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38)
벨브로크 토벌전 (6)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탁탁 털어낸 채 트릭스관의 3층 복도를 따라 달려나갔다.
이미 다 깨져버린 유리창에서는 외풍이 휙휙 들어오고 있었고, 반쯤 날아가버린 복도 천장으로는 별과 마법진들이 잔뜩 보이고 있었다.
벨브로크와 루시가 벌여대고 있는 전투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일단 최대한 지형지물과 장애물이 많은 곳으로 파고들어서 실베니아가 내 위치를 포착하기 힘들게 만들어야만 했다.
– 후우우욱
그러나, 실베니아쯤 되는 인물이 이런 내 의도를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다.
마력을 끌어모으는 느낌이 아래층에서부터 퍼져나오자, 나는 이를 악물고 충격에 대비했다.
– 콰아아아아아앙!
고위 전격 마법, 천벌.
순식간에 때려박힌 벼락이 그나마 남아있는 트릭스관의 잔해를 무너뜨려버린다.
이제는 멀쩡한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질 않은 트릭스관이 한차례 더 무너진다.
부서진 건물이라기 보다는, 이쯤되면 그냥 건물의 잔해만 남은 수준이다.
간헐적으로 세워진 외벽의 잔해 사이를 뛰어다니며, 나는 어떻게든 마법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 화아악!
고위 공간계 마법 ‘공간도약’.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양의 마력이 들어가는 고위 공간계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며, 실베니아가 내 코앞에 착지했다.
“카학, 아하학.”
가래가 끓는 듯한 기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실베니아는 내 코 앞에 지팡이를 들이밀었다.
“한 번은 막았을지 모르겠는데, 척 보니 두 번은 힘들어 보이네.”
여기서 한 번이라도 더 ‘즉사’가 꽂히면, 내 성위 마력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얼른 몸을 휘어꺾으며 실베니아의 지팡이를 돌려차서 쳐냈다.
그러나, 실베니아는 아랑곳않고 마력을 끌어모아, 내 어깨에 마력탄 두발을 꽂아넣었다.
내가 이를 악물고 어깨를 감싸쥐며 복도 구석으로 나가 떨어지자, 다시금 성위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일반 마력은 대처 가능하다. 그러나 성위 마력은 대처할 수 없다.
성위 마법이 가지는 가장 큰 특성. 상성을 전혀 타지 않고, 절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
같은 성위 마력을 통해 방어해낸다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방어할 수 없는 마법들이다.
“후욱…”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뭐라도 계속 공격을 가해서, 실베니아가 성위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게 만들어야만한다.
나는 마력을 끌어내서 순식간에 머그를 소환해냈다.
피어오른 불이 박쥐의 형상으로 변하며, 그 거대한 날개를 펼쳐보인다. 카아악 거리며 소리를 지른 머그가, 실베니아를 바라보고는 불의 마법을 이끌어냈다.
기초 원소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양의 불이 주변에 피어오른다. 그 불꽃의 행진이 향하는 방향은 성위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는 실베니아다.
실베니아는 잠시간 미간을 좁히다가, 이윽고 소름끼치는 미소를 흘린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휘둘러서 마력을 두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불꽃을 흩어내버렸다.
이어지는 성위 마법이 향하는 곳은, 머그 쪽이었다.
– 카앙!
일순간에 때려박힌 성위 마법, ‘시간감옥’.
공중에 날개를 펼친 채 가만히 떠있는 머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감옥에 당하면, 시전자의 마력이 바닥나거나 해지하기 전까지는 당한 자의 시간 자체가 멈춰버린다. 마치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굳어버린 채로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실베니아의 마력이 바닥나는 일은 없을테니, 한 번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끝이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실베니아가 한 번 모은 성위 마력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머그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더 큰 마력을 끌어낼 틈을 벌 수는 있었다. 이윽고 발현된 마력으로, 거대한 바람늑대… 메릴다가 다시금 발을 딛고 세상에 나선다.
– 화아아아악!
– 카아아아아아앙!
뻗어나온 마력의 흐름이 트릭스관의 상공을 뒤덮는다.
포효소리와 함께 건물들의 잔해를 짓밟고 바로선 메릴다가,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마법사를 내려다본다.
[ 실베니아… ]한 때, 오른산 끝자락에 나란히 앉아 아켄섬을 내려다보던 친우가… 그 거대한 바람의 늑대를 올려다 본다.
