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3)
“너는, 언제쯤 상인을 은퇴할 거 같냐.”
벨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갑자기 은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의미심장한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 해봐야… 정해져 있다.
“…네? 갑자기요?”
“너는 평생 상인으로 살았잖냐. 그렇게 평생을 투신해왔던 일을 관두고자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게 언제일 거 같아.”
“…질문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글쎄요… 은퇴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요. 아직 너무 이른 시기고…”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4시가 좀 넘었을까.
심야와 새벽 사이의 어딘가.
심야라 부르기엔 곧 아침이 오고, 새벽이라 부르기엔 아직 너무 어두운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부둣가를 지나쳐갔다.
큼지막한 범선이 잔뜩 세워져 있다. 얼마 안 가 부지런한 인부들이 나타나, 오늘의 짐을 적재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침 일찍 출항하는 배가 많다. 그렇기에, 새벽부터 미리 준비하는 배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보통… 거상들의 말로는 좋지 않아요.”
로르텔에게는 익숙한 풍경인지, 그런 부둣가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늘 뒤통수를 맞고 배신당해 죽거나,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렸다가 수습 못해서 시궁창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적대 세력에게 음해당해 쫓겨나거나… 대부분은… 진흙탕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죠.”
“…”
“지금은… 더 큰 뜻을 품고 살아가고 싶지만… 그래요, 이렇게 무작정 달려나가다 보면 고꾸라질 때가 반드시 올 거에요. 거상이란 이름을 단 자들은 항상 그랬어요. 탐욕에 빠져서, 더 높은 이상을 쫓고 쫓으려다가 끝끝내 추락해버리죠.”
적정한 선에서 그 야망을 접고,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비처럼, 욕망을 쫓아 살다 불타 죽는다. 그것이 거상이라는 작자들의 생애다.
로르텔 자신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글쎄요. 저도 항상 칼 끝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게 살아가지만, 아직 은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로르텔에겐 아직도 상인으로서의 야망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아직 너무 어리다.
언젠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고 해도, 어떻게 벌려놓은 일들을 마무리 할지 까마득할 것이다.
“그렇겠지…”
“애초에 상인들은 은퇴하기 쉽지 않아요…”
로르텔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혀있어서, 도망칠 수가 없어요. 중요한 비밀도 너무 많이 알아버리게 되고, 함부로 은퇴했다간 올덱의 형세가 많이 뒤바뀌어버려서 섣불리 물러나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죠.”
“그래. 그것 참 고생이겠네.”
“뭐, 몇 몇 거상들은 몇 년 동안 열심히 계획을 세워서, 깔끔하고 온전하게 은퇴하는 경우도 분명 있죠… 비자금도 빼돌려 두고, 흔적도 깔끔하게 지우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이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요.”
“…”
“하지만, 대개는 에드 선배님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죽음으로 커리어를 마무리 하는 법이에요.”
슬프지만, 죽음이야말로 가장 깔끔한 은퇴다.
로르텔은 그렇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부둣가를 함께 걸었다.
선선한 새벽 공기도 많이 차가워졌다. 여름은 끝이 났다. 이젠 가을이다.
로르텔은 내 팔을 감아 쥐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발랄하게 높였다.
이렇게 우중충한 이야기를 해서 뭐하겠냐는 투다.
“뭐어, 에드 선배님이랑 함께 올덱의 부둣가를 걷는 것도 각별한 기분이네요. 언제나 사업전선의 최전방이었던 곳인데, 이렇게 한산한 때에 오니까 분위기도 많이 다르고…”
“얼마 안가서 부지런한 상인들이 잔뜩 거리로 나오겠지만 말이야.”
“그러게요. 정말 정을 붙이려고 해도 붙일 수가 없는 도시라니까요. 어쨌든, 제 기분전환을 위해서 산책을 하자고 권해주신 거죠?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전 정말 괜찮아요.”
로르텔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 그리고는 괜시리 내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행복에 겨운 말을 내뱉었다.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꼭 확인해둬야 할 것도 있었거든.”
“확인해둬야 할 거요?”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만… 내가 약간 도움을 준 사람이 있어서.”
“…네?”
로르텔이 반문하는 순간, 부둣가의 길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체구에,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인다.
걸음걸이는 한 없이 느린 편이다. 군데 군데 헤진 로브 자락을 탁탁 털며, 이 늦은 올덱의 부둣가를 걷고 있는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그냥 행인일 뿐이다.
나랑 로르텔은 이대로 걸어서 리엔나 비서가 기다리고 있는 상회 건물로 가면 될 뿐.
저 멀리 반대편에서 나타난 사내는, 이 꼭두새벽의 배편을 타려는 모양인지 부둣가 방향으로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 저벅, 저벅.
