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1)
퓰란 지방 사람들은 산 능선을 따라 쭉 피어있는 팬지꽃을 ‘바람꽃’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사람 모두가 그리 불러서, 어릴 적 예니카 역시 별 의심 없이 그 아리따운 꽃을 바람꽃이라 불렀다.
탁 트인 산맥지대. 푸른 하늘 사이로 이따금씩 떠있는 구름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능선지대를 걷다보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한다.
피크닉 가방을 꽉 끌어안고, 탁 트인 능선을 부지런히 걸어나가는 유년시절의 예니카는 뺨을 훑는 바람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곤 했다.
휘리릭 기분 좋게 피부를 쓸어내린 바람이, 이윽고 윤기가 흐르는 연분홍빛 머리칼을 흩날린다. 초봄 특유의 미지근한 바람에 몸을 맡기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청량감이 마음을 뒤덮었다.
휙 고개를 들어보면 만년설로 꼭대기 언저리만 하얗게 물들인 고산지대가 펼쳐져 있다.
건너편 능선 언저리에서 방목된 소들이 풀을 뜯고, 길옆에선 나비 몇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다 근처 잔디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기분 좋은 듯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탁 트인 하늘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퓰란 특유의 그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과 고뇌라는 것이 없어진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런 동화 속 풍경 속에서 나고 자랐다.
소녀는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루 하루가 즐겁다는 자각은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적어도 이 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어린 예니카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 소중한 사람이라 해봐야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전부다.
마음 속에 품어두었던 소중한 사람들이야 모두 이 퓰란에서 부대끼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 누구에게 이 광경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느니 하는 생각은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다들 이 능선의 아름다운 광경은 충분하리만큼 잘 알고 있을테니까.
소녀는 예쁘게 땋아내린 머리칼을 갈무리하고, 괜시리 하늘에 손을 뻗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태양 빛이 눈가를 간질인다.
소녀는 내년에 실베니아 아카데미로 떠난다.
요람과도 같은 토렌 마을을 뒤로한 채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러 간다. 언제까지고 시골 마을에 박혀살기에 예니카는 너무 어리고, 남은 삶은 너무 길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새로운 장소와 인연을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각이 들었다.
퓰란에 박혀 목장 일을 돕기만 하며 살 때는 느낄 수 없던 감각이다.
후욱, 하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나니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고 나면 보이는 건, 여전히 탁 펼쳐져 있는 퓰란의 산맥지대다.
이 평화로운 동화 속 세상이야말로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소녀의 시발점이자, 종착지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겪은 뒤에도 결국 예니카 페일로버가 마지막으로 또아리를 틀 곳은 이 곳 퓰란이다.
소녀의 여정은 돌고돌아,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길가에 단출하게 세워진 울타리에 몸을 기댄 채, 소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리따운 꽃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핀 팬지꽃은, 사시사철 부는 바람의 방향에 맞춰 고개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바람꽃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
“이번 주 중에 퓰란에 가야겠는데.”
에드 로스테일러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한 것은 예니카가 남작저에 돌아온 날 오후였다.
황송한 대우를 받으며 저택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예니카는 아직도 귀족 신분에 적응하질 못했다.
2년이면 좀 적응할만도 하건만, 시골 마을 출신인 소녀에게 사람을 휘두르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에드가 남작저에 시간을 내서 찾아와 저택 관리를 도와주곤 했기에, 이번 방문도 그런 차원일 것이라 생각했다.
예니카 입장에서야 에드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었다만… 예상치 못한 에드의 발언에 잠시 찻잔을 휙 내려놓아야 했다.
“….어?”
순간적으로 예니카는 귀를 의심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퓰란에 간다. 그 짧고도 간단한 한 문장이 뭐라고, 대번에 받아들여지질 않아서 한 번 반문해야만 했다.
“방학 끝나기 전에 연구 업무 마무리 지어야지. 퓰란 쪽에서 있었다는 최고위 바람 정령에 대한 건을 종결내려면 직접 가야만 할 것 같아.”
“으, 응… 그렇구나. 에드. 그, 근데… 토렌 마을 근처도 가?”
“그러니까 널 찾아왔지. 이왕 거기까지 가려면 현지 사람 대동해서 가는 게 더 편할 거 아니야. 너 퓰란 쪽은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고향이잖아.”
예니카는 마른 침을 꾹 삼켰다.
출가한지도 어언 6년이 되어간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4년, 로스테일러 공작령에서 2년.
