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2)
정령에게는 죽음의 개념이 없다.
목이 잘려도, 복부를 관통 당해도, 아무리 많은 피를 흘려도 결국 유체 상태로 돌아가 마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뿐이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일정 시간 마력을 복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정령사의 부름에 응해 현현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허나, 수명의 개념은 존재한다. 죽음의 개념이 없는데 수명은 있을 수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긴하다.
정령의 최후는 죽음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맞이하게 된다.
정령 학자에 따라 부르는 방식은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자연 환원’이라 부른다.
정령으로서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령 감응이 뛰어난 정령사의 마력이 필요하다. 위계를 높이지 못하고 마력이 바닥나게 된다면, 정령의 영혼은 유체상태로 돌아가 잠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흐르는 물이 되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이 자연 속 순환 구조의 일부로서 살아가다가 다시금 유체 정령이 되고, 하위 정령이 되어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순환을 시작한다고 한들 유체 정령이 되기 전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새로운 삶인지, 아니면 이어지는 삶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영원히 순환하는 것.
그것이 정령의 생애였다.
“태산만한 곰 정령 하나 조사하자고 그 먼 퓰란까지 가다니, 신임 교수 직함 단지도 얼마 안됐는데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냐?”
“받은 만큼은 일해야죠. 사실 얼마나 열불나게 일을 해대든 간에 받은 거에 비하면 충분히 흑자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두 사내가 신축 트릭스관 앞 정원에서 연초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굳이 연초를 피우는 습관은 없었지만, 업무 때문에 칼레이드 교수와 자주 어울리다 보니 한 번씩 피우게 되었다.
화려한 마법학 교수 로브를 두른 채로, 학과장 칼레이드는 다 피운 연초를 대충 바닥에 던졌다.
“학사 본부를 대체 얼마나 털어먹은 거냐?”
“협상은 제가 아니라 타냐가 주도한 거니까, 저한테 물으신들 별 의미는 없어요. 어쨌든 출장 보고는 올렸으니까 갔다 옵니다? 별 불만 없으시죠?”
에드 로스테일러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칼레이드가 직무 대리로서 업무를 분담 받는다. 아직 트레이시아나 조교수가 완벽하게 1인분을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업무가 늘어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칼레이드 교수였지만, 오만상을 구길 뿐이지 별 다른 말은 하진 않았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교수직에 오른 뒤로는 칼레이드 교수와 많이 어울렸다.
황실 실세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이유로 에드 앞에서는 다들 쭈뼛거리거나 예의를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유독 칼레이드는 그런 권위의식에서 탈피해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신분 보다는 배움의 미덕이 더 강조되는 곳이고, 명목상 칼레이드는 에드의 상관이니 크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허나, 그렇다고해서 대륙 최대의 실세 가문 사람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는 강심장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칼레이드 교수 쯤 되니까 에드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한 잔 하려했는데… 텄네, 텄어.”
“학기 중에는 음주를 좀 자제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학과장 달았으니까 보는 눈도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술맛이 달달한 걸 어떡하냐~. 이 자식이, 연초 같은 거나 배우고. 넌 이런 거 피지 마라…. 몸에 안좋다~.”
트릭스관 정원의 벤치에 털썩 걸터 앉은 채 양팔뚝을 등받이에 올리고는, 하늘을 훅 올려다보며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생이 퍽퍽하면 술이 달아지는 거다~. 고론산 증류주나 퓰란산 와인이 달아지는 때가 올 거다~ 뭐냐, 그 표정. 아직 인생이 달달~하니까 술맛이 쓴 거지. 너도 언젠간 알거다~.”
“…”
“뭐냐, 그 표정.”
에드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칼레이드를 보고 말했다.
“너무 허세부리면 학생들한테서 안 좋은 소문이 돌겁니다.”
“허, 허세?! 나 방금 허세 부리는 것 같았냐…?!”
“술이 달면 단 거고 쓰면 쓴 거지 무슨 의미부여를 그렇게….”
“이 정도면 꽤 마초적이고 멋있는 대사를 탁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술 잘마시는 거 빼고는 자랑할 게 없는 주정뱅이가 자기 합리화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 앞에서는 좀 자제하시죠. 학과장 쯤 됐으면 권위 유지도 중요하니까.”
사실 에드는 에드대로 칼레이드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하는 입장이었다.
