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6)
퓰란 지방의 산등성이를 따라 쭉 패여 있는 계곡의 형태는, 저 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발톱 자국처럼 보인다.
아리땁게 펼쳐진 산맥 지대 사이 사이에 이따금씩 드러난 그 계곡을 보며, 사람들은 산에 상처가 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해당 지형들은 그 먼 옛날 커다란 곰의 일격으로 무너져내린 흔적이었던 것이다.
산을 긁어내려서 다섯 개의 계곡을 만들어버린 그 최고위정령의 위용을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최근에서야 그 연관성이 제대로 연구되어, 학회에 보고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광경이다.
“산의 재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전되는 중 다소 과장된 부분도, 축소된 부분도 있겠습니다마는… 하늘을 따라 펼쳐진 구름에 이따금씩 드러난 그 거대한 곰의 그림자가 참으로 웅장했다고 하지요.”
“그게 대충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입니까?”
“구전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아시잖습니까. 이런 산골 동네이니만큼 무언가 체계적으로 이야기가 기록되거나, 대륙 중앙 쪽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일이 잘 없습니다.”
아무리 산골 구석 중에서도 구석에 처박힌 목축의 마을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규모의 사건을 목격했는데도 구전되는 이야기가 전부라니….
아무리봐도 이 토렌 마을은 다소 세상과 유리된 별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당시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을테니, 아마 저희 조상님들도 신이 진노했거나 커다란 자연재해가 일어났다고 생각했을테지요.”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여길만한 규모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제야 제대로 드러났다는 거 자체가 웃길 정도로.”
“아시다시피, 이곳 퓰란은 완전히 폐쇄적이고, 또 그 대사건이 일어났을 시대에는 장거리 교통이나 소식 전달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지 않았을테니까요. 결국, 그 재앙의 결과물만 자연스럽게 남아 이렇게 풍경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촌장 글렘스는 한적하고 목가적인 산골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이제 겨우 아침이라고 부를만한 시간이 되니, 이미 마을은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물을 운반하는 목장 주인들과 인부들이 낑낑 대며 움직이고 있었고, 노새들을 끌고 움직이는 소년들, 양들을 이끌고 초지로 나가는 양치기들, 빨랫감을 들고 천으로 향하는 아낙네들이 까르르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시골엔 시골에서만 느껴지는 향취라는 것이 있다.
언제나 품위와 권위를 생각하며 움직여야하는 로스테일러 본가나, 학구열 가득한 학생들로 가득찬 실베니아 아카데미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한참 동안 그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살았던 와중이라, 이런 한적한 시골 풍경에 오히려 더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희 마을이 본격적으로 대륙 중앙부와 대규모 상행길을 튼 것도 30년이 채 안됩니다. 황실 입장에서도 이런 산맥지대를 솔선수범 관리하기도 쉽지 않았을테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습니까.”
“예. 뭐, 마을 주민들은 다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으니 촌장으로서는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예니카 너는 구석에서 뭘 하고 있는 게냐?”
글렘스 촌장이 적갈색 소가죽 외투를 탈탈 털면서, 구석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예니카에게 물었다.
예니카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상태가 복구되질 않았다. 이른바 현자타임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간밤에 자기가 무슨 꼴을 취했는지 뒤늦게 생각이 나 수치심에 빠진 것이다.
분위기에 취해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인 것이 썩 부끄러운지, 예니카는 눈도 맞추지 못하고 숨을 훅훅 몰아쉬는 상태였다.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뻔했다.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뻔한 레퍼토리다.
귀족 작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색도 추레하다.
대충 땋아내린 연분홍빛 머리칼은 여기저기 잔머리가 비죽 삐져나와 있고, 눈도 퀭하고, 입술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번개 나무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이윽고 신음성을 내며 벤치에 다시 나자빠졌다.
“허, 허리가아….”
나는 그런 예니카를 보며 잠시 표정을 굳혔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해보이던 예니카가,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다 죽은 듯한 몰골로 요통을 호소 하는 모습.
뭐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글렘스 촌장의 눈치에는 대충 상황이 그려질 것이었다.
글렘스 촌장은 호탕하게 웃더니, 내게 슬쩍 다가와서 속삭이듯 이야기 했다.
“과연, 듣던대로 힘이 장사이신가 봅니다.”
나는 뭐라 대답하려다 말았다.
우리 동침했어요 라고 만천하에 알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중에 예니카에게 주의를 좀 줄까 싶다가도, 사실을 파악한 예니카가 또 어떤 식으로 얼굴을 붉힐지 충분히 상상이 되어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방면의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참으로 예니카답다.
