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37)
벨브로크 토벌전 (5)
― ‘굳이 살아야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글록트란 이름을 댄 소년이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어리숙한 소년이, 세기의 대현자 실베니아 로베스테르와 만나 대담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모험가 달렉스 엘더베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황제는 실베니아로 하여금 각개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을 모두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실베니아의 견문을 넓혀준다면, 그녀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만드는 마법의 혁신을 계속해서 일구어내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황제의 의도는 제대로 들어맞았다. 백합궁 연구실에 있을 당시 실베니아의 견문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넓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자가, 공허한 눈을 하고 있는 더벅머리 소년 글록트였다.
접견실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실베니아를 올려다 보던 소년의 그 허망한 눈을, 그녀는 쭉 잊지 못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인 오지 모험가 달렉스는 저번 달에 사망했다. 극동의 땅을 탐험하다 곰에게 습격당해 죽은 것이다. 어머니는 글록트가 태어나던 날 돌아가셨으므로, 사실상 고아나 다름 없는 신분이 된 것이다.
홀로 남겨진 아들 글록트는, 마지막 소원으로 이름난 대현자 실베니아와 독대하고 싶어했다.
그의 아버지인 달렉스 엘더베인의 공로를 치하하며, 황제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윽고 드디어 실베니아와 마주하게 된 날, 그 멍한 눈의 소년이 꺼낸 말은 그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저는 태생적으로 몸이 병약해요. 마탑에서는 마법적인 재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대요. 그렇다고 무척 똑똑하지도 않아요.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대하는 게 오히려 힘들어요. 친한 사람도 없고, 그나마 가족이라 할만한 사람도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 ‘…’
― ‘이대로 쭉 산다고 해서, 딱히 인생에 빛을 볼 것 같지도 않아요. 뚜렷한 목표도 없어요. 꿈이라 할만한 것도 없을 것 같고, 생긴다고 해서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더 나아질 거 없는 인생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소년의 눈엔 확신마저 서려있다. 본인의 인생이고, 본인의 자질이기에,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안다는 것이다.
― ‘저는 행복이라는 걸 몰라요.’
― ‘그건 무슨 소리니?’
― ‘혹시라도 모를 일이죠. 쭉 살다보면, 이렇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멍청하기만 한 저라고 해도… 어딘가에는 두각을 드러낼지도 몰라요. 운이 좋다면 큰 성공을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결국에는 전 쓸쓸하게 죽을 거에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 죽음을 맞이할 거에요. 아예, 저는 처음부터 그냥… 텅 비어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이유 없는 확신이 들 때가 있다.
자기 삶이 이렇게 쭉 이어져 나가봤자, 더 나아질 건덕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이 오고 만다.
자기 인생의 고점이라는 것이 너무 명확하게 보여, 그리고 그것이 고점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리 높지도 않다는 사실이 가늠이 가고 말아…
그렇게, 삶이라는 것 자체에 허무를 느끼는 순간이 오고 만다.
이리 비루한 삶을 아득바득 이어나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연을 얻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 삶이 기적처럼 뒤집히는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다.
99프로의 비루한 삶은, 모두 비루하게 마무리 되기 마련이다.
동화 속의 불행이란 꺾어내야만 할 시련이다.
불행이란 꺾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행을 꺾어내고 다가올 빛나는 미래를 손에 취하는 것이, 동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불행은 그냥 불행일 뿐이다.
불행은 그 자체로 불행이다. 도래한 현실이다. 손과 발이 신체에 달라붙어 있는 기관에 불과한 것처럼, 불행 또한 평생을 이고 나아가야만 할 혹덩어리에 불과하다.
빛나는 해피엔딩을 담보해주는 장애물도, 언젠가 날 더 성장시켜줄 마음의 양식도 아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아닌 자들에게 있어 불행이란, 그냥 불행이다.
―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꼭 당신한테 묻고 싶었어요.’
그런 소년이, 실베니아에게 공허한 눈을 향한 채 묻는다.
― ‘앞으로 빛 볼 일이라곤 하나 없는 이런 인생을, 전 정말로 끝까지 살아내야만 하나요? 대체 그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칠 뿐인 삶일지언정, 계속 살아나가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열 살배기 소년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실베니아는 거기서 자기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절대적 힘의 우위가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부 동원해야만 한다.
