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28)
살아남은 그대에게 (3)
“트릭스관에 몰래 들어가서 현자의 봉서를 열람할 거예요.”
아직 채 절반도 해독되지 않았다던 대현자 실베니아의 저서, 현자의 봉서.
성위 마법에 대한 온갖 글귀들이 적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룬으로 새겨져 있는 마법 각인과,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조차 없는 기묘한 내용들이 가득 찬 미지의 책.
사실상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보물과도 같은 그 책은 온갖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선임 교수 글래스트가 훔쳐서 달아났던 기록이 있고, 고질적인 경영난 때문에 실질적인 소유권이 엘테 상회 쪽으로 넘어간 적도 있다.
저번 엘테 상회 탈환전 때, 로르텔이 협상 조건으로 현자의 봉서를 다시 학사에 돌려줌으로써 어쨌든 트릭스관의 보물고로 돌아갈 수는 있었으나….
“그 내용을 한번 쭉 훑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리 요청서를 올려도 오벨 교장님은 절 만나주시질 않더라고요. 그야… 당연하긴 해요. 이미 절도 이력이 있는 학교의 보물을 일개 학생이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리가 없죠….”
“그래서, 네가 다시 한번 훔치시겠다?”
“훔치는 게 아니고, 잠깐 빌려보는 거예요.”
너무나도 당당한 아일라의 얼굴에 나는 위화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장소는 황실 악단이 공연을 하고 있는 학생 광장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아직 열기가 덜 올라온 느낌은 있지만, 확실히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가장 성대하게 축제를 치르고, 마지막으로 중앙광장에 모여 폐막식을 진행하는 날인 것이다.
마지막 날 정도는 나도 좀 쉬어 볼까 싶어서 학생 광장 쪽 벤치에 앉아 늦봄의 따사로운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 봐야 음료수 한잔 마시면서 바람이나 쐬고 있었을 뿐이지만, 최근 들어 워낙 바쁘게 지냈던 터라 이런 자그마한 여유도 내게는 소중했다.
“한 달만 빨리 찾아왔어도 로르텔에게 부탁해서 내가 열람할 수 있도록 해 줬을 텐데.”
“그러게요…. 당시까지만 해도 봉서는 로르텔 선배님의 소유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현자의 봉서는 이미 학사 쪽으로 넘어갔다. 로르텔이 상회 세력을 다시 휘어잡기 위해, 그 협상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축제의 열기가 가장 드높아졌을 때를 틈타 트릭스관에… 근데, 에드 선배님. 이건 다 뭐예요….”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참이나,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일라가 벤치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보고 물었다.
“이건… 황실 문장이 박혀 있네요….”
“아, 이건… 별거 아니고, 셀라하 황녀님 쪽에서 학사 생활할 때 필요하면 쓰라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 줬거든.”
“셀라하 황녀님이요…? 에드 선배님, 페니아 황녀님 말고도 셀라하 황녀님이랑도 연이 있어요?”
“이번에 연이 생기긴 했는데…. 글쎄, 그렇게 좋은 연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일라는 에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실 측에서 보낸 선물이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인맥이 두루 넓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얼음장 같은 서리의 황녀랑도 접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예니카 선배님은 왜….”
“쟤는…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같이 축제 노점을 돌아다니기로 했던 예니카는, 선물 상자 사이에서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쓰러져 있었다.
나야 뭐, 오랜만에 휴식을 좀 취하기만 하면 될 일이니 크게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기운 빠진 예니카 옆에서 그냥 있어 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예니카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최근, 부모님한테 배신당했거든.”
“네, 네에…? 예니카 선배님한테 그, 그런 음울한 가정사가 있었어요?!”
“흐음… 사실 그렇게 음울한 이야기까지는 아닌데….”
예니카의 부모님인 오르테와 세일라는, 남은 축제 기간 동안 철저하게 로르텔에게 세뇌당한 것이다.
사실 세뇌라 표현하면 좀 그렇고, 로르텔의 타고난 언변과 처세에 넘어가서 완전히 엘테 상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틈만 나면 엘테 상회의 사업 계획과 퓰란 지방의 발전, 그리고 이웃들의 생활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짝짝짝 박수를 쳐 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예니카의 정신력도 가면 갈수록 깎여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니카는 세상 착해 보이는 소녀지만, 로르텔 앞에서는 유독 자존심이 세지는 경향이 있다.
