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3)
젊었을 적엔 꽤나 강렬한 삶을 살았겠다. 토렌 마을 촌장 글렘스의 첫인상이었다.
회갈색 장발 머리칼과 더불어서, 희끗해져가는 수염과 눈썹은 이미 전성기가 끝나고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총명하고 생기가 도는 것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향후 십몇년 안에 죽을 맘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딱히 잘난 체하거나 자신을 뽐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흐르는 인간이 있다.
마을을 대표하고 있는 글렘스가 그런 인간이었다.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호탕하여 두루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마을의 큰 어르신인 것이다.
“먼 길 찾아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을 회관 쪽에 조촐하게나마 숙소를 준비해두었습니다만… 목축지대 변방의 작은 마을이니만큼 도련님의 권위에 맞는 잠자리가 되진 못할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토렌 마을 입장에서는 이런 변방에 공작가 사람이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대사건이었을 터.
이미 예니카와 나란히 타고 있는 마차가 마을 초입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나이가 찰대로 찬 사람들이었고, 이따금씩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보이긴 했으나 다들 목장 일을 하느라 바빠보였다.
그래도 귀족가 도련님이 등장한다는 말에 호기심에 못 이겨, 하던 일을 두고 광장 여기저기에 모여앉아 구경을 하곤 있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마을 전경을 한 번 슥 훑어보았다.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상점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 규모가 적다.
이런 시골 마을일수록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하는 법이다.
‘잡화점’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물건들을 다 파는 만물상이 하나, 식료품 판매와 식당을 같이 하는 곳 하나, 외부인 잠자리는 모두 이 마을 회관에서 해결해주는 듯 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목장이나 농가들로 꽉꽉 차 있다.
풍경은 아름답다. 어딜 봐도 예술작품이다. 알프스 산맥이나 안데스 산맥의 능선을 따라 쭉 펼쳐져 있던 목축지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청명한 하늘이 녹지와 적당히 대비되어, 그냥 아무데나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의 묵은 체증이 싹 다 쓸려내려가는 기분이다.
“에드는 여기서 묵을거야? 나는 아마 본가에 가서 짐부터 풀고 올 거 같아.”
“아마 그럴 걸. 급한 건 없으니까 천천히 다녀와.”
예니카는 마차에서 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그러면서 온갖 곳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을사람들을 곁눈질로 보더니, 괜히 꾸물거리면서 눈치를 보았다.
“글렘스 할아버지. 잘 지내셨죠? 허리 아프신 건 좀 괜찮아요?”
예니카가 촌장을 향해 살갑게 인사를 건네자, 잠시간 글렘스 촌장은 고민에 빠진 듯 대답을 망설였다.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지 않는 촌장의 모습에 예니카가 잠깐 당황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여기선 내가 한 마디 해줘야 할 듯 했다.
“평소처럼 하셔도 됩니다.”
글렘스 촌장은 예절을 제법 따지는 경향이 있는 것인지… 내 눈치를 한 번 살핀 것이다.
예니카야 뭐, 남작 작위를 달고 있지만 고향에서까지 깐깐한 존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예니카의 성향상 그런 식으로 굴면 더 힘들어할 거란 사실을 마을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듯 하고.
그러나, 아득히 높은 공작가 작위를 달고 있는 내 앞에서는 또 다른 문제다.
차원이 다르게 높은 신분을 달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남작 작위를 달고 있는 자에게 말을 놓고 편히 대하는 건 예의에 안맞는 일이다.
오히려 예니카가 글렘스에게 존대를 하고 있으니 족보가 꼬이는 느낌까지 든다. 정작 예니카는 나를 편하게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가장 높은 사람인 내가 편하게 해두라고 언질을 해야하는 상황.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예니카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다.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변방지대까지 와서 세세한 예법까지 다 따지진 않습니다.”
“에드 도련님은 자비로우시군요. 살면서 귀족가 도련님께서 존대를 해주시는 것은 처음 경험해봅니다.”
글렘스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예니카에게 말을 건넸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예니카.”
