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31)
살아남은 그대에게 (6)
그 뒤로도 셀라하 황녀와의 신경전은 한참동안 계속 됐다.
폐막식 행사를 앞두고도 계속해서 나를 잡고 닦달을 해대는 통에, 내 입장으로서는 그냥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아 황녀님이 슬퍼하십니다…”
“그건 페니아 황녀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페니아 황녀님께 거짓을 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페니아 황녀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입니다.”
페니아, 페니아, 페니아, 페니아.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정도로 페니아 황녀를 방패로 들이밀면서, 끝까지 셀라하 황녀의 회유를 전부 다 튕겨냈다.
이쯤되면 끊임 없이 날 잡아채려 드는 셀라하 황녀도 대단할 지경이다.
셀라하 황녀는 손에 들고 다니던 레이스 부채를 벤치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미간을 좁히면서 자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세상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뭔가 절실해 보이기도 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면서도 아련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참으로 탁월한 연기력이다. 하긴, 그 하늘 같은 자존심까지도 잠시 내려놓았으니 뭔들 못할까.
그러나, 여기서 방심을 풀어선 절대로 안될 일이다.
페니아 황녀가 당부하고 또 당부한 일이다. 넘어가는 순간, 내 가치는 헌신짝조차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선 끝까지 뚝심을 지켜야만 한다.
“아무래도, 네 선에서 설득하는 건 힘든 일이겠구나. 너는 역시 페니아의 지시만을 듣는 모양이로다.”
한결 진정된 어조로 셀라하 황녀가 이야기 했다.
같은 이야기만 반복된지 어언 십분이 넘어가는데, 드디어 대화의 진전이라는 것이 이어질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간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러자 셀라하 황녀는 한숨을 머금고 이야기 했다.
“그럼, 내가 직접 페니아한테 이야기 하는 수밖에.”
“…예?”
“페니아의 지시라면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페니아를 설득해서 너를 내게 협조하도록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
“그… 그건… 논리적 하자는 없습니다만, 그게 됩니까?”
그거 안된다.
그렇게 단념하는 듯한 어조에, 셀라하 황녀는 오히려 자존심을 구겼는지 인상을 팍 쓰고 이야기했다.
“꽤 자신 있나보구나. 페니아가 너를 끝까지 아끼고 내놓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는 것이냐? 미안하지만, 너 하나 페니아의 품 안에서 빼내는 건 일도 아니란다.”
“황권 경쟁이 끝나가는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기 세력 사람을 상대에게 넘겨줄만한 분은 아닙니다.”
“교환 조건으로 뭘 거느냐에 따라 다르지. 어차피 너 하나 넘겨준다고 로스테일러 가문의 지지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당장 가주 자리를 꽉 쥐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가 페니아를 지지하고 있는 한, 너 하나가 지지를 바꾼다고 그리 큰 이변도 아닐 터.”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셀라하 황녀는 덧붙였다.
“어차피 나와 엘펠란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것 아니냐?”
이 부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 모를 줄 알았느냐? 조금 뒤늦게 눈치채긴 했는데, 엘펠란 가문의 그 박쥐가 쓸 데 없는 일을 꾸미더구나. 페니아 쪽으로 넘어가서 내 세력의 내부 비밀 따위를 팔아치울 생각인 것 같던데… 그런 짓을 할 거면 내가 학사를 떠난 다음에 했어야지.”
“…”
“뭐, 그 박쥐놈 입장에서는 이번 축제 기간이 끝나면 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서 한 행동이겠지만… 애석하게도 판단을 잘못했더구나. 페니아가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나도 페니아에 대해선 잘 알거든.”
셀라하 황녀는 고압적인 태도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유독 페니아나 페르시카를 대할 때에는 평소보다도 더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였다.
“페니아 그 아이는 배신자 따위는 기용 안해. 그냥 엘펠란 가문이라는 강력한 지지세력을 나한테서 떨어트려 놓고 싶었을 뿐이겠지. 엘펠란 가문 쪽에서 나를 떠나고 페니아 쪽으로 붙으려고 해도, 페니아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야. 가엾은 멍청이들. 그냥 내 아래에 얌전히 있었으면 한직이라도 받아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
“그딴 무능한 배신자 놈들, 나도 필요 없다. 엘펠란 가문의 지지 철회는 다소 피해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딴 썩은 가지를 안고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지. 어차피 페니아한테도 버려질테니 알아서 도태될 거다.”