우선, 탁 트인 지역에서 정직하게 힘의 크기로 붙는 것은 자살 행위다. 지형지물을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전장부터 이동해야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품 속에서 꺼낸 연막 발생기를 바닥에 흩뿌리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 콰악!
― 화아아아아악!
벨브로크의 브레스가 밤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마력의 외침이 다시 한 번 아켄섬을 뒤덮고 있는 순간, 나는 피어오르는 연막 사이로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방금 급하게 탈출해나온 트릭스관으로 다시 뛰어들어가기 위함이다. 탁 트여있는 앞마당에선 모든 공격을 직접 받아내야 하지만, 온갖 벽과 문으로 막힌 트릭스관 내부에서는 어떻게든 시야의 사각지대를 활용할 수 있다.
실베니아는 그 의도를 정확히 읽었다는 듯이, 손을 한 번 가볍게 휘적이는 것만으로도 수십발의 마탄을 날려댔다.
실베니아 입장에서는 가벼운 잽… 이라는 비유조차도 실례가 될 정도로 별 거 아닌 일격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떠는 것 정도 밖에 안되는 신경만으로도, 사람의 몸을 분쇄하고도 남을 마탄이 수십개가 발현이 된다. 정확히 나를 향해 내려 꽂히는 마탄의 폭격을, 나는 트릭스관의 로비 안으로 몸을 날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회피해냈다.
― 쾅! 콰광! 쾅!
이윽고, 트릭스관의 입구가 무너져 내린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있었던 곳을 건물 잔해가 몰아쳐 내려오고 있었다.
트릭스관 로비 공간은 뻥 뚫려있는 편이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끌고 시간을 지체시키려거든, 2층이나 3층 복도 쪽으로 도피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계단 쪽으로 몸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 쾅!
건물 옥상이 두부처럼 썰려나간다.
방금 전까지 뻥 뚫린 꼭대기에 있던 실베니아가, 발을 한 번 구르는 것만으로 1층 천장까지 전부 부수고 바닥에 착지한다.
로브자락이 휘날리고, 흙먼지가 피어오르지만, 그 중심에 서있는 소녀는 거대한 지팡이를 한 번 털어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여파를 전부 흡수해버린다.
물리력에 의한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움직임.
그 흙먼지 사이에서, 좀비처럼 상반신을 푹 숙이고서는 히죽 웃더니… 나를 보고는 그 소름끼치는 동공을 늘려보인다.
“용감해. 용감해. 정말 용감해.”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도망치지 않는구나. 용감해. 정말 용감해. 멋져. 용감해. 대단해. 저 하늘을 뒤덮는 성창룡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건물을 부숴대는 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는 거구나. 대단해. 정말 용감해. 멋져. 대단해. 용감해.”
커걱대며 갈라지는 목소리일지언정 말을 멈추지 않는다.
썩어들어가는 성대를 억지로 비틀어 목소리를 내는 듯한 느낌이다.
“너 같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저런 엄청난 시련도 이겨내는 거겠지. 성창룡이 부활해대는 그런 말도 안되는 재앙도 이겨내는 거겠지. 정말 대단해. 너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미래가 이어지는 거겠지. 그치. 그렇지. 대단해. 정말 멋져. 용감해. 너같은 용감한 사람이 있어서 정말 놀라워.”
“…”
“그러니까, 죽어야해 넌.”
방금까지 환희에 차서 웃는 것처럼 보이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비죽 내려간 입꼬리가 사람을 소름돋게 만든다.
“죽어야지, 죽자. 너는 없어야 해. 너는 변수야. 살려두면, 벨브로크를 막아서겠지. 저 성창룡이 이 부질없는 세상을 끝내는 걸 막아내려 하겠지. 가만히 있어. 빨리 죽는 게 편할 수도 있어. 아프지 않게, 잠들 듯이… 그렇게 편안한 안식을 줄게. 그렇지 않으면, 더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반항하지마. 내 말을 들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저항하면, 자꾸 시간을 끌면 더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
“목을 비틀어버릴거야. 심장을 쥐어짜고 핏줄을 뽑아낼거야. 내장을 찢어버리고 손톱을 벗겨버릴 거야. 얼굴 가죽을 드러내고 그 생살을 불에 태워버릴 거야. 혓바닥을 자르고, 손가락도 전부 꺾어버리고, 발목을 썰어버릴 거야.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입에는 불덩이를 쑤셔넣을 거야. 피가 강처럼 흐르겠지. 튀어나온 내장이 바닥을 굴러다닐거야. 아프다. 참 아프겠다. 끼학. 까학. 깔깔깔.”
