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1)
독이 든 성배 (2)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에 대해선 많이 드러난 게 없다.
4막에서, 로스테일러 가문의 참사에 비극성을 더 부여하고, 몰입감을 올리기 위해 희생되는 등장인물 정도의 비중이 전부다.
힘을 추종하고, 권위를 숭앙하며, 혈통의 고귀함에 집착하는 그녀는 빈말로도 플레이어의 호감을 사기 힘든 자였다. 뭐, 후일 악신 메뷸러의 힘에 먹혀버려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의도된 기색이 다분하긴 했다.
아랫 사람들을 막 대하는 장면들이 굳이 강조되거나, 권력을 좇으며 비릿하게 웃는 모습 따위를 계속 내비치는 걸 보면… 메뷸러에게 처참하게 먹혀 사라지면서 모종의 후련함을 자아내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셀라하 황녀는 살아남았다.
메뷸러의 잔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역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고 남아있음으로써, 셀라하 황녀 또한 이 무대 위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 누가 보든 간에, 셀라하 황녀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인으로서 설계된 인물이다. 그녀의 역할은 꼴사납게 망가져서 비탄의 비명을 지르며 추하게 퇴장하는 것이다.
퇴장해야할 때 퇴장하지 않은 그녀의 존재는 황실세력의 구심점으로서 너무 큰 변수로 남았다. …이제 물러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내 계획에 훼방을 놓는 인물로서는 남아선 안된다.
“내가 직접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다니. 큰 영광으로 알고 있거라.”
서리처럼 얼어붙는 듯한 느낌의 푸르스름한 머리칼이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감정하면서도 권위적인 듯한 말투엔 언제나 한기가 서려있는 느낌이다.
“또 만나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셀라하 황녀님.”
“재밌는 일을 했더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직접 알현하게 된 것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쭈뼛쭈뼛 눈치를 보고 있던 타냐는 덩달아서 고개를 숙였으나, 루시는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루시 메이릴은 악신 앞에서도 빳빳이 고개를 들고 서있던 자다. 하물며, 대놓고 에드 로스테일러를 사지로 내몰려 했던 악인의 앞에서 예를 취할 이유가 없다.
셀라하는 그런 루시를 보더니, 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루시 메이릴. 황실에 조사차 방문했을 때 오만방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여기에서는 이토록 조신할 수가 없구나. 이 사내의 면전이라 그런 것일까. 참 웃기는 일이구나.”
대체 루시가 황실에서 무슨 망나니짓을 일삼고 왔길래, 루시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이부터 가는 것인지…
듣자하니 페니아 황녀가 어떻게든 설득해서 다시 아켄섬으로 데려왔다곤 하는데, 그 전까지는 루시와 셀라하 황녀가 신나게 신경전을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을 뿐이다.
제 아무리 루시라 해도, 일국의 황녀에게 대놓고 해코지를 해대다간 대역죄인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무력만으로 뭐든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대충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무려 홀몸으로 악신 메뷸러를 내쫓아버린 그 지대한 공을 전부 퉁쳐버릴 정도로… 신나게 날뛰고 온 모양이다. 아예 신물이 나버린 셀라하 황녀의 표정을 보면 얼마나 골치가 아팠었는지 느낌이 온다.
“루시 메이릴에 타냐 로스테일러를 대동하고, 뒷배로는 페니아까지 두고 있는 것일까… 그 나이의 사내 치고는 꽤나 이룰만큼 이뤄냈구나.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봤을 때엔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한 쪽에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 루시 메이릴, 한 쪽에는 어린 나이에 로스테일러 가문과 실베니아 학생회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
뒤에는 자애의 황녀 페니아까지 세우고 있으니, 셀라하 황녀 입장에서는 수상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확고 부동한 독자 세력을 구축해가고 있는 자가, 굳이 셀라하 황녀의 이름을 드높이려 들 이유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셀라하 황녀는 대놓고 로스테일러 가문과는 척을 지고 있는 입장인 것이다. 로스테일러 가문이라는 기득 세력에 대한 반감을 역으로 이용해서 정치적인 입지를 다진 인물이니까.
그러니, 상대가 먼저 화친을 보내오는 이 요청엔 의심의 칼날부터 들이밀고 보는 게 당연하다.
“네 덕에 내 면이 많이 살았구나. 아바마마께서도 내 군주로서의 자질을 더 높게 쳐주시는 느낌이 드니, 큰 빚을 진 것이야.”
