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1)
“로르텔.”
대략 10분 정도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준 느낌이다.
반대 쪽 침대에 이불을 두르고 누워있던 로르텔은, 막 잡아올린 활어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비틀곤 했다.
기억을 되짚어 볼 때마다 누가 전극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몸을 꼬는데,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되어버려서 눈을 질끈 감았다.
“냉수 한 잔… 더 떠다주마…”
아까 떠 온 냉수는 이미 내가 다 벌컥 벌컥 들이켜버렸다. 나도 목이 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결국 나는 찻주전자를 들고 다시 1층 로비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방금 말했던 옷가지 말입니다…”
“…예?”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적당한 사이즈의 여성복을 좀 준비해주실 수 있는지…. 값은 치르겠습니다.”
여관 직원에게 그리 말하자, 잠시간 허공을 쳐다보던 직원이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로르텔이 함께 쓰고 있는 저 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멀쩡한 옷이 찢어져 못 쓸 옷이 되고 새 옷이 필요할 정도가 된단 말인가.
젊은 여성 직원 입장에선 갖가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질 상황인지라, 이 쪽도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그… 그럼 적당히… 저랑 비슷한 사이즈의 옷으로 준비해오겠습니다…”
그렇게 직원과의 묘한 문답을 나누고, 다시 방에 돌아오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로르텔이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언제나 회주로서 사람들을 지휘하는 로르텔의 모습만을 본 사람이라면, 지금의 로르텔을 보고 너털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헝클어진 적갈색 머리칼은 어둠과 달빛 사이에서도 그 불타는 듯한 색깔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영롱한 눈동자는 바닥에 고정된 채, 몸에 두른 이불보를 꽉 잡아쥐고 있는 상태다.
붉어진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서, 얼른 냉수를 따라서 건넸다.
로르텔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벌컥대며 냉수를 들이키더니, 잠시 한숨을 푹 내쉬며 진정했다.
그리고 3초 정도의 시간차를 가진 뒤, 다시 얼굴을 감싸쥐며 벽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슬로그의 저주에 당한 뒤, 로스테일러 영지에서 온갖 애교를 부리고 앙증맞은 행보를 하던 모습.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루시에게 얼굴을 부벼대거나, 예니카의 옷깃을 잡고 따라다니며 존경의 눈빛을 쏘아대던 모습까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치근덕 대던 모습도 눈에 남아있고… 심지어 로르텔의 비밀 노트를 내가 전부 다 봤다는 사실까지도 기억이 났을테니…
당장 혀를 깨물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그래요…. 슬로그 켈드럭스가…”
그렇게 30분 정도의 실랑이를 더 벌인 뒤, 겨우 어른스러운 어조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된 로르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로르텔이 무력화 되어 있었던 동안 벌어진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슬로그 켈드럭스가 벌려놓았던 일들의 전말을 빠짐없이 전부 다.
이제, 저 커다란 엘테 상회를 손아귀에 쥘 수 있는 인물은 로르텔 케헬른 뿐이다.
등 뒤에는 로스테일러 공작가, 나아가 클로엘 황실과 성도 클로에론까지 있다.
이 상업 도시 바닥의 제대로된 권력자가 되었다, 그렇게 평해도 될 체급이다.
그럼에도 로르텔 케헬른은 기뻐하거나 후련해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이불을 꽉 두른 채로 잠시간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역시 기뻐하진 않는구나.”
“지금은… 감정 정리가 잘 안되네요… 이런 걸로 지지부진하게 감정 정리 못하는 타입은 아닌데, 저주의 영향이 좀 남은 걸까요…”
로르텔은 이불깃을 꽉 잡으며 자기 어깨를 감싸안았다.
언제나 비싼 옷과 장신구를 두르고 다니는 모습과는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상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
몸에 두른 것들을 내려놓으면, 금화에 영혼을 판 악마라고 일컫어지는 로르텔조차도 여타 다른 자들과 같은 한낱 인간일 뿐이란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심경이 복잡할거란 생각은 한다.”
“글쎄요. 사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상황이긴 하죠. 단지 음…”
그제서야, 로르텔은 본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듯이. 멋쩍게 웃어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망설이면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선배님의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음흉한 미소를 흘려내며 늘 그렇듯 여우같이 구는 것이다.
그 모습에, 허탈한 미소를 내지을 법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 거란 생각한 건 좀 안일했을까요..”