셀라하의 말이 맞았다.
페니아 황녀는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두루 기용하지만… 배신자에 한해서는 절대로 기용하지 않는다.
엘테 상회를 배신하고 페니아 쪽에 붙으려던 듄 그렉스도 망설임 없이 잘라내버렸던 것처럼, 그녀에게 있어서 누군가의 뒤통수를 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란 중용의 대상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배신과 협잡질의 대명사인 로르텔 케헬른과 언제나 대립하는 이유다.
로르텔 케헬른이란 자는 페니아의 모든 이상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 정도 유혹에 넘어가는 부관이라면, 곁에 둬봐야 큰 의미도 없지.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네 그 굳건한 충성이, 날 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보장해주지. 페니아에 대한 충심? 그런 것이야, 내가 페니아와 협상을 마치면 전부 해결될 일 아니더냐? 그 과정에서 뭐, 손해야 좀 있을지도 모르지만 감수할만 하지.”
“…셀라하 황녀님.”
“뭐냐?”
“그래서야,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닙니까?”
“…그건 무슨 소리더냐?”
나는 조리있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좀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권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서 절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절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황권 경쟁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꼴이 됩니다. 이건 좀… 앞뒤가 바뀐 꼴 아닙니까?”
“…”
“로스테일러 가문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절 억지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른 정치적 이권을 포기하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시끄럽다, 네가 뭘 안다고 쫑알쫑알 훈수를 두느냐? 건방진 놈이, 어느 면전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냔 말이다.”
갑작스럽게 논리 따위는 내다버리고 언성을 높이는 셀라하 황녀. 과연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인간이라는 소문이 날만했다.
“너 하나를 내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손해를 감수하든 네가 신경쓸 필요는 없다. 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마치 내가 너한테 사적인 감정이라도 있어서 억지로 널 잡아끄는 것 같지 않느냐.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제 아무리 로스테일러 가문의 공자라 할지라도, 그건 자의식 과잉이다.”
“셀라하 황녀님이 제게 사적인 감정 같은 걸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건 압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가 감히 뭔데 내게 사적인 감정을 가질 수 없니 마니 하는 것이냐?”
“…”
피곤하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피곤한 인간이다…!
“그, 그리고 사적인 감정 따위를 정치적 담론 앞에 가져오지 말거라…! 천박하게…!”
“그… 먼저 언급하신 건 셀라하 황녀님이십니다…”
“자꾸 말대꾸를 하는 것이 건방지구나… 네놈… 그리고, 사적인 감정이라는 건 언제 생겼다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니라. 섣부르게 확신하는 꼴이 오만하구나.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좋지 않다.”
“그럼, 제가 셀라하 황녀님께 사적인 감정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말이! 어째서 페니아는 이리도 꽉 막힌 인간에게 총애를 주고 있는 것이란 말이냐. 참 통탄할 노릇이다…! 자꾸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거라! 어이가 없어서 마, 말문이 막히니까!”
바로 그 꽉막힌 인간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맞나…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셀라하의 세력으로 넘어갈 수는 없으므로, 당장은 이 상황을 무마하는 게 맞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고맙게도 상대편에서 먼저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어쨌든, 폐막식 행사에는 참석해야하니 일단은 풀어주도록 하마. 그 전에 페니아를 만나서 협의를 하고 올 것이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바마마를 만나러 가지 말거라!”
“폐막식 행사가 끝나고 바로 체스를 두자고 황명으로 지시하셨습니다. 제 아무리 셀라하 황녀님의 지시일지라도, 클로엘 황제님의 황명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가지 말라고 했느냐? 가기 전에 나 먼저 만나고 가라는 소리다…! 왜, 그토록 내 얼굴이 보기 싫으냐?”
틈만나면 잡아먹을 듯이 구는 상대를 어떻게 즐거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겠는가.
셀라하 황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멋쩍었는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다음에 만날 때는 넌 내 휘하의 부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페니아를 닦달해내고, 원하는 걸 빼앗아 오는 데에는 도가 텄거든. 너라고 다를 것 같으냐?”
그제서야 평정을 되찾았는지, 셀라하 황녀는 몰아쉬던 숨을 어떻게든 수습해내고서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미안하지만, 넌 내 거다. 다음번에는 네가 그 무거운 머리를 숙이게 될 거다.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려 하는구나, 쿠후후.”
