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30)
살아남은 그대에게 (5)
“직스, 표정이 왜 그래?”
“응?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직스가 엘카를 데리러 학생 도서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중앙 광장에서 폐막 행사가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온갖 화려한 무대는 다 모여있는 만큼, 모든 학생이 학수고대를 하고 있던 행사다. 직스도 중앙 광장에서 그 무대를 보고 싶었을 터인데, 굳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엘카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엘카의 지병인 천식이 날이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기침이 거세지다 못해 급기야는 재채기를 할 때 출혈이 동반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학업을 멈추기는 싫은 엘카를 배려하기 위해, 직스는 기숙사까지 옮겨가며 엘카의 병간호를 했다.
직스 입장에서는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원 지대를 거닐던 시절에 엘카를 만나 이슬란 가문에 주워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다닐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직스의 재능이 개화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직스에게 있어서 엘카는 은인 같은 사람이므로, 몸이 약해진 그녀를 챙기는 것에 딱히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엘카가 없었으면 이 아카데미에 다니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나 정도면 꽤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유년 시절을 초원지대에서 거대 늑대들이랑 추격전을 하며 보냈던 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거기다가 이슬란 가문에서 지낼 때도 매일 매일이 사고의 연속이었잖아…”
“잘 들어… 엘카…. 그런 건… 사건 사고도 아니야…”
“…학생회 일 하면서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 직스?”
“글쎄다…. 많은 일이 있었지…”
“…내 병간호 해주는 것만으로도 많이 바쁠텐데 학생회 일까지 하려면 안힘들어?”
“아니, 그렇게 고생스럽진 않아.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성적 산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실베니아 학생회 소속이라면 졸업 이후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도 꽤나 쳐주는 이력이다.
언제까지고 이슬란 가문에 얹혀 살 수는 없으므로, 홀로서기를 생각하고 있는 직스에겐 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그리고… 의외로 권력의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은 점이 많아.”
직스는 엘카를 에스코트하면서, 함께 학생도서관 아래를 따라 나있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좋은 점…? 직스,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거야?”
“아니, 오히려 권력은 귀찮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은데… 권력의 가까이에 있으면 여러 희귀한 장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거든…”
“그건 또 뭐야…”
“아냐… 그래도, 요즘 학교 생활이 제법 즐겁다. 너 안 만났으면 이런 경험도 못했겠지.”
“글쎄… 나는 그냥 계기일 뿐이고, 실베니아 다니면서 이룬 건 다 네 능력이니까. 너무 공을 넘길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이렇게 몸 안 좋은 나를 도와주고 있잖아.”
그건 당연한 거라고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도 몇 번째인지 세기 힘들어서, 직스는 그냥 피식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최근에는 타냐 회장님을 보좌하고 있다면서? 어때?”
“음… 네 생각엔 어떤 분인 것 같은데, 엘카?”
“뭐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단한 사람이라던데… 역대 회장 중에 이런 사람이 없었다면서? 가까이서 보좌하는 입장에선 어때? 존경할만한 사람이야?”
“흐음…”
초원지방에서 늑대에게 쫓겨다니던 유년기와 비교해보면, 추격자의 입장이 되어 타냐를 잡으러 다니는 요즘 생활이라고 해서 썩 많이 나아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목숨의 위기는 없으니까 다행이긴 하지만.
타냐를 잡으러 다니랴, 엘카를 간호하랴 바쁜 하루… 허나 그 속에서도 불현듯 묘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 ‘지, 진짜 오라버니가 셀라하 황녀님과 약혼 해버리면… 그래서 사실상 황실의 실권자로 등극해버린 순간 제 은퇴 계획은 싹 다 날아가버리잖아요…!’
황족 숙소에서 나와, 중앙 무대 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타냐를 보좌하던 직스.
머리를 북북 긁어대며 한숨을 내쉬는 타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일 하기 싫어서 죽을 것 같다는 듯이 굴고 있다.
― ‘내 한산한 시골 생활을 위한 은퇴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버릴 뻔 했어요… 오라버니께서 거절하셔서 다행이지…!’
― ‘보통은 왜 그런 좋은 기회를 거절하는 건지 어리둥절해 할텐데 말입니다.’
― ‘권력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권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쉬고 싶어…! 쉬고 싶어…!!’
철 없는 철부지. 일하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한심한 인간. 운 좋게 회장의 자리에 앉아, 가문의 권위에만 기대어 살아가느라 제 복을 걷어차는 멍청이.
