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
글라스칸 토벌전 (2)
이변은 이튿날 저녁에 일어났다.
교수동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 총알처럼 캠프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나다.
평소엔 저녁 식사 때 즈음 되면 이미 교수동을 떠나고 없지만, 오늘은 꽤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제대로 된 목재 오두막을 지어서 좀 더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구축하자는 목표가 생겼다.
따라서 학생 도서관에서 기초적인 설계 자료 같은 것을 눈에 익히고, 필요한 재료가 뭐가 있을지, 나무는 어떻게 다듬어야할지 같은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뭐, 당장에 식량이 급한 상황은 아니고, 주말을 앞둔 시기라 시급히 처리해야할 일이나 과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좀 늦게까지 교수동에 남아 있어도 괜찮겠지.
일처리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지지부진하게 끌어서 좋을 건 없다. 학생 도서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도 시간이 들어간다.
한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짜서 생활하는 내 입장에선, 일단 한 번 학생 도서관에 눌러 앉기로 마음먹었으면 계획한 일들을 한 번에 다 처리해버리는 게 낫다.
애초에 북쪽 숲과 학생 도서관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자주 자주 들르기가 부담스럽다.
대여할 수 있는 책의 권수에는 제한이 있고, 학업 때문에 이미 한계까지 활용한 상태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무조건 필요한 정보는 다 알아가야 한다.
그렇게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책을 잔뜩 쌓아놓고 미친 듯이 탐독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폐관 시간이에요. 정말 열심히 공부하시네요.”
푸근한 인상의 사서반 학생이 다가와서 내게 알렸다. 책에 둘러싸여서 정신없이 집중하고 있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가 앉은 자리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텅텅 비어있었다.
저녁도 굶고 바로 와서 눌러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폐관시간이라니.
나는 고개를 들고 내게 말을 건 학생을 쳐다보았다. 차분하고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고 있는 소녀의 가슴께를 쳐다보면, 푸른색 배지가 단정히 매달려있다. 1학년이라는 뜻. 요컨대 편하게 말을 놓아도 되는 상대라는 것이다.
“헉, 미안하게 됐네.”
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산처럼 책을 쌓아놓고 폐관 시간 직전까지 눌러붙어 있으면, 내가 간 뒤 이 책을 다 정리해놓아야 하는 사서 입장에서는 퍽 고역이다.
“좀 일찍 말했으면 미리 마무리 했을 텐데.”
“아니요. 괜찮아요. 완전히 집중하고 계셔서, 오히려 제 쪽에서 말을 붙이기 죄송스럽더라구요.”
웨이브 진 연분홍빛 머릿결,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어디서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든다.
실베니아 교수동 학생 도서관의 견습 사서, 이름이… 모카? 엘카? 델카? 뭐, 뭐였더라… 분명 시나리오에서 메인 인물까지는 아니었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라던데, 간식만 먹고 앉아 있으니 옆구리 살만 찌고… 어머, 너무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나도 참.”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얼른 책을 덮었다.
오늘 내로 오두막 건설을 위한 밑작업에 착수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리 되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선배님 같은 분을 보면 저도 학업의욕이 고취되는 걸요. 자주 오시진 않지만, 들를 때마다 정말 책에 빠지듯이 집중하는 모습은 존경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소녀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엘카 이슬란이라고 해요.”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꽤 오래 전부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에드.”
“…”
이름을 대자 삽시간에 굳어버리는 반응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서 좀 식상할 지경이다.
입학시험 사건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그놈의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소문은 끊이질 않는다. 최대한 조용히, 수업만 듣고 내 할 일만 하면서 사는데도 그 악명은 잦아들 기색이 없다.
대체 얼마나 거만하고 밉상이었으면 이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만다.
애초에 소문이라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는 잘 안 흘러가는 주제에, 나쁜 방향으로는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훌훌 잘 굴러가는 법이니..
그런 소문 하나하나에 일일이 마음 상하고 기분 나빠할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지만, 종종 저런 반응을 보면 에휴 하고 한숨을 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조용히 내 할 일만 하고, 학업에 성실히 임하고,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노력하다보면 평가가 일변하는 계기가 올 때도 있는 것이다.
“소문이랑은 많이 다르시네요.”
“소문?”
“아니, 음… 너무 이상하게 안 보셨으면 좋겠는데..”
소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도 영 촌스럽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일단 밤이 늦은 모양이니 빨리 캠프로 돌아가기나 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상대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오는 것이다.
“저는 견습 사서다 보니까, 방과 후에는 대개 여기서 시간을 보내거든요. 며칠에 한 번씩 원소학 서적 같은 거 많이 빌려 가시죠?”
“…”
“몇 백 페이지 되는 책 열 몇 권을 며칠만에 다 읽고 반납하시거나, 앉은 자리에서 대여섯 권씩 탐독하시고, 뭐 그런 모습을 보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젠체한다는 소문이라는 것도 사실은 뜬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앗, 기, 기분 나빴으면 죄송해요.”
소녀는 그렇게 쭈뼛대면서 이야기하고는 얼른 책들을 집어 드는 것이다.
“어, 어쨌든 저도 얼른 정리하고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니…. 몸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렇게 다급히 이야기하며, 소녀는 얼른 책장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도서관의 책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 내렸다.
*
메인 시나리오에 속하지 않은 채, 변두리 속에 산다는 건 참 고달픈 일이구만.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항상 받아들이기만 해야하는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익, 차!”
책장에 깔려서 바둥대던 사서를 끌어낸 다음, 대충 짐짝처럼 안아 들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교수동 전체에 울려 퍼지더니, 엄청난 떨림이 학생 도서관 건물 전체를 덮친 것이 15분 전.
그냥 지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책장들은 다 쓰러지고 책들은 바닥에 구르고 있으며, 열람 기재들이나 소모품들도 죄다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비싼 마도구들도 다 박살나고, 광원을 담당하는 수정구, 촛불들도 다 아작이 나서 내부는 어둠 그 자체였다.
“야.”
“으에-.”
사서는 정신을 잃었는지 혼미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고민을 좀 했다. 분명 기억에 남지는 않는 녀석인데, 어디서 본 거 같기는 한 묘한 느낌이다. 뭐, 그토록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을 플레이 해댔던 내가 기억을 못한다면 큰 의미는 없겠지.
시간은 얼추 9시가 넘어갔을 테고, 내부에는 광원이랄 것이 없다.
