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68)
로르텔에겐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유년 시절,
빈민가의 구정물을 밟으며 길을 떠돌던 한 소녀는 양아버지의 손을 잡고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상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큼지막한 상회 로비를 따라 쭉쭉 들어가다 보면 여기저기 서있는 상인들이 수군대는 모습이 보인다.
황금왕 엘테 케헬른의 양녀다.
그 엘테 케헬른이, 심복으로 삼기 위해 양녀로 들였다는 소녀가 바로 저기에 있다.
듣기로는, 숫자를 셈하는 법을 가르쳤더니 스스로 곱셈과 나눗셈을 깨우쳤다고 한다.
상회 장부를 보여주었더니 이틀만에 복식 부기법을 완전히 익혀왔다고 하질 않나,
시장 추이 분석표를 보여주었더니 일주일만에 새 사업안을 마련해오고, 급기야는 실제 상회 사업안에 반영되기까지 했다.
황금왕의 양녀가 된지 단 몇주만에 모든 상인들의 시선을 두루 받게 된 그녀의 곁엔, 언제나 그녀를 가르치는 엘테 케헬른이 있었다.
그녀를 대동하고 엘테 케헬른이 집무실로 향하는 날에는, 심복들이 도열해서 고개를 숙인다.
장부 총괄 담당, 인력 관리 담당, 재정 설계 담당, 동향 파악 담당, 시장 분석 담당…
각자의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자랑하는 인재들이 고개를 숙인 채 엘테에게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어린 로르텔은 먼 산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풍경으로 쳐다본다.
각 인사들에게 로르텔을 소개시키면서, 그녀가 다 자라면 이 상회를 책임지는 핵심인력이 될 거라고 정성스럽게 이야기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어린 로르텔은 거짓 웃음을 띠는 법을 배웠다. 아직은 가면을 쓰는 게 미숙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해 나간다.
그렇게 상회의 유능한 인재들과 인사를 한 끝에, 마지막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슬로그 켈드럭스를 보게 된다.
[ 나랑 가장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온 슬로그다. 내가 행하는 모든 사업과 업무에는 그의 보조가 있었지. 가장 믿음직한 인재고, 현 시점에서 가장 유능한 관리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엘테 케헬른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 아직 로르텔이 많이 배워야 하는데, 아비로서 도움을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더군. 아무쪼록 자네가 로르텔을 많이 챙겨줬으면 좋겠네. ] [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짧은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엘테와 로르텔은 집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로르텔이 뒤를 돌아 슬로그의 표정을 보자, 한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 잘 들어라, 로르텔. 방금 얼굴을 대면 했던 상회 고위 직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새끼들이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을 때와는 다르게, 뒤를 돌아본 엘테 케헬른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이 바닥에 오래 쳐박혀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지. 그 누구도 믿지 말아라. 함께 수십년을 같이 일해온 동업자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두 기회가 되면 등에 칼을 꽂을 새끼들이야. 한심한 새끼들. 부득부득 이나 갈면서 내 부를 탐하고 있겠지. 시기와 질투에 미쳐버린 새끼들 같으니라고… ]무한한 신뢰는 곧 죄악으로 취급당하는 곳.
그 법칙은 엘테 상회의 꼭대기에 앉은 사내에게도 공평히 적용된다.
어린 로르텔이 올려다 본 부패한 거상의 내면은, 이미 세파에 의한 상처와 수많은 실패의 흔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이야 말로, 상인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였다.
[ 이 엘테 상회에 도제랍시고 들어오는 새끼들한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게 그거야. 그 누구도 신뢰하지 말 것.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는 가족과 스승도. ] [ 원래 세상살이란 건 다 고독한 법. 절대 그 누구에게도 틈을 내주지마라.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진솔하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라는 건 없다. 사람은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태어난 생물이야. ]집무실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양팔저울 문양. 엘테 상회의 상징과도 같다.
대외적으로는 정의로움, 공정함, 진실함 따위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엘테 상회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위선과 기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 큼지막한 양팔저울 문양을 올려다보며, 엘테 케헬른은 단언한다.
[ 세상에 완전한 수평을 이루는 양팔저울 따위는 없다.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엘테 상회 본점 건물은 이미 혼란의 도가니 안이었다.
외부에서 보고 있으면 반파된 건물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엘테 상회 본점은 늘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었다.