“예니카.”
허나, 글렘스 촌장도 결국 이 퓰란의 사람인 것이다. 돌려말하는 거 없이 직설적으로 예니카에게 꽂아넣기를,
“오르테랑 세일라에게는 내 말해두마. 이왕이면 예니카에게 힘이 나는 음식 좀 많이 먹여두라고.”
훈훈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니카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헤헤거리다가, 문득 그 말의 속뜻을 이해하고는 다시 얼굴을 확 붉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흠? 말 그대로?
“…그, 그렇죠! 힘나는 음식! 힘나는 음식 많이 먹어야죠! 조사 업무도 해야하고, 남작저로 돌아가면 영지관리도 해야 하니까! 힘내야죠! 힘!”
무릎울 주먹으로 꾹꾹 누르면서 입술을 부르르 떨고서는 웃어보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나는 그쯤 해두라고 글렘스 촌장에게 이야기 한 뒤, 다시금 고개를 돌려서 탁 펼쳐진 산등성이의 모습을 보았다.
“요컨대, 에드 도련님은 저 커다란 흔적들이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가 날뛴 탓이라고 보고 계시는 군요.”
“예. 퓰란 지방의 토지 측량이나 지형 연구에 대한 보고 서류가 올라온지는 얼마 안됐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득한 먼 옛날의 바람 정령은 왜 그리 날뛰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정도로 강대한 존재가 날뛰었다면 누가 그 존재를 막아내고 제압한 것일까요?”
글렘스 촌장은 당연하고도 합당한 질문을 했다.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가 분노해서 날뛰었다면, 이 퓰란 지방을 다 초토화 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곰은 손톱 자국 정도만 이 산맥지대에 남기고서 누군가에게 제압당해 사라진 것이다.
“전설적인 대마법사 글록트 엘더베인조차도 최고위 정령을 제압하려거든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인재라고는 없다시피한 이 시골 산맥지대에 대체 누가 그 거대한 재앙을 막아냈단 말입니까.”
글렘스는 그리 이야기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충 그 답을 알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대충 그려지는 그림은 있는 것이다. 최고위 정령을 제압할 수 있는 인재라 해봤자 이 대륙에서도 손에 꼽으니까.
이 머나먼 퓰란 지방 땅에서 강림했던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의 이야기.
한참을 동떨어져 있는 아켄섬에서 수백년 간을 살아왔던 메릴다가, 그 거대 곰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 사실을 따져보면, 결국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뿐인 것이다.
“대현자 실베니아.”
퓰란 지방에 강림한 티르칼락스를 제압한 것은, 생전의 그 대현자였던 것이다.
* * *
“아이고, 에드 도련님! 토렌 마을에 도착 하셨을 때 가장 먼저 쏜 살 같이 달려나갔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방목해놓은 소들을 체크하러 산등성이까지 나가있었던 와중이라…!”
마을을 돌며 티르칼락스 강림 당시의 정보를 수집해볼까 하던 참이었다.
토렌 마을에서도 가장 이름난 목장 중 하나인 페일로버 목장에 도착했을 때, 제법 반가운 얼굴이 튀어나와 허리를 푹 수그렸다.
페일로버 목장의 주인, 오르테 페일로버. 우라부락한 근육과 호쾌한 웃음이 매력적인 중년 남성이었다.
이미 아켄섬에서 한 번 얼굴을 본 사이이니 만큼, 굳이 통성명은 필요 없었다.
“목장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암요. 거기다가 목초지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소들을 한 마리씩 점검하려거든, 결국 야숙 장비를 챙겨가서 그 근방에서 하룻밤 잠들어야 할 지경이라니까요. 아무튼, 먼길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집 안으로 드시지요! 자, 예니카, 너도 어서!”
“으, 응!”
예니카는 자택으로 돌아오자 어느정도 표정이 풀어졌다. 아무래도 편한 환경이니 만큼 긴장도 많이 풀어지는 듯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음식을 잔뜩 만들고 있던 세일라 페일로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내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전해들었던 것인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보아하니 어젯밤 예니카를 내 방으로 쫓아낸 당사자가 세일라 페일로버인 듯 한데, 그녀는 묘하게 쭈뼛거리는 예니카의 얼굴을 보더니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웠다.
“아이고, 에드 도련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적당히 외투를 벗은 채 식탁에 앉자, 예니카도 쫄래쫄래 따라와서 같이 앉았다.
분명 예니카의 집인데 예니카 본인의 모습이 가장 어색해 보이는 것은, 아까부터 의미심장한 웃음을 가득 띄우고 있는 양친의 표정 탓일 것이다.
