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6)
글라스칸 토벌전 (6)
코 끝이 찡하다.
예니카에게는 익숙한 감각이다.
학생 식당에서 크림 스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뿌렸을 때나, 항상 친하게 지내던 클라라랑 싸웠을 때, 사랑하는 아빠가 목장의 소에게 받쳐서 크게 다쳤을 때, 혹은 기나긴 방학이 끝나고 다시 실베니아로 돌아올 때.
그럴 때마다 조막만한 코 끝으로 올라오는 이 알싸한 감각을 예니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꾹 인내했다.
‘나는 울고 싶은 거구나.’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잘 알고 있다.
철 없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사실 예니카는 누구보다도 더 속 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다.
단 한 나절만 함께 시간을 보내 보아도, 예니카 특유의 그 발랄하고 나긋한 분위기의 근원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한 없이 어른스러운 내면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가족, 친구, 교직원, 선후배들까지 한 없이 그녀를 선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단 한 번도 마법부 2학년 수석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유망한 인재이기에 더욱 더.
그 기대감에 얹혀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 꼴이다.
고위 어둠 정령 벨로스페르가 네일관 전투 실습장의 꼭대기에 유유히 군림한다. 사람처럼 팔다리가 달려있지만 그 머리는 기괴한 산양의 머리다. 박쥐 같은 날개는 거대하다. 등에서부터 쭉쭉 뻗어 네일관을 뒤덮으려 든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불타는 철퇴는 당장이라도 좌석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것만 같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명백한 악마의 형상이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을 집어 삼키고 뒤로 물러서게 만들만한 모습이지만, 토벌대원들은 굳건한 눈으로 자리에 발을 붙이고 서있었다.
테일리 맥로어, 아일라 트리스,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직스 에펠슈타인, 엘비라 에니스턴.
토벌대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공포감보다는 굳건한 의지와 투지로 불타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본 후 지긋이 눈을 감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패배를 직감하고 만다.
나는 이 전투에서 꼴사납게 패배할 것이다. 그 의심은 확신이 된다.허나 가슴께를 타고 오르는 감정은 좌절이나 비탄 따위는 아니다.
예니카는 다시 지그시 눈을 뜨며, 이내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어올린 것이다.
역시나 코 끝이 찡하다.
예니카에게는, 제법 익숙한 감각이었다.
*
오벨관 옥상에서 미친 듯이 뛰어내려와 학생광장 외곽으로 다시 도달하자, 타칸전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콰앙! 콰앙!
“으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죽어 이 미친놈아 제발 좀 죽으라고!”
루시의 고위 전격 마법은 무서우리만치 위력적이지만, 타칸을 즉사시킬 수는 없었다.
루시의 마력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점,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마법을 캐스팅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걸 버텨낸 타칸의 맷집은 박수를 보내줄만하다.
그러나 타칸의 껍질은 모두 통째로 타버려서, 그 엄청난 수준의 마력 저항은 사라져있다.
마법이 유효타로 들어간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타칸 토벌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내려간다.
클레비어스는 비명을 질러대며 타칸의 공격을 회피하고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공포에 떨고 있지만, 타칸의 꼬리치기와 발길질을 요리조리 피하는 몸놀림은 정말 신묘할 지경이었다.
그건 클레비어스의 순발력이 대단한 이유도 있겠지만, 처음에 비해서 타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진 탓도 있다.
그 모습은 빈사 상태의 야수다. 최후의 발악 중인 것이다.
[ ㅡㅡㅡㅡㅡㅡㅡ. ]귀를 찌르는 타칸의 포효가 또 다시 학생 광장의 상공을 가로지른다.
처음 네일관 회랑에서 외쳤던 포효소리는 호전적인 전사들이 전투에 참전할 때 외치는 용맹한 굉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타칸이 외치는 포효는, 고통의 몸부림에 못 이겨 지르는 비명이다.
금방 편하게 해주마.
나는 그대로 화력지원을 하고 있는 로르텔 쪽으로 붙었다.
“루시는?”
“대충 근처에서 구석따라 굴러다니고 있어요. 마무리까지 해주면 참 좋을텐데, 그럴 힘이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됐어.”
