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
글라스칸 토벌전 (4)
– ‘언젠가, 꼭 예니카를 구해 달래.’
문득 생각나는 것은 숲속을 지키던 고위 바람 정령의 전언이다.
느닷없이 그런 말을 전달 받으면 여러 가지 반문을 던지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네가 예니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냐. 나처럼 이야기 흐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또, 구해달라는 건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미래 흐름이고 밑천이고 나발이고 간에 다 집어 던져 희생한 채, 그냥 학생회관으로 뛰어 들어가서 벨로스페르를 잡아족치라는 거냐. 일단 그게 가능하긴 할 거 같냐.
아니면 예니카의 행보가 정해진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미연에 그 녀석의 모든 생각을 다 읽어서,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변수를 다 통제해 예니카가 행복한 삶만을 살아갈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라는 거냐. 무리한 요구에도 정도가 있다.
메릴다도 바보가 아니다.
당장에 말이 통하는 루시 메이릴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내게 그런 전언을 전달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숲에서 살아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을 그 녀석이니만큼, 나름의 판단 끝에 건넨 말이겠지.
아쉽게도 그 의도를 지금 당장 유추해보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큰 의미도 없다.
해결해야할 일이 산재해있다. 곁가지에 신경 쓸 정신머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
세상사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구태여 불가능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다가 머리가 깨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을 수도 없이 클리어 해보고, 여러 등장인물들이나 적들의 능력치들을 가늠해보고, 이런 저런 방식의 컨셉 플레이도 해봤던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지금 타칸을 이기려 드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짓이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 1막 최종장, 3번째 네임드 보스. 고위 불 정령 타칸.
그 자체로도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고위 정령이지만, 벨로스페르의 광폭화 버프가 발려있는데다가, 상성 자체도 마법을 상대로 한 없이 우위에 있다.
온몸을 두른 그 단단한 껍질은 표면에 닿는 거의 모든 마력기반 공격의 위력을 무효화시켜 버린다. 그렇다고 칼이 제대로 박히냐 하면 그렇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불합리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뭐든 간에 플레이 좀 해본 사람들은 이 시점에서 직감적으로 눈치를 챈다. 저건 단순히 스펙이나 전략으로 뚫어내라고 만들어놓은 보스가 아니다.
결국 타칸의 본질은 이벤트 보스다. 직전에 테일리가 습득한 ‘원소베기’의 사용을 유도하는 흐름으로 상황을 이끌어가기 위해 설계된, 시나리오상의 필요에 의해 구현된 존재인 것이다.
그놈의 게임이라는 것들은 하여튼 새로운 기술이나 기능, 요소 따위가 추가되면 반드시 시나리오상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이끌어간다. 뭐, 기능을 추가해놓고 그걸 소개시켜주지 않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다만, 결과적으로, 열쇠 없이 잠긴 문을 열어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당연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뭡니까?”
“별 건 아니야. 사실 꼭 필요한 건 아닌데, 있으면 좋은 거.”
“그.. 렇습니까?”
열람실에서 챙겨서 나온 가죽 주머니를 보고 직스가 물었지만, 딱히 대답해줄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그냥 품속에 집어넣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 방법론 또한 정상적인 영역에서 찾으려 들어선 안 된다. 잠긴 문을 열 수 없다면 뒷문으로라도 들어가야한다.
원만하게 흐름대로 따라가던 시나리오에 비틀림이 생긴 상황 아닌가. 정해진 흐름을 안정적으로 따라가다가 나한테 유리한 부분만 쏙쏙 빼먹는 그런 스탠스는 잠시 접어둬야만 한다.
지금은 정사에서 삐져나와버린 시나리오 흐름 자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만 하는 상황이니, 여기서부터는 철저히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영역인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면 좀 더 단순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에 존재하는 온갖 육성 요소만큼은 줄줄 꾀고 있으니, 시간은 가면 갈수록 내 편이니까.