그리고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근데,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괜찮겠니? 모처럼인데.”
*방에 들어와서 보니 이것도 저것도 다 2인용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애초에 방 자체가 2인실이다. 침대도 두 개고, 간단히 준비된 생필품도 전부 2개다.
[ 예니카가 부끄럼 많은 성격이 된 이유를 알 것 같네… ]반대쪽 침대에 걸터 앉아서 허공에 휘휘 발을 휘젓고 있던 메릴다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짐을 풀어서 적당히 정리해둔 다음, 괜히 걸리적 거리던 망토나 외투를 벗어서 정리해두었다.
[ 방금 적당히 마차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수근대는 소리를 들어봤는데, 차마 내 귀로 듣고도 도저히 입에 담을 수가 없겠더라. ]예니카는 촌장의 말에 한사코 팔을 휘저으며 얼굴을 붉히고는 후다닥 자기 본가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예니카와 내가 한 방에서 동침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예니카한테 차였네. ]메릴다가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그리 이야기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은근하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재미 없다는 듯이 휙 고개를 돌리곤 빈 침대에 몸을 묻어버린다.
예니카에게 차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지만, 누구보다도 메릴다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 …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서 잠시간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메릴다는 한숨을 휙 흘렸다.
[ 아마 걘 너 없인 못살걸. ]“나도 알아.”
[ …우와, 완전 쓰레기 같아… ]“…”
툭 던지듯 내뱉은 경멸의 말이기에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능글맞은 메릴다 성격상 항상 곧이곧대로 말하는 법이 없다.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를 휙 벗어서 옷가방 위에 던져놓았다. 상처 가득한 몸이 드러나지만, 메릴다는 침대에 누운 채로 시선을 내리 깔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누웠다.
[ 예니카도 알 걸. 네 여동생이 네 반려자 자리가 비어있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거. ]그대로 나도 내 침대에 걸터 앉았다.
메릴다는 건너편 침대에서 한숨을 휙 흘리더니, 얼른 상반신을 일으켰다.
[ 예니카도 바보 아니야. 남작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만 들어도, 네 위치가 지금 클로엘 제국의 정치 지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알지. ]“…”
[ 걘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은 거야. ]메릴다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알고 있다.
토렌 마을에 도는 소문에 대해 인지하고도 별 다른 적극적인 해명을 하지 않은 것.
그 사실에 예니카가 죽을듯한 표정으로 사죄를 해댄 것도, 사실은 내 반려자 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로스테일러 공작가에 폐를 끼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예니카는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뻔하다.
[ 확인하는 게 무서운 거겠지. 마지막에는 에드 네가 입장의 차이, 신분의 차이 때문에 예니카를 밀어내게 될 거라 생각하는거야. 그래서 마지막 한 걸음을 못 내딛는 거겠지. ]발랄하게 발을 휙휙 휘젓고 있던 움직임도 멈췄다. 메릴다는 종종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사뭇 진지해질 때가 있었다.
[ 걔 성격 알잖아. 지금 이 정도 위치만으로도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금에 만족하면서 살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하지만 나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 티르칼락스의 죽음이랑 연관이 되어 있는 거냐..? 굳이 티르칼락스에 대해 알아보지 말라고 말한 거 말이다.”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메릴다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의 유해.
한 때, 메릴다가 직접 그 위치를 알려주겠다며, 때를 기다리겠다고 언급한 적은 있다.
당시에는 굉장히 협조적이었던 것 같은데, 근래 들어서는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어대곤 했다.
[ 유해를 찾아주는 건 일도 아니야. 다만, 티르칼락스라는 정령이 어떻게 생을 마감하고 자연으로 환원되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지는 말아달라는 이야기였어. 사실 정령의 유해 정도만 있으면 정령술 수련은 거뜬하거든. ]“그 때 입장이랑 지금 내 입장은 완전히 다르지. 나는 학사 소속으로 연구 업무 처리하려고 온 사람이잖아. 지금은.”