차라리 다행이다. 루시가 마무리까지 해버렸으면 어쩌지 하고 노심초사하던 차였다. 제 아무리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라 할지라도, 루시라면 타칸을 손쉽게 제압해낼 수 있을테니.
누누이 말했듯이 지금 시점에서 내 최종목표는 타칸의 막타를 치고, 그 막대한 양의 정령계 스킬 숙련도를 쪽 빨아먹는 것이다. 루시의 강력함은 오히려 방해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안 봤는데, 클레비어스도 전위로서는 훌륭하네요. 다친 상황인데도 이 정도까지 타칸의 시선을 끌어줄줄이야. 저 입만 좀 다물면 괜찮은 전사일텐데.”
“그 쫑알대는 입이 핵심이야.”
“야! 으아악! 악! 니네들! 거기서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살려줘 제발! 제발 마법을 쏴! 뭐하고 있어! 으아아아아아악! 이러다 나 죽겠어 제발!”
클레비어스의 최대 강점은 무엇보다 미친 듯이 만만하다는 점이다. 뭐만하면 비명을 꽥꽥 질러대니 자연스레 얕보게 되고,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안된다.
썩어도 준치다. 그는 실베니아 아카데미 전투부 1학년의 수석이다.
기묘할 정도로 낮은 자존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녀석의 장점이 되어줄 때가 많다. 타칸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모기처럼 왱왱대는 클레비어스는 꼬리치기 한 번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제 아무리 제압하려 들어도 제때 제압되질 않는다.
“진짜 가만 안 둘거야 니네들! 진짜! 미끼로나 쓰고 앉아있고! 가만히 안 놔둘거야!”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리는 저 모습에도 슬슬 한계가 올 터.
“마무리 하자.”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마력을 다 끌어모아서 영창한 얼음창을 두 대나 박았는데도 이 악물고 버티고 있어요. 뭐 저런 맷집이 다 있는지.”
“목을 베어야 해.”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서 손 끝에 집중시켜 보았다. 극한까지 단련한답시고 학생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마법을 쏴댄 통에, 남아있는 마력도 거의 바닥이다. 그러나 기초 마법 몇 번 정도는 쏠 수 있을 수준은 된다.
“네 빙결계 마법들은 깔끔하게 베어내는 작업에는 잘 안맞으니까 내가 하지. 내가 책임지고 끝낼 때니까 딱 한 번만 놈의 움직임을 막아. 할 수 있지?”
“가능해요. 지금이라면.”
어쨌든 중요한 건 약점 공략이다.
그 껍질만 없다면, 정사에서는 제대로 단련이 끝나지 않은 테일리도 충분히 베어냈다. 이미 숙련도 10레벨을 넘긴 내 바람칼날이니 단 방에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정거리다. 꼬리와 발을 미친 듯이 휘둘러대며 닥치는대로 주변을 파괴해대는 타칸, 그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한방에 골로 간다. 거의 서커스처럼 공격을 피해대는 클레비어스가 신기할 지경이다.
“내가 접근하는 순간에 타칸의 움직임을 멈춰 줘야 해. 그 잠깐의 순간에 내가 근거리에서 바람 칼날로 타칸의 목을 날려버릴 거야. 그 시점에서 타칸이 제압되지 않으면, 나도 위험해진다.”
나는 로르텔의 어깨를 툭 쳤다.
“내 목숨을 너한테 걸어 볼테니까, 똑바로 해야된다.”
“아하하. 에드 선배님은 책임지고 내가 하겠다느니, 목숨을 너한테 걸어본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참 쉽게 하시네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도박수인데 말이에요.”
“도박이 아니지.”
황금의 딸 로르텔에 대해서라면 지긋지긋하게 마주해봤으니 안다. 이 여자는 1막부터 그 마지막 장까지 그 어떤 이변이 일어날지라도 순식간에 당황스러움을 수습하고 현실을 마주하는, 이성의 괴물이다.
본인은 확신이 없는 듯 하지만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정사에서는 이거보다도 더 급박하고 신중해야만 하는 상황도 많았다. 끝까지 침착해야만 하는 이런 일에는 로르텔이 적임이다.
“이건 투자야. 목숨 값은 결코 싸지 않으니까, 일처리 잘 해.”