그러나 당면한 상황이 이렇다면, 이젠 가지고 있는 밑천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 방법론은 결국 나만이 향유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특권, ‘정보우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참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긴 했다.
어처구니없긴 해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죗값은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됐어요. 직스가 있었어도 분명 패퇴했을 거에요.”
토벌대와 맞닥트린 시점은 예상보다 일렀다.
엘카를 업고 학생회관을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앞에 있는 학생 광장 주둔지에 엘카를 내려놓고 가야만 했다. 한 시가 바쁜 상황인지라 급한 마음에 달려왔지만, 의외로 토벌대 멤버들은 전부 학생 광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운 좋게 퇴각하는 건 성공했지만….”
페니아 황녀는 드넓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글라스칸 소환진의 색조는 이미 완전히 검붉게 물들어서, 당장에 그 소환식이 완성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수동을 뒤덮고 있는 결계식도 멀쩡해서, 외부에서의 원조를 기대하는 건 힘들 듯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재진입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네요.”
시간은 아군이 아니다. 하늘에 펼쳐진 저 소환식을 보고도 더 이상 외부의 원조를 기다리자는 의견을 내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시 바쁜 상황인데, 심지어 한 번 패퇴해서 퇴각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까지 진행 됐고, 어디에서 막혔으며,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학생 광장 주둔지에 모여든 멤버들은 정말 하나 같이 눈이 부시다.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온갖 역할을 수행하는 메인 등장인물들이 종합 선물세트로 모여 있다.
낙제검성 테일리, 동반자 아일라, 자애의 황녀 페니아, 황금의 딸 로르텔, 초목의 창 직스, 호위대장 클레르, 음침한 클레비어스, 참견쟁이 엘비라…
하나 같이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있으며, 호위대장 클레르에 이르러서는 아예 한쪽 다리가 통째로 불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저 정도면 중상이다. 전력으로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클레비어스는 한 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골절상이다. 이 쪽도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크게 깎여나가고 말았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테일리의 상태는 괜찮은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시나리오의 진행 상태에 대한 판단으로 사고의 단계를 넘겼다.
그 때, 클레르가 몸을 겨우 가누며 의견을 냈다.
“재진입 하실 계획이라면, 일반 학생들 중 자원하는 자들을 모아서 재진입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다리에 통증이 가시면 얼른…”
“됐어요, 클레르. 당신은 주둔지에서 쉬세요.”
그 말에 클레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페니아 황녀님. 저를 정말로 배려하신다면, 명령을 거두어주십시오.”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요, 클레르. 저도… 마음이란 게 있어요.”
그 어투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호위대장 클레르 같은 실력자가 저런 중상을 입은 이유는 필시 페니아 황녀를 감쌌기 때문이다. 다부지게 입술을 다물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페니아 황녀의 마음속은 이미 만신창이일 것이다.
그래도 약한 테를 내비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페니아답다. 그러나, 마음이 다부지다고 해서 당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위기를 해결하는 건 다부진 마음이 아니라 실질적인 능력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 전경을 쳐다봤다.
학생 광장을 중심으로 네리스관, 오벨관, 학생회관이 있다.
세 개의 건물, 그 중에서 글록트관은 완전히 반파되어 있다. 2페이즈에 진입해 글록트관 메인 홀에서 중위 정령을 잡은 흔적이다. 그리고 네일관 입구를 막은 정령수 알타르까지 잡아낸 모양인지, 네일관의 입구는 확실하게 열려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2페이즈까지는 어떻게 돌파했지만, 토벌대는 3페이즈의 타칸에게 한 번 패퇴했다.
다행스럽게도 퇴각은 성공한 모양이지만, 그 과정에서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고, 호위대장 클레르라는 중요 전력을 잃었다. 1학년 전투부 수석인 클레비어스도 전력으로서는 절반 이상의 능력을 잃었다고 봐야한다.
시간은 없고, 전력은 깎여나갔다. 외부에서의 원조를 기대하기엔 금방이라도 소환진이 완성될 것만 같다. 가만히 있을 순 없지만, 당장에 재진입 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도 없다.
