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5)
독이 든 성배 (6)
“그 남자가 어떤 사내인지는 이미 대충 다 파악했느니라.”
이쯤되면, 에드의 오두막 캠프는 사실상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최중요 시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로르텔 케헬른은 불가에 앉아 차를 홀짝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모처럼 일손이 비는 날이라 에드를 달달 졸라서 축제에나 같이 나갈 생각 만만이었는데, 설마하니 셀라하 황녀가 캠프에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로써 실베니아 내의 귀빈이란 귀빈들은 대부분 에드의 오두막 캠프에 발을 한 번쯤은 들여본 듯한 느낌이다.
오필리스관 같은 귀빈 숙소도 아니고, 생각해 보니 참 웃긴 일이다.
“적대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의미 있는 일이라면,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다만….”
“…….”
“네가 이런 곳에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말이다.”
셀라하 황녀는 모닥불가에 앉은 채로 눈을 치켜뜨고는 로르텔을 바라보았다.
로르텔 케헬른은 로스테일러 저택의 참극에서 셀라하 황녀의 편을 들었던 자다. 셀라하 황녀가 에드 로스테일러를 빼돌려서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감언이설을 했던 자이기도 하다.
그런 자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캠프에 거처를 마련한 채 자리하고 있는 모습.
셀라하 황녀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 때 저택에서 내게 했던 말들도, 모두 나를 속여 넘기기 위해서 했던 말이겠군?”
로르텔은 뭐라 말할까 하다가, 일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셀라하 황녀라는 인간의 품성이 대충 어떤지는 로르텔도 파악하고 있다.
“애초에 정신을 잃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엘테상회 측에서 보호하기 위한 수작질이었구나.”
황녀를 속이려 들었다는 것이 들통난 상황.
그것도, 적대하는 자라면 거침없이 단죄하는 셀라하 황녀가 그 상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위기에 몰린 것만으로도 식은 땀이 줄줄 흘러도 이상하지 않다. 황족을 상대로 거짓을 고한 게 들켰다는 것은, 상대의 기분 여하에 따라 극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다.
그러나, 로르텔은 절대 당황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셀라하의 내면에서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평가가 일변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 잘 상기하고 있으면, 이 상황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맞아요. 저는 사실 에드 선배님 쪽에 속해 있는 인간이랍니다. 오랜 시간 보좌한 입장이고요.”
처세술이란 결국 그때그때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핵심이다.
로스테일러 저택에서는 에드를 구하기 위해 셀라하의 편에 서는 시늉을 했다면, 에드를 회유하러 온 셀라하 앞에서는 에드에 ‘예속된’ 시늉을 하면 그만이다.
셀라하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신분과 지위에 큰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자기 스스로를 에드의 앞잡이 역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셀라하의 시선 밖으로 나는 것이다.
상대가 다루는 체스말에게 일일이 화를 내는 자는 없다.
셀라하의 시선이 에드라는 인간의 됨됨이를 향하고 있다면, 그 시선의 밑바닥에 그림자처럼 눌어붙어 숨어들면 그만이다. 로르텔조차 제 손아귀 안에서 다루는 인간이라는 평가는 덤으로 더해질 터. 에드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로스테일러 저택에서의 참사가 모두 끝나고, 혹시나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을 때를 방지하기 위해 저를 미리 파견해 둔 것이지요. 저는 에드 선배님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도구 같은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셀라하 황녀님.”
“…아예 거처를 공유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꽤나 가까이 두고 다루는 것 같군.”
로르텔은 지그시 웃으며 셀라하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일단은 에드를 회유하러 온 입장이니만큼, 굳이 로르텔을 건드려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셀라하의 모든 입장을 전부 헤아리고 있는 로르텔은, 아무렇지도 않게 황족 모독의 죄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모습을 보여 주는 소녀다.
“거처를 공유한 것에는 뭐어, 사적인 이유가 더 크지만요.”
