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2)
벨브로크 토벌전 (10)
외눈박이 거인 둘이 육중한 몸을 들고 일어서니, 그 눈높이가 드높은 황족 숙소의 꼭대기 층과 딱 맞물렸다.
둔중한 움직임으로 손을 휘두르며 황족 숙소 한 쪽을 쳐부숴버리자, 외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지붕쪽에서 병사들이 화살을 마구 쏴대고 있었지만, 거인에게는 먹혀들어가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외눈 거인 둘이서 황족 숙소의 중앙 정원에 우뚝 서서 주변을 다 부숴대는 동안, 페니아 황녀는 클로엘 황제와 함께 1층의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벌써 몸에는 생채기가 가득하고, 드레스 자락도 찢어져 있었다. 달리기 불편해서 구두는 벗어 던져버렸더니, 그 새하얗고 부드러운 발조차 상처가 잔뜩 생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페니아 황녀는 표정을 구기며 달려나갔고, 그 뒤로 거대 박쥐 세 마리가 복도 벽을 짚으며 쫓아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타난 병사들이 몸을 던져서 놈들의 진로를 방해했지만, 아주 약간 거리를 벌릴 수 있을 뿐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애초에 따돌린다는 것에 의미가 있긴 할까 싶다. 황족 숙소의 정원엔 이미 수많은 마물족들이 가득해, 어딜 가든 병사들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만 가득했다.
탈출로가 없다.
심지어 몸도 많이 다쳤다.
클로엘 황제와 접견실에 숨어 있을 때, 들이닥쳤던 거대 박쥐로부터 도주하느라 거의 모든 마력을 다썼다. 그 과정에서 팔뚝에 상처가 남고, 오른쪽 어깨에 큰 자상을 입었으나 아프다고 나자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폐하! 후문 쪽으로 나가십시오!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용맹한 기사 하나가 거대 박쥐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도주하십시오. 이곳은 저희 황실 호위대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설령 후문까지 나가서 마차를 탄다 할지라도, 어디로 향할지도 알 수 없다. 이미 아켄섬은 마물족으로 뒤덮인 상태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다. 클로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페니아 황녀의 팔을 잡아 끈 채로 더 빨리 달렸다.
“ 크아아아악 ! ”
복도를 꺾어 들어가자 등 뒤로 방금 그 병사가 외치는 비명이 들렸다. 역시, 혼자서 막아서는 것은 무모했던 것이다.
충심 어린 기사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던져가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했다.
클로엘 황제는 진중한 얼굴로 안타까운 듯이 탄식했고, 페니아 황녀도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돌릴 틈조차 없이 황족 숙소 메인 건물의 뒤쪽으로 빠져나오자, 밤 공기가 폐를 확 채우고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한층 더 퍼뜩 솟아올랐지만, 여전히 하늘을 뒤덮는 마물족들의 양을 보면 아득해진 기분이 되고 만다.
페니아 황녀는 다시금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이번엔 자기가 앞장서서 후문을 향해 달렸다.
이대로 가면 하늘을 나는 마물족들에게 발각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것보단 백배는 낫다.
차마 용기를 내고 있지 못하던 클로엘 황제도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달렸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마물족들은 여지 없이 두 사람을 휙 쳐다본다. 척 봐도 전투 능력이 미흡해보이는 두 사람이 살아보겠답시고 달려나가고 있는 꼴이다.
좋은 희생양을 발견했다는 확신에 빠져, 기괴하게 뒤틀린 형태의 그리핀이 날개를 확 펼친 순간이었다.
그 순간, 드 넓은 하늘이 사라졌다. 수천개의 원소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고, 거기서 뿜어져나온 섬광이 일순간 세상을 물들였다.
운이 좋았다. 그것 말고는 더 적합한 표현이 없다.
루시의 마력에 의해 발현된 마법진들이 하늘을 뒤덮는 순간, 상공을 부유하던 마물족들은 모두 그 마법진에 시선이 쏠리고 만다.
사람이든 마물이든, 생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막대한 규모의 마법진.
제 아무리 루시 메이릴이라 할지라도, 저게 감당이 가능하긴 할까 싶을정도로 엄청난 수의 마법진은 아켄 섬의 모든 관객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이윽고, 그 수많은 마법진에 깃들여져 있던 마법이 발현되자… 세상은 섬광 속으로 물들어간다.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계를 넘어선 규모의 폭발은 순간적으로 세상을 아예 지워버린다.
