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0)
에필로그 (完)
루시 메이릴은 제국의 영웅이다.
클로엘 황가에서 온갖 공로를 치하 받고, 갖가지 표창에 금은보화에다가 온갖 명예직을 잔뜩 하사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엘 황제는 그녀에게 어떠한 작위도 영지도 주지 않았다. 무력으로는 훨씬 못미치는 예니카조차도 남작 작위를 받았음에도 말이다.
현명한 성군답게, 루시 메이릴이라는 인재에게 작위 같은 것은 오로지 족쇄로 작용하리란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애초에 작위를 책임질 그릇도 안되니, 그냥 영지 하나를 버리는 것에 가까운 일이다.
결국 루시는 신분의 변화는 없이, 그냥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나와서 로스테일러 저택에 몸을 의탁했다. 더 이상 그녀 스스로가 아켄섬에서 할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최종 전투에서 몇 년 치 마력을 끌어다 써버린 루시 메이릴은 사실상 평범한 소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공식적으로 보호해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 대가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본인이 재물에 별 관심이 없어서일까. 황실에 하사 받은 막대한 양의 부와 명예를 전부 로스테일러 공작가 쪽으로 넘겨 버린 뒤, 루시는 그냥 저택의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 하루 마력을 회복하는 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마력을 되찾는 날, 예니카와 루시라는 쌍두 마차에 의해 보호받는 로스테일러 영지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지가 될 것이다.
영지민들 사이에서 그리 화자되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예상보다 빨리 루시의 마력은 회복되어 갔다.
다만, 루시 메이릴이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녀를 통제할만한 인재를 찾던 에드가 벨 마이아를 스카웃 해버린 것이다.
– ‘루시 아가씨. 찻잔을 들어올리실 땐 좀 더 팔을 우아하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 ‘루시 아가씨, 부스러기를 흘리시면 안됩니다.’
– ‘루시 아가씨, 죄송하지만 드레스 자락이 정원 바닥에 닿아 있습니다.’
– ‘루시 아가씨…’
– ‘루시 아가씨.’
루시 아가씨, 루시 아가씨, 루시 아가씨, 루시 아가씨, 루시 아가씨.
하루종일 루시를 따라 붙으며 그녀를 보좌하는 두 메이드는 오필리스관 출신이다. 벨 마이아의 직속 부하로서, 유능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루시를 상대로도 기죽는 일이 없다.
애초에 루시는 마력을 잃은 입장이니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다.
루시는 안색이 새파래진 채로 다과상에 앉아 이야기했다.
“나 좀 살려줘…”
트레이시아나는 안타까운 듯이 이마를 쓸었다. 벨 마이아가 말했던, 본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게 뭔지 알만 했다.
루시가 힘을 되찾기 전에, 그녀를 일단 사람으로 만들어놓겠다는 그녀의 강력한 의지가 전해졌다. 과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할만하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스테일러 영지에 계속 눌러붙어 있는 것은 결국 여기가 맘에 들어서일 것이다.
몇 년만 지나면 희대의 천재 마법사로 돌아와 있을 그녀는, 온갖 기관과 마탑에서 침을 흘리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루시 메이릴은 에드 로스테일러가 있는 이 공작저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이유야 뻔하다. 그녀가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저택 내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루, 루시…”
예니카는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루시를 바라보았다.
예니카의 최대 걱정이 바로 저 루시 메이릴의 존재였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예니카를 각별하게 대우해주지만, 루시 메이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저에 돌아올 일이 있으면 언제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생활은 괜찮은지 직접 체크해왔던 것이다.
루시 메이릴도 그런 에드의 관심이 싫지는 않은지, 이따금씩 품에 안기거나 무릎에 앉아 있는 등… 보란 듯이 에드에게 추근덕거리지만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이 공작저 안에서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귀빈 중의 귀빈이다. 공작저의 주인 타냐조차도 루시를 상대로는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던 트레이시아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대체 내 지도교수라는 인간은 자기 저택 안에 여자를 몇 명을 끼고 앉아 있는 거야…?’
자기가 빚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책임지겠다는 그 기특한 마음의 발로였겠지만… 사실 모양새만 놓고보면 그냥 주지육림을 차려놓은 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사정을 알고 있는 트레이시아나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탐욕스러운 귀족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한 인간이란 소문이 돌지도 모르겠다. 뭐, 본인 자업자득이다.
트레이시아나에게는 미래가 뻔히 보였다.