“절대로 안 돼요.”
페니아 황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족 숙소의 호화로운 접견실.
폐막식 행사에조차 참석하지 않고 황족 숙소까지 한 달음에 달려온 셀라하 황녀다. 허락된 시간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촉박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에드 로스테일러가 지지를 철회하면, 현재 가주 역할로 있는 학생회장 타냐 로스테일러도 덩달아 지지를 철회할 것이 뻔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리스크가 너무 커요. 저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절대로 넘겨줄 수 없어요.”
“하하… 페니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공식 석상에서 로스테일러 가문을 꾸준히 공격해 왔던 인간이지. 그런 나를 아무런 언질도 없이,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가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 보니…? 로스테일러 가문의 잔존 세력들이 그런 의견에 찬성할 리가 없지.”
“아뇨. 타냐 로스테일러는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에드 로스테일러 쪽으로 붙을 거에요.”
페니아는 단언한다.
함부로 말을 단언하지 않는 페니아 황녀의 성품은 셀라하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구는 모습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되면 약속하신 장미궁 쪽의 측근 퇴출이나, 황실 기사단 내부 세력에 언니가 직접적으로 손을 뻗치지 않겠다는 약조, 그리고 저를 지지하는 분들을 향한 노골적인 정치적인 견제를 멈추겠다는 약조로는 모자라요. 적어도… 황권 주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신다면 모를까.”
페니아는 알고 있다.
셀라하 황녀는 절대로 황권 주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녀가 반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온 야심이자 꿈이다.
황권 주자의 자리를 포기하라는 내용의 요구조건을 내미는 것은, 그저 타협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판돈을 크게 올려놓는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셀라하의 콧대높은 자존심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머리가 많이 커졌구나, 페니아. 못 알아 보겠어.”
“그러는 셀라하 언니는, 옛날이랑 비해서 변한 게 전혀 없네요.”
“그 사내는 왜 너 같이 현실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철없이 뜬구름이나 잡는 철부지를 따르는 것일까.”
“적어도 오만하고 독선적인 셀라하 언니를 따르는 것보단 낫다고 판단했겠지요.”
“하하… 말대답… 말대답이라… 정말, 이 아켄섬에 오고 나서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내 자존심을 긁어대기만 하네…”
셀라하는 웃음을 흘렸지만, 그 입술은 비죽 내려가 있었다.
“언제나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거리던 네 모습이 참 고분고분해서 좋았는데… 실베니아에 다니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나 보구나.”
“확실한 건, 일단 제 쪽에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내줄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거에요.”
“페니아. 내 오기를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아. 난 한 번 이성을 잃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다.”
“애초에 이상한 일이네요.”
페니아 황녀는 한 달음에 접견실까지 달려온 셀라하 황녀를 보고는 내심 당황했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취하려 들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일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에드 로스테일러를 세력 안에 꽉 쥐고 있으면, 정치적으로든 세력적으로든 많은 이득이 동반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이고 속물적인 이유 뿐이라면… 다른 정치적 이점까지 포기해가면서까지 에드를 손에 쥐려고 하는 움직임이 설명되질 않는다.
“황실 내부 기관 안에서의 권력 투쟁까지 양보해가면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손에 쥐려고 한다고요? 그건, 그가 가진 정치적 위치를 생각해보더라도 손해보는 행동이잖아요.”
“…”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에요? 에드 로스테일러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고요? 너무 수상해요.”
“…딱히, 무슨 짓은 시키지 않을거다.”
“거짓말.”
“그냥 단지 신경 쓰일 뿐이다.”
“신경 쓰인다니 무슨 소리에요, 그건?”
“왜 그런 쓸 데 없는 걸 묻지? 설령 다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페니아 네게 내가 일러줘야 할 의무라도 있나?”
셀라하 황녀는 미간을 확 좁히며 페니아 황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내 하나를 취하고 싶은 것에 굳이 가타부타 이유를 가져다 붙여야 하느냐?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이득보는 부분까지 있으면 좋을 일이지만… 그런 게 없더라도,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내를 손에 쥐고 싶어하는 것일 뿐인데, 굳이 이유를 대라고 추궁해봤자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냔 말이다!”
