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5)
벨브로크 토벌전 (13)
푸른색 물감 한 방울이 미온수 위로 떨어졌다.
물속으로 떨어진 물감 한 방울은 처음엔 그저 작은 흔적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조금씩 컵 안쪽으로 퍼져나가더니, 이리저리 세력을 늘려가다가 이윽고 컵 전체의 물을 파랗게 물들인다.
자그마한 한 방울. 처음엔 그 정도뿐인 시작이었으나, 끝날 즈음엔 컵 안의 세상을 아예 다른 풍경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컵 안에서 흔들리는 물이 어떤 식으로 요동칠지, 그 안에서 덩달아 흔들리는 물감이 어떻게 퍼져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같다. 이 자그마한 물감 한 방울에서 시작된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자그마한 그 변수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나비 효과는 결국 돌고 돌아서 먼 미래를 아예 틀어놓는 것이다.
‘저는 이 황실 연구소에서, 이 물감과도 같은 존재를 마련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왔던 거에요. 리엔펠 황태자님.’
대현자 실베니아의 말이었다.
실베니아의 연구 때문에 크게 다치고 만 리엔펠 황태자는, 그 대가를 삼아 대체 실베니아가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관측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실베니아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 세상은 언젠가 예고도 없이 끝나버리는 닫힌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관측조차도 되지 않는 영원한 암흑. ‘절벽지점’.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미래의 가능성이 모두 끝나버리고, 어떤 방식으로 발버둥 치든 간에 반드시 맞이해야만 하는 약속된 어둠.
그 원초적 공포를 함께 관측하자, 리엔펠 황태자는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관측해봐도 그 미래는 바뀌지 않았어요. 원인조차도 측정할 수 없는 그 깊은 어둠으로부터 어떻게 이 세상이 달아나야할지, 저는 그 방법만을 강구해내기 위해 이 황실 백합궁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에요.’
리엔펠 황태자가 벌벌 떨며 이야기한다.
‘그럼… 방법을 알아냈느냐?’
‘아니요.’
그 말에 리엔펠 황태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만다.
‘다만, 가능성이 있는 여러 가설들을 세워보았을 뿐이에요. 제가 내린 결론은, 지금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닫힌 세계라는 거에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나아가더라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라는 거죠.’
‘내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질 않는구나…’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이 가설이 맞다면… 어떻게든 발버둥 칠 수단은 있어요. 이 세계 안의 가능성만으로 절벽지대를 벗어날 수 없다면, 새로운 변수를 일으켜 줄 세계 밖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의 흐름과는 아예 관계없는 세계의 인물이요.’
실베니아는 눈을 감는다.
평생을 걸쳐서 연구해왔던 성위 마법을 통해 관측한, 아득한 저 별의 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상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낀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작용을 할지는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니, 어떻게 구현될지도 함부로 속단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 복속되지 않은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돕지.’
‘고마워요. 황태자님. 하지만,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많지가 않아요.’
성위 마법이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학문이다.
실베니아야말로 세계 최고의 성위 마법학 권위자이지만, 그럼에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막대한 마력과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연구해야할 마법식들도 아직 잔뜩 남아있어요. 그리고 설령 시도한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있는 시간으로 불러낼 수 있을지 어떨지도 잘 몰라요. 본인을 직접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세계의 누군가에게 빙의되는 형태일지… 지금 이 장소에 나타날지, 아니면 머나먼 미래나 과거에 다른 장소에 오는 것인지… 연구해야 할 게 너무 많고, 그걸 확정지을 수 있을지도 잘 몰라요. 시공간을다루는 성위 마력의 힘은 원래 통제 불가능한 것이니까…’
아무도 해보지 않은, 세계의 섭리에 도전하는 마법이니까.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는 탐구의 영역이기에…
‘그리고, 설령 불러낸다 할지라도… 그게 정말 세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조차도 몰라요.’
‘그럼…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니냐…! 그런 식으로 어떻게 이런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라도, 손에 닿는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봐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삶이란 이다지도 고귀하고, 생이란 이다지도 소중한 것이다.
죽음만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계의 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운명에 순응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는 인류가 그 약속된 종말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포에 떨며 도망치지도, 우는 소리를 하며 한탄하지도 않는다.
어둠의 공포가 정신을 잠식하려들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털어내버린다.
