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49)
에필로그 (2)
“후우….”
마차에서 내린 트레이시아나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있는 상태였다.
한참을 마차를 타고 달려서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도착해 부임하자마자 받은 임무가, 로스테일러 영지까지 가서 에드 교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다 있나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시아나는 서류가 잔뜩 들어있는 목제 가방을 챙겨든 다음 로스테일러 저택 앞에 내렸다.
며칠동안 마차만 타고 있는 상태라 당장이라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일단 도착하긴 도착했으니 다행이다.
“…메뷸러 강림 때 많이 부서졌다고 들었는데, 여기도 그런 낌새는 더 이상 안 남아있네…”
로스테일러 저택은 크레핀이 관리하던 때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져 있었다. 사실 그럴만 했다.
위태위태한 시기가 있었으나, 결국 차기 가주 타냐 로스테일러와 그 오라버니 에드 로스테일러에 의해 이 공작가는 기사회생 하는 데에 성공했다.
제국 내 유력 세력에 의해 많은 비호를 받고 있는데다가, 원래 있었던 권위를 지켜내는 데에도 성공했고, 무력적으로도 강인한 사람을 많이 끼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로스테일러 공작가가 그 전성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느껴졌다.
“미리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갑작스럽게 블룸리버 가문의 영애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가.”
가신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낯이 익은 얼굴이 마중 나와 있었다.
너덧명의 사용인을 끼고 나와 정중하게 손님을 맞는 일은 보통 집사장 내지 메이드장의 역할이다.
“…벨 씨가 왜 여기서 나와요?”
“오랜만이십니다, 트레이시아나 아가씨. 오필리스관에서 계실 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어른스럽고 듬직해지셔서 알아보지 못할 뻔 했습니다.”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스카웃해간 거에요? 벨 씨를?”
“예? 아뇨, 그런 거창한 건 아닙니다만…”
로스테일러 저택에 오자마자 구면인 사람을 만나서 트레이시아나도 반가웠으나, 아무리 그래도 벨이 튀어나올줄은 몰랐다.
벨 마이아는 최고 등급 기숙사인 오필리스관을 관리하던 메이드 장이다. 자기 일에 자부심도 많고, 돈에 구애 받는 성격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스카웃 당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엘테 상회에서 그녀를 몇 번인가 빼내려고 했지만, 몇 번이나 실패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의 거처는 그녀 스스로 정한다는 그런 느낌이 강했다.
“사실… 스카웃 비슷한 제의가 많이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매번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로스테일러 공작가가 아니더라도요.”
“그런데 왜 여기서 집사장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게…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전 책임감이 좀 있는 편입니다. 제가 담당해야하고, 해내야할 일이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좀 책임져야겠다 싶은 일이 있는지라… 일단 오필리스관 쪽 일은 후임에게 맡겨놓고 이 쪽으로 나와 있습니다.”
메이드 장 벨 마이아는 사용인 신분이지만 실베니아 내부에서도 임원직 대우를 해줄만큼 유능한 인재다.
일단 꼭대기에 앉혀놓으면, 인사 관리, 재무 관리, 저택 관리, 가사 관리, 귀빈 응접, 심지어 사소한 정무는 대신해주는 데다가 꽤 높은 수준의 전투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참모로서는 이만한 인재가 없는지라 여러 귀족가나 유력가에서는 못 데려가서 안달인 인물이었다. 허나, 그런 인물일수록 더 신중하게 섬겨야 하는 인물을 고르는 법이다.
“지금은 타냐 로스테일러님과 에드 로스테일러님, 두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신분인지라 학사 쪽 일은 고문 정도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책임져야할 일이라는 게 뭔지는… 캐묻지는 않을게요. 일단 제가 마차를 너무 오래타서 힘든 상태거든요. 내부로 좀 들어가 쉬면서 용무를 이야기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트레이시아나는 서류가 잔뜩 든 가방을 사용인들에게 넘기고 땀을 닦아 내었다. 근 며칠간 이동 또 이동만을 한 상태다.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렇게 트레이시아나는 긴 말 하는 일 없이 벨 마이아를 따라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공작저에 왔으면, 그곳을 책임지고 있는 가주를 만나 인사를 올리는 게 예의다.