쭈뼛거리면서 찻잔을 들어서 입에 가져다대는 예니카와, 멍한 얼굴로 턱을 테이블 위에 얹고서도 은근하게 예니카의 시선을 의식하는 루시.
두 사람은 물론이고, 저택을 찾는 여성들 누구든 간에 쉽게 에드 로스테일러를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아마 클라리스 성녀도, 회주대리 로르텔도, 제국 황녀 셀라하도.. 에드 로스테일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나 같이 제국 안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인만큼, 쉽게 타협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원하는 인간은 많은데 에드 로스테일러의 몸뚱아리는 하나 뿐이다. 그렇다면… 도래할 미래는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가시밭길을 가시는구나…’
말했듯,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은 그릇이 커야만 한다.
트레이시아나는 자신의 지도교수가 제발 하해와 같이 넓은 그릇을 지니고 있기를 기원했다.
담아야할 것들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타냐를 찾으러 간 벨 마이아가 도착한 것은 이십분 쯤 지난 후였다.
허나, 타냐를 데리고 나타나지는 않았다. 결국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후일 들어서 알게 되는 이야기지만, 타냐 로스테일러는 격무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한 번씩 사라지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트레이시아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한 얼굴로 있었으나, 벨 마이아는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털며 다가오더니… 이내 다과상 주변을 슥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턱을 짚고 잠깐 고민을 하더니,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테이블 보를 들어올려 보았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 타냐가 나왔다.
“…”
?저택에 온 뒤로는 계속 벙찐 표정만을 짓고 있는 트레이시아나였다.
고풍스러운 가주의 망토와 더불어서, 깔끔하게 차려입은 셔츠와 스커트를 두른 타냐가 당연한 듯이 테이블 아래에서 나오더니, 커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레이시아나 영애.”
“…”
“실베니아에 계실 때는 학생회장으로서 만났었지요. 로스테일러 공작저의 주인으로서 환대하는 입장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저, 그… 언제부터… 그 아래에…?”
“…언제부터 일 것 같나요…?”
더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였다.
대체 이 로스테일러 공작저에 정상인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은 실례였다. 여기는 대륙 최대의 공작가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작저를 지배하는 여공작 타냐 로스테일러의 앞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려 하자, 타냐는 팔을 휙휙 저으며 됐다고 이야기 하며 다과상의 남은 자리에 앉았다.
“제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있는 걸 좀 좋아하다보니… 당황 시켜드렸네요. 묘하게 안정되는 그 따스한 느낌이 좋을 때가 있어요.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거나 피곤해질 때는 한 번 해보세요. 권할만 하달까요.”
“…”
“제가 주로 권장하는 곳은 옷장이나, 아니면 뭐… 집무용 책상 아래도 좋고, 이왕이면 이불을 덮고 있으면 더 좋아요. 그 착 달라붙어서 눌러주는 느낌이 또…”
“주인님.”
벨 마이아가 가볍게 그리 부르자, 타냐는 반달눈을 뜨고는 잠시 벨을 쳐다보았다.
벨의 말에 담긴 의미는 별 거 없었다. 고정하시고, 품위를 지켜주세요.
간만에 동문을 만나는 것인지라 타냐도 어깨에 힘이 좀 풀려있었던 탓일까.
타냐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휙 잡아 당기며 자세를 바로 잡고는 이야기 했다.
“뭐어, 트레이시아나 영애께서는 저희 오라버니의 여성 관계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그 말을 듣고 트레이시아나는 아차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 가문의 연애사에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사실 동문 예니카와 주고 받는 환담 선에서야 못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들을 저택의 주인인 타냐가 전부 듣고 있었다고 하면 또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여공작 타냐 로스테일러는 사실상 황제 다음 가는 직위에 있는, 이 제국의 심장 중 하나다.
권위적인 태도도 없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쪽도 편해져서는 안 된다.
트레이시아나는 이미 간파하고 있다.
철부지 같고, 행동거지가 가볍지만, 저 소녀의 안목과 심리는 절대 가볍지 않다.
슬쩍 곁눈질을 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그릇을 가늠하고, 아무 관심 없는 척 하면서 이해타산을 순식간에 계산해낸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으로 3년, 그리고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로 2년.
철부지 같던 소녀조차도 능구렁이로 만들어놓기에는 충분한 세월이다. 가볍고 편한 행동거지조차도 전부 계산의 범주 안이다.