페니아 황녀가 이를 꽉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됐든 지금은 이 주둔지를 지휘하는 입장이다. 무언가 대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토벌대를 둘로 나눕시다.”
거기서, 순식간에 상황파악을 끝낸 내가 일단 말을 던졌다.
느닷없이 등장한 외부인의 개입. 1학년 에이스 멤버들도 모두 다쳐서 돌아오는 바람에 암울해진 주둔지의 분위기가, 거기서 한 차례 더 가라앉았다.
“소환식 상태 보니까 저거 완성되는 거 진짜 조만간 입니다. 타칸을 잡고 갈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뭐야, 에드 로스테일러?”
대답은 음침한 클레비어스에게 돌아왔다. 골절상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봐, 지금 상황이 장난같…”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지. 클레비어스.”
클레비어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저지한 것은 ‘초목의 창 직스’였다.
그 사실에 일동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둔지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에드 로스테일러를 잡아먹을 듯이 말하던 직스의 태도가 일변한 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모양새였다.
학생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론 지금은 그런 아무래도 좋은 곁가지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위 불 정령 타칸은 시각보다는 청각, 촉각에 의존해 주변 지형과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때문에 요란하게 떠들어대면 충분히 유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팀이 타칸을 끌어낸 사이에, 다른 한 팀이 전투 실습장에 진입하는 게 낫습니다.”
“에드 선배님. 그건 타칸을 실제로 상대해보지 않았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이번엔 로르텔이 반론을 냈다. 합동 전투 실습에서 타칸과 아예 일대일로 붙어 본 전적이 있는 소녀였다.
“합동 전투 실습 때 봤던 그 상태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알아. 벨로스페르가 광폭화 마법을 걸어놨겠지. 그건 나도 하위정령들 제압하면서 충분히 확인했다.”
“시선을 끈다, 시간을 번다. 그런 개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에요. 일격에 나가떨어지거나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저희가 퇴각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죠.”
차분하게 현실을 설명하는 로르텔의 말에 나는 확인차 반문했다.
“녀석이 기둥에 깔린 틈에 탈출했나?”
“…”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런 의미가 담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지금은 그런 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시나리오에 개입해야만 하는 상황 자체도 영 편하진 않다. ‘정사’에서 엇나가버린 이변만 없었다면, 이렇게 중요인물들이 가득한 주둔지 한 가운데에서 가타부타 입을 털 일도 없었다.
정사의 흐름을 방해해서 내가 가진 정보우위를 허투루 돌리는 짓은 안한다.
그런 방침도, 일단 당장은 접어둬야 하는 시점.
– ‘※ 전투 중 세 번, 회랑의 기둥이 무너지는 컷신이 있습니다. 기둥에 깔릴시 즉사하므로 반드시 피해줍시다.’
‘원소베기’ 스킬이 있다면 타칸을 패퇴시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플레이 경험이 잔뜩 쌓여있는 사람이 아니면 의외로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네일관 회랑의 세 귀퉁이에 있는 거대한 석조 기둥, 타칸을 잘 유도해서 그곳에 깔리게 만들면 잠시간의 빈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운이 좋았구나.”
운 좋게도 그 석조 기둥 중 하나에 타칸이 깔려서 탈출의 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상황이었겠지.
타칸이 기둥에 깔리는 건 최초의 한 번 뿐이다. 그 뒤로는 꼬리로 기둥을 쳐내버리니, 그런 요행을 두 번 바랄 수는 없다.
“자세한 걸 꼬치꼬치 캐묻진 않을게요. 에드 선배님. 어쨌든 선배님이 제시하신 안은 비현실적이에요. 다 같이 덤벼들어도 도리가 없었던 상대인데, 심지어 전력을 반으로 나눈다니요. 잠시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유의미할 정도의 시간은 아닐 거에요.”