“뭐, 그 사내의 사적인 생활을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 사내의 입지와 능력이 필요할 뿐이니까. 다만….”
셀라하 황녀는 잠시 턱을 괴더니, 날카로운 눈매를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엘테 상회의 실권자를 휘하에 두고 다룬단 말인가. 페르시카가 엘테 상회를 장악하려고 수작을 몇 번 부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전부 헛수고였겠군.”
“판단은 셀라하 황녀님께 맡기겠습니다. 비천한 신분인 제가 감히 황녀님의 판단에 왈가왈부 할 수는 없으니.”
“네놈은 확실히, 능글맞은 여우같은 인간이구나.”
셀라하 황녀는 피식 웃더니 로르텔이라는 인간을 대번에 규정해 버렸다.
“참모로는 쓸 만한 인간이겠으나, 언제 뒤를 칠지 알 수가 없다. 한번 배신으로 옥좌에 앉아 본 자는, 결국 배신으로 폐위되는 법이지. 안 그런가?”
셀라하 황녀는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며, 신분의 격차가 아득히 나는 소녀 상인에게 확실히 이야기해 둔다.
발베론 엘펠란 같은 인간은 소인배에 탐욕꾼이라 행동을 가늠하기 쉽다.
그러나, 로르텔 같은 인간을 휘하에 두고 다루려거든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약점이 보이면 물어뜯고, 따를 이유가 사라지면 바로 판을 뒤집어 엎는 자다.
이런 자를 측근으로 두고 쓰려거든 언제나 총명해야 하고, 단 한 번도 빈틈을 내주어선 안된다.
“품 안에 맹수를 두고 사는구나. 그 사내는.”
“맹수씩이나 되는 인간으로 평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로르텔은 이쯤에서 화두를 마무리 짓고 에드를 부르러 갈 것이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로르텔에게 있어서, 일국의 황녀를 눈앞에 둔 이런 상황에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로르텔 케헬른은 실베니아 아카데미가 다 박살 나는 와중에도 마른침 한번 삼키는 것만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괴물 같은 이성의 소유자다.
허나, 세상 일에 예외라는 것은 반드시 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는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로르텔 케헬른이 이성을 잃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일에 연관되어 있을 때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셀라하 황녀는 그 지뢰를 정확하게 밟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셀라하 황녀는 로르텔에게 그리 말한 것이다.
너는 기회가 있다면 에드 로스테일러의 뒤통수를 치고서라도 옥좌에 오르려 들 맹수다.
에드 또한 네 출세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는 그런 인간이다. 유대라는 것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로르텔 케헬른이라는 인간을 그렇게 규정지어 버린 셀라하의 언동은, 로르텔 본인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것이었다.
목적을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로르텔을 바라보고 내린 평가.
로르텔은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허나, 관자놀이에는 십자핏줄이 비죽하고 올라왔다.
“셀라하 황녀님.”
목소리만큼은 언제나처럼 차분하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가 에드 선배님의 뒤를 칠 일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호오. 나는 상인이란 족속들이 그렇게 낭만 어린 유대를 이야기하는 건 처음 보는군. 차라리 독수리가 풀을 뜯어먹는다는 이야기가 더 믿음직하겠어.”
“어떨까요. 셀라하 황녀님.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를 너무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될 거예요.”
황족을 상대로 신경전을 치르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압도적인 신분과 권위의 격차는 입장의 차이로 이어진다. 결국 로르텔 입장에서는 은근하게 셀라하 황녀를 긁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로르텔의 주특기였다.
“과소평가? 하하… 오히려 꽤나 후하게 평가해 주고 있는 입장이지. 확실히, 엘테 상회까지 휘어잡기 직전인 걸 보아하니 쉽게 볼 인물은 아니다만… 공작가 샌님 하나 굴복시키지 못하면 내 어찌 일국의 황제가 될 수 있겠느냐?”