일단 셀라하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였으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곧이 곧대로 감사하며 네게 포상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을테지?”
고압적인 태도로 내려다보는 셀라하의 모습에 호의라고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난공불락의 여제다.
많은 자들이 그녀의 무릎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발 끝에 입을 맞추며 호의를 사려고 했을테다. 허나 그 누구도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인간은 출세의 수단일 뿐이고, 그녀의 호감을 사는 인간은 출세에 도움이 되는 인간일 뿐이다.
타고난 능력과 고귀한 혈통,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느냐. 사탕발림과 환담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들은 결국 평생 남 비위나 맞추다 살 자라고 확신할테지.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면서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많이도 봤다.
셀라하 역시 황실 권력의 꼭대기 부근에서 평생토록 추앙받으며 살아온 자이기에, 어지간한 부류의 인간들은 다 만나봤을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거만하게 구는 셀라하의 행동과 권위에 눌려, 비위를 맞추고 고개를 팍 숙이면서 콩고물을 바라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있었을테고.
인간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그녀의 사고방식에 반감을 가지며, 눈을 부릅뜨고 정의감을 불태우는 정의로운 자도 있었을테다.
추앙하는 자들에겐 포상하고, 반감을 가지는 자는 후회하게 만들며… 셀라하는 그렇게 군림해 왔을 터.
이런 자들을 쥐고 흔드는 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타인을 찍어누른 채 살아온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未知)’다.
어느 한 쪽으로 명확하게 규정되는 인간은 대처하기 쉽다.
그러나, 아군인지 적군인지, 내게 도움이 될 것인지 혹은 독이 될 것인지.
배척하는 것이 맞는지, 끌어들이는 것이 맞는지… 애매모호한 자야말로 군림하는 자들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럴리가요. 저는 그저 순수하게, 셀라하 황녀님에 대한 경의를 표했을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이야기 했다.
본인은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게는 셀라하 황녀의 얼굴에서 미묘한 경계심이 남아있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언제나 그런 묘한 위화감이 서려있다.
이 자를 내 밑에 두는 것이 도움이 될지, 독이 될지를 항상 판단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잘못된 구성원을 제 휘하에 들였다가는 오히려 집단을 어지럽히는 미꾸라지가 되고 만다.
“네가 나를 지지해야할 이유가 뭐가 있지? 나는 너희들을 보란 듯이 적대하고 있었는데?”
“저는 저 스스로의 판단을 내릴 때, 그런 감정적인 사유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입지 같은 것도 생각 안합니다. 제 판단의 근거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인간은 간사한 생물이다.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더 가지고 싶어하는, 묘한 열망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는 생물이다.
“황제가 될만한 자는 누구인가? 저는, 셀라하 황녀님이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입 바른 말을 하는 솜씨가 좋구나. 확실히, 달콤한 말을 듣고 싶을 때 옆에 두기 좋은 인물이로다.”
셀라하 황녀는 비릿하게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 말에 내재된 뜻은 ‘그런 입바른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나, 네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초에 페니아의 곁에 서지도 않았겠지.”
“제 말을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저는 딱히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셀라하 황녀님께서 믿어주시든 아니든, 저는 제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뭐, 곧이 곧대로 말하리란 생각은 안했다. 다만, 이번에 내 이름을 언급해준 덕에 내 입지가 좀 더 높아진 것은 맞구나. 그것에 대해선 감사를 표하마. 다만, 그 뿐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드높은 소녀다. 감사를 표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큰 양보를 했다고 볼 순 있겠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허나 이 정도로 내 환심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란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 같은 건 절대 곧이 곧대로 받지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안타깝습니다.”
긴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일 없이,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끝내자 오히려 셀라하 황녀가 팔짱을 끼고 불만인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전혀 없다.
오직 그 뿐이었다.
일단 형식상으로는, 내가 셀라하 황녀의 공을 추앙하고, 그녀를 받드는 형국이다.
셀라하 황녀 입장에서는 이 이상으로 나를 추궁하거나, 파고들만한 지점이 전혀 없다.
그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마치는 것으로, 서로의 탐색전은 마무리 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고생이 많으십니다. 직스 도련님.”
“아니요. 벨 씨야 말로 항상 오필리스관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자기가 직접 보조하던 사람에게 존댓말을 듣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벨이다.