칼레이드는 직속 상관이지만, 신분과 영향력으로는 에드가 위다.
결국 그 묘하게 맞물리는 균형 덕에 서로가 서로에게 스스럼 없이 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피곤한 상황 일지도 모르겠으나, 에드 입장에서는 이런 말을 주고 받을만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서 오히려 썩 괜찮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말이 심하구만! 나는 학과장 달고서도 신랄하게 갈굼이나 당하고 있는 신세고~. 이러니 술이 달지.”
“어쨌든 필요한 보고는 다 올려뒀고, 업무 인계도 끝났으니까 가보겠습니다.”
“그래~. 우리 에드 나리, 학사 업무도 하고 연구 업무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귀족 노릇도 하느라 많이 바쁘겠구만.”
“알면 일 좀 하십쇼. 그럼 이만.”
에드는 서류가 들어있는 목재 케이스를 들어올리고, 대충 손을 휘적여 칼레이드에게 인사를 했다. 수배해놓은 마차가 올 때가 되었으니 슬슬 떠날 시점이었다.
“야, 에드.”
그러나, 슬슬 트릭스관 언덕의 계단으로 발길을 향하려던 에드를 칼레이드가 불러세웠다.
새 연초를 꺼내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칼레이드는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넌 될 놈이다.”
칼레이드 록스테르.
생애의 절반을 전쟁터 혹은 무법지대에서 보내며, 결국 전쟁영웅의 영광을 안고 실베니아에서 교편을 잡게된 학과장.
면도도 제대로 안하고, 항상 헤벌레하게 뜬 눈으로 만취해 있거나 연초나 피워올리고 있는,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는 사람. 학과 선임들은 물론이고, 후임 교수들한테까지 야단이나 맞는 그런 인간이었다.
허나, 썩어도 준치다.
“너, 글래스트나 젤란처럼 되지 마라.”
목제 서류가방을 바로 든 채 가만히 뒤돌아보고 있는 에드를 향해, 칼레이드 교수는 연초 연기를 뿜어낸 뒤 이야기했다.
아인족 전쟁의 세 영웅.
탐구자 글래스트, 무법자 칼레이드, 절단자 젤란.
그 중 글래스트는 사망했고, 젤란은 생애에 환멸을 느낀 채 세상을 떠돌고 있다고 했다.
둘 모두, 칼레이드에게는 함께 사선을 넘어왔던 전장의 동료들이었을테다.
그 끝맺음이 좋지 않았던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칼레이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야기했다.
“난 될 놈이었던 자식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불행해지는 걸 너무 많이 봤어.”
“…”
“넌 안 그랬으면 좋겠다.”
에드는 연초를 피워올리는 칼레이드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하늘에 울려퍼지는 용의 포효도 진즉에 잦아들었고,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무대도 막이 내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같은 하루 속에서 끝까지 버텨내, 그 이야기의 끝을 확인했다.
남아있는 것은 후일담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동화책이 으레 그렇게 끝난다.
그 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책을 탁 하고 덮으면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칼레이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만 바라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거기에 뭐라 대답해줄만한 말이 있을 리가.
그런 의례적인 감사인사만 남겨둔 채로, 에드는 언덕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
홀로 남은 칼레이드 교수는 벤치 등받이에 널찍하게 기댄 채,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기우 였구만.”
*“에, 에드 교수님…. 저번에 말씀해주신 원소 감응 이론을 접목해보니까, 확실하게 마력 반응이 더 좋아졌어요… 저 혼자서는 깨우치기 힘들었는데… 그… 감사드리고 싶어서요…”
생활동 입구 광장에서 마차가 도착하는 걸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칼레이드 교수에게 업무 보고를 마친 후, 이제 퓰란으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
미리 고용해두었던 마부가 페일로버 남작저에서 예니카를 태운 채로, 이 곳 아켄섬까지 올 예정이었다.
예니카가 오면 반나절 정도 쉬었다가 퓰란으로 출발이다. 아마 예니카도 오랜만에 학사 땅을 밟아보는 것일테니, 각별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 선물을 좀…”
그 때, 분수대 난간에 앉아있는 나한테 쭈뼛대며 다가온 그 학생은 낯이 익다.
원소학 수업 때마다 맨 앞에 앉아서 총명하게 눈을 빛내며 강의를 듣던 소녀다.
