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8)
에필로그 (1)
사내는 나무등걸에 가만히 앉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셔츠와 비단조끼, 린넨 바지, 푸르스름한 외투에 얇은 마법사 로브.
답답한 복장이지만 단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달리 보는 눈이 없으니, 조금은 편한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었다.
연초를 피워 올린다. 선임 교수와 어울리다가 배운 나쁜 습관이었지만, 생각을 정리할 때는 이만한 게 또 없다.
그리고는 멍하니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보고선 생각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절벽지점. 갖가지 생각들이 요동치지만, 일단 확실히 해야할 건 정해져있었다.
사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물음이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가 실베니아 아카데미로 찾아온 것은 2년만이었다.
“결국 졸업 이후에도 여길 또 오게 되는구나…”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짐을 챙겨서 내리자, 저 바다 너머의 아켄섬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재작년에 벌어진 대참사로 맥세스 대교는 무너져 내렸지만, 그 이후로 새로 시공된 블룸리버 대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연식이 오래된 맥세스 대교에 비해서 훨씬 더 널찍하고 깔끔한 다리다. 블룸리버 가문에서 지원을 받아 세워진 다리인만큼, 그 이름부터가 블룸리버 대교였다.
트레이시아나의 뒤를 이어서 초로의 여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블룸리버 가문의 가주 시니르 블룸리버.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온 그녀는, 실베니아 아카데미로 향하는 대교를 바라보고는 이야기했다.
“시공 자체는 꽤 잘 된 듯 하구나. 완공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간 너무 바빠서 이제야 확인해보는군.”
“어머니… 아니, 가주님은 본가 일 때문에 바쁘셨으니까요. 직접 확인하러 오지 못하는 것도 별 수 없죠.”
“그래도 가문의 돈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간 사업이니만큼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단다. 뭐… 이제는 자주 보겠지만.”
시니르는 가죽을 덧댄 외투를 걸친 다음, 옷 매무새를 깔끔히 정리했다.
그녀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할 연금학 교수였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재작년의 대참사로 인해서 절반 이상의 교직원을 잃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교수진을 새로 꾸리기 위해 온갖 인사를 다 불러들인 것이다.
그 중에서 교직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부름에 응답했지만, 대부분은 거절했다.
큰 상처를 입은 실베니아 아카데미이니만큼, 향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어서 불안정한 자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간 쌓아놓은 이름값이 있어서, 여러 학회의 학회장이나 마탑주, 유명 기사단의 은퇴한 기사단장, 용병대장, 연금학 권위자 등이 새로운 자리를 채웠다.
시니르 블룸리버 또한 블룸리버의 가주로서 처리할 일이 많았지만, 슬하에 있는 딸들이 가문의 일을 잘 이어받아 처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교직을 손에 잡기로 했다.
성창룡 벨브로크가 날뛰던 그 참사의 현장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꾸려나가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2년 하고도 몇 개월이 더 지난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 피해는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시니르는 새로운 교수진 중에서는 거의 막바지로 합류한 입장이었다. 어찌보면 아카데미 복구가 끝난 뒤에 교편을 잡게된 첫 교수진이다.
7할 이상이 부서져내렸던 건물들도 황실과 상단, 교단의 지원을 두루 받아 전부 다시 세워졌다.
아예 새 것처럼 빛나는 건물들 덕에 오히려 새로운 전성기가 찾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상처 또한 남아 있었다.
블룸리버 대교가 끝나는 지점 즈음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있다.
재작년의 대참사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었다.
그들을 추모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비석은 크기가 몇 미터는 족히 넘어보인다.
그 커다란 비석에 빼곡히 채워진 이름을 보면서, 트레이시아나는 한숨을 푹 흘렸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네 입장에서는 썩 무거운 이름들이구나.”
트레이시아나는 2년 전의 참사 때 이 실베니아에 재학 중이었다. 졸업을 앞둔 상황인데다 학년 수석이었던지라 후배들을 최대한 살려보겠다고 뛰어다녔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많이 살리기도 했지만, 또 많이 죽기도 했다.