그러나 열람실 내부는 은은한 보랏빛이 감돌아, 암순응이 끝나지 않은 두 눈으로도 얼추 내부 구조가 보일 정도다.
그 빛의 근원이 어디인가 하고 살펴보면, 놀랍게도 창문이다.
나는 그대로 창가 쪽으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이 학생 도서관은 교수동 외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해 있으므로, 그럭저럭 교수동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올라온 불그스름한 빛의 기둥. 그것은 교수동 상공을 똑바로 가로질러, 교수동 전체를 휘감는 공간 봉인의 결계식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지진은 분명 저 대규모 공간 봉인 마법의 여파일 것이다.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뻗어져나온 것을 보면 확실하다.
“음… 시기가 좀 빠른 거 아닌가…?”
어쨌든 당황하는 일은 없다.
비록 에드 로스테일러의 구더기 같은 몸뚱아리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 처지지만, 이럴 때만큼은 내가 가진 정보우위가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음…”
나는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당황하고 나자빠질 정도의 일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꽤 있었다.
일단 저 공간 봉인 마법은 고위 어둠 정령 벨로스페르가 예니카를 매개로 발동한 것으로, 이 넓디넓은 교수동을 외부와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다. 고위 어둠 마법인 ‘그림자 장막’을 벨로스페르가 응용한 거지.
말이 좋아 고위 결계지, 시나리오 차원에서 보자면 그냥 무대 세팅이나 다름없다.
1막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글라스칸 토벌전, 비중 있는 1학년의 올스타 멤버들이 다 튀어나와 토벌대를 꾸려서 학생회관을 공격하는 에피소드.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시나리오가 성립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원소 정령 중에서도 가장 불가해하고 악명 높은 어둠 정령, 그것도 고위 정령 쯤 되면 학생 차원에서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다. 심지어 학생회관까지 점거해버린 상황이라면 당연히 교직원과 교수들이 튀어나와서 제압해야만 한다.
허나 그래서는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된다. 테일리가 검성식을 발현하는 에피소드가 되기 위해선, 필시 교직원과 교수들의 개입을 차단시켜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튀어나온 개념이 저 벨로스페르의 공간 봉인 마법일 것이다.
저 결계는 안쪽에서 걸어 잠긴 자물쇠와도 같아서, 내부에서 잠겨있단 사실을 확인하긴 쉬워도 밖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설령 이변을 눈치 챈다고 해도, 아직은 불가해한 어둠 정령의 결계식을 정석적인 방법으로 해제시키는 건 거의 한나절 가까이 시간을 잡아먹는다. 결국 재빠르게 돌파하려거든 압도적인 파괴력을 이용해 결계 째로 부수는 수밖에 없다.
저만한 규모의 결계에 그런 무식한 방법이 통하겠나 싶어도, 실베니아라는 이름답게 그게 가능한 인간들이 몇몇 존재하긴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교장 오벨만 불러와도 해석 작업 없이 결계를 통째로 부숴버릴 것이다.
그러나 고위 어둠 정령 벨로스페르는 교활하다.
이변이 발생한 것은 대부분의 교수들이 개인 연구실이나 자택으로 돌아가 있는 늦은 저녁 시간.
얼추 9시는 넘어간 지금쯤 되면, 교수동에 남아있는 교수는 거의 없다. 교수들의 개인 연구실은 그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모두 생활동 쪽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1막의 최종장인 이 글라스칸 토벌전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동이 트기 전, 예니카가 최고위 어둠 정령 글라스칸을 소환하기 전에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 핵심 골자다.
가만히 놔두면 금방 파훼될 결계식일지언정, 글라스칸 소환식이 발동되기 전까지만 시간을 끌어주면 그만인 것이다.
-‘드르륵’
나는 창문을 휙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뺐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직 예니카가 현현시킨 정령들이 길목을 점령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직 1페이즈에 진입도 안했구만.”
토벌대 소집 – 학생회관 탈환 – 네일관 회랑 전투 – 예니카 토벌 – 글라스칸 토벌 로 이어지는 보스전 흐름은 지금부터 시작해 동이 트기 전에 마무리 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진짜 개고생이다. 테일리에게는 기도라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일단 1페이즈부터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한다. 길목을 방해하는 정령들을 제압하면서, 교수동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1학년 에이스들을 한군데에 소집시키는 작업을 하다보면 진짜 똥개라도 된 기분이다.
“지금쯤이면 아일라랑 만났으려나.”
상황 파악은 끝났겠지.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정령식의 기운. 정령학에 조예가 있는 소꿉친구 아일라는 테일리에게 분명하게 상황을 일러줄 것이다.
지금부터 학생들끼리라도 힘을 모아 저 괴물 같은 고위 어둠 정령을 제압해야만 한다.
최고위 어둠 정령 글라스칸이 교수동에 강림이라도 하는 순간,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와줄 사람들을 학생 광장으로 불러 모은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빛은 이내 불길한 검붉은 색으로 그 색조를 바꾼다. 글라스칸 소환식을 위한 영창이 시작되었다. 그 영창을 행하는 주체가 누군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2학년생 모두의 동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염둥이 수석 정령사다.
“여기서 보니까 또 신박한 광경이네.”
테일리의 시점에서 저 결계식이 발현되는 순간을 볼 때는, 바로 학생회관 근처에 있었다.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결계식의 마나 흐름에 휩쓸려 날아가고, 이윽고 별 하나 없는 불길한 하늘을 불그스름한 장막이 뒤덮는다. 그 넓이는 교수동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다.
딱 봐도 스케일 큰 사건 하나가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허나, 이미 여러 번 플레이를 마친 내 입장에서는 지금 시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보아도 저 빛의 기둥은 저렇게 웅장하구나.
교수동 외곽의 학생 도서관에서 바라본 저 결계식의 발현 장면은 과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계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 참으로 형편 좋은 결계다.
뭐, 글라스칸이든 뭐든 간에 테일리가 알아서 발로 뛰어다니면서 해결해주겠지. 나는 여기서 책이라도 훑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끝날 일이다.
내가 굳이 나서서 고생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들일 노력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내 오두막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투자하는 게 낫다. 괜히 엮이면 오히려 개고생만 잔뜩 하고 몸만 다친다.
거기다가 시나리오 중요 인물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 괜시리 접근하고 싶지도 않다. 미래 지식과 일방적인 정보 우위는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 괜한 변수를 제공했다가 내 손으로 그 강력한 무기를 버리는 멍청한 짓은 절대로 안한다.