웃는 얼굴로 대중 앞에 나선다.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확신한다. 평화로운 태평성대는 계속될 것이라 이야기 해준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섭리에 저항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대중들 몰래 리엔펠 황태자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계산식을 정립한다.
라멜른 산맥지대까지 나가서, 산꼭대기에서 별을 관찰하며 마력의 흐름을 역산한다.
이따금씩 성위 마력을 동원하여 다른 세계를 관측하기도, 이 세계의 약속된 종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한다.
이윽고 긴 세월을 바쳐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불러일으키는 소환진을 완성시킨다. 허나, 관측되는 세상의 흐름은 바뀌는 게 없다. 여전히 미래는 끝없는 어둠뿐인 절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래도 실베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소환진을 구현해낸다. 연구를 계속 더 해가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내서 시도해보지만, 여전히 미래의 흐름은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몇 번이고 시도해보지만, 결국 리엔펠 황태자가 먼저 좌절하고 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시도해봐도 안되지 않느냐! 역시 아무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세계의 섭리에 저항하려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어!’
‘황태자님…’
‘부질없다! 부질없어! 이런 건 아무 의미 없어…!’
리엔펠 황태자는 결국 좌절과 절망에 빠져, 책상을 내리친다.
그대로 팔을 밀어서 책상 위에 있던 여러 연구 서적과 서류들을 전부 밀어버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친다.
‘세상을 구할 구세주라고 널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너밖에… 너밖에 이 약속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다 끝난 거였어! 우리는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어!’
머리를 뜯어대는 황태자를 보면서 실베니아는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 아득한 절망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리엔펠 황태자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깊은 어둠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보다도 자신의 수명이 먼저 다 하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명감만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공포였다면, 당장 방에 틀어박혀서 몸을 덜덜 떠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터다.
그러나, 아직 움직일 시간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엔펠 황태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허무가 황태자를 잡아먹기 시작한다. 자신이 어떤 생을 살고, 얼마나 공을 일구어내든, 결국 모두 어둠에 잡아먹혀 버릴 미래라는 생각이 들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린다.
실베니아조차도 황실에서 내쫓아 버린다.
황권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역사 속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결국 황실에서 쫓겨나던 날, 실베니아에 대한 소문이 대중들 사이에 돌았다.
아무리 대현자 실베니아라 할지라도, 결국 황태자를 직접 다치게 한 중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고.
아켄섬으로 유배를 당하는 실베니아를 보며, 그렇게 수군거렸다. 이 정도면 오래 버텼다고.
실베니아는 굳이 진상을 설명하진 않았다.
다만, 아켄섬으로 떠나며 오히려 활짝 웃었다.
몇 번이고 관측했던, 결국 끝없는 어둠으로 수렴하는 머나먼 미래.
그 과정에서 수없이 보았던 다양한 형태의 흐름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관측했음에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음을… 누군가가 기억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지팡이를 휘두른 대현자 실베니아의 눈이 휘둥그레 진다.
보란 듯이 도래해, 생활동 입구 광장을 휘어감는 거대한 어둠의 거인이 팔을 휘두른다. 마력이 생활동 광장 일대를 뒤덮으며, 어둠속에서 솟아오른 묵빛 칼날이 실베니아의 방어 법진에 날아와 막힌다.
– 카가가가가가각!
그대로 글라스칸이 그 육중한 몸을 똑바로 일으키자, 그림자 형태로 된 악마의 형상이 완전히 눈에 들어온다.
눈속임이 아니다. 실제로 눈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트라우마를 혼자서 극복해낸 예니카 페일로버가, 온전히 자기 힘으로 세상에 현현시켜놓은 최고위 어둠 정령이다.
잠시 당황한 실베니아의 몸에 어두운 기운의 마력이 직격한다. 그대로 실베니아는 첨탑에서 나가 떨어져, 광장 옆에 있는 자그마한 상점가 건물에 쑤셔박혀버린다.
– 쾅!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겨우 몸을 가눈 실베니아가, 여전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는, 단순히 저 거대한 악마 형상의 괴물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끝끝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제자 필로나 블룸리버의 발명품 델 헤임 모래시계.
약자의 전투방식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결국 힘의 차이에 찍혀 눌려서 패배해야 했을 루시 메이릴.
큰 실패를 경험하고 결국 다시는 극복해내지 못할 좌절 속에 빠져있었을 예니카 페일로버.
