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6)
살아남은 그대에게 (1)
페르시카 황녀가 황실 도서관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장미궁을 지키는 병사들답게 각이 깔끔하게 살아있었다.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음에도 당황한 기색조차도 없다.
페르시카는 창밖을 보고는 해가 뉘엿뉘엿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축제 기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축제 기간 내내 도서관에 박혀 있었던 페르시카 황녀는 딱히 열띤 분위기를 실감하지는 못했다. 이런 축제의 열기를 굳이 즐기는 편도 아니고, 그렇게 밖에 나다니고 싶어하는 성격도 아니다.
다만, 황권 분쟁이니 황실 회의니 하는 피곤한 일들이 잔뜩 겹쳐서 도서관에 눌러붙어 있지를 못하니… 이번 축제기간이야 말로 책에 둘러쌓여서 시간을 보낼 좋은 기회였다.
셀라하는 이 틈을 타서 클로엘 황제와 함께 순회를 돌러 나간 듯 했다.
클로엘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중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황실에서 세력을 더 끌어모으는 것도 꽤나 중요한 일이다.
페르시카는 셀라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재상과 중요 호위 인력들을 포섭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책들에 파묻혀 너무 과몰입을 하고 말았다. 적어도 이틀은 일찍 나왔어야 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페르시카 황녀님.”
“아니, 됐다. 다만…”
장미궁 복도의 창문을 내다보면, 중앙 궁전 옆으로 쭉 뻗어오른 첨탑이 하나 보였다.
군사적인 용도로 세워진 첨탑이지만, 태평성대가 이어진 뒤로는 그 역할도 많이 퇴색됐다. 지금은 황실 구성원 중 한 명이 사적인 용도로 쓰고 있는 건물이었다.
“마침 보는 이도 없으니, 첨탑에 좀 들르고 싶구나.”
“…”
“왜, 내가 뭐 하면 안될 일이라도 하고 있느냐?”
클로엘 황제는 누군가가 저 첨탑에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황가의 아픈 손가락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세 황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는다.
각자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클로엘 황실을 잇고자 경쟁하는 세 황녀. 그들이야말로 이 눈부신 황가의 자랑이다. 허나, 이 빛나는 세 황녀의 위에서, 사실상 차기 황제의 자리에 내정되어 있던 장남이 있었다.
황태자 린돈 클로엘.
한 때는 클로엘 황제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며, 누구보다 굳건하게 후계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다.
현 클로엘 황가의 직계 자손 중에서 유일한 남자로, 사실상 후계자의 자리에 내정되어 있던 건실한 군주.
세 황녀의 큰 오빠이자, 언제나 총명한 머리와 촉기 있는 눈으로 백성들을 굽어보던… 성군의 자질을 지닌 사내였다.
건실한 린돈이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던 시절엔, 신하들 사이에선 그런 이야기까지 돌았다.
각자 자기 색이 확실한 세 황녀의, 강점만을 모아놓은 이상적인 군주이시니…
이 클로엘 제국도, 적어도 한 세대는 더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
그런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세 황녀를 둘러싼 황권 분쟁의 시초는, 어느 날 갑자기 린돈 클로엘이 황권 계승자의 자격을 모두 버리고, 저 첨탑에 틀어박혔을 때다.
그 때 이후로 황권 후계자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세 황녀 중 누구를 다음 후계자로 지명할 것인지 클로엘 황제가 망설이기 시작하면서… 기나긴 반목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린돈 클로엘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그 유구하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 원인은… 놀랍게도 아무도 모른다.
바로 옆에서 린돈 황태자를 보좌하고 있었던 보좌관도, 황실 재상도, 집사장도, 호위병들도 모두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의욕과 뜻을 잃은 채 방에 틀어박혀버린 그 남자.
전조도 없었고, 이렇다 할 큰 사건도 없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조차하지 않은 채… 모든 일에 무기력한 사내가 되어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버린 자.
린돈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클로엘 황제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처음 몇 개월은 반드시 기운을 차릴거라 생각하고 기다려보았지만, 가면 갈수록 린돈의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어느 샌가 삐쩍 마르고, 헬쓱해진 몰골로 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다. 신하들이 가져다주는 밥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채… 첨탑 꼭대기의 방에서 벽난로 불을 앞에 둔 채 꺼이꺼이 울거나, 허탈한 듯 웃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황실의 후계자가 그렇게 폐인이 되어버리자, 황실의 권력자들은 일단 그를 첨탑에 완전히 격리시켰다.
