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67)
에드 로스테일러의 위임장을 드러내자, 관청 직원은 곧바로 귀빈을 대접하기 위한 접객실로 벨 마이아를 안내했다.
벨은 로르텔의 손을 꼭 잡은 채, 접객실에 앉아서 조용히 주변에 정신을 집중했다.
데려온 가신들을 전부 엘테 상회 쪽으로 보낸 시점에서, 로르텔을 지킬 사람은 벨 뿐이었다. 언제라도 긴급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경계를 풀어선 안된다.
“그 이름난 로스테일러 영지의 내실을 홀로 책임지는 이름난 가신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까다로운 영주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가 저택의 안주인이나 다름 없는 위치까지 올라섰다는 소문이 자자하지요.”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온 늙은 신사가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직접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니 영광이군요.”
깔끔한 상인모에 외눈안경, 딱 붙는 셔츠와 바지. 그리고 감청색 외투까지. 겉모습이 워낙 세련되어, 군데군데 희끗한 머리칼마저 품위있어 보인다.
황도 직속기관인 올덱 관청의 청장, 마이트였다.
“소문은 언제나 부풀려지는 법이지요. 저야말로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마이트 청장님.”
벨은 가신이 아니라 고용된 신분이다. 그리고 평민 출신도 아니고 플란첼 귀족가 출신이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이 어긋나는 건 소문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생각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분이라 놀랍군요. 로스테일러 가문의 전령이시니만큼, 그에 맞는 예우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그 귀여운 아이는?”
벨은 에드의 지시를 곱씹으며,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현재 로스테일러 가문에 몸을 위탁하고 있는 손님, 로르텔 아가씨입니다.”
올덱 내의 권력 구도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이트 청장이다. 그 이름을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처음에는 재미 없는 농담이라 생각해서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다.
그러나, 벨의 표정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서 조금씩 인상을 찌푸린다.
벨의 옆에 꽉 붙어 앉아서 한쪽 팔을 감싸안고 있는 로르텔은, 불안한 듯 마이트와 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다.
마이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설명드릴 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청장님은 곧 있으면 제 도움이 필요하시게 될 겁니다.”
벨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이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 모습을 내비치면서도, 천천히 벨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벨은 시계를 슬쩍 바라보고선 이야기 했다.
“제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귀빈대접용 악단과 의전 용품들을 먼저 빨리 수배하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일을 진행하면서 들으시는 게 나을겁니다.”
*- 쾅!!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신들이 상회의 나무 문을 부수고 로비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와중에 한 발 더 꽂힌 마력화살은 또 다시 슬로그의 집무실을 뒤흔들어 놓았다. 한 발 한 발의 충격이 거대한 폭탄과도 같았다.
“이, 씨팔…!”
너무나도 놀라서 아예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두 거상에게, 슬로그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 일단 어서 저층으로 내려가야 해! 이왕이면 지하로!”
“슬로그 켈드럭스!”
살이 찔대로 찐 푸엘란은 바닥에 처박힌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6인의 거상이자 제국 남부의 광물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요인이다. 슬로그는 이를 악물고 푸엘란의 팔을 끌어올려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반면, 얄팍한 체구의 채권상인 칼덴하임은 얼른 스스로 몸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에드 로스테일러는 신중하게 접근해올 것이라고…!”
“잘잘못을 따지는 건 나중에 하세!”
슬로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확실히 위화감이 든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무력과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그가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향’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뒷일 생각 안하고 불도저처럼 밀어내버리는 것은 에드 로스테일러의 성향과는 정반대다.
황실과 성도의 비호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행동의 정당성과 명분이 있냐 없냐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냥 멀쩡히 장사하고 있는 거상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것은… 가능은 할지 몰라도 평판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제 막 부활해서 세력을 부풀리고 있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이름값에 큰 해가 될 터.
뿐만 아니라 교직을 잡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는, 오명을 쓰게 되면 학생들 사이에서의 여론도 악화되고 평판도 더욱 무너질 터. 수틀리면 아무렇게나 깽판을 치는 망나니 이미지는 교편을 잡은 자에게는 치명적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쌓아온 게 많은 남자다. 그 말은, 잃을 것이 많다는 이야기다.