잠시간 소름돕게 웃음을 짓던 실베니아의 얼굴이, 다시금 기괴할정도로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편하게 죽어. 우리 다 같이 편하게 죽자. 허무에 잡아먹히지 말자. 끝 없는 공허에 떨어져서 끝나지도 않는 미래 억겁의 시간동안 방황할 바에, 그런 끝 없는 공포에 먹힐 바에… 여기서 다같이 죽자. 죽음이라는 안식으로 향하자. 내가 도와줄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실베니아 로베스테르.”
내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휘날리던 로브자락을 털어낸 소녀가 기괴하게 목을 비틀며 내쪽을 쳐다보았다.
“넌, 뭘 본 거냐?”
“아무것도, 못 봤어.”
그 순간, 실베니아의 입술에서 피 한줄기가 부욱 흘러나온다.
자세히 보니 자기 입술을 잘근 잘근 씹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봤어. 아무것도 없었다고. 내가 본 건, 그냥 공허 속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끝 없는 어둠 뿐이야.”
“…”
“있잖아. 너는 한밤 중에 멍하니 어두운 산을 올려다 본 적 있어? 아니면 깜깜한 바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적 있어? 끝이 가늠이 되지 않는, 끝 없이 펼쳐진 어둠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던 적은? 그런 적 없어?”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광기에 차 이야기를 걸어오는 실베니아는…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다만, 몸의 마력을 끌어낼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나는 반 이상 바닥 나있는 마력을 다시금 집중해서 끌어모았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질이야. 그 속에서 영원토록 헤엄쳐야 하는 건…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내장을 쏟으면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걸 이해하겠니?”
“…”
“우리는 말야, 더 편하게 죽을 수 있어.”
― 투둑, 쿵, 쿠웅!
다시금 끌어올려진 성위 마력이, 일대를 뒤덮는다. 꽤나 큰 트릭스관의 로비이건만, 꽉 찬 마력의 농도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질 지경이다.
실베니아가 다시금 움직임을 보이려는 순간, 나는 끌어낸 마력을 화살로 변화시켜 서너발을 그녀에게 발사했다.
유효타가 될 거란 생각은 안한다. 단지, 계단 쪽으로 도망치는 동안 잠깐의 방해라도 되길 바랬을 뿐이다.
그러나, 실베니아는 방어자세조차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방어 마법조차 구현하지 않는다.
흩뿌려진 마력의 흐름을 두껍게 두르는 것만으로도, 쏘아진 마력화살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력화되었다.
끌어올린 성위 마력이 나를 향한다. 나를 향해 멀찍이서 손아귀를 펼친 실베니아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이윽고, 나는 그 마법의 정체를 깨닫는다.
고위 성위 마법, ‘즉사’.
사정거리 안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일격사 시키는… 그야말로 불합리의 극치에 달한 마법이다.
그 마법이 통하기 위한 조건은 오로지 하나, 상대가 인간일 것. 그것 뿐이다.
상성도 없다. 방어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사거리 안에서, 시전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어떤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시전 시간이 길고, 막대한 양의 성위 마력이 들어간다는 엄청난 맹점이 있지만… 성위 마법의 선구자인 실베니아에겐 모두 무의미하다.
제 아무리 실베니아라 해도 고위 성위 마법을 시전하는 데에는 다소 힘을 들여야만 하지만, 일격에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한다.
할 일이 많다. 세상에는 저 벨브로크를 막아서려 드는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을 상대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어봐야, 그녀 입장에서는 좋을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항해낸다.
성위 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성위 마력으로 대항하는 것 뿐이다.
성위 마법이 가지는 희귀성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의 가정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성위 마법을 익혔다.