타냐의 이런 모습을 보면 혹자들은 그렇게 평할지도 모른다.
허나, 잠시간 침묵이 감돌더니, 이윽고 타냐의 앳되고 철부지 같은 어조가 잦아든다. 그리고는 마치 어둠속에 순식간에 스며들 듯, 조용히 내리깔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 ‘그럼, 캘러모어 가문과 블룸리버 가문을 엮어서 셀라하 황녀를 황실의 1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계획도, 다시 검토해야겠네요.’
타냐 로스테일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기 후계자이자,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다.
툴툴대고, 징징거리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절대로 빈틈을 내비치지 않는다.
오솔길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푹 숙이며 읊조리는 타냐의 뒷모습… 그 뒷모습엔 한 번씩 알 수 없는 귀기 같은 게 서릴 때가 있다.
― ‘어느 쪽이 로스테일러 가문에 득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될테니까.’
어둠이 자리한 오솔길 구석에서,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타냐의 눈에 한줄기 안광이 스쳤다.
“정말 만만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사람이긴 해.”
학생도서관 앞의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직스는 엘카의 어깨를 받친 채 이야기했다.
“그래도, 절대로 쉽게 보면 안돼.”
세상을 살다보면, 한 없이 만만해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처럼 털털하게 굴고 다니는 인간이 많다.
대부분은 실제로 만만하고, 빈털터리인 인간들이다.
그러나, 걔중에는 그런 인간의 무리에 섞여서,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을 비수처럼 숨겨놓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 진짜로 무서운 자들이다.
직스는 미간을 좁히며, 엘카에게 진지한 어조로 그리 이야기했던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 하마, 뭘 원하느냐?”
중앙 광장에서 치러질 행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사실상 하이라이트가 될만한 무대를 한 번에 싹 다 몰아서 관람한 다음, 회장의 폐막사를 마지막으로 거하게 폭죽 터뜨리고 끝이다.
밤 하늘을 가득 수놓는 폭죽의 행렬은 과연 엄청난 장관이겠다만, 나머지 무대는 사실 그간 학사 무대 여기저기에서 나눠서 진행하던 것들을 한 군데 모은 것들이었다.
몇몇 악단의 무대나, 연극, 마법 퍼포먼스 같은 것들은 새로 준비한 것도 올라올테지만… 그렇다고해서 내 신경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학생 광장까지 따라와서 날 벤치 맞은 편에 앉혀놓고 인상을 구기고 있는 셀라하 황녀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양보해본 적이 없다.”
푸르스름한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내리자, 고혹적인 어깨의 선이 보란 듯이 드러난다. 자기 외관에 자신 있는 자들이나 취할 수 있는 제스처였다.
깔끔하게 딱 붙어서 어깨가 드러나있는 드레스는 평소보다도 더 화려하다. 어딜 가든 주인공처럼 구는 셀라하 황녀에게 딱 어울리는 옷이라 볼 수 있었다.
그 덕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한 데 모이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중앙 광장의 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녀가 학생 하나를 끼고 앉아 있는 신묘한 광경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다.
― ‘저기 저거…. 에드 선배님 아니야?’
― ‘저… 저번에는 클라리스 성녀님을 끼고 앉아 있더니, 이번에는 셀라하 황녀님이야…?’
― ‘세… 셀라하 황녀님을 실물로 본 건 처음이야… 그런데, 대체 저 두사람이 어쩌다가…?’
벌써부터 술렁거리는 주변 인파들의 시선에, 나는 한숨이 흘러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황족이다. 대놓고 한숨을 쉬거나, 보란 듯이 무례하게 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네가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마. 설마 아바마마까지 네게 귀를 기울일 거란 생각은 못했구나. 역시 처세에 능한 사내로군.”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의견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그런 순진한 소리에 내가 넘어갈 거라 생각하느냐? 생각하는 바를 가감 없이 말하거라. 네 요구조건은 되도록 다 들어주도록 하마.”
셀라하 황녀는 이를 으득 갈며 이야기 했다.
아직도 고압적인 태도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셀라하 황녀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많이 굽힌 것이다.
네 요구조건을 되도록 다 들어주도록 하마.
그 대사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셀라하 황녀는 자존심이 상해 죽을 것만 같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간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절대로 고개를 숙이는 일만큼은 하지 않는다.
세상이 때려죽여도, 절대로 가슴에 품은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굽히지 않는다.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자를 상대로 매달리고 부탁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다.
그 신념에 이젠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내 특별히, 네 부탁을 전부 들어주고자 마음먹었느니라.”