사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야 뻔한 것이니, 나로서도 썩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에드….’
‘왜…?’
‘이런 말 하면 에드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는데, 나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아….’
‘…익숙해져라….’
자기 부모를 무슨 시한폭탄 보듯이 보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당장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인지라, 일단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냥 학술 조사차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 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학술 조사차 말입니까?”
“여기 토렌 지방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 옛날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했던 곰 형상의 괴물 이야기 말입니다.”
그 말에 일순간 정적이 감도는 듯 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것인가 싶다가도,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하고… 어쨌든 애매한 반응이었다.
“촌장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까?”
“개략적으로는 알려주셨는데, 뭔가 구체적인 부분은 언급을 회피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토렌 마을에서도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알만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쉬쉬하는 내용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사실, 촌장님께서 일러주시기보단, 직접 마을 주민한테 듣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신 거겠지요.”
갖가지 샐러드와 고기 요리가 푸짐하게 쌓여있는 식탁 앞에서, 예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 으응? 나는 처음 듣는데….”
“당연하지, 예니카. 굳이 말해줄 이유가 없는 이야기거든.”
오르테는 식탁에 앉으면서, 어디인가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저희는, 처음에는 예니카가 실베니아에 입학하는 걸 반대했었습니다.”
갑자기 예니카 쪽으로 이야기가 튀었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일단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예니카가 정령술에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쉬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일맥상통하지요.”
“그 이유라 함은?”
“이제는 구전으로밖에 전해지지 않는 먼 과거의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먼 옛날에 저희 토렌 마을 출신의 정령사가 한 명 더 있긴 했습니다.”
예니카는 금시초문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토렌 마을의 오랜 세대들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 것일까.
쉬쉬하며 언급을 피하는 그 옛 이야기에, 예니카 또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축적한 오래된 정령들은 인간의 형상으로서 세상에 현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다. 당장에 예시로 들 수 있을만한 녀석을 하나 항상 곁에 붙이고 다니는 입장이다.
“그렇게 되어 현현한 티르칼락스와 사랑에 빠진 정령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
세일라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오르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글렘스 촌장은 오르테 본인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해듣기를 바랬던 것일까. 본인이 직접 말을 할만한 사안은 아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이유라고 하면 아마….
“그녀의 이름은 케이틴 페일로버라고 합니다.”
타인의 가정사이기 때문이겠지.
정령 감응이란 것도 결국 이어받은 재능이란 것일까. 예니카의 비범한 정령술의 근원을 찾아보자면, 결국 혈통의 영향도 있었던 것이다.
부모인 오르테와 세일라는 그 쪽 방면으로 전혀 재능이 없어 보이는 걸 보면 그게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을테지만.
“…저희의 먼 조상님이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잠시 오르테는 입을 다물었다. 예니카의 표정을 살피니, 완전히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다.
딸인 예니카에게조차도 이야기 해주지 않은 것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테지.
“그녀의 말로가 썩 좋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오르테는 포크를 내려놓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티르칼락스와 억지로 계약하려다가 감응 마력이 폭주해서 사망했습니다. 피가 역류했다고 들었습니다.”
“…….”
“저도 저희 조부님에게 전해들은 사실이지요. 처음에는 정령술에 대한 재능이라고는 전혀 없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고위 정령과 계약하더니… 끝끝내 티르칼락스와 무리하게 계약을 진행하다가 화를 입고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다만, 희한한 일이지요.”
어느샌가 예니카 또한 오르테의 말을 완전히 경청하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살았던 가족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완전히 처음이었던 것이다.
“최고위 정령은 한 번 소환해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는 그런 천상의 존재 아닙니까. 억지로 잠깐 현현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했을텐데 왜 직접 계약을 하려 했을까… 그런 의문은 남아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르테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너무 먼 과거 이야기니까요. 사실 무슨 감상을 남길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럴 입장도 안됩니다.”
오르테에게 있어선 먼 과거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전설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 뿐인 예쁜 딸이 정령술에 조예를 보이기 시작했을 땐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을 터.
“그렇기에, 예니카가 정령 계약을 해내고, 실베니아에 입학하고 싶다고 했을 땐 심장이 덜컥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이야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지만… 솔직히 걱정도 많이 했지요.”
선조 정령사의 끔찍한 최후를 생각해보면, 같은 피를 타고난 예니카가 똑같이 정령사의 길을 걷겠다는 말을 했을 때 무슨 느낌이 들었을까.
“아빠는… 그래서 반대했던 거구나.”