제 상반신보다도 커다란 지팡이를 비스듬히 들고, 화려한 문양이 잔뜩 수놓인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멍하니 메릴다를 올려다보던 실베니아는 읊조린다.
“어머나….”
그 눈동자에 생기라는 것은 없다.
“늑대, 커다랗네.”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할 여유는 없다.
실베니아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메릴다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대의 공기가 메릴다로부터 구현된 마력으로 인해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메릴다의 마력이 실베니아를 덮치려는 순간… ──이미, 메릴다의 몸에는 거대한 얼음창이 관통되어 있었다.
[ … ]메릴다의 쭉 째진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마력의 흐름을 눈치조차 못챈 것이다.
얼음 창은 중위 마법이다.
그러나, 이걸 중위 마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얼음창이 땅에서부터 솟아올라 메릴다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뚝뚝 흐르는 피 때문에, 창의 표면이 붉게 물들어 있다.
[ 너…어… ]“불쌍하네, 정령은… 죽지도 못하고. 인간이었으면 이 일격으로 편안하게 죽었을텐데.”
고위 정령이 가지는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일대에선 이름난 정령사의 반열에 들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고위 정령조차, 실베니아는 단 일격에 정리해버린다.
그러나, 마력을 소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슨 내가 행동할 수 있는 틈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 콰앙!
‘일점폭발’을 발현해서 바닥을 부숴버린 나는, 얼른 지상으로 휙 뛰어내려갔다.
실베니아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뚫어놓은 구멍 쪽을 보고는 가벼운 몸짓으로 휙 뛰어내렸다.
실베니아가 바닥에 지하는 순간, 시야의 사각지대에 숨어있던 나는 역수로 쥔 단검을 꺼내들어 그녀의 등을 찌르려 든다.
철저히 시야 밖에서의 기습이었지만, 그녀는 등 뒤에 눈이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방어 마법을 발현해 단검을 튕겨냈다.
– 카앙!
방어 마법의 충격에 의해 내 손이 튕겨나가자, 그 틈을 타 뒤로 휙 몸을 돌린 실베니아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피어오르는 마력이 몸을 휘감더니, 엄청난 힘으로 날 밀치자 그 여파에 이끌려 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실베니아는 그대로 무릎으로 내 복부를 찍고, 멱살을 틀어쥐면서 충혈된 눈을 코 앞까지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상처 가득한 몸에선 피가 더 흘러나왔다.
“근접전은 이길 줄 알았어? 내가 마법사라서? 아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 대단해. 이런 상황에서까지 다른 방향으로 전투를 끌어가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거구나. 무서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어떻게든 이기는 수를 생각하고 있었어. 놀라워, 정말 대단해. 죽이기 아까워. 이딴 세상이 아니었으면, 이런 어둠뿐인 미래가 아니었으면… 넌 대단한 사람이 됐을텐데.”
“…”
“우흑… 으윽… 흐으윽… 슬퍼… 너무 슬퍼… 너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 너같이 놀랍고 대단한 사람이 세상엔 참 많을텐데.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그 끝없는 어둠에서 발버둥쳐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슬퍼…”
빙긋빙긋 웃다가, 이윽고 줄줄 눈물을 흘리다가… 그야말로 미치광이처럼 이리저리 변화하는 감정 속에서 실베니아가 내 눈을 맞춘 채 이야기 한다.
방금까지 흘리던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그러니까, 내가 죽여줄게.”
“사양한다.”
– 콰앙!!
내 품속에서부터 발현된 거대한 충격이 일대를 뒤덮었다.
‘충격 강화 파동구’. 끝까지 아껴두었던 마공학용품 중 하나다. 품 속에 있던 그 수정구슬이 깨지고 갑자기 발현된 충격에, 실베니아는 펄럭대는 옷깃으로 눈을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몸에 덕지덕지 바른 방어 마법 때문에 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야를 가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대로 나는 바닥에 흩어진 흙먼지들을 주먹으로 끌어모아서, 실베니아의 눈에 냅다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싼 실베니아는 뒷걸음질을 몇 번 쳤다. 품위 있는 마법사로 평생을 살아왔던 실베니아는, 이런 길바닥 전투에는 익숙치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대로 나는 단검을 꺼내들어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대로 정령식을 발현하려 했으나, 단검에 새겨진 정령식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후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냥 그대로 단검을 가져다 꽂았다.
