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2)
독이 든 성배 (3)
다이크의 대기실.
쓰러져서 의식을 잃은 채 간단한 처치를 받고 있는 다이크의 모습을 보면서, 발베론 엘펠란은 남들 모르게 혀를 찼다.
풍성한 볼륨이 여기저기 들어가서 고풍스러움이 강조된 귀족 복식을 하고 있는 사내는, 제 피를 이어받은 다이크와는 다르게 호리호리하고 얇상한 인상이었다.
코 끝에 슬쩍 나있는 수염과 깡마른 볼, 왠지 모르게 초췌한 듯한 기색. 전사로서는 훌륭하다 말하기 힘들지만 눈치와 언변에는 어느정도 능한 인물이다.
명문 무가 엘펠란 가문에 어울리는 가주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엘펠란 가문을 어느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인물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전투보다는 정무적인 능력을 타고난 인물답게, 다이크가 이 결투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두들겨 맞을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체격 차가 나는 전투에서 다이크가 손도 못 쓴 채 당하기만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셀라하 황녀님께서 크게 실망하셨겠군… 그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했는데… 젠장…’
엘펠란 가문은 셀라하 황녀에게 받은 공덕이 크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틈만 나면 황실 정무 회의에서 엘펠란 가문의 이름을 언급해주고, 가문의 핵심 인사들을 요직에 꽂아주고, 명문 무가라는 이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황실 기사단의 견습기사 몇 자리를 내주는 등… 엘펠란 가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셀라하 황녀와의 연줄이 출세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근래들어 중앙 권력에 손을 뻗치느라, 무가로서의 기분에 충실하지 못했던 탓일까.
가면 갈수록 인재가 줄어드는 형국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다이크 엘펠란이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호재다.
4학년 전투부의 수석이라는 것만으로도 졸업 이후에 쭉 그 명예를 안고 살아갈 수 있을 터.
기본적으로 실베니아를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하기만 해도 대단한 인재로 인정 받는 기류가 있는 한, 다이크 정도면 엘펠란 가문의 그럴싸한 간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이크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까.
그 육중한 몸이 들썩거리면서 겨우 호흡하고 있는 모습을 앞에 두고서… 발베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쓸모 없는 놈… 모처럼 예상치도 못한 보물이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건만…’
– 끼익
그 때, 허가도 없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안 그래도 심기가 편치 않았던 발베론이 인상을 팍 구기며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구긴 표정이 순식간에 확 펴졌다.
그와 동시에 발베론은 얼른 튀어나가 들어온 자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세, 셀라하 황녀님…!”
호위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이크의 대기실로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발베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서리의 황녀 셀라하였다.
“여, 여기까지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언질을 주셨더라면 사람을 보내놓았을텐데…!”
“아니다. 나도 다른 용무가 있어서 온 김에 들른 셈이니.”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다이크를 보고, 셀라하 황녀는 혀를 찼다.
슬쩍 보인 기색이지만, 발베론은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철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셀라하 황녀를 실망시키는 것은 곧 엘펠란 가문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애초에 셀라하 황녀가 없었을 때도 엘펠란 가문은 나름대로 성과를 내며 무가로서의 자질을 다지며 살았지만, 한 번 중앙 권력과의 연결이 생기고 나면 그 특혜에서 벗어나오는 데에는 큰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없었을 때는 그럭저럭 잘 버텨냈지만, 손에 들어오고 나면 잃을까 두려워지는게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구심점에 서있는 것이 저 셀라하 황녀다.
중앙 권력에 엮이는 것은 확실히 많은 제약을 생기게 만들지만, 어쨌든 셀라하 황녀가 황제가 되기만 하면 엘펠란 가문도 제국 중심 가문으로 급부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그 때까지만 줄을 잘 잡으며 버티고 있으면, 발베론 엘펠란 본인도 전성기 크레핀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대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셀라하 황녀님. 말씀드린 것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 엘펠란 가문 쪽에서도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변명은 됐다.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 정도로 빠르게 강해질줄은 나도 몰랐으니. 굳이 뻔한 추궁과 질책은 하지 않으마.”