“…”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느냐? 왜 그런 표정을 짓지, 페니아?”
“그… 셀라하 언니. 본인이 하신 말을 좀 곱씹어 보면 어때요?”
페니아는 이제야 눈치 챘다. 셀라하 황녀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르다.
언제나 기품을 챙겨가면서, 자기가 할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가면서 내뱉던 자다.
그런 자가, 묘하게 마음이 급해보이고, 반드시 확답을 받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페니아 황녀는 셀라하 황녀가 에드 로스테일러를 취하고 싶어 할 거란 것 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 사이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고, 그저 정치적 이득에 관련된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러나… 묘하게 다급해 보이는 셀라하의 표정에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 페니아는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 셀라하가…
세상 모든 것을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관조하던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
“…”
아직도 페니아의 기억에는 똑똑히 남아있다.
셀라하는 유년시절부터, 그림으로 그린 듯한 폭군 그 자체였다. 페니아의 기억 속 셀라하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악질 중의 악질. 성악설의 산증인과도 같은 인간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부탁해놓은 바가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란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셀라하 언니… 혹시…”
“…너무 자세하게 묻진 말거라. 나도 지금 좀 당황스러우니까.”
그야 당황스러울 수밖에. 평생토록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꺾어본 적은 없으니까.
페니아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셀라하 본인도 뭐라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간의 정적이 이어지다가, 다시금 셀라하가 못참고 말을 꺼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고귀한 황족의 혈통을 타고난 황권 주자라는 자들이 사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것 같은 모습은… 남사스러워서 어디에 보여줄 수나 있겠느냐?”
“먼저 다른 세력 사람을 빼내려고 든 것은 셀라하 언니잖아요!”
“어쨌든, 이 건은 오늘 밤 안에 마무리 지어두잔 이야기다. 괜히 장기화되어서 좋을 건 없는 이야기다. 네게도, 내게도 말이다. 그리고… 나라고 숨겨둔 카드가 더 없을 것 같으냐?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건 내 쪽이란다. 내가 제안할 때 얼른 받아들이는 게 좋을텐데.”
페니아는 셀라하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워낙 뜬금없어서 그럴만 했다.
“오늘, 아바마마께서 나와 에드 로스테일러의 약혼을 추진시키려고 했거든. 지금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계시던 것 같고 말이다.”
“…뭐라고요? 그런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누가 믿어요?”
“사실관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을테지. 중요한 건, 내가 작정하고 추진하면 아바마마의 지지를 업고 억지로라도 약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거지. 아바마마의 말씀은 곧 이 제국의 법도니까.”
“…세상에. 에드 로스테일러 본인의 의견은요?”
“그런 게 중요한가?”
셀라하는 고개를 내밀고 유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는 내 거야.”
그리고선 속삭이듯 덧붙인다.
“일단 몸과 자유를 취하면, 마음 따위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취하면 될 일이지. 내가 더 난폭한 수단을 취하기 전에 내놓는게 좋을걸.”
“…아무리 언니가 호기심을 느꼈다고 해도, 다짜고짜 약혼부터 하는 건 언니 본인에게도 큰 부담일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페니아, 너…”
“언니, 지금 폭주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조금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약혼 같이 난폭한 수단은 셀라하 언니한테도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은 다 알 수 있어요.”
페니아의 지적은 맹점을 찌르고 있었다.
셀라하가 에드 로스테일러를 상대로 독점욕 비스무리한 감정을 자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즉각적인 감정에 휘둘려 약혼 상대를 정한다니. 제 정신이면 그런 짓은 못한다.
그저, 에드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페니아를 쥐고 흔들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네 말이 맞아, 페니아.”
페니아도 확실히 어렸을 적에 비해 많이 예리해졌다.
유년 시절, 셀라하에게 휘둘려 인형이나 뺏기고 다니던 그녀가 아니란 사실은 인정해야만 했다.
“허나, 방금 네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내 자존심을 긁었구나.”
허나, 페니아가 예상치 못한 것은… 셀라하의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심은 일반적인 사고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셀라하 언니?”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약혼 쯤이야 못할 것도 없지. 왜, 지나치게 난폭하게 나가는 것 같으냐? 허나, 잘 생각해보면 약혼을 못할 건 또 뭐냐?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파혼하면 그만인 것을.”
“…이성을 잃지는 마세요, 셀라하 언니.”