백합궁 연구실에 틀어박혀, 몇 번이고 성위 마법을 통해 들여다 보았던 수 천 가지의 미래 흐름 속에서…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었던 변수들이 속속들이 고개를 내민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의 실베니아가 고개를 든다.
이상한 일이다.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많다.
머리를 잠식하는 어둠의 공포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젓지만… 실베니아는 그 탁한 동공을 흔들거리며 이야기한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그리 스스로 되뇌어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상했던 것.
무너진 트릭스관의 외벽을 기대고 앉아,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를 노려보던 그 금발의 사내.
그 눈빛에서부터 흘러나오던 독기가, 기억에 각인 되어, 끊임없이 실베니아의 의식을 자극한다.
머나먼 세월 동안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정신을 부여잡고, 광기가 다시 밀려 올라온다. 마력을 끌어올린 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상공으로 부유하자, 마법진 안에서 지팡이를 꽉 움켜쥔 채 앉아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가 보인다.
언제나 순하고 착해보이기만 하던 눈매는 그 어느 때보다 공격적으로 실베니아를 쳐다보고 있다.
머리 여기저기가 새하얗게 새어버렸고, 피부를 타고 어둠의 각인이 밀려 올라고 있지만… 두 눈은 굳건하다.
실베니아가 고위 원소 마법을 발현한다. 불, 바람, 물, 땅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마법들이 요동치며 글라스칸을 향해 날아든다.
어둠 마법이 발현되어 대부분은 무력화되어 버리지만, 몇 몇 마법은 유효타로 들어간다. 글라스칸의 몸에 직격한 원소 마법들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일대를 빛으로 뒤덮는다.
허나, 상대는 최고위계의 원소 정령이다.
그 정도 수준의 공격으로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실베니아를 향해 날아드는 어둠 마법이 이윽고 광장에 뒤덮였다.
– 콰광! 쾅! 쾅! 화아아아악!
피어오르는 검붉은 불꽃은 세상 모든 것을 공평하게 태워버린다. 오로지 글라스칸만이 사용할 수 있는 흑염(黑炎)주문.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마력까지도 전부 공평하게 태워 없애버리는 순수한 어둠의 화염이다.
그러나, 실베니아의 성위 마법에는 대응할 수 없다.
순식간에 몸에 둘렀던 ‘공간 장막’을 깨고 나온 실베니아는 멀쩡한 상태로 다시금 첨탑의 꼭대기에 자리한다.
저 거인을 상대하는 것은 그래도 꽤 애를 먹어야한다. 특히나 원소 상성을 잘 안타는 어둠 정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못 이기는 건 아니다. 손이 좀 많이 갈 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느새부턴가 입구 광장에 물이 가득 깔려있다. 깊게 깔린 어둠 때문에 너무 뒤늦게 눈치챘다.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광장 표면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 넘치는 물이 조금씩 일대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앉아 있던 예니카 페일로버도 거의 무릎 언저리까지 물에 잠겨있었다.
정령식 – 수원 발현.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의 정령 레이시아가 쓰는 것과는 그 규모부터가 다르다.
──어떤 곳에 도래하든지, 그곳이 곧 바다다.
그리 일컫어지는 전설 속의 정령이 있다. 심해 속의 거대 괴수들을 잡아먹고, 암초조차도 씹어삼켜버린다는 신화 속의 거대 정령이다.
최고위 물 정령 프리데.
불사조 반지의 힘을 빌려서 소환했음에도, 일주일 넘게 고열에 시달리고, 시력까지 잃었어야만 했던 그 거대한 고래의 이름이다.
신화시대의 전설적인 정령사 ‘델크롬’이, 한 번에 두 개체의 최고위 정령을 여유롭게 불러낸 적이 있다는 전승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업적은 신화적 영웅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제아무리 정령사의 기질을 잘 타고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손을 모아서 지팡이를 꽉 안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예니카의 모습은 진심이다.
평범한 인간인 자신이 역사적 인물인 실베니아 로베스테르의 발을 묶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런 게 가능한 시점에서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 것인지, 예니카는 피를 쏟으며 정신력을 끌어모을 뿐이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뚝뚝 떨어지는 핏줄기 속에서도, 눈은 부릅뜨고 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꽉 잡은 채로, 온 몸의 정령 감응이 불타오르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 우우우우우웅.