셀라하 황녀는 생각보다 기분이 썩 나빠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대중들과 클로엘 황제 앞에서 제 영향력을 과시하는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다이크 엘펠란이 아닌 에드 로스테일러의 입으로 찬양의 말을 들은 것은 계획과는 다르긴 했으나, 그래도 결과가 좋았으니 썩 표정을 구길 일까진 아니다.
다만, 아랫사람의 실책에 대해 관대하게 굴지는 않는다.
“허나, 질책하지 않는다 하여 내가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네 호언장담을 듣고 나도 흡족한 기분이었던 것이 정말 바보 같게 느껴지는구나.”
“죄, 죄송합니다… 셀라하 황녀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자각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로다. 너는 생각이 아주 짧았다. 그리고 그런 너를 믿은 내 생각도 아주 짧았지.”
차갑게 식은 셀라하 황녀의 눈은 언제나와 같다.
제 아랫 사람이 되어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면, 셀라하 황녀는 가차 없어진다.
“내가 엘펠란 가문에 걸었던 기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기대감이 정말로 허탈하구나.”
“저,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자중하고 있으려무나. 오늘 일에 대해서는 후일 이야기해보자꾸나.”
“아, 알겠습니다…!”
발베론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채 송구스러운 듯이 이야기했다.
난처한 듯이 목소리를 떠는 그 꼴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마치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 같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스워서, 셀라하 황녀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내 하다하다 적대 세력의 찬양을 받게 되는 날이 오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로다.”
셀라하 황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련장 한 가운데에서 셀라하 황녀를 우러러 보던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 루시와 타냐를 양 옆에 대동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제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나서 발베론을 쳐다본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한심한지, 이런 자를 고귀한 혈통의 귀족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싶다.
황족 앞에서조차 당당하고 고고한 표정으로, 제 할 말을 다 하는 에드 로스테일러와는 너무 비교된다.
측근이라는 것은 본디 빌빌 기고, 아첨을 하는 맛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그러면서도 제 중심과 뚝심만큼은 지키고 있어야 한다.
‘페니아에겐 너무 아까운 인재긴 하지.’
대차게 몰락해서 바닥 끝까지 찍어봤다가 다시 올라온 인간. 그렇기에 고위 귀족의 고고함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인간 본질의 추악함까지 모두 경험해본 자다.
로스테일러 출신이라 정무 능력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고, 전투 능력은 더 따질 것도 없으며, 인맥도 출중한 느낌이다.
정치적으로 적대하게 되었으나, 아군으로 회유할 수 있다면 이만한 참모가 또 없다.
군주로서의 삶이란 걸 깊게 이해하고 있는 셀라하 황녀는 잘 알고 있다.
본디 군림하는 자로서 길게 가기 위해선, 실력 있는 참모의 존재는 필수와도 같다.
아예 적대해서 회유의 여지라도 없다면 고려조차도 하지 않았겠지만, 보란 듯이 대중 앞에서 셀라하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고 난 지금이라면 또 상황이 많이 다르다.
물론 셀라하도 바보는 아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거란 계산이 깔려있다.
허나, 아직 판단해야할 여지가 너무 많다.
이런 식으로 셀라하를 두둔한 것은 에드 로스테일러의 독단인가, 아니면 페니아와 이야기가 된 것인가.
그가 셀라하 황녀에게 어떤 움직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뭘 얻어가려는 것인가.
– ‘저는 저 스스로의 판단을 내릴 때, 그런 감정적인 사유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입지 같은 것도 생각 안합니다. 제 판단의 근거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 ‘황제가 될만한 자는 누구인가? 저는, 셀라하 황녀님이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하하.”
에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셀라하 황녀는 비릿하게 웃음지었다.
