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60)
엘테 상회의 어떤 지부를 가든 간에, 로비에는 큼지막한 양팔 저울이 올라와 있다.
정확히 수평을 이루고 있는 그 저울이 상징하는 바는 뻔하다. 공정함이다.
휘어잡은 상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집단이다. 그런 자들이 공정함을 내세우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우습긴 하나, 본래 몸집이 커질수록 명분이 중요해지는 법이다.
위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혹자들은 이런 엘테 상회의 위선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이라도 상도에 눈이 트인 사람들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결국 집단을 이끈다는 것은 사소한 의사 결정 하나하나에 모두 합당한 명분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니.
적나라한 위선일지언정, 선인행세를 해야만 한다.
로르텔 케헬른은 지긋지긋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새까맣고 음습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언정, 만면에 미소를 짓고, 상대에게 공정함을 강조한다.
“명분인가…”
엘테상회 회주, 슬로그 켈드럭스가 고개를 숙인 채 읊조렸다.
책상 위에는 현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 로르텔 케헬른의 초상화와 이력이 올라와 있었다.
중후하게 피어난 수염과 더불어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주름살이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호화롭지도, 그렇다고 단출하지도 않은 상인 특유의 펑퍼짐한 가죽외투엔 고풍스러운 털장식이 달려 있었다.
아스라하게 눈가를 좁히는 것은, 백전노장 슬로그 켈드럭스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생각할 때마다 취하는 버릇이었다.
상업도시 올덱.
클로엘 제국 서쪽의 사미엘 해안선을 따라 쭉 펼쳐져 있는 그 항구 도시는, 이 제국 물류 유통의 거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황도 클로에론, 성도 카르페아, 혁신의 땅 탈카렌, 라멜른 산맥지대, 코헬톤 무법지대, 대륙 남단의 아켄섬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제국 중앙부 지역으로 물류가 유통되려거든 이 항구 도시를 반드시 지나야만 한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크고 작은 상회들의 각축장. 사리사욕에 찌든 상인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모여든 황금의 땅이다.
이른 아침에 그 도시의 선착장을 걷다보면, 아침해보다 일찍 거리로 나와 바삐 뛰어다니는 상인과 인부들을 구경할 수 있다.
한 푼이라도 더 제 주머니에 집어넣기 위해 분주한 자들의 도시.
이런 곳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보낸 자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로르텔 케헬른 또한 마찬가지일 터.
“사업 확장인가…”
성도 카르페아 쪽으로 연결되는 상로를 좀 더 본격적으로 뚫어보려 드는 로르텔의 사업계획을 읽으면서, 슬로그는 생각에 잠겼다.
현 엘테 상회의 명목상 회주는 슬로그 켈드럭스이지만, 대부분의 실권은 로르텔 케헬른이 쥐고 있는 형국. 얼마 안가서 슬슬 로르텔이 직접 회주의 자리에 오르려 할 것이다.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거든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그래. 언제나 중요한 것은, 명분인 법이지.”
그런 말을 읊조리며, 슬로그는 넌지시 눈을 감았다.
“황금왕 엘테가 이 바닥을 떠난지도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슬슬 ‘엘테 상회’라는 이름을 버릴 때도… 되었지…”
엘테 상회 중앙 지부의 넓은 회주 집무실에, 정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퓰란까지 다녀오셨다고요? 연구 업무 때문에?”
로르텔 케헬른이 로스테일러 저택에 들른 것은 이미 여름날의 무더위가 전부 가신 뒤였다.
아직 가을이라 하기엔 좀 후덥지근한 감이 있지만, 여름이라 부르기엔 선선한.. 그런 날씨였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몇 개월 정도 올덱에서 상회 관리를 하던 로르텔은 이윽고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겠답시고 외근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믿을만한 심복 몇 명을 끌고 다니면서 새로운 무역로를 트는 것은 보통 회주가 직접 하는 일이 아니다. 아직 슬로그에게 회주 자리를 돌려받지 않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일 때 실무적으로 중요한 일은 최대한 마쳐놓으려는 것이었다.
특히, 성도 카르페아와의 무역로를 새로 트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텔로스 교도들이 모여있는 카르페아는 문화적 특성상 그 수요 품목 파악이 굉장히 쉽고, 시기별 수요량 자체도 어렵지 않게 산출된다.