아직 현역이던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주도해서, 황태자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그를 돌보며 최대한 외부인에게 노출을 삼가기로 결론을 냈다. 일국의 황태자가 미쳐버렸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린돈 황태자는 스스로 후계자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그 사실만을… 널리 알렸을 뿐이다.
그 뒤로 린돈 황태자가 이상해진 이유를 수많은 신하들이 추측해보았지만, 정확한 답을 알아낸 자는 없었다. 그냥 과도한 스트레스가 누적되다가, 어느 날 일시에 정신적으로 큰 압박을 주면서 머리가 이상해졌으리라 이야기 할 뿐이다.
한 편으로는, 음모론 또한 돌았다.
린돈 황태자를 저렇게 만든 건 황권에 뜻을 둔 황녀들 중 누군가의 소행이다.
셀라하, 페르시카, 페니아.
린돈 황태자가 황권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그 황권을 이어받을 생각을 한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의심을 산 것이 바로 페르시카 황녀였다.
린돈이 이상해지기 이전에, 가장 린돈 황태자와 가까이 지냈던 자가 바로 페르시카 황녀였기 때문이다.
틈만나면 도서관에 가서 페르시카와 환담을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여러 현황들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린돈 황태자와 같이 가장 긴 시간을 보냈던 페르시카 황녀이니 만큼, 그녀야말로 가장 황태자에게 손을 쓰기 쉬웠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소문을 황가의 면전에서 수근거렸다간 곧바로 극형에 처해지기 딱 좋다.
그러나… 신하들 사이에 수근대는 그 소문이 페르시카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는 없다.
‘웃기는 이야기로구나.’
첨탑의 계단을 오르며, 페르시카 황녀는 코웃음을 쳤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몇 몇 신하들을 넘어서, 근래 들어서는 셀라하마저 페르시카를 의심의 눈초리를 한 채 쳐다보곤 했다.
정말로 린돈 황태자에게 무슨 수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진실의 조각이 보이지 않을 때, 군중은 있는대로 대충 진실을 끼워맞추기 시작한다.
린돈 황태자를 이상하게 만든 것은 페르시카 황녀다.
그런 딱봐도 끼워맞추기 좋아보이는 진실이 있으니, 그거에 혹해서 넘어가는 인간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허나, 페르시카 황녀 또한 린돈 황태자가 왜 방에 틀어박혔는지 모른다.
그저, 페르시카와 가장 말이 잘 통한다는 이유로 도서관에 찾아드는 린돈 황태자를 상대해 주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아는 것도 많고 식견이 깊어서 페르시카 또한 린돈을 상대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현행 안건들에 대해 깊은 토론을 하거나, 도서관 구석에서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주거나… 썩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린돈 정도라면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성군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말이다.
– 똑, 똑.
페르시카가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클로엘 황제가 황실에 있을 때는 눈치를 보느라 근처에도 못 갔던 방이다.
축제를 틈타 모두의 시선이 밖을 향할 때야말로, 린돈 황태자를 만나기에는 딱이다.
몇 번이고 린돈을 만나보긴 했지만, 그 때마다 별 다른 수확은 없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첨탑을 향하던 것이 버릇이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수확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섰다.
커튼이 몇 겹으로 쳐져있고, 음침한 촛불만이 가득 켜져 있는 방에 들어가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눈이 어둠에 암순응해가며… 충격적인 풍경이 동공을 가득 매운다.
“리, 린돈 오라버니!”
페르시카가 소리를 지르며 방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호위병들조차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이 첨탑이니 만큼, 그 왜소한 몸으로 직접 달려들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린돈이 천장에 매단 밧줄에 목을 집어넣으려고 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드는 그 순간, 페르시카가 날아들다시피 초췌해진 그의 배를 꽉 안아들며 밀어내자, 그가 의자에서 떨어져서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커, 허억… 컥, 컥…”
“린돈 오라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젠장… 젠장…! 또, 죽지 못 했어… 또…!”
린돈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집어삼켰다.
“살아남을 자신도 없는 주제에, 죽을 용기조차 없는 한심한 인간이구나… 몇 시간이나 밧줄을 노려보았지만, 도저히 죽음의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용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정신 차리세요, 린돈 오라버니! 왜 죽으려고 하는 거에요!”
“페르시카… 페르시카구나…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는데… 이젠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바닥을 나뒹굴던 린돈은 근처 갑옷 모양 장식품에 있던 자그마한 단검을 스윽 뽑아들더니, 손잡이를 페르시카 쪽으로 향해서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페르시카… 네가… 네가 날 끝내주겠니…? 신하들은, 이런 부탁을 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테니…”
“저라고 해서 그런 해괴한 부탁을 들어주겠어요? 정신 차리세요, 린돈 오라버니!”