한 번씩 가족 얼굴을 보겠다고 방문한 적은 있지만, 아예 에드 로스테일러를 대동하고 퓰란에 방문한 적은 없었기에… 식은 땀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퓰란 사람들의 그 음험한 장밋빛 시선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파고든다.
이미 작년에 방문해있을 때, 에드와 예니카에 대한 소문은 그녀의 손을 아득히 떠나고 있었다.
장터와 시장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은 눈덩이처럼 굴러가서,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네들 사이에서 예니카와 에드는 볼 장 다본 사이. 선남선녀, 천생연분,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 두 번 다시 없을 운명의 맞상대가 되어있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 특히, 오르테와 세일라가 직접 아켄섬에 와서 에드와의 관계를 확인한 뒤로는 더 무섭게 불어난 것이었다.
작년에 방문했을 때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있던 그 소문을 예니카 역시 확인하긴 했다만…
예니카는…. 굳이 저지하거나 적극 부인하지 않았다….!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왜냐면…. 사실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못할 말이지만, 오히려 소문을 듣고 있다보니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헛소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가는 소문을 방조하는 것도 썩 당당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사람 감정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어차피 에드 로스테일러는 공작저를 관리하고, 학사 업무까지 병행하느라 워낙에 바쁘다.
저 머나먼 퓰란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도는 소문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인물 아닌가. 대륙 최고의 공작가문 도련님이, 어찌 그런 지엽적인 소문에 정신을 소모한단 말인가.
그렇게 예니카 페일로버는 스스로의 방조를 합리화 했고.
“마차는 내가 수배해놨으니까, 다음 주 중에 같이 가자. 남작저 관리는 벨한테 맡겨두면 될 거다.”
이제 그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
예니카는 호흡이 멈추려는 것을 억지로 다잡고, 어렵사리 미소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에, 에드… 그렇구나. 퓰란에 오는 거구나. 하하… 에드는 퓰란 처음이지? 가보면 깜짝 놀랄거야. 정말 동화 같은 그런 곳이거든. 풍경도 아름답고… 헤헤…. 헤헤헤….”
그렇다고해서 오지 말란 말을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는 서로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예니카 페일로버는 공작가문 도련님인 에드 로스테일러의 가신이 된 신분이다. 명확한 상하관계로 묶인, 에드 로스테일러의 아랫 사람이란 이야기다.
에드와 예니카가 학사 생활할 때처럼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에드 로스테일러의 배려 덕분이다. 굳이 예니카와는 벽을 치고 싶어하지 않는 에드의 호의 덕에 예니카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그 상하관계의 본질에서 벗어날 순 없다. 결국 예니카는 에드에게 예속되어 있는 입장이니, 에드가 하자면 해야하는 것이다.
에드는 굳이 예니카가 불편해하거나, 곤란해하는 일을 지시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러나 학사 관련한 업무라면 공적인 일이니, 어떻게 예니카의 사정을 들이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에드는 반드시 퓰란으로 올 것이고… 그걸 막을 방법이 예니카에겐 없다.
그렇다면 남은 활로는 하나 뿐이다.
“에드… 그게… 미안!!! 미안해! 지금 토렌 마을은… 그…!”
갑자기 푹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를 하는 예니카의 모습에, 에드는 드물게도 미간을 좁히며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
“…”
“…”
“…”
“…”
잠시간 유지되는 침묵이 이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예니카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인 채 에드와 마주앉아 있었다.
사정 설명을 들은 에드는 마법사 로브 끝을 휙휙 당겨대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리하자면, 토렌 마을에서는 이미 우리는 볼 장 다 본 사이로 알고 있다 이거냐…”
훅 들어오는 그 말 한 마디에 예니카의 등줄기를 타고 전기 한 줄기가 휙 지나가는 듯 했다.
숨이 팍 막혀서, 예니카는 잠시간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해대야만 했다. 이 쑥맥 같은 반응은 몇 년을 지나도 바뀌는 법이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이런 걸 어떻게 해보겠는가.
“대체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간 거냐…”
“에드도 우리 부모님을 만나봐서 알겠지만… 워낙… 이런 구설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있다보니까… 이게 어떻게 눈덩이가 구르고 또 굴러서… 미안… 내가 뭘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
사실 손을 안 썼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만 예니카도 거기까지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데도 정도가 있다. 제 아무리 서로 교감하고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다. 나 너랑 볼 장 다 본 사이 되고 싶다~고 대놓고 이야기 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예니카 입장에서야 에드와 일선을 넘고 싶은 마음은 차고도 넘치지만, 확실히 에드와 예니카 사이에는 넘기 힘든 선이라는 것이 남아있다.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선은 결국 신분의 차이다.