수석 자리도 거뜬히 양보할 정도로 대인배지만, 꼭 로르텔에게만큼은 한마디도 지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부모한테 화를 낼 만한 위인도 못되므로, 혼자 끙끙 앓으며 로르텔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누누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능구렁이 같은 원로 상인들조차 휘어잡는 로르텔에게 있어서, 시골에서 막 올라온 농촌 부부 하나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다.
허나, 상대의 가족까지 자기 품 안으로 끌어들여서 신경전을 치르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으면 꽤나 살벌할 지경이다.
“우윽…. 에드… 우리 엄마 아빠가 갑자기 양모 유통이나 축산품 시장의 미래 흐름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목장에 있는 소 걱정밖에 안 하시던 분들이….”
“…….”
뭔가, 다단계에 빠져든 가장을 둔 자식이 떠오르는 듯한 몰골이다. 눈물이 핑 돌 뻔했으나, 그런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적어도 오르테와 세일라는 건실한 미래 설계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단지, 그 배경에 엘테 상회가 끼어있다는 것이 예니카에겐 뼈아픈 사실일 뿐이다.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부모님한테까지 손을 대는 건 선 넘었지!”
“선을 넘었다고 하기엔… 너희 부모님이 피해를 본 게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세상일이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로르텔은 정말 왜 항상 그런 식이야!”
“애석하게도, 돈이면 거의 다 되긴 해…. 너도 지금 통감하고 있지…?”
“…나 정말 이런 식이면 가출해 버릴지도 몰라.”
사실 이미 가출한 상태 아니냐. 최근에 집에 들어간 적도 없지 않냐.
…그런 부분까지 넘어지진 않았다. 애초에 예니카는 천성부터가 부모님과 척을 질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나 사춘기 온 것 같아, 에드.”
“보통 사춘기를 맞이한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 그런 말 안 한다….”
“아냐, 난 사춘기야. 나 이제 집에 돌아가도 목장 일은 안 도와줄 거야. 흠… 그래도 텃밭의 허브들 수확하는 건 재밌으니까 하긴 하겠지만… 힘들고 고된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근데 해 질 녘에 풀어 놓은 소를 울타리 안으로 다시 들이는 건 해야겠네. 그건 사람 수 많으면 효율 자체가 달라지니까…. 그래도 거름을 치우거나, 우유를 짜는 일은 안 할 거야. 아닌가. 우유 짜는 일은 좀 도와줘야 납품 일자에 맞출 수 있으려나. 그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앞마당 빗자루질을 안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까…. 그래, 세탁물도 안 개어 둘 거고, 침대 시트도 정리 안 할 거야…. 어디 한번 당해 보라지….”
하여튼 착해 빠진 사람들은 반항기를 맞이해도 애매모호하게 맞이한다.
“그럼, 지금부터 할 일과 안 할 일 리스트를 작성해야겠어.”
“그건 또 뭐냐.”
“방학 때 목장 일정을 생각해 보고, 어디까지 도와줘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나태하게 굴어도 될지 그 경계선을 잘 생각해서 확실하게 반항해 둘 생각이야. 로르텔에게 넘어가다니, 엄마 아빠도…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게 건실하고 건설적인 반항기를 보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오르테와 세일라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그냥 딸이 방학 때 돌아와서 집에 좀 늘어져 있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게 뻔하다.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는 미래에, 나는 차마 격려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졸업하면 남작 직위를 끼고 로스테일러 영지의 외곽을 혼자서 책임져야 할 텐데…. 아직도 목장 일을 할 생각만 만만인 것 같아 불안할 따름이다. 예니카답다면 예니카다워서 오히려 안심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주문을 외듯 뭐라 중얼중얼하는 예니카를 내버려 둔 채, 한숨을 푹 쉬며 아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굳이 위험하게 현자의 봉서를 훔치려 들 필요는 없다. 로르텔이나 페니아 황녀님이랑 이야기해서, 학사 쪽이랑 잘 협상을 해 보면 열람을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한테 상담한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렇긴 하지만, 몰래 열람하다가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리스크가 적잖아.”
“에드 선배님. 언제 선배님의 예언이 실현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부분을 오래 남겨 두고 싶진 않아요. 무엇보다 테일리의 목숨이 직결된 문제잖아요. 저는… 테일리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로 대충 처리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 마음 급하게 굴 필요 없다…. 고 이야기 하기에는 나 역시도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은 아니다. 이 부분에 있어선 아일라의 말도 맞았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으려면 일주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아니면 한 학기가 걸릴지 모르잖아요.”