트레이시아나는 잠시간 비석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시원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어머…! 어머머! 시니르 선임 교수님이 오늘 부임하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죄송해요! 먼 길 와주셨는데! 지금 학사 인력이 많이 모자란데다 일정도 꽉꽉 차 있어서…! 아니,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되는 분인데… 제가… 제가 사과드릴게요…!”
시니르 쯤 되는 인사가 직접 교수로 부임해왔는데 맞이하는 인간도 제대로 없다.
보통 같으면 호통을 쳐야되는 상황일지도 모르겠으나, 신축 트릭스관의 상황을 보고 나서 시니르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 하나 바빠 보이지 않는 인간이 없었다.
전성기 때의 절반 좀 넘는 인력만으로 이 거대한 학교를 굴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예상보다도 빨리 정교수로 진급한 클레어는 서류를 잔뜩 안아들고 퀭한 눈으로 트릭스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사 실무도 함께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만큼, 시니르 교수를 안내하는 것은 클레어 교수의 일이었다.
“많이 정신 없어 보이는군요. 저도 빨리 실무로 투입되어야겠습니다.”
시니르는 예의 바르게 대처해주었다.
척 봐도 품위 있어 보이는 그 모습에, 클레어 교수는 갑자기 눈물을 핑 머금었다.
“시니르 선임 교수님은… 상식인이시군요…”
“…네? 제가 뭔가 했습니까?”
“아니요. 정중한 사과에 정중한 격려로 대응해주시니까… 어쩐지 눈물이… 나려 해서…”
대체 이 사람은 정교수 직위를 달아놓고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 것인가.
자세히 묻는 건 상처만 헤집는 행위가 될 것 같아서 시니르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 쪽은… 앗… 그렇구나. 트레이시아나 학생. 진짜 듬직해졌네요. 학생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어른스러워져서 못 알아 볼 뻔했어요. 그래봐야 2년인데… 사람이란 정말 휙휙 바뀌네요.”
“클레어 조교수님… 아니, 교수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 다고는 빈말로도 못하겠네요. 원래 이런 과도기일수록 업무가 많은 법이잖아요. 그래도 얼추 정리는 다 되어서 할만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트레이시아나 학생. 아참 내 정신 좀 봐. 학생이 아니지 이제.
클레어는 잔뜩 쌓인 서류들을 업무용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을 정정했다.
“트레이시아나 조교수.”
시니르가 자기 전용 연구실을 확인하러 간 동안, 트레이시아나는 클레어 교수를 따라서 업무 안내를 받으러 갔다.
가는 도중에도 이런저런 지시들을 내리며 개인 연구실에 도착한 클레어 교수는, 들어가자마자 창문부터 열고 환기를 했다.
조교수 시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은 수의 서류들을 보며 트레이시아나는 혀를 내둘렀다.
실 없어 보이고 매일 한탄이나 해대고 있는 철부지. 클레어 교수 하면 그런 이미지가 잡혀 있기 마련이건만, 실상은 혼자서 몇인분의 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조교수 티도 많이 사라져서, 이제 대부분의 일은 다 능숙하다. 수석 조교 아니스도 이제 졸업하고 없지만, 오히려 일처리 속도는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지도교수가 누구인지 아직 안내 안 받았죠? 트레이시아나 조교수.”
“네에… 클레어 교수님이 아니신가보네요?”
“저는 더 이상 누굴 책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아… 예…”
트레이시아나는 눈물이 핑 도는 클레어 교수를 보면서 안타까운 얼굴을 해보였다.
클레어 교수는 서류들 사이에 있는 특정 문건을 휙 꺼내들더니, 탁탁 털어서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아마 조교수들을 담당할 지도교수들의 목록인 듯 했다.
한참동안 리스트를 살피다가 이윽고 클레어 교수는 난처한 듯 웃었다.
“아하하, 트레이시아나 조교수도 좀 고생을 하겠네요.”
“네? 제 지도교수님이 깐깐하신 분인가요?”
“아뇨. 그렇다기보단…”
클레어 교수는 서류를 휙 돌려서 트레이시아나에게 보여주었다.
조교수 트레이시아나의 옆에 붙은 담당 교수의 이름은… 낯이 익었다.
– ‘에드 로스테일러’
“…어라?”
“아는 이름이죠?”