평민 출신으로 시작해서 겨우 변방 영지를 받은 남작 직위의 예니카와, 아예 공작가 자제로 태어나 황실의 비호를 받는 에드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신분의 간극이 있다.
에드의 짝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결국 공작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치적 안건이므로, 예니카가 함부로 그 자리를 넘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에드 또한 예니카가 그 격차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억지로 필요 이상의 업무를 강요하진 않았다.
허나, 예니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남작저 안주인으로 금이야 옥이야 보호 받고만 있을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퓰란의 소문을 명목삼아 일선을 넘어버리는 것은 또 어떨까.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그런 묘한 가능성이 떠올라,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사실상…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버려서… 이제와서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적극 부정하지 않은 나는 거짓말쟁이 비스무리한 게 되어버릴지도…”
“그게 그렇게 된다고?“
“응… 그 뭐라고 해야할까, 너무 신물이 나서 그냥 상대를 안했거든… 이렇게까지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거라곤 상상도 못했고…”
“그럼 내가 이제 와서 ‘우리는 그냥 영주와 가신 관계에 불과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라고 공표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글쎄…. 마을 사람들이야 뭐라고 이야기 하진 않겠지만, 속으로 나를 되게 측은하게 여기겠지…”
거기까지 생각해놓고 보니 예니카도 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 우리 예니카가 많이 외로웠구나… 그런 상상을 하고…
하긴 에드 도련님이야 멋지시고 든든하신 분이니까… 그런 마음을 품을만 하지…
미안하다… 예니카…! 너의 고독을 알아주지 못해서…!
외로웠구나! 그럴 나이지!
아직 젊으니까 노처녀가 될 걱정 같은 건 안해도 되는데! 아리땁고 능력있는 귀족나리인데… 뭘 그렇게 급했던 거니…
우리가 이해해주자… 예니카도… 이런 거짓말 같은 걸 하고 싶진 않았을 거야…
“차라리 죽여줘….”
마을 사람들의 측은하고 따뜻한 시선을 생각한 예니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야기 했다.
“나도 방금 상상해봤는데, 너무 끔찍해서 토할 것 같다. 예니카.”
“괜..찮아… 자업자득이니까, 내가 감당할 일이야 에드… 너무 신경쓰지마…”
에드는 안색이 새파래진 예니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한숨을 푹 쉬고 손에 든 서류들을 책상에 던져 놓았다.
“어쨌든, 내가 대충 어울려주면 되는 일이지. 안 그래?”
“응? 무슨 뜻이야, 에드?”
“대충 소문이 얼추 맞는다는 느낌으로 행동을 취해주면 되는 일이잖아. 이건 네 남작으로서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니… 조금 정도는 어울려 주마…”
이런 말도 안되는 소문에 어울려줄 필요 따위는 없지만, 어쨌든 에드는 예니카를 각별히 여기는 사람이다.
“이번 한 번은 어떻게든 소문 따라 행동해 줄 테니까, 이 다음부터는 천천히 네 권위가 깎여나가지 않는 선에서 오해를 좀 풀어가라.”
“그, 그래…?”
“그래. 사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잖아. 그냥 사이 좋은 느낌의 모습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냐? 애초에 우리 사이 좋잖아.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되는 일이지.”
사실 이제 막 작위를 단 변방의 남작 나부랭이가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도련님이랑 말을 트고 지내는 것부터가 비범한 일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이 났는데? 그대로 다 행동해 줄 테니까, 이야기 해 봐.”
죄 지은 가신이나 잘못을 범한 하인들에게는 가차 없는 에드 로스테일러건만, 유독 예니카 페일로버에게는 자비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 사실을 예니카 자신 또한 잘 알고 있기에, 저렇게 협조적인 에드의 모습에 감사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게…”
허나,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이 났는지를 예니카의 입으로 직접 말하라는 것은… 사실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그…”
예니카는 쭈뼛거리면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대관절 소문이라는 게 어떻게 퍼져나갔길래 그 내용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저렇게 붉혀대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
결국 에드 로스테일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 뿐이었다.
“그… 돌아다닐 때마다 매번 팔짱을 끼고 다닌다거나… 눈이 마주치면 이마에 입맞춤을 해준다거나…”
“…”
“함께 마차에 타고 이동할 때면 항상 꽉 껴안고 있다거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서로한테 기대어 있다던가…”
“대체 무슨 경위를 거쳐야 그런 소문이 날 수 있는거냐…?”