트레이시아나는 그 사실까지 꿰뚫어 보고서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
그리고, 어딘가 여유가 넘치는 그 한마디만 듣고서 트레이시아나는 눈치챘다.
이 소녀는, 트레이시아나가 자기 내면을 꿰뚫었다는 사실조차도 간파했다. 왠지 모르게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어, 트레이시아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 불편하게 하실 필요 없어요. 적어도 이 다과상에 앉아 있는 분은, 제 신분이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게 대해주시거든요.”
그렇게 생긋웃으며 이야기하자, 예니카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건 애초에 타냐가 편하게 대해주니까 가능한 거잖아. 오래 알고 지냈기도 했구.”
“…그럼, 이 메이드들 좀 물러줘… 제발…”
루시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타냐는 못들은 체 했다. 루시에게 메이드를 계속 붙여놓으라는 지시는 에드가 직접 내린 것이었다.
“어쨌든, 트레이시아나 영애께서는 저희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신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오라버니는 그저께 아켄섬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오라버니가 담당하는 신입생 선발 시험이 얼마 안 남았거든요.”
“네, 네에…? 에드 교수님이요? 그럼..”
“네. 엇갈리셨네요. 급한 전달사항이라면 빨리 돌아가보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트레이시아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고생을 해서 왔는데, 엇갈렸다니. 신께서 자신을 버린 것만 같았다.
이윽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서는 이야기 한다.
“그렇..네요… 그럼 빨리 돌아가봐야겠군요. 바쁘실텐데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학기 중이 되면 실베니아로 돌아가봐야 하니까, 또 보게 되겠네요. 거기선 교수 대 학생 관계니까 굳이 말을 높이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 때가서 말을 놓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긍정은 해두었다.
“그리고… 가문의 개인사에 너무 쓸 데 없는 말을 해둔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헉, 아니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오라버니야 뭐, 워낙에 구설수에 많이 오르시는 분이니까 궁금하실 수 있죠. 그리고 트레이시아나 영애를 담당할 지도교수이시기도 하니까, 당연히 여러모로 궁금하시겠죠.”
“아, 네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레이시아나는 괜찮다는 타냐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제 지도교수님이 에드 교수님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그러고보면, 벨에게 그 사실까지 말한 적은 없다. 학사 내부 사정을 너무 많이 알리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 잊으신 듯 한데… 저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기도 하답니다?”
그 사실을 듣고서야, 트레이시아나는 실감한다.
자신은 일단 이 여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반쯤 망한 공작가를 단기간 안에 여기까지 일으킨 인물이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그릇부터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고 말았다.
그제서야, 그림이 보인다.
타냐 로스테일러는 이 로스테일러 공작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그런 그녀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행보나 인간 관계를 모를 리가 없다. 슬슬 에드의 미래가 트레이시아나의 머리에 그려지는 듯 하다.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번성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간에 손에 쥐고 보는 이 소녀의 눈에, 오라버니의 그 빛나는 인간관계는 금은보화처럼 보일 터.
희대의 정령사. 역사적인 천재 마법사. 제국의 황녀. 성황도의 성녀. 상단의 회주.
이 소녀는, 그 무엇 하나 포기할 마음이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들을 싹 다 취해서 데려갈 수 있도록,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소녀를 뒤에 끼고 있으니, 결국 에드가 도달할 미래라고 한다면…
‘이번에 지도 교수로 따르는 동안, 최대한 친해져야겠네.’
애석하게도,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또한 속물 중의 속물이었다.
*연초를 피워 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교수직에 올라선 뒤로는 선임 교수 칼레이드와 너무 자주 어울린 탓이었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항상 얼굴에 책을 덮어놓고 잠에 들어있거나, 넋이 나간 소리나 해대는 교수였지만 나름대로 실력만큼은 출중했다.
“후우…”
마법을 이용해서 연초의 불을 꺼버린 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은은히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이따금씩 눈을 찌른다. 그래도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기분이 좋아, 머리를 환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북쪽숲 언저리에 있는 개인 연구실 앞.
간만에 아켄섬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차려놓은 북쪽 숲의 시설을 확인한 것이었다.
불꽃이 일렁이는 중앙의 캠프파이어는 꽤나 규모가 커져서, 아예 거대한 불길이 되어 있었다.
예니카가 쓰던 오두막은 창고로 개조되어 있었고, 내 오두막은 아예 큼지막한 건물이 되어서 개인 연구실이 되어있다.