“분명 제가 졸업할 당시에 3학년이었는데…? 왜… 제 지도교수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거죠?”
클레어 교수는 어디부터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결론부터 휙 이야기하는 게 편할 듯해 입을 열었다.
“올해 초에 특임 교수로 선임 됐어요. 차기 황제로 내정되신 페니아 황녀님의 추천서에다가, 클라리스 성녀님의 추천서가 동시에 들어왔거든요. 졸업하자마자 정교수 직위 달고, 지금은 연차만 좀 쌓이면 바로 선임교수로 내정될 예정이에요. 속도만 보면 몇 년 안가서 학과장도 달 것 같고요.”
“그 나이에 선임교수라고요…?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인사네요…”
“참사 당시에 세운 공도 혁혁한데다가, 정령술이랑 마공학 분야에 있어서는 교수진들도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취를 이뤄냈거든요. 거기다가 성위학 분야에 있어서는, 사실상 독보적인 사람이니…”
정령학과 마공학 분야를 동시에 커버할 수 있는 교수 인력인데다가, 성위학까지도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출신 성분도 고귀하고, 학생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있으니…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서 허덕대는 학사 입장에서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 증거로, 학사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가면서까지 그를 잡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학사 차원에서 물밑으로 로스테일러 가문에 밑지고 들어간 다른 조건들이 더 많다는 소문도 돌았다.
소문에 불과하지만,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실권 중 많은 부분이 로스테일러 쪽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
20대 초반의 나이에 선임 교수. 트레이시아나는 조교수 신분인 자기 입장을 생각해보니, 그 차이가 실감이 나고 말았다.
쾌속 승진해서 가장 빨리 선임 교수를 단 글래스트 교수조차도 당시에 3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당시에도 파격적인 인사로 유명했다.
“후배였던 사람이 지도 교수가 되었으니, 트레이시아나 조교수도 좀 난처하겠네요.”
“아뇨. 그런 건 별로 신경 안써요. 애초에 공작가 자제 분이시고, 하대하는 게 오히려 더 불편했으니까요. 다만… 업무가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감이 잘 안 잡히긴 하네요.”
“사실 진짜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로 그거에요. 에드 로스테일러 교수님은 종잡을 수가 없는 분이거든요.”
“…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출세해서, 순식간에 클레어 교수와 동등한 위치가 되어 있었다.
사실 시간이 좀 더 흘러가면 에드 로스테일러는 더 위로 올라가 있을 것이 자명했다. 동등한 위치라는 것도 지금 잠깐의 일일 뿐일 터. 이미 그가 이룬 공이나 그에 따른 명예는 제국 여기저기에 유명하기도 했다.
신입생 후보들 사이에서는 실베니아에 오면 에드 로스테일러 교수를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교편에 관심이 없는 트레이시아나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업무는 다 깔끔하게 처리하시지만, 워낙 일이 많으셔서 그런지 잘 찾아뵙기가 힘들어요. 원래는 북쪽숲에 마련한 개인 연구실에서 잘 안나오시는데, 방학 기간 중엔 더 찾아내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요?”
“심지어는 학교 밖에 나갔다 오시는 일도 많으시고… 요즘에도 잘 안보이시는데… 방학 중에 로스테일러 본가에 다녀오신다고 전에 이야기 했던 거 생각해보면, 지금은 본가에 가 계실지도..”
“아니, 어디 가는지 이야기도 안하고 그렇게 막 돌아다니신단 말이에요?”
“…그래도 할 일은 다 하고 다니시니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애초에 위인이나 비범한 인물이랑 일한다는 건 원래 힘겨운 일이고요… 사람들이 다 자기만큼 능력있는 줄 아니까..”
일처리만큼은 확실한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학생 시절에도 그런 사람이었다.
트레이시아나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자기는 지도 교수를 잘못 만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전달해야할 서류가 세 개나 있는데, 트레이시아나 조교수가 이것 좀 전달해주세요. 북쪽 숲 연구실에 없으면… 저도 어디 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네에… 서류요…”
부임한 뒤로 처음 받는 업무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찾아내서 서류 전달하기.