확실한 건, 그 아첨은 꽤나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빈 말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헤실헤실 웃으며 식은 땀을 삐질대기나 하는 무능한 것들이, 절실함에 못 이겨 어떻게든 셀라하를 치켜세우는 꼴은 나름대로 우습긴 하다.
허나 에드 로스테일러와 같이 제 중심을 무겁게 잡고 있는 자들이 중후하게 내뱉는 찬양의 말은… 과연 알량한 천 것들의 깃털 같이 가벼운 아첨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제 아무리 혈통과 권위의 차이가 나는 자들 앞에서도, 뚝심과 지조를 세우고 있는 자들이 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황족의 피를 타고나 권력 위에 군림하는 셀라하의 앞에서조차 식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가지고 싶다.’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는 모르는 자들이 보면 소름이 돋는 광경이다.
‘그 남자를 무릎 꿇리고, 내 휘하에 들여서 휘두르고 싶도다…!’
반짝거리는 눈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가 꼭 손에 넣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한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내면에 깊게 각인된 고고한 자존감은 아예 격이 다르다. 셀라하 황녀의 콧대 높은 자존심과 음험한 권력욕은 천진난만한 아이와 빗댈만한 것은 아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사랑에 빠진 듯 하구나… 크으흐… 재밌구나, 재밌어.’
그것은, 사랑이라는 낭만어린 감정과는 한없이 동떨어지고 비틀린 것이다. 소유욕이나 독점욕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셀라하 황녀는 대충 그러모아서 사랑이라고 난폭하게 규정지어버리고서는 퉁쳐버린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비틀린 자존감을 꺾어낼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실존하기나 할까. 적어도 그녀의 집사장 데스트는 이 제국에 그런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지 오래였다.
절벽 위에 핀 고고한 장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자는 이 제국엔 오로지 클로엘 황제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 자명해 보였다.
적어도 데스트의 눈에는 그랬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는 확실히 회유할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수 있는 자다.
정무 능력, 판단력, 전투 능력, 인맥, 신분, 향후 미래성까지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자다.
그러나, 아랫것들의 사고방식 따위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셀라하 황녀가 캐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독이 든 성배다.
자신 따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심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셀라하 황녀를 바라보고 있던 발베론 엘펠란.
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셀라하 황녀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니카 페일로버의 얼굴에 핏기라는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에드의 대기실에 찾아간 예니카는, 오르테와 세일라가 그곳에서 벨 마이아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은 덤이다.
“사용인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저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평생토록 목장 일을 해왔다는 것에 깊은 자존심이 있습니다. 저희 손으로 직접 키워낸 이 고기는 저희가 직접 요리하고 싶습니다…! 부디, 아랫것들의 미천한 자존심이라 생각하고 한 번 허가해 주십시오! 절대 시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사나이 오르테, 여기서 굽힐 수는 없습니다!”
오르테 특유의 그 패기와 열정이 넘쳐흐르는 외침 소리에, 벌써부터 두통이 지끈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오르테의 열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벨 마이아는 꽤나 곤란해보였다.
“아, 안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에드 도련님의 거처에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벨 마이아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상대로 단호하게 이야기 했던 적이 있던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때도 항상 온갖 간접 화법을 써가며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벨 마이아다. 이런 모습은 그녀 치고는 꽤나 극단적이었다.
오필리스관에서 메이드 장으로서 근엄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는 절대 그런 일이 없지만, 유독 에드와의 일에 엮여서 곤란한 상황이 되면 궁지에 몰리게 되는 일이 많다.
곤혹스럽지만 어쨌든 해야할 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벨의 분전에 예니카는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대기실에 달려든 예니카는 보란 듯이 소리부터 질렀다.
“어, 엄마! 아빠! 어, 언제 여기에 온 거야! 여기 맘대로 들어오면 안돼! 에드… 아니, 에드 도련님한테 실례잖아!”
“어, 어?! 예니카! 어디 갔나 했네! 계속 찾아봐도 어딨는질 모르겠으니 우리가 먼저 와버렸잖니!”