그 말에 로르텔은 잠깐 표정을 굳히고 만다. 그러나 이윽고 재밌다는 듯이,
“투자라, 그건 제 전문 분야인데.”
얄궃은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냉정히 말하면, 그런 근접 전투는 클레비어스에게 맡기는 게 낫잖아요? 저래봬도 전투부 수석이고, 뭔가를 베어내는 일이라면 검이 더 알맞을테고.”
역시나 타당한 의견이다. 굳이 마법부 소속인 내가 근접전에 휘말려들 필요가 없다. 당장에 신묘한 움직임으로 타칸의 공격을 피해대는 클레비어스라면, 저 공포스러운 타칸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서 목을 베어내는 일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해야만 한다.
왜?
막타를 먹어야 하니까!
고위 불정령 타칸이 주는 그 막대한 양의 전투 숙련도와 정령계 스킬의 숙련도는 절대로 낭비해서는 안되는 보물이니까.
그러나 대놓고 그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대답으로 쓸만한 건 급조한 핑계가 될 수밖에 없다.
“클레비어스가 그걸 할 거 같냐?”
그 말에 로르텔의 동공이 살짝 넓어지는 듯 싶더니, 꽃망울이 피어오르듯 한 아름 웃음을 흘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요. 타칸의 시선을 끌기만 하는 거랑, 그 품속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가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요. 겁쟁이 클레비어스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좋아요, 에드 선배님.”
지금 이렇게 넉살좋게 이야기 하는 와중에도 클레비어스는 비명을 질러대면서 타칸으로부터 쫓기고 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광폭화 버프가 발리고, 상태가 멀쩡한 타칸이라면 모를까… 약화된 타칸은 클레비어스를 쉬이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저 녀석은 왱왱대는 모기랑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날렵하다.
“행여나 죽지 마세요. 절대로.”
말투는 표독스럽다. 미간을 우스꽝스럽게 좁히고, 우악스러운 모습으로 황녀의 대사를 따라하는 꼴은 누가봐도 조롱의 의도다.
“너 그거 황족 모독이다.”
“그 자애롭다는 황녀님이 이런 어리숙한 성대모사 한 번으로 형벌에 처하겠어요. 그럴까 궁금하면 에드 선배님이 보고하시면 되겠네요.”
그러고서는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가관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페니아 황녀님은 싫어해요. 본인 사정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어리숙한 리더 아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도 지긋지긋하고요.”
“꽤 위험한 말을 하네.”
“황실의 피를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어리숙한 인간을 더러 군주 행세를 하게 만드는 꼴이 너무 우습죠. 세상의 질서가 알맞게 돌아가려거든, 분명 핏줄 따위가 아니라 능력으로 줄을 세워야 합리적일 텐데.”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꽤 위험 발언이죠? 제 본심을 이렇게 깔끔하게 터는 것도 오랜만인데요.”
“내가 황녀님한테 보고하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안 믿어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극형에 처해질지도 모르죠. 보고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 아닐까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로르텔이 이어서 내뱉은 말은 너무나도 그녀다워서, 나도 뭐라 더 말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배님이 멋대로 저한테 목숨을 걸었잖아요. 그러니 저도 선배한테 목숨을 달아둘게요.”
양 손을 들어서 끼익대는 시늉.
“양팔저울의 균형은 언제나 수평을 유지해야죠. 엘테 상회의 장수비결은 양심이니까.”
그것이 위선이라는 사실은 피차 간에 똑똑히 알고 있어서 되레 지적하는 게 촌스럽다.
생각해보면 이게 로르텔 케헬른이었다. 이 소녀는 경의를 표하는 방법조차 지나치게 복잡하다. 속내를 단순하게 휙 내미는 법이 절대 없다.
그것이, 상인이라는 족속들의 특징이었다.
*
클레비어스가 바지에 오줌이라도 누기 전에 빨리 일을 해결해야겠지.
벨로스페르전과 타칸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 말만 들어보면 미친 것 같지만, 정사에서 엇나가버린 이 1막 최종전도 어떻게든 잘 마무리 되어간다.
일단 벨로스페르전에 진입하기만 하면, 테일리의 검성식이 발현될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의 이변이 없다.