소리보다 훨씬 빠른 빛이 하늘을 뒤덮고, 뒤이어 들려오는 폭발음에 고막이 고통을 내지른다.
상공을 부유하고 있던 수많은 마물족들은 물론이고,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던 벨브로크 마저도 고통에 몸부림 치기 시작한다.
하늘을 뒤덮었던 수많은 마물족들이, 한 순간이나마 전부 사라져버린다.
하늘에서 육편의 비가 쏟아져 내린다. 조각난 마물족의 시체가 아켄섬을 뒤덮으며, 푸르른 숲도 회백색 건물들도 붉게 물들여간다.
– 후두두두둑
– 후우욱
피를 뒤집어쓴 만물이 마치 지옥을 형상화 해놓은 것 같다.
페니아는 온 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정원 뒤쪽을 따라 달려나갔다.
방금 그 일격으로 인해서 하늘을 뒤덮은 마물족이 거의 다 사라졌다.
물론, 끊임 없이 마물족을 소환해대는 벨브로크의 힘을 생각해보면 다시금 물량으로 뒤덮이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도, 지금 이 한순간이야말로 안전지대까지 도주할 수 있는 유일한 적기다.
지상으로 이미 착지한 마물족들만 피해서 어떻게든 안전한 구역을 찾아낸다. 그럼 일단 클로엘 황제의 신변만큼은 보호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며 후문 쪽에 도달하자, 기사가 말했던 거대한 마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페니ㅁ아 황녀는 이를 악물고 달려나가, 클로엘 황제를 얼른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마차의 외문을 타고 밟아 마부석 쪽으로 간 다음 창문에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바로 출발시켜요! 빨리요!”
그리 말하고 마부석 내부를 보았다가 숨을 머금고 만다.
늙고 원숙한 마부의 시체가 한 구.
마부석에서 황녀와 황제를 기다리다가, 그렘린에게 습격당해 사망한 것이다. 어깻죽지에는 거대한 칼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그렘린 한 마리가 페니아 황녀와 눈을 마주쳤다. 페니아 황녀는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는 물론이고, 내장의 내벽 하나 하나에 모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칼을 뽑아든 그렘린이 포효를 내지르며 마차에 달라 붙어 있는 페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페니아는 얼른 몸을 다시 옆으로 밀어냈지만, 마부석 문을 부수고 튀어나온 그렘린의 팔짓에 그만 추락하고 만다.
진흙 바닥을 구른 페니아는 칼을 역수로 쥐고 자신을 꿰뚫으려 드는 그렘린의 모습을 보았다. 그대로 옆으로 얼른 굴러서 찔리진 않았지만, 온 몸이 진흙 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페니아 황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일어서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녀가 특기로 하는 물 마법. 수구를 이끌어내서 그렘린에게 날려댔다.
마법에 직격 당한 그렘린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뒤로 몇걸음질 쳤다. 페니아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키며 또 다른 수구를 그렘린의 눈가에 꽂아 넣었다.
그렘린이 눈을 감싸쥐며 고통스러워 하는 틈을 타 중위 물 마법 ‘익사’를 시전한다.
그렘린의 머리 근처에서부터 발현된 물 웅덩이가, 그의 호흡기를 모두 틀어막아 버린다.
그렘린은 한참을 저항하며 마력을 풀어버리려 했지만, 페니아 황녀는 피를 흘리면서도 정신의 집중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마법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렘린은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 강한 정예 마물족도 아닌데, 너무나도 큰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심지어 몸의 마력도 다 쓴 느낌이다.
그래도 페니아 황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서 마부석에 올라탔다. 피와 더불어서 내장을 반쯤 쏟아낸 마부의 시체를 보자,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다.
페니아 황녀는 체력이 거의 다 떨어진 몸으로나마 어떻게든 움직여서, 마부를 마차 밖으로 밀어내었다. 마부의 시체가 마치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페니아 황녀는 고인에 대한 예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해, 잠시 기도를 올리곤 채찍을 잡았다. 다행히 말들은 아직 무사한 것 같다.
어떻게든 황족 숙소 밖으로 대피할 수는 있다.