학사 차원에서 이렇게 개인 연구실을 마련해주는 일은 많지 않은데, 내가 여기가 좋다고 말하자 딱 깔끔하게 시설을 마련해주었다. 이래저래 배려받는 기분이 많이 들었다.
북쪽숲에 와서 이렇게 가만히 캠프를 보고 앉아 있으면,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곤 한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았다 천천히 뜨면 보이는 것은,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난 빈털터리 몰락 귀족이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광경이다.
소년은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게 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북쪽숲에 와서 목재 가방을 내려놓고 한참을 앉아 있는다.
이윽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커다란 나뭇잎들과 줄기를 그러모아 자그마한 목재 쉼터를 만든다.
그 작고 허름한 목재쉼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앞에 자그마한 캠프파이어가 설치된다. 소년은 그 앞 나무 등걸에 다가와 앉는다.
작업대와 건조대, 낚싯대, 나무창 따위를 만들어서 옆에 늘어놓는다.
임시 거처인 목재 쉼터의 모양새도 조금씩 그럴싸해진다. 이따금씩 먹을 걸 들고와서 떠들다 가는 소녀나, 목재 쉼터 안에서 낮잠을 자다 떠나는 소녀, 운동을 하면서 지나가는 후배나, 재밌는 제안을 하러 오는 상인이 오간다.
어느샌가 자그마한 목재 창고가 세워지고, 그럴싸한 오두막도 올라간다.
소년이 나무등걸에 앉아 만들던 도구도 가면 갈수록 모양새가 좋아진다.
캠프파이어의 규모는 커져서, 이제 열댓명은 넉넉히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가 된다.
해가 뜨고 진다.
비가 오고 눈이 온다. 해가 바뀌고, 오두막 캠프는 커져간다.
어느덧 눈을 떠보면, 이제는 비교도 안되게 말끔해진 건물들 틈바구니에 앉아있다.
나는 가만히 장작이 불타는 것을 보다가, 이윽고 꽁초를 집어 던져서 넣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에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물음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과거는 이어져서 현재가 됐고, 이윽고 미래가 될 터.
이제 더 이상 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남아있지 않다.
달리고 달려서 도달한 끝에, 이야기의 마지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이야기에 엔딩이란 것은 없다. 결국 죽음으로 끝날 이야기지만, 죽지 않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베니아가 관측했다던, 모든 것이 끝나는 미래인 ‘절벽지점’은 오지 않았다.
벨브로크가 죽은 뒤로 2년의 세월이 흘렀고, 게임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마무리 되었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나아간다.
모든 시나리오에는 끝이 있다.
그녀가 관측한 ‘절벽지점’은, 모든 시나리오가 마무리되어 세상이 그대로 닫혀버리는… 그런 끝 없는 어둠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이 세상에 와서, 변수로서 존재해 앞을 보고 있는 한… 그런 어두운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존재함으로서 세상은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 종말은 유예된 것일 뿐이고, 여전히 세상은 영원한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미래의 사실들을 알고, 그 정보를 기반으로 위기에 대처해왔지만… 그건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원래 미래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
그 미래란 걸 도통 알 수가 없기에, 사람을 일단 살아보는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 테일리 맥로어다.
이 소년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날 찾아왔는지 오히려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이렇다 할 화해 같은 것을 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테일리는 모닥불 반대편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검집을 내려놓고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사말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때에도 이런 식으로 깍듯이 인사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면, 너도 곧 졸업이구나.”
“…네. 에드 선배님은 졸업하자마자 교수직으로 취임하셨으니 계속 얼굴을 맞댔지만, 이번에 저희가 졸업하고 나면 정말로 이젠 볼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아서요.”
테일리는 그리 이야기 하면서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진 않았다.
“뭘 새삼스럽게 인사를 해. 이미 볼 일 다 끝난 사이잖아.”
“그렇습니다만… 지난 제 학사 생활을 회고해보면 결국 중요한 시점에서 기여하신 건 언제나 에드 선배님이셨습니다.”
굳이 그 사실을 깨우쳐 주고 싶진 않았다. 테일리 맥로어는 예정된 영웅의 길을 걸어줬으면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테일리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기도 했고.
덕분에 테일리는 차곡차곡 강해질 수 있었고, 내가 원하던 대로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벨브로크를 베어주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그거면 됐다.
해야할 일은 다 해줬으니, 테일리에게 더 이상 남아있는 감정도 없다.