[ 그래서 망설였던 거야. ]능글 맞은 고위 바람 정령은, 그제서야 웃음기를 지우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티르칼락스는 인간을 사랑했어. ]이동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인지, 이미 창밖의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은 하늘과 더불어서, 길게 늘어져가는 그림자 사이에서 메릴다는 드러누운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것도 이 퓰란의, 아무것도 없는 농가 소녀를 사랑했었지. ]“표정을 보니 결말이 좋진 않았나 보네.”
[ 응. 뭐 뻔한 이야기지만, 살아가는 시간대가 다른 두 존재가 필요 이상으로 교감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야. ]그 언젠가 북쪽숲 호수 위를 거닐며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메릴다를 본 기억이 난다.
눈망울에 담긴 별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바람 정령이 늘상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변하지 않는 건 저 드높은 하늘 위의 별과 달 뿐.
지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스러져가고, 다시 일어서는 일을 반복해나가는 것이다.
[ 하면 안 될 사랑을 했지. 그리고, 소녀가 세상을 떠난 뒤 고독에 못이겨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거야. ]“…”
[ 그게 티르칼락스의 죽음이야. ]해선 안될 사랑을 했다.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존재들에게는 고독이야말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질병이다.
긴 세월을 버텨온 고위 정령들은, 그 치명적인 질병에 대처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갖춰야만 했다.
최고위 정령인 티르칼락스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최고위 정령조차도 마음을 꺾어야만 했던 사정이란 무엇이었을까.
[ 인간의 형태로 현현한다고 해서, 우리를 인간이랑 같다고 착각하면 안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가장 각별했던 사람의 모습을 본따서 현현한 의태 같은 것에 불과하잖아.”
[ 응. 세상에는 생각보다 성립 못할 인연이라는 게 많은 법이지. 동화 속에서야 금단의 벽을 이겨내고 서로의 사랑을 취하는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많겠지만… 이제, 예니카도 스스로 잘 알고 있거든. ]세상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없다.
[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고, 자신은 동화 속 주인공 같은 게 아니라는 거. 예니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메릴다는 괜히 수심이 깊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 바람 정령은 그 누구보다도 예니카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니… 그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것이리라.
[ 티르칼락스는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거든.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했으니까. ]“…”
[ 그 진상을 확인한 예니카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그게 좀 걱정됐었어. ]이제야 훌훌 털어놓는 속내.
메릴다가 약간이나마 비협조적으로 굴었던 것은, 결국 예니카의 마음을 걱정한 탓이었다.
[ 뭐어, 에드 너한테 무리한 요구는 안할게. 로스테일러 가문의 위세는 많이 올라왔지만,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게 귀족가의 권력 다툼이라는 거니까.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해. 다만… 이대로면 예니카가 너무 불쌍하잖아. ]결국 마주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예니카 페일로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이성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나? 그녀를 반려자로 맞이해, 함께 가정을 꾸릴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왜 이렇게 애매하게 굴고 있는지, 너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냐?”
[ … ]네 하고 싶은 말만 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리 당당히 이야기 해보았다.
사실 예니카가 원한다면, 내 반려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놓는 데에서 오는 정치적 이득 같은 것은 내려놓아도 별 상관 없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좋은 사람이다. 반려로 맞이하기에 부족한 부분도 없을뿐더러, 죽을 때까지 날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예니카에게 이성적으로 큰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예니카 한 명을 반려로 맞이하기 위해 로스테일러 공작가 전체가 포기해야만 하는 정치적 실리,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크기의 것인지 예니카 또한 구구절절 잘 이해하고 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타인의 호의와 사랑으로 인한 부담으로 한 번 무너져 본 적 있는 소녀다.
이대로 모든 배경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밀어붙이면, 그녀는 평생동안 그 부채의식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인간이 그렇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주거나 희생해준 부분이 있다면, 절대로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그 부채의식 위에서 성립하는 관계가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평생토록 그 압박에 눌려 살아야만 하는데, 심지어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영애로서 피비린내 나는 정치 전선에까지 나서야 할 것이다.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온 순박한 소녀 예니카 페일로버가 말이다.