검성식은 나중 가면 갈수록 뭔가 애매한 성능으로 붕 뜨게 되지만, 적어도 1막 시점에서는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오버스펙 기술로 점철되어 있다. 초반 시나리오를 뚫어내는데 검성식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모두가 다 잘 안다.
그러니, 방어마법을 구현해줄 페니아 황녀와 기동전을 담당해줄 직스가 함께 있다면 테일리만으로도 벨로스페르를 제압할 수 있다.
타칸을 치워서 길을 뚫어준 시점에서 이미 이야기는 정사로 돌아온 셈이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뻔하다. 예니카와 토벌대가 맞붙고, 벨로스페르가 대규모 광폭화 마법으로 정령들을 한 번 더 폭주시켜 일행을 궁지에 몬다. 그 순간 테일리의 검성식이 발현, 벨로스페르를 단 칼에 베어버리지만, 궁지에 몰려 죽기 직전인 벨로스페르는 예니카를 이용해 미완성된 글라스칸 소환진을 발동시켜 버린다.
당연히 마무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소환식으로 온전한 글라스칸을 소환할 수는 없다. 허나, 그 오른팔 만큼은 소환해내는데 성공한다. 글라스칸이 소환진에서 뻗어 나온 오른팔만의 마력으로 교수동을 뒤덮고, 토벌대를 순식간에 궤멸시키려는 순간. 테일리의 두 번째 검성식이 바로 발현되어 그 오른팔을 베어버린다.
그 순간, 테일리는 검성의 도를 깨닫게 된다.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순간이다.
정사의 흐름이 되돌아왔다면, 이후로는 내 잇속만 챙기면 될 일이다.
어쨌든 네임드 보스인 고위 불 정령 타칸을 토벌할 기회. 이런 침이 줄줄 흐르는 절호의 찬스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타칸을 잡고 정령계 스킬의 숙련도를 대량으로 챙기는 게 최선이다. 아슬아슬하게 목표에 미달한 숙련도 레벨들을 올릴 찬스다.
“간다.”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그대로 학생광장 외곽을 걸어나갔다.
얼음창을 준비한 로르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태도는 간 데 없다. 자기 딴에는 내가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엄청난 담력이 필요한 일이긴 하겠으나, 절대 무리가 아니다. 나는 타칸의 능력치를 줄줄 꿰고 있으며, 녀석은 약화되어 있는 상태이기까지 하니 제때 지원만 받으면 무난하게 이길 수 있다.
핵심은 약점 공략. 그 목을 베어버리는 것.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클레비어스가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슬슬 약발이 다할 때가 됐다. 너무나 만만해 보이는 클레비어스지만, 실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타칸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타칸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만신창이다. 타칸도, 나도.
서로 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타칸은 더 볼 것도 없이 내게 포효하며 뛰어들었다. 지축이 흔들리고, 귀가 쿵쿵 울린다. 정면에서 직접 타칸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과연 겁을 집어먹은 클레비어스가 이해가 된다.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 만으로 삐걱대는 몸을 끌어가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습이다.
아직이다. 더 좁혀져야 한다.
로르텔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얼음창을 발사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또 가까워져, 녀석의 목이 내 마법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그 순간에 빈틈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쿠우웅.
그러나, 이변은 있었다. 그건 바로 하늘을 수놓은 글라스칸의 소환진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저게 뭐야!”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클레비어스였다.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 하늘에서 글라스칸 소환진이 눈부실 정도의 빛을 뿜어낸다. 그리고, 그 소환진을 찢고 튀어나오는 것은, 네일관을 통째로 뒤덮고도 남을 커다란 오른손이다.
벨로스페르가 제압 당했다.
그것은 이야기가 5 페이즈로 진입했다는 소리다. 이제 테일리가 저 글라스칸을 베어버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이다.
아마 교수동 어디에 있든 간에 저 재앙이 똑똑히 보이겠지. 하늘의 소환진에서 거무튀튀한 기운으로 이루어진 오른손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은, 가히 세상의 종말처럼도 보인다.
예상된 이변이지만, 타이밍이 안 좋다.
누가됐든 그 광경에는 시선이 빼앗길 수밖에 없다. 저런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광경이다. 정신이 팔리지 않으면 이상하다.
