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0)
독이 든 성배 (1)
생각보다 손이 더 많이 갔다.
다이크 엘펠란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지금 갖춰진 내 스펙을 생각해보면 절대로 패배할 리가 없다는 견적이 이미 나있었다.
거기다 상황을 더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루시를 통해 고위 마법까지 완벽하게 익혀두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모두 감안하기 위해서다.
이론적인 부분이나 마력 감응, 원소 응용 방식 등 숙지해야할 요소들은 몇 번이고 암기했다보니,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자 금방 고위 마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금방 습득했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루시와의 결투 속에서 몇 번이고 사선을 넘나 들었던 것 같긴 한데… 뭐, 필요한 과정이었다.
– 와아아!
환호성을 뒤로한 채로 대기실에 돌아왔다. 철창을 지나서 조용한 내부로 들어오자 변한 것 하나 없는 대기실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흙바닥을 구르고 날뛰느라 거적데기나 다름 없어진 셔츠를 휙 벗어버리고, 간단하게 준비되어 있던 용품 보관함 문을 열었다.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옷을 탈탈 털어버리고 여분의 교복을 꺼내들어서 조용한 대기실 중앙 탁자로 돌아왔다.
굳이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벨 마이아가 세탁을 해준 교복이다.
소맷귀가 조금이라도 찢어지는 날에는 밤을 새서 수선을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여분 교복까지 있는 상태라니.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일일이 감개무량한 느낌이 들어서야 밑도 끝도 없는 일이긴 하다만.
“왜 봐줬어.”
익숙한 목소리가 전조도 없이 들려왔다.
굳이 놀라지 않은 것은, 그 묘하게 힘 없고 졸린듯한 어조는 척 듣기만 해도 누군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편의용으로 준비해준 대기실 소파의 반대편에 루시가 누워있었다. 등받이 때문에 건너편은 보이질 않았는데, 대체 언제부터 와있었던 것일까.
근래들어 갑자기 무리하기 시작한 내가 걱정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결투가 보고 싶었던 것 뿐인지…
루시는 고개를 휙 돌린채로 반대편의 푹신한 부분에 앉아서 멍하니 말을 내뱉었다.
다이크와 이리저리 치고박고 싸우느라 자잘한 생채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상처라 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그 무지막지한 위력의 주먹은 한 방 한 방이 정말 위협적이었지만, 직격을 허용할만한 수준의 공격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전투 센스의 부재. 선천적으로 그런 감각 자체를 타고나지 못한 다이크의 일격 일격은, 파괴력에 버금가는 유연함을 전혀 지니질 못했다.
위력 자체는 전투부에서 제일가는 파괴력이라 칭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게 전부다.
성장의 고점으로 치면 직스나 클레비어스 같은 천생 전사들을 절대로 따라 잡을 수 없다.
3학년만 되어도, 그 두 사람이 다이크보다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단지 전투부 교수들의 체계적인 가르침과 효율 좋은 훈련 방식을 다 흡수하지 못했을 뿐이다.
“안 봐줬어.”
“작정하면, 처음부터 끝내버릴 수 있었잖아.”
“…”
다이크 엘펠란은 고위 바람 정령인 메릴다를 뚫어내지 못했다.
아예 처음부터 지팡이를 들고 나가서, 메릴다를 불러낸 뒤 그 늑대를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한다면, 그리고 레이시아와 머그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만을 유도했으면 다이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접근전을 허용했다.
그 광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들에게는 다이크가 의지력으로 모두를 뚫어내고 내게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전투를 이어간 것처럼 보였겠지만…
내 모든 스펙을 상세히 알고 있는 루시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마치, 치열하고도 끈덕지게 이어지는 그 전투를 연출한 것처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해서 한 방이라도 허용했었다간…”
그렇게 말을 하면서 모자챙을 잡고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루시는, 나랑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침몰하듯이 다시 건너편 소파에 몸을 묻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련의 행동이 꼭 동영상을 역재생이라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왜 벗고 있어?”
“옷 갈아 입어야지. 이러고 축제 구경 나갈 수도 없잖아.”
“말을 해.”
“뭐?”
“옷 갈아 입는 중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뭘… 새삼스럽게…”
사실 그간 루시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 가지고 불편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두막 캠프 옆에 있는 냇가에서 몸을 훌훌 씻어내고 있을 때나, 옷을 수선할 때마다 근처 평평한 바위에서 몸을 말고 낮잠을 자던 루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 상의 좀 벗어제낀 것 가지고 미리 말을 해라 뭐해라 떽떽 댈만한 이유도 없고, 사실 그럴 성격도 아니건만… 루시는 모자를 꾹 눌러쓴 채로 반대쪽 소파에 몸을 묻었다.