온몸에 피와 진흙이 가득 묻었고, 꼴도 말이 아니지만… 목숨 만큼은 부지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말 두 마리가 외눈 거인의 발에 밟혀서 터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쿠웅
쩌억, 하고 거인의 발에 피가 눌러붙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정원에서부터 빠져나온 외눈 거인 하나가 페니아 황녀의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번에 밟아 없애려던 걸, 조준이 실패해 말만 죽인 느낌이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밟아 없애주겠다는 투로, 외눈 거인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그 거대한 발이 다시 상공을 향해 올라간다.
죽는다.
밟혀서 터져 죽는다.
저항할 수단은 없다.
저급 그렘린 하나 잡는데도 발버둥을 쳐야 했는데, 저런 고위 마물족을 잡을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천천히 발의 위치를 조정한 외눈 거인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 쾅! 콰앙!
마차 위로 추락하듯이 내려온 금발의 사내가 차마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외벽에 부딪혀 크게 한 번 굴렀다. 허나 아랑곳 않고 그대로 페니아 황녀의 팔을 잡아끌고 마차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페니아 황녀를 꽉 끌어안은 채로 함께 바닥을 구른 그 사내는 분명… 에드 로스테일러다.
“허읍…!”
그와 동시에, 물로 이루어진 암사자 한 마리가 클로엘 황제를 태우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 거인의 발에 밟혀 마차가 폭삭 터져버린 것이 1초 뒤였다.
– 콰아아앙!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그 속에서 재채기하며, 겨우 정신을 차린 페니아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숨을 머금고 만다.
사내는, 페니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다친 상태였다.
출혈의 양이 보통이 아니다. 그나마도 많이 출혈이 멈춘 상태인 거고, 온 몸의 상처는 마치 송곳 같은 것에 찌르고 꿰뚫린 것처럼 난장판이 나있다.
숨만 쉬고 있어도 고통스러울 상황일지언데, 페니아를 구한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
뭐라 말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외눈 거인의 시야가 두 사람을 향했다. 페니아는 그 순간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지금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사이좋게 거인의 발에 짓이겨질 뿐이다.
그러나, 거인이 또 다시 발을 들어올리는 일은 없었다.
– 화아아악!
거대한 몸집을 끌어낸 불도마뱀이, 오히려 외눈 거인 보다 조금 더 크다.
괴수들의 싸움을 보는 듯한 광경이지만, 타칸의 불 마법은 마법 내성이 없는 외눈 거인에게는 한 발 한 발이 치명타다.
타칸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불꽃이 외눈 거인을 뒤덮었다.
그 머리 꼭대기에 타고있는 것은, 예니카 페일로버와… 페니아 황녀의 언니 셀라하였다.
“이… 이건…”
“페니아 황녀님.”
에드는 격통을 참고 몸을 일으키며, 페니아 황녀와 코앞에서 똑바로 눈을 맞췄다.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피칠갑이 된 모습으로 끝까지 페니아의 안위를 지킨 모습에… 페니아는 크게 당황하고 만다.
그는 이 모양 이꼴이 돼서도 페니아를 지키겠답시고 이 지옥도가 펼쳐진 황족 숙소까지 달려온 것이다.
에드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페니아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페니아는 깜짝 놀라서 흔들리는 동공으로 가만히 에드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먼저 말을 건넸다.
“치료… 치료를 받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 화아아악!
외눈 거인을 제압한 타칸이 고개를 숙이자, 그 위에서 예니카와 셀라하 황녀가 뛰어내렸다.
풀밭 위에 착지한 두 사람은 얼른 달려와서 셀라하는 클로엘 황제를, 예니카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부축했다.
“아바마마! 괜찮으세요!”
“무사했구나, 내 딸 셀라하! 네가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저도 아바마마가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셀라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느라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페니아를 품속에서 내려놓은 에드는 예니카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에드! 몸도 안 좋은데… 갑자기 그렇게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 진짜로 에드… 이 정도 출혈이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예니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외치자, 에드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리며 이야기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페니아 황녀님. 지금 당장 테일리가 있는 곳으로 가셔야합니다.”
“뭐라고요…?”
“우리는… 지금 여기서 저 용을 잡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국 전체로 퍼져나가는 재앙이 될겁니다.”