잃을 것이 많은 자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제도권 안에서, 규율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려 든다.
그렇기에, 슬로그가 자신있어 하는 전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암투와 모략의 세계 말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여태까지 그렇게 행동해왔고, 단 한 번도 그 법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슬로그가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변의 시선이 어쨌냐는 듯이 망나니처럼 치고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에드 로스테일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왔는지, 분석하고 파악해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보다.
“자네만 믿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이런, 미친…!”
“이런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닐세! 상회 지하에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수단이 있네!”
슬로그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팔을 걷어붙였다.
“푸엘란, 칼덴하임. 그대 둘이 지하로 달려가서 B-3 창고에 있는 물자를 챙겨오게. 상회 직원들 손에 맡기기에는 너무 귀중한 물품이니.”
“거, 거기에 뭐가 있지?”
어찌됐든 푸엘란과 칼덴하임은 완전히 슬로그 쪽에 베팅한 거상들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슬로그에게 붙어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물건이지. 어차피 에드 로스테일러는 날 잡는게 목적일테니, 내가 도주하면서 시간을 끌어보겠네.”
칼덴하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부서진 외벽쪽을 쳐다보았다.
상회 철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가신 뒤로,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 보인다.
장궁을 정리해서 내려놓고 팔을 털며 상회 지부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모습엔 모종의 귀기마저 느껴진다.
상회 내부를 지키는 용병들이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저 사내의 진입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다.
“운반해올 거면 최소 두 명은 필요할 걸세. 어차피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거나 다름 없으니, 딴 생각하지 말고 바로 와야하네.”
슬로그는 이를 악물고 두 사람에게 강조해서 말했다.
푸엘란과 칼덴하임은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퇴로는 없다. 작정하고 추격하기 시작하면 떼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해결을 봐야한다.
*상회 로비로 진입하자 이미 제압당해서 바닥에 자세를 낮추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잔뜩보였다.
다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제국의 심장 역할을 하는 도시인 올덱 한가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큼지막한 상회 건물인 엘테 상회 본점에서 이런 테러에 가까운 난동에 휘말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 하다.
상인들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목숨만 부지해주면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상회와 계약하고 본점과 지점을 지키는 용병들이다.
“뭐, 뭐야… 저 놈…!”
“다, 다 튀어나와! 적습이다!”
부지 외곽이나 위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서 로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단검, 장검, 석궁, 지팡이… 각종 무기들을 잔뜩 챙겨들고 모여들었지만… 쉽사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가신들이 가슴께에 달고 있는 공작가 문양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 뭣들하고 있어!”
엎드려 있던 상인이 공포에 떨다 못참고 외쳤다.
“우, 우리가 도주할 틈을 만들어야 될 거 아니야!”
어쨌든 용병은 신뢰가 생명이다. 엘테 상회와 계약을 했으면 상대가 그 누구가 되었든 엘테 상회를 수호하는 게 맞다.
용병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 화아아악!
기초 바람마법으로 용병들을 전부 밀어내버리면서, 나는 한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신을 다치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므로, 전투는 최소화한다. 어차피 슬로그를 잡아내는 게 핵심이므로, 나머지 놈들은 제압하기 보다는 도주를 유도한다.
끌어올린 마력이 몸 안에서 피어오르자, 정령식으로 화해 허공을 수놓는다.
– 콰아아아악!
미리 언질을 들은 가신들은 일제히 상회 내부의 복도로 뛰어들어갔다.
로비를 가득 매운 마력의 크기는 더욱 더 커지고 커져서, 이윽고 천장과 기둥을 부수기 시작한다.
상인들과 용병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나자빠진다. 나는 그대로 끌어올린 정령 감응을 바깥 부지 쪽으로 발산해냈다.
– 화아아아악!
거대한 파충류의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져서, 정문 바깥에서 안 쪽을 쳐다본다.