문제는 타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친 듯이 내게 달려오는 타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재빨리 뒤돌아 봤다.
아마도 정신을 놓고 있을 로르텔을 향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외치려는 순간, 얼음창이 날아들었다.
날아든 얼음창은 타칸의 얼굴에 적중해, 놈의 시야와 청각을 앗아가고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뒤돌아본 로르텔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대 이변의 한 가운데에서도, 똑바로 내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이 슬쩍 움직이는 게 보인다. 지금이에요. 그리 말하고, 이후의 일들을 내게 일임했다.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
뒤를 돌아보고, 위를 쳐다보면, 거대한 도마뱀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수백 수천 번은 더 써봤을 바람 칼날을 영창해 놈의 목에 때려박았다.
[ 고위 불 정령 타칸을 쓰러트렸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감응’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이해’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감응’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이해’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감응’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계 마법 ‘정령 이해’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령 계약 슬롯이 개방되었습니다! 정령과의 계약이 가능해집니다! ]*
“진심으로 목숨을 건다느니 하는 사람들을 살면서 참 많이도 봤죠. 거진 다 겁쟁이들이었지만.”
완전히 제압당한 타칸의 현현은 해제되어,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와 로르텔, 클레비어스, 루시는 학생 광장 외곽의 느티나무 아래에 나란히 기대고 앉아 있었다.
클레비어스는 지긋지긋하게 우는 소리를 일삼더니, 이윽고 완전히 지쳐서 풀이 죽어있었고, 루시는 육포를 우물대다가 내 옆에 기대어서 잠든 와중이다. 이 녀석은 이러다가도 또 금세 사라져버리겠지.
반파된 네일관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을 보면, 교수동을 뒤덮고 있던 결계식에 금이 가있다.
글라스칸의 오른팔이 소환 된 직후의 이야기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검성식이 발현된 테일리가 상공으로 뛰어들어서 순식간에 놈을 베어버렸다. 너무나도 시원스럽고 화끈해서 헛웃음 마저 나왔다. 물론 네일관 쪽에서는 정말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겠지만, 이야기의 무대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와 바라본 풍경은 이렇다.
최종장 자체가 글라스칸 토벌전인 주제에, 글라스칸 자체는 컷신 한 번 만에 삭제되어버리니 참 웃기는 노릇이지. 어쩜 플레이 했을 때랑 이리 똑같은 감상이 나올까.
그래도 교수동 일대가 광풍에 휩싸이고, 현현된 글라스칸의 오른팔이 제압 당해 사라지는 광경은 과연, 주인공의 행보라 할만했다. 졸고 있는 루시를 제외하고선 모두 그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1막 최종장의 막은 내려가고 있었다.
“분명 토벌의 본대는 전투실습장 진입조였을테고, 저쪽도 목숨을 걸고 싸웠겠죠. 그래도 우린 우리대로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까, 어디 가서 당당히 얘기 할 수 있겠네요. 정말로 목숨을 걸어봤노라.”
로르텔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어, 상도의 삶도 분명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 있긴 했었지만요. 이렇게 직관적인 위기는 또 처음인지라, 경험이 됐네요.”
당장 죽을 뻔 했는데 넉살도 좋다, 그런식으로만 이야기 하기에는 로르텔의 삶은 필시 테일리 못지 않은 가시밭길이었다. 이런 위기도 분명, 꽤 많이 겪어 봤던 것이다.
“그래.”
나는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간략한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로르텔은 뚱한 얼굴로 상반신을 일으켜서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에요, 선배님. 생사의 위기를 함께 넘겼는데 감상이 너무 간략하네요.”
“피곤해 죽겠다. 잠도 못 잤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이게 무슨 고생인지…”
태양이 떠오르고 새벽의 빛이 날을 밝힌다. 기나긴 밤이었다.
반파된 네일관에서 토벌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검성식이 발현된 테일리가 맨 앞이다. 거무튀튀한 머리는 회백색으로 물들어있고, 눈동자의 색은 새빨갛다.
그 뒤로 아일라, 페니아, 직스, 엘비라가 따라 나온다. 모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전위를 맡아서 고생이 많았을 직스는 발을 절뚝 대고 있고, 엘비라는 아예 당장이라도 나자빠질 기색이다.