“제 때 감사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오해도 많았고, 악감정이 쌓인 나날도 많았지만… 결국 에드 선배님이… 아니, 에드 교수님이 옳으셨습니다.”
“너무 그렇게 포장할 것도 없다. 사실, 네 입장에서도 엄청 고생했을테니까.”
나는 그다지 테일리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때로는 테일리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건 나였으니까.
너는 충분히 잘 해줬고, 무대의 마지막까지 잘 버텨서 해야할 일을 해냈다.
그것밖에 해 줄 말이 없다.
“그냥, 꼭 그런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졸업하기 전에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테일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 이상 주고 받을 말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테일리는 다시금 검을 집어든다.
그는 이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검성이 되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아일라와 함께 나름대로 모험과 여행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많은 업적을 남기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영웅이 되겠지.
테일리가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다시금 쭉 뻗은 숲속 너머의 길로 걸어나가기 위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은, 다친 몸을 돌보며 방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화면 속에서 펼쳐지던 모험과 여행 속에서도, 테일리는 언제나 시련에 굴복한 적이 없다.
무대 위에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영웅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비록 화면 너머의 이야기였지만, 삶에 좌절하고 평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에 처박혀 있던 시절의 나에겐… 나름의 구원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만들어진 이야기일지언정, 그리고 무대 아래의 엑스트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일지언정… 그냥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면 구원 받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누군가를 구해내는 힘이 있는 것이다.
“야, 테일리.”
떠나려던 테일리를 불러세우자,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다시금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나는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가, 불을 휘적이던 부지깽이를 대충 불 속에 집어넣고, 그냥 툭 던지듯 이야기 했다.
“고생해라.”
오직 그 뿐인 이야기다.
테일리는 가만히 내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길을 떠난다.
길은 갈라지고 합쳐지면서도, 쭉 이어져 나간다.
삶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신입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줄어들지를 않았다.
큰 아픔이 남은 재앙이 있긴 했지만, 아카데미는 여전히 많은 영웅을 배출해냈고, 그 명성은 나날이 더해져갔다.
용을 죽인 검성 테일리 맥로어. 대현자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일라 트리스.
북방 초원지대의 대영웅 직스 에펠슈타인. 혈검술을 지배해낸 검귀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혁신의 연금술사 엘비라 에니스턴. 클로엘 제국의 차기 황제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엘테 상회의 차기 회주 로르텔 케헬른까지.
주인공 세대는, 빛나는 조명을 받으며 졸업한다. 졸업식에서도 찬사를 받으며, 제국의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길 영웅으로서의 삶을 계속해 나간다.
그들의 요람이 되어주던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여전히 아켄섬에 자리한 채 우뚝 솟아있다.
새 영웅을 배출해내고, 다음 시대를 만들 인재들을 양성해내기 위해.
그리고, 그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고자 많은 신입생들이 여지 없이 몰려든다.
“우, 우와아…”
마법 지팡이를 꽉 안아든 소년 하나가 아켄섬의 북쪽숲 초입에 모여든 신입생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명문가 자제들이다. 촌뜨기 출신인 소년조차도 한 눈에 알아볼만한 온갖 귀족 자제들과 유명인들이 가득하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신입생이 되겠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모여든 그 무리들 사이에서, 소년의 소꿉친구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기죽지마, 펠림!”
“에, 엘리아…! 누가 기죽었다는 거야!”
“척 봐도 기죽어서 덜덜 떨고 있네! 이런 곳일수록 더 당당해야 해! 자! 촌뜨기 티 내지 말고! 노력으로는 누구한테도 안 지잖아!”
그렇게 덜덜 떨고 있는 소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소녀 역시,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찾아온 입장이다.
커다란 지팡이를 꽉 안고서는 당당히 소년의 등을 토닥여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년은 이윽고 정신을 다 잡고 용기를 냈다.
“그, 그래… 나도 열심히 하는 걸로는 안 져…!”
그렇게 소년이 정신을 꽉 다잡고 있자, 이윽고 학생들 사이로 키가 큰 사내 하나가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웅성대는 소리가 가득했다. 여기에 모여든 신입생 후보는 하나 같이 그 사내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에, 에드 로스테일러다…!’
– ‘지, 진짜 잖아…! 보…본인이 직접 왔어…!’
– ‘쉿… 들리겠어…! 유명인 처음봐?! 그야, 신입생 선발 담당 교수니까 직접 오겠지!’