“딱히 부탁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셀라하 언니에게 회유되어선 안돼요. 이건 저의 정치적 입지 뿐만이 아니라, 에드 당신의 입장에도 직결되는 문제에요.’
― ‘셀라하 언니가 갈망하는 건 오로지 손에 넣지 못한 것 뿐이에요. 제 손에 들어오면 모든 흥미를 잃고 내쳐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절대 넘어가지 않는 것 하나밖에 없어요.’
페니아의 그런 조언은 뭐, 알았다고 치자.
셀라하가 더 강하게 요구조건을 내걸수록, 절대로 넘어가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이야기도 잘 알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언제부터 셀라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내 고집이 꺾였다는 듯이 행동해도 되는 거냐…? 어느 정도 선부터 상대가 완전히 굴복했다고 여기면 되는 거냐…?
애석하게도, 그 기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그냥 버티고, 또 버텨야만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야 당연하다. 셀라하라는 인간의 성격상, 그녀가 양보하고 굽히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허나, 클로엘 황제의 개입으로 상황이 더 급변하고 말았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황권 경쟁에 있어서 더 가치 있는 변수가 되고 나니, 셀라하 황녀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자존심을 굽혀왔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도저히 참지 못할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숨을 확 머금으면서까지 대사를 내뱉는다.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준다고… 분명 말했지 않았느냐?”
“…”
“다소 무리한 요구도 괜찮으니… 말해보거라…”
곧 죽어도 하대한다. 본인이 선심을 쓴다는 듯한 스탠스는 절대 포기 못한다.
하늘을 찌를듯한 자존심은 온몸이 불타는 한이 있더라도 그 고개만큼은 꼿꼿이 세우게 만든다.
“내 요구조건은 그리 대단치도 않다… 나는 이미 대충 알고 있다. 아바마마는 나를 차기 황권주자로 거의 결정지으셨다. 조금만 더, 귀띰을 해줄만한 사람이 있다면… 아바마마도 마음을 완전히 굽히시겠지…”
그 마지막 열쇠가, 에드 로스테일러가 될지도 모른다.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도저히 닿지 않았던 황권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움켜쥐라고 귓가에 속삭인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출세를 꿈꾸는 그 야심이 셀라하 황녀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이번 한 번만 굽히면, 차기 황제는 너다.
그 참을 수 없는 유혹이 그녀의 고개를 푹푹 찍어누를 터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라고.
그간의 무례를 사과하고, 지금부터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보자고. 제발 부탁이니 한 번만 편을 들어달라고.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이미 고개를 숙이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인간들은 다 굴복했을, 찬란한 영광과 막대한 권력을 코앞에 둔 이 상황에서조차.
셀라하 황녀는…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끝까지 본인이 위에 있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일국의 황제조차도 경이롭다고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다. 이쯤되면 신조차도 어이없어할 정도로 굳건한 뚝심이다. 거의 신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될 지경이다.
“아니면… 내가… 네게… 빌기라도 할 것 같으냐…? 고개를 숙이며 부탁이라도 할 것 같냔 말이다. 나는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다. 클로엘 제국의 제 1황녀란 말이다.”
“…”
“너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절대로 고개를 꺾지 않는다. 설령 코 앞에 황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아랫것에게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부탁이나 해댈 것 같으냔 말이다.”
“셀라하 황녀님.”
어쩔 수 없다.
셀라하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는 정해진 방침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순간의 판단에 이끌려서 계획 바깥으로 일을 끌고갔다간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므로.
“저는 페니아 황녀님의 세력입니다.”
그 말에, 셀라하는 발작이라도 하듯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또…! 또 페니아…! 대체… 페니아에게 무슨 빚이라도 진게냐…?!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되는 것이냔 말이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진 않습니다.”
“그럼 대체 왜 그렇게까지 페니아한테 충성을 하냔 말이다! 내가 다 준다고 말했지 않느냐?! 돈, 권력, 로스테일러 가문의 복권, 황실의 요직… 다 주겠다고 말하는데, 아바마마 앞에서 날 한 번 두둔하는 것조차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 놈의 충심이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렇게까지 이해판단이 안되는 거냔 말이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목소리를 드높였던 셀라하 황녀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이를 간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며 이야기 한다.
“그래, 기어이… 내가 고개라도 숙이며 부탁해야 들어주겠다는 것이냐..?”