텔로스 성당의 대 기도회 기간, 사순절 기간, 성녀 기도식, 11성인의 축일, 대축일, 중앙 세례일… 뿐만 아니라 중앙 기관인 성황도의 기초 유지 물자까지 전부 댈 수 있다면 그 매출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현재 성황도의 물자들을 이런 저런 상회에서 중구난방으로 매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로르텔은, 어떻게든 성황도 핵심인물 쪽과 이야기를 틀만한 방안을 마련하고 싶었다. 엘테 상회에서 전담해서 매입을 돕는다면, 성황도 쪽에서도 많은 부대비용을 아낄 수 있을테니까.
그 과정에서 찾아간 사람이 바로 에드 로스테일러였다.
“그래, 퓰란 쪽에서 최고위 정령에 대한 연구를 좀 하고 왔어. 그 과정에서 좀 귀중한 물건이 손에 들어왔는데, 감정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에드 선배님. 필요할 때 적당히 서신을 넣어주세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개학이 머지 않았다.
신입생들의 선출 및 반배정, A반 학생 수업을 담당한 에드 로스테일러는 학기 중이 되면 많이 바빠질 것이다. 특히, 가장 유망한 학생들을 전담해서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학사 차원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지금이야 본가에서 신변을 정리하고 있지만, 조만간 더 얼굴을 보기 힘들어질 예정이다.
얼마 안남은 휴식기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여유있게 보내고 싶은 것인지, 에드 로스테일러는 별다른 큰 업무를 더 맡지는 않았다. 저택의 정원에서 간단한 보고 사항 서류만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중앙 정원은 화사하고 아름답다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유능한 메이드장이 전담해서 관리하는 저택 부지인 만큼, 황실 정원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을 갖추고 있었다.
그 저택의 중앙부에 적당한 다과상을 차려놓고, 동생과 나란히 앉아 각자 자기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서로 외관이 꽤 닮아,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남매 지간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허나, 한 명은 대륙 제일 가는 성위 마법 연구가에다가 최연소 정교수 직위를 단 고위 정령사고, 다른 한 명은 대륙 제일 가는 공작가의 가주 직위를 단 소녀다.
절대로 적으로 돌려선 안되는 자가 있다면, 이 남매를 뜻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다행인 점은, 인연이 긴 덕에 두 사람이 로르텔에게 한 없이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로르텔 선배님은 요즘 사업 때문에 정신이 없으시겠던데요~. 올덱이 요즘 워낙 소문이 흉흉하던데, 상회 운영하는데 큰 차질은 없으세요?”
“글쎄요. 언제나 문제는 잔뜩 넘쳐나죠. 하나하나 해결 해나가고 있을 뿐~.”
깃펜을 놀리며 일을 보고 있던 타냐가 던지는 환담에, 로르텔은 웃으며 답해주었다.
타냐는 대륙 최고의 반열에 들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음에도, 로르텔을 꾸준히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솔직히 로르텔을 아랫 것으로 대우해도 불만이 없을 지위이건만, 꾸준히 학연으로 엮여있으려는 듯 묘한 의도가 느껴져서 로르텔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로르텔은 선배로서의 입장은 내려놓고 존대를 하고 있음에도, 타냐는 그 태도를 쭉 견지할 마음인 듯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싱글벙글 웃기만 하며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더 이상 로르텔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려주던 그 때의 타냐가 아니다. 처음 실베니아에 입학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능글맞은 모습에, 로르텔은 세월이 무상할 지경이었다.
“뭐어, 사업에 관련된 사항을 저희가 이야기 해봤자 겉핥기 밖에 안되겠지만… 윽, 으히익!”
그러면서도 홍차를 입에 가져다 대려다가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는 모습이 여전히 허당같기도 하니,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오라버니… 홍차 온도가… 아무래도 신입 메이드가 내온 모양인데요…”
“내버려둬, 이미 벨이 체크해서 질책하러 갔을 거다.”
“부에엑- 부에에에엑-”
혓바닥을 휙 내밀며 죽을 상을 짓던 타냐는, 깃펜을 탁 내려놓고 체크하던 서류를 덮었다. 아마 당장에 처리할 일은 마무리 된 모양이었다.
학회 서류를 읽고 있던 에드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 서류에 눈을 박고 있는 상황이었다. 로르텔이라는 귀빈이 직접 찾아온만큼,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분주해져 있는 티가 나기는 한다.
어딜 가든 극진한 귀빈 대우를 받는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가, 눈앞의 업무 서류보다 뒷전으로 밀려있다는 사실은 잘 적응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은 로스테일러 공작가인 것이다.