머그가 시간 감옥에 당해버려서, 머그와 연결된 정령식까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급하면 급한대로, 이 아주 약간의 틈을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실베니아는 시야를 잃은 와중에도 움직임의 흐름을 마력으로 느낀 채 휙 몸을 꺾어 피했다. 이쯤 됐으면 일격 정도는 당해줘도 되지 않나 싶을 지경인데, 놀라울 정도로 직감이 발달해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회피하느라 몸을 크게 비틀어꺾은 탓에.. 실베니아는 그 관성으로 인해 뒷걸음질 치다가 부러진 기둥쪽에 등을 부딪혔다.
– 쾅!
그대로 등을 기둥에 기댄 채… 숨을 한 번 몰아쉰 실베니아는, 한층 더 붉게 실핏줄이 올라온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예식용 단검이구나. 그러고보면 너는…”
눈을 부라리고선 나를 바라보는 실베니아는, 이윽고 입술 끝을 떨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래, 넌 에드 로스테일러야.”
“…그야 알고 있겠지. 넌 여러 갈래로 뻗어져나가는 미래를 모두 관측한 인간이니까.”
“그래… 그래… 기억이… 나려고하네… 분명 내 기억 속… 에드 로스테일러…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은…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기괴하게 비틀어지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이야기를 하던 실베니아가, 이윽고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름이 돋는 미소를 한 번 더 흘렸다.
“아, 하하…. 하하하….”
다시 한 번 잘근 잘근 씹어대던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입술 끝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선혈이, 소름끼치도록 망가져 있는 그녀의 정신상태를 대변해준다.
“알겠다… 이제 대충 알겠네… 너는… 그 먼 옛날, 내가 저지른 과오의 부산물이야.”
“뭐?”
“이 부질없는 세상에 저항해볼 수 있을거라 생각해보던 시절. 삶이라는 걸 찬미하다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거라고 확신하던, 그 옛날의 멍청한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던 내가 끌어들인… 무고한 희생자구나…”
천천히 기둥에서부터 등을 떼고, 몸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드는 실베니아.
한층 더 짙어지는 마력의 양은 방금 전보다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끌려와서, 치고 박고, 싸우고, 부질 없는 삶을 이어나가보려고 발버둥치던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지.. 미안해…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
또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대는 실베니아. 그 감정의 흐름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죽여줄게. 편히 쉬어. 부질 없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하지 않아도 돼.”
그 순간, 팽창하듯 퍼져나가는 마력이 형태만 남은 트릭스관의 로비를 꽉 채웠다. 그 여파만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 쿠궁! 쿵!
나는 떨어지는 건물 잔해를 얼른 몸을 날려서 피했다. 그리고 전투 태세를 취하려는 순간, 왼쪽 어깨에 얼음창 두발이 날아와 박혔다.
커헉, 소리를 채 내뱉기도 전에 왼쪽허리 언저리에 마력탄이 한 발 더 꽂혔다. 나는 그대로 크게 몇 번 굴러서, 잔해의 외벽에 내다 꽂혔다.
그대로 외벽에 등을 맞댄 채로 나자빠져 있자, 이윽고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고개를 흔들어서 시야를 되찾고보니, 코앞에서 실베니아가 날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성위 마력은 상당히 많은 양이 축적되어 있었다. 처음 맞딱트렸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위 마력을 모으고 있는 느낌이다.
무언가 감정에 큰 변동이 생긴 모양인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막대한 양의 성위 마력을 끌어모았다.
한 번 더 ‘즉사’를 발현할 생각이다. 애석하게도 내게는 저항할 수 있을만한 양의 성위 마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일단 발현되면, 확실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 사실은 실베니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고통스러웠지. 너무 고통스러웠지. 힘들었지. 괜찮아. 정말 이제 괜찮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정말… 고생 많았어..”
어떻게든 힘을 끌어내서 회피해보려 했지만,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뻗어나가는 성위 마력이, 일순간 실베니아의 손에 집결되더니─
실베니아가 손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고위 성위 마법 ‘즉사’는 발현되어… 내게 직격했다.
*- 콰악!
– 화아아악!
온몸에서 피를 쏟은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며… 이윽고 숨을 거둔다.
외벽에 기대어, 잠들 듯이 고개를 숙인 에드 로스테일러를 보면서… 실베니아는 잠시간 숨을 머금었다.
그가 소환했던 불 박쥐와, 얼음창에 꿰어 있던 바람 늑대 또한 조용히 소환히 해제되어… 유체 상태로 돌아간다.