으리으리한 본관 하나와 작지 않은 별관 두 개,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큰 첨탑 하나로 이루어진 이 로스테일러 공작저는 전성기보다도 훨씬 더 거대해져 있었다. 방심하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대륙 최대의 공작가인데다가 최근에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권위까지 모여들어서, 사실상 클로엘 황가 다음가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거의 궁전에 가까운 크기의 저택 규모도 이해가 간다.
“저택에 귀빈 신분으로 오셨으니, 일단 타냐 주인님께 한 번 인사를 올리시지요.”
이 저택의 주인인 여공작 타냐 로스테일러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재학생이자 학생회장이다.
학기 중에는 주요 가신들에게 저택 관리와 가문 기본 업무를 맡기고 아카데미에 와있지만, 지금 같은 방학 시기에는 공작저에 틀어박혀 가문 업무를 처리한다고 한다.
몸이 두 개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일정이지만, 실제로 해내고 있는 걸 보면 타냐 본인도 엄청난 능력자다 싶었다.
“지금 로스테일러 공작저 내부에는 여러 귀빈들이 와계십니다. 트레이시아나 아가씨와 구면이신 분들도 계실 터이니, 혹시 마주치더라도 크게 당황하실 일은 없을겁니다.”
“귀빈들이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냥 공작저에는 늘 귀빈들이 드나듭니다. 틈만 나면 제국 전체에서도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휙휙 튀어나오는 곳이니, 항상 몸가짐을 주의하시는 편을 권장해드립니다.”
황실에서도 보기 힘든 귀빈들을 그냥 지나가다가 만나는 그런 장소.
메이드들 입장에서는 거의 지옥에 가까운 업무 환경이었다. 언제나 완벽해야했고,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서 메이드 장을 달고 있는 벨 마이아 또한 여간내기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 쯤은 트레이시아나도 알고 있었다.
“블룸리버 가문의 영애이신 트레이시아나 아가씨도 물론 크나큰 귀빈이십니다.”
혹시나 상대를 낮잡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느껴졌을까봐, 그렇게 덧붙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벨 마이아는 세심한 부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 처세술의 보유자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사실 전 오늘 블룸리버 가문의 영애로서 온 게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예. 저는 오늘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조교수로서 에드 교수님을 찾으러 왔어요. 슬슬 업무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트레이시아나가 조교수가 되었다. 그 사실에 일단 벨 마이아는 놀라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고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에드 주인님의 거취에 대해서는 저희 메이드들도 정확히 판단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네? 그래요?”
“예.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이시는 분이라, 갑자기 저택에 나타나는고 하면… 어느 순간 다시금 아켄섬으로 돌아가시곤 합니다.”
“아켄섬을 구석구석 뒤져보았는데도 보이질 않아서요. 그래서 찾아왔어요.”
“그렇습니까… 본래 주인님은 본인이 필요하겠다 싶은 일은 다 미리 처리해버리시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직접 발걸음을 하게 만들었군요. 주인님을 대신해서 사과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일단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벨 마이아에게, 트레이시아나는 괜찮다면서 난처한 듯이 손을 휘적였다. 제 주인에 대한 사소한 앙심 하나라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듯한 일처리는 일류 메이드 답다.
다만, 언제나 오필리스관을 책임지는 대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탓에, 누군가 한명을 콕 집어서 ‘주인님’이라며 따르는 모습은 또 신선하다.
설마 그 벨 마이아가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인재를 아래에 두고 다룰만한 그릇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유능한 참모는 때때로 제 주인조차 잡아먹는다. 그릇이 작은 자가 자기보다 그릇이 큰 자를 품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도… 아켄섬에 계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일단 로스테일러 공작저를 좀 찾아보는 게 맞겠죠. 제 생각보다도 더 넓어보여서, 쉽지는 않아보이지만…”
“사용인들에게 공지해 두겠습니다. 그럼 일단 타냐 주인님의 접견실이 있는 본관 쪽으로…”
그 때 였다.