“어, 엄마…! 아빠 안말리구 뭐했어!”
“말리다니…?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예니카는 아연실색을 해대며 달려들어와서 얼른 제 부모님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에드… 아니, 에드 도련님 미안해요! 제가 미리 말씀을 못드려서 어쩌다보니 상황이 이렇게… 어쨌든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 아니, 할게요! …아니, 해드릴게요! 설명을… 하겠습니다…? 설명할 기회를 주세요? 뭐 어쨌든 아무튼!”
평소엔 쓰지도 않는 존칭을 억지로 쓰려하니 말이 더 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니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부모님을 이 방에서 빼내야만 했다.
“뭐가 그리 급해, 예니카. 나도 딱히 급한 일 있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있다가도 된다. 네 부모님이면 나한테도 귀중한 손님이시지.”
그러나, 에드는 급할 거 없다는 듯이 예니카를 일단 진정시켰다.
이렇게 다들 정신없는 듯이 구는 게 이상하다는 모습이다.
그 시점에서, 예니카는 깨달았다.
예니카는 에드에게 전후 사정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을 하지 않는 선을 넘어서… 그간 에드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집에는 다 알렸다고 두루뭉술하게 변명을 해뒀던 것이다.
그렇다. 오필리스관을 쫓겨났던 날의 기억이 남아있다.
괜찮냐고 묻는 에드에게, 예니카는 집에서도 이해해줬고 학비도 어떻게든 빌려서 해결했으니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이윽고 동거에 대한 사실이나, 야생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들 이해해주기로 했으니 에드는 신경 쓸 것 없다는 투로 이야기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예니카는 에드가 자신을 걱정하느라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해서, 에드에게 전후 사정을 굳이 자세하게 알리진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에드 입장에서는… 예니카의 양 부모님은 예니카의 이런 모든 생활을 이해해주는, 굉장히 아량 넓으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오르테와 세일라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아량이 넓기 때문에…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이해 못해주진 않을 것이다. 에드도 두 사람을 보자마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아주 정직한 인상에, 정직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허나, 문제는 그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문이 난다! 고향에! 졸업하고, 앞으로도 평생을 찾아가야하는 고향에, 예니카가 사실은 이렇다면서… 듣는 것만으로 얼굴에 열기가 쏠리는 낯 뜨거운 소문이 펑펑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성과 손 한 번만 잡아도 등줄기에 소름이 슥슥 돋아나는 예민한 나이의 예니카에게, 그런 낯 뜨거운 소문이 고향 땅에 널리 퍼지는 것은 고통을 넘어서 고문이다…!
다 늙은 마을 아낙네들의 음담패설은 상상 이상으로 맵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예니카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충격인지라 아예 귀를 막고 다녔던 시절도 있다.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를 느끼며 코피를 쏟아낸 적도 있을 지경이다.
이번에 그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은 도시에 사는 젊은 이가 아니라 바로 예니카 본인이 될 것이다…!
지옥이 도래한다. 상상만 해도 푸근해지던 마음의 고향 퓰란이, 뜨거운 유황불이 타오르는 생지옥으로 변모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허나 눈물나는 일이지만, 전부 예니카의 자업자득이다…!
“에, 에드…! 아니, 에드 도련님…! 아직 제가 이야기 하지 못한 게 좀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후일 가져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일단은 급하게 저희 부모님과 만남을 가지는 것보다는 좀 더 여유를 가지는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는 듯한 생각이 조금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아닌가? 맞나? 맞을까요? 아닐까요?”
“예니카. 왜 혼자 생각 정리하다 폭주하는 거니? 어렸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다니까, 정말! 곤란하거나 거짓말 할 때면 꼭 이런 식으로 횡설수설 말이 많아지곤 했지. 안 그래요, 여보?”
“그렇지. 하하! 우리 예니카가 거짓말 하나는 정말 끔찍하게 못 한다니까! 부모된 입장에선 오히려 걱정될 지경이야!”
오르테가 호탕하게 웃더니 예니카의 머리를 푹푹 쓰다듬었다.