그것은, 정령이 내는 소리라기 보단 거대한 범선이 내는 고동 소리에 가까웠다.
거대한 광장의 바닥을 뚫고 올라와 하늘로 도약하는 고래의 크기는… 어지간한 건물 몇 개 정도는 가볍게 압도한다.
프리데의 강림으로 인한 물줄기가 피어오르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듯 했다.
프리데는 현현되는 것만으로도 수백 마리의 하위 정령을 끌고 나타난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고래 옆으로 피어오르는 정령들의 군세를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모선을 지키며 군림하는 함대를 보는 듯 하다.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막대한 고래 정령과 함께 피어올라, 하늘을 뒤덮으려 드는 글라스칸의 주변으로 날아오른다.
이곳은 현세인가, 아니면 정령들이 모여있는 정령계인가.
그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숫자의 군세가 세상을 뒤덮는다.
하늘에 가득한 마물족들이 휩쓸려 나가면서, 포효하는 벨브로크를 배경으로 온갖 원소 정령들이 날아오른다.
실베니아는 부서진 첨탑에 서서 그 광경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니카 페일로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피가 쏟아져 나오면서, 고열이 밀려올라온다. 오감이 전부 타는 듯한 감각에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래도 몸에 힘을 풀지는 않는다.
마력이 다 바닥난 것은 물론이요, 최소한의 생명 유지에 동원되어야 할 힘까지 전부 써버리기 직전이었다.
컥컥대는 이유는 호흡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이 거의 보이지도 않고, 촉각조차도 미약해졌다.
그래도, 예니카 페일로버는 쓰러지지 않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일삼아가면서까지 버티는 이유는 그냥 하나뿐이다. 지켜야만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실베니아가 알고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프리데의 포효소리와 함께, 글라스칸의 최고위 어둠 마법이 실베니아를 급습한다.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공격들. 그리고 화력과 물량 조차도 상식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있다.
실베니아는 일단 성위 마력을 끌어올렸다. 세계의 섭리를 무시해버릴 수 있는 성위 마력의 힘이라면, 제아무리 상식선을 벗어나 있는 규모의 정령술이라 할지라도 전부 제압해버릴 수 있다.
대현자 실베니아는 애초에 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마법사다.
세상을 다 뒤덮을 듯이 솟아오르는 정령들의 군세들조차도, 결국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압해내냐의 문제에 불과하다.
첨탑을 중심으로 검붉은 마력이 휘감긴다.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성위 마법을 수십 번을 넘게 쓰고도, 여전히 마력의 양은 마를 기세가 보이질 않는다.
벨브로크의 포효 소리가 아켄섬을 뒤덮으며, 쏘아낸 브레스가 상공의 정령 수백 마리를 훑고 지나간다. 정령이 가득한 하늘을 우주공간처럼 유영하고 있는 프리데는 꼬리를 한 번 휘저어버리는 것으로 마물족의 무리를 쓸어 담는다.
그 속에서, 실베니아가 눈을 부릅뜬다.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어둠의 광기가 귓가에 속삭인다.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는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과도 같은 죽음을.
부질 없는 삶 속에서 끝없이 고통 받을 뿐인 악순환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구원의 손길을.
긴 세월 동안 어둠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끝끝내 버텨내지 못한,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깊은 좌절이 마력을 끌어내게 만든다.
최고위 성위 마법 – 허무(虛無).
일대를 뒤덮는 성위 마력은 아켄섬 전체로 퍼져나간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 이만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수준이다.
지팡이를 들어올리고,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실베니아는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허무의 마법은 그 범위조차도 아득하게 넓다.
성위 마법의 대가이자 희대의 천재인 실베니아조차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성위 마법이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후유증이 대단히 심하다. 그렇기에 실베니아 조차도 되도록 사용을 지양할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마법이었다.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저 엄청난 규모의 정령 군세조차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힘.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부정당해 버리는, 세계의 섭리를 손에 쥐고 흔드는 그런 힘이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고 있다. 허나, 그조차도 실베니아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터.
편안한 안식을 주겠다는 그 일념.
그 하나만으로, 실베니아는 눈을 치켜뜨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모든 것은 촛불이 휙 꺼져버리듯이, 순식간에 끝이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화아아아아아아아악!
– 콰가가각!