로르텔의 의견은 언제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 뛰어난 냉철함이 소녀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타칸을 맡은 쪽 토벌대는 시간을 끌기는커녕 대번에 제압 당해버릴 가능성이 더 커요. 그 타칸이 전투 실습장으로 합류하기라도 하면, 저희는 벨로스페르와 타칸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해야 될지도 몰라요.”
그 모든 이야기를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리스크가, 너무 커요.”
그러나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리스크의 크기를 따지는 건 다른 대안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야. 로르텔.”
그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로르텔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라 반박할 말이 더 없는지 눈을 굴려보지만, 로르텔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다른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페니아 황녀님. 벨로스페르에게 지배당한 예니카를 저지하는 일 아닙니까?”
다시 일동 침묵. 화자가 에드 로스테일러이니 만큼 도저히 동감하고 싶진 않겠지만, 틀린 말은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타칸은 굳이 제압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칸은 그냥 건너뛰고, 어떻게든 전투실습장으로 넘어가서 예니카를 저지하십시오. 이 정도 멤버면 충분히 벨로스페르를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해야만 합니다.”
이런 황금 같은 멤버들을 가지고 타칸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상성 상의 열세가 핵심이다.
벨로스페르와 예니카가 나오는 최종전 페이즈는 분명 온전치 않은 전력의 토벌대라고 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핵심은 테일리의 검성식이다. 그걸 받쳐줄만한 인원만 있으면 된다.
“에드 로스테일러.”
페니아 황녀의 두 눈이 나를 향한다. 몰골은 영 좋지 않다.
온갖 변수와 상황들이 그녀를 궁지로 몰았을 것이다.
흙바닥을 한 번 굴렀는지, 언제나 윤기 넘치던 그녀의 드레스 자락은 더럽혀져 있고, 여기저기 찢겨나가 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의 끝자락은 타칸의 화염에 그을려있다. 처참한 전투의 흔적이다.
몸도 마음도 궁지에 몰려 있을 그녀는, 또 다시 한 번 내 눈을 똑바로 본다.
“또… 당신이군요..”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니, 긴 말 안하겠습니다.”
주변은 이미 수군대는 학생들의 속삭임 소리가 가득하다. 저 사람이 뭔데 저렇게 잘난 듯이 이야기하나, 에드 로스테일러의 의견을 따라가다니 미친 짓이냐, 다 같이 죽자는 거냐. 뭐 굳이 내용을 읊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저는 거짓말 안합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는 그들이 아니다. 이 급조된 주둔지를 책임지는 군주의 자격을 단 자는, 단 한 명뿐이다.
페니아 황녀는 나를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더니… 잠시 사색에 잠긴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야 어쨌든, 하는 말에 틀린 부분은 없군요.”
차분하게 내려진 판결.
“페니아 황녀님! 지금 저 자의 의견을 따라가자는 겁니까! 저 자는 에드 로스테일러 입니다!”
“조용히 하세요, 클레르. 저는 지금 에드 로스테일러의 의견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타당한 의견’을 따라가는 거에요. 그는 충분하리만치 타당한 의견을 내놓고 있어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 페니아 황녀는 이윽고 주둔지에 둘러선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타칸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래도 확실한 건, 정령사 예니카를 제압하면 타칸도 같이 무력화 될 거라는 거에요. 다만… 반드시 정해야만 하는 게 있어요,”
“누가, 타칸을 막아낼 것인가.”
핵심을 꿰뚫는 직스의 말에, 일동 사이로 잠깐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아하핫… 그건 그냥 자살 희망자를 뽑는 거네.”
“말 조심 하세요, 엘비라.”
“어멋, 죄송합니다. 황녀님.”
만신창이 상태에서도 헤실 대는 ‘참견쟁이 엘비라’는, 황녀의 일갈에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느 쪽에 속한다고 해서 특별히 더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상대는 고위 어둠 정령과 고위 불 정령인 걸요.”
그렇다.
이들 입장에서는, 타칸을 막아서지 않고 전투 실습장에 진입한다고 해서 딱히 더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다.