“그건… 확실히 네 말이 맞다. 아일라.”
“제가 오늘 밤 축제 쪽에 정신이 쏠려 있을 때 트릭스관에 숨어들 거예요. 그동안 시선을 끌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트릭스관 근처에서요.”
“너, 생각보다 진심으로 일에 임하고 있구나.”
“저한테 사태의 심각성을 납득시킨 건 에드 선배님 본인이시잖아요.”
무겁고 진중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일라를 보며, 나는 턱을 훑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정도면 너한테도 알려 줘도 되겠다 싶어서.”
“네…? 뭘요?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있어요?”
나는 가죽 주머니에서 오래된 고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씌워 두었던 커버를 벗겨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아일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책의 제목을 한번 스윽 읽었다가, 순간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숨을 휙 집어삼켰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는 반응이었다.
『성위학 개론』 ― 저자, 글록트 엘더베인.
―콰당탕!
순간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일라가 책 표지를 휙 하고 가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위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소녀이기에, 이 책이 지닌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게 당황한 것이다.
“이, 이런 게 왜… 아무렇지도 않게… 선배님 가죽 주머니 속에서 튀어나와요?”
“그냥… 내가 가지고 있었어.”
“그냥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잖아요! 이건… 이건…!”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대마법사 글록트의 저서다.
이것이 진품인지 아닌지는, 책의 연식과 필체, 그리고 느껴지는 성위 마력으로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문외한이라면 척 봐선 모르겠지만, 아일라는 대번에 눈치챈 것이다.
“빌려주마.”
“이, 이건… 빌려준다고 받을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잖아요!”
“대마법사 글록트가 연구한 기록이고, 또 대현자 실베니아에 대한 기록도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 네 연구에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거다.”
“…….”
“그리고, 틈날 때 캠프로 오면 메릴다와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알아서 짬 내서 와. 테일리도 데려오면 좋고.”
“메릴다라면… 그 늑대 정령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했다.
“대현자 실베니아를 직접 만나 봤던 정령이야. 지금 시점에서, 그 위인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지.”
“…헉.”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일라는 일단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배님한테 상담하는 게 정답이었네요.”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제일 중요한 건, 그래서 대현자 실베니아가 품었던 진의가 뭐였냐는 거지. 벨브로크의 봉인에 대한 것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고.”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다 알아볼게요. 다만….”
아일라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다.
“테일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돼요.”
“그건… 애석하게도 보장해 줄 수 없다. 걔는 시련 속에서 살아야 할 숙명이야.”
“…….”
“애먼 거짓말로 널 구슬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확실히 이야기해 두는 게 네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 안 그래?”
“…그건, 맞아요.”
아일라는 내 말에 수긍을 하고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오늘 밤 움직일 거지?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해 봐.”
* * *
슬슬 해 질 녘이 되자, 축제의 마지막 밤을 성대하게 장식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학사 조교들은 바쁘게 쏘다니면서 무대를 준비하기 바빴고, 학생회 소속 학생들도 인원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중앙광장에 모여서 귀빈들의 연설을 차례로 듣고, 커다란 무대들을 본 다음,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을 터뜨리고 크레스톨 대축제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무대였으므로, 모든 학생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이름난 악단들이 오고, 제국의 여러 유명인들도 참석하는 데다가, 성녀와 황녀의 얼굴까지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일개 아카데미의 축제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대하다. 평생 몇 번 볼까 말까 한 그런 자리에 학생들은 모두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나는 학사 쪽에 가기 전에 캠프에서 이런저런 장비들과 도구들을 챙겨 들었다. 학사와 캠프는 거리가 좀 되므로, 일찍 와서 시간적 여유가 좀 남아 있었다.
예니카는 정령학회 때문에 바쁘고, 로르텔은 지금이 상회 최고의 성수기이기 때문에 정신이 없다. 루시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니, 지금은 캠프가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후우….”
해도 다 저물어서, 이젠 하늘에 별이 떠 있는 시간.
대부분의 학생이 중앙광장 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캠프로 향하는 길은 한산했다.