어둠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린돈의 모습. 말 그대로 폐인 그 자체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은 푸석푸석 해져서 볼에 들러붙어 있고, 생기 없는 눈동자와 야위어버린 몸뚱아리는 흡사 허수아비 같다.
페르시카는 그 몰골을 보고 한 번 더 헛숨을 집어삼켰다.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더 살아갈 용기가 없다… 황권이 무슨 소용이고, 태평성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오라버니…”
“나는 앞으로 다가올 허무가 두렵다. 왜 이런 걸 알아버린 거지. 왜 굳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아서, 스스로를 이런 공포의 늪에 가둔거지…! 젠장… 무지했던 때가 그립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그립다…! 굳이 알아서, 굳이 아파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아둔하게만 느껴지는구나…!”
“정말…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네요…”
페르시카와 도서관 책상에 두런두런 앉아서 지식을 탐구하던 때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페르시카는 일단 린돈 황태자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혔다. 신하가 가져다 놓았을 냉수를 그 야윈 사내의 입에 밀어넣자, 벌컥대며 겨우 물을 받아마시기 시작했다.
“일단 침착하고, 진정부터 하세요.”
“페르시카… 페르시카… 이제 곧… 모든 게 끝난다… 나는 두렵다…. 나는 고통 받고 싶지 않다… 떠나고 싶어… 살아남아 고통에 몸부림치느니, 이 미천한 목숨을 내다 버리고 싶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해서 내지르며, 린돈은 눈물을 머금었다.
그래도 일단은 진정이 된 듯 하여, 페르시카는 진땀을 닦으며 소파의 맞은 편에 앉았다.
혹시나 해서 와봤지만, 역시나 말이 제대로 통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페르시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대 참사가 날 뻔 했다. 일국의 황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나라가 통째로 혼란에 빠질 뻔 한 상황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페르시카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곳이다.
평소에는 시체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인지, 책장이나 가구들 따위엔 먼지가 쌓여있을 지경이었다.
주기적으로 신하들이 와서 치우고, 린돈의 상태를 확인해 클로엘 황제에게 보고하는 듯 하지만… 이제는 그 주기마저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
페르시카는 한숨을 푹 흘리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놓여진 황가의 문양이 박힌 반지로 시선이 향했다.
“이, 이건…”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황실의 후계자에게만 두루 이어져 내려오는 귀중한 반지였다.
이 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클로엘 황가에서 차기 황제의 자리를 약속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직… 오라버니가 가지고 계셨군요..”
개국이래로 황태자에게만 전해져 내려온 이 황가의 보물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는 것은 썩 좋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린돈은 황태자 자리를 포기했다. 애초에 삶의 의욕 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에게 이런 황가의 보물을 맡겨 놓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일단 페르시카가 회수하여 클로엘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을 듯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반지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안돼, 페르시카!”
– 쿠당탕!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만 하던 린돈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반지를 휙 잡아챘다.
그 반동으로 다시 한 번 바닥에 고꾸라져서 넘어진 린돈은, 꼴사납게 흐느끼면서 반지를 자기 품에 꽉 안아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반지에 손 대지 마! 제발 절대로 반지에 손 대지 마! 특히 너는 절대 안돼! 너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페르시카!”
“오, 오라버니…?”
“이건 안 돼…! 모든 걸 알게 되면, 너도… 아마 너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오라버니. 똑바로 말해주세요.”
페르시카는 바닥에 한심하게 나자빠져 있는 린돈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대서 한 번 쓰다듬었다.
“너무… 혼자서 고통 받을 필요 없어요. 대체, 뭘 알았는지, 그 반지가 무슨 상관인지… 알려주세요.. 왜 계속해서 함구하고만 있는 거에요…? 말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잖아요…!”
“페르시카… 하지만… 나는…”
“오라버니.”
페르시카가 단호한 얼굴로 린돈을 내려다 보았다.
린돈은 한심한 얼굴로 페르시카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팔에 힘을 조금씩 풀었다.
“그래… 어차피… 이제 다 끝날 일이지…”
“…”
“이 반지는… 황가의 황태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반지다… 그러면서도, 열쇠이기도 하지…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지금은 오로지 나 뿐이다. 우연히 알게 되었거든.”
뭔가를 체념한 듯이, 린돈 황태자는 가슴 속에 묵혀놓았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현자 실베니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때, 이 클로엘 황실에서 지내며, 성위 마법을 연구하던 위대한 학자지…”
“…예. 하지만…. 당시 리엔펠 황태자를 다치게 했단 이유로 아켄섬에 유배당했잖아요.”