“어라, 얘 열 올라오는 것 좀 봐. 얼굴은 또 왜 이리 홍당무야?”
“그러고보니, 이미 알 거 다 알고 왔는데 숨길 건 또 뭐가 있다고 이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거니. 예니카도 참… 에드 도련님 앞에서 모양 빠지게…”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세일라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말 끝을 흐렸다.
예니카가 부모에게 숨길만한 게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양팔을 벌린 채 에드 쪽을 가로 막고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예니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묘한 가능성이 머리 안에 또아리를 튼다.
홍당무 같이 붉어진 볼과, 사정없이 떨리는 동공, 조막만한 몸집으로 양손을 벌린 채 에드를 막아서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허나, 예니카가 오르테와 세일라에게 감출만한 사실이란 건… 딱 정해져 있었다.
“여, 여보…”
“응? 세일라? 뭐야, 갑자기? 배라도 아파?”
이런 부분에 있어선 둔탱이나 다름 없는 오르테가 호쾌한 얼굴로 세일라에게 물었다.
아켄섬에 들어오자마자 직스를 보고선, 예니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떠볼정도로 사윗감에 대한 로망이 가득한 부부다.
그 덕에 지난 방학 때부터 예니카와 모종의 묘한 기류가 흐르는 남성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허나 지금 이 시점, 십수년 간 예니카를 키워내면서 올라온 감각이 소리를 친다.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서 에드를 가로막고 있는 예니카의 얼굴.
예니카가 에드를 가로막고 있는 사이, 에드에게 다가간 벨은 조용히 손바닥을 들어 입모양을 가린 채 그의 귀에 뭐라 속삭이고 있다.
에드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팍 굳으며, 동공이 살짝 커진 느낌이 들지만… 크게 당황한 기색은 없다.
그러나, 세일라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일라는 침착하게 지난 방학, 오르테와 예니카가 나누었던 대담을 떠올렸다.
“그… 에드 도련님. 아까 대련 하시는 모습 잘 봤습니다만… 혹시, 그… 역시… 활은 좀 잘 쏘시는 편이신가… 보군요…”
“예…? 네…. 뭐…. 그냥, 좀 쏩니다…”
– ‘활은 좀 쏘는 편이냐? 사윗감이랑 반주 한 잔 걸치고 과녁 좀 쏘는 게 내 로망이었는데…. 아니, 술은 아직 이르겠구나.’
– ‘화…활은 잘 쏴…’
지난 방학 예니카와 오르테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자, 세일라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마치 석상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흐음? 세일라? 왜 그러냐? 화장실 급하면 양해 구하고 지금 다녀오는 게 좋을 걸? 괜히 낯부끄럽다고 참는 건 좋지 않아! 카하하하! 좀 민망했나? 그래도 우리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지…! 크하하!”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오르테 옆에서 가만히 서있던 세일라는, 마치 지구에 운석이 때려박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떡 벌린 입은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축제 기간 동안은 확실히 매출이 크게 뛰네요. 이번 기회에 식료품 매입을 좀 더 다채롭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글쎄요. 일시적인 매출 상승에 일희일비해서 매입 방침을 바꾸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죠. 리엔나 비서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겠네요~.”
“아, 읏… 네엣.”
리엔나가 보고 서류와 함께 내온 차를 한 잔 머금은 뒤, 로브 모자를 휙 내려쓴 로르텔은 잠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축제의 열기는 생활동에도 공평하게 밀려들어와, 평소보다도 많은 인파들이 아켄섬에 들어차 있었다.
이런 축제의 열기에 함께 빠져드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좋은 돈 벌이 기회를 노느라 날려먹는 건 상인으로서 실격이다.
엘테 상회 측에서도 이런저런 특별 매입 상품을 유통하고, 평소보다도 발주량도 더 많이 들어와서 많은 이득을 봤다. 허나, 이제 축제는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상황이다.