사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평해보자면 타칸 쪽이 더 위험하다.
테일리에게 ‘원소베기’의 사용법을 터득시키기 위해 마련된 적인 타칸은 그 특성상 압도적인 상성 우위를 달고 등장했다.
다만, 고위 어둠 정령 벨로스페르는 그저 ‘강한 적’일 뿐이다.
특정한 ‘공략법’에 의존해 상대해야하는 적이 아닌, 가진 능력과 전략을 적절히 활용해 상대하는 정석적인 최종 보스다.
지금 상황에서 타칸의 존재는 한없이 불합리하다. 전술 했듯, 열쇠 없이 열어야하는 자물쇠다.
그러나 벨로스페르는, 굳이 빗댄다면 복잡한 미궁일 뿐… 이 정도 멤버가 있으니 노력하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불도마뱀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겁쟁이 기질이 있는 클레비어스는 그렇게 탄식했다.
“나는…! 나는! 전투실습장 진입조에 넣어줘! 차라리 그 쪽으로 갈래! 예니카 선배를 제압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그렇다. 이 시점에서 타칸과 벨로스페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피부에 닿는 그 공포의 체감이다.
일동들 사이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황녀는 클레비어스의 불길한 그 말을 곧바로 제지 못했다. 황녀 또한 일순간, 타칸을 마주했을 때의 그 공포감을 재차 실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 직접 맞닥트리지 않은 미지의 대상과, 실제로 목전에서 한 번 패퇴한 상대.
지금 시점에서는 타칸이 주는 심리적 공포가 훨씬 더 강대할 것이 뻔했다.
벨로스페르의 광폭화 버프를 두른 고위 불 정령 타칸. 포효 소리와 함께 꼬리를 휘두르고, 회랑의 기둥을 부숴대고, 불을 뿜으며 폭주하는 그 공포의 화신은…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 누구도, 타칸의 토벌조에는 자원하지 않았다.
일동 사이로 긴장감이 돌았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책임져야만 한다.
“제가, 남겠습니다.”
가장 먼저 손을 든 자는, 테일리 맥로어였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단 1초의 유예도 없이 테일리의 의견을 쳐냈다.
“뭐라고요..?”
나를 보는 테일리의 눈에는 아직도 적개심이 남아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너는 지금 죽었다 깨어나도 그 도마뱀을 상대할 수가 없다. 1분도 못 버텨.”
“…다른 사람이라고 그게 가능할 거란 보장은 없잖아요. 어차피 버림 말을 골라야만 한다면, 그건 제가 되는 게 합리적이겠죠.”
테일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 광장 주둔지 중앙, 그곳을 두르고 앉아있는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 같이 휘황찬란하다. 난다 긴다 하는 멤버들이 두런두런 앉아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단 한 명의 낙제 위기생. 백조 떼 사이에 끼어있는 한 마리의 거위와도 같다.
지금은 꽤나 단련이 된 상태겠지만, 그 압도적인 스펙의 차이를 누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겠지.
“저, 발은 빨라요.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제가 하는 게 맞아요.”
“너,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구나. 지금 우리는 희생양을 뽑고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그리 이야기 하고 테일리의 어깨를 휙 잡아서 돌렸다. 그대로 등을 내주고만 테일리는, 나에게 퍽 떠밀려서 다시 군중의 사이로 휘말려 들어가고 만다.
“나대지 말고 들어가 있어. 너는 무조건 전투실습장 진입조야.”
그리고, 나는 페니아 황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한테 묘안이 있습니다. 본대가 예니카를 제압하기 전까지 타칸의 발을 묶어둘 수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굉장히 깁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글라스칸 소환식의 색조는 더 이상 변할 기색도 없다. 완전히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당장이라도 재앙과도 같은 글라스칸을 내뱉을 것만 같다.
“토벌대를 반으로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딱 둘만 내주십시오. 전위 담당 하나, 화력 담당 하나.”