그렇게 팔짱을 낀 우리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
나도, 로르텔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로브를 뒤집어 쓴 정체 불명의 사내는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가… 내 앞에서 아주 잠깐 멈춰섰다.
그리고선, 아주 약간… 까딱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 터벅, 터벅.
– 스윽.
그렇게, 우리는 엇갈려서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로, 사내는 사내의 목적지로.
우리 인생사 대부분의 인연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내 팔을 감싸안고 있던 로르텔이, 문득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무언가 눈치 챈 것일까.
부둣가를 거닐며 건넸던 내 뜬금없는 질문을 생각해보면, 로르텔 정도로 머리가 좋은 소녀라면 어느정도 눈치를 챌 수 있을 터.
구구절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저기요.”
그렇기에, 로르텔은 가만히 사내를 불러세웠다.
이미 사내는 우리를 지나쳐서 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꽤나 분주해 보였다. 곧 배가 출발하는 모양이다.
굳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배에 저리 급히 승선하려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사내에게는 사내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몸을 돌리는 일은 없이 고개만 슬쩍 돌려… 로르텔이 나지막이 사내 쪽을 쳐다본다.
허름한 로브를 입고 있던 사내 또한, 굳이 몸을 돌리진 않고 고개만 슬쩍 돌린다. 당연히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몸을 완전히 감싸는 로브 때문에, 체격까지도 가려져 있는 상태다.
상대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건만, 로르텔은 묘한 확신 같은 것에 서려있었다.
그러다가, 헛웃음을 픽 흘리고 만다.
“환절기라, 밤공기가 많이 차갑네요. 바다로 나가면 아마 더 춥겠죠.”
로브 자락의 어둠 아래에서, 사내는 미동조차도 하지 않는다.
“옷 좀 두텁게 입고 다니세요. 많이 추워요.”
로르텔이 그리 말하자, 한동안 침묵이 감돈다.
“…”
조용한 올덱의 거리에, 잠시간의 공허한 한 때.
“…하.”
사내는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는 것인지, 꽤 길게 침묵한다.
갈매기 소리. 파도 소리. 저 부둣가 멀리에서 들리는 인부들의 출근 소리.
새벽의 소리가 한 데 모여 잠시간 그 공허한 침묵을 채워 넣어준다.
그 속에서 한참을 있다가, 이내 짧게 입을 연다.
“─그래, 참고하지.”
그렇게, 별 거 아니라는 듯 툭 던지는 대답이 전부.
걸걸한 어조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충고 고맙네.”
그런 짧은 담화만을 주고 받은 채, 다시금 뒤로 돌아 서로의 갈 길을 간다.
상인들의 이별이란 이런 법이다.
스쳐지나듯 만나고, 스쳐지나듯 헤어진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 좋은 거래 이야기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거기까지인 인연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다시 멀어져간다.
로르텔은 가던 길을 나아 가며 내 팔을 꽉 감싸안았다. 그렇게 그냥 웃음지었다.
은은한 바닷가의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퇴직금도 못 챙겨줬네.”
그렇게 짧은 한탄을 하며, 로르텔은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걸었다.
올려다 본 초승달도, 함께 미소짓고 있었다.
*엘테 상회의 양팔저울은 언제나 수평을 이룬다.
엘테 상회 소속의 상인들은 그런 격언을 보고 기만이라며 비웃었다. 원숙한 상인들은 세상에 완전히 수평을 이루는 양팔저울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 요란하게도 날뛰셨네요.”
로르텔은 상회 로비로 들어서면서 감탄했다.
외벽도 여기저기 부서져있고,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최대한 화려하게 날뛰어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리엔나 비서가 큼지막한 정리들은 어느정도 마무리를 해놓은 상태다.
이미 슬로그 쪽에 붙어있던 상인들은 리엔나 비서가 그 목록을 정리해놓았다. 수장 격인 슬로그는 사망했으니, 이제 더 이상 이 엘테 상회에 발 붙여놓을 자리는 없을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꼴 사나운 모습을 너무 많이 보였네요, 리엔나.”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셨고…”
리엔나는 역시나 많이 듬직해져 있었다.
로르텔의 수석 비서로 그렇게 긴 시간을 굴렀으니, 나름대로 잔뼈가 굵었을 때다.
리엔나는 리엔나대로 슬로그에게 납치당하고 감금 당하는 둥, 여러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슬로그가 두 손으로 직접 풀어준 모양이다.
애초에 리엔나 비서는, 그 늙은 상인이 세운 계획을 마무리지어줄 카드였던 셈이다.
“심경이 복잡하실텐데, 조금 더 쉬셔도 괜찮아요. 반파된 상회 건물은 저 혼자서도 어느정도 정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부들도 많으니, 날이 밝을 때 쯤이면 급한 업무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거에요.”