그렇게, 또 한 명이 영원한 안식 속으로 떠났다.
– 휘이이이잉.
– 카아아아아아아앙!
세상을 끝낼 듯이 포효를 질러대는 벨브로크.
그리고, 그 벨브로크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는 절체불명의 소녀 마법사.
실베니아는 고개를 휙 꺾은 채 그 광경을 본다.
어떻게든 에드 로스테일러를 정리했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저 벨브로크를 막아서려 들 ‘변수’들이 너무나도 많다.
정리해야할 자들이 너무도 많아,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이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코앞에는 피칠갑이 되어버린 채 쓰러져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시체가 누워있다. 눈은 잠든듯이 편안하게 감겨 있지만,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와 여러 핏자국들을 보면 생전의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미안해.”
실베니아는 그렇게 읊조렸다.
“고통밖에 남아 있지 않는 삶이라면…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는 게, 차라리 나아.”
실베니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잠시 에드 로스테일러를 향해 묵념했다. 몸에 두르고 있던 모든 마력이 사라지자, 이윽고 실베니아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흘러나왔다.
떠오르는 것은, 첫 제자 글록트를 만났을 때다.
그 어린 제자가, 지금 실베니아의 고민을 그대로 물었던 것이다.
수백년 전, 그 어리숙한 제자의 질문 하나를 이제와서 되새김질 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라고 해야할까. 세상 일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어린 소년이, 공허한 눈으로 실베니아를 보며 묻던 질문.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칠 뿐인 삶일지언정, 계속 살아나가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실베니아 본인은… 무슨 대답을 했었을까. 이제는 기억 속 저 너머에 묻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흑백 사진처럼 흐릿해져가는 기억 속의 실베니아 자신은…
왜 인지 모르겠으나, 활짝 웃으며 대답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나서…
실베니아는, 허무에 파묻힌 기분으로, 조용히 눈을 떴다.
“일단 살아보고 말을 해, 이 새끼야.”
──그 순간 피칠갑이 된 에드 로스테일러가 달려들어, 실베니아의 어깨에 역수로 쥔 단검을 박아 넣고 있었다.
– 파악!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마력의 흐름을 전부 흐트러트린 상태였다.
허나, 눈을 뜬 순간 시야에 가득히 보이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많은 양의 피를 뒤집어 쓴 에드의 얼굴이었다.
“커, 허억… 흐윽…!”
제 아무리 막대한 양의 마력을 잔뜩 두르고 있어도, 실베니아의 체구는 왜소하다.
날카로운 단검에 일격을 허용하는 순간, 치명상으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어깨 언저리에 박힌 단검은 급소를 찌르진 못했다. 에드는 에드대로 몸이 한계에 달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급소를 노릴 수 있을만큼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 타앙! 쨍그랑!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주먹 절반만한 크기의 모래시계 였다.
실베니아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겨우 읊조렸다.
“델… 헤임…”
주박신 델 헤임의 기운을 끌어모아, 딱 한 번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마공학용품.
그 먼 옛날, 아직 학교다운 기색을 갖추지도 못한 실베니아 학당을 다니던 세 명의 제자. 테슬린 맥로어, 글록트 엘더베인, 필로나 블룸리버.
그 중, 연금술에 두각을 나타내던 제자 필로나가 유독 신을 내며 연구하던… 그 마공학용품의 기록을, 실베니아는 알고 있다.
현실성 없는 연구 기록이란 생각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긴 세월 그녀의 제자 필로나가 남긴 기록이 이어져 내려오며… 결국 근래의 마공학은 그 청사진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너무나도 방법이 난해하고, 재료가 희귀해서 큰 의미는 없었다고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필로나의 기록은 나름의 의미를 남기고 있었다.
“크.. 허억…”
언제나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연구 일지들을 쌓아나가던 제자… 필로나 블룸리버.
그녀의 청사진에 그려져 있던, 모래시계 모양의 마공학용품을… 실베니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어…”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실베니아는, 이 세계에서 일구어질 모든 미래의 흐름을 전부 읽어낸 대현자다.
그러나, 필로나의 발명품인 ‘델 헤임 모래시계’가 완성품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관측한 적이 없다.
– 파앙!
일단 빠르게 마력을 발해 에드의 몸을 튕겨낸 실베니아는, 자기 어깨에 박힌 단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솟아오르는 격통을 참으며, 이를 악문 채… 어떻게든 단검을 뽑아낸다.