“뭐, 필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져줄 맘은 추호도 없었지만, 적어도 다이크 엘펠란이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객들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왜?”
“그래야 가문 내에서의 입장이 곤란하지 않을테지. 적어도, 의지력만큼은 대중 앞에서 보여줬으니까.”
실제로 축제 관객들 사이에서 다이크 엘펠란에 대한 여론은 ‘졌지만 분전했다’, ‘가치 있는 싸움을 보여줬다’, ‘의지력과 기합만큼은 발군이었다’라는 둥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두들겨 맞다가 퇴장했다면,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다이크 입장에서는 뭐라고 목소리를 낼 여지도 없었을 테다.
“거기다가, 정치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어.”
“그래?”
“그래.”
내가 셔츠 단추를 다 잠그고 로브를 휙 뒤집어 쓰자, 루시는 그제서야 그 조막만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는 헐렁하게 남아도는 소매 끝을 흔들었다.
“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좀 더 두고 보자고.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냐?”
“네가 걱정되서 보러왔어. 마법 수련하느라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잖아.”
“지금 시간이면 오필리스관 쪽에서 레이첼 부교장이랑 같이 음악회 참석하기로 되어있지 않았나? 학교 전체 수석 자격으로 맨 앞자리 상석에 앉아 환담을 나누며 관람하기로 했다고…. 벨에게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
내가 그리 말하자, 루시는 숨길 기색조차도 없이 식은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 도망 나왔냐?”
“나, 음악 같은 거 잘 몰라.”
“레이첼 부교장이라고 그걸 잘 알아서 음악회 같은 데에를 참석하겠냐. 그냥 보여주기식 행사지.”
“난 그런 보여주기식 행동 같은 거 안해…”
지금쯤 벨 마이아가 눈에 불을 켜고 학사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루시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곁눈질로 내 신발 언저리를 쳐다봤다. 제발 일러다 바치지는 말아달라는 듯한 모습이다.
“후우… 루시. 내가 너한테 무슨 설교질 같은 걸 할 마음은 없다만, 그래도 맡겨진 책무는 다 해야지. 안 그래?”
“…”
“물론 네가 원치 않은 것이긴 하지만, 큰 힘과 높은 자리에는 그에 따른 책무도 따르는 법이잖아.”
나는 옷 소매 끝 단추를 다 채우고, 신발 끝을 바닥에 탁탁 두들겨서 고쳐 신었다. 그리고 옷 맵시 여기저기를 살피며, 딱히 흐트러진 부분이 없는 걸 잘 확인한 다음 캐비넷 쪽으로 헌 옷을 들고 나아갔다.
벨 마이아는 일단 사용인 신분인지라 루시를 훈계할 수는 없다.
그러니, 딱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닐지라도 일단은 내가 말을 해둘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학사에 루시가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과, 큰 힘이 있는 사람은 모두 책임을 감당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 잘 알잖아. 그 정도 위치에 올랐으면, 싫은 일이라고 해서 무작정 도망치는 사람은 없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끼익
그렇게 설교 아닌 설교를 하며 문을 열자, 타냐 로스테일러가 캐비넷 안에서 몸을 말고 있었다.
“앗,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축제 운영위원회에서 안건을 191개나 올리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만…”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나는 그만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말았다.
*대련장 건물의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웅성거리면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나와, 그 옆 복도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사람의 모습이 믿기질 않았기 때문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전체 학년 수석 루시 메이릴.
그리고 학생회장 타냐 로스테일러.
어지간한 학생 모임 자리에서는 주인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인사들이다.
그런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행인들로 하여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끼게 만들었다.
얼굴은 알아보지만, 차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가만히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방해해선 안될 것 같다.
그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게 맞는 행동인 것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이 흐르는 것이다.
나는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되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루시 메이릴과 타냐 로스테일러는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벤치 한가운데에서 관자놀이를 덮고서 한숨을 푹 흘리고 있자, 양 옆에서 멋쩍은 듯이 앉아 있는 두 소녀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루시 메이릴은, 음악회 행사에서 도망쳐 나왔다.
타냐 로스테일러는, 축제 운영위원회 일에서 도망쳐 나왔다.
…도망자들인 것이다.
