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4)
독이 든 성배 (5)
축제의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밤이 되자 학사 여기저기선 폭죽이 솟아오르고, 학생 광장에서는 캠프 파이어가 높게 솟아올랐다.
오필리스관의 메인 파티홀에선 실력 있는 악단들이 와서 연주를 하고, 메이드들이 열심히 준비한 다과와 함께 환담을 나누는 학생들이 가득했고,
교직원들도 모처럼의 축제에 노점을 노닐며 학생들과 어울리거나, 연구실 조교들과 함께 식사를 즐겼다.
축제를 관리하느라 바쁜 학사 본부 소속 사람들과, 학생회원들도 근무를 교대해가며 볼거리들을 구경다니고, 걔중에서는 이 뜨거운 열기에 힘입어 사랑의 결실을 맺어보려 하는 낭만꾼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켄섬이 축제의 열기에 물들어가는 밤.
– 스륵, 스륵.
– 탁.
며칠 째 도서관에만 왔다갔다 하며 실베니아에 대한 기록들을 뒤적이던 아일라가 마침내 책을 덮었다.
축제기간에 도서관에 드는 학생은 거의 없으므로, 사실상 열람실을 독점한 상태였다.
밤색 머리칼을 위로 한 번 쓱 쓸어넘기더니, 열람용 의자에 등을 휙 기대고선 한숨을 쉰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오는 테일리에게 매번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불쑥 불쑥 솟아올랐으나,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축제 조차도 뒤로한 채 어두운 열람실에 박혀 몇 날 며칠을 기록만 조회하다보니, 슬슬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실베니아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이미 밝혀진 것들 뿐이다. 이런 아켄섬의 학생 도서관 구석에서 열람할 수 있는 정보만으로는 실베니아의 숨겨진 의도나 기행에 대해서 분석할 수는 없다.
실베니아가 남겨놓은 기록들은 대부분 단편적이고, 구전된 것들이 많다.
여러 책을 저술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하나 하나가 국가의 보물 취급을 받아 황실 도서관에 보관되거나, 아니면 유실된 것들이다.
일반 학생 선에서 접촉할 수 있는 정보들로 실베니아의 발자취를 더듬으려 해봤자 허공에 주먹질 하는 기분밖에 안 든다.
실베니아 본인이 집필한 저서.
혹은, 실베니아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남긴 기록이 필요하다.
트릭스관에 남겨진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보물 ‘현자의 봉서’
황실 도서관에 남겨진 실베니아의 ‘성위학 연구일지’
황도의 중앙기록관이 보관하고 있는 ‘성위와 마력 흐름에 관한 고찰’
생전 대마법사 글록트가 집필하다가 끝끝내 마무리 짓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성위학 개론’
그리고 실베니아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수많은 메모 조각들까지.
접근할 수만 있다면 정말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 같이 귀중한 유산들이라 일반 학생이 접근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결국 아일라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들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것들.
그녀의 발언을 듣고 기록한 것들이나, 공식적으로 발표한 연구기록들 따위다.
그런 것들에서 특이한 점이나 기묘한 부분을 발견 할 수 있었다면, 굳이 아일라가 아니더라도 다들 사학자들이 진즉 짚고 넘어갔을 것이다.
“어렵다…”
아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잔뜩 쌓여있는 문건들 중 하나를 스윽 훑어보았다.
아켄섬으로의 유배가 결정되었을 당시, 황궁 앞에 모여든 대중들 앞에서 했던 그녀의 연설 내용이었다.
– ‘여러분. 저는 끔찍하리만치 극단적인 운명론자입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일단 내려놓고, 제국 남서쪽 변방의 한적한 곳으로 추방당하는 소녀다.