“크…으으..으으으으.. 꺄아아아악!!”
단검을 뽑아냈지만,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른다.
실베니아는 반대쪽 손에 성위 마력을 발현해내서, 어떻게든 이를 악문 채 어깨의 상처를 과거의 상태로 돌려낸다.
“크, 아아아! 하아, 하아…”
상처는 사라졌지만, 그 격통의 여파가 남아있다. 몸의 시간을 일부 되돌렸다고 해서, 그 고통의 기억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마치 환상통처럼 그 감각이 남아, 실베니아는 계속해서 식은 땀을 흘렸다.
그 틈에, 에드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장의 수를 숨겨놓고… 전력을 다하는 모습으로 방심을 이끌어내는 그의 침착함.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그러나, 방금 내지른 일격이 모든 것을 건 비장의 수였을 것이다. 확실하게 실베니아의 허를 찔렀으나, 그 일격으로 끝내지 못했다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발버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상반신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킨다.
이젠 실베니아보다는 오히려 에드 로스테일러 쪽이 훨씬 더 좀비 같은 몰골이었으나… 그의 눈은, 생존에 대한 의지로 여전히 불타고 있다.
살아남겠다는 일념. 오로지 그것 하나.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 속에서도, 마법이 오가는 이 아카데미 안에서도. 그가 끝까지 두다리를 땅에 붙이고 서있을 수 있게 만든 것은, 오로지 그 일념 뿐.
“난, 니 같은 놈들이 제일 싫어.”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에드가 말한다.
“넌 니가 관측한 미래가 전부라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나도 그랬어.”
그는 에 존재하는 모든 시나리오를 전부 꿰고 있던 자다.
그러나, 무엇하나 정사대로 흘러간 것이 없다.
제 생각대로 흘러갈거라 여겼던 이 세계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모두 기대를 배신한 채 제멋대로 흘러갔다.
이 빌어처먹을 세상은, 온갖 이변과 변수로 가득해, 전부 가늠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자기 멋대로 뻗어나간다.
삶이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잃은 게 많았고.
그렇기에 얻은 게 있었다.
죽음이란 언제나 목전에 다가와 있는 것.
그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총알이 날아다니며 사람의 살점을 파헤치는 그 지옥도에서… 죽은 눈으로 탁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기도 있었다.
그 악몽이 사라지지 않아, 방구석에 처박혀, 그냥 숨이 붙어있기에 살았던 시절도 길었다.
잃을 것이 두려워 손에 무언가를 쥐려하지 않았고, 그렇게 쭉 무채색으로 물들여진 세상을 마지못해 살아나가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졸업장 하나만 목표로, 누구와도 엮이는 일 없이, 가만히 숨을 쉬며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그냥 임시 거주지에 불과했던 캠프는 어느새 정이 붙어버려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나.
착해 빠진 정령사 소녀 하나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아서 자기 몸 사리며 살게 되질 않나.
상처 많은 상인 하나 책임져보겠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사기극을 벌이고.
자신보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마법사 하나 위로해보겠다고 어깨를 안아주며 오지랖이나 부리고.
밤하늘을 보며 괜한 감상에 빠지고.
사냥터를 노니며 바쁘게 뛰어다니고.
성장해나가는 실력에 묘한 자신감이 솟고.
커져가는 오두막 캠프를 보면서 괜시리 콧노래를 부르고.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쓸 데 없는 뿌듯함 따위를 느끼면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쭉쭉 뻗어져 나가는 삶에 진저리치다보니.
그냥,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게 당연해져 있는 것.
그것이 이 아켄섬에서 살아간, 에드 로스테일러의 삶이었다.
“그딴 건방진 소리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는, 살아서 움직이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한 걸음 걷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할 정도로 한계에 몰려있을지언정, 그는 확실하게 숨을 내쉬며 지금을 살아오고 있다.
“다 살아본 새끼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지.”
모든 일이 잘 풀리리란 무책임한 소리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불행도 언젠간 다 해소되어, 과거의 아픔으로 바뀌리라는… 그런 희망에 가득찬 소리도 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은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끝나리란 비현실적인 위로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에드 로스테일러는… 긁어보지도 않은 복권을 잔뜩 쌓아놓고선 돈이 없다고 칭얼대는 자들을 끔찍하게 혐오한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할지라도.
적어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인생을 살았다.