피신한 곳이 내가 있는 곳이라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어쨌든 도망을 치면 내 주변으로 숨어드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추격자 입장인 직스 에펠슈타인이나, 벨 마이아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일단 사라졌다면, 에드 로스테일러의 주변을 뒤져보면 될 일이니까.
결국 이 둘은 얼마 안가면 잡혀갈 사람들인 것이다.
“그…. 오랜만이네요… 루시 선배님…”
“…”
루시는 슥 고개를 들었다가, 타냐와 눈이 마주치고선 다시 벤치의 등받이에 스윽 그 자그마한 몸을 뉘였다.
최근들어 묘하게 말 수가 많아진듯한 느낌이 든 루시지만, 사실 누구를 만나든 별 다른 관심을 보이는 일이 없는 게 보통인 소녀다.
운 좋게 루시와 친해질 수 있었던 입장에서 보자면, 얘는 대체 다른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사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루시와 타냐의 관계는 상당히 묘하다.
한 때는 전폭적인 타냐의 지지자였다가, 또 한 때는 타냐를 잡아먹으려 들었다가, 다시 사과하고 관계를 풀었다가… 이제 와서는 별다른 악감정은 남지 않은 사이다.
썩 좋은 관계만을 유지해왔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루시와 타냐는 제법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한 사이인 것이다.
루시 입장에서는 살갑게 대해줄 만도 하건만, 아직도 썩 그렇게 친근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 것인지, 묘하게 내 쪽으로 붙어서 스윽 숨어들었다.
“또 직스를 제치고 도망 나왔냐…?”
“제가,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천장을 찌를 듯이 가득 쌓인 서류를 보면 일단 뒷걸음질 치다가 뛰쳐나오는 버릇이… 생겨버렸어요…”
“…”
“이, 일종의 공포증인 걸까요. 갑자기 숨이 확 가빠지면서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더니, 정신을 차려보니까 학사동 광장을 가로질러서 뛰고 있었어요…”
“내가 눈물이 다 나려하네…”
“도망쳐봤자 어차피 나중에 다 해결해야할 일인데… 일단 도망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그런 게… 이거… 중독될 것 같아요…”
“아니, 애초에 아니스가 학생회에 들어간 뒤론 업무 효율이 괜찮아진 거 아니었냐?”
“물론 그렇긴 한데, 축제 시기잖아요…”
아, 그건 확실히 그렇다.
요즘 시기야 말로 학생회의 업무 부담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의외로 도망이라는 거… 사람의 마음을 간질이는 묘한 쾌감이란 게 있네요…”
“…”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해서 가만히 있자, 반대편 쪽에서 내 몸 뒤로 숨은 루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타냐를 보면서 눈을 반짝반짝 거리고 있는데,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모양이다.
“…그런 쪽으로 공감대 형성을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싶다.”
“루, 루시 선배님도 도망 나온 입장이세요?”
“얘는 기본적으로 밖에 있는 시간 대부분이 도망쳐있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수업도 졸업 필수 과정이 아닌 이상 거의 참석을 안하니까.”
추격자 벨 마이아에게 묵념을.
“그, 그런데도 수석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거에요?”
“애초에 실기 성적이 말도 안되는 수준이잖아. 너도 얘 성적은 알 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해요. 근데 제가 알기론 오필리스관 학사 쪽에 쌓인 벌점도 어마어마하시던데…”
“그걸 다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실기 성적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니까…”
루시 메이릴은 학생 수준에서 최고위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유일한 마법사다.
최고위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인간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봐도 다섯이 안된다. 그 중 루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고.
애초에 학생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서, 왜 실베니아에 다니고 있는지 그 자체가 의문으로 뒤덮인 녀석이다. 글록트의 유언에 대한 사실을 보통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대련 잘 봤어요, 오라버니. 만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시는 것 같아서, 솔직히 동생된 입장에서도 좀 무서울 지경이에요.”
“호들갑 떨면서 말하는 것 치고는 그렇게 놀란 느낌도 없네.”
“그런가요? 사실 학생회장이 된 뒤로는 매일매일이 감탄의 연속이라 무덤덤해진 걸지도 모르겠어요…”
타냐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신세 한탄을 좀 하더니, 이윽고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셀라하 황녀님께 모든 공을 돌리는 건 페니아 황녀님의 아이디어인가요?”
“너한테도 어느정도 언질을 해둔 거 아니었어?”