그것은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
[ 그 말을 할 줄 알았어. ]메릴다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더니, 언제 진지했냐는 듯이 갑자기 또 앙탈을 부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 카하핫. 결국 너도 예니카를 걱정하는 것 뿐이잖아? 차라리 그러니까 마음은 편하다. ]“오히려 더 걱정을 해야하는 상황 아니냐? 나 같은 인간이랑 엮인 시점에서, 예니카의 인생도 그리 순탄치는 않을 거라고 보는데.”
[ 오히려 좋다고 봐. 있잖아, 에드. 내가 봤을 땐, 그냥 네가 마음을 다잡으면 될 일인 것 같은데. 이도저도 안되면 네가 각오를 다지고 나서 희생하면 될 일이잖아? ]“각오? 무슨 각오? 희생은 또 뭐냐?”
메릴다는 꺄하학 거리면서 웃더니,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라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흥미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죽 비죽 올리며 웃는 메릴다의 모습에서, 그게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가늠이 갔기 때문이다.
내가 반달눈을 뜬 채 쳐다보고 있었지만, 메릴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대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녕, 에드.”
예니카가 짐을 잔뜩 싸들고 방에 찾아온 것은 한 시간 쯤 지났을 때였다.
본가에 가서 짐을 풀어놓고 오겠다던 예니카는 어쩐 일인지, 짐을 그대로 들고 내 숙소로 찾아온 것이다.
“나, 집에서 쫓겨 났는데…”
“…뭐?”
열린 문 틈 사이로 주눅이 든 예니카의 얼굴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달이 중천에 떠있는 야심한 시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묘령의 여성을 집밖으로 내쫓는다는 게 말이 되는건가 싶었지만…
“왜 2인용 숙소를 준비해줬는데 집에서 자겠다는 거냐면서, 엄마가… 쫓아냈어…”
“…”
세일라 페일로버… 그 강단 있는 여자의 결단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너, 너무해… 방문도 닫아버리고, 침대 시트도 싹 다 빼버렸지 뭐야… 오늘 여기서 잘 생각하지 말라면서…”
“…”
“그래서, 아는 분 집이나 친구 집에 신세를 질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문이 그렇게 나있는데… 남의 집 가서 신세 지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이래봬도 예니카 페일로버는 희대의 천재 정령사이자 페일로버 남작가의 안주인이다.
그 신분이 무색할정도로 주눅 든 모습에 나는 그만 눈가를 쓸어내리고 말았다.
“그래, 일단 들어와라… 오늘은 같이 자자…”
여기서 문전박대를 할 수도 없으므로 나는 일단 방 안에 예니카를 들였다.
예니카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일단 잔뜩 짐이 든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정령학 서적들을 정리해서 넣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예니카는 쭈뼛거리면서 들어와서 맞은 편 침대에 스윽 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
“…”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창밖에서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는 야심한 시각.
램프 불빛 하나밖에 광원이 없는 이 숙소의 방은, 은은하게 흔들리는 촛불에 이끌려 그림자들도 덩달아 춤을 추고 있었다.
“너, 너무 폐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해… 에드… 근래들어 나 때문에 이것저것 고생이 많아서…”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늘 말하는 거지만 내가 신세지는 것도 많으니까, 너무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일단 그…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땀 좀 흘렸을 테니…”
뭐 그리 대단한 의미도 담긴 말이 아니건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두었다.
“씻어라, 일단.”
“…”
“…”
“…”
“내가 뭐 이상한 말 했냐?”
“아니! 아니! 전혀! 저어어언혀!”
예니카는 휙 고개를 들더니, 알았다면서 얼른 짐을 챙겨서 욕실 쪽으로 나아갔다.
나는 예니카가 떠난 뒤, 홀로 침대에 걸터 앉아서 한숨을 푹 쉬며 입가를 쓸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메릴다가 했던 말이 아른거린다.
쓰레기가 될 각오.
쓰레기가……….. 될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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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 viene? SE VI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