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6)
벨브로크 토벌전 (14)
늦은 밤, 아켄섬에 단출하게 꾸려놓은 연구실.
실베니아 로베스테르가 책을 편다.
평생토록 연구해왔던 성위 마법에 대한 기록을 모아놓은 저서. 후일 ‘현자의 봉서’라 일컫어지며 연구의 대상이 되는 그 마도서의 집필을 끝낸 참이었다.
이제 곧 시간 감옥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어, 어둠이 도래할 미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간다.
긴 어둠과의 싸움이 되겠지만,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복돋아 볼 뿐이다.
모든 가능성이 닫힌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든 열어 젖혀줄 존재를 불러내려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가능성을 쫓아 살았다. 머나먼 별 빛 너머의 세계에서 고독을 곱씹고 살아가던 한 사내를 불러내보려고, 평생을 성위 마법을 연구하며 살았다.
그 노력의 결과를 확인할 수 조차 없었다.
사내가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도래할 것인지, 언제 도래할 것인지, 그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것인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지금의 위치에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뿐이다.
저 먼 별 너머의 세계를 관측해서 바라본 그 사내에 대해선 단편적인 정보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수많은 건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기계 장치 같은 것에 둘러쌓여 살아온 그 남자는 언제나 목숨의 위기 속에 있었다.
숱한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놓지 않았다. 몇 번의 좌절을 경험하고, 비탄과 슬픔 속에 잠겨 있던 적이 있더라도, 끝까지 주어진 삶을 살아내려 했다.
어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던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실베니아가 관측할 수 없더라도.
그 언젠가 이 세상에 도래해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가능성의 물꼬를 터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사내를 향해 깃펜을 써내려간다.
반드시 살아남아, 무대의 마지막에 서있어줄 그 사내를 향해 경의를 담아 이야기를 띄운다.
현자의 봉서, 서문.
자신의 인생을 오롯이 담은 저서의 초입에, 그에게 향할 말을 천천히 써내려갔던 것이다.
– ‘살아남은 그대여.’
잔해 속에서 일어선 에드 로스테일러가 기합을 내지른다.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몸을 일으키려면, 악이라도 내질러야만 했다.
처절함 속에서도 의지는 불탄다. 하늘을 가득 메운 정령들의 군세를 배경 삼아, 주인공도 뭣도 아닌 삼류 엑스트라가 몸을 딛고 일어선다.
–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그 긴 여정의 끝이, 당신이 생각했던 형태와는 많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바닥까지 마력을 긁어모아, 다시 한 번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를 현현시킨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오고, 귀에서도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흐릿해진 눈가로 실베니아를 똑바로 노려보는 와중에도, 거대한 바람의 늑대는 몸을 일으킨다.
실베니아는 그 늑대의 형상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단 사실에, 숨을 삼키고 만다.
–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당신은 기나긴 여정을 어렵사리 달려왔고, 결국 그 끝에 당당히 살아남아 서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실베니아가 움직임을 버벅였다. 평소 같았으면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냈을 터이지만, 뇌를 뒤흔드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사고를 틀어막는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대로 원소마법을 발현한다. 기초 원소 마법일 뿐인 바람 칼날이 실베니아의 오른팔에 적중한다. 한 줄기 핏방울이 허공에 휘날렸다.
실베니아는 그런 기초마법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 자신의 오른 팔에 생긴 상처를 움켜쥔다.
하늘을 뒤덮는 고위 마법의 물결조차 그녀에게 상처를 낼 순 없었다.
허나, 똑바로 선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베니아는 떨리는 동공을 멈출 수 없었다.
아마도, 모든 것이 뒤바뀐 이 미래 흐름의 가운데에 서있던 자는… 바로 저 남자 에드 로스테일러다.
–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어 행복했나요?’
유배지였던 아켄섬의 연구실에서, 이따금씩 창밖의 별하늘을 바라보며 써내려갔던 그 서문의 기억이.
– ‘아니면, 고통과 고뇌뿐인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가요?’
그 언젠가 모든 것이 틀어막힌 미래를 어떻게든 뚫어내줄 사내가 도래해주리라 믿으며 잠에 들었던 나날의 기억들이.
– ‘삶의 이유는 찾았나요?’
– ‘가치는 있는 삶이었나요?’
–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요?’
– ‘무엇을 성공했고, 무엇을 실패했나요?’
– ‘기뻤을 때의 희열은, 좌절했을 때의 절망은, 당신을 어떻게 만들었나요?’