나이차는 얼마 나지도 않아 보이는데, 교수 직함을 달고, 망토를 두른 채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위압하는 느낌이 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온갖 것을 메모하고 있는 조교수 트레이시아나 역시, 기백만으로 주변 학생들을 꽉 누르는 느낌이 있었다.
이윽고, 인파 앞으로 사내가 빠져나왔다. 그를 따라 나온 조교수가 정숙할 것을 지시하자, 이윽고 일대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북쪽숲 내부를 등진 채로, 잠시 일동을 훑어 보던 사내는 이야기 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들 많았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꼭 실베니아에 입학하고 싶겠지만… 애석하게도 실베니아에 입학 가능한 인원은 이 중 절반 뿐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실만을 담담히 이야기 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에드 로스테일러 교수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묘한 고양감이 감돌았다. 본인들이 정말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만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조교수에게 눈길을 줘서 지시를 하자, 조교수 트레이시아나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북쪽 숲 안에 설치된 온갖 환영 원반들이 작동하더니, 갖가지 하위 마물족과, 광폭화된 하위 정령 형태의 환영을 숲 안에 뿌려놓았다. 환영 자체는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진 않겠지만, 공격당하면 정신적인 고통이 동반되는 후유증을 앓게 된다.
숲 안에서 마물족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고, 광폭화된 정령들이 포효했다. 그 소리는 나무들 사이를 거쳐서 일동이 모인 초입에까지 들려왔다.
신입생 후보들은 출신 성분은 화려하지만, 실전경험이라곤 없는 초짜들이다. 일제히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여기에서부터 숲을 가로질러서 반대편 북쪽 절벽지대에 도달하면 된다. 평가 내용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진 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야기했다.
“살아남아라.”
그 간결하고도 확실한 요건 하나만이, 에드 로스테일러가 입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
– 完 –
후기
안녕하세요, 코리타입니다.
2020년 겨울, 너무 추워서 덜덜 떨리던 때에 처음 연재분을 올렸던 생각이 납니다. 정신 차려보니 2년 지난 22년 여름이 되어있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를 연재하는 19개월 동안, 개인사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길게 소설을 써 본 적은 처음입니다.
250화 분량, 편당 평균 1만자 분량이니, 보통으로는 400화 정도의 분량을 쓴 것인데… 지금 그 작업을 마치고 나니, 몇 질씩이나 완결을 내신 기성 작가분들에 대한 존경심만 솟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오신 기성 작가 분들은 얼마나 고된 일을 반복해오셨던 걸까요..
처음으로 장편을 끝내본 입장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작품 하나를 온전히 끝내서, 완결 후기를 쓰게 된다는 상상은 많이 해보았습니다.
막상 그게 현실이 되어서 후기를 쓰게 되니, 사실 무슨 내용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독자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올리자. 내가 이렇게 계속 뭔가를 쓸 수 있는 건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틀에 박힌 감사 인사를 온갖 미사여구를 덧칠해서 상상해보지만, 사실 구태여 당연한 사실을 구구절절 이야기할수록 진정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당연한만큼 확연한 사실입니다. 굳이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이 소설을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뭐라도 쓸 수 있는 이유는, 읽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고 산 적 없습니다.
의 이야기는,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아직 조금 남아있습니다.
퓰란의 최고위 바람 정령에 대한 이야기, 올덱의 늙은 여우 슬로그에 대한 이야기, 젤란과 글록트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에드 로스테일러는 훌륭히 이야기의 결말을 확인했지만, 아직은 세상의 이방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에드 로스테일러가 인연을 맞이하고, 세상에 온전히 정착하게 되어가는 이야기를 아직 조금 더 풀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외전은 아마… 자유 연재 방식으로 써내려갈 것 같습니다. 무료연재 시절처럼요. 사실 가장 온전히 글 쓰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가 그 때였던 것 같습니다.
시간에 쫓겨쓰다 보면 후회가 남는 것도 있고, 나중에 가서야 깨닫는 것도 있어서 이마를 탁 쳤던 기억이 참 많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3일에 1편은 올리자, 라는 마음가짐으로 써내려갈 것 같습니다. 그 때도 그랬던 것처럼요.
다만, 독자님들과의 약속으로 확정하기보단… 일단은 나 자신과의 약속으로 남겨두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일주일 정도 쉰 후, 6월 13일 월요일에 예니카 페일로버 외전 : 바람 꽃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2. 6. 4.
코리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