“힘들 땐 그냥 힘들다고 하는 게 낫다. 경험상.”
사실 로르텔이 살아온 생애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이 도시는 로르텔의 약점을 캐내고 싶어서 호시탐탐 침을 흘리는 야수들로 가득하다. 그런 곳에서 약한 모습을 내비치는 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로르텔은 자기 약점을 숨기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고, 방황하고 싶을 때조차 상대에게 넌지시 능청스러운 여우처럼 행동하고 마는 모습에서,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어떤 식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어버린다.
“힘들다기보단… 글쎄요… 전 그냥 두려운 걸 거에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두른 채,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자신의 새하얀 발을 훑는다.
창밖으로 은은하게 밀려들어오는 별빛을 슬쩍 치켜 올려보면, 속눈썹 끝에 달이 걸려있다.
눈 앞에는 나 뿐이다.
서로 볼 장은 다 본 사이이기에, 로르텔은 가감없이 자기 약점을 내비친다.
“이 올덱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기가 어딘지는 당연히 모르고, 피아구분 조차 안 되서 들리는 모든 인기척을 경계해야만 하죠.”
그러고서는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유리 세공품처럼 보이고 만다.
“그렇게 만인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걷다보면, 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던 자들의 목을 베는 일도 부지기수죠. 슬로그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어요.”
“…”
“꽤 자주 있었던 일이에요. 선배님을 만나기 전에는요.”
피를 흘리며 눈을 감던 슬로그의 얼굴에서 내가 보았던 감정은, ‘달관’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로르텔이 슬로그를 신뢰하는 일은 없다.
배신과 협잡이 당연한 도시에서 평생을 버텨온 소녀다. 슬로그도 그 사실을 뼈가 저릴 정도로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되게 바보 같죠. 자기 손으로 전부 쳐내고 밀어내가면서, 끝끝내 자기 스스로는 고독에 좀먹혀 가는 꼴이요.”
로르텔이 자조하는 모습은 흔치 않다. 언제 어디서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슬로그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로르텔은 그렇게 금화로 덮힌 길을 걸으며, 진정한 동료가 되었을 수도 있고,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스스로 쳐내왔다.
그리고 필시 그것은, 로르텔에게만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상인들의 도시에서는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한 번의 그릇된 판단이 피를 쏟게 만든다. 상업의 세계란 그런 곳이다.
“이 도시에선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고독과 세금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어요.”
자기 무릎을 안아쥔 채로, 농담하듯 이야기 한다.
헛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그 공허한 뒷맛엔 씁쓸함이 배어있다.
밤이다. 해가 뜨려거든 멀었다.
이 긴 긴 어둠이, 오늘따라 로르텔에게는 더 길게 느껴질 것이었다.
많은 사람을 잃으며 길을 따라 달려왔지만, 결코 그 상실감과 고독에 익숙해지는 법은 없다. 사람이란 생물이 그렇다.
그렇기에, 로르텔은 고개를 자기 무릎에 묻는다.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슬로그와 같은 자들을 땅에 묻으며 살아와야 할지는…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없다.
“선배님.”
나를 부르는 그 짧은 호칭만으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려놓을 것을 이것저것 많이 내려놓은 로르텔은, 말 끝의 힘 없는 호흡 하나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다.
여우처럼 능글맞게 상대를 떠보며, 이따금씩 푼수처럼 웃는 모습과는 다르다.
고개를 묻고 있는 로르텔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목덜미 사이로 쓸려내려오는 머리칼만이 힘 없이 툭 떨어질 뿐.
예전과 지금의 로르텔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은,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 번만 안아주실래요.”
희미해져 가는 등대의 빛 같이, 아련한 목소리였다.
본인 딴에는 말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려본다. 허나, 잠긴 듯한 목소리 끝에 은근하게 서려 있는 긴장을 읽어낼 수 있다.
금방이라도 농담이라 말하며, 놀려본 거라고 파하하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런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1초가 지나고, 5초가 지나도… 로르텔은 ‘농담’이라는 이름의 퇴로로 도망치지 않는다.
다만, 은은한 침묵 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묻고 있을 뿐이다.
평생을 끈질기게 따라온 그 고독이란 이름의 고질병에는, 생각보다 확실한 특효약이 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준다는 실감이다.
길고도 어두운 밤을, 더 이상 홀로 몸을 말고 누워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그 확신말이다.