거기까지 이야기 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 뭐?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을 따라서 타칸을 상대하기 위해 남으라고?!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에! 차라리 신한테 빌고 말지! 당신을 믿고 따라가느니…! 그냥 결계식 외곽까지 도망을 가겠어!”
“전위 담당은 지금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저 클레비어스면 됩니다.”
“뭐? 왜! 왜 나야! 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죽기 싫어!”
“거..참… 시끄럽네! 멍청한 클레비어스!”
듣다 못한 참견쟁이 엘비라가 소리를 지르며, 연금 시약을 봉하기 위해 사용하는 천을 가져와 다친 클레비어스의 입에 박아 넣었다. 클레비어스는 우욱대면서도 간헐적으로 비명을 내지를 뿐이었다.
“화력 담당은… 로르텔. 네가 남아라.”
“저요?”
황금의 딸 로르텔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광폭화 마법이 걸리지 않은 타칸을 상대로도 참패한 전적이 있답니다?”
“그런 게 의미가 있겠냐. 지금 시점에 일대일로 타칸을 이길 수 있는 놈이 어딨어.”
“그것도 그렇지만 음…”
로르텔은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도 제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아는 사람인 걸요.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됐든 정중히 거절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굳이 저 멍청한 클레비어스가 아니더라도요.”
누굴 더러 멍청이라는 거냐, 그런 클레비어스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토벌대원 중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사실 네 의견은 별로 안 중요하긴 해.”
“…그것도 그렇네요.”
로르텔은 쿨하게 인정했다. 지금 시점에서 토벌대의 모든 행동방침에 대한 결정권자는 단 한 명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모든 이의 행보를 결정할 실질적인 권력이 있는 소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이 있다.
“결정을 내리십시오.”
“당신을 믿어보라고요?”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주변의 시선은 이미 완전히 쏠려 있었다. 주둔지를 지키고 있는 학생들의 의견은 대개 회의적이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악명이야 이제는 모르는 놈이 간첩이다. 호의적인 반응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양심 없다.
“황녀님! 안됩니다! 안 돼! 아무튼 절대 안 돼요! 저런 자를 믿고 일을 맡기면 안 됩니다!”
음침한 클레비어스는 천을 뱉어내고 소리치며 반대했다.
“저는 걸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에드 선배님의 의견을 따라가 보죠. 그게 유일한 대안이니까.”
초목의 창 직스는 비교적 내게 찬동하는 편이었으며,
“그래, 차라리 저 의견을 따라가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다른 건 모르겠고, 가만히 있다 개죽음 당하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아. 아하하.”
참견쟁이 엘비라는 내게 찬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래도 좋다는 스탠스다.
“저는… 별 말은 안할게요.”
황금의 딸 로르텔은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 모습이고,
“….”
테일리는 생각이 복잡한지 묵언하고 있었다.
페니아 황녀는 그 중심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산재하는 의견 속에서 무엇이 옳은 길인가를 파악해낸다. 누구의 의견을 믿고, 누구의 의견을 내칠 것인지를 신중히 파악해야만 한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뒤에, 이윽고 눈을 떠서… 겨우 내뱉은 말은.
“조건이 있어요. 조금 어려울지도 몰라요.”
더 따질 것도 없이, 계획의 시동을 알리는 것이었다.
“행여나 죽지 마세요. 절대로.”
*
토벌대는 두 조로 나뉘어졌다.
나와 클레비어스, 로르텔로 이루어진 타칸 담당조.
그리고 나머지 멤버로 이루어진 예니카 제압조.
굳이 클레비어스와 로르텔을 지명한 이유는 별 거 없다. 전위 담당 하나, 화력 담당 하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
토벌대에서 전위 담당이 가능한 녀석은 테일리, 클레비어스, 직스, 클레르였다.
테일리는 논외고, 클레르는 중상을 입었다. 결국 직스 아니면 클레비어스 둘 중 하나인데, 사실상 토벌의 핵심인 예니카 제압 팀에는 더 강자인 직스를 붙여주는 게 낫다.
