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4)
벨브로크 토벌전 (12)
총력전.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승리를 취해야만 하는 상황.
지난 세월 간 계속해 온 내 노력은 오로지 이 시련을 이겨 내기 위함이었다.
마물족들이 아켄섬을 휩쓸고, 세상이 멸망해 가는 것만 같은 광경 속에서… 나는 루시를 꽉 안아 들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탓인지 루시는 고통의 신음성을 뱉었지만, 온몸이 쑤시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대로 한계에 달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도, 일단은 루시를 끌어내어 안전 범위까지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뛸 거다.”
품 안의 루시에게 그리 말하고, 나는 생활동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달려 들어갔다.
실베니아의 일차적인 목표는 루시 메이릴이다.
벨브로크를 혼자서 막아서고 있던 루시를 일단 없애 둬야만, 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성창룡이 더 마음껏 날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러니 일단은 전투 불능 상태인 루시를 전장에서 빼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페니아 황녀와 예니카 둘이서 실베니아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도주라면 가능하다.
루시 메이릴 또한 전력을 다하면 도망 정도는 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자신이 성창룡 벨브로크와 대현자 실베니아의 발을 묶어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오필리스관에 집결해서, 우리끼리 저 미치광이 마법사를 상대할 계획이야. 테일리는 벨브로크를 해결하러 갈 거고.”
루시를 안아 들고, 상처를 꽉 동여매며 힘껏 달렸다. 루시와 내 몸에서 나온 핏줄기가 골목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다… 행이네….”
“…뭐?”
있는 힘껏 발걸음을 앞으로 하면서도, 뜬금없는 루시의 말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너, 살아 있어서.”
루시는 긴말을 하진 않는다. 애초에 감정 표현이랄 것도 거의 없는 소녀다.
허나, 주마등을 보고 온 탓일까. 괜스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건지, 피가 흐르는 몸을 어렵사리 들어 올리며 이야기했다.
“네가 죽었으면, 어쩌나 했어.”
“너도 알잖아.”
걱정했다는 루시의 말을 듣고, 나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결국엔 살아남는 게 내 주특기야.”
그 말을 듣고 루시는 숨을 삼켰다. 사실 루시도 모르진 않았던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난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실베니아의 발을 붙잡아 보려고 했던 거겠지.
“우, 욱… 컥, 허억…!”
그 순간, 루시가 재채기를 하며 피를 한 차례 토해 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일단 건물 외벽에 루시를 기댄 채 내려놓았다.
격통에 시달리는 루시. 피와 함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칼을 밀어서 내려 주고, 몸 상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뒤늦게 눈치챘지만, 한쪽 손에 통째로 화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몸 여기저기에 자상이 가득하고, 마력탄에 의한 상흔도 눈에 띄게 많이 남아 있었다.
넝마가 된 교복 틈새로 보이는 상처만 해도 그 정도인데, 자세히 뜯어 보면 얼마나 만신창이일지 상상조차 힘들다.
뿐만 아니라, 아까부터 고열을 동반한 몸살과 각혈까지 해 대고 있다. 때때로 환각이라도 보이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허공에 손짓을 해 대기까지 한다.
나는 이게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한창 과로해서 나자빠졌을 때 경험해 봤다.
필요 이상으로 온몸의 마력을 반복적으로 끌어내는 바람에,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꼬여 버렸던 기억이다. 완전히 바닥난 마력이 다시 몸에서 회복되면서 원래 흐름을 찾지 못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당시엔 몇 날 며칠을 누워 있다가, 끝끝내 루시가 자기 마력으로 내 몸의 꼬인 마력을 끊어 내 버려서 해결해 줬다.
상당히 난폭한 해결책이었으나, 어쨌든 꽤나 효율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허, 허윽… 꺼헉….”
숨이 멎어 들어가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내는 루시를 벽에 기대어 둔 채, 나는 얼마 남지도 않은 몸의 마력을 이끌어 냈다.
그대로 루시의 명치 언저리에 손가락을 댄 채 눈을 감고 집중하니, 루시의 마력이 느껴졌다.
완전히 바닥난 마력이 다시금 회복되면서, 몸 여기저기의 흐름을 타고 난반사 되는 탓에 마력이 제 길을 못 찾고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신체의 회복 체계와 마력의 회복 체계가 잘 맞물리지 않은 것이 핵심 원인이다. 어쨌든, 일단 엉켜 버린 마력을 풀어내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루시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 올려 루시의 몸에 엉킨 마력을 풀어내었다.