“굴복이라…. 확실히, 어느 한쪽은 굴복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겠네요. 황권이 엮인 일이니까.”
“어느 한쪽?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셀라하 황녀는 콧대를 높이고 거만한 웃음을 짓는다.
“내가 굴복을 해? 미안하지만, 나야말로 언제나 굴복시키는 입장이었지.”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심. 그에 걸맞은 권력과 혈통.
로르텔은 셀라하 황녀를 가만히 올려다 보면서, 비릿한 반발심과 배덕감이 피어오른다.
긴 생애에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매달려 본 적 없고, 무릎 꿇어 본 적 없는 인간.
하여튼, 쓸데없이 감정적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절실하게 필요해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의 특징이다. 뭐든지 금방 제 손에 넣을 수 있을거라고 착각한다. 그 어떤 고고한 신념도 다 꺾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럼, 에드 선배님을 불러 오겠습니다. 잠시 모닥불가에 앉아 계시길.”
허나, 로르텔 케헬른은 알고 있다.
셀라하 황녀의 회유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 * *
“죄송하지만, 저는 페니아 황녀님을 계속 보좌할 생각입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냅다 무릎부터 꿇고, 송구스러운 얼굴로 신하의 예를 다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평민도 아니고, 일단은 대륙 제일의 공작가에 몸을 담고 있던 귀족이다.
최소한의 예우 정도를 지키면서, 공손하게 대하는 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르텔의 부름에 응해서 모닥불가로 온 에드는…. 땀이 범벅이 된 셔츠를 대충 걷어붙이고, 냉수부터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던 것이다.
황족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유를 대라면 댈 수 있다.
황실도 아니고, 대륙 외곽에 있는 이 아켄섬, 그리고 그 안의 실베니아 아카데미.
중앙 권력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신분의 격차만큼이나 배움의 미덕 그 자체에 뜻을 두고 있는 곳이다.
귀족과 평민이 어우러져 교육을 받는 환경인 만큼, 신분 의식이 많이 약화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황녀나 성녀 쯤 되는 인간이라면 이곳이 아켄섬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이상의 우대를 받는다. 그 정도의 권위를 지닌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 로스테일러는 신하의 예를 취하는 시늉조차도 없이, 모닥불 건너편에 앉아서 냉수가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강가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 올라온 모습이었다.
태도에서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셀라하 황녀의 회유에 처음부터 응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예 태도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셀라하는 그 모습에 우선 코웃음을 쳤다.
“네 입으로 말했지, 황제가 될 만한 자는 역시 나라고. 실제로 대련회 끝나고 나서도 내 이름을 드높였고 말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 자가 네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너도 가까이서 지켜봐 알겠지만, 페니아는 황제가 될만한 재목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않느냐.”
로르텔은 이 대목에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시점에서 노발대발 화를 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셀라하는 침착하게 그녀의 우월함을 이야기했다.
“이미 황실 내 세력은 내 쪽으로 많이 넘어왔다. 그 귀찮은 기사단장이 페르시카 쪽에 붙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핵심 인사들은 사실상 나를 지지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능력에 걸맞은 성과입니다. 셀라하 황녀님의 인덕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겠지요.”
셀라하를 추켜세워 주고 있지만, 에드의 얼굴에 충직함이라고는 전혀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셀라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말의 의도를 모르겠느냐? 너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품었던 모든 의심을 거둬 주고, 황실 회의에서의 공격도 멈추겠다는 이야기다.”
“그래주신다면, 저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게 공짜라고 생각하느냐?”
“대가를 바라신다면 가능한 선에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만, 황권 투쟁에서 다른 사람의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해괴한 일이로구나.”
셀라하는 팔짱을 끼고서 치켜뜬 눈매로 이야기 했다.
“황권 투쟁에서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황제로서 걸맞은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정말로 황제가 될 만한 인재가 나라고 생각한다면, 내 편을 들어야 함이 맞지.”