“잠깐…”
허나, 문득 드는 생각.
“이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도서관 테이블에 대충 걸터앉아 웅장한 결계식을 쳐다보던 중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머나먼 옛날에 보았던 한 공략글의 글귀 한 구절.
-‘ 혹시 연금계 스킬의 정령식에 투자할 생각이 있다면, 이 페이즈에서 정령 이해와 정령 감응의 숙련도를 올려놓으시면 나중에 편합니다.’
“맞다..!”
1막 최종전은 예니카와 계약한 정령 수십 마리와, 그 정령이 현현하면서 파생하는 수많은 유체정령(幼體精靈) 들이 대거로 등장하는 파트다.
그 지긋지긋한 ‘정령 이해’와 ‘정령 감응’의 숙련도를 한 번에 올릴 기회인 것이다.
본디 정령계 스킬의 숙련도는 정령과의 접촉을 통해 쌓여간다. 교감을 나누든, 전투를 하던 뭐든 간에 정령과의 교류가 있어야만 한다. 대개는 전투 경험이 숙련도를 잘 채워주는 편이다.
허나 평범한 사람은 정령을 볼 수조차 없다. 예니카처럼 운 좋게 막대한 정령 감응력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에야.
그러니 타고난 재능이 없는 자가 정령계 스킬을 다루기 위해선, 다른 정령사가 ‘현현’시킨 정령과 접촉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정령계 스킬의 그런 폐쇄적인 특성은 두꺼운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진입장벽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1막 최종전이다.
최종 보스가 정령사인만큼, 이 파트에서는 현현된 정령과의 전투 경험을 잔뜩 쌓아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꿀 같은 경험치 대방출 이벤트를 눈앞에 놔두고 멍하니 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거기다가, 이번 전투는 ‘실전’이다.
커리큘럼 중간 중간에 경험하는 자잘한 모의 전투와는 궤를 달리하는 전투 숙련도 또한 쌓을 수 있다.
최대한 많은 정령들을 제압해서, 일단 내 성장을 기하는 게 최우선인 것이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네!”
나는 재빨리 테이블에서 뛰쳐 내려와서 열람실 출구를 열어제꼈다. 그대로 뛰어나가려다 문득,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있는 사서가 눈에 들어왔다.
“음…”
일단 건물 내부에 있으면 딱히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양피지와 깃펜을 주워들었다.
-‘정신이 들면 당황하지 말고 여기에 가만히 있을 것. 동이 트기 전에 모든 일이 마무리 될 예정이니, 침착하게 입구를 잘 막은 다음 정령들을 자극하지 말 것. 무조건 자기 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 것.’
흠… 그냥 메모 하나만 덜렁 놔두고 가는 것도 좀 뭐한가.
배회하는 정령들이 도서관 건물의 열람실까지 쳐들어와서 자고 있는 소녀를 급습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긴 하다. 괜시리 다치거나 목숨에 영향이라도 생기면 뒷맛이 씁쓸하기만 하겠지.
나는 열람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칠판을 세우고, 구석에 떨어진 분필을 들어서 큼지막하게 글씨를 썼다. 혹시라도 메모를 발견 못할 수도 있으니 똑같은 내용을 다시 써놨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창문 쪽 벽을 장식장을 밀어서 전부 가려놓았다. 이러면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 덜 위험하겠지. 출구 쪽도 너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아서 찢어져서 뒹굴고 있던 암막 커튼으로 대충 덮어놓았다. 이러면 입구도 잘 안 보이고, 혹시라도 탈출해야할 상황에 이동에 방해도 안 될 것이다.
내부가 좀 어두워지긴 했는데,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칠판에 써놨는데 알아서 잘 발견하겠지.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나는 얼른 복도 쪽으로 뛰쳐나왔다.
곧 있으면 경험치 대방출 이벤트다. 빨리 빨리 움직여야지.
유체정령이나 원소의 흔적 같은 것들은 나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노력 좀 하면 하급 정령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원래 같으면 내 성장을 따지기 이전에 저 악랄한 벨로스페르를 어떻게 제압 해야 될지 먼저 고민해야되는 상황이지만… 참 고맙게도 나 대신에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책임져줄 사람이 있으니까…
테일리야..
난 잘 모르겠으니까 니가 알아서 잘 해결해라.
고생 좀 하긴 할 텐데… 아무튼 화이팅!
*
-‘제가 무슨 짐을 짊어진들, 황녀님이 짊어지신 짐보다 무겁기야 하겠습니까.’
-‘복잡한 정세나 치세를 신경 쓰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을 좀 편하게 드시면 어떻습니까?’
문득, 그 말이 떠오르고 마는 것은 페니아 황녀의 나쁜 버릇이 원인이다.
매사에 타인의 심중을 손쉽게 꿰뚫어 보는 그녀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이 꿰뚫려본 경험이 극도로 적다. 그렇기에 한 번이라도 폐부를 찔리면 쉽게 그 사실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무심한 듯 툭 던진 에드 로스테일러의 말이 아른거리는 것 또한 그런 성향이 원인이겠지.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페니아 황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정신을 똑바로 했다.
“이상이 지금 상황입니다.”
1학년 아일라가 상황을 모두 요약해서 전달했다.
장소는 학생 광장에 임시로 마련된 집합 장소. 시간은 11시 30분.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느닷없이 일어난 결계식 발현. 그 재앙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지도 벌써 2시간 가까이 지나있었다.
광장은 벨로스페르의 결계식에 갇혀서 나가지 못한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임시 주둔지인 셈이다.
광장의 가운데 위치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근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서 설치한 바리케이트가 동서남북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조잡하지만 최소한의 엄폐물은 되어주기 때문에 주변에 산개해있는 정령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결계가 오래 갈 리가 없어요. 금방 발각되고, 외부에서 도움이 올 거에요. 일단 외부에서 눈치 채기만 하면 교수님들이 나서겠죠.”
아일라의 말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끼리 자발적으로 형성한 이 임시 주둔지의 우두머리는 누가 뭐라해도 페니아 황녀였다.
위기 상황이 되면 가장 급한 건 상황을 통제할 책임자의 존재다. 혼돈으로 치닫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정당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가 절실해지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상황에서는 페니아 황녀가 적임이었다. 그녀의 권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 광장 주둔지에 모여든 학생의 수는 총합 57명.