아마도, 지금의 로르텔이 가장 갈구하고 있을 그런 것일테다.
심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의 존재는, 가장 힘들 때 찾게 된다.
그렇기에… 끝끝내 농담이라고 말 끝을 얼버무리지 않는 로르텔의 모습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
위태위태한 모습은,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촛불과도 같다.
여기서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다며, 로르텔을 놔둔 채 방을 나설 수 있는가 묻는다면…
그럴 수가 있겠냐 라고 반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마음 속 한 켠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부분은…. 역시 예니카다.
예니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우리는 제법 행복할 거라는 세상 로맨틱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를 악물게 되는) 대사까지 던져 놓고서…
여기서 로르텔의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은…. 영락 없는 쓰레기 그 자체가 아닌가.
…쓰레기가 될 각오인가.
문득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메릴다가 귓가에 속삭이던, 그 의미심장한 표현이 가슴 속 깊숙이 파고 들어온다.
쓰레기가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반대의 길을 갈 각오를 다져야 한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로르텔에게 고개를 젓고, 조용히 방을 나갈 각오다.
이 어두운 여관 방에 로르텔을 홀로 남겨 놓고, 밤거리의 인파 사이로 조용히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 그건 그거대로 쉽지 않다.
외통수에 밀려서 목이 졸려드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목에 칼날을 들이밀며 묻는 것 같다. 둘 중 하나의 각오는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머리가 핑핑 돌면서 사고가 가속한다.
이 시점에서는 ‘고민을 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게 허락된 고민의 시간은 길어봐야 2초 3초 남짓이다.
흠칫 하고 몸을 떠는 아주 약간의 그 틈 사이에 모든 결론을 내야만 한다. 불합리하다 싶을 정도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나는 숨을 휙 머금으며 로르텔 쪽을 보았다.
목덜미가 새빨갛다.
귀 뒤쪽도 혈색이 잔뜩 오른 것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쪽은 저 쪽대로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내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씩 평정이 돌아온다.
그래, 애초에 내 사고방식부터가 잘못됐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레기가 되냐 마냐가 아니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끌어내서 내지른 로르텔을 앞에 두고서, 그런 자기 보신에만 가득찬 생각으로 대답을 고민하는 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핵심은, 결국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체면이나 도의 같은 것이 아닌, 정말로 내가 로르텔을 이성으로서 의식하고 있느냐부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것 아닌가?
세상 누가 봐도 로르텔은 좋은 여자다.
미려한 외모나 엄청난 경제력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통찰력이 깊고 생각이 트여있다. 그러면서도 곁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부분도 있다. 한 없이 이기적인 사람처럼 굴지만, 일단 자기사람이란 확신이 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갭이 매력이다.
어찌됐든, 곁에 두면 든든한 사람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로르텔이라는 여자를, 굉장히 매력적인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부정할 수가 없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발버둥 쳐야만 했던 생활도 끝이 났다.
안정된 일상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그녀가 건네는 호의를 보고 있자니, 새삼 그녀의 진심이 무겁다는 게 실감이 되고 만다.
늘 뒷걸음질 치면서 물러섰던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일편단심으로 호의를 내비쳐왔던 로르텔의 모습들을 되새김질 해본다.
실베니아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고, 갖은 시련들을 함께 해쳐왔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으나, 그녀는 언제나 일관된 자세로 날 도와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내게 호의를 가감없이 내비치며, 나를 따라 걸어주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확실하게 결론이 나버리고 만다.
나는 절대로 로르텔을 버릴 수가 없다.
“….”
얼굴을 한 번 세수하듯 쓸어올리고, 그대로 앞머리까지 휙 밀어올린 다음 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 쪽으로 나아갔다.
– 쏴아, 쏴아.
심신을 안정시키는 밤바다의 파도소리와 은은한 바람.
나는 잠시간 그렇게 창밖의 야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로르텔의 이름을 불렀다.
“로르텔,”
“끄힉!”
“…”
숨을 참고 있었던 건지, 로르텔은 어깨를 떨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주먹에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반응이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까지도 너무 부끄러운지, 곧바로 대답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애처로울 지경이다.
여기서 로르텔에게 뭔가를 더 묻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인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문 채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로르텔 쪽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레 그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안아 보았다.
“서, 선배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정도까지 긴장을 할 일인가 싶다. 허나, 자세히 들어보니 내 심장 소리가 아니다.