이왕이면 말을 놓고 하대해주길 바라곤 하지만,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스는 썩 상쾌한 표정으로 벨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셀라하 황녀와 한바탕 신경전을 치르고 난 뒤, 대련회의 나머지 일정이 마무리 될 때 즈음이 되자 추격자들이 도착했다.
애초에 직스는 대련회를 관람하고 있었고, 벨도 루시를 추격하는 부분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다.
두 사람이 각각 타냐와 루시를 잡으러 나타났을 때, 서로를 보고선 또 둘 사이의 묘한 동질감을 형성한 느낌이다.
대체 내 주변 사람들은 왜 쓸 데 없이 아련한 이유로 동질감을 형성해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타냐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군요.”
“벨 씨는 루시를 찾으러 오셨군요.”
벨과 직스는 서로를 안타까운 눈으로 잠시간 쳐다보다가, 이내 각자 용무를 처리하기 위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맡아두고 있던 분실물 (타냐, 루시)를 건네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문득, 루시를 잡아 끌고서는 묘한 위화감을 느낀 벨이 먼저 물었다.
평소 같으면 저항다운 저항은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끌려가는 루시이건만, 오늘따라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은 느낌이다.
“잠시, 셀라하 황녀님이랑 대담을 좀 나눴거든. 옆에 동석했어.”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하셨겠군요.”
“뭐, 정국이 정국이다 보니 꽤 날이 서있긴 했지.”
“…난 그 여자 별로 맘에 안 들어. 싫어.”
루시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지만, 당사자인 나는 별로 신경쓰는 기색을 내비치진 않았다. 애초에 셀라하 황녀와 나 사이의 입장이 되면, 그 누가 되었든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인 진영의 반대편에 서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 정도 쯤 되면 악감정이 쌓이지 않는 게 더 어렵다.
“그러고보니 대련이 끝나고 셀라하 황녀님의 공으로 돌리셨었지요. 의외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할만 해.”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셀라하 황녀님한테 그런 회유책이 먹힐지 저는 의문입니다.”
직스는 망설이면서 이야기의 운을 뗐다.
“굳이 나쁘게 말하긴 그렇지만, 셀라하 황녀님은 정말로 자존심이 세신 분 아닙니까? 빚을 지워두면 그것을 기억해두고 보답하려 하기보단, 오히려 상대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란 걸 알고 이용하려 들 것 같습니다.”
함부로 이야기를 하면 황족에 대한 모독이 된다.
그럼에도 직스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지, 직스 치고는 꽤 과감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런 접근방식은 오히려 상대에게 만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것만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나도 좀 회의적이긴 하다만, 페니아 황녀님이 워낙 강력하게 이 방향성이 맞다고 목소리를 드높이셨거든.”
나는 가기 싫다고 벤치 구석에 박혀있는 타냐를 떼내며, 직스에게 어렵사리 대답했다.
“적어도 나보다는 셀라하 황녀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실 것 같으니,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필시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렇군요. 선배님 판단이 그러시다면 뭐… 자, 회장님. 갑시다. 쌓인 축제 일이 한 가득입니다.”
“그… 직스 선배님. 오늘 안에 처리해야할 안건이 몇 개 남았는지 기억하나요?”
“아니스 선배님이 정확히 숙지하고 계실텐데… 사실 오늘 안에 처리해야할 일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왜, 왜요?”
“어차피 오늘 안에 처리 다 못합니다.”
타냐가 아연실색을 하며 직스의 손에 잡혔다. 같은 피가 흐르는 동생을 악마에게 내주는 듯한 묘한 배덕감이 밀려 올라왔으나, 어쩔 수 없다…. 이게 맞다….
“어쨌든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아직 축제도 많이 남았으니까, 둘 다 힘 좀 내고.”
아직도 축제의 분위기는 뜨겁다.
나는 대련 준비 하랴, 캠프 관리 하랴, 개인적인 마법 수련을 하랴 축제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축제 막바지 정도는 분위기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
아마 셀라하 황녀 또한 좀 더 실베니아에 머무를 테지. 그 동안 나에 대한 정보도 좀 더 수집할 것이고,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 이유도 제대로 분석하려 들테다.
― ‘더 이상 뭘하지 않으려 해도 괜찮아요. 가만히 있으면… 셀라하 언니는 알아서 꿰어들거에요.’
페니아 황녀가 그렇게 까지 단호하게 이야기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말을 좀 더 믿어보도록 할까.
아직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렇게 루시를 잡으러온 벨과 타냐를 잡으러 온 직스를 배웅했다.