“그 외에도, 4학년 학생들 졸업식도 준비해야하거든요. 막내 교수가 도맡아서 처리하는 일이니까, 트레이시아나 조교수가 한다고 봐야해요.”
거기다가 현 4학년 학생들 졸업식 준비하기.
“이, 이 정도 업무는 할 수 있어요.”
“그래요. 장하네요, 트레이시아나 조교수…”
클레어 교수는 트레이시아나를 보다가 잠시 아련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막 막내 교수로 부임해서 업무를 몰아 받던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느덧 자신이 업무를 몰아주고 있는 입장이 되어있으니, 세월이 참 무색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업무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트레이시아나는 전달받은 서류를 슥 살펴보았다.
“이 서류는…?”
“에드 로스테일러 교수님이 방학 중에 처리하실 업무 내역이에요. 사실 다 하실 필요는 없고, 셋 중 하나만 골라 하시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가요?”
“네. 하나같이 중요 업무들이긴 한데, 남은 방학 기간 안에 다 처리하긴 힘들거든요. 그래도 셋 중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마무리 해주셨으면 좋겠어서요. 이왕이면 방학 끝나기 전에요.”
그러고보면 방학 기간도 얼마 안남았다. 학사 일정을 보니, 신입생 선발 시험 마무리 하고, 졸업생들 보내고 나면 그 다음 바로 개학이다.
“신입생 선발 시험 업무를 도맡아 하시느라 바쁘시긴 하시겠지만, 그래도 짬을 내서 처리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군요…”
트레이시아나는 첫 서류를 펼쳐보았다.
“퓰란…?”
“아, 그거요. 목축의 땅 퓰란 아시죠? 그 낙농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요.”
“네에…”
“최근 학사 쪽 연구 인력팀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그 옛날에 유명했던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에 대한 기록이 그 쪽에서 끊겼잖아요.”
“티르칼락스라면… 산등성이만한 크기의 거대 곰 형상 정령… 맞죠?”
“네. 맞아요. 사실 학술 연구 분야는 처리 중요도가 떨어지는 업무긴 한데, 그래도 학술 분야 일을 제 때 처리하지 않으면 황실 쪽에서 감찰이 오거든요. 최소한의 연구 일은 계속 해야죠.”
클레어 교수는 다른 서류에 이리저리 싸인을 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최근에 퓰란 지방 쪽에서 티르칼락스의 기록에 대한 문헌이 발견됐다지 뭐에요. 정령학 분야의 대발견인 셈이죠. 지금 정령학 교수 중에 손을 쓸만한 분이 에드 교수님 정도니까, 혹시 일손 남으면 퓰란 지방으로 가서 알아봐주실 수 있냐고 학사차원에서 물어보는 거죠.”
“그런가요…”
“뭐, 딱히 위험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소한의 전투 능력은 갖추신 분이 가야죠.”
트레이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 뒤로 이어지는 다른 서류를 꺼내보았다.
이번에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무적인 내용의 서류들이었다.
“이건.. 상업도시 올덱…?”
“네. 그것도 아마 출장 요청일 거에요. 학술 연구가 아니라 물류 유통에 관한 실무 업무 거든요. 지금 학사 물류를 도맡아 담당하고 있는 엘테 상회 쪽이랑 유통 협상을 갱신해야 하는 시기라서요.”
“이걸 왜 에드 교수님이 처리하시는 거죠…?”
“에드 교수님은 상단 쪽에 인맥이 두루 넓으시거든요. 거기다가, 요즘 올덱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자주 들려서… 이왕이면 믿음직스러운 분이 출두하시는 걸 학사에서 희망하는 것 같아요.”
“심상치 않다니요?”
클레어는 깃펜으로 서류에 사인을 슥슥 해나가다가, 잠깐 고민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테 상회의 현 회주가 누구인지 아시죠? 슬로그 켈드럭스라고 하는 그 늙은 상인이요.”
“로르텔이 아니었어요?”
“로르텔 학생의 정식 직함은 ‘회주 대리’였죠. 로르텔 학생이 실베니아에 재학하는 동안 실질적인 회주 자리에 앉아 있어줄 얼굴이 필요했거든요. 올덱에 있는 엘테 상회 본점을 관리하려면 대리직함으로는 부족하니까요.”