그 말을 한 다음, 페르시카는 순간적으로 숨을 확 들이삼킬 수밖에 없었다.
실베니아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클로엘 황가의 후계자이자 황태자였던 리엔펠.
그 또한, 이 반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을 터다. 황가의 유서깊은 이 보물은, 오로지 일국의 황태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니까.
“…”
“당시 대현자 실베니아는… 큰 죄를 범하고 리엔펠 황태자에게 사과를 했지. 그리고, 피해를 준 자의 최소한의 도리로서, 그녀가 진짜로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그에게 알려주었지.”
“그걸…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아요?”
“그녀의 비밀 연구실에 들어갔거든. 거기엔, 그녀가 이 황실에서 지내며 이룩해냈던 모든 연구가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연구 일지와 기록들도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었지.”
페르시카는 동공을 떨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애초에 실베니아가 지냈던 연구실은… 이 장미궁이 아니라 백합궁에 있잖아요…!”
“그곳에 있던 기록들은 모두 표면적인 것들 뿐이야. 진짜로 그녀가 감추고 연구했던 기록들은…. 황실 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책장 너머에 있다…”
그 사실에, 페르시카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린돈 황태자는 굳이 황실 도서관에 들르는 것을 즐기진 않았다. 단지, 페르시카 황녀가 그곳에 항상 머무르고 있었기에, 만나러 왔을 뿐이다.
린돈 황태자는… 페르시카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동안, 우연히 실베니아의 비밀 연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장난일까… 그곳에 입장하기 위한 열쇠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었다.
“대현자 실베니아는 자신의 비밀 연구실에 들어가기 위한 마법의 각인을 이 반지에 새겨주었다. 언제든지… 리엔펠 황태자가 실베니아의 연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말이야.”
“…”
“….그 뒤로 리엔펠 황태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었지?”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사실이다.
리엔펠 황태자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린다.
기록에 남아 있기로는, 속세를 멀리하고 황권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질 뿐이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니 모두 그리 받아들였을 뿐이다.
“연구실에서… 뭘… 본 거에요…?”
“그건… 그건…”
린돈이 이빨을 딱딱 부딪히면서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젠장… 여기까지 이야기 했으면… 내가 입을 다물어도 네가 직접 확인하러 가겠지…”
“…”
“잘 들어라, 페르시카…! 성위 마법 같은 것에 뜻을 두지 마라…! 성위학에 너무 깊이 연관되면, 세계의 섭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 하려 하면…! 그대로 잡아먹혀 버린다…! 거대한 어둠 같은 것에, 신이 지키고 있는 섭리 같은 것에… 통째로 먹혀서 정신이 나가버린다…!”
대체 이 사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묘한 진실을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그 편린을 맛보았다. 이대로 미치광이가 되어버릴 거란 걸 느꼈다. 나같은 아둔한 인간도 그리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필시, 세상의 섭리를 지키는 신이 마지막으로 그어둔 선이다…! 비천한 인간 따위가 이 이상으로 세계의 섭리를 꿰뚫으려 해선 안된다… 그렇게 이야기 하듯, 신의 자비가 허용하는 마지막 임계점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 사실을… 그 똑똑한 대현자라는 인간이… 모르지는 않았겠지…”
성위마법이라 함은 세계의 섭리를 파악하고, 비틀어 꺾는 마법.
단순히 체계에 대해 분석하고, 그 힘의 편린을 약간이나마 취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허나, 완전히 그 깊숙한 곳에 빠져들어, 세계의 법칙을 완전히 통제하려고 드는 영역에 간다면… 그 막대한 힘 앞에 인간의 이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미치광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현자 실베니아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학구열 때문에?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그 알량한 호기심 하나 때문에?
그 이유를 아는 자는, 오로지 대현자 실베니아 본인 뿐이다.
“…오라버니.”
“제발, 이렇게 부탁 하마. 페르시카.”
꺼억대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린돈이 호소한다.
“내 삶을 끝내줘. 나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용기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인간이야… 그러니까, 네 손으로… 내 눈을 감겨줘. 다가올 파국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편하게 눈 감을 수 있게 해줘… 부탁이다…. 부탁이야…. 페르시카…”
페르시카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통제하면서, 다시금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입술 아래가 부르르 떨려오고, 가슴께에서도 멈출 수 없는 진동이 이어진다. 등줄기에서 돋는 소름은 이젠 당연할 지경이다.
이윽고, 페르시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집어들었다.
린돈 또한 흐느낌을 계속하면서 몸을 떨다가, 이윽고 반지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벌려보였다.