“…”
쿵쿵대는 소리가 민망한지 로르텔이 어떻게든 심호흡을 했으나, 애석하게도 소리가 멎는 일은 없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조용히 로르텔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서 내 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입을 맞췄다.
그렇게 반대 손으로 로르텔의 등허리 부근을 받쳐주고, 천천히 무게 중심을 침대쪽으로 밀었다.
귀신이라도 홀린 듯이 내 손에 이끌리던 로르텔이, 푹신한 이불 위에서 나를 올려다 본다.
“손에 힘 풀어라.”
내가 그리 이야기하자, 로르텔은 그제서야 내 팔뚝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
로르텔이 힘을 풀자 내 팔목에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에, 에드 선배님… 저.. 그… 그런데…”
“…”
“제.. 제가 부탁해놓고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저… 뭐.. 뭘 어떻게 해야할지…”
경험이 없다면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일일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의도치는 않았지만… 대충 뭘 원하는지는 아니까…”
“네…에… 음… 네…?”
“…”
로르텔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다.
내 말의 어조만으로도 뭔가를 파악했다는 듯이, 잠시간 헛숨을 삼킨다.
“……”
그리고 나서는 깨닫는다.
나는 로르텔이 평소에 들고다니던 비밀 노트를 전부 들춰본 입장이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 원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알게 된 것은 또 어쩔 수 없다.
혹여나 누가 볼까봐 맨 뒷장의 비밀 페이지에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놓은 흔적. 꽤 오래된 흔적이다 보니 본인 스스로도 그 존재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메모라기보단 망상의 집합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교제 경험이 없는 로르텔이 늘어놓는 소녀적 망상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다소간 낯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혹자들은 너털웃음을 흘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함부로 비웃을 수는 없다. 그 나잇대 소녀가 이성에게 품는 로망이나 낭만적인 상상들은… 내뱉기 부끄러울 뿐이지 누구나 한 번 쯤은 상상해본 것들 아니던가.
그래서 로르텔을 배려해 굳이 그런 메모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거만큼 좋은 교보재는 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본인의 바람이다.
…귓볼이 어쨌고 뒷목을 어떻게 쓸고 하는 디테일까지 적혀 있던 것은… 아무리 그래도 좀 깨긴 했다만….
– 쿵!
갑자기 몸을 일으킨 로르텔이 침대를 밀며 뒤로 몸을 휙 내뺐다.
그리고 알몸 그대로 침대 등받이에 몸을 탁 붙인 뒤, 덜덜덜 떨었다. 그제서야 그 먼 옛날 노트에 어떤 파멸적인 내용들을 기입해뒀는지 겨우 떠올린 모양이었다.
“…에, 에, 에, 에드 선배님…. 어어어어어 어디까지….”
“다, 당황하지 마라… 로르텔…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서로 간의 바람이나 내면을 긴밀히 공유하고 있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다…”
최, 최대한 침착하게, 별 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여야 저 쪽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터.
“그.. 그럼…그러면…”
“그, 그래도 말이다. 로르텔. 아무리 그래도…. 프리지아 향기가 나는 향초나 장미꽃을 띄운 욕탕 같은 걸 준비할만한 여건은…”
“갸악!”
꼴사납게 비명을 삼키는 모습이 이게 로르텔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그래도 일단은 최소한의 이성은 유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
숨을 허억허억 몰아쉬며 한계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뜬 모습은, 이게 그 금화에게 영혼을 판 상인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말이다… 로르텔…”
“…”
“미안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미모를 꽃에 비유한다든가, 눈동자의 빛을 별빛에 비유한다든가… 그런 낭만적인 은유가 가득한 말은 잘 못 뱉는다… 그건… 거… 조금 미안하게 됐다…”
“………………………………………….”
요컨대… 네가 노트에 예시로 적어두었던 그런 대사들은 조금 힘들다.
로르텔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에드라는 양반은 그런 간드러지는 대사도 제법 잘 치는 것 같다만, 애석하게도 현실의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어휘력이 출중하지 않다…
노력은 해볼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상상해보니 그건 오히려 로르텔을 두 번 죽이는 일 같다.
“……………”
“………….에드 선배님…”
“…”
“………절….. 죽여주세요….”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단다.
이 풍파가 가득한 세상…
힘들어도 일단,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