그래도 모두 무사해 보인다. 어찌됐든 이야기는 정사대로 잘 흘러간 모양이었다.
로르텔은 승전보를 들고 온 토벌대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능청스럽게 자기 이름을 이야기 하며.
“로르텔 케헬른.”
“….아는데.”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는 거잖아요. 뭐어, 선배님을 상대로 어줍잖은 장난질은 안할게요. 이제.”
어줍잖은 장난질이라고 하면 저번에 갑자기 찾아와서 내게 돈을 들이밀던 때의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녀는 거무튀튀한 속내를 숨긴 채 내게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예상이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 잘 생각했다.”
나는 피곤한 마음에 대충 로르텔의 악수 신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 다음은 예상치 못했다.
로르텔은 그 자그마한 손으로 내 팔을 확 감싸쥐더니, 얼른 위아래로 몇 번 흔든 다음, 손을 놓고 뒷짐을 진 채로 재빠르게 멀어진 것이다.
통통 뒷걸음질을 치며 멀어지는 모습이 퍽 장난꾸러기 같다.
“이번엔 제가 이겼네요.”
여우같은 미소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다.
손을 펴보면 플렌 금화 3닢이 들어와 있다. 저번에 돌려줬던 금화를 복수랍시고 다시 내 손에 욱여넣은 것이다.
“방심했죠? 이제 나한테 은혜를 입어버렸네요. 이걸 어쩐담.”
로르텔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휙 돌렸다.
또 봐요. 선배님.
그런 말을 남기고. 로르텔은 먼저 걸어 나갔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동이 떠오르는 하늘을 본다.
로르텔의 여우같은 일면이야 알고 있었다. 뭐, 돈 좀 받았다고 해서 그거에 마음의 빚이 생겨서 휘둘릴 필요도 없고, 로르텔도 그 사실이야 잘 알고 건네준 거겠지만, 어쨌든 로르텔의 의도는 나와의 접점을 유지시켜 놓는 것이다. 후일 어떤 방식으로든 이 연결고리를 이어가기 위한 명분이다.
– ‘투자라, 그건 제 전문 분야인데.’
여지없이 그 말을 똑바로 실천하는 그녀의 행동력엔 감탄의 박수마저 나온다.
어쨌든, 글라스칸 토벌전은 잘 마무리 됐다.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걸어나오는 토벌대를 바라보며, 그런 독백을 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힘든 고비였지만 나름 잘 넘기지 않았나. 조금씩 밝아져가는 하늘을 보면서, 그런 자축도 해보는 것이었다.
수고했다. 나 자신. 이제 1막이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잘 헤쳐나왔구나.
“…..그래서, 예니카는?”
문득 느낀 감상은 이야기의 핵심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뭔가 중요한 부분이 스킵되어버린 듯한, 이루 말하기 힘든 공허감이 한 켠에 남아있다.
예니카의 모든 행보에 대한 것은 비어있는 퍼즐조각이었고, 아직도 비어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그럭저럭 잘 마무리된 글라스칸 토벌전이었고, 이변이 있었지만 결국 이야기의 흐름을 정사대로 되돌려 놓았으며,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이거면 잘 마무리 된 거 아닌가…. 그렇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러고보니, 예니카 선배의 모습이 안보이네요.”
저 멀리 네일관에서 나오는 토벌대의 모습에 예니카는 보이지 않는다. 예니카를 제압했다면, 기절한 예니카라도 누군가가 업고 나와야 자연스러운 흐름 아닌가.
“뭐, 중간부터는 글라스칸의 오른팔에 정신이 쏠려 있었을 테니까. 일단 예니카는 뒷전이 되었겠지.”
먼저 앞으로 나아가던 로르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면 저, 예니카 선배님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뭐?”
“저, 오필리스관 복도에서 예니카 선배랑 우연히 만난 적 있거든요. 마침 그 때 합동 전투 실습 당시 일을 화해하기도 했구요.”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로르텔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예니카 선배의 방 안을 들여다 봤거든요.”
로르텔은 가벼운 걸음걸이를 이어나가며,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건넨 것이다.
“한 번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