끝까지 살아남아 도착해주리라 생각하며, 머나먼 미래의 사내에게 띄워올렸던 편지의 내용들이 뇌리에 각인된다.
사내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무대의 마지막까지 도착했다.
여정은 길었고, 고되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죽음을 받아들인 적 없다.
– ‘대체 왜 우리는, 끝나면 모두 허무해질 뿐인 이 삶에 이리도 집착하면서,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걸까요?’
테일리와 아일라, 직스는 엘비라를 데리고 오필리스관을 나선다.
프리데가 날아오르고, 글라스칸이 날뛰고 있는 광장 쪽을 바라보고선 달려 나간다.
조연 벨 마이아는 그들을 보내며 생각한다. 부디 그들이 무사하길. 끝까지 버텨내고 살아남아 저 재앙을 끝내주기를.
– ‘끝이 정해진 삶 속에서, 부질없이 그 여정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검귀 클레비어스가 마물족 무리를 뚫어내며 광장에 도달한다. 혼자서 수백마리의 마물족을 베어버린 그는, 피에 취해 솟아오르는 광기에 이끌려 광장 내부로 달려들어간다.
그를 뒤따르던 다이크는 주먹을 꽉 쥐고 달려나간다. 전투부 학생들 또한 클레비어스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마물족들을 제압해나가며, 전장을 향해 달려나간다.
– ‘우리는, 어째서 이리도 살아남으려고 부질 없는 발버둥을 치게 되는 걸까요?’
로르텔 케헬른이 상인과 용병대의 무리를 이끌고 전장으로 합류한다. 날아드는 마물족 무리들을 헤치우며, 마력을 이끌고 광장으로 전진한다.
반대쪽에서 다가오던 성녀 클라리스의 성당 기사단 무리들과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의사 소통을 끝낸 후 힘을 합쳐 광장 쪽으로 달려 나간다.
– ‘이 책은, 그 답에 대한 고뇌의 기록입니다.’
페니아 황녀와 셀라하 황녀가 갈라선다.
페니아는 벨브로크를 바라보고 있고, 셀라하는 황제를 부축하고 있다.
상황을 끝내려는 자와, 황제의 안위를 지키려는 자.
두 사람의 가치관은 명확하게 달랐지만, 무엇 하나를 집어서 오답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엇갈린다.
누군가는 주연이고, 누군가는 조연이었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행진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물밑에서 있는 힘껏 자기 삶을 살아내는 자들 또한 있었다.
비록 조명의 빛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확실히 있다. 으레 모두의 삶이 그렇듯.
광장에 접어든 타냐 로스테일러도, 마물족을 제압하며 학생들을 보호해보려고 길을 뚫는 칼레이드 교수도, 갈음의 제단에 묶여 마지막 남은 봉인의 편린을 잡아쥐고 있는 오벨 포시어스도, 마법부 학생들 무리를 지키고 있는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도, 모두 정령들과 성위 마력으로 가득차있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언제부터인가, 벨브로크의 포효소리에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살아남겠다는 일념만으로.
– 콰앙!
메릴다의 바람 마법에 실베니아가 얼른 대처해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에 잠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으나, 후속타까지 허용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진 않았다.
그대로 지팡이를 들어올려 성위 마력을 더 끌어 모았으나, 첨탑에서부터 뛰쳐내려온 루시가 바닥에 착지하며, 고위 번개 마법 ‘천벌’을 내려 꽂아버린다.
– 후우욱, 콰앙!
번개의 여파가 사라지기도 전에, 정령식 ‘어둠 칼날’이 땅에서부터 솟아나 실베니아를 꿰뚫으려 했다.
허나, 실베니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반응속도로 방어법진을 발현해내 전부 튕겨내 버린다.
초췌해진 예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벌써 시력을 잃어버렸는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지만, 마력의 흐름만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실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파악이 끝난 것이다.
실베니아는 에드의 정령식 사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하늘로 날아오르려든다. 성위 마력을 끌어모아 공간 그 자체를 도약하려는 순간이었다.
성위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다시 한 번 루시가 끌어올린 마력이 찍어눌러버린다.
“어디 가.”
시야를 뒤덮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핏줄기 속에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루시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허리를 푹 수그린 채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그녀는, 의식이 거의 없는 것 같지만 확실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미래의 마력을 모두 끌어모은 탓에 정신을 잃기 직전이다. 그럼에도, 실베니아 만큼은 확실하게 제압하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있다.