몰려드는 성위 마력에 이를 악물어서, 내 몸의 성위 마력을 이끌어낸다. 말도 안되는 막대한 양을 자랑하는 실베니아의 마력에 비하면 꽤나 미약하지만, 적어도 저항만큼은 할 수 있다.
중위 성위 마법 ‘사망 면역’.
아직 제대로 숙련도가 오르진 않았지만, 그 기본적인 효력만큼은 착실하게 발현한다.
압도적인 실베니아의 마력에 온 몸의 실핏줄이 터져나가고, 코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질 듯이 떨려오지만… 나는 팔을 한 번 확 걷어 올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저항해냈다.
― 카앙!
정신이 어질어질 했지만, 나는 나머지 마력을 끌어내 바람칼날을 구현해낸다.
방금 막 고위 마법을 사용해 빈틈이 생긴 실베니아에게 마력으로 구현된 바람 칼날이 날아든다.
실베니아는 지팡이를 한 번 휙 휘젓는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 칼날을 없애보였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휘둥그렇게 커져있었다.
“안 죽었어?”
실베니아가 잠시 놀라 있는 그 순간, 나는 부서질 듯이 통증이 올라오는 온 몸을 이끈 채 그대로 트릭스관의 2층 계단을 향해 뛰어올라갔다.
“안 죽었어? 어떻게? 어떻게 안 죽었어? 죽어야지. 편하게, 죽을 때… 편하게 죽을 수 있을 때… 죽어야지! 근데 어떻게? 왜? 왜 안 죽어? 왜 안죽는 거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데, 왜 안 죽어? 어떻게 안 죽어? 왜? 왜? 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기괴한 목소리로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이던 실베니아는, 이윽고 고개를 비틀어 꺾고, 계단을 향해 뛰쳐올라가는 나를 쳐다본다.
“괜찮아. 꼭 죽여줄게.”
이윽고 다시 펼쳐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더니…
트릭스관의 절반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저희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다 죽어요! 하늘에, 하늘에 마물족이 너무 많아요!”
“회장님! 저희 이제 어떻게 해야하죠?! 오벨관 쪽으로 도망쳐야할까요?! 매, 맥세스 대교 쪽은 무너졌다는데…!”
“다들 침착하세요!”
폐막 행사가 치러지던 학생 광장 쪽에서는, 잔류한 학생회 세력들이 생존자를 끌고 농성 중이었다.
연단 아래에 내려와, 무너진 무대장치들을 바리케이트 삼아서 임시 주둔지를 꾸린 학생회원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학생회장 타냐 로스테일러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사 본부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죠?”
“예. 아마 학사 본부 쪽도 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해서 연락을 기다리고만 있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임시 주둔지의 북쪽 출입구에서 전투를 막 마치고 돌아온 직스는, 칼의 피를 탁탁 털어내며 타냐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 난리가 일어난 뒤로,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전투를 해온 것이다. 이미 직스는 꽤 지친 상태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듬직함이 남아있었다.
“일단 지형이 너무 안 좋습니다. 탁 트인 곳에서 자리 잡은 채로 사방으로 몰아치는 마물족을 전부 상대하는 것보다는, 건물이라도 하나 잡고 들어가 있는 게 낫습니다. 붕괴의 위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마물족에 둘러싸이는 것보단 낫습니다.”
“일단 지금 주둔지에 있는 학생이랑 외부인을 합치면 200명이 넘어요. 이 인원을 수용할만하면서도 수비하기 용이한 건물이 주변에 있을까요?”
“오벨관은 별로입니다. 글록트관이 적절해 보입니다만… 방금 저 괴물의 일격으로 무너진 듯 하고… 차라리, 수업동 쪽으로 이동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만한 인원을 이끌고 수업동까지 피해 없이 가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피해가 있더라도,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직스는 냉철하게 상황을 잘 분석해서 전달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급박하다. 아무런 피해도 없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버려야만 한다.
학생광장 쪽 주둔지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타냐의 판단에 목숨을 위탁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으나, 타냐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는 것만으로 그 부담감을 어떻게든 흘려넘겼다.
“최대한 인원을 호위하면서 수업동으로 향하면…”
“그래도 최소 반절은 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농성하다 마물족에게 둘러싸이면… 전부 다 죽습니다.”