“그래도 현장에 있는 게 낫겠죠. 피해 상황도 확인해야 하고.”
그 피해를 일으킨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좀 멋쩍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으나, 누누이 말했듯이 불가항력이었다.
이 정도 난리를 피우지 않으면, 그 영악한 엘테 상회의 상인들이 쉽게 속아넘어가 줄 리가 없다.
“그리고, 조금 이른 축하일지도 모르겠지만…”
리엔나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 했다.
“정식으로 회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
“말하셨듯이, 너무 일러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르텔이 리엔나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부서진 상회 건물을 정리하고 있는 주변 인부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렇다. 이제 지금 여기에 있는 로르텔 케헬른이, 엘테 상회의 지배자가 된다.
등 뒤에는 로스테일러 가문, 황도 클로에론, 성도 카르페아가 있다. 사실상 이 대륙의 무역로를 한 손에 쥐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엘테 상회라는 이름도 낡아가네요….”
권력을 쥐게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황금왕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로르텔 케헬른의 시대가 되었다. 엘테라는 이름은 역사 너머로 사라질 때다.
“이제 하나의 상회라고 부르기에는 규모도 너무 커졌어요. 휘하에 두고 있는 군소 상회들을 합치면, 그냥 거대한 하나의 상업 조합을 자칭하는 게 훨씬 낫겠죠.”
로르텔 말대로 엘테 상회는 더 이상 독립적인 상회로 존재하기는 힘들 규모가 된지 오래다.
그렇기에, 단순히 사업만을 하는 곳이 아닌… 휘하의 상인들을 규합하고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한 발 더 나아갈 때가 되었다.
그 꼭대기에 앉아 있는 조합장, 내부 조합 규정을 조율하고, 대표로 외부 세력 집단과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는 로르텔 케헬른.
금화에 목숨을 건 상인들 사이에 군림하는, 여왕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관청 쪽에서 처리할 서류 일들이 늘겠네요.”
그 말에, 리엔나 비서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미리 처리할 서류들을 규합해놓을게요. 조합장님.”
엘테 상회의 이름을 버렸으니, 상업 조합으로서의 이름을 새로 지을 때다.
온갖 다양한 조합명들이 가득하지만, 로르텔은 딱히 고민하지는 않았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새 이름을 내뱉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리엔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의 집무실이었던 방 또한 완전히 부서져있다.
에드와 로르텔이 함께 들어섰을 땐, 부서진 외벽에서 들어온 먼지 때문에 어디 앉을만한 곳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로르텔은 여기 저기를 살피다가, 접객용 티 테이블 위의 먼지를 쓸어내고 그 위에 휙 앉는다.
그리고 에드에게 손짓을 해 옆에 앉으라 말한 뒤,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다.
부서진 외벽 바깥으로 보이는 부둣가에는, 막 출항하려고 하는 범선 한 채가 보인다. 이런 꼭두 새벽부터 올덱을 나가려는 자들이라 해봐야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착실히 출항 준비가 끝나 있었다.
저 수평선 너머의 대양을 향해, 배는 나아갈 예정이다.
올덱의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기 전에… 그 범선은 쫓기듯 올덱을 떠날 것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상업도시의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밤이야.
그렇게 속삭이는 듯, 따뜻하게 빛나는 초승달이 수평선 위에 떠올라 있다.
은은한 달빛이 세상을 비추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잠시 잠들어있다.
하지만, 이런 시간에도 눈을 뜨고 있는 부지런한 자들도 있는 법이다.
로스테일러 영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잠시 창문을 열고 푸르스름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벨이 그렇다.
집무실 한 켠에 촛불을 켜고 앉아서, 올덱으로부터 날아온 전서구를 확인하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도 그렇다.
반파된 상회 건물을 수습하면서, 직원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는 리엔나 비서 또한 그렇다.
태양이 떠있는 밝은 하루를 힘차게 보내고, 지금은 다들 잠시 휴식에 빠져있는 시간.
잠들어 있는 세상 속에서도, 근면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달은 웃는다.
“그, 그럴 수가…! 말이 다르잖아…! 분명 승선료는 텔로스 은화로 일곱 닢이라고 말해놓고선…! 이러기야…?!”
늦은 새벽의 부둣가.
한 소년이 선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행상을 떠나려 하는 어리숙한 소년이다. 억울하다는 얼굴로 선원들을 향해 항의해 보지만, 선원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이러기냐?! 자, 딱 봐도 양팔저울이 이 쪽으로 기울어 있잖아! 무게추랑 은화 무게가 안 맞는 걸 보면, 너 위조 은화라도 가져온 거 아니냐?”
