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6)
———————————————————–
평안하신지요, 에드 도련님.
메이드장 벨 마이아입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현재 루시 아가씨께서는 로스테일러 저택을 나가 아켄섬에 도달하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명민하신 도련님이시라면 어떤 상황인지 금방 파악하셨을 듯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드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서 내려 주신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루시 아가씨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구구절절 변명을 일삼진 않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담당 메이드들은 도련님께서 내려보내실 어떤 징계 조치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전서구를 도련님께서 읽으실 때 쯤이면, 저희 저택 쪽에서 파견 보낸 메이드가 아켄섬에 도달할 것입니다.
사정은 설명해 두었으니, 그 메이드에게 루시 아가씨를 맡기시면 저택으로 잘 보호해서 데려올 것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을 생각해 보면 제가 직접 아켄섬으로 가야 하나, 가주님께서 저택에 반드시 남아 있으라 명하신 게 있어, 부득이하게 대리인을 보냅니다.
다시 한번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에드 도련님께서 중히 강조해 주신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저희 관리 인원들이 부족한 탓이며, 세세한 징계안은 회신해 주시는 서신에 담아 보내 주시면 그대로 이행토록 하겠습니다.
벨 마이아 올림.
———————————————————–
———————————————————–
*회신) 에드 로스테일러
징계는 됐다.
루시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는다.
그리고 육포 좀 잔뜩 만들어서 보내 둬라. 트릭스관 연구동의 내 조교실 쪽으로 부쳐 놓으면 된다. 간은 좀 짜게 해서 보내라.
———————————————————–
긴장된 얼굴을 하고 모여 앉은 메이드들 앞에서, 에드의 회신 편지를 뜯어본 벨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서신에 어떤 끔찍한 내용이 적혀 있길래, 언제나 냉철하던 벨이 저렇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모여 앉은 메이드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절단자 젤란에 관한 일도 있고 하니, 당장 루시를 아켄섬으로 돌려보내는 건 영 비효율적일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유물 관련된 일들도 다 처리해버려야지.
그간 루시가 저택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몸을 회복했는지 확인도 해볼겸, 당분간은 루시를 아켄섬에서 데리고 있기로 했다.
― ‘학사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바쁘신데, 요양 중인 루시 아가씨까지 데리고 계시는 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 걱정이 되옵니다.’
벨 마이아가 파견한 메이드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그리 정중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상관없다 이야기하면서 그녀를 물렀다.
메이드의 그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녀들에게 있어서 루시 메이릴이란 존재는 감당하기 버겁고, 통제하기 힘든 일감인 것이다.
사실 그녀들이 알면 조금 야속할지도 모르겠는데, 내 입장에서는 딱히 그 정도까진 아니다.
내가 숙소의 책상에 앉아서 가만히 일을 하고 있으면, 루시는 이따금씩 근처에 와서 내 무릎에 앉거나, 근처 소파에 드러누워서 책을 읽거나, 타닥대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정도다.
한 번씩 적적해질 쯤에 루시의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루시를 휙 들어서 끌어안는 둥… 별 의도도 없이 루시와 부대끼고 있다 보면,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며 몸을 내주지만… 또 가끔은 불현듯 부끄러움을 타며 밀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모습을 보면 일관된 기준이란 것이 없다. 뭐 어쨌든 루시는 단조로운 내 일상에 나름대로 적적함을 해소시켜 주는 고마운 역할만큼은 톡톡히 해 주었다.
루시 본인도 그런 것들이 퍽 마음에 드는지, 알게 모르게 꽤나 표정이 좋아졌다.
그러니, 내가 혹시나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메이드의 걱정은 기우라고 보는 게 맞다.
그렇게 학사 여기저기에 전설적인 대마법사 루시 메이릴이 출몰한다는 소문 속에서… 우리는 그냥저냥 학사 일정을 함께 소화해 나갔다.
생각보다 단조로우면서도, 또 세세한 부분을 보자면 파란만장한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의 절반 즈음이 지나갔을 무렵이었다.
“황실 쪽에서 예정해 두었던 시찰단은 다음 주 중으로 방문 예정이라고 하더군.”
마법부 최고학장, 맥도웰 교수가 학사 회의 중 꺼낸 말이었다.
선임 교수들이 잔뜩 모여있는 학사회의장은 제법 엄숙한 분위기였다. 최고학장이 들고 온 안건이 꽤나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몇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황실 시찰이니만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뒷말이 나오면 골치 아파질걸세.”
아직까지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교장 오벨을 대신해, 실질적인 교장 업무를 대리하고 있는 맥도웰이다.
이번 황궁 시찰에서 학사 평가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황실 휘하에 있는 기관인 실베니아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입지가 많이 곤란해진다.
공적인 지원금 삭감이나 학사 규모 축소 따위의 일은 당연하고, 가장 중요한 신뢰와 이미지가 무너진다.
“관련해서, 에드 로스테일러 교수가 이번 시찰단 안내를 도맡아 주면 좋겠는데….”
업무 분배야 최고 학장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 손을 들어서 발언했다.