직스의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히 변함없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투다.
― 카아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벨브로크의 포효가 하늘을 가른다. 그 괴물의 입에서 나온 마력의 빛이 세상을 뒤덮으려 했지만, 루시 메이릴이 이를 악물고 수백개의 마법진을 발현해내 저 바다 멀리로 튕겨내 버린다.
벨브로크의 광선이 꽂힌 바다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어찌나 그 규모가 어마어마 한지, 한창 떨어진 아켄섬에 비가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두두두두둑
쏟아지는 바닷물을 팔을 들어 막은 채, 타냐가 이를 악물고 이야기 했다.
“주둔지에 있는 사람들 싹 다 짐 챙기라고 전해요! 못 따라오는 사람은, 죽을 거라고! 일단 수업동 쪽으로 향할 거에요! 거긴 생활동이랑 거리가 가까우니까 운이 좋으면 클라리스 성녀님이 이끄는 성당 주둔지 쪽 사람들과 합류할 수도 있을 거에요!”
“전투부 교사 쪽에 있는 학생들한테도 전할까요? 다소 시간이 걸리고, 위험을 부담해야합니다만.”
“거기는… 다이크 선배님이 잘 이끌고 있을거에요. 거기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요! 거기는 거기대로 전투부 훈련장에서 잘 농성하고 있을테니까, 일단 우리 먼저 수업동으로 향하는 게 맞아요! 수업동이라고 해서 안전할 거란 보장은 없지만 여기보단 낫겠죠!”
“알았습니다.”
직스가 짧게 대답한 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회장님! 동쪽 출입지에서 새로운 생존자가 합류를…!”
“일일이 만나볼 여유 없어요! 기본적인 사항은 대피하면서 전해주고, 일단은 이 주둔지를 떠날 준비를 먼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직스가 먼저 반응을 했다.
저 멀리서, 한 소녀의 부축을 받은 채 달려오고 있는 소년의 형상은 익숙했다.
“저건… 테일리…? 테일리잖아…? 살아있었구나, 테일리!”
“직..스…!”
수많은 마물족을 뚫어내면서 많이 지친 것일까. 테일리는 자기 몸을 힘겹게 가누면서, 아일라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이 학생 광장 주둔지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긴 여정이었던 것이다.
직스는 얼른 달려나가서,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테일리를 아일라와 함께 받쳐주었다.
“테일리! 무슨 일이야!”
“트릭스관! 트릭스관이 함락 됐습니다, 회장님!”
타냐는 그 말을 듣고 숨을 집어삼켰다.
트릭스관은…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두뇌와도 같은 기관이다. 사실상 이 학사의 모든 비상 대책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한 곳이다.
“함락됐다니, 무슨 소리에요? 마물족한테 뚫렸다는 거에요?”
“대현자 실베니아가… 부활했습니다. 이상한 소리라는 거 압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죠.”
테일리를 받쳐들고 있던 직스 또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변에 모여있던 학생들도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쳐다보았다.
“이상한 말이라는 거 압니다! 그래도, 일단은 상황이 급박하니까 믿어주십시오! 저 괴물이 날뛰고 있는 지금 상황도 정상은 아니잖습니까! 내 말이 진짜니 어쩌니 설득하면서 허비할 시간이 없어요!”
“그럼… 트릭스관은…”
“대현자 실베니아가 전부 박살냈습니다. 마침 트릭스관에 있던 저와 아일라는,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든 도망나왔습니다. 에드 로스테일러…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녀를 막고 있어요…. 콜록.. 콜록..”
부축을 받으며 재채기를 해대는 테일리를 보면서, 학생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일리 맥로어가 드디어 미쳐버린 것인가. 이 급박한 상황에 그만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헛것이라도 보고 만 것인가.
“제발, 믿어주세요. 지금… 저 하늘을 뒤덮는 괴물 뿐만이 아니라, 트릭스관에… 진짜 괴물이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쳐버린 대현자가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단 말이에요! 둘 중 무엇 하나라도 막지 못하면, 다 끝납니다!”
어쨌든 테일리가 물어온 소식은 한 없이 절망적인 것이었다.