“언제나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게 사람 아닙니까. 저는 페니아 황녀님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페니아 황녀님을 지지할 생각입니다.”
“이유를 대 보거라.”
“언제나 아래를 보고, 자애를 베푸는 정치는 겉보기에는 아름답습니다만… 그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그제야, 셀라하 황녀의 머릿속에 모든 그림이 온전히 그려지기 시작한다.
페니아는 한심한 이상론자다. 적어도 셀라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자는 그렇게 이상을 좇다 죽는다.
배신을 종용하고, 암투를 반복하고, 필요하면 죽이고, 뺏고, 적극적으로 상대를 찍어 눌러야만 살아남는 것이 권력의 세계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할 때만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다.
가능한 한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악인이 되어야 오래 명줄을 붙들고 살 수 있는 세계다.
“저는 그 길을 지탱할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 페니아가 여전히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한없이 차분하고 현실적인 이 남자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알고, 필요하다면 암투와 모략을 짜낼 줄 아는 인간. 그러면서도 페니아의 이상론을 받아들여 주고 이해해, 현실과 조금씩 타협시켜 나가 줄 인간.
이상만을 좇으면 뜬구름 잡기만 하다 현실과 유리될 뿐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그 낭만을 최대한 이 현실에 붙들고 있어 줄 자가 필요했다.
처음엔 이 사내는 페니아에게 충성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녀를 권력의 징검다리로 이용할 뿐인 자라고 생각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이 남자는 페니아를 깊게 이해하고, 그녀를 지탱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이 가진 사상의 기저를 떠받들고 있는, 큰 기둥이나 다름없는 남자다. 페니아는 이 남자가 있어서라야 비로소 뜬구름 잡는 철부지가 아니라, 자기 이상을 좇는 이상주의자로 있을 수 있다.
단순히 권력을 위해 황족의 피를 이용하려는 자라면, 되려 셀라하 쪽에서 이용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페니아를 깊게 받아들이고 있는 남자라면, 쉽게 회유되지는 않는다.
그럼 거기서 끝일 뿐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면, 다른 길을 가면 그만이다.
셀라하가 황제에 걸맞다고 생각할지라도, 계속해서 페니아를 지지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면 될 일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셀라하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르텔은 속으로 슬쩍 당황했다.
뚝심있고, 지조 있게, 자기 곤조를 지키는 사내. 능력과 인맥이 출중함에도, 끝까지 페니아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남자.
황족 숙소에서 식사를 할 때, 페니아가 왜 그렇게까지 이 사내를 살갑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페니아는 필시 이 남자와 자신의 관계를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이 남자의 밑바닥을 본 셀라하가, 무슨 생각을 품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셀라하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에서 보이는 감정을, 로르텔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으실 듯 합니다. 캠프에 오래 머무르는 게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벌레도 많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흙냄새가 몸에 배이십니다.”
세상에는, 타인의 것을 약탈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손에 넣고 싶은 보물을 보는 것처럼, 고혹적인 셀라하의 눈동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한차례 가슴속에 꿈틀 피어오르는 것은, 약탈애라고 부르는… 저속하지만 한없이 강렬한 감정이었다.
* * *
“셀라하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것을 빼앗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었죠.”
황족 숙소의 테라스에 앉아, 페니아는 클레르가 따라 주는 차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곳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누구보다도 셀라하와 페르시카에 대해서는 잘 안다.
특히, 그 오만하면서도 고고한 셀라하 황녀의 콧대 높은 자존심은… 누구보다도 페니아가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었다.
페니아가 어렸을 적 소중히 여기며 안고 다니던 곰 인형은 여기저기 뜯어지고, 디자인이 뒤바뀐 채로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제 눈에는 이 모습이 더 귀엽다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 셀라하는, 그렇게 깔깔대며 곰 인형을 안아 들고 웃곤 했다.
