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57)
‘염사 기록 마법 장치’라는 것이 있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당시 클레어 조교수가 흑막을 조사한답시고 사용한 전적이 있는 물건이다.
기본적으로 실베니아 학사에서 관리하는 마공학용품으로, 건장한 사내 한 명의 몸집보다 더 커다랗고 무거운 장치다. 보통은 분해해서 여러 가방에 나누어 담아 들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 덜 연구된 성위 마법 이론을 사용하는 만큼 불안정한 부분이 많다. 안정성을 챙기기 위해 온갖 고급 재료들을 덕지덕지 쳐바른데다가, 학사 최고의 연구진이 다 달려들어서 유지보수를 반복해온 보물 중의 보물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마공학용품을 사용하려거든 학사 위원회 내부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야만 한다.
이 장치 하나에 들어간 학사 예산만 해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사실상 거대한 저택 한 채를 들고다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이런 귀중한 물건을 학사 밖까지 반출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이름 값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베니아 학사 안에서도 받을 수 있는 배려란 배려는 다 받는 입장인 만큼, 고가의 마공학용품 하나 반출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염사 기록 마법은 제 아무리 마력을 들이부어도 1년 이상의 과거를 보긴 힘들어. 하지만 성위 마력을 다룰 수 있다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지.”
장소는 토렌 마을의 광장이었다.
마공학용품 설치에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광장 중앙에 똑바로 설치된 커다란 마공학용품. 이곳 저곳에 박혀있는 톱니바퀴가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고, 중간 중간 보이는 마력 구슬에서는 신비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설치하는 데에만 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클레어 조교수나 학사 직원들이 사용할 때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지금 성위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가 끝난 상태에서는 완전히 성능이 달라. 몇 백 년 전도, 능히 엿볼 수 있을 거야.”
“그, 그 정도 입니까? 그야말로 획기적인 물건 아닙니까? 원한다면 어떤 과거라도 볼 수 있다니, 오래된 미제 사건 같은 것도 전부 해결 가능한 것 아닙니까…”
“물론 먼 과거를 본다는 게 그리 쉬운 것도 아닙니다.”
세상 일이 그리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득히 먼 과거까지 마력의 흐름을 흘려보내려거든 그에 걸맞은 매개가 필요하다.
나는 손을 탁탁 털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고맙게도 설치에 도움을 준 토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고, 예니카 또한 옆에 딱 붙어서 장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기본적인 정보 수집은 끝났으니, 어디… 한 번 확인이나 해봅시다.”
예니카의 부탁이야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 내가 온 목적은 학술 조사를 위해서다.
제대로 된 결과물을 들고 가야 나도 면이 살지 않겠는가.
매개가 되어줄만한 존재는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몸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후욱, 하고 힘을 주자 온 몸의 정령 감응이 휙 달아올랐다.
– 화아아아악!
거대한 바람이 불어 닥치고, 거대한 늑대가 현현해 몸을 일으킨다. 존재만으로 위압감을 내뿜는 그 거대한 바람의 정령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렸다.
– 쿠웅
새하얀 털을 휘날리며 고산지대의 바람을 맞아 늠름하게 서 있는 메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침을 꼴깍 삼키며 그 광경을 보았다. 고위 정령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 ‘마, 말도 안돼… 늑대가… 집채만한 늑대가…’
– ‘쉿… 조심해… 잡아먹힐지도 몰라…!’
마을 사람들이 긴장해서 숨도 쉬지 못하는 것도 잠시, 늑대가 한숨 같은 콧김을 휙 흘리더니, 바람으로 자기 몸을 휘감았다.
그대로 현현되어 있는 몸의 형태가 바뀌더니, 백색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은 소녀가 되어 바닥에 착지한다.
[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현현한 메릴다는 스커트 자락을 탁탁 털고 예니카와 내 쪽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저었다.