“뭐, 그래도 예니카 네 굳건한 의지를 보고 금방 다시 찬성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니카, 네가 글라스칸을 소환하려다 실패해서 난리가 났을 때 무슨 기분이었겠니.”
오르테와 세일라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기분이었을테다.
최고위 정령을 끌어내려다 죽음을 맞이한 자의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구전으로 들어오던 사람이, 제 딸이 최고위 정령과 엮여 폭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니 당장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인 지경이다.
“지금 이렇게 어엿한 정령사가 되어있는 네 모습을 보면 기쁘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때때로 불안한 감정이 비죽 솟아오를 때가 있단다. 그건 어쩔 수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일라도 한 입 거들었다.
케이틴 페일로버.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와 무리하게 계약하려다 사망한 정령사라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지만, 어쨌든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아침이 빠른 만큼 밤 역시 빠르다. 시골 생활이란 것이 다 그런 걸까.
토렌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질 때 쯤 되면 이미 하루 일과가 끝나고, 슬슬 달이 얼굴을 내밀면 곧바로 잠에 들 준비를 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지만, 매번 밤 늦게까지 연구하고 작업하던 내 생활과는 너무 리듬이 안맞는다.
그건 예니카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숙소 앞에서 연초를 피우고 있는 내 상태를 보러 나왔다.
늦여름이다. 그 말은 곧, 가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켄섬에서는 밤에도 후덥지근 했는데, 과연 고산지대라 그런지 벌써부터 제법 쌀쌀했다.
“에드.”
“왜, 방에 들어가 있지.”
예니카도 일찍 쌀쌀해지는 이 곳 날씨에 익숙해졌는지, 펑퍼짐한 파자마에 연회색 길다란 숄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선을 넘어서 허리 선까지 내려온 숄을 손으로 꽉 말아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꼭 커튼 속에 사람이 숨어있는 것 같다.
“그, 그게… 뭔가 진정이 안 돼서….”
그리고는 마을 회관 외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내 옆에 나란히 와서 앉는다.
흙바닥 위에 대충 놓여진 나무 등걸에 걸터 앉은 상태라 자세가 많이 낮다. 예니카는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내 옆에 와서 앉더니, 숨을 휙 흘리고선 어렵사리 이야기했다.
“그, 뭐랄까… 방에 혼자 있으니까…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된달까….”
“그렇겠지. 네 선조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전해 들었으니까. 부모님은 아예 감추고 있었다며?”
“응? 어, 응! 그렇지! 그것도 있고….”
“그것‘도’…?”
“…….”
“…….”
예니카는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자수하듯이 말한다.
“아, 아직 한 방에 동침한다는 게 안 익숙해….”
“아직… 도…? 어제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아직도 그런 게 남아있어?”
“구,굳이 어제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나 아직 적응이 안 되니까.”
“너도 참 이런 부분에서는 지독하리만치 적응력이 달리는구나.”
“처, 처음인데 어떻게 해! 처음부터 능숙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 그냥….”
예니카는 자기 무릎을 끌어 안더니, 이윽고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살면서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너무 호들갑이다. 누구나 다 겪고 지나가는 일인데.”
“그것도 그런데… 그냥… 생각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단 말야.”
예니카는 잠시간 그렇게 어깨를 기대고 있다가, 중천에 뜬 달을 올려다 보았다.
퓰란의 달은 정적을 상징한다.
달이 뜰 때 쯤에 일찍 잠에드는 퓰란 사람들의 생활 때문인지, 달빛을 받는 토렌 마을은 언제나 정적에 잠겨 있었을 터.
“고향에서 달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예니카가 기억하는 퓰란의 풍경 또한 대부분은 밝은 태양 빛 아래에서 풀을 뜯는 가축들의 모습일 것이다.
조용히 단잠에 든 토렌 마을에, 마치 둘이서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감돌았다.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인가 싶다가도, 착 가라앉은 풀벌레 소리나 한 번씩 풀숲을 사삭대는 산짐승 소리 때문에 여전히 시간은 흘러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을 건데, 일찍 자라. 피로 풀어야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지금 피로 풀고 있어.”
“그래?”
“응.”
고개를 묻은 채, 예니카는 나지막이 이야기 한다.
“되게 신기한 이야기 해줄까? 예전에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처음으로 에드를 봤을 때는, 에드가 되게 불편했다?”
“그럴만 했지. 학사에서 내 이름 대면 일단 다들 질색부터 했었으니까. 그 와중에 불편한 티를 안낸 건 너밖에 없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구나.”