본관과 별관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첨탑 광장. 사용인 너덧명을 끼고 서있던 두 사람이 본관 쪽을 보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마침 로스테일러 본관의 커다란 문이 열리고, 귀빈 한사람이 사용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땋아내린 연분홍빛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가신들 사이로 걸어나온 사람은 트레이시아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벨 마이아가 고개를 숙이고, 주변 사람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로스테일러 공작가를 지키는 가신들 중에서는, 그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지닌 정령사가 있다.
여남작 예니카 페일로버.
로스테일러 영지의 남단, 크로튼 산맥지대를 관리하며 일대의 영지민들에게 천사처럼 추앙받는 존재이자…
사실상 이 로스테일러 영지를 수호해내는 최고의 전력 중 하나인 소녀였다.
실베니아에 재학할 때에 비해서 앳된 모습은 좀 사라졌으나, 철부지 같고 활달해보이는 모습은 여전했다. 애초에 평민 출신인지라 영지민들에게 두루 인기도 많고, 그렇다고 해서 귀빈들 사이에서 나쁜 소문이 도는 일도 없다.
세상 모든 일에 활짝 활짝 웃어주는 천상 소녀. 그것이 예니카 페일로버를 처음 보고 트레이시아나가 내린 평가였으나,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모습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워낙 한결 같아서 오히려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어라, 트레이시아나 선배님!”
영지민들이 우러러보는 여남작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는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드레스 자락을 휙 잡아 올리더니, 종종 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뛰어내려왔다. 그 뒤를 뒤따르던 사용인들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얼른 따라붙었다.
“오랜만이시네요, 로스테일러 저택까진 어쩐 일이에요!”
예니카 페일로버가 아직도 트레이시아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감격이었다.
마법부 시절의 선배된 입장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교류가 있진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학창시절 선배였고, 지금은 자작가 영애 입장인 트레이시아나이기에 고개를 수그리진 않았다.
“예니카… 오랜만이네. 남작 직위를 받았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극진히 대접 받고 있을 줄은 몰랐어…”
“네에? 뭐어, 그… 로스테일러 영지 내에선 유독 특별 취급을 받는 입장이거든요…”
사실상 영지 수호의 최전선에 있는 입장인데다가, 타냐와 에드 모두의 비호를 받는 입장이다.
직위는 남작이지만, 두 사람의 비호 아래에 거의 공작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영지민의 사랑까지 두루 받고 있는 입장이기에, 예니카는 가는 곳마다 괜시리 낯 뜨거워서 고개를 푹푹 수그리곤 했다. 자기 이름을 연호하기라도 했다간 얼른 마차의 커튼을 치고 안으로 숨기도 하고, 사용인들의 극진한 대접에 몸둘 바를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가 팔을 걷어붙이고 세탁을 하거나, 설거지를 해대려고 해서 사용인들이 놀라 나자빠지는 일도 많다고 한다.
2년이면 슬슬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예니카는 본디 성품상 평민 티를 절대 벗지를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예니카 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트레이시아나는 오히려 안심을 하고 말았다. 예니카 본인에게는 실례가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타냐 주인님과 접견하고 오시는 길입니까?”
벨이 그렇게 묻자, 예니카는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냐가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벨 마이아가 한숨을 참았다.
트레이시아나가 옆에 있으니, 일단은 제 주인의 권위를 지켜준다.
하지만… 이미 트레이시아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타냐는 소문으로 도는 것처럼 완벽한 초인이 아니라는 것 쯤은… 학사 시절 때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깔끔하게 관리된 로스테일러 저택 한 켠에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예니카는 한 쪽 켠에 앉아서 어깨에 앉은 참새 모양 바람 정령의 부리를 툭툭 건드리다, 이윽고 손가락을 머리위로 올려 휙 날려보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상하리만치 정령들의 사랑을 두루 받는 소녀다.
“사실 로스테일러 가문에 가신으로 들어온 뒤로는, 항상 만나는 사람만 또 만나거든요. 오랜만에 동문을 만나니까 너무 반가웠지 뭐에요.”
예니카는 싱긋싱긋 웃으면서 트레이사아나에게 그리 이야기했다.