[ 그래, 내 마력을 매개로 삼으면 실베니아와 관련된 과거의 흐름은 어느 정도 관측이 가능하겠지. 마력을 상당 부분 공유했었으니까. ]“생각보다 협조적으로 나와주네.”
[ 반항해봐야 뭐 어쩌겠어. 너희들이 내 말을 듣겠니.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마을 사람들을 휙 바라보다가, 메릴다는 다시금 한숨을 머금곤 몸을 휙 돌렸다.
[ 우리 에드 나으리를 학사에 빈 손으로 돌아가게 만들 순 없으니까. 그래, 뭐라도 손에 쥐어줘야지. 한 번 확인해 봐. 최고위 바람 정령이 어떤 끔찍한 최후를 맞이 했는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번엔 성위 마력을 끌어올렸다.
생전 처음 보는 성위 마력에 화들짝 놀라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끌어올린 그 검붉은 마력을 마공학용품에 쏟아부었다.
이어서 염사 기록 장치로부터 검붉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기억에 각인 되듯 뇌리에 새겨지는 풍경을 느끼면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케이틴 페일로버는 이따금씩 산등성이에 핀 팬지꽃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길 따라 나있는 팬지꽃이 고산지대의 바람에 이리저리 살랑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충족감을 느끼는 그런 소녀였다.
머리는 땋아내렸다. 옆머리를 결을 따라 땋은 예니카와는 달리,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릿결을 통째로 땋아 앞으로 감아내린 소녀였다.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칼은 길가에 핀 팬지꽃 만큼이나 아름다워,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그 예쁜 머릿결을 칭찬하곤 했다.
소녀는 어느 정도 정령 감응력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특출날 수준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유체 정령의 존재를 느끼거나, 미약한 하위 정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일 뿐이다. 그 이상의 능력은 없었고, 더 성장할 잠재력도 없는… 그냥 마을 아낙네로 살다 갈 운명을 지닌 소녀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숲속에 쓰러져있는 티르칼락스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
염사 기록 장치로 인해 펼쳐지는 광경은,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뇌리에 직접 각인되는 방식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현실적일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허공에 부유하는 듯한 감각. 바로 곁에서 염사 대상을 관측하는 듯한 느낌은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케이틴 페일로버가 숲속을 거닐다 발견했던 광경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이런 형태로 체험하니 더 확실히 와닿는다.
계란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숲속을 헤쳐나가던 소녀가, 거대한 고목 나무 아래에 쓰러져있는 청년을 발견하는 모습.
현현 상태를 유지할만한 마력도 거의 남지 않은 상태다. 청년의 주변에는 인간이 흘렸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양의 피가 흩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을 끄는 것은, 거대한 뱀의 사체다. 쓰러진 청년 뒤로 두동강 난 채 놓여있는 뱀의 사체가, 보기만해도 구역질이 오르려 한다.
나는 그 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령학을 연구하다보면 한 번씩 들어볼 법한 이름이다.
고위 어둠 정령 플쿠록스.
글라스칸이 최고위 어둠 정령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필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고위 어둠의 정령이다. 고위 정령 개체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하고, 또 그 잔악함이 유명해 아직도 그 이름이 역사서에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 법칙에 의해 소멸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실상은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최고위 정령을 넘보려드는 그 강대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뱀이 흩뿌리는 독기와 저주는 수백년을 간다고 들었다. 서방대륙에는 아예 플쿠록스의 독기로 멸망해버린 도시가 있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지만.
‘플쿠록스를 제압한 게 티르칼락스였다고…?’
이 시점에서 이미 여러 사학 서적의 기록을 뒤바꿀 대발견이다.
일단 학술 조사 차원에서 목소리를 낼만한 성과는 챙겨둔 느낌이 들었다.
– ‘이… 이럴수가…! 괘, 괜찮아요?!’
케이틴 페일로버는 쓰러진 청년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응급 처치를 하려 했다.