실베니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지팡이를 다시 들어올렸다.
일단 성위 마법을 사용하려면 루시부터 제압해야 했다. 실질적으로 실베니아의 성위 마력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루시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루시는 빈사 상태다. 제대로 된 원소 마법을 한 번 직격시키기만 해도 그대로 제압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일반 마력을 끌어내려는 순간이었다.
– 화아아악
예니카가 마물족들을 틀어막고, 루시가 실베니아의 성위 마력을 틀어막은 그 잠깐의 순간.
오롯이 성위 마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순간,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억지로 끌어낸 성위 마력을 이용해 ‘강제 집결’을 발동시킨다.
성위 마력은 성위 마력으로만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실베니아의 성위 마력은… 이미 의식을 다 잃기 직전의 루시가 억지로 찍어누르고 있었다.
실베니아의 몸이 에드 로스테일러 쪽으로 다시 빨려들어간다. 강제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실베니아의 어깨에 다시금 단검을 박아넣어버린다.
“크, 으앗…!”
고통의 비명을 내지를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에드는 단검에 몸의 무게를 실었다.
이젠 몸의 힘이 다 빠져버려서, 무게를 끌어넣는 게 아니면 유효한 타격을 주기 힘들었다.
“허, 어헉…”
단검이 박힌 어깨에서부터 밀려올라오는 고통이 실베니아의 뇌리를 엄습한다.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어깨를 보면서, 다시 마력을 끌어내기도 전에 에드는 실베니아를 넘어 트려서 위에 올라타버린다.
“커, 카학…!”
단검에 찔린 채로 바닥을 구른다. 상처가 헤집어지면서 실베니아의 입에서 격통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대로 실베니아의 어깨에서 단검을 뽑아버린 뒤, 다시금 온 몸의 힘을 끌어내서, 양손으로 쥔 단검을 내려찍으려 든다.
그 순간…
– 카앙!
실베니아가 겨우 들어올린 지팡이에, 에드의 단검이 막혔다.
실베니아는 단검에 찔린 상처 때문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고, 에드는 이미 몸을 한계의 한계까지 혹사시킨 상태였기에 힘을 더 실을 수가 없었다.
기묘하게 맞춰진 힘의 균형 탓에, 에드의 단검이 더 나아가지 못한다. 실베니아의 미간을 조준하고 있는 단검이 덜덜 떨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실베니아의 얼굴 위로 에드의 피가 뚝뚝 떨어진다.
흘러내리는 앞머리의 음영 아래로 보이는 에드의 눈빛은, 여전히 생존에 대한 의지로 가득하다.
덜덜 떨리는 단검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힘싸움을 했다.
마력을 끌어모으겠답시고 두 팔에 조금이라도 힘이 풀리면, 순식간에 단검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실베니아는 일단 이 단검을 어떻게든 흘려내고자, 어깨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격통을 참은 채 힘의 균형을 옆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허나, 에드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서 힘이 거의 들어가지도 않는 몸으로, 이를 악문 채 실베니아를 향해 단검을 밀어냈다.
그 눈빛은, 실베니아 또한 알고 있다.
그 먼 옛날, 실베니아가 보았던 사내의 기록들이… 천천히… 기억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사내는 전쟁터를 떠돌던 군인이었다.
총알들이 오가는 최전선에서 수많은 인연을 만났다.
국적도 다르고, 전쟁터에 뛰어든 목적도 다른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때때로 웃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으며, 다시 화해 하기도 했다. 전우를 넘어, 가족 같은 사람이란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리고, 그 인연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피가 강처럼 흘러내리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사내는 머리를 움켜쥐며 총성 속에서 벌벌 떤다.
함께 보급용 빵을 나눠먹던 친구는 머리가 꿰뚫린 채 바닥을 구르고 있다. 그가 보물처럼 여기던 가족사진이 든 아뮬렛은 진흙바닥에 파묻혀 있다.
제법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군 장교는 사내를 풀숲 속에 숨기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사망한다.
장교의 희생 덕에 사내와 동료는 함께 숲속에 숨어서 생존한다. 그러나, 크게 다친 동료는 거동이 불편해서 움직일 수 없다. 사내는 어떻게든 동료를 살려보고자 등에 업고 한밤중의 숲을 가로지르지만, 결국 그 동료는 사내의 등 위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이젠 사내에겐 동료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애초에 가족도 없었다.