셀라하 황녀가 아켄섬에 들어와 있다고 하니, 표면적으로는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로르텔 입장에선 얼굴 도장 한 번 정도는 찍으러 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사 쪽에서는 부교장 레이첼이 적극적으로 발주량을 늘려줄 것을 요청해왔다. 최근들어 학생회 쪽과 우호적으로 지내다보니, 학사 본부 쪽에서도 가감 없이 더 관계를 늘리려 드는 듯 하다.
사실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라는 것이 냉랭한 시기가 있다면, 반대로 온화한 시기도 있는 법이다. 발주량 증대는 매출과도 직결되니 로르텔 입장에서도 기분 나쁠 일은 아니다.
“흐음…”
“왜 그러세요? 로르텔 회주대리?”
“아뇨. 그냥… 최근 들어 학사 본부 쪽 실무는 대부분 레이첼 부교장님이 도맡아서 하네요. 오벨 교장님은 부쩍 공식 석상에 나오시질 않으시고요. 저번에 듄이 일을 냈을 때도, 현자의 봉서 협상을 직접 하러 나온 사람은 레이첼 부교장이었었죠, 아마?”
“오벨 교장님은 많이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요.”
학사 쪽 요청서류를 읽고 있던 로르텔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필리스관이 박살났을 때도 직접 뛰어 다니면서 자금 융통을 할정도로 실무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근래들어 왜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요…”
“뭔가 묘한 냄새가 느껴지시나요?”
“글쎄요.. 뭐, 사소한 것에 너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걸지도 모르죠. 그래도 한 번 짚고 넘어갈만한 부분이긴 해요. 학사 내부 동향은 저희 쪽에서도 꽤나 중요한 정보니까.”
그렇게 말하며, 로르텔은 요청 서류에 사인을 하고, 처리 완료된 서류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남은 서류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이윽고 기지개를 쭉 폈다.
“으윽, 끄흐윽…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검토했더니 그럭저럭 마무리는 됐네요. 나머지는 정기 업무 보고 서류들이죠?”
“네에. 특기할만한 상항은 거의 마무리 됐고, 이제 의례적인 검토가 필요한 항목들 위주로만 남았네요.”
“그래도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좀 피곤하긴 하네요. 급한 안건 아니니까 몸 좀 풀고 해야겠어요.”
로르텔은 창가에 가서 창틀에 스윽 걸쳐 앉더니, 팔을 이리저리 꺾고서는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저 멀찍이 보이는 학사동의 첨탑과 그 뒤로 북쪽숲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쳐다보았다.
“에드 선배님은 뭐하시려나. 지금쯤 대련도 끝났을텐데. 뭐어, 항상 그렇듯이 캠프 모닥불 근처에서 일이나 하고 계시겠지.”
그리고는 늘 그렇듯 여우 같은 미소를 짓더니, 리엔나 비서에게 남은 서류들을 챙겨두라고 이야기 했다.
“나머지 서류는 별장에서 처리해둘게요. 급한 일 아니니까 내일 오전 중에 결재 건들 전달해 두면 되겠죠.”
“그럼 사람 시켜서 자택으로 서류들을 보내둘게요.”
“아니요. 그거 뭐 얼마 되지도 않는데 제가 직접 들고 갈게요. 인력 낭비는 금물이에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로르텔은 콧노래를 부르며 남은 결재 서류들을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로브 끝을 탁탁 털 듯이 잡아 당겨서 매무새를 정리 한 뒤, 문득 거울을 보고서는 푸른색 장미가 달린 머리핀을 꽂았다. 로르텔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신구였다.
그리고 서류를 안아 들고선, 상회 건물을 떠난다.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는 로르텔의 모습에, 평소같이 음험하고 속이 검은 사업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괜시리 발걸음이 가벼워보이는 모습이다.
그 괴리감에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리엔나 비서다.
로르텔을 배웅하고 난 뒤, 리엔나도 퇴근 준비를 했다.
리엔나 비서도 마침… 축제를 좀 즐기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