나라고 해서 지금 남 몸 상태를 걱정할 때는 아니다. 나도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루시는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확실히 죽는다.
그대로 몸의 힘을 이끌어 내서 겨우 루시의 마력을 원래 흐름으로 되돌렸다.
이제 막 회복되기 시작한 미약한 마력이지만, 루시의 마력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양이 막대하다. 그 약간의 흐름을 비틀어 꺾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운을 거의 다 소진해야만 했다.
“허억… 허억….”
완전히 지친 내가 눈을 치켜뜨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루시의 호흡도 꽤나 안정되어 있었다. 컥컥대며 피를 뱉던 때와 다르게, 꽤 안정된 감각으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때마다 폐도 안정적으로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일단 큰 위기는 겨우 넘겼다.
그다음은 루시의 한쪽 팔에 가득한 화상이다. 붉게 피어오른 상흔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불꽃 모양을 형상화해 놓은 듯하다.
막 생긴 화상이니만큼 그 격통이 상당할 것이다. 아직 완전히 고통이 가라앉지도 않았을 타이밍이지만, 일단 남아 있는 열을 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상처는 평생을 가겠지만, 그래도 대처를 잘만 하면 손을 못 쓰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빙결계 마법으로 얼음을 불러내는 게 최고겠지만, 내 영역 밖의 힘이다. 나는 일단 바람 마법을 일으켜서 어떻게든 루시의 피부 표면을 식히고, 덩달아서 루시의 이마에 손을 짚어서 열을 쟀다.
천천히 루시의 호흡이 더 안정적으로 변해 간다. 천천히 상태가 안정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콰앙! 콰아아아앙!
입구 광장 쪽에서 실베니아가 날려 대는 원소 마법의 소리가 들려왔다.
예니카에게는 최대한 버티다가 도주하라고 말해 두었지만, 역시 그조차도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미 한번 예니카의 도주를 허용했던 실베니아다. 두 번, 세 번 허용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예니카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정말 잡기 힘들다. 그 수많은 정령들을 전부 제압하는 건, 힘의 크기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시간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일단 루시의 몸상태가 안정 됐으니, 다시금 출발해 볼까 하던 시점이었다.
―탁.
루시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멀쩡한 손을 들어서 열을 재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끌어 내려서 자기 뺨에 가져다 댄다. 마치 손바닥의 온기를 느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리곤 멍한 목소리로… 은은하게 이야기한다….
“꿈은 아니네.”
“…….”
“네가 살아 있단 사실이 꿈일까 봐, 지금 보고 있는 게 주마등일까 봐… 걱정했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나 잘 살아 있다.”
“응.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생뚱맞은 말을 하기에 그 의미를 물어보려 했으나, 질문도 하기 전에 대답이 먼저 흘러나온다.
“나, 죽으려고 했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죽음을 불사하지 않으면 막질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죽으려고 했어.”
루시 메이릴은 애초에 동귀어진을 노렸다.
그렇게 해도 실베니아를 제압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하기 위해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에 의미가 되어 줬잖아. 네가.”
“…….”
“그러니까 너를 위해 죽어도, 나름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았을까. 괜찮게 살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의외로 죽는 게…. 그렇게 안 무서웠어.”
루시는 자기 뺨으로 내 손바닥을 훑으며 이야기한다. 피와 상처로 얼룩진 얼굴일지언정, 지그시 감은 눈이 편안해 보였다.
“신기한 기분이었어.”
“다시 한번 그런 생뚱맞은 소리를 하면 진지하게 정색할 거다, 잘 들어라.”
나는 루시의 뺨에서 손을 뗀 다음에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사조 반지를 꺼내어서 루시의 손가락에 찬찬히 꽂아 주었다.
이 반지가 어떤 반지인지는, 함께 반지를 가지러 유령 도서관에 내려갔던 루시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날 위해 죽을 생각을 하지 말고, 날 위해 살 생각을 해.”
“…….”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살아라. 방금도 말했잖아. 죽음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날 위하든 뭐든 간에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긴말 안 한다. 난 네가 꼭 살아남아 주길 바라고 있어. 네가 죽는다면,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낄 거야.”
일단 글래스트 교수의 불사조 반지는 루시가 가지고 있는 게 가장 효율적일 터. 허나, 지금 당장 루시는 마력이 꼬이고 만신창이 상태이기까지 해서 이 반지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기도 힘들 것이다. 조금은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사이에 쓸데없는 생각을 하거나, 의지를 잃지 않도록 나는 확실히 단언해서 이야기했다.