“그런 건…”
“그럼 페니아를 버리고 내 쪽으로 붙겠느냐? 그대도 참으로 악취미로다. 기어이 내가 자존심을 꺾고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싶은게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해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셀라하 황녀의 표정은 더욱 더 일그러진다.
“그럼 대체 뭐가 널 페니아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냔 말이다! 어디 말해보라고 계속 하지 않느냐! 원한다면 페니아의 안위까지도 내가 챙겨준다고 말하지 않느냐! 대체… 대체 뭐가 불만이란 말이냐!”
“페니아 황녀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셀라하는 꺼억대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숨을 집어삼키더니, 자기 얼굴을 쓸어올리며 어이 없다는 감정을 표출했다.
“아바마마를 만나면, 페니아를 황제의 재목으로 추천할 생각이구나.”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봐야할 일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저는 셀라하 황녀님이 황제로서는 더 어울리는 재목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페니아 황녀님의 방식에 감화되어 그녀를 따를 뿐입니다. 충성심의 방향이, 꼭 권력의 방향을 따라가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페니아 황녀님께 불리한 진언을 드릴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고할 수도 없으므로… 좀 고민스럽긴 합니다…”
“그렇게… 자꾸 여지를 주는 듯한 느낌이 더 치가 떨린다…! 차라리 날 원망하고 경멸하며 적대하든가…!”
셀라하는 그리 이야기하다가 헛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간 것이다.
반복해서 사람의 신경을 긁고, 자존심을 자극해대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뒷걸음질 치는 일의 반복이다.
사람의 신경을 가지고 신묘한 줄타기를 해대는 듯한 태도에 멀미가 올라올 것만 같다.
본인은 자각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셀라하 황녀 같은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독약이나 다름없는 태도다.
셀라하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테이블에 다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허리에 힘을 풀고… 한 번 고개를 숙일까… 진심으로 고뇌했다.
참을 수 없는 권력의 유혹이, 그녀의 고개를 떨구려고 하는 순간… 다시금 팔에 힘이 들어갔다.
본능의 영역에 새겨진 자존심이 어떻게든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한다. 굳어버린 목을, 이를 악물고 숙여보려고 하지만… 부득부득 이만 갈려나갈 뿐 고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도 영 힘든 상황인지라, 나는 오히려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셀라하 황녀님. 분명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았습니…”
“닥쳐… 닥쳐라…! 입 닥쳐, 그 시끄러운 입 다물고 닥치고 있으란말이다…!”
에드를 노려다보는 셀라하의 눈빛엔 숭고함이 느껴질 정도의 의지가 배여있었다.
“몰락해가는 공자 나부랭이 주제에… 내가… 내가 누군줄 알고…. 너와 나의 격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냐…? 내가 얼마나 한 없이 높은 존재인지, 너 따위와는 다르게, 얼마나 고귀한 자인지 이해하고 있냔… 말이다…”
셀라하는 아득바득 이를 악물면서 그리 이야기 했지만… 그럼에도, 팔을 억지로라도 굽혔다.
그리고, 그 끝에… 기어이 고개를 숙이고이야기했다.
“부탁하마.”
황실의 신하들이 봤으면 모두 제 눈을 의심했을 광경이었다. 다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페니아 쪽에서 나와서, 내 쪽으로 붙어주거라.”
셀라하 황녀가 자존심을 굽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나도 모르고 있지는 않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했으면… 어차피 벨브로크를 위한 병력이 필요할 뿐인 내 입장에서는 대충 받아들여줘도 나쁘진 않다.
그러나… 정해둔 방침이란 게 있다.
이대로 셀라하 황녀의 부탁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변수가 어떻게 변화할지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뭘 어떻게 믿으란 것인가.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그 셀라하 황녀가 이렇게까지 했다는 사실만 보고서 홀라당 넘어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고, 나 또한 흔들거리긴 하는 입장이긴 하다만…
모든 상황이 끝나고 셀라하 황녀가 어떻게 태도를 뒤집을지 모르는 입장이다. 나한테는 목숨이 걸린 일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이쯤되면 받아들여줄만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올라옴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악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페니아 황녀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 쾅!
셀라하 황녀는 테이블을 내려치고서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탄식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대관절 이 사내는 뭘 원하는거지?’
사람을 회유하려거든,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해낼줄 알아야한다.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면, 대부분은 넘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는 원할만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었음에도 도저히 넘어오질 않는다.
‘애시당초… 아바마마의 총애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사내 아닌가. 별 것도 아닌 주제에, 왜 이렇게까지 굳건하게 버틴단 말이냐…’
에드의 반대편 좌석에 주저앉은 채, 잠시간 그를 노려보던 셀라하 황녀는 다시 한 번 이를 부득 갈았다.