허나, 그 연설에서는 비관적인 모습도, 실망한 모습도, 좌절하는 모습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 ‘하지만, 야속한 세상의 운명에 저항해야할 때가 온다면… 약속된 파국으로부터 어떻게든 발버둥쳐야만 할 때가 도래한다면… 그 땐 모든 생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 ‘저는 아켄섬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게 유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게 주어진 운명에 발버둥치기 위한, 새 발돋움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살다 보면 야속한 운명이 자신을 찍어누르는 듯한 기분에 빠질 때가 있을겁니다. 세상이 나를 조련하는 것 같고, 삶이 내 발을 걸어오는 것 같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을거고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 ‘내가, 운명이랑 싸워서 이겨볼테니까.’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아켄섬으로 떠난 대현자의 뒷모습을, 황도의 국민들은 당당히 전장으로 떠나는 장군의 모습처럼 느꼈다고 남아있다.
그 기록에, 아일라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당시 시점에서 이미 세계에서 제일가는 성위 마법의 대가가 되었던 실베니아다.
아일라는 잠시간 숨을 머금고 있다가, 다시 공개된 그녀의 연구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성위 마법을 통해 어떤 미래를 보고 난 뒤, 오랜 세월동안 그 미래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해왔다.
– ‘시간의 흐름은 가변적이다. 마력의 흐름을 비틀어 꺾는 것으로, 약속된 미래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직접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의 법칙을 규정하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실증 가능한 실험을 할 수가 없다.’
–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성위 마법은 세상의 섭리를 비틀어 꺾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규정된 운명의 흐름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선, ’변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 ‘이 세상에 복속되지 않은 변수를 불러들여, 약속되어 있는 세상의 법칙과 정해진 미래로의 흐름을 억지로 비틀어 꺾는다. 끊어진 미래를 이어붙이고, 더 이상 이어져나가지 않을 시간을 억지로 회생시킨다. 그렇게 하려면… 역시 필요하다.’
– ‘세상이 나아갈 길을 알고, 억지로 흐름을 꺾어 시간이 나아가는 방향을 비틀 줄 아는 선지자.’
– ‘다른 세상에서 온 자.’
*탐욕스러운 귀족. 그리고 그런 자에게 첩으로 팔려나가는 딸.
이제는 고전적이다 못해 한바퀴 빙 돌아서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다.
상황을 보고 있는 벨 마이아에게는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당장 자기 과거사부터가 그런 고전적인 이야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딸이 귀족가 도련님을 후려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라는 이야기가, 사실은 잘 나가는 귀족의 노리개 중 하나였다-로 치환되는 건 순식간이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페일로버 부부는 귀족들 사이의 문화를 제대로 모른다. 평생을 토렌 마을의 목장 구석에 박혀 살았기 때문이다.
“뭐어, 기본적으로 공작가 도련님이면 이 정도는 무난하게 감당 가능하신 편이죠. 그렇죠? 에드 선배님?”
로르텔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제 아무리 권력가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여자 관계는 신중해야 한다. 누구와 교제하느냐도 권력 구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입장이니 만큼, 내연녀 한 둘 정도를 두는 데에도 혹시나 들킬까봐 몇 겹으로 안전을 기하는 작자들이다.
두자릿 수 여자를 데려다 놓고 주지육림을 구가하는 귀족이라는 건 수백년 전으로 넘어가야 겨우 볼 수 있을까 말까한 존재다.
요컨대 로르텔의 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는 세상 물정 모르는 페일로버 부부를 벙찌게 만들기 위한 견제구다.
“장난하냐.”
당연히, 에드 로스테일러가 수긍할 리가 없다…!
에드가 로르텔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자, 그녀는 아하핫하고 웃으며 머그잔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꽉 잡았다.
“오해 하시면 곤란합니다만, 그런 거창한 짓은 안합니다.”
로르텔 또한 당연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농담이 통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페일로버 부부에게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신분의 격차’라는 것이다.
로르텔 케헬른 또한 평민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으나, 어쨌든 그녀는 제 실력으로 하여금 권력자의 반열에 올라선 인물이다.
단순히 시골 목장에서 양을 치고 소 여물을 주는 자들과는 아예 격부터가 다른 입장이란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이 얼마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자인지 확실히 각인 시키기 위함이다.