“날 위해 살아 줘.”
루시는 그 말을 듣고, 어울리지도 않게 동공을 확 늘리더니.
반지를 받아들이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그 루시 메이릴이 이런 얼굴을 하는 광경을 보면 누가 됐든 간에 까무러치게 놀랄 것이다.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이, 그리고 자기 손에 꽂힌 반지가 믿기질 않는다는 듯이 쳐다보며… 한계까지 늘린 동공으로 내 얼굴을 휙 올려다본다.
“지금 당장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겠지만, 마력이 조금 회복되고 나면 그 반지가 큰 도움이 될 거다. 네가 가지고 있어. 아마, 내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라서… 이런 식으로는 끝까지 도망 못 갈 거 같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테니까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하지만… 이 반지는 네 비장의 무기잖아….”
“말했잖아. 한 번 더 말해 줘야 해?”
루시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한계까지 붉어진 얼굴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멍해져 가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곤, 읊조리듯이 대답했다.
“알았어.”
흘러내려 가는 피를 겨우 조금 회복된 마력으로 틀어막으며, 루시가 입을 앙다문다.
“널 위해 살게.”
“훌륭하다.”
나는 루시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어 주고서는, 격통이 가득한 몸을 어떻게든 일으켰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보니,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루시의 몸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륙의 역사에 다시 없을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벽에 기대어 앉혀 놓고 보니 이렇게나 작고 미약하다. 왜소한 몸집과 얇은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만 같다.
결국 한꺼풀 털어 내 놓고 보면 누구나 미약한 사람이다.
한계에 몰려 죽음을 목전에 두면, 결국엔 있는 힘껏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생물. 그게 사람이다.
찬찬히 몸을 일으켜서, 실베니아와 예니카가 대치하고 있을 입구 광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치광이 실베니아.
결국 일대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다. 가담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가담해서, ‘토벌’해야만 한다.
레이드라는 것도 결국엔 머릿수에 의해 그 난이도도 결정되는 법. 가능하다면 모든 전력을 다 끌어모으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콰앙! 콰아아아앙! 콰앙!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오필리스관까지 도주하려고 했던 참이었다.
이젠 다시 마물족에 의해 뒤덮일 거라 생각했던 하늘이, 이번엔 검붉은 마법진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루시의 마법진과는 그 성질이 판이하다. 생소한 형태의 마법진이었으나, 의외로 어디서 본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그 마법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순간 미간을 좁힌 채로, 입구 광장 쪽으로 얼른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 * *
― ‘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 ‘살려 주세요! 회주 대리님! 저… 팔이… 팔이…!’
― ‘상회 입구가 뚫립니다! 용병대원 절반이 당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비명인지 보고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로르텔 케헬른은 엘테 상회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렘린이 내뿜은 마력의 여파에 창문이 깨져 나가고, 기괴한 모양의 괴수가 그대로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로르텔은 빙결 마법과 중력 마법을 발현해 건물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마물족을 얼른 해치우고, 그대로 집무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뒤따라 들어온 리엔나 비서가 식은땀을 흘리며 로르텔의 표정을 살폈으나, 로르텔은 땀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창문 닫고 커튼 내리세요, 리엔나 비서.”
“네, 네헤엡!”
당황한 리엔나 비서는 얼른 시킨 대로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이윽고 로르텔의 집무실 안으로 혼란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다만, 이따금씩 폭발음이 밀려들어 오거나, 크고 작은 진동 따위가 느껴졌다. 밖이 얼마나 아수라장인지 충분하리만치 잘 알 수 있었다.
바로 방금까지 전투를 하다 들어온 로르텔은, 예니카의 정령으로부터 전달받은 서신을 집무용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우 숨을 돌릴 타이밍이 생겨,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깊게 내쉰다.
“회, 회주 대리님….”
리엔나 비서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로르텔을 불렀지만, 로르텔은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전달받은 서신의 내용을 곱씹는다.
오필리스관으로 지원을 와 줄 것.
대현자 실베니아가 부활해서 학사 내 강자들을 학살하는 중.
벨브로크 토벌에 도움이 필요함.
요약해 보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급박하게 써 내린 서신이었는지 최대한 간략하게 축약되어 있었다. 집결해 달라는 것과 벨프로크 토벌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실베니아에 대한 내용은 무슨 소리인가 싶다.
허나, 필체를 보면 에드 로스테일러가 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일수록 일단 확실하게 믿고 따라 주는 것이 맞다.