“원래 소문이라는 게 논리적인 경위를 거쳐서 불어나는 게 아니잖아…”
“그 와중에 넌 그걸 적극 부정하질 않았고…?”
“미안해!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에드는 어이 없다는 듯이 앞머리를 휙 쓸어올리더니 마른 세수를 한 번 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허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다.
“그래, 계속 이야기 해봐.”
“미안… 나도 머리에 열기가 올라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으음… 그냥… 응, 그 외에도 대부분은 비슷한 이야기야. 어딜 가든 손을 맞잡고 있다든가, 남이 안보이는 곳에서 입을 맞춘다든가… 그리고, 밤이 되면… 음…”
“…”
“…미안해, 여기서부턴 음담패설의 영역이야.”
“잘도 그런 소문 속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모멸감이나 수치심이 들 법도 한데.”
“원래 마을 사람들 구설수에는 선이라는 게 없잖아…”
사실 모멸감이나 수치심은 고사하고, 오히려 혼자 신혼생활 비스무리한 걸 상상하다가 입꼬리가 승천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차마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뭐, 상황은 대충 알았다. 완전히 어울려주지는 못해도, 그래도 대충 사이는 좋다라는 모습 정도는 보여줘서 소문의 진위에 신빙성을 부여해줄 순 있어.”
“그, 그래애…”
“그런데, 괜히 이러면 소문이 더 불어나기만 하는 거 아니냐?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아니야! 그래도 사이는 좋다, 라는 느낌이면 소문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잖아! 소문의 일부 정도는 사실이라고 하면, 나머지는 부풀려진 거구나…. 라는 선에서 끝낼 수 있어. 내 권위가 상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아예 거짓말이란 거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니까…”
예니카의 부모님인 오르테와 세일라 또한, 에드와 예니카가 사이가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목격정보와 잘 겹쳐지면, 에드 로스테일러와 예니카가 생각보다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만큼은 진실로 받아들여질 터.
그러면, 예니카가 외로움에 못 이겨 그런 헛소문을 방조했다는 오명을 쓸 일은 없다. 소문의 일부 정도만 긍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래… 알았다…”
에드는 한숨을 푹 쉬면서도, 예니카의 입장을 이해해주었다.
“최대한 어울려줄테니까, 너는 그냥 내 연구 업무에만 잘 협조해줘.”
“으응… 연구 업무라,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메릴다 녀석도 그렇고…”
예니카는 힐끗 시선을 내려서 에드가 펼쳐놓은 서류를 보았다.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에 대한 자료들.
그 거대한 곰 형태의 정령이 자연에 녹아들면서 남긴 바람의 흔적이, 퓰란 지방의 고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
퓰란을 호령하던 그 거대한 곰 정령이 최후를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 또한, 연구 과제로서 남아있었다.
목축지가 탁 펼쳐져 있는 퓰란의 고산 지대, 그 능선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 또한 그 최고위 바람 정령의 흔적이었을까.
그리 생각해보니, 에드가 가져온 연구 일지에 적힌 기록이 예니카에게도 각별하게 느껴졌다.
퓰란의 바람은 따스하면서도 포근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 바람 속에서 자라온 소녀가, 바로 예니카 페일로버였다.
“그건 그렇고, 사실 소문에 맞춰주려거든 내가 아니라 네가 더 고생할 거 같은데.”
“으, 응? 나 말이야? 아니야, 에드가 더 고생하면 고생했지… 내가 고생할 일이 뭐가 있어.”
“애초에 뭐만 하면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였다간, 오히려 의심을 더 사기만 할 걸?”
예니카 페일로버는 남성에게 면역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특히 에드 로스테일러를 상대로는, 피부만 슥 스쳐도 몸에 전류라도 튀는 듯이 어깨를 휙 좁히며 고개를 푹 숙여대는데…
그런 자세로 팔짱을 낀다든가,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든가 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반응만 튀어나올 것이 뻔했다.
코피라도 흘리면서 부끄러움에 못 이겨 에드를 밀어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오히려 더 의심을 사기만 할 터.
“애초에 너는 스킨십 같은 거에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그그그그 그래? 꼭 그래야 할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면 꼭 그렇진 않을 거긴 한데 에드가 꼭 그래야한다고 하면 나야 뭐 꼭 그러기 위해 노력을 할 준비는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네!”
“벌써부터 횡설수설하는 것부터가 문제야, 너는.”
“그, 그치만… 안 익숙한 걸 어떻게 해!”