다시금 조용해진 대기실 복도에 홀로 앉아서, 한참동안 가만히 쉬고 있었다. 황제를 알현하러 가기 전까지는 좀 시간이 있으니, 휴식을 취해도 괜찮은 시기였다.
문득 내가 다시 대기실에 앉아서 쉬려하는 순간이었다. 루시를 데리고 떠나려 했던 벨이 갑자기 내 대기실로 돌아서 들어왔다.
“아, 에드 도련님. 전해드릴 말이 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전할 말?”
“예. 사실….”
―쾅!
대기실 문이 보란 듯이 활짝 열린 것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없어…!”
예니카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황제와 황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대련장 관객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어서, 학사 직원과 학생회원들이 어떻게든 인원을 통제해보려 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성군 클로엘 황제를 찬양하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가 웅웅 울려댈 지경이다.
이런 복잡한 곳에서 길을 잃으면 시간 낭비가 심하다. 대충 에드 로스테일러의 얼굴도 보았고, 황제의 모습도 멀찍이서나마 보았으니 부모님을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허나, 예니카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오르테와 셀라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둘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없다. 잠시 예니카와 떨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처음 아켄섬에 들어와 본 두 사람이 실베니아 내부 구조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뭘 알고 돌아다닐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문득 불안한 감정이 예니카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시골 출신의 기운 넘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장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을 면전에서 지켜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 먼 곳에서 선물 바리바리 싸들고 아켄섬까지 달려왔을 정도인데, 이렇게 코앞까지 은혜로운 도련님이 있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두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야 어떻게 기세로 얼버무려왔지만, 여기서 빨리 데리고 나지 않으면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기 시작하자, 예니카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좌석 근처를 찾아봐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이윽고, 고향에서 챙겨온 선물상자가 든 봉투가 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자, 예니카는 불안한 예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이고, 에드 도련님!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너무 큰 영광입니다! 예니카의 애비 되는 몸입니다. 힘써주셔서 우리 예니카가 많은 덕을 봤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도저히 퓰란에 박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직접 선물 싸들고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엉덩이가 가볍지는 않은데, 이런 큰 은혜를 입고 어떻게 집에만 박혀 있겠습니까!”
“여보! 주책이 심해요! 엉덩이라뇨! 공작가 도련님 앞에서 그런 천한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어떻게 해요! 에드 도련님, 용서하세요. 그 이는 하루 종일 소젖만 짜고 사느라 귀족의 예같은 건 잘 몰라요. 물론 저도 그런 건 잘 몰라서… 저희 천한 것들이 결례를 범해도 아 몰라서 그러는구나 하고 아량넓게 넘어가주세요…!”
오르테 페일로버, 세일라 페일로버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부부는 척 봐도 마을 일꾼과 아낙네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경계 인력들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참가자 대기실까지 오려면 관계자들 외엔 출입이 허가가 안되는 내부 복도를 쭉 가로질러서 들어와야만 한다.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아이고, 에드 도련님. 들어오셨습니까라니요, 말이 너무 깁니다! 말이 너무 길어요! 그냥 짧게 하십쇼! 저 사나이 오르테, 나서야 할 때와 주제를 아는 남자입니다!”
“마, 맞아요. 에드 도련님! 그냥, 뭐냐 니들? 아니면… 니들이 뭔데 여기에 있냐? 정도로면 괜찮아요!”
“자, 잠깐… 세일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여보, 이럴 때일수록 더 저자세로 나가야 해요. 에드 도련님. 그냥 천 것들이 오지랖 부린다 생각하시고 여기 이 선물들을 받아주세요. 저희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저희 목장에서 제일 좋은 소를 잡아왔거든요.”
세일라는 바구니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을 꺼내더니, 대기실 탁자 위에 보기 좋게 도열해놓았다.
“저희 페일로버 목장의 고기들은 높으신 분들도 따로 찾으실 정도로 품질이 좋거든요. 실망 시키지 않을겁니다! 아무렇게나 해드셔도 정말 맛이 좋으니까, 사용인들에게 가장 자신있는 방식으로 요리해달라고 지시하시면 됩니다!”
“아이고, 사용인 아가씨. 이거 진짜 정말 좋은 고기니까… 꼭 그에 걸맞은 요리를 선사해줬으면 좋겠네… 좋은 재료는 좋은 요리사를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이니까…”
사용인 같은 거 없고, 그냥 내가 직접 요리해먹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나는 굳이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방금부터 내 옆에서 루시를 데리고 멍하니 서있는 벨 마이아를 내 개인 사용인으로 착각한 것 같다.