이런 빠른 대응은 전투부 1학년인 테일리 맥로어의 공덕이 컸다. 교수동을 점령한 정령 무리를 헤치고 다니면서 이 학생 광장으로 학생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파발 역할을 해주었다.
그 결과, 교수동에 남아있는 학생들 중 과반이 넘는 숫자가 이 학생 광장에 일단 집결할 수 있었다.
그 주둔지의 중심에는 모여든 학생들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불릴만한 멤버들이 모여 회의 중이었다.
자애의 황녀 페니아. 황금의 딸 로르텔. 초목의 창 직스. 호위대장 클레르. 낙제검성 테일리. 동반자 아일라. 참견쟁이 엘비라. 음침한 클레비어스….
각자 바닥에 앉아있거나, 바리케이드 벽에 기대있거나, 다소곳하게 서있는 등 자유분방하게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페니아 황녀였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저희들끼리라도 학생회관으로 진입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정령들 사이를 뚫고서 교수동을 뛰어다니는 통에,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테일리 맥로어의 의견이었다.
그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몸을 일으키고, 똑바로 의견을 제시했다.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저 결계는 말 그대로 시간 끌기용일 뿐이에요. 만약 아일라의 말대로 정말로 글라스칸이 소환되어버린다면, 큰 인명 피해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정령계 마법에 조예가 있는 아일라와, 현장을 뛰어다녔던 테일리가 취합해서 전달한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밤하늘을 뒤덮은 저 정령식은 최고위 어둠 정령 글라스칸을 소환하는 마법이라는 것.
그 정도 정령을 소환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정령 감응이 뛰어난 자라고 해봐야 이 학교에 몇 없다는 것.
소거법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그 범인은 필시 마법부 2학년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것.
“페니아 황녀님. 저는 그 의견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페니아 황녀님의 옥체입니다. 지금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생각하면서 임시 주둔지 밖으로 나가선 안 됩니다.”
호위대장 클레르는 최대한 페니아 황녀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결계 밖의 사람들이 금방 이변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생활동 쪽에 주둔해있는 황실 호위대와, 학사의 교수들이 대처하기 시작하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고위 어둠 정령의 결계는 힘으로 깨부수지 않는 한 쉽게 해석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오벨 교장님이 직접 나선다면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자리를 자주 비우시잖아요. 흠흠.”
클레르의 말을 말괄량이 같이 생긴 연금술사가 받아쳤다. 실베니아 연금부 1학년 수석, ‘참견쟁이 엘비라’였다.
“으음~. 저는 테일리의 의견에 동의해요~. 무엇보다 이 정도 멤버가 다 힘을 합치면, 최고위 정령까지는 무리여도 고위 정령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흠~. 솔직히 다들 자신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저기를… 뚫자고…? 히익… 나는 반대야…”
다크서클이 짙은 남학생, ‘음침한 클레비어스’가 학생회관 쪽을 가리켰다.
교수동 전체에 퍼진 유체정령들이나 하위 정령들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 이 정도 멤버가 한 자리에 모여 있으면 백프로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회관 쪽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이 모든 정령들의 주인격인 예니카 페일로버가 있는 곳. 그곳은 온갖 중위 정령들과 정령수들이 이중 삼중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저 중위 정령들을 다 뚫고, 정령수까지 다 제압하고, 건물 내부로 진입해서 예니카까지 제압하자고..? 그… 그게 가능하겠어…? 심지어 저것들이 다가 아니야! 내부에 고위 정령이 둘이나 있다고! 고위 불 정령 타칸, 고위 어둠 정령 벨로스페르!”
클레비어스의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합동 전투 실습에서 고위 정령의 힘은 똑똑히 보았다.
예니카가 소환한 고위 불 정령 타칸. 그 거대한 불도마뱀은 네일관의 꼭대기를 감싸안고서 포효했다.
글래스트 교수가 인정한 A반 학생 중 하나인 로르텔조차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제압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타칸은 그 때보다도 더 강대해져 있을 것이다. 교수동을 점거한 정령들은 하나 같이 벨로스페르의 광폭화 마법이 걸려있었다. 타칸이라고 해서 예외일 턱은 없다.
“나는 그런 자살 행위 안 해..! 못 해!”
“흥분 하지 마세요. 클레비어스.”
“윽… 죄송합니다. 페니아 황녀님.”
페니아 황녀의 일갈에 클레비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나, 일단 내뱉은 클레비어스의 말은 학생들 사이에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게 했다.
쉰 명이 넘는 학생이 이 좁은 주둔지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이 대화는 모두에게 고스란히 들리므로, 쓸 데 없이 사기를 떨어트리는 말을 계속 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아무리 2학년 수석이라고 해도 너무 강한 거 아니에요? 일개 학생이 이 정도 수의 정령을 현현시키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글라스칸 소환식까지 영창 한다고요?”
로르텔의 질문에 대답을 해준 것은 테일리의 소꿉친구 아일라였다.
“대부분은 벨로스페르의 힘일 거에요. 예니카 선배는 그 힘을 발현하는 매개체에 불과해요. 이래서 모든 정령사들이 어둠 정령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거죠.”
이어지는 아일라의 설명은 페니아 황녀도 아는 내용이었다.
본디 정령사의 천적으로 일컫어지는 어둠 정령은 그 힘은 막대하나 정령사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법이 없다.
오히려 정령사를 지배해, 자신의 의도대로 놀아나게 만드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다만, 누구보다 정령학에 조예가 깊은 예니카 선배를 어떻게 벨로스페르가 지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어둠 정령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텐데요.”
“그런 게 지금 중요하진 않지.”
아일라의 설명에, 구석에 앉아있던 ‘초목의 창 직스’가 대답했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의 행동 방침을 정하는 것 아니겠어?”
진중하고 중후한 목소리.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의 소년은 무심한 듯 하면서도 확실하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걸 정할만한 사람은… 페니아 황녀님 밖에 없습니다.”
직스의 그 말에 다시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쉰명 넘는 학생들의 시선이 페니아 황녀에게 쏟아져들어왔다. 반대편에서는, 호위대장 클레르의 걱정스런 시선이 페니아의 등을 따갑게 했다.
무엇보다도 황녀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클레르의 시선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도움만을 기다리는 것은 황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진입하죠. 혹시라도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퇴각한다는 전제하에.”
황녀의 그 말에 좌중의 반응은 양분됐다.