나도 사람인지라, 수업태도가 좋은 학생에게는 더 정이 갈 수 밖에 없다. 매사 열심히 하는 모습이 학생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원소 마법 관련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줬던 기억이 난다.
작은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앙증맞게 정리한 그 소녀는, 망설임 가득한 움직임으로 내게 자그마한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제가 그 시, 시, 실력이… 아직 좀 모자라서… 맛이 없을 수도 있긴한데…!”
“…”
“그래도, 보답이라도 됐으면 좋겠어서… 그, 정말 알려주신 부분 큰 도움이 됐거든요! 그러니까… 성의라도 표하고 싶었어요…”
나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한 손을 내밀어서 받았다.
“그래, 고맙다. 켈커스 가문의 피오른 학생이었나?”
“네! 이름 기억 해주셨네요…!”
“애초에 담당 학생은 다 기억하지. 그런데, 사적인 선물이나 금품을 주고 받는 행위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자제해두는 게 좋아. 지금 주는 건 딱히 금전적으로 엄청난 건 아니 것 같아 보이고, 성의가 담겨 있는 것 같으니까 받아두긴 하겠다만.”
“네, 네에…! 그, 그런 생각은 못해봤네요. 혹시 폐가 됐다면 죄송해요!”
“아니, 폐 될 것 까진 없고 그냥 주의하란 이야기였다. 성의있는 선물 고맙다.”
그렇게 착실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더니, 소녀는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만 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열어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슬쩍 상자 입구를 찾아보는 순간이었다.
– 히히잉
– 타닥, 다그닥.
지친 말이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소리.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출입절차를 마친 커다란 마차 하나가 생활동 입구 광장의 길을 따라 들어왔다.
페일로버 남작저의 코스모스 문양이 박힌 마차는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럽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생활동 광장을 가로질러 내 앞에 멈춘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윽고, 그 안에서 페일로버 남작령의 주인인 여남작 예니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중부 지방에서 정령술을 수련하는 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그 이름. 사실상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방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희대의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의 등장에, 주변 일대의 시선이 슬쩍 모여들었다.
나야 뭐 자주 보는 입장이니 크게 신기할 것도 없지만, 학생 광장의 행인들에게는 신기한 광경일 것이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 수수한 성품 탓인지, 화려한 드레스 같은 것은 잘 입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꽃모양 자수들이 새겨진 수수한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그녀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래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주고자 갖가지 예쁜 문양들이 조화롭게 수놓아져 있는 옷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간편복이라는 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니카는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마차 계단을 타고 휙휙 내려와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바라본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사는 꽤나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왔냐, 예니카.”
“에드!”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 예니카는, 문득 얼굴을 붉히며 눈치를 보는 내 옆의 소녀를 보고는 잠시 굳었다.
피오른 학생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전설적인 정령사의 모습을 보면서 휙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이 애는 누구…? 혹시 에드한테 배우는 학생이야?”
“그렇지. 저기 동북부 평원지대를 관리하는 켈커스 가문의 피오른 학생이다. 우등생이야. 자 인사해라.”
예니카 페일로버와 안면을 터둘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피오른 입장에서는 행운일 터.
허나, 예니카는 내 손에 들린 상자와 쭈뼛거리는 피오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윽고 괜시리 흔들리는 동공을 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에, 에드… 학생들이랑 많이 친한가봐?”
“…? 아니, 딱히 친한 편까지는 아니지만… 따로 벽을 치진 않지. 내가 가르쳐야되는 애들인데.”
“그래애… 그렇구나… 피오른 학생, 우리 로스테일러 공작령의 도련님이신 에드한테 이렇게 선물도 주고, 정말 고마워…”
“네에…? 네, 네에…”
예니카는 피오른에게 감사인사를 하면서도, 뭔가가 두려운 듯이 동공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인사를 나누면서도, 예니카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이 피오른을 쭉 쳐다보다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에, 에드! 우리 늘 하던 거! 있잖아!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밥 먹듯이 하는 그거 해야지!”
“뭐?”
“아하하, 에드도 참…! 벌써 잊어버렸어…? 자, 여기… 그.. 이마…”
보는 눈도 많건만, 예니카는 휙휙 다가와서 내 코앞에서 자기 이마를 드러내보였다.
이제야 이해했다. 몇 번이고 과부하가 와서 실패했던 이마에 입맞추기를 여기서 해보이겠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과감히 이마를 내민다는 것은, 예니카 페일로버의 의지의 표명이다.