공작가 도련님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여자 몇 정도 꿰어서 데리고 사는 건 일도 아니다. 일반 평민들과는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페일로버 부부 또한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기에, 새삼 한 번 더 격의 차이를 느끼고 만다.
“그, 그렇…습니까…?”
“로르텔의 말에 너무 의미 부여하진 마세요.”
“그… 그럼… 따로 각별한 관계도 아닌데, 이렇게 동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 말에는 역시 에드 로스테일러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왜냐하면… 팩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팩트로 때리면 반항할 수가 없다…!
아예 대놓고 옆에 살림 차리고 살고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도, 별장이랍시고 지었지만 거의 상주하고 있는 로르텔 케헬른도, 틈만나면 에드의 이불에 숨어들어서 동침을 하려 드는 루시 메이릴도… 표면적으로는 친우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냥 그 셋 사이의 마음에서 줄타기를 하며 노는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에드도 스스로를 변호할 논리 정도는 있다.
덱스관에서 버티기 힘들어서 오두막으로 오고 싶다고 말한 것은 예니카고, 멋대로 토지를 매입해서 별장을 올린 것도 로르텔이고, 루시는 아예 무단 침입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냥 가만히 오두막 캠프에서 생존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관계든, 장래 진로든, 미래의 일이든, 일단 목전에 닥친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뭘 할 거 아닌가.
실베니아의 졸업장을 따고, 세상을 위협하는 목숨의 위기에서 벗어나,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원한다.
처음 이 몸뚱아리에 빙의해 왔을 때부터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그 목표를 향해, 헤매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을 뿐이다. 저 멀리 보이는 목표를 향해 건실한 걸음걸이를 뚜벅뚜벅 이어왔을 뿐이란 말이다.
허나, 그런 변명이 통하겠는가.
“대체… 몇 명을 울리려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세일라가 제 입을 휙 하고 막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실례가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적과도 같은 에드의 언동에 그만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에드 도련님!”
“세일라! 생각을 하고 말을 뱉어야지!”
“아, 그래요! 미안해요! 여보! 내가 그…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례한 언동에 저도 같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에드 도련님! 그리고 저는…. 사내의 삶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르테는 갑자기 굳건한 표정으로 자기 철학을 논하기 시작했다.
“초원의 늑대처럼 고독하게 거닐다, 맘에 드는 곳에 정착하는 삶이지요. 그 과정에서 거쳐왔던 수많은 거처들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 되는 것 아닐까요…”
“여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마누라를 옆에 두고 할 말이에요?!”
“어, 허어… 그,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래, 일단 나는 세일라 당신 밖에 없어, 여보…. 오, 오해 하지 마….! 그냥, 에드 도련님의 삶을 이해한다 뭐 그런 뜻이야!”
“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니카가 엮여 있잖아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딸 예니카!”
“그, 그건… 확실히… 그렇다…”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떨며 패닉에 빠진 부부는 도저히 의견 정리가 안되는 듯 하다.
에드 또한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화제의 중심이 되는 예니카 페일로버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샌가 캠프 구석에 박혀서 메릴다를 옆에 끼고 앉아 있었다.
홍당무가 되어버린 얼굴을 자기 무릎에 묻은 채로, 책을 읽고 있던 메릴다에게 한탄한다.
“있잖아. 메릴다. 나, 부모님이 부끄러우면… 불효자인 걸까…”
[ 이해는 해. ]이미 예니카 페일로버는 넉아웃된 상태였다.
결국 상황을 정리한 것은 벨 마이아였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파문된 이후로 삶의 역정이 많아서 현재 야생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사람과 많이 엮이긴 했지만, 부부가 생각하는 그런 흑심은 아니란 것.
벨 특유의 차분하고 정적인 목소리 덕에, 페일로버 부부는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일은 벨 마이아의 특기다. 지금까지는 벨조차도 좀 당황한 와중이라 상황이 난잡하게 흘러갔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렸으면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은 방문자 숙소로 돌아가셔서 하루를 마무리 하십시오. 이 쪽은 제가 잘 정리하겠습니다.”