호위대장 클레르와 겁쟁이인 클레비어스, 그 외 보수적인 학생들은 한숨을 푹 쉬었고, 반대로 호전적인 학생들은 웃음을 지었다.
“다만, 모든 학생이 다 진입할 수는 없어요. 섣부르게 다 같이 진입하면 오히려 피해만 늘리는 형국이 되니까… 자기 몸 하나는 여유롭게 지킬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는 게 맞아요. ”
어찌됐든 일반 학생들은 고위 정령은 커녕 중위 정령한테도 싹 쓸려나갈 것이다. 굳이 전부 데려가서 피해 규모를 늘릴 이유가 없다.
“여기 근처에 모인 멤버들, 제 호위기사인 클레르와, 각 학년 부서의 수석들, 그리고 A반 학생들끼리 진입하죠. 다들 실력은 검증되어 있으니까.”
“그럼 굳이 황녀님이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뇨, 저도 동행할게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클레르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지만, 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젠체하면서 지시만 하는 주제에 일선에 나가지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황녀님. 황녀님의 옥체는 황녀님만의 것이 아닙니다. 호위하는 자로서 말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클레르. 저도 마법 수련을 소홀히 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테일리와 아일라도 동행해주세요. 두 사람은 학생들을 수색하면서 학생회관 외곽을 돌아다녔을 테니, 내부 상황을 대충이라도 알고 있겠죠.”
이로써 토벌대 멤버가 확실하게 결정되었다. 애석하게도 고학년 멤버는 한명도 없다. 성인인 클레르를 제외하면 죄다 1학년생이다.
그러나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하나가 실력자들이다. 애초에 이번 1학년생들은 이례적일 정도로 강자가 많다. 행방이 불분명하여 ‘나태한 루시’가 합류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어지간한 고학년들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진입은 한 시간 뒤로 할게요. 다들 채비를 마치고 마음의 준비도 끝내놓으세요.”
황녀의 그 말에 일동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 페니아 황녀님!”
그 때, 엄숙한 분위기를 깨고 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교수동 잔류 인원 파악이 끝났습니다”
적갈색 머리칼을 한 남학생은 바리케이드 사이를 뚫고 들어와 황녀 앞까지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인 만큼 주요 인원 파악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시간이 시간이다. 대부분은 생활동으로 돌아가 있을 시간이니, 교수동에 남아 있다가 결계식에 갇혀버린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이곳에 모여든 학생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취합하면 그럭저럭 전체적인 인원견적이 나왔다.
그 조사를 책임졌던 남학생은 숨을 헐떡이면서,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타녜스 마법 용품 보관소에서 시약 연구를 하던 연금부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농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부분 3학년생들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요?”
“문단속을 하고 건물 관리를 하던 교직원들은 오드리관에 잘 모여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 쪽은 일반 교직원들이라 정령에 대응할 무력이 모자라다고 합니다.”
“지원이 필요할까요?”
“칼리 교수님이 그 쪽을 책임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합류 자체는 힘들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교수가 생활동으로 돌아갔을 시간이지만, 남아있던 교수진도 한두 명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많은 일반인 교직원들을 관리하고 지키려면 힘에 부칠 것이다. 오드리관과 이 곳 학생 광장까지의 거리는 꽤 머니, 그 많은 교직원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합류해주길 바라는 건 너무 무리한 기대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직원들을 거기다가 방치해놓고 올 수도 없을 것이고.
“그 쪽도 농성을 하는 방향으로 가겠군요.”
“예,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괜히 일반 관리직 교직원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판단을 하진 않을 테니까요.”
“실질적으로 학생회관에 진입할만한 여건이 되는 건 우리들뿐인 것 같네요.”
황녀는 다시 결심을 굳혔다. 어찌됐든 이 곳 학생 광장은 문제의 중심이 되는 학생회관 바로 앞에 위치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신속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무리는 여기뿐이었다.
“그 외에는 따로 파악된 학생은 없…”
“…있어요!”
동서남북으로 형성된 바리케이드 한 쪽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식간에 그 쪽으로 일행의 시야가 모여들었다. 불안한 듯 가슴께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1학년생 소녀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 외친 것이다.
“죄, 죄송해요… 너무 분위기가 엄숙해서… 말 못하고 있었어요.”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저는… 학생 도서관을 관리하는 견습 사서반의 티시카라고 해요… 사실, 학생 도서관 쪽에 남겨두고온 친구가 있어요.”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은 고통스러워보였다. 뭔가 힘겹게 고해성사를 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원래 같으면 함께 도서관 폐관 작업을 마무리 하고 오는데, 오늘따라 열람생 한 명이 폐관 시간 직전까지 나가질 않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기다렸다가 마무리 하고 갈 테니 저는 먼저 생활동으로 돌아가라고 배려해줘서… 저 먼저 귀가하던 길이었어요.”
“그렇다면 학생 도서관 쪽에 사서 한 명, 열람생 한 명이 고립되어 있다는 이야기군. 가만… 사서반이라고?”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직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여학생에게 다가가더니,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네 친구라는 그 사서 이름이 뭐지?”
“엘카. 엘카 이슬란이요.”
땀을 삐질 흘리고 시선을 회피하면서, 소녀는 어렵게 그 이름을 뱉었다.
그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직스의 동공이 떨렸다.
“엘카… 라고..? 확실하나? 헷갈린 게 아닐 테지?”
“네… 같이 견습 사서반에서 마도서 관리를 배우고 있어요…”
직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소녀의 뒤편에 있는 바리케이드를 후려쳤다. 화들짝 놀란 소녀가 눈을 질끔감고 뒷걸음질 치고, 목재 벤치와 장식용 기재들로 이루어진 바리케이트가 하릴 없이 무너졌다.
“젠장! 페니아 황녀님. 당장 구하러 가야합니다.”
“직스?”
“엘카는 마도서 관리와 마력진 연구에는 조예가 깊지만, 자기를 방어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애초에 학자 지망생이니까요. 가만히 놔두면 필시 폭주화 상태인 정령들에게 당할 겁니다.”
직스는 성큼 성큼 걸어서 주둔지 중앙으로 돌아오더니, 페니아 황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당장 학생 도서관으로 가서 구해야합니다.”
“직스 에벨슈타인. 너 지금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니?”