헛 것을 봤든, 전설 속의 대현자가 진짜로 부활을 했든…. 중요한 건 트릭스관을 제압해버린 모종의 위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걸 막아서고 있다는 것이다.
“오라버니가, 지금 트릭스관에 있다고요?”
“빨리 돕지 않으면 죽을 겁니다.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이 섬의 전력을 다 끌어모아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상대에요!”
“하지만…”
타냐는 숨을 머금었다.
지금 자기 어깨위에 수백명의 목숨이 걸려있다. 이 시점에서 에드를 돕겠답시고 트릭스관으로 달려가는 건 사실상 수백명의 목숨을 유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학생회장이라는 권위를 달고, 그 중심을 꽉 잡고 이끌어 주던 타냐의 부재는… 이 학생 광장 주둔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더뎌지는 순간 수십명의 목숨이 갈려나간다. 그런 칼 끝을 달리는 위기상황인 것이다.
타냐는 뿌드득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것보다, 우리는 저 성창룡 쪽을 해결해야해, 테일리!”
거기서 목소리를 드높인 것이 아일라였다.
그녀는 에드에게서 거의 대부분의 진실을 전해들은 입장이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뜻이다.
“최대한 전력을 끌어내서, 우리가 저 벨브로크를 정리해야만 해!”
“그, 그게… 가능하겠어…?”
“쟤.. 쟤는 뭐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저 괴물을 우리가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야! 도망칠 방법을 강구해야할 거 아니야!”
아일라의 외침에, 주둔지 학생들이 목소리를 벌벌 떨며 반박해왔다. 그럼에도 아일라는 아랑곳 않고 타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장님. 저희는 벨브로크를 잡으러 갈 거에요. 지금 테일리라면, 어떻게든 벨브로크의 심장 앞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면… 그걸 베어버릴 수 있어요.”
타냐는 마른 침을 삼키며 테일리를 보았다. 이미 몸엔 상처가 가득하고, 많이 지쳐보였다.
제 아무리 검성식을 구사할 줄 아는 전투부의 희망이라 할지라도, 저 상태로 저 괴물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아직 봉인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이건만, 희대의 천재 루시 메이릴조차도 고전하고 있는 상대다.
“저 봉인이 완전히 풀려버리면 이제 진짜 끝장이에요. 차라리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벨브로크의 심장에 접근이라도 가능할지도 몰라요! 도망만 치려들면 사람만 계속 죽어나갈 뿐이에요!”
아일라가 절박하게 외쳐댔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소리로 들릴지, 솔직히 아일라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테일리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타냐의 이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왔다. 저런 무모한 이야기를 절대로 들어주어선 안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하면, 아일라와 테일리까지 챙겨서 수업동으로 도주하는 것이 맞다. 전투 인력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지금 이 순간에, 테일리라는 전투 요원이 합류한 것은 더 없을 호재다.
한 명이라도 많은 호위 인력을 이끈 채로 실날 같은 희망이라도 쥐려하는 것이 분명 맞는 판단일 터인데…
에드 로스테일러의 의도가, 가슴 속을 푹푹 긁으며 찝찝하게 만든다.
자신이 직접 트릭스관에 남으면서까지 테일리를 살려서 학생광장에 보낸 것은, 필시 그 의도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오라버니인 에드 로스테일러는 절대로 아무 의미 없이 사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서 테일리를 살려보낸 것에… 기묘할 정도로 묘한 집착이 느껴진다.
이성과 육감.
무리를 이끌다 보면, 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언제나 이성적인 과정에만 집착해도, 언제나 육감의 울부짖음에만 귀기울여도 안된다.
상황은 급박하다.
망설이는 순간에도 사람은 죽어나간다.
판단이 빗나가도, 사람은 죽어나간다. 목숨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타냐는 눈을 질끈 감고 고민의 시간을 가지다, 이윽고 겨우 목소리를 낸다.
“직스 선배님. 테일리 선배님을 도와드려요.”
“뭐..라고요?”
전투 요원 한 명 한 명이 황금같이 귀한 순간이다. 직스는 사실상 이 주둔지의 최고 전력 중 하나다. 어찌보면 타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판단이다.
“두 분한테 합류해서,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보세요. 저는 여기 남아서 주둔지 사람들 책임지고 있을테니까.”