성위 마력은, 성위 마력으로만 대항할 수 있다.
그 대전제만큼은 단 한 번도 무너져 내린 적이 없다. 그 어떤 상성으로도 받아칠 수 없는 성위 마법의 절대성을 부정할 수 있는 건 끽해봐야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뿐일 것이다.
그러나, 실베니아의 성위마력이 엄청난 규모의 성위 마력에 찍어눌린다.
아켄섬 상공으로 솟아올라 정령들의 군세를 뒤덮으려 들 정도로 막대한 규모다. 그런 수준의 마력을 뒤덮을 수 있는 성위 마법 사용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실베니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마력의 근원을 바라본다.
반파된 생활동 외곽 건물의 꼭대기.
피를 뒤집어쓴 루시 메이릴이, 겨우 몸을 가눈 채 서있다.
뚝뚝 흘리는 피사이로 꽉 쥔 손엔 불사조 반지가 빛을 내고 있다. 그 원리 또한 성위 마법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실베니아는 잘 알고 있다.
미래의 마력을 현재로 끌어와 억지로 마력량을 부풀리는 마도구.
그것을 왜 루시 메이릴이 가지고 있는가.
이 또한, 단 한 번도 관측한 적이 없는 미래일텐데.
똑같은 마도구라고 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효력은 궤를 달리 한다.
마도구 따위 없이도 세계를 호령하던 천재 루시 메이릴이, 미래에 약속된 마력을 현재로 끌어모은다.
그조차도 며 칠, 몇 달 차원의 양이 아니다. 최소 1년, 혹은 3년, 넘어서 5년까지.
단 며칠 만에 몇 백명 분의 마력을 회복하는 루시 메이릴이, 몇 년 간을 끌어모아야만 취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란 얼마나 막대할 것인가.
루시 메이릴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는다.
앞으로 몇 년을 마력 없이 살아야 한다는 그 고단한 미래 따위, 고려 대상에 들어가 있지도 않다.
지금 당장 살아남는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 일념으로 똘똘 뭉친 피칠갑의 소녀가, 그 소름끼칠만큼 침착한 눈동자를 들어올린다.
반지로 쏠리는 마력의 양이 이미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모으고 또 끌어모으는 행위를 반복한 끝에, 결국 그 막대한 양의 마력을 버텨내지 못한 반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루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베니아를 상대하려거든 얼마나 많은 마력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부족하다.
– 우우우우웅
벨브로크의 포효소리와 함께 프리데의 고동소리가 하늘에 울린다.
마력을 끌어올린 거대 거인 글라스칸이 마물족들을 쓸어버리며, 사악한 웃음소리를 상공에 퍼뜨려 나간다.
그리고, 실베니아가 눈을 잠시 감았다 떴을 때…
아득히 저 편 멀리에 있던 루시 메이릴이 코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손 끝에 마력을 끌어모은 루시 메이릴이 얼굴을 들이밀며 이야기 한다.
“그 할아범이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어.”
존칭 따위는 벌써 그 사이에 내다 버린 것일까.
참으로 루시 메이릴 다운 그 태도에, 실베니아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자기는, 정말 최악의 스승을 만났다고.”
실베니아를 회상하며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그 늙은이의 모습을 기억한다.
루시에게는 언제나 인자하고 자상했던 글록트지만, 유독 실베니아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 할 때면 말투가 퉁명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필시, 자기 삶에서 만나 보았던 최고의 스승을 회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 콰아아앙!
거대한 양의 성위 마력이 때려박히자, 실베니아는 그대로 첨탑에서 다시 나가떨어져 버린다.
옆 건물에 그대로 쑤셔박혀버리지만, 마력은 여전히 넘쳐 흐른다. 그럼에도, 실베니아는 조금씩 움직임이 굼떠지고 있었다.
실베니아의 기억 속 편린이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공허한 삶 속에서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린 소년 마법사를 만났던 기억이다.
평화로운 아켄섬에서 따분한 듯 바닷가를 내려다보던 거대한 늑대 정령의 기억도 있다.
학당을 차리고 칠판과 책상 뿐인 단출한 교실에서 마력식을 가르치던 기억도 내심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그런 삶도 살았다.
언제나 백합궁 연구실과 리엔펠 황태자의 집무실을 오가며 거창한 미래 걱정만 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흙먼지 속에서 피어오르는 기억은, 실베니아가 발버둥쳐온 기록이다.