“네가… 네가, 뭔데…”
뿌드득, 하고 이를 간 실베니아가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직 고통의 여파가 남아 정신을 괴롭히고 있지만, 두다리를 붙들고 서있는 에드를 당장 끝내는 게 먼저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차피,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더 저항할 수단은 남아있지 않다.
델 헤임 모래시계로 목숨을 한 번 건졌을 뿐, 그 모든 걸 걸었던 마지막 회심의 일격도 실베니아의 목숨을 끊어내지는 못했다.
이젠 정말, 마지막 일격을 맞고 죽을 일만 기다리고 있는… 살아 있는 시체에 불과하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실베니아는 끌어올린 마력을 손에 휘감았다. 피어오른 수십개의 얼음창. 단 일격만 허용해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대로 절명할 것이다.
그렇게, 에드의 목숨을 거두기 위한 수십개의 얼음창이 날아들었으나…
– 카앙! 화아아아악!
– 화르륵!
피어오른 것은, 일대를 뒤덮은 거대한 불길이었다.
정령식 – 화화(火花)
피어오르는 불의 꽃이 트릭스관의 로비를 가득 매우며, 순식간에 얼음창을 전부 용해시켜 버린다.
그 정령식의 정체를 에드 로스테일러는 잘 알고 있다.
고위 불 정령 타칸의 힘을 끌어내,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의 망토에 코스모스 자수로 새겨둔… 고위 정령식이다.
그 정체를 가늠한 순간, 이미 에드의 코 앞에 숄을 휘날리며 소녀 하나가 착지하고 있었다.
중위 바람 정령을 통해 날아온 예니카 페일로버의 연분홍빛 머리칼이 불꽃 속에서 한 차례 휘날린다.
이윽고 팔을 아래로 크게 휘젓는 것으로, 트릭스관 상공을 수많은 정령들이 뒤덮는다.
쏟아지는 마탄의 행렬. 대현자 실베니아는 얼른 방어마법을 발현해내 어렵지 않게 전부 막아내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 틈을 타, 얼른 에드 로스테일러 쪽으로 휙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듯 안아든다.
몸에 힘이 거의 빠진 만신창이 상태의 에드를 품속에 꽉 안은 채로, 가슴이 아픈 듯 눈을 질끈 감는다. 잠시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다가, 이윽고 중위 바람 정령 칼락스를 불러낸다.
거대한 시조새 모양의 바람 정령이 두 사람을 얼른 태우는 것을 보며 실베니아는 눈치 챈다. 저 소녀는 만신창이 상태의 에드 로스테일러를 데리고 얼른 퇴각하려는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예니카 페일로버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대현자 실베니아는 일대일로 승부해서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디를…!”
그러나, 거대한 불 도마뱀 타칸의 마력이 한 차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어차피 공격이 통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다.
실베니아를 이기는 건 불가능할지 몰라도, 전략적 후퇴라면 가능하다. 예니카 페일로버의 정령 군세는 그 물량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막대하다.
이윽고 마력으로 연기를 걷어냈을 땐, 칼락스의 등에 탄 예니카 페일로버가 에드를 회수해서 저 멀리 도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켄섬의 상공. 퍼덕대는 옷깃 속에서 에드의 머리를 꽉 끌어안은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 멀리서도 실베니아를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여실히 느낀 실베니아는… 지팡이를 비스듬히 든 채로, 잠시간 가만히 서있었다.
그 많던 정령들의 군세들도, 예니카가 퇴각을 완료하자 전부 사라져 버렸다.
잔해만 남은 트릭스관에는 이윽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
홀로남은 실베니아는 잠시간 고개를 숙였다.
예니카 페일로버에 대해서라면 실베니아도 몇 번인가 관측한 적은 있다. 그러나, 실베니아가 관측한 것과는 그 모습이나 행동 방식이 조금 다르단 느낌이 들고 만다.
그것은 착각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적인 행동의 결과인가.
긴 세월 시간의 감옥 속에 갇혀있느라 조금씩 침전되어가던 정신이, 이윽고 더 큰 고통에 휩싸인다.
“우윽, 큭… 후윽… 후으.. 후우…”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제 어깨를 감싸안던 실베니아가, 이윽고 숨을 몰아쉰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찔린 단검의 고통이 아직도 어깨에 가득 남아있는 듯 하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그 뼈를 깎던 고통이 잦아든다.
“그래… 아직… 제거해야할 변수는… 많이 남았어… 아직은… 할 일이 많아…”
다시금 밀려 올라오는 광기의 여파가, 여전히 그녀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