딱 찌르기 좋게 생긴 널따란 가슴께가 드러난다.
– 타당, 탕!
그러나, 페르시카는 그대로 단검을 바닥에 버려버리고, 재빠르게 반지를 집어들었다.
그대로 놀란 동공을 좁힐 마음 조차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들어올린 채 바쁘게 첨탑 계단을 뛰쳐내려간다.
페르시카의 눈가가… 계속해서 떨려오고 있었다.
*‘페페로페페’라는 이름을 쓰는 유저가 있었다.
의 보스들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거나, 보스전 공략 따위를 작성하곤 하는 유저였다.
처음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출시 당일 곧바로 1막 보스 예니카 페일로버를 완전히 분석해서 세세한 공략글을 남겼을 때다.
그 뒤로 2막 보스 ‘글래스트’, 3막 보스 ‘루시 메이릴’, 4막 보스 ‘크레핀 로스테일러’에 이어서, 5막 보스 ‘성창룡 벨브로크’까지 전부 최단기간에 공략해낸 유저이기도 하다.
말도 안되는 공략 속도와 더불어서, 깔끔하고도 완벽한 정보 정리, 거기다가 일반 유저들은 잘 모르는 세세한 뒷정보들까지도 완전히 꿰차고 있는 모습. 그 덕에 별에별 루머가 다 돌곤 했다.
사실은 개발사의 직원이라느니,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라느니, 농담 삼아 이야기 하기론…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 인간이라느니…
반쯤 농담인 소문이 그 외에도 많이 돌았으나, 그 유저에 대한 정체가 드러난 적은 없다. 굳이 적극적으로 추적해대는 사람도 없었다.
뭐, 어쨌든 그가 남긴 고퀄리티 공략이나 정보글이 중요한 것이지, 그가 누구인지는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을 꽤나 인상깊게 즐겼던 내 입장에서는… 그런 공략 글들 또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한 번은 그가 쓰던 닉네임을 해외 포털에 검색해보기도 하고, 그가 쓴 메일 주소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게임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사적으로 연락이라도 주고 받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뭐, 연락이 닿으면 좋은 일이고…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일이다.
이런저런 설정집도 찾아서 읽어보았던 나이니 만큼, 내가 몰랐던 정보에 대해서도 이 사람이라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연락이 닿는 일은 없었다. ‘페페로페페’라는 양반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인간인지 알아낼 수 있을만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머나먼 인터넷 사이트의 한 구석에서… 그가 홀로 사용하던 블로그의 흔적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에서 볼 수 있었던 인물들의 그림이 백업 파일처럼 올라와 있었다.
설정집에서도 보았던 그림들이다.
학생회관에서 글라스칸의 오른팔을 배경으로 삼아 고고하게 서있는 예니카 페일로버의 모습.
마력탑 꼭대기에서 별을 올려다보고 있는 탐구자 글래스트의 모습.
오른산 정상에서 수십 겹의 마법진을 두르고 마녀모자를 눌러 쓰는 루시 메이릴의 모습.
불타는 건물 옥상의 잔해 가운데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모습.
그리고, 아켄섬 상공에 고고히 떠서 세계를 관조하고 있는 성창룡 벨브로크의 모습까지.
각 막의 최종을 장식하고 있는 보스들의 그림들이… 마치 설정화처럼 나열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우스의 휠을 끝까지 내려보면 알 수 없는 그림이 하나 더 올라와 있었다.
그림만 봐서는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기억에 남기지도 않았다. 뭔가 어둡고 커다란 마력의 문 같은 것이 개방되어 있고, 그 앞에 로브를 눌러쓴 자의 뒷모습이 보일 뿐이다. 커다랗고 화려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장소는 어두컴컴한 지하처럼 보인다. 마력의 흐름이 퍼져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알기로 에 저러한 장면이나 등장 인물은 없다.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다른 곳에서 따온 그림인 것일까. 어찌됐든 깊게 파고들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인지는 미지수였다.
늦은 시간이었다. 슬슬 잠에 들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잠시 마우스를 내버려 둔 채로, 몸을 씻으러 갔다.
이미지 파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두면, 잠시 후 이미지 정보가 커서를 따라 팝업되는 경우가 있다.
잠시 팝업되다 사라지는 그 파일명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다.
Hidden Boss
미치광이 실베니아 ( Silvenia, The Lunatic )
세계의 섭리와 싸우려 했던 자여.
약속된 파국에 저항하려 했던 자여.
끝까지 살아남아 삶의 가치를 찬미하려 했던 자여.
이만, 편히 잠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