“회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제가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카 선배님은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살려놓을게요. 우리 로스테일러 가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약속해요.”
직스의 행동 원칙 정도는 타냐도 훤히 꿰고 있다.
직스가 이 주둔지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가 학생회원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결국 그의 연인인 엘카가 이 주둔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라버니 판단에 배팅해볼테니까… 그러니까 좀 어울려 주세요. 직스 선배님.”
타냐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직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다. 직스는 미간을 한 번 좁히더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칼의 피를 털어낸 다음 칼집에 그 칼을 집어 넣었다.
그 뒤 테일리 쪽을 돌아본 채 이야기 한다.
“벨브로크에게 접근하려면, 일단 놈이 몸에 두르고 있는 마력에 최소한의 저항은 할 수 있어야 해. 보면 알겠지만, 놈의 마력 농도는 가까이 갈수록 짙어져서… 심장을 베려고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마력의 여파를 버티기 힘들어질거야.”
차분하게 향후 대책을 이야기하는 직스의 모습에… 아일라는 화색이 되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마력의 여파를 버텨낼 수 있는 수단부터 강구해야해.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저항 시약을 음용하는 거야.”
“연금부 교수님들이라면 그 방법을 알거야…!”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연락이 두절됐어, 아일라. 트릭스관이 점령당해버렸잖아.”
직스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테일리를 다시금 부축했다.
“하지만… 굳이 교수가 아니더라도 시약 연성이 가능한 학생들은 많지. 일단 내가 알기론… 엘비라라면 가능해. 그 외 연금부 수석 학생들도 가능할테고 말야.”
“하지만… 엘비라가 어딨는지 모르잖아…”
“엘비라가 됐든, 아니면 다른 연금부 수석학생들이 됐든… 일단 우등생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할지는 뻔하지.”
직스는 테일리를 부축한 채로, 타냐에게 고개를 돌려서 이야기 했다.
“저는 메이드 장 벨 마이아가 관리하고 있는 오필리스관 쪽으로 향하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굳건했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냐를 보며, 직스는 발걸음을 뻗었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미 사망자의 수는 셀 수조차 없다.
몇 번이고 하늘을 수놓는 벨브로크의 포효소리와, 마력의 여파가 사람들을 더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넣는다.
벨브로크의 마력은 루시 메이릴조차도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막대하다. 보통의 고위 마법사가 한 번만 쏴도 기진맥진해질 규모의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난사해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아켄섬 상공에 당당히 떠있는 루시 메이릴의 옷은 이미 여기저기 헤진 상태였다.
마녀 모자를 꾹 눌러쓰고 거적데기나 다름 없어진 외투를 휘날리며 부유 중인 루시의 앞에는, 쇠사슬에 감겨있는 벨브로크의 모습이 여전하다.
세상을 끝내버리겠다는 듯 공포스럽게 군림하는 재앙이, 세상을 때려부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신조차 잡아먹는 성창룡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그 힘은, 인간이 막아설 수 있는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제 아무리 강한 마법을 때려박아도 벨브로크의 가죽은 뚫릴 생각을 하질 않는다. 루시는 혀를 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칠대로 지친 것이다.
지쳤다, 라는 느낌을 얼마만에 받는 것인가. 그 메뷸러를 잡았을 때조차도 약간의 노곤함과 수면욕을 느꼈을 뿐이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보는 것은 정말 인생에 몇 번 없었던 일이다.
루시는 그럼에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에 와서까지도, 그 멍하고 맥빠지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 카아아앙!
코앞에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직감하게 만드는 성창룡이 포효하고 있다.
“많이 화났나 보네.”
팔을 휙 들어올리며, 벨브로크의 다음 일격을 막아낼 준비를 한다. 부릅 뜬 눈에 휘감기는 마력의 빛이 마치 은하수의 별빛처럼 뿜어져 나온다.
“오든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존재로 인해 비틀릴만큼 비틀려버린 정사는,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변수’를 하나 꼽아보자면… 결국 한 사람의 존재로 귀결된다.
루시 메이릴.
단신으로 대재앙을 막아선 소녀는, 포효를 내지르는 성창룡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폭풍같은 마력의 여파에,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만 귓가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