황도의 황성이나,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시계탑, 성도의 성황도처럼.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자리하고 있는, 랜드마크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그런 엘테 상회 본점이 아수라장이 된 모습은, 마치 이 광경이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적어도 올덱의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상회 내부의 모습도, 외부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1층 로비는 이미 수많은 가구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벽으로 상인들이 도망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서 각자의 사정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신들은 상회 내부를 수색한다.
상회의 상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간다.
그 중에서도 거상들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상황의 타개책을 찾아 움직인다.
완전히 슬로그의 편으로 들어선 푸엘란과 칼덴하임은 지하를 향해 전력질주로 뛰어간다.
다른 거상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올덱 관청으로 연락을 보낸다.
로르텔의 심복인 수석 비서 리엔나는 어두운 공간에서 조용히 눈을 뜬다.
현 회주인 슬로그는 에드 로스테일러 앞에서 동공을 떨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의 중심에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는, 조용히 슬로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려 하고 있었다.
– 쾅!
그러나, 슬로그는 그대로 잡혀주지는 않았다.
아직 뒷주머니 안에 숨겨놓은 마공학용품이 남아있었는지,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슬로그가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 콰가가가가각!
에드 로스테일러는 마공학의 대가다. 마공학용품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순식간에 내부 구조를 파악해서 무력화 시켜버린다.
그렇기에 슬로그는 그대로 자기 품속에서 폭발계 마공학용품을 발동시켜버렸다.
– 화아아악!
“크아아아악!”
온 몸을 찌르는 듯한 격통이 밀려 왔다. 그 아래층으로 추락한 슬로그는 바닥을 구르면서, 흙먼지 속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입속에서 알싸한 쇠맛이 난다. 그래도 에드 로스테일러와는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허억, 허어억!”
그대로 슬로그는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달려나갔다.
에드는 무너진 구멍으로 뛰어내려 착지한 다음, 도망가는 슬로그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투원도 아니고, 일개 상인이 그 폭발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그는 꽤나 빠른 속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흙먼지 속을 뚫고 나와 슬로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슬로그는 피칠갑이 된 몸으로 어렵사리 복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꺾이고 꺾이는 복도를, 벽을 짚은 채 절뚝거리면서 계속해서 도망쳤다.
가면서 손에 잡히는 가구와 장식장들을 모두 쓰러뜨리면서 에드 로스테일러의 진행로를 방해했다.
그러나 뚜벅뚜벅 거리를 좁혀오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그 정도 장애물은 장애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마력이 담긴 손짓을 몇 번 휘적거리는 것만으로 모두 창밖으로 날려버린다.
“이, 윽… 허억… 허억…!”
슬로그는 알고 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작정하면 도주하는 자신을 잡아채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뚜벅뚜벅 걷는 것만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을 뿐이다.
놈은 슬로그의 뒤를 봐주고 있는 그 뒷배가 누구인지 확인할 심산이다.
슬로그만 잡고 치워버리는 게 아니라, 슬로그가 자신감 있게 날 뛸 수 있었던 근원을 찾아내 제거해버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런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슬로그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슬로그는 전력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복도 끝으로 오자, 외곽 계단이 나왔다. 그대로 계단을 급한 걸음걸이로 뛰어내려가다, 발을 헛디뎌서 굴러 떨어졌다.
콰가가각 소리를 내며 꼴사납게 계단을 굴러내려간 슬로그는, 당장이라도 온 몸이 으깨질 것 같았지만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계단 꼭대기에서 천천히 층계를 따라 내려오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 보인다.
살인마와 희생자. 추격자와 도망자. 사냥꾼과 사냥감.
“네 놈은… 네 놈은… 정말로 이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미 에드 로스테일러를 귀족으로서 예우할 여유조차도 없는 것인지, 슬로그는 악을 썼다.
“날 완전히 깔끔하게 보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나!”
“말했듯이, 이미 모든 조치가 끝났어. 얌전히 있어, 그냥.”
“미안하지만 나를 함부로 건드렸다간…!”
– 부우우
그 때, 무너진 층계참 외벽의 틈으로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올덱 관청의 의전 음악대가 내는 연주음이었다. 그 소리가 귀에 아른거리자, 슬로그는 떨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외벽 너머로, 큼지막한 엘테 상회의 철제 정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성황도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변을 채운 올덱의 주민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고 있었다.