그러나, 그 대답은 다른 곳, ‘황금의 딸 로르텔’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학생 도서관까지의 거리는 전력질주로 달려도 한참 걸리는데, 정령들까지 뚫고 가야하잖아. 얼마나 시간이 소비될지 가늠이 안 돼. 그것보다는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인 예니카 선배를 제압하는 걸 우선시해야지.”
차분하고 단정적인 어조. 한 없이 현실적인 방안.
상급자에게는 예의바르고 차분하지만, 대등하거나 아래인 자에게는 가차 없는 기질.
그것은 엘테 상회의 차가운 현실에서 살아온 로르텔에게는 당연하디 당연한 것이다.
“네가 엘카에게 애착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직스. 하지만 일의 경중을 파악해야해.”
엘카 이슬란.
그녀는 창끝의 삶을 살아온 ‘초목의 창 직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북방 유목 민족의 후예로서, 철 들었을 때부터 핏빛 길만을 걸어온 직스의 삶을 긍정하고 보듬어준 소녀.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던 직스에게 인간의 포근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소녀.
항상 학생 도서관 열람실 직원석에 앉아, 두꺼운 마도서의 틈바구니에서 다소곳이 미소지어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녀가 있었기에, 직스는 피를 탐하는 괴물의 삶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새로운 삶을 주었던 그녀의 미소를 잃는 것이, 직스에게 있어선 목숨을 잃는 것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다.
“으윽…”
그러나,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로르텔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
교활하고 탐욕적인 상인이지만, 그녀의 말에는 언제나 정당성이 부여되어 있다. 그것이 로르텔이라는 인간이었다.
“진정하세요, 직스. 당신답지 않게 너무 감정적이네요. 로르텔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초목의 창 직스는 단 3명뿐인 A반의 멤버들 중에서도 언제나 가장 침착한 인물이었다.
괴짜 같은 루시와, 괜시리 수상하고 믿을 수가 없는 로르텔. 그 둘과 달리 언제나 정의롭고, 상식적이며, 말도 잘 통하는 인간이다. 직스의 그 안정감 있는 품행은, 1학년생들 사이에서 ‘직스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게 만들 정도다.
그 모습과 이상하리만치 괴리되는 모습. 굳이 황녀의 통찰안이 아니더라도, 직스에게 있어서 엘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티시카 학생이 말했던 것처럼 학생 도서관에는 아직 잔류해있는 학생이 한 명 더 있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그 학생을 믿어 보는 게 어떨까요.”
“그건… 윽….”
확실히, 당장 눈앞에 있는 학생회관에 모든 문제의 원인 예니카가 있는데, 그걸 내팽개쳐두고 학생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건 너무 이기적인 판단이다.
직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황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다른 학생이 더 있다고 했었죠? 티시카.”
“그.. 그것이…”
눈을 맞추지 않고, 땀을 삐질 흘리며 뒷걸음질 치는 티시카.
페니아 황녀는 모종의 불안감이 뒤통수를 엄습하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나요?”
“저… 그게…. 으읏…”
황녀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직스였다.
직스는 다시 티시카에게 성큼 성큼 걸어가서, 아예 멱살을 잡아 올렸다.
“당장 말해!”
“으윽… 그흐… 죄송, 죄송해요…!”
그제서야 눈시울을 붉히면서 티시카가 무릎을 꿇었다. 고해성사는 계속된다.
“에드…. 에드 로스테일러였어요.”
그 이름이 언급되자,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불길한 침묵이 좌중에 감돌았다.
“밤늦게까지 그 인간이 자리를 깔고 앉아있어서, 말 걸기도 싫고 너무 짜증이 나서… 다들 아시잖아요..! 에드 로스테일러가 어떤 인간인지! 그래서 그냥 엘카에게 맡겨두고 나왔어요. 엘카는.. 그런 소문 같은 거 잘 신경 안쓰는 성격이고 해서…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누군지도 잘 모르니까 괜찮겠지 하고…”
소녀를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게 만든 건 죄악감이었다. 자기가 친구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무거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니나 다를까, 엘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 보내줬어요… 그냥, 그래서… 너무 미안해서.. 그…. 으흑….”
직스의 머리 언저리에서 인내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 로스테일러.
직스도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신분이니, 그 인간의 추함에 대해서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 ‘이거 놔라!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남 에드 로스테일러다! 더러운 손 치워라 돼지들아! 어딜 몸에 손을 대느냐!’
– ‘저 테일리인지 뭔지 더러운 낙제생 하나 욕보이자고 내가 그런 수작을 부릴 것 같으냐? 이거 놔라! 더럽고 무지한 평민 나부랭이들이 뭘 안다고 나불나불 대고 있는 것이냐!’
– ‘테일리? 하…. 신분도 천한 낙제생 버러지가 입만 살아있구나.’
사치와 향락, 교만과 나태, 그리고 무능.
추레한 인간상의 밑바닥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기회가 오면 그 어떤 맹우라도 버림수로 활용하고, 자기가 받은 은혜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이기심 그 자체와도 같은 자.
주둔지에 모여든 학생들이 무슨 말을 수근 거렸을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에드? 그 에드 로스테일러? 그럼 큰일 난 거 아니야?”
“그 인간, 듣기로는 진짜 추하고 한심하단 소문 엄청나잖아.”
“그럼 그 사서는 이 상황에 그런 인간이랑 단 둘이 있는 거야?”
“저런….”
광폭화된 정령이 길목을 죄다 점령하고, 건물 밖은 커녕 방 밖으로 나가기도 위험한 상황.
그 잔악한 에드 로스테일러와 엘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
절대로 좋은 일이 일어날 거 같진 않다. 극한의 상황에 치닫으면 아무런 무력도 없는 엘카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버림수로 활용당하거나, 급기야는 그 유약한 몸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
직스는 에드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들리는 소문들도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그딴 작자의 손아귀에 엘카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이, 직스의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지금 당장. 학생 도서관으로 가겠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분노는 뜨겁다기보단 오히려 차갑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직스는 ‘통보’를 했다.
그 통보를 받은 상대는 교장 오벨조차도 존대를 하는 자인 ‘자애의 황녀 페니아’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선을 지키지 않는구나, 직스 에펠슈타인.”
가장 먼저 나선 건 그녀의 호위대장 클레르였다. 그러나, 직스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초목의 창 직스는, 나태한 루시가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제압할 수 없다. 설령 왕실 호위대 소속인 클레르라 할지라도, 그를 상대로 몇 합이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는 나태한 루시, 황금의 딸 로르텔과 함께 오로지 실력만으로 글래스트 교수에게 인정받은 1학년 최고의 마법사다.