혼돈만이 가득한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
누가 됐든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지옥도 속에서조차, 로르텔은 침착하디 침착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정신력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다.
“오필리스관으로 지원을 가려거든, 이 상회 지부 건물을 포기해야만 하겠죠.”
상회 지부 건물이 초토화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내부 창고에 저장된 재고 자산 등의 현물 자산을 전부 잃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상인 목숨 수십이 날아간 마당에 그런 자산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엘테 상회 쯤 되는 상회의 지부 창고에는 천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귀중품들이 가득 쌓여 있다.
설령 지부 방어를 포기한다고 쳐도, 피해 없이 오필리스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여러모로 보나 너무 리스크가 큰 선택이다.
그럼에도, 로르텔은 일단 에드의 요청대로 오필리스관으로 향할 계획을 수립한다.
아무런 해결 방안도 없이 그냥 지부 건물을 방어 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밑도 끝도 없다.
차라리 근본적인 위협인 벨브로크를 해결해 버릴 생각을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 방법론을 제시한 자가 에드 로스테일러라면… 생각보다 걸어 볼 만한 도박일지도 모른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금발의 사내를 생각해 본다.
매번 그 사내를 떠올릴 때마다 로르텔이 느꼈던 위화감은, 다른 무대에 서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이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제 삶을 꾸려 가기 시작한 뒤로, 로르텔은 언제나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되도록 그의 옆에서 그의 길을 따라 걷고자 하였으나, 언제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엇갈림이라는 게 로르텔의 가슴에 진득한 위화감으로 남아 있다.
나란히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에드는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와 자신 사이에 어떤 거대한 가림막 같은 것이 서 있는 느낌이 드는 날이 많아진다.
로르텔 케헬른은, 메인 시나리오에 속한 주인공 세대의 인물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무대의 아래에서 빛 받는 일조차 없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 간극이라는 것은 미약한 것 같기도, 막대한 것 같기도 하다.
로르텔은 자세한 사정 같은 것은 모른다. 그러나 직감만큼은 타고난 인물이다.
문득 환상 같은 게 눈앞에 아른거려, 로르텔의 불안감을 자극할 때도 있다.
그것은 꿈일까, 아니면 환각일까.
테일리 맥로어가 걷는다.
검집을 꽉 움켜쥐고, 다부진 표정으로 의지를 간직한 채 맨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 옆에 그의 동반자이자 연인인 아일라가 나란히 걷는다. 그 뒤로 굳건한 의지를 배운 황녀 페니아가, 문명의 흐름에 익숙해진 직스가, 겁쟁이 기질을 이겨 낸 클레비어스가, 사람의 깊이를 깨우친 엘비라가 걸어 나간다.
각자의 시련을 겪고, 이겨 내고, 성장해서 굳건해진 ‘주인공 세대’가 위풍당당이 걸어 나간다. 쏟아지는 찬사의 박수 속에서 영웅의 길을 걷는다.
로르텔 케헬른은 그 맨 뒤에 서서, 그 영광스럽고 멋진 주인공 세대의 일원으로서 뒤따라 걸어 나간다.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들과 스쳐 지나간다.
나아가는 방향은 정반대다. 위풍당당하지도 않고, 대단하다고 뻗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박은 채 걱정에 찬 퀭한 눈을 뜨고선… 테일리와는 정반대 방향을 향해 스쳐 지나간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은 물론이고, 박수받는 일도, 찬사를 받는 일도 없다.
그 뒤로 예니카 페일로버가, 루시 메이릴이, 클라리스가, 다이크 엘펠란이,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가….
무대 바깥으로 내려온 ‘엑스트라’들이 뒤따라 지나간다.
문득 스쳐 지나간 무리를 뒤돌아본다. 로르텔의 눈에 보이는 그들은, 찬찬히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서 있는 무대가 다르다.
그곳은 애석하게도 로르텔의 무대가 아니다.
더 많은 빛을 받고, 더 많은 찬사를 받으며, 결국엔 원하는 바를 이루고 행복해지는 길을 걷고 있으나.
그 길엔, 에드 로스테일러가 없다.
“회주 대리님!”
그 순간, 리엔나 비서가 부르는 사이에 확 정신이 들었다.
리엔나 비서는 함부로 생각을 정리하는 로르텔의 집중을 깨지 않는다. 그만큼 알려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너무 정신을 집중한 것인가, 겨우 의식을 찾은 로르텔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엔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창문을 열었는지, 창밖으로 거대한 그림자 같은 형상이 보였다. 이윽고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마법진까지 눈에 들어오자… 그 거대한 그림자 형상의 정체를 순식간에 깨달을 수밖에 없다.