“그,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할람 은행에서 바로 환전 받아온 은화인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어..! 무게나 제대로 맞춰놓고 말을 해라! 한닢 더 올려!”
누가봐도 억지였다.
그러나, 선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저울은 척 봐도 수평이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소년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험악하게 생긴 선원들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승선료 못 맞추면 배는 못 탄다! 너 그런…”
– 툭.
언쟁이 더 격화되기 직전, 금화 하나가 저울 위에 툭 던져졌다.
꽤나 묵직한 금화인지, 저울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거의 대여섯명 분의 승선료였다.
소년이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지갑을 갈무리 해서 품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로를 쳐다보던 선원은, 말을 더듬으면서 안내했다.
“아, 안으로 승선하면 되네.”
“고맙군.”
그리 말하고, 로브를 입은 사내는 소년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긴 다음 배 안으로 사라졌다.
– 끼룩, 끼룩.
부지런한 갈매기 몇 마리가 돗대에 앉아 먼 수평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사내 또한, 배의 난간에 기대 저 먼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와중이다.
“아, 아까는 고맙습니다. 부, 분명 딱 맞춰서 은화를 가져왔는데… 왜인지 무게가 맞지를 않아서…”
“저울 눈금을 제대로 확인했어야지. 적당히 어중이 떠중이처럼 보이는 놈들한테 자주 쓰는 협잡질이야. 다음부터는 그런 뻔한 수에 넘어가지 않게 조심하면 좋지.”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에, 소년은 생각보다 놀랐다.
새벽부터 올덱을 떠나는 이 범선에는, 온갖 사정이 가득한 사람들이 잔뜩 승선해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뭔가 더 사정이 각별해 보이는 사람이다.
“저, 저울에 수를 써뒀을 거란 생각은… 못했어요..”
“애초에 완전히 수평이 맞는 양팔저울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았어야지.”
세계를 노니며 모험하는 행상인의 꿈을 꾸던 소년이다.
그런 기본적인 수작질도 파악하지 못한 게 부끄러워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원래 뭘 하시던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내는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윽고 허탈한 웃음을 푹 흘리며 미소지었다.
소년을 보고 있으면, 저울 눈금 하나 볼 줄 몰라서 뒤통수를 맞고 다녔던 자신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이런 시기가, 있었던 것이겠지.
황금왕 엘테도, 조합장 로르텔도. 모두 처음에는 미숙하고, 불안한 초짜들이었던 것이다.
사내는 로브의 모자를 밀어내렸다. 회갈색 머리칼 사이로 희끗희끗한 새치가 가득하다.
늙은 거상. 올덱에 사는 노호(老狐).
그런 식으로 불리며 살았던 것도, 이제 과거의 한 때가 되어야겠지.
“예전엔 돈 좀 만졌지만, 지금은 은퇴한 늙은이야.”
소년의 눈에는, 사연 가득해 보이는 그 늙은 거상의 모습이 괜시리 우러러 보여서.
멍하니, 수평선 너머의 달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올덱을 떠나는 배 위에 올라, 바닷바람을 맞으며 평생을 함께한 상업도시를 올려다 본다.
저 멀리, 반파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간 바라보다, 늙은 상인은 고개를 숙이고선 짐짓 웃음짓는다.
“좋은 걸 하나 알려주지, 소년.”
저울 눈금 하나 볼 줄 모르는 초짜에게, 세파의 온갖 바람을 다 맞고도 살아남은 늙은이가 전한다.
“양팔저울이란 건 완전히 수평이 맞는 법이 없지. 하지만, 사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어.”
“…네?”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다 그런 법이거든.”
주고받다 보면, 저울은 한 쪽으로 기우는 법이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딱히 그래도 상관 없는 자들을,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라고 부르고 산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상인으로서의 동업자 이전에, 인생의 동반자를 먼저 찾는 것이 먼저 일지도 모른다.
자기 사람을 만들 줄 알아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바닷바람이 로브 자락을 잡아 끌었다.
사내는 옷자락을 몇 번 털어버리고, 다시금 난간에 기대어 풍경을 살핀다.
배가 목적지에 도달하려거든 아직 멀었다.
말상대가 되어줄 상대 정도는 있으니,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멀리 반파된 건물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올덱의 밤은 길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길.
아직은, 가야할 길이 훨씬 많이 남은 사람들일테니까.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로르텔은 잠시간의 휴식에 빠진다.
이리저리 기울어가는 양팔저울이지만, 그래도 상관 없는 것이었다.
올덱의 총괄 상업 조합 ‘금화 세 닢’의 조합장, 로르텔 케헬른.
냉혈한 거상이기 이전에, 그녀는 한 명의 소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