“나는 지금 매우 침착하단다. 다만, 자꾸 내 신경을 긁는 일들이 반복되니 머리에 열이 오르기는 하는구나.”
확실히, 셀라하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그러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고 해서 그 내면도 잔잔하리란 보장은 없다.
“날 자극하지 말았어야지.”
“이런 말까지 하게 될지는 몰랐는데, 그렇게 강제적으로 일을 추진하면 좋지 않은 일로 이어질지도 몰라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 영광스러운 클로엘 제국의 제 1황녀를 겁박할 인간이라도 있을까봐?”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진 않겠지만, 에드 로스테일러를 중심으로 구축된 인간관계는 생각이상으로 복잡하거든요.”
페니아는 벨이나 직스만큼 에드의 인간 관계에 대해 숙지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최소한 에드가 그런 식으로 납치 약혼을 당했다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을 몇몇 인물들이 떠오르긴 한다.
하나 하나가 쉽게 볼 수 없는 인간들이기에, 셀라하 입장에서는 악수 중의 악수가 될 소산이 크다.
“제 입장에서도 일이 커지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짓은 안하는 걸 권장드릴게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마라. 페니아. 최근 지지세력이 늘었다고 해서… 그 사내한테 충성을 받는다고 해서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드나…?”
“셀라하 언니…”
“충성심이란 바람 앞의 갈대라는 것이란다. 지금은 평생 널 따를 것처럼 굴지만, 언제고 그 마음이 꺾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지. 장미궁의 더러운 암투와 권모술수를 직접 경험하며 자란 너라면 알테지?”
셀라하 황녀는 상반신을 쭉 내밀고, 페니아 황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충성심이라는 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변하지.”
“…”
“그리고, 그렇게 사람 마음을 비틀어 꺾는게 내 주특기고.”
그 사실만큼은 인정해야만 했다.
셀라하 황녀는 군림하는 자로서, 신하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같은 것이 있다.
언제나 확신에 찬 결정을 하고, 제 고귀함을 아는 듯한 우아함을 두르고 있다.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야만 하는 것. 그것이 황제의 재목이라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그 기질조차, 결국 군림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것이니.
셀라하를 추종하는 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구둣발에 입을 맞춘다.
“…”
페니아는 셀라하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셀라하는 에드의 충심을 몇 번이고 꺾어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상태다. 이건 단지 페니아를 뒤흔들기 위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페니아가 그 과정까지 전부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단지, 묘한 불안이 피어오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 에드 로스테일러다. 이미 페니아와의 이야기도 모두 끝나있다. 절대로 셀라하에게 회유되지 않을거라고 결심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뚝심을 꺾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에드도 에드지만, 셀라하도 셀라하다.
영원히 불변할 거라 생각했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제 뜻대로 취해온 삶을 살아온 소녀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끝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수많은 신하들이, 셀라하의 비전과 카리스마에 이끌려 넘어갔다. 그리고, 능력과 쓰임새가 다하고나면 흥미를 잃은 셀라하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페니아는 이미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빼앗긴 것에 대한 상실감. 원래 없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그 빈자리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타인의 것을 약탈하며 자라온 셀라하 황녀의 친동생이기에,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를 휘하에 두고 있으면서 느끼고 있던 묘한 평온과 든든함을, 그제서야 자각하기 시작한다.
잃고 나서 자각해봐야 늦다는 것을 안다.
에드 로스테일러와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드 로스테일러가 페니아 황녀에게 앙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에드와 페니아의 관계는 적대관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페니아에게 협조적으로 대해주는 게 이상한 것이다. 페니아와 에드의 관계는, 사실상 에드의 이해심으로부터 지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잃을 수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배후를 덮치는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당초에는, 에드를 이용해 셀라하의 세력을 흔들려고 하는 계획이었다.
“엘펠란 가문과 나를 이간질하려고 머리를 좀 굴린 모양이구나, 페니아.”
그러나, 그조차도 간파해냈다는 듯한 셀라하의 태도가, 페니아의 뇌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각인시킨다.
“미안하지만, 그런 알량한 계획에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란다.”
모든게 네 생각대로 흘러가리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런 메시지를 남겨 놓은 채, 셀라하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접견실을 떠났다.
“…”
덩그러니 남겨진 페니아 황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잠시간 홀로 앉아 있었다.
접견실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