저 거대한 그림자 형상은… 이미 한번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예전에 봤을 때는 일부였을 뿐이다. 온전한 형태로 강림한 것을 본 적은 없었기에, 침착한 로르텔조차도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예니카 페일로버는 실패로 인해 무너져 버린 소녀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잔뜩 사랑도 받고, 본인도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그 끝에 기다린 결말은 실패로 얼룩져 있었다.
그대로 좌절감과 절망감에 잡아먹혀, 졸업하는 그날까지 무기력하게 생활하다… 조용히 소식이 끊겨 버린 소녀.
그것은, 실베니아가 관측한 모든 미래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예니카 페일로버가 경험한 실패는, 그녀의 기질과 가치관만으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베니아의 눈앞에 조금씩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형상의 그림자는… 그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법진은 예니카가 벨로스페르에게 지배당했을 때 구현했던 거대 소환진이다.
예니카의 역량으로는 온전하게 구현할 수도 없었으며, 설령 지금 기량이라 할지라도 온몸의 마력 회로를 다 태워 먹어 버릴 각오를 해야만 하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법진이었다.
정령술의 극의에 달한 예니카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수준의 법진.
설령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자기 이성과 의지를 빼앗겨 버릴지도 모르는 도박 수.
그러나, 그 힘의 강대함만큼은 다른 어떤 속성의 정령을 데려와도 비할 수가 없다.
휘몰아치는 그림자가 악마의 형상을 이루며, 조금씩 거대해진다.
수십 겹으로 겹쳐진 마법진 위에서, 지팡이를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예니카 페일로버. 그녀를 내려다보는 실베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런 미래는, 단 한 번도 읽어 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도래해 있는 미래다.
극한의 극한까지 와서 예니카 페일로버가 생각한 것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켄섬을 지켜 내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예니카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역린을 찌르는 듯한 행동을 스스로 자행한다.
실패의 경험이, 가슴에 깊이 남은 트라우마가 마음을 긁어내 버릴 듯하지만… 예니카 페일로버는 의지가 담긴 두 눈을 지그시 뜬 채 실베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연분홍빛 머리칼의 절반은 새하얗게 물들어 버린다.
피부를 타고 어둠 정령 특유의 각인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온다.
그러나, ‘의지’는 잡아먹히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어둠 정령의 힘에 이끌려, 통째로 잡아먹혀 버리는 일은 없다.
몸에 부하가 올라오고, 어둠의 각인이 끊임없이 제 사고를 파고들려고 하지만… 예니카는 끝끝내 그 어둠 정령의 힘을 완전히 제압해 내고, 통제해 낸다. 불사조 반지의 힘을 빌리는 일조차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온몸의 마력 흐름이 요동쳐 불타 버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자기 기량 이상의 정령을 휘두르려거든, 제 몸을 깎아 먹는 수밖에 없다. 마치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서 불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예니카의 눈에 굳건한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에 어둠이 드리운다. 광장에 서 있는 높다란 첨탑보다도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세상을 통째로 잡아먹어 버릴 듯이 똑바로 선다.
어둠.
실베니아가 경계하고 또 경계하던, 그 인간의 원초적 공포.
그것을 통제해 낸 예니카 페일로버가 똑바로 선다.
이르기를, 신화 시대의 암흑.
최고위 어둠 정령. 글라스칸의 포효가, 생활동 전체에 퍼져 나간다.
* * *
오른산 꼭대기.
갈음의 제단.
그 먼 옛날, 대현자 실베니아가 스스로의 마력을 갈음하기 위해 구현해 놓은 거대 마도구.
그 제단의 앞에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막대한 마력의 흐름을 끌어낸 채,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로브 자락 아래로 짧게 깎은 머리와 구겨진 주름살이 보인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갈음의 제단에 새겨진 각인에 계속해서 마력을 부어 넣고 있다.
사내의 양팔은 마법 쇠사슬에 의해 칭칭 감겨 있었다.
주변은 마물족의 시체로 가득하다. 사내의 옷도 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대로 위로 뻗은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사내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계속해서 마력을 퍼붓는다.
허나, 이제 슬슬 한계가 올 듯하다.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사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를 악문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도 다시금 평정심을 다잡는다.
실베니아 아카데미 최후의 교장.
오벨 포시어스가… 멸망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