재다. 그가 다루는 활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롱소드를 다루는 기교의 정교함이 놀라운 수준인지라, 궁수일거라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였다.
여러 무기를 자유롭게 다루지만, 투척과 발사 무기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한 명중을 보장하는 그의 실력은… 레이거스 가문의 사냥꾼이라는 별칭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모두… 4학년이 되면 다이크 따위는 가볍게 재칠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저 학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선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퍽 스스로 우스웠다.
“한 수 배울 것 가지 있나. 나도 배우고자 대련하는 건데.”
다이크는 그 육중한 몸을 일으킨 채로, 낮고 웅장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슬슬 몸을 풀어야 할 시기이고 말이야.”
“…그러고보면, 에드 로스테일러와 대련이 잡히셨었지요.”
“그래, 3학년 마법부의 그 고위 귀족 도련님.”
다이크 엘펠란은 눈을 지그시 감고, 연습장에서 보았던 그 고풍스러운 금발 귀족의 모습을 떠올렸다. 심드렁한 표정. 세상 만사를 다 간파하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마법사 로브를 두른 채로… 당당히 서있던 그 사내의 전투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지겠지.”
그는, 천재들 중에서도 더 두드러지는 천재다.
본인은 본인 스스로를 노력가라고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진짜 노력가로서 일생을 살아온 자는 알 수 있다.
클레비어스가 눈을 내리깔며, 머뭇머뭇 이야기 했다.
“다이크 선배님이… 지신다고요…?”
“그래. 놈은 이미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경지에 이르렀어.”
다이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실베니아의 수석 자리를 취하고 나서야, 자랑스러운 엘펠란 가문의 일원이라며 온갖 지원을 쏟아낸 가신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자신이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준 가문이니, 의리를 다 했다.
허나, 이번 대련회에서 우승해서 셀라하 황녀의 이름을 드높이라는 가문의 편지에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가문이 괘씸해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신경 쓸 게 많은 가신들이 이해타산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다이크도 잘 이해하고 있다.
단지, 에드 로스테일러를 이길 수 있을거란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패배하시면… 가문에서는…”
“그걸 왜 네가 신경쓰나,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명문 무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클레비어스이기에, 다이크에게 걱정의 말을 내비쳤다. 허나 다이크는 피식 웃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가 루시 메이릴에게 달려들었던 건, 네가 이길 것 같아서였나?”
다이크가 그리 이야기 하자, 클레비어스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라면 이해하고 있겠지.”
웨이드와 드레이크는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클레비어스는 다이크가 이야기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오필리스관 입구.
피투성이가 된 채로, 루시 메이릴에게 검을 쥐고 달려들었던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다이크 엘펠란은, 그 투기를 이해하고 있는 자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패배할 걸 알아도 달려들어야 할 때가 있다. 당연히 있는 힘껏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하지.”
다이크는 피식 웃으면서, 대련장에 똑바로 섰다. 도망치는 기색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다.
너클을 꽉 쥐면서, 세 학생들을 한 번에 상대하겠다는 듯이 똑바로 몸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전투부 학생들에게 이제와서 그 이름을 알리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학사에서 이르기를, 둔재들의 왕.
권왕 다이크 엘펠란이다.
*
“그, 그런데… 페니아 황녀님… 외람된 말이긴 한데요…”
한창 황권 경쟁과 셀라하 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 앉아있던 예니카가 끼어들어왔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한참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던 그녀다.
“저… 결국 저는… 왜 부르신 거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기만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결국 예니카는 참지 못하고 먼저 물어왔다.
그렇다. 이번 결투회 일은 예니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아 황녀는 예니카까지 직접 황족 숙소로 불러들였다.
이번 건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아니,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셀라하 언니는 신분과 위엄, 권위, 기품 따위를 가장 제일로 치는 분이에요. 저랑은… 의견이 많이 다르시죠.”
“그, 그러신가요…”
“당연히 귀족가 사람들과도 많이 엮인 만큼, 자기 세력의 대표로 세울만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름만 말해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신분의 사람들이 셀라하 언니를 지지하며 나오겠죠.”
그런 쪽으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셀라하 황녀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제 입장에서도, 제 세력의 얼굴이 되어줄만한 사람이 필요해요.”
“에드… 말이에요…?”
“에드 로스테일러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말했듯이 기득 세력이자 고위 귀족 출신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잖아요.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출신이 출신이니까.”
페니아 황녀는 찻잔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평민 출신이고,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정점에 올라서본 적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제가 원하고 기용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들인 거에요.”
예니카는 멍하게 페니아 황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본인 이야기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까.
“예니카 페일로버.”
페니아 황녀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이번에는 확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했다.
“… 당신은, 좀 더 출세해야 해요.”
“…”
예니카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잠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네에?”
사실 대답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