오히려 로르텔은 편안한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얼마만에 보든간에, 에드 로스테일러는 언제나 에드 로스테일러다운 것이다. 찾아든 로르텔에게 반가운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일단 일을 뒷전으로 미루지는 않는 것이 참으로 이 남자 답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보자니, 타냐가 공연히 테이블 보를 들어 올리고서는 티 테이블 아래 공간을 슥 바라보고 있었다.
“쓸 데 없는 생각 하지 마라, 타냐.”
“으힉! 아, 아뇨… 그냥 쳐다보는 것도 안 돼요? 체크 해볼 수는 있는 거잖아요.”
“…왜 체크를 하는데…”
“…”
그런 남매지간의 오묘한 담화에 로르텔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에드는 당장에 체크해야할 일은 마무리 되었는지, 덩달아 깃펜을 내려놓고 서류를 탈탈 털어서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인상이 많이 좋아졌네. 로르텔. 실베니아 때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아. 아무래도 정식으로 회주 행세를 하고 다니려니 여러모로 외관을 뽐낼 필요가 있겠지. 잘 어울린다.”
“어머, 그렇네요~. 예쁜 적갈색 머리칼인만큼 이왕이면 그렇게 풀어 헤치는 게 풍성해보고 좋죠~. 로르텔 선배님.”
두 사람은 로르텔의 외관을 칭찬하고 있지만, 그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
에드는 말 그대로 순수하게 로르텔의 외관을 아름답다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지만, 타냐는 로르텔이 들인 노력을 그대로 꿰뚫어 보고 있는 티가 난다. 같은 여자로서의 직감인 것일까.
평소 같으면 편하게 한쪽으로 묶어내리는 머리칼을 굳이 풀고, 예쁘장한 푸른색 장미 머리핀을 꽂고, 감청색 스커트를 갖춰입은 모습. 꾸민 듯 하기도 하고, 꾸미지 않은 듯 하기도 하지만 그런 느낌조차도 의도한 것이다.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왜 굳이 외관을 가꾸고 나왔냐고 하면, 에드의 말마따나 이제 회주로서의 권위를 미리미리 챙기려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에드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방점을 두는 게 맞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순수하게 외관을 칭찬해주는 에드 쪽의 말이 좀 더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상인으로 살며 의례적 칭찬이란 것을 질리도록 많이 들어본 로르텔이지만, 꼭 에드가 말하고나니 괜시리 어깨가 으쓱하고 들뜨는 것은 또 신기한 느낌이다. 칭찬에 대한 면역은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여튼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처참할 정도로 방어력이 없다.
“그렇!”
목소리가 갑자기 뜬 것에 로르텔 본인도 숨을 휙 삼켰다. 거, 의례적으로 툭 던지는 말에 혼자 들떠서 말 끝이 뜨다니. 상업 전선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초보적인 실책이다.
다행인 점은, 이곳은 상업 전선이 아니라 로스테일러 저택의 야외 티 테이블이라는 점이다.
“크흠…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저도 슬슬 지위를 따져봐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에드는 별로 큰 의미를 두진 않는 듯 하지만,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할까… 타냐의 눈매는 이미 스리슬쩍 좁아지고 있었다. 무슨 의미의 눈웃음일까. 어쩌다가 타냐는 이렇게 피곤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역시 틀린 거 하나 없다.
“뭐, 바쁠텐데 이렇게 로스테일러 본가까지 얼굴 비추러 와주니 반갑다. 그간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도 잔뜩이지만,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저녁 만찬 자리에서 하자. 일단… 사업 이야기부터 해야지. 안 그래?”
에드는 본론부터 확 쑤시고 들어왔다.
그렇다. 로르텔 케헬른은 졸업 이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에드에게 추근덕 거리고, 음흉한 여우 같은 애정표현을 일삼긴 했지만… 일단은 잔뜩 쌓인 일을 처리하는 걸 우선시 해서 움직였다.
이쯤되니, 로르텔이 사업적인 이유로 방문했는지, 단순히 에드에게 추파를 던지겠답시고 방문했는지도 벌써 가늠이 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적인 이야기가 끝나면, 따로 해둘 이야기가 있다. 음… 난 말이다 퓰란에서…”
“오라버니,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죠! 일! 일 얘기가 먼저죠! 안 그래요? 아하!”
갑자기 테이블을 휙 치며 상반신을 일으킨 타냐가 이야기의 템포를 끌어올렸다.
“사실 엘테 상회 이야기야 뻔하죠. 요즘 로르텔 선배님이 분주하신 이유도 이런 저런 소식통을 통해서 다 들었거든요. 슬슬 방문하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결국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여공작 타냐 로스테일러에게서 나온다.