캠프 또한 아무도 없이 한산한 분위기다. 처음 여기에 자리 잡고 살아남기 시작했을 땐 이런 조용한 상태가 기본이었는데, 최근 들어 더부살이하는 사람도 생기고 방문자들도 많아져서 오히려 이런 조용한 상태가 특이한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감개가 무량할 지경이다. 이 캠프도 어느덧 내 삶의 터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졸업하면 이 캠프를 떠나게 될 텐데, 그 사실이 썩 무겁게 느껴졌다. 나한테는 여기야말로 정든 고향 같은 곳이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일단 접어 둔 채, 단검과 마공학 용품들을 챙겼다.
그리고 오두막을 나서자, 모닥불 가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오두막에 들어가 있진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 에드 도련님. 지금 막 오셨습니까.”
우락부락한 근육과 호탕해 보이는 몸집은 익숙하다. 예니카의 아버지, 오르테 페일로버였던 것이다.
“지금 중앙무대에서 마지막 행사가 진행될 거라는데, 어쩐 일로 캠프까지 오셨습니까?”
“카하핫. 당연히 행사 보러 가야지요. 그런데, 마지막 행사라고 하니 기분이 묘해져서 말입니다. 이제 축제도 마무리되고, 저랑 세일라는 내일 아침 일찍 고향으로 돌아갈 거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이 마지막 아니겠습니까?”
오르테 또한 지금 막 도착해서 모닥불가에 앉은 것인지, 몸 여기저기에 숲을 헤치고 오면서 묻었을 나뭇잎들이 붙어 있었다.
탈탈 털어내면서, 오르테는 챙겨 온 술을 머그잔에 콸콸콸 부었다.
“건방지게 에드 도련님 캠프에서 마지막으로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 뭡니까. 그 김에 에드 도련님이랑도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마주하면 좋은 일이고요.”
“아내분은?”
“세일라는 예니카랑 중앙 무대로 향했습니다. 저도 곧 갈 거고요.”
굳이 거기서 따로 떨어져 나와 캠프에 올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이윽고, 이어지는 오르테의 행동에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은 안 합니다.”
“아이고, 세일라가 좋아하겠네. 그 여편네는 술 안 마시는 남자가 좋다면서 왜 나랑 결혼했는지 몰라.”
정말로 오르테는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가족을 끼지 않고, 그냥 혼자서. 1대1로 마주하려고.
나는 모닥불 건너편에 마주 앉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오르테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 들었다.
“맞춰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혼자서도 잘 마십니다. 카하핫.”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보는 거니….”
“그렇습니까. 하하핫, 저희 같은 못 배운 놈들도 배려해 주시니 참으로 자애로우십니다.”
이윽고 오르테는 벌컥벌컥 대며 술을 들이켜더니, 파핫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하게 숨을 내쉬었다. 근육이 불룩불룩 솟아오른 팔뚝으로 입을 슥 닦아 내고는, 피식 웃었다.
“감사 인사 마지막으로 한번 전하려고 들렀습니다. 페일로버 가문을 책임지는 가장이 아니라, 그냥 사내 대 사내로서 한번 보려고요.”
“감사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안 했습니다. 예니카한테 해 준 건 다 필요에 의한 것들이 더 많았고요.”
“그래도 받은 건 받은 겁니다. 꺼으윽, 어후. 실례.”
이야기하는 와중에 트림이 섞여 올라와, 오르테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사과를 올렸다.
“못 배워 처먹은 사내가 참으로 과분한 마누라와 딸을 얻었지요. 젊었을 땐 힘 쓰는 맛에 살았고, 나이 먹고는 소 키우는 맛에 살다 보니 어느새 인생이 반환점을 돌아 있더군요.”
평소처럼 떠들던 어조와는 달리, 목소리의 억양이 많이 죽어 있었다.
“사실 뭐, 에드 도련님이나 여타 다른 높으신 귀족 나리들처럼 큰 뜻을 품고, 높은 이상을 좇아 살지는 못했습니다. 머리도 멍청해서 성인이 돼서도 한참 동안은 글자를 못 떼었지요. 그야말로 삼류의 삶이었습니다만, 이만하면 이룰 만큼 이루지 않았습니까. 아내는 세일라고, 딸이 예니카잖습니까.”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지요.”
“그렇죠. 그 둘이 제 인생 최고 성과물인 만큼, 거 꽤나 애지중지하는 편입니다.”