“그래?”
“네에, 물론 저한테 과분하리만치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긴 하지만요…”
디저트 트레이에 잔뜩 실린 다과들은 척봐도 고급품들이다. 잠시 에드를 찾으러 왔을 뿐이지만 이리 극진히 대접해줄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척봐도 일류 제빵사들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트레이시아나는 다과들의 품질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눈의 소유자였다.
“그나저나, 정말 대접받고 사는구나. 사용인들이 다 네 눈치를 보고 있는 느낌이야.”
“그렇죠…? 저도 걱정이에요. 사실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해 줄 필요는 없는데… 사소한 실수만 하더라도 죽을 듯이 사과를 하더라구요. 벌써 남작 직위 단지도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요…”
페일로버 남작령에 있는 개인 저택에서는 대체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인가. 거기까지 가면 아예 예니카가 저택의 주인이다.
이쯤되면 슬슬 예니카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기나 한 걸까.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 너무 칭찬 받고 사는 건 아닐까…”
“뭐어, 그런 고민은 하지마 예니카. 빈 말 아니고 정말 잘 어울려. 나보다 네가 훨씬 더 귀빈 같아.”
“그, 그래요?”“응. 아까 본관 저택에서 나왔을 때도 깜짝 놀랐어. 정말 무슨 공작 부인이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그 말에 갑자기 예니카는 얼굴을 확 붉히더니, 이야기 한다.
“고, 공작 부인이라니…! 그그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요!”
“…?”
“…”
“…”
그러더니, 예니카는 잠시간 주변을 휙휙 돌아보다가 은근하게 고개를 낮추고 작게 이야기했다.
“지, 진짜요?”
“뭐야, 그 반응은… 애초에 학창 시절에 너랑 에드는 사귀었던 거 아니었어?”
“그, 그런 건 아니었지만… 거의 그 준하는 관계였다고 할까, 아니었다고 해야할까… 워낙 에드는 바쁘니까, 그런 관계 규정을 강요하는 건 너무 앞서나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도 안 들었다가도…. 하는 그런…”
예니카가 얼굴을 훅훅 붉히며 그리 이야기하자, 트레이시아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해냈다.
애초에 이 여자, 착할 대로 착해 빠져서, 본인이 반했다 싶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스타일이다.
에드가 그럴 인간은 아니지만, 잘못하면 놀아날대로 놀아다가 야박하게 내팽개쳐지는 그런 비극 속의 여주인공이 되기 딱 좋다.
트레이시아나는 반달 눈을 뜬 채로 차를 한 입 머금고는 이야기 했다.
“그쯤 됐으면 슬슬 사귀어라 좀… 너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까지 왔는데 제대로 관계 규정도 안하는 남자는 쓰레기잖아 그냥…”
“에, 에드를 욕 하진 마세요…”
“…미안하게 됐네.”
사실 상대 남자가 그릇이 너무 큰 탓도 있다.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주인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남작 직위를 달고 있다고 해도 대등하게 대하기가 힘든 인물이다.
사실 에드와 예니카 사이에 권위 같은 걸 따질 것 같진 않지만, 그게 남녀 관계를 넘어서 혼인 관계가 된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슬슬 위기감을 느끼지 그래. 이제 출세할만큼 출세해버려서, 에드 교수님을 호시탐탐 노리는 작자들도 상당히 많아질텐데… 그 때가서 아 좀 더 적극적으로 굴어볼걸,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니?”
“그,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니까… 뭐라 말하기는 힘든데요…”
예니카는 고개를 쭈뼛거리다가 어렵사리 이야기 했다.
“확실히, 로스테일러 공작저에는 이런저런 여성분들이 많이 오가거든요…. 저도, 위기감 비스무리한 걸 느껴보기는 했어요…”
“그래? 그건… 확실히 장족의 발전이네.”
“헌데, 하나 같이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저번 주에는 클라리스 성녀님이 그냥 얼굴 한 번 보자는 느낌으로 오질 않나,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인 로르텔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질 않나…”
하나 같이 이름만 들어도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거물들이다.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위해 묵념을 했다.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기가 죽는다고 해야할까…. 에드가 워낙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되고 나니, 나 같은 거랑 어울리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
“그리고, 이건… 으음…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지 곤란한데…”
예니카는 다시금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 한다.