몇 번이고 연습해도 자기 혼자 코피 흘리고 나가 떨어지던 쑥맥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슬슬 퓰란에 갈 때가 다 되니까 마음도 더 굳건해진 것일까.
그런 예니카의 노력에 성의있게 보답해주려거든, 나도 맞장구를 쳐주는 수밖에 없다.
나는 예니카의 어깨에 팔을 휘감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 잠깐 사이에 느껴지는 예니카의 열기는 거의 용광로 같았다. 홍당무 같은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면서 지팡이를 쥔 양손을 꾸물꾸물 거리는 것이, 어떻게든 폭발을 참아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처음으로 입맞출 때는 예니카가 먼저 덤벼들었던 것 같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럼 그 때는 대체 얼마나 용기를 낸 것일까. 작금의 예니카를 보고 있으니, 그 때의 예니카에게 더더욱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별…”
당장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예니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별거아니네!매일같이하는일상과도같은입맞춤이라그런지딱히대단한감정도들지않고평범하네!하긴그렇지우리한테는이정도입맞춤은뭐안부인사같은거니까!”
숨은 좀 쉬고 말하라고 지적하려다 말았다. 괜히 그런 지적을 당하면 수치심이 한계에 달해 쓰러질 것 같다.
예니카는 얼른 이마를 슥 내리고, 피오른에게 보란 듯이 이야기했다.
“어머, 미안해 피오른 학생! 갑자기 당황스러웠지! 우리는 이게 일상이거든! 일상!”
“허…어…”
“그렇지! 우리 연구 일정 맞추려면 빨리 퓰란으로 가야지! 지금 바로 출발해야지! 안 그래 에드?!”
“뭐? 너 로스테일러 영지에서 여기까지 오는것만으로도 고생 했을텐데, 반나절 정도 쉬면서 간만에 학교 구경도 좀 하다가…”
“아니! 지금 가야지! 일을 미루면 안 되지! 자 가자! 자!”
내 팔을 꽉 끌어안아서 잡아당기며, 예니카는 얼른 마차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야 일처리 빨리하면 좋으니 상관없지만, 먼 길 온 예니카가 피곤할까봐 일정을 좀 널널하게 잡아두었던 것이다.
본인이 괜찮다고 한사코 사양하며 마차쪽으로 나를 잡아 당기기에,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탕!
그렇게 마차의 문이 닫혔다. 창문 너머로 어안이 벙벙해진 피오른의 표정이 보였다.
마차가 나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산들바람이 휘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갈무리하며, 피오른은 가만히 마차를 마중해줄 수밖에 없었다.
*“와, 이 쿠키 맛있네!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맛있진 않네!”
예니카는 피오른이 건네준 수제 쿠키를 자기가 거의 다 먹어버렸다.
“별로 맛 없어! 아니, 그래도 그… 되게… 성의가 많이 들어가 있네…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맛없다고 단언해버리는 것도 좀… 성의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열심히 만들었을텐데…”
“…”
“아니야, 그래도 맛 없어! 아닌 건 아닌거야!”
“…”
무슨 자문자답하는 것도 아니고…. 쿠키를 품평하던 예니카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맛없다고 단언했다.
그래도 착한 마음씨는 못 버려서 또 쿠키에 배인 정성을 무시는 못하는 것이, 누가봐도 예니카 페일로버였다.
마음먹고 매몰차게 하려면 끝까지 매몰차게 하던가. 이도 저도 아닌 태도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우스울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매몰차게 하려고 마음 먹어도 저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안 피곤하겠어, 예니카?”
“내 생각엔 같이 학사에 남아있는 게 더 피곤할 것 같아…”
아켄섬을 벗어나온 마차는 천천히 퓰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평원지대 여기저기엔 꽃이 피어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나비 몇 마리가 날아드는 평화로운 광경.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이따금씩 마부가 채찍질을 하는 나른한 광경에 썩 마음이 편해졌다.
“있잖아… 에드는 이런 선물 많이 받아…?”
“뭐, 학생들한테?”
“응.”
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꽤 많이 받긴 하지. 고맙게도 학생들 중에는 가르침 받은 것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있는 모양이야. 나 학생 때는 그런 거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입장이 바뀌고 나니까 나도 그렇게 표현 좀 할 걸 그랬더라. 뭐, 그 때는 목숨이 위험했으니까 여유가 없었지만.”