슬로그 또한 마찬가지다. 무너진 외벽의 틈 앞에 고개를 쳐박고, 바깥의 풍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생을 살아도 몇 번 보기 힘들다는, 성황도의 성녀가 탄 마차다.
“이…런… 미친….”
– 부- 부-
– 둥 둥 둥
웅장한 음악대의 연주 사이로 나타난 마차가, 엘테 상회의 부지 안에서 멈춘다.
상회 정문 앞으로 몰려든 인파는 으리으리한 규모다. 갑작스러운 성녀의 등장에 한층 더 현장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성황도의 성녀 클라리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비로움이란 개념이 사람의 자태로 화해 세상에 내려온 듯한 모습이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고결한 순백색 그 자체다.
새하얀 머리칼, 새하얀 성녀복, 새하얀 피부.
그 와중에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와, 붉은 나비 머리핀.
사뿐 사뿐 마차 계단을 타고 걸어내려오는 걸음걸이 또한, 아름다운 나비가 꽃잎 위로 내려앉는 듯 하다.
진짜로, 성녀 클라리스의 실물이다.
그녀는 함부로 누군가가 사칭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극형이다.
그렇게 성녀 클라리스는 지상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서 내려온 사람은… 슬로그도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메이드장, 벨 마이아. 그리고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어린 로르텔.
그 외에 수많은 성황도의 호위병들까지.
그 모습을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갑자기 성녀 클라리스가 나타나게된 경위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손을 썼기 때문이다. 그의 가신 벨 마이아가 저런 곳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론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메이드 장 벨 마이아를 미리 관청으로 보내서, 성녀 클라리스가 바로 이 엘테 상회로 안내될 수 있도록 미리 수를 써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계획의 현실성이라는 게 있다.
성도 카르페아의 성녀를 진짜로 엘테 상회의 부지에 데려다 놓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성녀 클라리스가 엘테 상회 본점까진 왜 왔을 거 같냐?”
반대 쪽 층계참 위에서 슬로그를 내려다보며,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야기한다.
“엘테상회와 미리 이야기를 나누었던 유통 계약에 도장을 찍으러 온 거야. 다만, 약속과는 다르게 상회에 도착하니까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거지.”
그런 유통 계약 건을 체결시킨 적 없다.
그럼에도, 성녀 클라리스가 그렇게 말하면 그게 진실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먼 거리를 성녀라는 거물이 직접 행차할 이유가 없다. 엘테 상회와 성황도 사이의 접점은 거의 없으니까.
성녀가 직접 나타나는 것만큼, 성황도와 엘테 상회 사이의 거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또 없다.
결국, 슬로그가 성황도와 엘테 상회 사이의 거대한 계약을… 오로지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파묻어버린 놈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다.
– 부우우우우우
음악대가 울려대는 웅장한 나팔 소리.
정당성과 명분.
슬로그가 쥐고 있던 마지막 무기가 사라져가는 소리였다.
“네 뒤를 봐주는 사람이 부디 성황도의 성녀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인물이길 바란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담담히 이야기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 회주 자리를 더 지켜줄 수 없을거다.”
자신감의 표현도, 조롱의 표현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황도의 성녀만큼이나 권위 있는 인물을 이 대륙에서 꼽아보자면, 한 손바닥을 다 채우기도 힘들다.
외벽 틈 너머로 보이는 성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로그는 목소리를 한꺼풀 낮췄다.
“그래… 성황도와의 접점을 이런 식으로 만천하에 드러내버리면, 내 입장에서는 더 반박할 수단이 없겠군… 뿐만 아니라, 아무런 후폭풍 없이 로르텔 케헬른이 회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여건도 마련이 되는 셈이고….”
그리고서는, 허무한 듯 다시 뒤를 돌아 에드 쪽을 보고선 말했다.
“하하…”
“…”
“그래, 내 뒷배가 궁금하시다고…”
그대로 반파된 외벽 쪽에 등을 붙이고선, 지친 듯이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의 꼴.
그 와중에도, 슬로그는 피를 뚝뚝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 하하…. 카칵…. 카하학…. 크흐흑….”
입술 사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그 웃음소리는,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후욱… 후우….”
그대로 슬로그는 지친 듯이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스윽 허리를 세워올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나?!”
– 쾅!!!!
그 순간, 마지막으로 쟁여두었던 슬로그의 마공학용품이 폭발을 일으켰다.