“성황도 쪽이랑 연결해주셨으면 하는거죠? 이왕이면, 그 꼭대기에 있는 클라리스 성녀에게.”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나. 사실 로르텔의 행적을 알고 있다면 그 정도 유추는 어렵지 않긴 하다.
로르텔은 대답하기보다는, 빙그레 웃었다.
“인맥은 곧 자산이거든요. 거기다가, 텔로스 교단의 심장이자 우상이신 분과 직접적으로 일을 틀 수 있다면… 저희 상회 차원에서는 최대한의 답례를…”
“답례는 필요 없다.”
예고조차 없이 튀어나온 에드의 말에, 타냐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이야기 하는 태도. 별 거 없다는 듯이, 홍차를 홀짝이며 대충 던진 그 말은… 예상대로이기도 하고, 예상 외이기도 하다.
엘테 상회의 회주대리와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최고 결정권자.
권력과 권력의 최정점이 맞닿는 장소에는 언제나 따라오는 단어들이 있다.
이해득실, 협상, 신경전, 계약, 보장, 기밀 유지, 기한.
그 차가운 얼음장 같은 단어들의 나열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손에 한 푼이라도 더 쥐기 위해 계약서의 마침표 하나까지도 응시한다.
지난한 로르텔의 삶 속에서, 협상테이블이라고 함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해주겠다고 이야기 한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둘은 이미 지긋지긋하리만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왔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로르텔 케헬른의 사람이다.
로르텔 케헬른은 에드 로스테일러의 사람이다.
‘내 사람’이다.
이해득실에서 초월해, 결국 마지막까지 편을 들어주는… 로르텔 케헬른에게 있어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위탁한 인간이다.
서로가 서로의 사업과 본분으로 바쁜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순간인 듯 해… 로르텔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로스테일러 저택을 책임지는 여공작 타냐의 입장에선, 이를 명분삼아 좀 더 엘테 상회에 이런 저런 요구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가 그렇게 못을 박듯이 선언해 버리자, 타냐는 딱히 더 뭔가를 말하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저택 운영에 대한 사안들은 모두 타냐에게 위탁하고, 타냐의 판단을 믿어주는 에드인 만큼… 이렇게 에드가 나서서 뭔가를 못 박듯이 이야기 해버리면 타냐는 딱히 반발하지 않는다.
대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르텔은 코끝이 찡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지만, 눈물을 훔치며 감사하다고 깍듯이 이야기 하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에드에게는 이게 당연한 것이니, 로르텔에게도 당연한 것.
에드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로르텔은 돕는다. 로르텔에게 도움이 필요한다면 에드는 돕는다.
그 과정에 이해타산이나 계산 같은 것은 일절 들어있지 않다.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명제처럼, 당연한 사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로르텔은 여우 같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데에 성공했다. 과연, 그 표정관리는 능구렁이가 다 된 타냐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다.
“자세한 실무에 대한 이야기는 만찬 때 나누도록 해요.”
로르텔은 싱긋 웃으며, 에드에게 그리 이야기 했다. 에드는 알겠다며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당장 급한 일은 다 처리했으니 저녁까지 오라버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퓰란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타냐는 다시 발랄한 어조로 이야기 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피로하진 않은데.”
“몸의 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적되는 거에요. 같이 퓰란에 다녀온 예니카 선배님은 남작저로 돌아가지도 않고 오늘 하루종일 드러누워 있었잖아요!”
거기서, 로르텔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퓰란이란 지명을 들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예니카… 선배님…?”
“어머나, 로르텔 선배님… 자세한 여정은 모르시겠죠, 역시. 그게…. 에드 오라버니는 예니카 선배님네 고향에 다녀왔거든요, 둘이서요.”
입가를 슬쩍 가리며 말하는 타냐의 말에 살짝 들뜬 듯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묘한 눈웃음을 감추며, 타냐는 속내가 들어있는 듯한 어조로 로르텔에게 속삭였다.
“뭐어, 워낙 거리가 멀다보니 많은 사람을 파견하기도 좀 그래서… 두 분만 단 둘이서 다녀오라고 마차를 내줬었죠. 마부 한 명이랑요. 아시다시피, 두 분이 어디 가서 납치당하고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뭐어, 단 둘이서 다녀오는 게 가장 효율적이죠. 단 둘이서.”
단 둘이서.
뭔가 그 부분을 강조하는 듯한 어조가 탐탁지 않으나, 로르텔은 어렵사리 표정관리를 해내느라 자세한 부분을 따지긴 힘든 상황이었다.