“그, 그렇구나… 그럼 꽤 자주 있는 일인거네…”
“그런 셈이지.”
예니카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다가 망설이며 이야기 했다.
“있잖아… 에드, 내가 질투하는 건 아닌데 말야…”
“…”
“아니, 말 정정할게.”
예니카는 예니카대로 그간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인지…
“나 질투나.”
숨을 한 번 들이킨 다음, 위풍당당한 얼굴로 그리 이야기한다.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하는 것 치고는 그 내용이 좀스럽다…”
“나, 나도 자각은 있어! 그래도 질투가 나는 걸 어떻게 해!”
“…”
“겨, 경험상 질투 나는데 질투 안 나는 척 하면 나만 더 비참해진단 말야!”
“그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려는 태도 그 자체는 높게 산다…”
“근데, 질투 나는 걸 인정해도 비참해지네… 이건 뭘까… 뭘 어떻게 하든 간에 난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뭐, 굳이 비참해질 필요까지야 있냐.”
예니카를 어떻게 위로해야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입장 바꿔봐도 마찬가지야. 네가 다른 남자랑 사이 좋은 듯 이야기 주고 받고 있으면, 나는 나대로 질투가 날지도 모르지.”
“에, 에드가? 나한테? 질투를?”
“말했잖아. 난 너랑 사이좋은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그, 그래…?!”
뭐, 그런 상황이 온다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건만, 예니카는 그거가지고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휙휙 올린다.
“그런데, 전제가 너무 비현실적인걸… 에드말고 다른 남자라… 별로 상상해 본적이 없는데…”
“사실 굳이 남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귀족이 되었으면 여기저기 발을 넓혀놓는 게 좋을거야.”
“글쎄에… 학사에 있을 때는 다들 편하게 대해줘서 좋았는데, 남작저 안주인이 된 뒤로는 좀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난항을 겪는 중이야.”
“시간이 다 해결해줄거다.”
“이러고 있으니까 나만 손해보는 거 같잖아! 구조적으로 나만 질투할 수밖에 없네…!”
예니카는 머리를 북북 쓸어내리며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허탈해졌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우…”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탄식이었다. 그 이유를 대보라한다면…
“나, 질투 같은 거 하는 사람이었네.”
“원래 사람이 항상 긍정적인 감정만 안고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안 그래?”
“그래도, 에드한테 짐은 되기 싫었단말야.”
“짐 안 돼.”
“이런 식으로 툴툴 대는 것도 신경 쓰일 거 아니야.”
“그 정도 투닥거리는 것도 없이 인간관계가 유지가 되겠냐고.”
괜시리 자기 감정에 탄식해대는 예니카를 가만히 놔두기도 뭣해서, 나는 확실하게 이야기 해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말한 적 있잖아. 서로한테 완전히 폐가 되지 않는 관계가 어디있겠냐고. 너는 너대로 나한테 빚지고, 나는 나대로 너한테 빚지고. 그렇게 서로 퉁쳐가면서 사는거지.”
“그런가… 역시 에드 말이 맞겠지. 동화 속 공주님이랑 왕자님처럼, 운명이 약속한 천생연분 같은 건 세상에 없는 거겠지… 응, 현실이니까.”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예니카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휙 바로세웠다.
갑작스럽게 쭈뼛거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아마도 공주와 왕자에 빗대어서 설명한 자기 말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우친 모양이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 아하아, 다들 기운이 펄펄 넘치네. ]예니카가 얼굴을 확 붉히며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마차 좌석 맞은 편에 휙 하고 현현된 바람 정령이 하나 나타났다.
소녀의 형상을 한 그 정령의 본래 모습은 집채만한 늑대다. 허나 지금은 마력 소모를 최소화한 형태로 현현되어 있는 상태다.
“메릴다.”
[ 여행길 말동무가 필요해보이진 않네. 너희 둘다. 그래도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거든. ]퓰란을 향하는 마차 안.
지금까지는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던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는, 다각대는 마차바퀴의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다가… 이윽고 말을 이어나갔다.
[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 말인데… 그 거대곰의 최후에 대해선 굳이 캐지 않는 걸 추천해. ]갑작스럽게 스스로의 의지로 나타나는 일은 잘 없는 녀석이다.
그래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메릴다는 요염한 표정으로 걸터 앉아서, 그 새하얀 맨발을 휘적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