자존심을 굽히고 아랫 것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셀라하 황녀 입장에서는 영혼을 부러뜨리는 것과 같을 정도로 치명적인 굴욕이다.
그것을, 이 사내도 분명 잘 알고 있다. 그 행위에 담긴 진정성이란 것도 전달이 되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내의 행동은 이제 경이로울 지경이다. 이렇게까지 독하게 버티는 인간은 처음이다.
인간의 충심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이해타산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누군가를 회유하지 못했다면, 그 자의 진정한 바람을 정확하게 꿰뚫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내가…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처세를 보여주었는데도, 다 내려놓았는데도…?’
그럴 수는 있다.
세상 누가 와도 빳빳한 고개만큼은 절대로 숙이지 않는 셀라하 황녀의 자존심은… 자기 자신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다.
허나, 이 사내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 그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는가.
몇날 며칠이 지나도록 편지를 쓰고, 설득을 해도, 대쪽같은 마음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이 사내의 굳건함은… 이렇게까지 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로… 그 충심 하나 만으로 그렇게 버티고 서있을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을 호령하는 1황녀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내려갔는데, 그것이 몰락해가는 공작 나부랭이가 내다놓은 자식 하나의 마음도 못 꺾는단 말인가?
그 사실이 셀라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세상 고귀한 자신의 마지막 발버둥이, 가장 가치있다 생각한 자신의 콧대높은 명예가… 아무런 가치조차 없이 헌신짝처럼 내다버려지는 느낌이다.
도저히 본인 스스로가 납득할 수가 없다.
풍랑을 맞이한 바다의 풍경처럼, 셀라하의 마음속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대로 납득할 수는 없다. 자신의 드높은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만다.
누구에게나 심리적 방어기제가 있다.
평생토록 애지중지 지켜온 자존심을 꺾어낸 셀라하 황녀가, 그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단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
그 드높은 자존심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서… 사고의 흐름을 꺾고 만다. 응당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고작… 이런 사내에게… 내가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그럴 이유가 없다… 이 내가… 그런 조잡한 이유로 고개를 숙일 리가 없어…’
그냥 사람 충심하나 꺾어보겠다고 평생토록 지켜온 신념을 내다버리는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정당화할 명분이 필요하다.
비틀린 신념은 스스로의 사고에조차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지난 며칠간 스스로 고뇌하고 또 고뇌해가면서 써내려온 편지의 내용이 머리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향한 구애의 언어들이, 그를 끌어안고, 품에 넣어, 참모로서 곁에 두어 끝까지 함께 하고싶다는 말들이 머릿속에 메아리 친다.
그제서야, 셀라하는 스스로의 행동에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
계기는 중요치 않다. 결국 그 끝에 나온 결론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면 그만이다. 사람의 심리란 그토록 간사한 것이다.
연심의 계기라는 것도, 결국엔 마찬가지다. 다 같은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이 사내를… 진짜로…? …설마, 그건… 그럴 리가…’
문득, 셀라하가 고개를 휙 들어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 쳐봤던 사내다. 끝끝내 그 대쪽같은 심정을 절대로 굽히지 않은 인간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뒷목을 타고 올라와서, 셀라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셀라하 본인조차도 알 수 없는 감각이 뒷머리를 타고 찡하게 올라와, 순식간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건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평생을 타인을 휘두르며 살아왔던 삶 아니던가.
그 익숙치 않은 느낌에, 셀라하 황녀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과 같은 아득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미지(未知)를 마주했을 때의 두려움이었다.
*“엘펠란 가문과는 언제 쯤 만날 일정을 잡는 게 좋을까요?”
“일단 축제가 끝난 다음 주변 상황이 조용해졌을 때가 적절할 것 같아요. 그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해두겠습니다, 페니아 황녀님.”
페니아는 클레르에게 그리 지시를 한 뒤, 엘펠란 가문 쪽에서 보낸 서신들을 모두 정리해서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고, 귀빈용 소파에 몸을 묻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구나…”
자존심 강한 셀라하 황녀는 끝끝내 에드와 타협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엘펠란 가문은 불안함을 느낄 것이고.
허나,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을 때야말로 가장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때다.
애시당초 계획이라는 건, 그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 변수라고 할만한 것도 없으니… 괜찮을 것 같지만…”
페니아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여러 문건들을 보면서, 괜히 한숨을 머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