내 쪽에는 그저 시선 끌기용 전위만 있으면 되니, 굳이 강력한 전위를 요구할 필요는 없어서 상처를 입은 상태인 클레비어스를 뽑았다.
남은 사람들 중 화력 담당이 가능한 자는 페니아, 로르텔, 엘비라가 있다. 아일라는 화력 담당을 하기에는 아직 힘이 미약하다.
페니아 황녀는 논외다. 그녀는 최종전에서 벨로스페르의 공격 마법을 막아내는 방어식 구축 담당이니, 예니카 제압조로 보내야 한다.
남은 것은 엘비라와 로르텔. 그 중에서 결국 로르텔을 집은 이유는 별로 대단치 않다. 언젠가 얘기 했듯이, 1막 시점에서의 로르텔은 배드 엔딩 메이커다. 굳이 테일리와 붙여놓을 필요가 없어서 그냥 내가 데려왔다.
결과적으로 예니카 제압조는 테일리, 페니아, 직스, 엘비라, 아일라가 되었다.
‘정사’에 비하면 한없이 단출한 구성이지만, 테일리의 검성식이 발현되기만 하면 이론상 분명 이길 수 있다.
“좀 아슬아슬한가…”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시점에서 인물들의 능력치를 유추하고, 담당 역할을 최대한 잘 생각해 최적의 배분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사에 비해서는 확실히 불안한 부분이 많다.
저 멤버로 예니카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거기서부터는 더욱 더 머리가 아파진다. 뭐 일단은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급한 건 타칸이다.
“그래서, 에드 선배님. 선배님이 원하시는 대로 상황이 구축 됐네요.”
시간은 야심한 새벽. 슬슬 일출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타임 리미트도 끝이 보인다.
장소는 학생회관이 똑바로 보이는 입구다. 양 옆으로 네리스관과 오벨관도 보였다.
“젠장!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신이시여! 제발 목숨만 부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클레비어스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저렇게 보여도 일단 할 때는 하는 녀석이다. 시끄럽게 윙윙거려서 모기 같은 녀석이지만, 일단 미끼 역할 하나는 기가 막히니까.
나와 로르텔, 클레비어스는 나란히 서서 열려 있는 네일관 입구를 바라보았다. 진입하면, 곧바로 네일관 회랑 전투의 시작이다.
타칸을 끌어내면, 그 틈을 타 예니카 제압조가 진입해서 전투 실습장까지 돌격, 그대로 최종전 진입이다.
타칸 전과 벨로스페르 전을 동시에 진행하다니. 이런 일에 휘말리다보니 별 해괴한 경험도 다 해본다.
“슬슬 귀띔해주실 때도 됐죠? 저 불도마뱀을 상대로 어떻게 시간을 끌 셈이에요?”
“못 끌어, 시간.”
“….네?”
로르텔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클레비어스도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스치기만 해도 사망인데다가, 속도도 말도 안 되게 빠르고, 협소한 공간에 기둥까지 무너져 내려대는데 어떻게 시간을 끌어. 어줍잖게 도망치려 해봤자 5분도 시간 못 끌어.”
“그건… 쉬이 넘겨 들을 수가 없는 말이네요. 에드 선배님. 저희는 목숨을 걸었는데요.”
“뒤집어서 말하면, 5분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다는 이야기지. ”
나는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교복 외투를 벗고, 팔을 걷어붙였다.
“도망칠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잡을 생각을 해야 된다.”
그 말에 클레비어스와 로르텔은 벙찌고 말았다. 클레비어스야 그렇다 치고, 항상 냉철한 얼굴을 하던 로르텔이 벙찐 표정은 또 처음 본다. 흔한 광경은 아닌데, 또 막상 보고 나니 우습다.
“시키는 대로만 해. 계획대로만 하면,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
나는 대충 팔을 휘저어서, 예니카 제압조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입하겠다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