“그, 그래요… 사용인 아가씨. 저희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지요. 에드 도련님께도 죄송합니다.”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당황스러울만한 상황이기도 했고.”
에드는 끝까지 페일로버 부부를 젠틀한 태도로 대했다.
척 봐도, 보이는대로 무책임하게 여성들을 후리고 다니는 망나니로 보이진 않는다.
요컨대 예니카 페일로버는 여자를 밝히는 귀족에게 첩으로 매여있다기보다는, 그냥 아수라장과도 같은 연애전선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자, 페일로버 부부는 눈물이 핑 도는 듯 했다.
‘예니카… 너는 대체 어떤 싸움을 해온 거니…! 집에도 비밀로 하고, 홀로 이 먼 타지에서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나 희대의 천재 마법사 같은 사람들이랑 기 싸움을 해왔던 거구나…!’
그 고독함의 무게를 세일라는 수도 없이 통감한다.
그렇기에, 부모된 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조차 든다.
‘우리 토렌 마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먼 타향에서 이런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온 예니카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서야지…!’
‘여보, 마을로 돌아가거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이 먼 아켄섬에서 예니카가 홀로 고통 받는 걸 가만히 놔두진 않을테니까! 회관에 다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예니카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는 거에요!’
그거야말로 예니카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진 못했다. 부부는 딸을 너무 사랑했으므로.
-흠칫
로르텔을 바라보는 페일로버 부부의 눈에 묘한 결의가 서린다.
토렌 마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예니카 페일로버를 위해서라면, 마을 사람들은 대동단결해서 엘테 상회와의 거래를 끊을 결심을 할지도 모른다.
토렌 마을의 자랑, 토렌 마을의 빛, 토렌 마을의 꿈. 그게 예니카 페일로버였다.
‘흐음…’
로르텔은 두 사람이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격의 차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어볼까 했는데, 오히려 오르테와 세일라의 눈에는 로르텔을 향한 적개심 비스무리한 게 아른거리기까지 한다.
‘접근 방식을 좀 달리해야하려나.’
어쨌든 예니카 페일로버의 부모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한테 유리하도록 상황을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로르텔은 빙긋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밤이 늦었으니 마차를 불러드리지요. 방문자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되니까. 숲 입구에서 엘테 상회의 마차를 타고 가세요.”
“아니요, 됐습니다.”
오르테와 세일라는 로르텔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걸어서! 가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한 번 더 단호하게 이야기 한 다음, 구석에 박혀서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예니카 쪽으로 나아갔다.
오르테는 무릎을 꿇고 예니카와 시선을 맞추더니, 사랑스러운 딸에게 속삭인다.
‘예니카. 상황은 다 알았단다. 힘든 싸움을 해왔구나.’
‘아, 아빠…’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 있단다. 무엇보다, 저 불여우 같은 상인 나리는 확실히 우리한테는 버겁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합심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아니야 아니야! 부탁이니까 제발 절대 마을 사람들한테 알리지마!’
‘마을 사람들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은 네 예쁜 마음씨는 잘 알고 있다… 예니카…! 하지만, 지켜보는 우리의 고통스러움도 이해해줘라…! 우리는, 네가 잘 됐으면 하는 그 마음 뿐이야…!’
‘그런 착하고 마음씨 좋은 뜻이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알리기 싫은거야 제발 좀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줘!’
‘크흑… 여보… 우리 딸이, 이렇게… 착하게 자랐소…’
‘나도 눈물이 나려하네요. 여보…’
예니카는 가슴에서 열불이 터져나오려 했다.
“로르텔 나리. 우리는 못 배워먹고, 가진 것도 없어서 이런 높은 상류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가겠습니다.”
뭔가를 결의한 듯, 오르테가 로르텔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후일, 그리 웃는 얼굴로 만나뵙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딸이 소중하니까.”
비장한 어조. 꽉 쥔 주먹. 날카로운 눈매.
남자다운 열정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어조로, 오르테는 로르텔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그 어떤 해코지를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테니까!”