현현되어 있는 티르칼락스는 마력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지만, 플쿠록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저주로 인해 제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에게 죽음의 개념은 없다. 자연으로 환원시키고, 유체 정령으로 되돌리는 순환의 굴레만 있을 뿐이다.
플쿠록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유체 정령으로서 환원되기 직전에 티르칼락스에게 저주를 새긴 것이다.
유약한 인간 형태 안에 티르칼락스를 가둬놓고, 마력을 흐트려서 치유되지 못할 상처의 고통에 끝없이 몸부림 치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각인된 저주 때문에 제대로 마력을 통제하지 못한 채로, 상처의 격통에 끊임없이 빠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저주는 정신을 궁지로 몬다. 격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끝끝내 정신을 놓게 만드는 게 목적이다.
그런 상태의 티르칼락스를, 케이틴이라는 삼류 정령사가 발견하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었을 테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케이틴 페일로버는 시골 아낙네들 사이에서 자란 소녀답게, 손재주가 좋고 생활력도 좋았다.
매번 격통에 휩싸여서 고통에 몸부림 치는 청년을 위해 풀숲을 그러모아 침상을 만들어주고, 그걸로 부족해보이자 목재를 끌어모아 쉼터를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 왜소한 몸집과 조막만한 몸으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티르칼락스는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정령들은 정령사가 아닌 인간들과 엮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 이유는 뻔했다. 인간과 필요 이상으로 교감해온 정령들의 말로는 대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틴은 티르칼락스의 그런 심정을 이해해주면서, 숲을 오갈 때마다 언제나 스스로 티르칼락스를 살폈다.
마을에서 솜과 천을 가져다가 제대로 침상다운 침상을 만들어 준다.
밤에는 추울까봐 불을 피워서 그 옆을 지켜주고,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제대로 된 천막을 세워준다.
플쿠록스의 저주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곤 있었으나 그 속도가 너무 더뎠다. 매번 이런 환경에서 청년을 간병하긴 힘들겠다고 생각한 소녀는, 숲 더 깊은 곳에 있는 폐오두막을 떠올린다.
한참 이 숲을 사냥터로 쓰던 옛 사냥꾼들이 베이스 캠프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지금에 와선 사용하지 않는 폐오두막이었다.
케이틴은 장장 이틀에 걸쳐서 그곳으로 청년의 무거운 몸을 끌어다 옮겨놓는다.
오두막 앞에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제대로 된 도구들을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 간병 생활을 이어 나간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 비가 오고 눈이 오지만, 케이틴은 쭉 오두막에 앉아서 티르칼락스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요리 도구들도 챙겨다가 놓아 매번 뜨거운 스프를 끓여주었지만, 청년은 제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 정령에게 음식 섭취는 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꼬여있는 마력의 흐름을 풀기 위해, 케이틴의 미약한 정령사로서의 재능에 기대야만 했다.
매일 병상에 누워서 티르칼락스의 마력 흐름을 살펴주면서, 케이틴의 정령 감응력도 조금씩 일취월장해갔다.
최고위정령과 이렇게 가까이서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티르칼락스를 돕기 위해 정령에 대한 이해도 드높여간다. 어느샌가 중위 정령과도 거뜬히 교감할 수 있게 되고, 토렌 마을에서는 제대로 된 정령사로서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티르칼락스의 병세가 호전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인간화를 풀 정도는 안되지만, 적어도 케이틴 혼자서 오두막 캠프를 관리하게 놔두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힘겨운 몸을 이끌어서 캠프 주변을 돌기도 하고, 간단한 산책이나 마력 체크도 한다. 몸이 호전되면 호전되어 갈수록 장작을 패어놓기도 하고 오두막 유지 보수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티르칼락스는 아주 잠깐의 세월을 인간으로 살았다.
기나긴 최고위 정령의 생애 중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그 잠깐의 기억은 영원토록 티르칼락스의 마음 속에 각인 되었다.