로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큼지막한 눈동자 뿐이다. 그 도마뱀의 크기는 어지간한 집채만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가, 불 정령의 현신을 알린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의 소리는 이윽고 상회 건물 전체로 퍼져나간다.
고위 불 정령 타칸.
어지간한 중위급 마법사를 무더기로 데려와도, 그 껍질조차 뚫을 수 없는 고위 정령이었다.
부지 안의 상회 직원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지나는 행인들마저도 비명을 지르며 뛰쳐다니기 시작한다.
도심 한 복판에 냅다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다. 고위 정령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머금게 만든다.
“제, 젠장…! 이런… 젠장…!”
용병들은 일제히 엉덩방아를 찧거나 몸을 떠는 등,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도주 뿐이다.
“이, 일단… 후문… 후문 쪽으로 뛰어!”
용병으로서의 신용보다 목숨 부지를 택한 자들이 도주로를 향해 일제히 뛰쳐나간다.
사로잡힌 상인들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차마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입장이 반대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란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가신들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도 못한 채 완전히 길을 내준 용병들은, 이를 악물고 부지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설마 이런 도심지 한 가운데에서 고위 정령을 맞딱트리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다.
“리엔나부터 찾아. 나는 슬로그를 쫓는다.”
가신들에게 그리 지시해두었다.
로르텔의 수석비서 리엔나 클렘슨은 분명 슬로그에게 포박당한 상태일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리엔나는 절대로 로르텔을 배신할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슬로그는 리엔나의 입으로부터 로르텔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고 말했다. 요컨대 고문을 했든, 자백제를 먹였든, 무언가 탐탁지 않은 수단을 써서 리엔나의 입을 열게 만들었단 뜻이다.
그러려거든 손이 닿는 곳에 리엔나를 포박해둬야 할 터. 분명 이 상회 본점을 뒤지다보면 리엔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신들은 우렁차게 대답한 후, 일제히 흩어져서 상회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올려서,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로 반파된 로비 천장을 아예 부숴버렸다.
길게 시간을 끌 마음이 없다. 도심 한복판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뿐이다. 20분 안에 끝낸다.
폭발의 여파로 뚫린 구멍은 상회 윗층으로 이어져, 슬로그의 집무실까지 그대로 길을 내준다.
상인들은 완전히 제압당해 전의를 잃었다. 용병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주했다.
도시 질서를 책임지는 관청의 개입까지 시간도 좀 남았다.
나는 그대로 바람의 마력을 끌어모아 상회 건물 상층부로 도약했다.
슬로그는 아무런 전투 능력도 없는 상인일 뿐이다. 무력으로 맞서야하는 상황이 되면, 상대조차도 되지 않는다.
그대로 뛰어 올라 슬로그의 집무실에 도달하자 반파된 외벽과 복도 쪽 열린 문만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있다가 얼른 복도 쪽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
나는 그대로 열린 문으로 성큼 성큼 걸어나가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저 복도 끝에 이를 악물고 달려나가는 슬로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 끝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이번에는 일반 마력이 아닌 성위 마력이다.
성위 마법 ‘강제 결집’.
성위 마법은 그야말로 불합리의 극치와도 같은 마법이다. 일단 시야에 들어오고, 발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허용할 수 밖에 없는 기술들 뿐이다.
그대로 끌어올린 성위 마력을 발산하자, 저 멀리 도주하고 있던 슬로그의 몸이 그대로 다시 내 쪽으로 빨려들어온다.
“크허억!”
그대로 슬로그의 멱살을 잡아채서, 반대 쪽 복도 외벽에 매쳐버렸다.
– 콰당탕!
– 쾅!
“크악!”
그대로 외벽에 부딪혀서 바닥을 구른 슬로그가, 고통의 신음성을 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슬로그는 품 속에서 마공학용품 하나를 꺼내든다. 충격발산장치였다.