거의 만신창이에 가까워진 몸으로 그런 폭발을 일으키면, 슬로그 본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 확실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발을 받아들이며… 상회 건물의 최하층으로 추락해들어갔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폭발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재빠르게 방어 마법을 둘러서 대처했기 때문이다.
슬로그와 함께 최하층까지 추락한 나는, 요령 좋게 착지한 뒤 옷을 털었다.
그리고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슬로그의 모습이 보였다.
희끗한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은 피칠갑이 되어 있다.
폭발의 여파로 화상을 입은 몸 여기 저기가 드러나서, 끔찍한 몰골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상인 복장은 이미 고급품이라고 부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서지기 전에 회의실 같은 걸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여러 회의용 테이블이 도열해 있었으나, 폭발의 여파로 절반은 날아가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흙먼지가 사라지고 드러난 슬로그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꺼… 허어윽… 허어… 큭…”
허리춤을 철봉 같은 것이 관통하고 있었다. 추락의 충격으로 복부에 박혀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외벽이 무너지며 건축재가 드러난 모양이었다.
꿀렁대며 흐르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가고 있었다.
슬로그는 거의 광인에 가까운 집념으로 몸을 일으켜서 허리춤의 철봉을 뽑아내보려 했지만, 더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결국 손을 내려놓고 말았다.
“…”
“커… 허… 후욱… 끄흐윽… 큭… 큭큭… 큭큭큭큭…”
목에서부터 바람이 빠지는 듯한 숨소리를 몇 번 흘리더니,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또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몇 번 걸어보려고 하다가, 회의용 탁자 위에 철퍼덕 쓰러지고 만다.
옆구리에 박혀들어간 철봉을 꽉 쥐면서, 다시 테이블을 밀어올려서 몸을 일으켜보려하지만, 자기 피에 미끄러져서 나자빠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켜서 나아간다.
부질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도망… 도망쳐야 해… 보고.. 보고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어… 도움… 도움을 청한다면….”
“…”
“크…. 으윽…”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에드 로스테일러가 슬로그의 뒷켠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담담한 얼굴.
만신창이가 된 슬로그와, 멀쩡한 에드 로스테일러.
마음만 먹으면 한 손만으로도 슬로그를 제압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에드는 굳이 움직이지 않았다.
“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나… 날 내버려둬…! 커헉… 컥…”
슬로그는 덜덜 떨리는 팔로 회의용 테이블을 꽉 잡고 선 채다. 떨리는 동공을 수습도 하지 못하고 에드에게 공허한 외침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미… 미안해…! 그래, 확실히… 네가 이렇게까지 난폭한 수단을 취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비를 줘…”
“슬로그 켈드럭스.”
“그, 그래… 나, 날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로스테일러 영지까지 들락거리면서 대립각을 세우고, 이렇게 과감하게 로르텔을 제압했을 거라고 생각해?! 이 올덱에서 수십년을 버텨오면서 알만한 건 다 알게된 내가?!”
“…”
“내가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을 줄 알아?! 내가 단언할 수 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손을 대면… 넌 무조건 후회해….!”
슬로그에겐 더 이상 뒷걸음질 칠 공간조차도 없다.
입가에서 주욱 흘러내리는 선혈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이런 촌극은 그만하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슬로그.”
─폐부를 찌르는 말.
슬로그의 말이 확 멈추는 걸 보고, 나는 천천히 덧붙여서 말했다.
“네 뒤에, 널 봐주고 있는 뒷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거 안다.”
“…”
“전부 네 독단이었잖아.”
내가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슬로그는 한동안 완전히 굳어버린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나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이내 쿨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피를 뱉어내고는… 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애초에 전부 눈치채고 있었나… 쿠흑, 커허억…. 쿨럭… 쿨럭…”
“…”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크큭… 크흐흑…. 큭… 큭큭큭… 크하하학… 카하하하하하학… 컥… 쿨럭… 꺼허억… 허억…”
이내 힘이 완전히 풀려버린 슬로그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회의용 테이블에 나자빠졌다.
넝마가 되어버린 옷가지에, 상처만 가득한 온 몸. 줄줄 흐르던 피가 굳어서 피부 여기저기에 눌러 붙어 있고, 눈의 초점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만신창이가 될 대로 된 추레한 몰골이, 거상이라기보단 길바닥 거지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