그 찰나의 때에 언제나 옆에 있어주었던 자는 케이틴이라는 소녀였다.
뭐만 하면 팔을 걷어붙이며 흠흠 거리고, 자신 있다는 듯이 나서서 티르칼락스를 살펴보아주던 소녀. 한 없이 미약하고,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부질 없는 인간 소녀.
필요 이상으로 엮여보았자 마음 고생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티르칼락스는 소녀를 따르며 소녀를 생각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으며 함께 퓰란의 산맥을 보고 있으면 특유의 안정감이 감돌았다.
해질녘의 산맥지대. 티르칼락스는 그 풍경이 좋았다.
피크닉 가방을 안아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는 케이틴의 뒤를 따라 걷는다. 내려다보는 그 산맥의 풍광이 그림처럼 가슴에 남는다.
– ‘있잖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저렇게 산등성이를 따라 피어있는 팬지꽃을 바람꽃이라고 불러.’
– ‘바람꽃? 저 팬지들이 말이냐?’
– ‘응. 알다시피 고산지대는 항상 바람이 불잖아. 팬지꽃을 보면 그 바람에 따라 항상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있거든.’
길가의 울타리에 걸터앉아서 바람을 맞는다.
덩달아 흔들리는 티르칼락스의 검붉은 머리칼도, 케이틴의 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 ‘바람이 가는 방향을 보고 있는거지.’
– ‘그런가… 인간들은 그런 의미 부여를 하나…’
– ‘아하하, 티르칼락스한테는 좀 부질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인간들은 그런 부질없는 의미 부여를 하는 걸 좋아해~. 이것 봐.’
케이틴은 화사하게 웃으며, 울타리에서 뛰어내려 길가에 핀 팬지꽃을 본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팬지꽃의 모습이 마치 바람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 ‘이렇게 앙증맞고 예쁜 꽃이 있잖아. 그럼 뭐라도 이야기를 붙여보고 싶어지는거야.’
– ‘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나?’
– ‘음, 글쎄. 나는 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긴 해.’
케이틴은 흔들리는 팬지꽃을 보다가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바람은 자유롭게 세상을 노닐지만, 팬지꽃 한송이는 땅에 뿌리를 박고 가만히 있잖아. 이렇게 흙속에 발을 묻고, 멍하니 바람이 세상을 떠도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거야.’
– ‘…’
– ‘바람을 향해 고개를 흔드는 건, 바람 따라 함께 노닐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근데 말야, 꽃은 뿌리를 뽑으면 죽어버려.’
탁 펼쳐진 창공을 늘 땅에 박혀 올려다보고 있는 꽃 한송이의 기분이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는, 아득히 드높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평범한 자들의 모습과도 같다.
바람처럼 세상을 노니며 자유로이 뜻을 펼치는 누군가를, 현실 위에 뿌리를 박은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일까.
산등성이를 따라 가득 핀 팬지꽃은, 그 동경과 염원을 모아놓은 것만 같다.
그것은 티르칼락스를 사랑한 케이틴의 모습일까. 아니면 에드 로스테일러를 연모하는 예니카 페일로버의 모습일까.
혹은 둘 다일까.
– ‘곧 있으면 저주도 어느정도 수습이 되지?’
– ‘그래…’
– ‘생각나면 한 번씩 놀러와~ 인간은 말야, 정령들 입장에서는 잠깐 안보이면 픽 하고 죽어버리는 미약한 존재잖아. 그러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올 수 있을 때 꼭!’
그렇게 베시시 웃으며 티르칼락스의 가슴께를 툭툭 두들기는 모습에, 티르칼락스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소녀에게 유대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거의 영생을 사는 정령에게 그런 감정이란 독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나온 모든 인간들 중에, 이 소녀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을 추억하자.
티르칼락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케이틴의 손등에서, 플쿠록스의 저주 각인이 발현된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 * *
“…….”
귓가에 속삭이는 메릴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메릴다는 예니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