“고, 공작가의 주인쯤 되면, 혼자서 여러 여자를 취하는 일도 곧잘 있다고 하잖아요…?”
“…예니카…”
“그, 그런 눈으로 보진 말아주세요. 그래요, 에드가 막 그렇게 방탕한 성격은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혹시 그… 그렇게 되면… 나도 거기에 낄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면서 또 안하자니 좀 그렇고,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니 너무 좀 그렇고… 애초에 내 도덕관이 따라가질 못하는 느낌인데… 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미리 생각해두지 않으면…”
“…”
횡설수설하는 예니카를 보며, 트레이시아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애초에 스스로 첩으로 들어가려는 행동을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출중한 능력에 비해 자존감이 낮은 예니카의 성품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내가 함부로 확신해서는 안되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에드 교수님한테 있어서 예니카 너는 충분하리만치 특별한 존재야. 좀 더 자존감을 가져도 돼.”
“그, 그, 그,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고고 고마운데요… 헤헤…”
괜시리 입꼬리가 휙휙 올라가는 예니카를 보며, 트레이시아나는 한탄했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반려가 되고자 생각해야지. 솔직히 말해서, 예니카 네가 드러누우면서 나 좀 봐주세요 하면 에드 교수님은 당장에라도 널 봐줄걸.”
“그렇긴 한데, 그럼 에드가 곤란하잖아요…”
“…”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에드한테 폐를 끼치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이왕이면 도움이 되고 싶고요…”
그 백지 같이 순수한 성품을 모르진 않는다. 그렇기에 트레이시아나는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다.
속물인 자신에게, 이토록 천상 소녀인 예니카는 너무 상성이 안 좋다…!
“그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예니카 네 자유겠지. 그거에 뭐 왈가왈부하진 않을게. 다만, 다른 여자한테 에드 교수님을 빼앗기고 나서 질투에 빠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그건…”
예니카도 뭔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는 것인지, 섣불리 트레이시아나의 말에 대답하진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의 저택에 온갖 여성들이 드나든다고 한다. 심지어 몇 몇은 진지하게 에드를 잡아채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트레이시아나도 눈치채고 있다.
사실 에드가 여복이 많다는 사실 정도는 예니카도 인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예니카만큼 교감을 쌓아올리진 못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또 안심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누구보다 예니카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안녕.”
멍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휙 돌려보았다.
메이드 둘의 보조를 받으며 나타난 그 조막만한 소녀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재학했다면 그 누구도 모를 리 없는 인물이다.
희대의 천재 마법사, 루시 메이릴.
지금은 실베니아를 관두고 로스테일러 저택에 몸을 의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루, 루시?”
“응. 안녕.”
– ‘블룸리버 가문의 영애님이십니다. 조금 더… 각별하게 교류를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좀 더 붙임성 좋게 다가가 봅시다…!’
루시의 뒤편에 서있던 메이드 하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낮추고 루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시는 세상 귀찮다는 얼굴로 몸을 휘적대며 다과상에 한 쪽에 와서 앉더니, 고개를 테이블 위에 묻었다.
복장은 깔끔한 사교용 드레스이고, 머리칼도 윤기있고 깔끔하게 말려내려오고 있었다.
대충 사이즈도 맞지 않는 교복에, 낡은 마녀모자를 쓰고 풀밭 위를 구를 때는 몰랐던 것이지만, 루시는 차려입혀 놓으면 제법 아가씨 같고 아리땁다.
– ‘몸가짐을 좀 더 단아하게 해주셔야합니다. 자작가 영애님 앞에서 실례이십니다.’
계속해서 뒤에서 속삭이고있는 메이드가 괜시리 신경쓰였다.
– ‘좀 더 귀빈 분들과 교류하시려거든, 행동을 품위있게 하셔야합니다. 자, 허리를 펴주세요.’
루시가 세상 죽겠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없었다.
“…”
트레시아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이윽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루시는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