“퓰란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니까 확실하게 일 다 잘 처리하고 오셨더라구요. 제 입장에서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어요~. 에드 오라버니 같은 분이 저택에 딱 든든하게 있고, 예니카 선배님 같은 분이 가신으로 들어와 계시니~.”
타냐는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또 은근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다음에 또 일이 있으면, 두 분만 파견해도 괜찮겠는 걸요?!”
“호들갑 떨지 마라, 타냐…”
“네엡…”
타냐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지만, 콧대를 세워보이며 흠흠 웃는 모습은 뭔가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로르텔은 턱 끝을 한 번 훑고는 작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사실 크게 당황할 일은 없다.
다만,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순 없다.
대체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갔단 말인가?
*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간 에드를 보낸 뒤, 로르텔은 정원을 따라 걸었다.
사실 로스테일러 공작가까지 온 가장 큰 이유는 성황도와의 거래를 트기 위함이지만, 예니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신이 약간 혼미해지는 듯 하다.
상인 특유의 침착함 덕에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잡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신도 없고 저택의 사용인들도 없는, 명백한 둘만의 공간에 한참을 함께 머물렀을 것이다.
에드 성격상 어지간해선 일선을 넘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다.
만약, 두 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건너갔다면? 나란히 손을 잡고 저 먼 무지개 건너편의 동화나라를 거닐다 왔다면?
예쁜 팬지 꽃이 피는 동산을 따라 하하호호 춤을 추다가…………… 요컨대, 이래저래 해서 동침했다면?
로르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듣자하니 아직 예니카는 남작저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나.
만약, 예니카와 맞딱트리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로르텔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상업 전선에서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정신이 없었던 틈에, 에드의 팔짱을 끼고 하하호호 둘만의 나라로 떠나갔다가 온 예니카가 지을 표정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전부 도출해내 본다.
로르텔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우고, 콧김을 흥 하고 뿜을 것인가.
측은한 표정으로 로르텔을 보고서 픽 웃을 것인가.
아니면 보란 듯이 자랑하며 로르텔을 조롱할 것인가.
예니카라면 첫 번째 경우의 수가 가장 유력해보인다. 어쨌든 긴 기간동안 에드와 단 둘이서 많은 교감을 주고 받다 왔을테니, 심리적 우월감을 표현하려 들겠지.
겉에서 보기엔 앙증맞기만 한 그 자랑스러운 표정을, 로르텔은 어떻게든 감당해낼 준비를 끝마쳐야했다.
“읏…”
저 멀리, 정원에 마련된 자그마한 정자에 예니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인가. 로르텔 입장에서는 썩 반갑지 않은 만남이었으나, 언젠가는 부딪혀야만 할 시련이었다.
에드와 예니카의 진도가 어디까지 갔을지, 예니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 예상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로르텔은 어떻게든 미소띤 가면을 쓴 채 예니카에게 다가갔다.
예니카가 로르텔을 향해 우월감을 표할 수많은 수단을 전부 떠올리며, 모두 어떻게 대처할지 시뮬레이션을 마친 상태.
어찌됐든 간에 로르텔의 미소 띤 가면이 벗겨질 일은 절대 없다. 마음의 준비를 철저하게 끝내놓은 채, 점잖은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예니카 선배님. 계셨네요.”
정자 한쪽에 달린 감꽃을 가만히 만지고 있던 예니카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로르텔과 눈을 맞춘다.
언제나 저택에 찾아온 로르텔을 볼 때마다 대놓고 뾰루퉁 대거나, 경계하는 표정을 짓던 예니카다. 이번엔 제대로 기회를 잡았으니 뭐라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어라, 로르텔 왔네! 오랜만이야! 요즘 사업 때문에 많이 바쁘지?!”
예니카는, 정말 새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로르텔에게 안부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 속내엔 단 한톨의 경계심이나 위기감조차 없다.
“그래도 날이 많이 선선해졌네! 덥지는 않으니까 다행이야… 어쨌든, 나는 이만 방에 돌아봐야겠다. 너무 오래 밖에 나와있어서 가신들이 걱정할지두… 이따가 저녁 만찬에 보자! 응!”
순수 백프로 화사함만을 가득 띄운 미소를 지은 채, 예니카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멀어져가면서도, 로르텔에게 산뜻한 웃음과 함께 계속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
로르텔은 그대로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
“…………………………….”
그리고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건 예니카에게 예상했던 그 어떤 반응보다도… 가장 위험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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