전투 능력이 없는 거상들은 호신용 마공학용품을 반드시 쟁여두고 다닌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애석하게도 마공학은 내 전문 분야다. 슬로그가 꺼내든 충격발산장치는 이미 수백 번도 더 넘게 만들어본 것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장치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내부의 마력회로를 끊어버렸다. 내부 구조가 어떤 식으로 되어있는지는 눈감고도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 딸각, 딸각.
“이, 이런 미친… 왜 이게 작동을…! 이게… 얼마 짜린데…!”
나는 그대로 슬로그가 들고 있는 충격발산장치를 휙 낚아채서 집어던져버렸다. 구석으로 던져진 장치는 속절없이 깨져서 바닥을 굴렀따.
슬로그는 그대로 날 올려다보다가 얼른 바닥을 뒤로 밀치며 뒷걸음질을 쳐봤지만, 야속한 복도 벽이 그의 등을 막아섰다.
“하…참… 큭… 으윽…”
슬로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에드 도련님… 지금 잘못 판단하고 계신 겁니다.”
“…”
“제가 지금 상황을 해결하려고 급하게 혀를 놀리는 것으로 보이시겠지만,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일을 무를 수 있습니다. 가신들을 데리고 물러가십시오. 이건 그 로르텔 케헬른을 돕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더 몰아넣는 일일 뿐이라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슬로그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로르텔이 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인들의 싸움은 명분과 정당성의 싸움이라고.”
나는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력으로 밀어붙여서 제 목을 꺾어버리고, 로르텔 케헬른을 상회 꼭대기 자리에 앉힌들… 상인들이 그녀를 따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애석하지만 상인들은 로르텔을 따르는 게 아니라, 언제 개입할지 모르는 당신에 대한 공포를 느낄 뿐입니다.”
슬로그는 복도 벽에 팔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세치 혓바닥 뿐이다.
허나, 슬로그는 그 혓바닥으로 먹고 사는 상인이다.
“상인들은 결국 효율과 합리를 따져 행동하는 족속들입니다. 처음에는 로르텔에게 따르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겠지만, 결국 이 모든 건 경제 논리와 합리성 아래에 세워진 집단이 아닌, 힘과 공포에 의해 세워진 집단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겠지요.”
상인은 권력이 아닌 돈을 따라 행동한다. 둘은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상인들이 로스테일러의 위광을 등에 업었을 뿐인 로르텔을 언제까지 따를거라고 생각합니까? 상회를 지탱하는 핵심 인력들이 회의감을 느끼고 떠나는 데에는 얼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사업을 잘하는 리더가 필요하지, 정치 권력과 무력으로 군림할 뿐인 리더는 원하지 않습니다.”
로르텔이 그토록 성황도와의 거래 건을 트려고 노력했던 것도, 결국 엘테 상회 소속 상인들을 꿰어내기 위한 수였다.
상회는 돈을 벌고자 하는 상인들이 모인 곳. 결국 그들을 잡아놓고 목줄을 채워 휘하의 인간으로 부리려거든 ‘사업’이야 말로 최고의 명분이다.
“이대로 제 목을 꺾는다면, 전 로스테일러 가문의 폭거에 희생당해 억울하게 자리에서 내려놓은 불쌍한 회주로 기억되겠지요. 로르텔은 그런 저를 밀어내고 힘으로 자리를 꿰찬 인간이 될테고요.”
“…”
“이것이 정녕 당신이 바라던 상회의 정치구도입니까? 이 정도는…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건 완전히 기본 아닙니까?”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자, 슬로그는 자신의 말에 더 힘을 실어가기 시작했다.
“명분과 정당성 없이 꿰찬 권력은 결국 천천히 무너질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서로 피해를 볼 뿐인 최악의 선택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슬로그 켈드럭스.”
나는 마력을 끌어올린 손을 슬로그의 면전에 가져다 댔다. 슬로그가 마른 침을 꽉 삼켰다.
“명분과 정당성이 없는 건 너겠지.”
“그런… 무슨… 저는 대외적으로 정당하게 황금왕 엘테의 자리를 이어 받은…”
“상인들의 눈이 향하는 곳은 결국 금화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슬로그가 하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꽤 있다.