로르텔에게 가담해서 황금왕 엘테를 밀어내고, 로르텔이 상도에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맡아둔 회주 자리.
“헌데, 로르텔 학생이 졸업하고 난 뒤로도 회주 자리를 반납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회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네요. 아마도, 올덱의 권력 균형을 재편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거겠죠.”
“그런 음습한 상인들의 이야기는… 저는 익숙치가 않아서…”
“저도 마찬가지에요. 확실한 건, 올덱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적어도 현지 인맥이 넓은 에드 교수님이 직접 가는 게 낫겠다는 이야기죠.”
확실히 이해갈만한 판단이었다. 다른 담당자를 배정해도 괜찮겠지만, 학사를 이끄는 입장에서는 확실한 일처리가 가능한 인력이 가는 게 나았다.
“그럼 마지막 서류는…”
“아, 그건 라멜른 산맥지대 쪽으로의 출장 요청서에요.”
“무슨 출장 갈 곳이 그렇게 많아요?”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은 요청 받는 일도 많은 법이잖아요. 그건 스카웃 쪽 일이에요.”
트레이시아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서류를 슥슥 넘겨보았다.
“절단자 젤란이라는 마법사 아시죠? 글래스트 교수님과 칼레이드 교수님, 두 분과 함께 아인족 전쟁에 참가하셨던 마법사 분인데… 최근에는 대마법사 글록트의 흔적을 좇아 라멜른 산맥지대에 출몰한다던데요… 그가 살아온 자취를 살핀다나 뭐라나…”
“이 분을 교수직으로 스카웃 할 생각인 건가요?”
“능력이 출중한 분이시거든요. 다만, 최근에 성위 마법 쪽 연구에 흥미가 깊으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학사 내 최고의 성위 마법 전문가인 에드 교수님께 설득을 부탁드리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지금 학사는 인력난이니까, 꼭 데려오고 싶을거에요.”
“그렇군요. 헌데, 설득한다고 오실까요…”
“글쎄요. 사실 지금 병상에 누워계시는 오벨 교장님이 직접 가시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움직이실 수가 없으니까요…”
클레어 교수는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외 성위 마법에 능통한 루시 학생은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은 학교를 떠나서 로스테일러 저택 쪽에 몸을 의탁했으니까… 역시, 결국은 에드 교수님이 적임이시죠.”
탐구자 글래스트, 무법자 칼레이드, 절단자 젤란.
젤란은 오벨과 함께 전쟁 시대를 살며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던 그 세 마법사 중 하나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클레드릭 수도원에 아인족 아이들을 맡긴 당사자이기도 하다.
“확실히… 셋 다 한 번에 처리하기엔 너무 빡빡하네요. 하나 같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에드 교수님을 발견하면 꼭 하나라도 잘 골라서 처리해달라고 말씀 드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정작 에드 교수님은 어떻게 찾아내야…”
트레이시아나가 그렇게 묻자, 클레어 교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북쪽숲의 개인 연구실을 찾아가보시는 게 제일 빠를거에요. 만약 거기 안 계시다면 학사의 다른 시설들을 다 찾아보시고… 만약, 아켄섬 안에 없다면… 방학 기간이기도 하니…”
“…?”
클레어 교수가 어렵사리 지은 미소가 어쩐지 불길했다.
그녀는 서류 사이에 끼어있던 종이 하나를 휙 꺼내서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제국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지도였다.
그 시점에서 트레이시아나는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호, 혹시…”
“여기부터.”
클레어 교수가 제국 중앙 언저리 부분을 쿡 집었다. 가주 타냐 로스테일러가 관리하고 있는 로스테일러 영지의 북쪽 끝.
“여기까지.”
그리고 그 남쪽 끝에 덩달아 붙어있는 페일로버 남작령까지.
“들러보시면, 아마 여기 중 어딘가에 계실 거에요.”
트레이시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애초에 클레어 교수가 아켄섬 내에서 그를 못 찾아냈다면, 트레이시아나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부임하자마자 첫 임무는, 곧바로 대륙 중앙까지 마차를 타고 며칠을 달리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막내 교수의 숙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