– ‘미래라는 것은 변하는 일이 없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을 것이다. 우린 이제 끝났어!’
– ‘이딴 부질 없는 발버둥은 그만해! 우리는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절망의 외침을 내지르며, 리엔펠 황태자가 책상을 발로 차서 넘어 뜨린다. 공포와 허무에 휩싸인 채, 이 모든 게 부질 없다며 머리를 쥐어 뜯는다.
글라스칸의 어둠 화살 수백개가 때려박힌다. 실베니아는 건물 외벽에 쳐박힌 상태에서도 재빨리 방어 법진을 발현해 전부 막아낸다.
허나, 이어서 루시가 뛰어들며 날리는 후속타에 방어 법진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그러면서도 뇌리를 파고드는 좌절의 기억이, 실베니아를 다시금 좀먹으려 든다.
더 이상 희망을 가져봤자 의미가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어왔던 그 목소리가 다시금 사고를 차단하려고 했다.
마력을 다시 끌어올린 루시에게 고위 원소 마법을 때려박으며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음 성위 마법의 방향을 모든 물량을 책임지고 있는 예니카의 본체에게로 향한다.
정령사의 최대 약점은, 정령술을 사용하고 있는 본체를 제압해버리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시 메이릴은 온 몸의 성위 마력을 끌어내어, 실베니아의 마법이 나아가는 방향을 틀어버린다.
반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루시의 발버둥은 전부 유효타로 들어가고 있다.
실베니아의 마법을, 이를 악물고 저항해내고 있다.
실베니아의 원소 마법을 전부 무력화 시켜버린 루시가, 커다란 마녀 모자를 꾹 눌러 쓰며 다시 도약한다.
실베니아의 주변에 구현된 수많은 폭발 법진이 일제히 폭발해댄다. 실베니아는 재빠르게 마력을 놀리며 모든 충격을 받아냈지만, 이어지는 프리데의 최고위 물 마법에 대처해내지는 못한다.
프리데의 고동 소리가 다시 한 번 아켄섬의 상공을 가른다.
최고위 물 마법 ‘해저압’.
프리데가 있는 곳은, 그곳이 곧 바다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퍼져나가는 심해의 수압이 일대를 뒤덮는다. 마력이 닿는 모든 곳이 감당할 수 없는 압력으로 뒤덮힌다.
실베니아의 자그마한 몸집으로는 저 아득한 심해의 압력에 직격당하면 즉사다. 다시금 마력을 끌어내어 어떻게든 버텨내보지만, 그 압력에 못이겨 바닥에 쳐박히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 콰아아앙!
편린만 겨우 남아있는 실베니아의 이성이, 건물 잔해 사이에 파묻혀 있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평생토록 책상에 앉아, 미래를 엿보며, 종말을 관측해왔던 그 세월은 정말로 무의미 했느냐?
삶을 뒤덮는 허무에 저항하는 것은,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진즉 해뒀다고 생각했으나.
저 먼 과거에서는 한 번도 관측된 적 없었던 미래의 모습이.
예상치 못한 힘으로 저항해대는 지금의 저 존재들이.
수십 수백 번의 좌절을 경험한 실베니아에게 새로운 의문을 던진다.
수 천 갈래로 뻗어져나가는 모든 미래 흐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관측했음에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흐름의 갈래가 있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미약하고 부질 없어, 저 거대한 절벽 너머로 뻗어져 나가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싶을 정도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하면.
그 모든 미래의 흐름을 뒤집어 꺾은, 이 세계의 변수는.
닫혀 있는 미온수 속에 떨어진 물방 한 방울은, 그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애시당초, 답은 정해져있었다.
– 콰악!
반대쪽 건물 잔해 속에서, 피칠갑이 된 에드 로스테일러가 몸을 일으킨다.
흙먼지 속을 절뚝거리면서 몸을 다잡은 그의 한 손에는 단검이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에는 조금이나마 남은 마력이 휘감겨 있다.
후두둑 떨어지는 흙먼지 속에서 귀기 어린 눈으로 실베니아를 노려본다.
그의 목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그렇게 복잡한 것도, 대단한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는 설명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다만, 숨을 훅 몰아쉬며 고개를 똑바로 세운다.
피로 얼룩져 있지만, 그 의지가 꺾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