허나, 내가 그런 부분을 미리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네 회주 자리를 지키겠다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사업안을 땅에 파묻으려고 하는 놈을 회주로 인정할 거라고 보냐?”
“…성황도 거래 건 말입니까?”
슬로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윽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성립되지도 않은 사업안을… 그리고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은 그런 건을 명분으로 현 회주를 밀어낼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로르텔이 추진하고 있던 성황도 거래 건은 아직 제대로 빛을 보지도 못했다.
아니 빛을 봤다 어쨌다 하기 전에, 그냥 추진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성황도와 로르텔을 연결시켜주겠단 약속을 받아냈을 뿐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업안으로 발전되리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설령 성황도와의 접선이 계획되어 있다고 해도, 그게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런 일정도 확정된 게 없고, 무엇보다 상인들은 계약서로 말합니다. 계약서 하나 없는데 누가 믿어줍니까?”
“내가 직접 보장한다고 해도?”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위용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그 목소리가 성도 카르페아 전체를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력한 공작가 자제라 할지라도, 목소리 하나로 국가를 움직일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슬로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슬로그는 지금 움직인 것이다. 슬로그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이라면 로르텔이 슬로그를 밀어낼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성황도와 엘테 상회는 이미 물류 계약을 끝마쳤고, 계약서도 있어. 네가 그걸 불태운 거야. 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회 전체의 이득을 불에 태워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거야.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이야기가 될 거야.”
“중상모략과 음해. 그건 아주 훌륭한 전략이지만… 이해 당사자인 에드 도련님이 말해도, 모든 상인들이 믿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슬로그 켈드럭스.”
슬로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비죽 웃음을 흘렸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 슬로그를 어떻게 해 볼 명분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자의 입을 빌려야겠지.”
이어지는 내 말에, 슬로그의 웃음이 휙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비틀거리면서 들어올리더니, 조금씩 그 동공을 크게 확장시킨다.
그렇게 완전히 생각이 정리되자…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당신… 무슨… 짓을…”
*- 쾅!
올덱 관청 접견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직원이 얼른 사과를 했다.
이렇게 급박하게 업무 중인 청장을 찾아와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청장은 성큼성큼 다가온 직원이 조용히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청장의 눈 역시 휘둥그렇게 커지고 말았다.
상회 직원이 속삭이는 말을 들으면서, 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벨은 여전히 조신하게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뿐이다.
청장 마이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용 책상 서랍에 있는 여러 보고 서류들을 휙 펼쳐보았다.
매일 아침 보고 받는, 제국 내 여러 유력 인사의 공식 일정 목록이었다. 그 중 한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앞머리를 휙 쓸어올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벨은, 이윽고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귀빈이 오시나 보군요.”
벨은 기억하고 있다.
에드가 타냐에게 심드렁하게 던졌던 그 질문을.
– ‘지금부터 성도 카르페아에 서신을 보내면,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성녀의 일정은 기본적으로 성황도 차원에서 매달 공표하고 있다.
성도 카르페아의 모든 경의를 한 몸에 받는 성녀인 만큼, 모든 일정은 공표된 대로… 철저한 호위와 함께 움직이는 법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정세에 밝은 사람이라면 성녀 클라리스의 일정을 꿰고 있을 수 있다.
“이건…”
─상인들은 성녀 클라리스를 ‘걸어다니는 도시’라고 부른다.
그녀가 가는 곳은 몰려든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고, 한 말씀이라도 듣고자 가르침을 청하는 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큼지막한 중앙 광장 서너개를 다 메우고도 남을 인파들이다.
그런 영향력을 지닌 성녀를 마음대로 오라가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모든 공식 일정을 완전히 제쳐버리고…. 상업도시 올덱으로 그 희대의 성녀가 탄 마차가 달리고 있단 사실은… 두 귀로 전해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자기가 관리하는 도시에 갑자기 폭탄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
정적으로 가득찬 접견실에서, 상황파악이 안되는 어린 로르텔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