공허한 삶 속에서, 사내는 총구를 자기 머리에 들이밀어 본다.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해봐야 힘들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젓고 이를 악물며 총구를 내린다.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생환해, 부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또 다른 전장에 투입되고,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정을 쌓고, 그들이 죽는 모습을 본다.
때로는 동료를 구해내고, 때로는 구해내지 못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간다.
생과 사의 경계 속에서 사내는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사내는 결국 전쟁의 물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그 공을 치하받았지만, 총알을 맞은 허벅지엔 다시는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상병으로서 사회로 돌아온 그는, 평화로운 모국의 품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도록 명받는다.
평생을 총성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높이 솟아오른 빌딩과 평화에 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모국의 도심은 익숙치 않았다.
평화로운 도시의 거처 속에서 잠에 들려하면,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눈꺼풀 너머로 떠오른다.
새벽에 눈을 부릅뜨고 거실로 나와 냉수를 들이키고, 괜시리 솟아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낸다.
그렇게 한참을 환각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는 길고 어두운 밤을 어떻게든 버텨낸다.
그렇게 버티고 있다보면 아침해는 뜬다.
자그마한 오피스텔 건물의 창문 너머에도 새벽의 빛은 돈다.
어두운 밤이 길어도, 아침은 반드시 온다.
사내는 책을 읽는다.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듣는다.
커피를 마신다.
살아남은 전우와 즐겁게 통화를 한다.
재활 운동을 한다.
방을 청소한다.
게임을 한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한다.
키우는 강아지에게 사료를 챙겨준다.
샤워를 한다.
옷을 갈아입는다.
새로운 가구를 조립한다.
고장난 청소기를 수리한다.
우편물을 확인한다.
대충 차린 밥을 먹는다.
이따금씩, 비 내리는 숲 속에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던 때를 떠올린다.
어렵사리 겨우 내렸던 총구를 생각하며, 사내는 사색에 잠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딱히 살아갈 이유가 보이지 않는 삶이었음에도 끝을 내지 않았다.
그 뒤로 삶이 뭐 대단하게 변한 것도 없었다.
인생이 뒤집히는 일도, 고질병처럼 안고 살아가던 고민이 모두 해결되는 일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삶은 이어졌다.
그래서, 이어져가는 삶을 그냥 살았다.
그제서야 사내는 깨닫는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평화도, 어느샌가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만끽하고 있다.
하루종일 총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던 죽은 전우들의 모습도, 어느샌가 편안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회상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그리 바뀌지는 않았지만, 어느틈엔가 정신을 차려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거였다.
– 카앙!
– 푸욱!
에드 로스테일러의 단검은, 실베니아의 반대쪽 어깨에 파고들어간다.
제 아무리 에드 로스테일러가 빈사 상태라고 할지라도, 무게를 실어서 밀어내는 단검을 왜소한 체구의 실베니아가 막아내기는 쉽지 않다.
조금씩, 상처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단검의 날을 밀어내면서…. 천천히 실베니아가 입을 연다.
“있잖아.”
그 놀라우리만치 청량한 목소리에, 에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실베니아를 본다.
언제부터였을까.
광기 어린 눈동자에 이성의 빛이 돈다. 새하얀 뺨에 뚝뚝 떨어지는 에드의 피가, 그대로 방울져 흘러서 바닥으로 향하고 있다.
어둠 속에 갇혀서, 긴 여정을 항해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물었을 질문.
차마 대답을 듣기가 겁이 나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 말을 에드에게 건넨다.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까.”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었다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끝까지 빳빳이 고개를 들고 살았던 삶은.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 깐 채로, 실베니아를 향해 뭐라 말을 하려다 만다.
뭐가 됐든,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그냥 입 발린 말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에드 로스테일러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자그마한 긍정만으로도,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는 눈을 지그시감고 눈물을 흘렸다.
단검을 쥔 에드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천천히, 에드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벨브로크의 포효가 한 번 더 하늘을 뒤덮으며, 마력포가 아켄섬을 훑고 지나갔다.
서쪽 해안지대부터 가로지르며 섬을 초토화 시킬 기세로 뻗어나온 그 힘은… 전투가 한창인 입구 광장쪽까지도 그 여파가 미쳤다.
에드 또한 그 여파에 휩쓸릴 뻔 했으나, 실베니아와 에드의 주변에 순식간에 마력이 피어오른다.
고위 성위 마법 ‘공간 장막’에 의해 뒤덮인 두 사람은, 그 충격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