“글쎄요… 황족 숙소는 그리 자주 갈 수가 없으니까요. 뭔가 행동을 취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걸요.”
솔직히 말해서 타냐의 반응은 의외였다.
웬수 같이 여기던 셀라하 황녀에게 이렇게 대놓고 고개를 딱 숙인 모습에, 타냐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며 이유를 물어올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회장에 오른 이후로 타냐의 내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로르텔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무리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해내는 면모를 어느정도 갖춘 느낌이 든다.
항상 우는 소리를하고, 징징대면서도,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에는 눈가를 예리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상대 세력을 분열시키려거든, 억지로 갈등을 조장하고 회유하려 들어봤자 의미가 없죠. 무엇보다 엘펠란 가문은 셀라하 황녀님과는 긴 세월 공생 관계에 있었던 곳이니까요.”
엘펠란 가문과 셀라하 황녀의 세력은 교류의 역사가 길다.
특히 현 엘펠란 가문의 가주 발베론 엘펠란은 셀라하 황녀의 깊숙한 비밀을 많이 알고 있을 정도로 서로 간에 신뢰 관계가 깊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신뢰관계를 무너뜨리려거든, 억지로 이간질하고 회유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엘펠란 가문이 스스로 셀라하 황녀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어야 한다. 허나, 시간을 들인 신뢰 관계라는 것이 그리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
그러니, 아주 천천히 공략해야만 한다.
엘펠란 가문이 셀라하 황녀를 따르는 것은,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자기들 역시 한층 더 높은 지위와 벼슬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 확신을 무너뜨려줄 필요가 있다.
엘펠란 가문보다 각별한 경쟁자가 등장해주면 된다.
훨씬 더 유능한 인재가 포진해있고, 이미 권력을 한 번 장악해 본 적 있어서 벼슬자리에 능숙하며, 백작가보다 훨씬 권위 있는 공작가 인데다가, 훨씬 더 강하고 능력있는 후계자를 보유한 가문이… 고개를 숙인 채 셀라하 황녀의 슬하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으로, 엘펠란 가문의 지위는 흔들거리게 된다.
엘펠란 가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도 자기네들을 중용하기 보다는 로스테일러 가문을 중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 것이다.
그 약간의 의심의 씨앗.
권력 쟁취를 위해 쓰다 버려지는 희생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씨앗을… 은밀하고도 확실하게 적들의 틈바구니에 심어놓는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셀라하 황녀의 최측근인 엘펠란 가문이 스스로 충성심을 내려놓게 만드는 시발점이 될 터이다.
– ‘셀라하 언니는 아마 당신을 가지고 싶어 할 거에요. 권위 있는 공작가 출신이고, 강하고, 영향력 있으니까.’
황족 숙소의 테라스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던 페니아 황녀의 이야기.
– ‘지금까지는 완전히 적대한 입장이었지만, 먼저 고개를 숙이고 권위를 인정하며 찬찬히 다가가면… 셀라하 언니는 절대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마다하지 못해요.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은… 셀라하 언니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사람이거든요.’
– ‘갑작스럽게 살가운 듯이 굴면 그 쪽에서도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 ‘처음에는 그렇겠죠. 그래도, 셀라하 언니는… 절대로 이 미끼를 놓칠 수 없을 거에요.’
찻잔을 내려놓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황족의 피를 이어 받은 백금발의 소녀가 아련한 눈으로 이야기 한다.
–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넝쿨째 들어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꽉 움켜쥐려고 할 거에요. 하지만… 셀라하 언니에게 있어서,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은 그 자체로 독이에요.’
대기실 쪽으로 향하는 복도.
그 반대편 끝에 있던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병사 여럿이 복도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필시 황제를 알현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을 터인데, 그 전에 먼저 황실 호위병이 움직인 것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일정을 위해 움직이는 병력이 아니다.
셀라하 황녀가 독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대동한 병력인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대련 일정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모든 무대가 끝이나고, 황제를 알현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선수쳐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셀라하 황녀가 직접. 나를 독대하기 위해서.
병사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나온 것은, 날카로운 눈매를 드러낸 고혹적인 인상의 황녀.
서리의 황녀 셀라하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는 늘 그렇듯 멍한 눈으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쌔근쌔근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고, 타냐는 남들 모르게 조용히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황족의 피를 타고난 자가 직접 누군가를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보통은 본인이 있는 건물의 접견실로 불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나를 만나기 위해 대기실 복도까지 행차한 것이다.
드러난 표정은 아직, 경계심에 가득찬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