그 말을 듣고, 셀라하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선 클로엘 황제가 이야기 했다.
“그대는… 에드 로스테일러 경…”
“폐하… 급박한 상황이라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서 전달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저희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에드는 밀려올라오는 격통을 참으면서 이야기 했다.
“일단은… 테일리가 있을만한 곳… 테일리의 일행이 모여있으면서도, 트릭스관에서 가까운 주둔지였던… 오필리스관… 오필리스관으로 향하셔야합니다… 여기보다 거기가 더 안전할 거고… 또… 크윽…”
에드는 피를 한 차례 더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에드를 부축하고 있던 예니카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질끈 감더니, 페니아 황녀를 향해 이야기했다.
“의료진. 의료진은 없어요! 에드는 일단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 그래 보이긴 하는데… 지금 황족 숙소 내부는 마물족이 아예 중심부까지 침범해 들어와서… 사실 남아 있는 의료진이 없다 봐도 무방해요! 거의 다… 사망했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왔는데… 에드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거에요?”
페니아 황녀는 눈을 덜덜 떨며 에드의 상처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래요… 어떻게든… 간단한 응급처치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됐습니다. 치료는 오필리스관에 가서 받아도 됩니다.”
어쨌든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장에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에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페니아 황녀님이 무사하신 걸 확인했다면, 그럼 됐습니다.”
페니아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긴 인연이고, 대부분은 계약으로 이어진 관계였지만… 에드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 혼신을 다해줄 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저런 몸 상태로, 페니아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황족 숙소까지 달려오다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지력이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 당신은….”
에드는 이를 악물고서 다시금 클로엘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 목표는 벨브로크를 잡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페니아 황녀를 반드시 데려가야만 했다.
이런 난리가 난 상황에서 페니아를 벨브로크 토벌대에 집어넣겠다는 말을 한다면, 클로엘 황제가 찬성할 리가 없다.
그래도, 상황을 최대한 잘 설명해서 페니아를 데려가야만 했다.
“황제 폐하.”
에드는 피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사실상 범국가적 재앙 사태입니다. 지금 여기서 해결 못한다면, 사상자는 수만 단위를 아득히 넘어갈 겁니다. 어쩌면… 제국의 명맥이 여기서 끊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건… 그렇네…”
“믿어주실지 안 믿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말씀드려보자면 벨브로크를 토벌할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노력은 해볼테니….”
예니카의 부축을 잠시 사양한 에드는, 스스로의 힘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서… 클로엘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페니아 황녀님이 필요합니다. 제가 페니아 황녀님을 데려가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
바닥에 나자빠져있던 페니아가 갑자기 얼굴을 훅 붉히면서 어깨를 떨었다.
클로엘 황제를 부축하고 있던 셀라하 황녀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언성을 높였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런 식으로 부탁하면 좀 느낌이 이상하지 않느냐!”
셀라하의 말에 일단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그런 의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인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셀라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페니아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예니카도 묘하게 야생의 촉 같은 것이 생긴 모양인지… 괜시리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엘 황제는 통찰력이 있는 자다.
그는 상황이 급박하면 급박할수록, 언제나 핵심을 꿰뚫고 들어온다.
“무모함을 용기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에드 로스테일러. 저 성창룡은… 초대 검성 루덴도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신화 속의 괴물이다.”
“그렇다고 저항도 안해보고 개죽음을 당할 순 없습니다. 여기서 마무리 못 지으면 대륙 전체로 피해가 퍼져나갈 겁니다. 일단 아켄섬 내에 있는 여러 주둔지 세력을 한 데 모아서 저항할 생각입니다.”
“섬 여기저기에 찢어져서 흩어져 있는데다가, 각자 버티기도 힘들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자들을 한 군데 소집시키겠다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각 주둔지의 리더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전투부 학생 수석 다이크 엘펠란,
엘테상회 실베니아 지부 회주 대리 로르텔 케헬른.
실베니아 아카데미 총 학생회장 타냐 로스테일러.
성황도 텔로스 교단의 성녀 클라리스.
최고 등급 기숙사 오필리스관의 메이드장 벨 마이아.
하나 같이 가치관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며, 이런 비상사태에서 취하는 행동 방침도 다른 리더들이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그 자들 사이에 딱 하나의 공통 분모가 있다고 한다면….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중심에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미, 예니카의 편지를 들고 있는 정령들이 아켄섬 여기 저기로 날아서 흩어졌다.