에드는 잠시 턱을 괴고 고민에 빠져 있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니카에게 스윽 다가갔다.
“결국 해결책은, 많이 해봐서 익숙해지는 거 말곤 답이 없다고 본다.”
“뭐허엇!”
예니카가 차마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에드는 예니카의 앞머리를 슥 쓸어올려서 이마가 드러나게 했다.
예니카는 호흡이 가빠져 왔지만,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돌고도는 소문 중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마에 입맞춤을 해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단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을 보여주려거든,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된다는 사실인가.
그 논리는 잘 알겠다만, 순진한 예니카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벽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온갖 인생경험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보니, 이제와서 여성이랑 피부 좀 맞닿는다고 긴장할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예니카를 돕겠다는 의무감의 발로에 가까운 행동인지라, 더 거침없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예니카는 안면에 한계까지 차오르는 혈류를 버텨내지 못한 채, 코피를 쏟기 일보직전까지 왔으나…
사실은 지금 상황이 그렇게까지 싫지 않다는 자기 자신을 마주한 순간, 오히려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그렇게,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이마에 맞닿을 아스라한 열기를 기다리는 순간──
– 똑, 똑.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예니카 아가씨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남작저 관리 일정에 대해…”
사무적인 느낌의 노크를 한 후, 접견실에 들어온 벨 마이아가 상황을 목격했다.
“…”
“…”
“…”
에드가 예니카의 이마를 쓸어올리고 있는 그 광경을 본 벨 마이아는… 잠시 침묵했다.
“30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주인님.”
고풍스러운 자세로 양 치맛단을 올린 채 인사를 한 후, 벨은 다시 접견실 문을 굳게 닫고 나갔다.
“…”
“…”
에드와 예니카는 침묵한 채로, 다시금 조용해진 접견실 안에서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
접견실에서 나온 벨 마이아는 자신의 양 관자놀이를 누르며 복도 벽에 머리를 묻었다.
‘철 들었을 때부터 견습 메이드를 시작해서, 올해로 벌써 경력이 17년 차인데….’
일처리는 언제나 신속하고 확실하게. 그것이 벨 마이아의 모토였건만, 그 방침에 정신이 팔려 너무나도 큰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원래 감정교류라는 것은 열기에 못 이겨 화끈하게 저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벨의 등장으로 일단 이성을 되찾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벨은 아뿔싸 하는 느낌과 함께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그 소심쟁이 예니카 남작이 간만에 진도를 빼려하는 그 순간에 하필 업무 지시를 받으러 가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까지 예측해서 움직이는 건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언제나 완벽해야할 메이드 벨 마이아 스스로에게는 너무 큰 실책처럼 느껴졌다.
‘후우… 진정하자…’
어쨌든, 예니카 입장에서라야 이제부터 퓰란을 향해 에드와 동행할 것이니 진도를 뺄 기회는 많을 것이다.
오히려 벌써부터 저렇게 물고 빨고 다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니, 벨 입장에서는 좀 든든한 기분이 들 지경이다.
사실 벨이야 자기 주인님인 에드가 누구와 엮이든 간에 박수를 쳐줄 준비가 되어있으나, 유독 예니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애 방면에서는 그야말로 쑥맥이나 다름 없으니, 조금쯤은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타냐 로스테일러가 그렇게 놔둘 맘이 없다는 것이다.
타냐는 에드의 주변 인간 관계를 전부 끌고 가게 만들기 위해 수를 쓰고 있었다.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오라버니의 그 화려한 인맥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타냐 주인님께서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려나…’
벨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벨 입장에서야 제 주인인 에드 로스테일러가 어떻게 되든, 그를 보조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만…
솔직히 예니카와 에드가 퓰란까지 그 긴 여정을 동행하고 오면, 선이란 선은 다 넘고 나서 돌아오리라는게 벨의 추측이었다. 그리 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
그간 에드 로스테일러는 공작가와 아켄섬을 오가며 워낙 바쁘게 움직여서 정신이 없었으나…
퓰란 같이 낭만 넘치고 아리따운 땅에 좀 여유로운 일정으로 예니카와 다녀오게 된다면… 사실상 여기서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닌가…?
벨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시 빠져있다가, 이내 훌훌 고개를 털어버렸다.
사실 벨이 고민해봐야 별 의미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냥 퓰란으로 떠나는 에드와 예니카를 배웅할 준비나 잘 하자. 메이드에게는 메이드의 본분이 있다.
그리 되새기며, 벨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복도를 가로질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