북방 유목민족의 땅에서, 철이 들 때에는 이미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히며 살았다.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온 그는, ‘실전감각’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나태한 루시가 개인의 힘으로 막아설 수 없는 전차나 전투기라면, 초목의 창 직스는 평생에 걸쳐 잘 훈련된 특수 요원 같은 자다. 그 힘과 규모에서는 처참하게 밀릴지 모르겠으나, 특화된 분야에서만큼은 그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그 분야는 말할 것도 없이, 외부요소의 개입이 없는 철저한 대인 결투 상황이다.
“제가 떠나는 걸 방해하는 사람은, 전부 제압하겠습니다.”
“그렇게는 안 되겠네.”
황금의 딸 로르텔이 주문을 영창했다. 삽시간에 대기의 수분이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창 하나를 허공에 생성해낸다. 네일관의 천장을 날려버렸던 중급 마법 ‘얼음창’이었다.
실베니아 1학년 마법부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는 두 학생. 직스와 로르텔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여든 학생들의 시선에 긴장이 감돌았다. 모여든 학생들은 일제히 마른 침을 삼키며, 갑자기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상황에 긴장했다.
“인정할 건 인정할게, 직스. 너는 지금 주둔지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전력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네가 토벌대에서 빠지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급감해. 미안하지만, 절대로 자리를 비워선 안 돼.”
“웃기는구나, 로르텔. 나를 그렇게 억지로 잡아놓는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협조할까?”
“너는 지금 이성을 잃었어. 엘카를 소중히 하는 그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적어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저길 봐.”
로르텔의 고개가 향한 곳을 바라보면, 조금씩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글라스칸의 소환식과, 학생회관을 점령한 온갖 정령수들이 가득히 보인다.
“저걸 놔두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로르텔은 직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로르텔은 질색했다.
열정, 열혈, 기합, 의리, 패기, 혈기, 강인한 의지. 로르텔은 급박한 상황에 그런 단어가 튀어나오는 일을 혐오했다. 그것은 감성에 지배당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들이 자주 핑계 삼아 쓰는 단어다.
자고로, 인간이란 이성적이고 냉철해야만 한다. 제 아무리 궁지에 몰려있고, 외부적 상황이 가혹할지라도, 삿된 감정에 현혹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진짜로 믿음직한 자다.
아무리 마법적 실력이 뛰어나고, 그 힘이 강대해도,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신뢰를 내주지 않는다. 로르텔이 상도의 길을 걸어오며 지킨 제 1의 대원칙이었다.
“이런 대인전에서 내가 직스 너를 이길 순 없겠지. 그래도, 있는 힘껏 맞상대하면 너도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나지 않을 거야.”
“큭…”
대인전 기량에 있어서는 직스가 로르텔보다 위다. 그러나 로르텔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한참동안을 호각으로 합을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시간도 시간이고, 몸도 상처 없이 끝나진 않을 터.
정령들을 헤치며 도서관까지 가야하는 직스의 입장에서는 너무 압박이다. 그러나 직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둘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큰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으면 전투가 시작되려는 그 순간이었다.
“우리들끼리 분열해서 뭘 어쩌자는 거에요, 지금!”
결국, 한계에 달한 페니아 황녀가 소리쳤다.
“하지만, 페니아 황녀님!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간절한 기세로 직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거의 악을 지르듯이 시작했던 직스의 말은, 그 끝에 와서야 묘하게 젖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완전히 간절해진 얼굴로, 반쯤은 울먹거리면서 이야기 했다. 1학년생들 사이에서 언제나 다부지고 믿음직한 사람으로서 평가받던 ‘초목의 창 직스’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엘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감정의 기조는 분노에서 슬픔, 간절함 따위로 넘어와 있었다.
그런 반응은 페니아 황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차갑게 분노하는 직스를 질책하고,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쥐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절실해져버린 직스의 그 내면이 황녀의 통찰안에는 너무나도 똑똑히 보였다.
그 마음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앞둔 자보다도 절박하다. 직스에게 있어서 엘카는, 정말로 가족과도 같은 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 진정성 있는 절실함에 되려 페니아 황녀가 말을 더듬게 되어버린다. 입은 벌어지지만, 목을 타고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작자를. 황녀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황녀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 말에, 페니아 황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애초에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해 생각하면, 오히려 생각의 흐름은 복잡해지고, 명확했던 사실들조차 안개 속으로 숨어버리는 느낌이다.
언제나 명확하게 꿰뚫려 보이던 인간 내면의 갖가지 심상들이, 그 남자의 내면에 들어서자면 아무런 윤곽도 잡히질 않는다.
상황은 또 어떤가.
당장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극한의 위기 상황.
1분 1초가 아까운 현실. 글라스칸의 소환진은 갈수록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학생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데, 모인 사람들은 결정을 내려달라고 모두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다.
결정권자이자 책임자. 평생 군주의 등 뒤를 따라 붙는 그 꼬리표의 무게를 실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모습으로 있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었으나.
이윽고 다시금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불명확한 현실의 잔재들이 그녀를 궁지로 몰았다.
“그.. 래도…”
주둔지의 모든 시선이 페니아 황녀와 직스에게로 몰려 있었다. 상황의 급박함, 복잡한 머릿속, 판결을 기다리는 자들, 책임져야 하는 위치, 판단의 실수는 누군가의 인명 피해로 이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 부지깽이로 대충 불을 툭툭 건드리던 소년의 등판.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황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모습. 실습장 문을 열고 나가며 황녀의 심중을 꿰뚫던 말.
꼴사납게 바닥을 기던 입학시험 때의 추태, 무감각한 얼굴로 황녀를 지나치고 테일리를 쫓던 뒷모습. 뭐 하나 명확히 내비치질 않는 그 속내.
궁지에 궁지까지 몰린 페니아의 이성은… 이윽고 말을 내뱉게 만든다.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페니아 황녀의 육감이 가리킨 방향은 분명.
“그래도…. 한 번… 그 남자를… 믿어 보는.. 건…?”
좌중에 다시 침묵.
일동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동안을 침묵 속에 서있었다.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어이없는 광경을 본 표정들이었다.
“어째서…”
그러나. 직스는 한탄했다.
“어째서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하십니까. 제가 아는 자애의 황녀님은,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직스에게는 그 남자를 믿으라는 페니아 황녀의 말이, 직스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한 명분만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저는… 가겠습니다.”