로르텔은 그런 오르테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 로르텔 아가씨가 생각보다도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그러게요, 여보. 단지 상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너무 선입견을 가졌나봐요. 상인이라고 다 탐욕스럽고, 돈 생각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대화 나눠보니까 생각이 훨씬 더 깊더라고?! 토렌 마을의 지리적 이점이나 향후 축산품 생산 구조 개선안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고 계시고. 또 퓰란 지방 동향 같은 것도 빠삭하신게, 확실히 거래처를 단순히 상품이나 바치는 노동꾼들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사업길을 동행하는 동반자로 인식하고 계시더라고…! 카하하하하하하하하!”
이튿날 아침, 예니카와 함께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던 페일로버 부부는 호탕하게 이야기했다.
“…엄마,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응? 별 일 없었는데? 그냥 오전 중에 상회 수석 비서가 숙소에 찾아오더니, 이런 저런 선물을 좀 주더구나!”
“그리고 아켄섬 여기저기에 있는 시설들 좀 구경 시켜주고, 또 상회 건물들도 견학시켜 줬었죠 아마…?”
“그렇지. 엘테 상회라는 곳이 그냥 돈만 밝히는 수전노 집단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건실하게 학사와의 공존을 생각하고 있더구나. 자선 사업 같은 것도 많이 하는 모양이고!”
“어찌나 직원들이 깍듯이 대하는지, 이 쪽이 다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니까!”
맛좋은 수프를 슥슥 입에 넣으며, 오르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거기다가 목장 일이라는 게 얼마나 고되고, 변수가 많고, 그러면서도 낭만 넘치는 것인지 깊게 이해하고 있더라고. 이야, 역시 그 나이에 회주 대리에 오른 자 답다고 해야할까, 견문 자체가 달라!”
“토렌 마을과의 거래 협약도 유지해주고, 오히려 품질 유지만 된다면 더 거래를 넓게 터준다고도 약조했었죠, 아마?!”
“그래, 마을로 돌아가면 다들 좋아할 거야. 후후후. 이런 희소식을 들고 돌아가다니, 벌써부터 발 걸음이 가볍구만…!”
“엄마… 아빠… 로르텔한테 완전 홀라당 넘어간 거 아니야?!”
“로르텔이라니! 로르텔 나리라고 해야지! 토렌 마을에 매년 흘러들어오는 엘테 상회의 금화만 해도 얼마인데!”
“빨리 돌아가서 목장 확장 일정을 세워보고 싶구나…! 이토록 일하는 게 기다려질 때가 올 줄이야…!”
예니카 페일로버가 간과한 것은, 로르텔은 사람을 홀리는 데에 있어선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란 것이다.
제 아무리 마음의 방패를 세우고, 적대하려고 이를 갈아도, 로르텔의 쇼맨십과 세치 혀 몇 번이면 그 마음의 벽은 허물어져 버린다.
일류 상인의 언변이란 그 정도 수준인 것이다.
모닥불 가에 앉아서, 머그컵을 스윽 쓸어내리며 웃고 있을 로르텔의 모습이 상상이 되자..
예니카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어머.”
모닥불 가에 앉아서, 머그컵을 스윽 쓸어내리며 웃고 있던 로르텔이다.
시골 변방에서 온 목장 부부의 마음을 사는 데에는 단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원래 위협이 먹히지 않으면, 핸들을 반대로 꺾어 회유하면 될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건,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로르텔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소녀였다.
간만에 상회 쪽 일도 여유가 생겨서, 오늘은 에드를 끌고 축제라도 좀 즐겨볼까 하던 차였다.
로르텔은 놀란 듯한 목소리를 냈다.
북쪽숲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가… 병사들과 함께 풀숲을 헤치고 에드의 오두막 캠프에 방문한 것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그러게요. 이런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에드 로스테일러는 강가에 낚시 그물을 확인하러 나간 참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캠프에 나타난 것은… 이 생활감 넘치는 캠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
클로엘 제국의 제 1황녀.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