“황실 쪽과 관련된 일이니 만큼, 접점이 있는 제가 도맡아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나는 황실 시찰단 명부의 맨 꼭대기, 최고 실권자의 이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72회기 ― 소속기관 종합 시찰단 명부
시찰단장 ―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
이런 하부기관 시찰은 황실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다.
실무 기관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 소신대로 현장을 보고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건 황제가 직접 행차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황족들이 가장 많이 발탁당하는 자리가 바로 이 시찰단장의 자리다.
예전에 황실 경쟁이 치열할 때에야, 이런 일을 도맡아서 하려고 난리였던게 제 1황녀,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이다.
그러나 페니아 황녀에게 완전히 황권이 넘어간 뒤로는, 조용히 제국 서부와 북서부 쪽의 영토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던 그녀 아니던가.
황권에 완전히 멀어진 뒤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셀라하 황녀님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썩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황실 쪽과 연이 있는 자네가 맡는 게 가장 수월할 거라고 생각네만….”
“그렇게 판단하셨으면… 저야 제 나름대로 일 처리를 해 볼 뿐입니다. 다만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차기 황제,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의 비호를 받는다는 건 때때로 이렇게 짐으로 작용하곤 한다. 황실과의 관계가 중요한 일이 있으면 대부분 나를 보며 해결해 달라며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히 페니아 측의 사람이 되어 버린 나를 셀라하가 살갑게 대해 줄 리가 없었다.
이따금씩 로스테일러 저택에 찾아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왜 아직도 이렇게 사냐며, 황족의 비호를 받는 자가 이런 쥐꼬리만 한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그건 그렇고… 거…. 회의 때까지… 그래야 하나…?”
맥도웰은 몸을 흠칫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나도 잘 안다.
엄숙한 회의 자리지만,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나와 앉아 있었다.
사실 더 말해 뭣 하겠냐. 루시 메이릴이다.
루시는 무릎에 앉아서 내 허리를 감싸안은 채로, 지루한 듯 발을 휘휘 젓고 있었던 것이다.
“…뭐,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괜히 학사가 더 시끄러워지는 것보단 이렇게 항상 끌고 다니는 게 낫다 싶어서요….”
“루시 학생… 아니, 이젠 학생이 아니지… 정 그렇게 갈 데가 없으면 학사 차원에서 숙소를 따로 내어 줄 수도….”
“난 여기가 편해.”
단칼에 잘라 내듯이 말한 루시는 내 명치 언저리에 자기 머리를 대더니, 이윽고 마녀 모자를 꽉 안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또 한숨 자겠다는 뜻이었다.
“요 근래는 항상 이런 식으로 붙어 다니니… 그냥 신체의 일부 같은 것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
“어이없는 소리라는 거 자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 뭐… 에드 교수가 학사에 기여하는 게 있으니, 그 정도 쯤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지.”
맥도웰은 헛웃음을 몇 번 흘린 뒤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어쨌든, 이번 시찰만 잘 마무리하면 방학 시기 들어가기 전까지는 크게 바쁜 일은 없네. 이번 시기만 잘 흘려 보세.”
모여앉은 교수들 사이에서 부드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다들 의욕이 넘쳐 보였다.
* * *
“그래서… 간만에 그대 얼굴이나 좀 보겠나 싶었더니만… 이런 몰골이렷다….”
“…….”
시간은 그렇게 한달을 더 건너 뛰어서, 황실 시찰단이 실베니아를 방문하는 날이다.
황족이 직접 학사에 나타나는 날인 만큼, 이것저것 바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들을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큰 의미도 없겠지만.
으리으리한 규모의 시찰단을 이끌고, 학생회관에서 간단한 연설을 마친 셀라하는 곧장 내가 대기하고 있던 트릭스관 로비로 찾아왔다.
황권은 물 건너 갔다지만 어쨌든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소녀다. 시찰단원은 물론이요, 꽤나 큰 규모의 호위대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셀라하 황녀는 황권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로는, 생각보다 성격이 꽤 유해졌다는 소문이 돈다.
예전처럼 신분의 귀천을 과하게 따지며 아랫 사람들을 업신 여기는 기질도 꽤 많이 죽어서, 이제 제법 진심으로 그녀를 따르는 신하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거만하고, 기가 쎈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서리가 맺힌 듯 푸르스름한 머리칼도, 그 차가운 심성만큼이나 한기가 서려 있었다.
분노의 이유는 알 만하다.
“…….”
이제는 정말 신체 부위나 다름없이 느껴질 지경까지 온, 루시 메이릴의 존재다.
늘 들러붙어 다니는 모습… 이쯤되니 학사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있다.
그러나, 간만에 본 셀라하 황녀는 찰떡같이 달라붙어 있는 루시의 모습이 영 아니꼬운지, 양팔을 자기 허리춤에 얹은 채 한숨을 푹 쉬었다.