직스는 고개를 가로젓고 몸을 주둔지 출구 쪽으로 향했다.
“가기는 어딜…!”
“로르텔.”
직스를 잡으려는 로르텔을 손을 들어서 제지한 자는, 의외로 페니아 황녀였다. 바로 방금 전에 에드를 믿어보는 건 어떠냐는 둥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한 와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페니아 황녀도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보내주세요.”
“황녀님.”
“다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거에요, 직스.”
당장에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페니아 황녀의 머릿속은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었다.
“모든 죗값은, 다녀와서 치르겠습니다.”
그제서야 이해 받은 직스는, 다시금 몸을 돌려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스스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카를 구하러 가겠다면, 페니아 황녀로서는 그 신념을 막아설 수가 없다.
그렇게, 직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다부진 얼굴로 주둔지를 떠났다.
“페니아 황녀님.”
직스의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로르텔이 페니아 황녀를 불렀다.
페니아 황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소곳한 모습으로 페니아 황녀를 바라보고 있는 로르텔이 있었다.
로르텔이 무슨 생각을 할지, 페니아 황녀는 굳이 그 특유의 통찰안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그녀는 필시 페니아 황녀의 결단을 규탄할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다치고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를 떠나게 해서는 안됐다고 이야기할 터.
그리 생각하고, 다부진 마음을 먹은 채 로르텔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로르텔은 오히려 빙그레 웃어보였다.
“생각해보면,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로르텔.”
“황녀님 또한 고민 끝에 내리신 결단이었을 테니까요. 어찌됐든 그의 의지 또한 숭고했으니, 무작정 옳다 그르다 잣대를 들이밀 순 없겠죠.”
로르텔은 방금까지의 긴장감 넘치던 결투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 시원하게 말하고 페니아 황녀를 긍정해준 것이다.
“어쨌든 한 시간 안으로 학생회관에 진입한다는 방침에 변화가 없다면, 지금부터 토벌 준비를 해야겠지요. 저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몸 상태를 점검할게요. 페니아 황녀님도 부디, 편히 휴식을 취하시길.”
단아한 미소와 함께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로르텔 케헬른은 페니아 황녀를 지나쳐 갔다.
본인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원스레 황녀를 격려하고 물러가는 모습은, 과연 신하의 귀감이다.
그러나 황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그 누가 봐도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황녀를 격려하던 그 내면에는, 깊은 환멸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로르텔이 옆을 지나쳐가는 순간, 페니아 황녀는 직감했다.
원래부터 로르텔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을 기점으로 로르텔과는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난 느낌.
세상이 거꾸로 도는 한이 있더라도 저 소녀는 절대로 자기를 긍정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확실하게 직감하고 말았다.
“…저도 좀 쉴게요, 클레르.”
그녀는 충성스러운 호위에게 그리 말하고, 주둔지 구석의 바리케이트 근처에 등을 기댔다. 클레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부진 모습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긴장감 넘치던 주둔지의 상황은 일단락 됐다.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나태한 루시’는 그 행방을 알 수조차 없다.
가장 중요한 전력 중 하나였던 ‘초목의 창 직스’는 아예 주둔지를 떠났다.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황금의 딸 로르텔’은 심정적으로 자신과 완전히 적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의 중심을 잡아줄 자는 자기밖에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황녀는 시선이 닿지 않을 바리케이트 뒤에 숨어 자기 무릎을 끌어안았다.
어쨌든 주둔지는 일단 휴식을 취하자는 분위기가 퍼져있었다. 당장에 강력한 정령이 덤벼드는 것도 아니니, 보초만 잘 서면 자기 몸과 장비를 점검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린 주둔지 구석,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가만히 앉아 페니아 황녀는 작게 되뇌였던 것이다.
그 말은, 군주의 명함을 달고 있는 자는 일평생 절대로 내뱉어선 안 될 말이었다.
“나도, 힘들어..”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릴까봐 조바심을 내면서도, 끝끝내 입 밖으로 스며나오고 마는 것이다.
“나도, 힘들단 말야…”
일평생 누구에게도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는 소녀다.
슬픈 일이지만, 그 작은 한마디를 내뱉는 일조차 죄악감을 동반해야만했다.
토벌의 때가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눈부시게 밤하늘을 수놓은 글라스칸의 소환진은, 야속하게도 그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 [ 마법 능력 상세 ]
등급 : 평범한 마법학도 전문 분야 : 원소 공통 마법 : 빠른 캐스팅 Lv 4 마나 감지 Lv 5 불 원소 마법 : 발화 Lv 10 바람 원소 마법 : 바람 칼날 Lv 10 정령계 마법 : 정령 감응 Lv 3 정령 이해 Lv 3
“허억, 허억….”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길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1페이즈가 시작된 지도 2시간 무렵이 지났을까. 학생 도서관 주변으로 모여든 정령의 성흔과, 원소의 흔적 따위를 잡고 있자니… 간간히 정령계 스킬의 숙련도가 오르고 있었다.
땀을 닦아내고 마법능력 상세창을 보고 있으니 흡족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령식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 화살에도 정령계 마법을 부여할 수 있게 되겠지. 그야말로 전투력 측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다.
“와, 근데… 진짜 빡쌔긴 하네..”
부지런히 단련을 반복해왔기에 망정이지… 잡으면 또 끝도 없이 밀려오는 바람에 중간 중간 정말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미 학생 도서관 주변의 정령들은 싹 다 정리되어 있었다. 연속적으로 쏴댄 바람 칼날의 흔적과, 발화 마법에 의해 타버린 잔해들도 나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좀 기다리고 있으면 또 새로 들이닥칠 것이다.
“후우… 정령 감응은 최대한 10레벨에 가깝게 찍어 놔야지. 그래야 정령이랑 계약도 할 수 있으니… 지금 아니면 이런 절호의 기회가 또 올 리가 없으니까 열심히 하자. 음음.”
이런 황금 같은 시기를 절대 놓칠 수는 없지.
“으윽… 후우… 아직, 한계는 아니야…”
어쨌든 단련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 붙이는 것이다. 헬스장에서 쇠질 좀 해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나태해지지 말고, 정말 온 몸의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극한으로 버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유의미한 스탯 변화가 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령 무리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파이팅 넘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진짜 온몸이 녹초가 되는 그 순간까지 단련 또 단련이다.
아직 더 할 수 있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