오르테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저 오르테는 주제 파악을 잘합니다. 비천한 평민 출신이고, 배운 거 하나 없고, 할 줄 아는 건 힘 쓰는 일밖에 없는 멍청한 놈이지요. 그래서 굳이 저보다 높으신 분한테 반기를 드는 일도 없고, 상급자에겐 항상 충성충성입니다. 에드 도련님이라고 해서 뭐 다르겠습니까. 이렇게 받은 게 많으니 충성 또 충성이지요. 허허.”
“너무 그렇게까지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무슨 부담까지 느끼십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습니다. 흐르는 대로 살뿐이지요~”
그러고서는 술을 한입 머금고는 덧붙인다.
“다만, 제 딸 울리는 놈은 절대로 가만 안 놔둡니다.”
그러나, 오르테 또한 나름대로 심지가 굳은 인간이다.
그 사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거 먹고살고자 하면 나보다 몇십 살 어린 꼬맹이 상인 앞에서도 굽신거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 딸 울렸다고 하면, 귀족이든 황족이든 낯짝에 주먹부터 날립니다.”
“…….”
“내 머리를 짓밟으면서 기분 나쁘게 쪼개고, 가래침 뱉는 거만한 귀족 나리들이야 살면서 많이도 봤습니다. 뭐…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 정도 고개 숙이는 거야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 가족 건드리면, 저는 단 1초도 안 참습니다.”
나는 받아 든 잔을 가만히 들고 있다가, 이내 옅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런 것치고는 예니카가 끔찍이 싫어하는 로르텔은 썩 맘에 들어 하시던데요….”
“뭐, 청춘을 구가하다 보면 그런 연적 한둘은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되는 법입죠.”
“…생각보다도 더 개방적인 사람이군요.”
“애초에 로르텔 나리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오르테는 아련한 얼굴로 지난 며칠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어떻게든 저랑 세일라를 끌고 다니면서 진실을 숨겨 보려고 애쓰는 예니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떨어져 살면서 비밀도 많이 생겼구나. 알리고 싶지 않은 일도, 자기 혼자 처리하고 싶은 일도 잔뜩 생겼구나….”
“…….”
“다 컸구나.”
애초에 처음부터 오르테와 세일라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사 생활을 하는 예니카는 집에 알리지 않은 비밀이 잔뜩 있다는 것을.
“목장 뛰어다니다 넘어져서 질질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집채만 한 정령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잘 상상은 안 됩니다.”
“사실 뭐 별 대단한 느낌은 안 듭니다. 뭐 저리 빨리 커. 이게 말이나 되는 속도냐~ 하고 실없이 놀랄 뿐입니다. 제가 딱히 감상적인 사람은 아닌지라 딱 그 정도일 뿐이지요.”
오르테는 피식대며 웃고서는 술을 한 입 더 머금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뭐라 말할지 판단이 안 서서 가만히 있자, 오르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족한 딸내미입니다.”
단지,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오르테는 이 북쪽 숲을 혼자서 헤쳐서 이 캠프까지 온 것이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제가 그 애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이젠 딱히 많지가 않습니다.”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서, 나는 잠시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대답해 주었다.
“도움은 제가 더 많이 받습니다.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 * *
예니카의 집안 쪽 일은, 오르테와 일대일로 담화를 나눈 것으로 그럭저럭 마무리 된 듯 했다.
사실 별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예니카의 부모님을 만나 보는 건 상당히 각별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확실히 예니카의 부모다운 사람들이었다.
그쪽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일에 접어들 때다. 당장은 현자의 봉서를 열람하도록 아일라를 도와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황권 경쟁을 마무리한 뒤 벨브로크를 토벌하는 것이다.
나는 챙겨 둔 장비들을 잘 체크한 뒤, 교수동 쪽으로 나아갔다. 중앙광장 쪽 행사에 참석한 다음, 아일라가 있는 트릭스관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계획이라는 건 항상 그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는 것이었다.
“클로엘 황제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요즘에는 아예 면식이 깊어져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셀라하의 시종인 집사장 데스트는, 중앙광장으로 향하던 나를 불러세우더니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셀라하 황녀님께서 지금까지 보냈던 서신의 내용이 클로엘 황제님의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예?”
대련회가 끝나고, 흡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클로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이었던 것 같았다.
“그… 알현실로, 에드 도련님을 호출하셨습니다. 이건… 황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