“뭐어, 불편했다고 해도 에드가 생각하는 그런 불쾌한 느낌이라기 보단, 그냥… 어떻게 대해야할지 잘 모르겠고, 에드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이 안 되고… 그런 느낌이 더 강했지. 그래서 에드는 항상 불편한 상대였어.”
예니카는 어깨에 볼을 댄 채로 가만히 눈을 치떠서 눈을 나와 맞춘다.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보아하니 여유를 되찾은 듯 했다.
“근데, 지금에 와서는 에드 어깨에 이렇게 고개를 기대고 있으니까 되게 안심이 되고 편해지는 거 있지. 혼자 방에 앉아 있을 땐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긴장됐는데 말야.”
“…….”
“이상한 일이지. 난 에드가 그렇게 어색하고 어려웠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편하고 안심되는 상대가 된 걸까. 딱 언제부터라고 집어 말할 수가 없이,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천천히 변해가는 게 사람 마음인가봐. 결과만 놓고 보면 완전히 정반대로 뒤바뀌었는데 말야.”
나는 팔을 들어서 예니카의 반대 쪽 어깨를 감아주었다. 본인이 편하다 이야기 해주니, 나야 내칠 마음은 없다. 무엇보다 나도 예니카에게 여러모로 심적인 구원을 많이 받았다.
하루 하루 죽음의 공포로부터 뛰어서 도망쳐야만 했던 나의 학창시절은, 이 부끄럼 많고 소심한 정령사 하나가 여러모로 많이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격변이라 칭할 정도로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조금씩 뒤틀어놓은 변화가 차근차근 축적되어 어느샌가 풍경 자체를 뒤바꾸어 놓기도 한다.
해가 뜬 퓰란과 달이 뜬 퓰란이 거울의 정반대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예니카가 존재하는 캠프의 풍경은 내 생존 생활의 밝은 면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심적인 구원이 되어주었는지는, 굳이 입바른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말야, 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된 지금 상태이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 속 소리나 진심이 새어 나올 수도 있어. 적당히 받아줄 수 있어?”
“뭔데?”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은 그냥 못들은 척 해도 돼.”
예니카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대로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케이틴 페일로버라는 조상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야, 그런 생각을 했어. 최고위정령이라는, 아예 위계도 완전히 다르고 태생도, 힘도, 모든 것이 저 아득히 초월해있는 저 먼 존재를 사랑했던 그분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글쎄…. 그런 경험을 해보긴 쉽지 않지.”
“나한텐 에드가 그런 사람이야.”
거기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적절한 대답을 바로 꺼내려거든 생각을 좀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예니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가 있기에, 당황스럽진 않았다.
“무지무지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돼? 너무 뻔하고 새삼스러워서 헛웃음 흘려도 난 몰라.”
예니카는 한껏 웃음을 짓고선 이야기 한다.
잠시간 시간이 멈춘 듯, 혹은 오히려 시간이 너무나도 빨라진 듯. 툭 던져진 말이 귓가에 파고든다.
“난 에드를 사랑하나봐.”
예니카의 어깨를 꽉 끌어 안아주고, 그 정수리에 내 고개를 포개어주었다.
이럴 때 일수록 입으로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보단, 조용히 말을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입밖으로 표현하려는 순간 묘하게 변질되고 흐려지는 기묘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교감이라는 것을 한다. 굳이 말을 주고 받지 않고, 기대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의사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의 신기한 점이다.
“그래서 말야… 난 케이틴 페일로버라는 사람의 최후를 제대로 알고 싶어. 이런 식으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둥으로 전해듣는 것보단 말야.”
예니카의 말엔 무게가 실려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썩 좋은 최후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자세히 파고들어봐야 뒷맛만 씁쓸한 거 아니야?”
“그래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걸.”
“그러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고 씁쓸한 이야기면? 마치….”
나는 예니카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느낌이 왔다. 그 부분을 곧바로 푹 찔러 들어간다.
“마치, 네 미래처럼 느껴질정도로 끔찍하면…?”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래도 난 에드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케이틴 페일로버와 예니카 페일로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처한 상황도, 본인의 능력도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예니카를 아무렇게나 방치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인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는 건 완전히 본인의 문제.
“그래. 확인시켜줄 수는 있다.”
그렇기에 일단 확언해두었다.
내가 퓰란까지 온 것은 학술 조사를 위해서다. 당연히 그를 위한 준비는 어느정도 갖춰서 왔다.
무엇보다 나는 성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환경과 매개만 잘 갖춰지면, 먼 과거를 엿보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쉬운 일은 아니긴 하지만.
“내일 마차에 실어온 마공학용품을 꺼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