“그대가 학사 차원에서 날 맞이하러 온 안내인인가? 학사 인부들 생각도 알 만하군…. 그대가 황실 내에서 평판이 좋으니, 그대의 얼굴을 팔아 이번 시찰을 넘겨 보려는 알량한 수작이겠지.”
“그렇다기보단, 제가 황실의 법도를 잘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귀하신 셀라하 황녀님을 아무한테나 맞이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말은 참 번지르르 하군. 왜, 내 그대 얼굴을 봐서 조금이라도 평가에 손속을 두게 될 것 같으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 그대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겠지만 내 눈에는….”
“…크츗!”
“…….”
아기자기한 기침 소리가 트릭스관의 로비를 갈랐다.
황족의 말을 끊은 기침이다. 그러나 재채기를 한 당사자는 멍한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셀라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 옷깃을 휘어잡은 채.
“…….”
셀라하 황녀는 루시에게 크게 데여 본 적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지금이야 루시는 온전한 힘을 다 끌어낼 수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에 각인된 공포라는 것은 쉽사리 사라지질 않는다.
클로엘 황실을 혼자서 뒤집어엎으면서 난동을 부리던 루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일까.
셀라하는 미간을 잠깐 좁혔다가, 이윽고 한층 낮아진 어조로 이야기했다.
“대체 어찌하여 페니아가 그대 같은 사내에게 이리 집착하게 된 것인지….”
“…….”
“말해 두건대, 나는 그대가 싫다. 재미도 없고, 아첨도 안 하고, 항상 제 잘났다는 듯이 굴면서 입바른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지.”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바로 지금 그런 부분! 그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대단히 송구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댄단 말이다.”
하여튼 사사건건 귀찮은 여자다.
이 시점까지 오면 내 입장에선 딱히 더 할 말은 없으므로, 셀라하 혼자 알아서 화를 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바쁜 티는 팍팍 내고, 뭐 좀 여유롭게 얼굴을 맞대 볼 짬도 못 내지. 하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인 양 돌아다니는지. 누가 보면 마법 교수가 아니라 공사장 인부라도 되는 줄 알겠더구나. 그리 요란하게 일한다고 능력 있는 건 아닌데… 기묘한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검토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또… 저번에 저택에 방문했을 때도….”
그렇게 한참을 악담을 퍼붓던 셀라하는, 이윽고 자기 모습이 영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는지 한숨을 다시금 푹 흘렸다.
“…그래, 말해 뭐 하겠느냐. 너란 사내는 뭐 그 정도인 게지.”
“송구스럽습니다.”
“…확언해 두마. 내가 그대 얼굴을 본 것이 시찰 평가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말거라.”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정말이느냐?”
“예.”
“…진짜로? 단 한 톨도 하지 않았느냐…?”
“…”
이쯤되면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는 지경까지 왔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시는 분이시잖습니까.”
“잘 아는구나. …다, 다만,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네게 사적인 감정이라도 있는 것 같은 뉘앙스가 되지 않느냐.”
“…그런 의미를 내포해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마, 말을 오해의 소지가 없게 똑바로 하거라. 어간 하나 만으로도 말뜻이 휙휙 바뀌어 쉽게 오해하게되는 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슬슬 더 대꾸하기도 힘들어져서 그냥저냥 다 긍정해 주는 쪽으로 전략을 수립했다.
셀라하 황녀는 괜시리 고개를 휙휙 꺾으면서 내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몸을 완전히 뒤로 휙 돌려 버렸다.
“하, 하여간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다.”
셀라하는 괜스레 어미를 떨면서 호흡을 훅훅 가다듬더니, 이윽고 다시금 뒤를 돌아보고서 이야기했다. 부채 끝으로 입꼬리를 갈무리하는 모습이 썩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시찰이 끝나면 내 마차로 오거라. 사적으로 널 한번 봐야겠다.”
“…황녀님의 마차로 말입니까?”
“그래. 다른 사람 대동하지 말고 혼자서 오거라. 황명이니라.”
“…….”
내가 잠시간 대답할 말을 찾고 있자, 셀라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방금 자기가 한 말이야 말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휙휙 내저었다.
“그, 그런 의미심장한 반응은 또 무엇이냐?! 그대가 거기서 침묵해 버리면 내 말이 좀 이상해지지 않느냐!”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적인 이유라 함은…?”
“오해의 소지를 없애 두자면…. 네가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다. 널 만나 보고 싶다고 내게 간곡히 요청하기에, 내 마차에 한 자리를 내주었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거든.”
황녀의 마차를 얻어 타고 왔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거만한 셀라하 황녀의 마차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비범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온갖 후보군의 인물들이 잔뜩 떠오르지만, 그게 누구인지 정확하게 한 명을 꼽기는 영 힘들었다.
그 인물의 정체는, 곧바로 셀라하 황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절단자 젤란.”
그 이름을 듣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그대가 그리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던데. 그 쪽도 그대를 만나고 싶어 하더군.”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셀라하 황녀는 양팔을 허리춤에 얹고서는, 가슴을 펴고서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내게 신세를 졌구나. 쿠후후.”
그게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셀라하는 한동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여튼 여러모로 피곤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