페르시카가 보물처럼 여기던 마도서는 셀라하의 서재로 가야만 했고, 가장 아끼던 메이드도 셀라하의 시종이 되었다.
셀라하는 자매들 사이에서 폭군처럼 군림했다. 언제나 목소리가 가장 컸고, 사람들을 휘어잡았으며,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 그녀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단 손에 넣으면, 바로 질려 버려서 내쳐 버리는 일의 반복이다.
‘손에 넣은 것’에는 금방 권태가 깃든다. 셀라하 황녀는 언제나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더 갈망할 뿐이다. 그것이 타인의 소중한 것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약탈이 주는 희열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
― ‘적어도 셀라하 언니가 와 있는 축제 기간 동안, 저희는 충직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 ‘사실 별 대단한 일은 아니죠. 그냥, 연기여도 좋으니까… 저를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으로 있어 주세요. 많이 바라지 않아요. 적어도 축제 기간 동안은요.’
이 테라스에서 찻잔을 주고 받던 금발의 사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생각난다.
막 남작 작위를 받아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예니카를 옆에 낀 채로, 사내는 턱을 짚은 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 ‘어렵진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엘펠란 가문 쪽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생각보다 그 쪽 반응이 빠르네요. 부탁드려요.”
페니아 황녀가 찻잔을 내려놓은 곳 옆엔,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여러 학사 기록들이나 정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적어도 이 축제 기간 동안은, 에드와 페니아는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군신 관계로 있어야 했다.
누구보다도 에드를 깊게 믿고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셀라하 앞에 있어야만, 셀라하도 그 미끼를 물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굳이 하지 않았던 학사 정보를 조회하고, 그의 일대기를 한번 다시 훑고, 그의 생각을 여러 번 더 들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의외의 일면도 많아서 페니아 입장에서는 꽤나 신선한 기분이었다.
학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악단의 음악 소리가 저 멀찍이서부터 들려온다.
축제의 나날은 무르익고 있다. 페니아 본인은 황족 숙소 밖으로 잘 나가진 않았지만, 일상이 잠시 멈추고 일탈이 시작된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고 있었다.
다시 한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페니아 황녀는 생각에 잠겼다.
― ‘그리고 애초에… 저는 페니아 황녀님을 원래부터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페니아 황녀님이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고요. 그 이유는,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만.’
― ‘…….’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니아 황녀님은 좋은 황제가 되실 겁니다. 혹여 저한테 저지른 일에 너무 마음 쓰지는 마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잘하는 사람.”
정말로.
그렇게 입술을 뻐끔대며 사내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에드 로스테일러. 톡톡 튀는 부분 하나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발음이,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머나먼 학사의 풍경으로 시선을 다시금 돌렸다.
여전히, 축제의 열기가 드높아지고 있었다.
* * *
“현자의 봉서를 열람해 보고 싶다고?”
“네. 대현자 실베니아님이 직접 남기신 기록을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어요.”
“글쎄다. 학생 선에서 요청한다고 그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것 같다. 뭐, 교장님이나 부교장님이 특별히 허가하신다면 모를까….”
트릭스관 초입.
벤치에 드러누워서 연초를 피고 있던 칼레이드 교수의 옷깃을 잡아끌더니, 아일라 트리스는 굳건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럼, 교장 선생님이나 부교장 선생님을 설득하면 된다는 거죠?”
“애초에 한번 도난 경험이 있는 물건이야. 관리가 워낙 삼엄하니까, 쉽게 허락해 주진 않을 거다. 그 레이첼 할멈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할 거고, 오벨 교장이라면 혹시 모르긴 하겠는데… 최근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만나기도 쉽지가 않을 테지.”
이미 칼레이드는 반쯤 술에 취한 상태였다. 축제의 열기 때문이라곤 하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인데 한심한 꼴이다.
“…알았어요.”
아일라는 비몽사몽한 칼레이드를 대충 벤치 위에 내버려 두고, 팔을 걷어붙인 채 트릭스관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