본래라면 포진해있는 마물족 때문에 정령을 보내기도 힘들었겠지만, 일시적으로 루시의 마법으로 상공의 마족들이 한 번 쓸려나간 틈을 타서… 훨씬 더 빨리 메시지를 보낼 여건이 조성됐다.
루시의 원소 마법은 발악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각 주둔지들 사이에 연락망이 더 빨리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책임지고 오필리스관으로 모여달라고 전언을 보냈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기약없이 버티기만 해봐야 파국을 맞이할 뿐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겁니다.”
죽어나가는 상인들 사이에서, 빙결 마법으로 마물족을 처리하며 상회 건물을 보호하고 있던 로르텔. 그 어깨에 어느샌가 참새 모양을 한 하위 바람 정령 카리스가 날아와 앉는다.
상회의 용병대들이 비명을 지르며 싸워나가는 와중에, 보호를 요청하는 외부인사들은 끊임 없이 상회 건물로 밀려들어온다.
그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어깨에 앉은 정령의 발에 묶여 있는 편지를 발견한 로르텔은, 재빠르게 꺼내어 읽어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위기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웃음을 흘리며 마법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 본다.
걸어볼만한 도박이라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전투부 훈련장에서 생존자 구조를 진행하고 있는 다이크 엘펠란도 마찬가지다. 에드의 편지를 받아들고서는 턱을 괴고 고민하더니, 이윽고 주둔해있는 전투부 학생들에게 외친다.
오필리스관까지 가는 길은 이미 피에 미친 클레비어스가 어느 정도 뚫어놓았다. 그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은 리스크가 적다. 해볼 만한 판단이었다.
생활동으로 향한 타냐 로스테일러도 편지를 받아들고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직스가 오필리스관을 향해 떠났으므로, 그 뒤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 에드 로스테일러를 중심으로 모여든 주둔지라면, 사실상 학사 내부의 핵심 전력들이 많이 모일테니 그 쪽이 더 안전할 것이다.
거리는 좀 더 멀지만, 오필리스관이라면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지금이라도 이동 루트를 꺾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에드 로스테일러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게 가장 무난하기 때문이다.
학사 성당에서 성직자들과 함께 모여서 농성하고 있던 클라리스 성녀 또한 마찬가지다.
벨브로크의 부활에 대해 어느정도 언질을 들었던 그녀이기에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처할 수는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부활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클라리스는 애초부터 에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벨브로크의 부활에 대해 예견하고 있던 그 사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을 취해 행동 방침을 이야기 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오필리스관으로 모여, 저 벨브로크를 토벌하러 간다는 계획에 클라리스는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성직자들에게 지시를 내기 위해, 성당 앞 광장의 바리케이드 쪽으로 얼른 뛰어나갈 뿐이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들 오필리스관으로 모여들겁니다.”
“하… 허허…”
클로엘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일국의 황제조차도 대번에 컨트롤 하기 힘든 인사까지도 섞여 있다. 특히 성녀 클라리스나 회주대리 로르텔 같은 거물들은, 이런 급박한 상황일수록 보수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인물들을 한 번에 휘어잡아서 일단 오필리스관으로 모아놓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무리를 이끄는 자는 항상 리스크를 계산해야하는 법이다. 억지로 주둔지를 옮기고, 마물족을 헤치며 한 곳에 모인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판단인지… 각기 다른 그 우두머리를 전부 한 마음으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게 얼마나 정치적으로 고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내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 세력을 한 곳으로 규합시켜버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은 두 부류 중 하나다.
정치의 화신이거나.
아니면, 영웅이거나.
이 사내는 어느 쪽인가. 클로엘 황제는 피를 흘리는 에드를 잠시 쳐다보았으나, 결론을 내리진 않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지금 당장은, 당면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에 능한 능구렁이든, 사람을 휘어잡는 영웅이든… 그 주둔지의 리더들이 에드의 뜻에 따른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사내의 방침을 믿어주는 것이 황제로서는 옳은 판단이 아닌가.
클로엘 황제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크레핀이 쥐고 흔들던 그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새로 피어오른 불꽃인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뿌리까지 썩은 가문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