분명 오필리스관에서 벨의 얼굴을 보았을텐데, 딱히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오필리스관 사용인이면 내 사용인이기도 하다는 듯이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애초에 오필리스관 소속도 아닌데…
“아, 알겠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벨 마이아가 말을 더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문득 곁눈질로 벨 쪽을 보니, 뭔가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저 쪽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뭔가 꼭 내게 전해줘야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아직 전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다.
물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실망이구나, 벨…….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저희 예니카가 정말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에드 도련님! 혹시 폐를 끼치거나 하진 않았지요…?!”
요컨대 부모님 앞이니까, 예니카를 좀 띄워달라 이 이야기 아니던가…!
“확실히 예니카는 뛰어난 친구입니다. 두 분을 닮아서 인성도 바르고, 매사에 열심히고, 실력도 출중한 제 절친이지요.”
“친구…! 친구라니… 여보 들었어?! 이름난 중앙 귀족가 도련님이 예니카를 보고… ‘친구’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뭔가 리액션에 호들갑이 많아서 같이 있기만 해도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일단은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니카에겐 빚이 많다. 부모님 앞에서 어깨 좀 으쓱할 수 있도록 띄워주는 일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정령술은 물론이고, 여러 원소학 기초들도 탄탄히 잡혀있어서 여러모로 수련할 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청소나 요리 같은 가사들도 어찌나 능숙하던지, 집에서 지낼 때부터 훌륭히 교육 받은 것 같더군요. 정말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건실한 소녀는 보기 힘든데… 두 분의 교육이 훌륭하신 덕입니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에드 도련님! 우리 예니카가… 허허… 허허허…. 허허허 하하하하하하하!‘
입꼬리가 정직할정도로 벌떡벌떡 올라가는 게, 보고 있기만 해도 오르테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훤하다.
오히려 투명한 유리처럼 진심을 내비치는 이런 인간들이, 대하고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법이다.
속내를 감추고 서로의 의중을 떠보기만 하는 고위 귀족들 간의 대화보다는 훨씬 더 직설적이고 시원한 것이다.
“저희가 좀 걱정이 많았습니다! 사실, 대기실 복도는 슬쩍 관계자인 척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페일로버의 이름을 대니까 그럭저럭 통과시켜주더군요. 과연, 예니카가 얼마나 신뢰받는 입장인지 한 방에 이해가 되어서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함부로 돌아다니지는 않으시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래야지요! 에드 도련님! 어쨌든 부디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또… 폐가 안 된다면 에드 도련님의 거처에 가서 직접 요리를 해드리고 싶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오르테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훌륭한 사용인 분이 계시지만, 첫 요리는 저희가 직접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희 고향의 고기는 저희가 가장 잘 요리하지요. 맛 만큼은 정말 자신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저희의 솜씨를 보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맞아요. 제 남편은 섬세함은 모자라지만, 저랑 함께하면 일류 요리사들도 부럽지 않은 맛을 낼 수 있거든요. 정말 깜짝 놀라실 거에요!”
세일라는 자기 팔을 걷어붙이며 힘차게 말을 덧붙였다. 저렇게까지 자신 있어 보이는 모습도 흔치 않은 것이다. 이 정도 쯤 되면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뭐, 그 정도야… 근데 제 거처가 상상하시는 거랑은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안됩니다!”
거기서 갑자기 뛰어든 것이 루시를 안고 있던 벨 마이아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벨?”
“사, 사용인씨…?”
“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인 것인지, 내 의아한 시선을 가만히 받고 있던 벨이 땀 한방울을 삐질 흘리며 이야기 했다.
“그, 그러니까. 요리라는 것은 저희 일류 메이드에게는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에드 도련님 쯤 되면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일류 메이드가 동행하시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에드 도련님… 저희 주인님은 일류 요리사가 자존심을 걸고 요리하는 최고급 요리만 입에 대십니다. 함부로 에드 도련님의 저택에 다른 요리인을 들이는 것은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저에 대한 모독입니다.”
벨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뭐 주인님이니 뭐니 이상한 거짓말까지 일삼고 있었다.
벨은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이라든가, 긍지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생업의 일환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요리를 잘하긴 하지만, 그것에 쓸 데 없는 자존심을 챙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벨은 뭔가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절대로 내 거처에 오게 할 수 없다는… 묘하게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