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7)
시찰은 참 다행스럽게도 별 문제 없이 끝났다.
혹시 나에 대한 악감정을 품은 셀라하 황녀가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을까 싶어서 걱정했으나,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불만 없이 보고 사항을 모두 확인만 한 것이다.
학사 시설을 시찰하는 셀라하 황녀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 보여서, 급기야는 학사의 상황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셀라하 황녀처럼 똑부러진 성격의 소유자가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서, 시찰은 무난히 마무리 되고, 미리 셀라하 황녀가 지시했던대로 그녀의 으리으리한 마차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
절단자 젤란.
그 전쟁영웅을 만나러.
“나도 갈래.”
이제는 나한테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허전한 기분이 들 정도다. 루시 메이릴은 여지 없이 자기도 동행하겠다고 말해두었다.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셀라하 황녀는 반드시 나 혼자서 오라고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내가 글록트 할아범의 거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젤란 쪽에서도 날 만나고 싶다고 먼저 부탁할걸.”
루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셀라하 황녀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루시를 기묘할정도로 불편해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밀어붙이면 될 거 같긴 하다.
그 결과, 루시를 대동한 채 셀라하 황녀의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마차라고 부르기도 뭣한 것이, 어지간한 집 한 채 안부러울 정도의 크기다. 적어도 내 첫 오두막보다는 확실히 크다.
달라붙어있는 말만 13마리다. 마차라기보단 이동 요새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다.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참이었다. 마차 입구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그대로 마차의 문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마차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석에 앉은 셀라하 황녀. 이 마차의 주인이니만큼 당연하다.
“왔구나.”
그리고, 그 아래쪽 좌석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년 사내 하나.
그 옆에는 좀 더 왜소한 체구의 마법사 하나가 앉아있다. 외모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체구를 봐서는 어린 소년 내지 소녀일 듯 했다.
“그 쪽에 앉거라. 다만… 분명 혼자 오라고 말했을텐데.”
“예. 허나, 이 녀석이 필요할 듯 해서.”
“…?”
나는 반대편에 앉은 두 사람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루시의 팔을 끌고 와서 나란히 앉았다.
루시는 잠시간 주변을 살피더니, 큼지막한 옷깃을 질질 끌면서 내 무릎위에 올라와 앉았다.
하여튼 주변 시선은 절대 신경을 쓰지 않는 녀석이다.
“루시 메이릴은, 현재 시점에서는 대마법사 글록트의 옛 거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말에, 늙은 사내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묘한 반응을 보인 것은 로브를 쓴 쪽도 마찬가지다.
“만약 대마법사 글록트에 대한 정보가 궁금한 것이라면, 그 대답을 해줄 사람으로 루시만큼 적임인 사람은 없겠지요.”
“…젤란의 목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나보군.”
“옛 동료인 칼레이드 교수님으로부터 대충 전해들었습니다.”
“그 꼴초는 아직도 쓸 데 없이 입을 털고 다니는 모양이야. 변한 게 없어보여서 마음이 누그러지네.”
예상보다 청아한 목소리였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여유로워보이기도 하는 목소리다.
그리고 로브를 내려쓰자, 예상대로 앳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양 옆으로 예쁘게 올려서 묶은 머리칼이 날개처럼 어깨를 타고 퍼져 내려온다.
연보랏빛이 약간 맴도는 백발. 완전히 어려보이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칼레이드 교수가 말하길, 지금쯤이면 아주머니가 되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만나서 반가워. 젤란 알렌다르크 라고 해. 북방의 올펜드 산맥을 반으로 잘라버렸다고 해서, ‘절단자 젤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겠지. 뭐…”
눈 앞에서 젤란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소녀는, 빈말로도 나이들어보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투톤 색깔의 머리칼 끝을 베베 꼬면서, 소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딱히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지만.”
“…”
“조금 놀란 표정이네. 뭐,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라서 당황스러웠나보지?”
소녀는 로브 모자를 정리해서 뒤로 넘기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래봬도 난 올해 140살이야. 젊은 친구.”
*“나는 금기에 도전하는 자야.”
한참 글래스트를 토벌할 때 언급했던 적이있다.
이 세계의 마법사에게는, 절대로 추구해선 안될 세가지의 마법 분야가 있다.
세계의 섭리를 비틀어꺾고, 영혼계의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3대 분야.
영생 추구, 사자 소생, 시간 역행.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 세 분야를 연구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그 경계선 사이에서 선을 타며 연구를 이어가는 작자들도 존재하긴 했지만, 대놓고 마법사의 규율을 깨는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은 마탑 차원에서 징계하고, 마력을 봉인해버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 또한 교육기관으로서 모범을 보여야하기 때문에, 그런 금기 분야에 대한 교육은 확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단자 젤란은 그 세가지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다.
“…칼레이드 교수는 당신이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되어있을 거라고 하던데..”
“아아. 뭐, 그 녀석이랑 한창 전쟁터를 노닐 때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
“뭐, 의태 마법이 쉬운 마법은 아니지만… 그럴 필요가 있었거든.”
소녀는 자기 머리끝을 몇 번이나 당기면서 이야기 한다.
“나는 나이를 안 먹어. 15살 때, 금기를 어기고 내 몸의 시간을 마법으로 멈췄거든.”
“…그런 게 가능합니까?”
그런 건 성위 마법으로도 한계가 있다.
시간 감옥이나 시간 절제로 아예 생물 자체를 멈춰버릴 순 있지만, 성장만을 딱 골라서 멈춰서 불로의 몸을 가질 수 있게 되다니.
그런 영생 마법이 실존했다면 전 세계의 유력인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금기라는 건 인간의 욕망 앞에서 생각보다 쉽게 깨지기 마련이다.
“왜 안되겠어. 난 천재거든.”
“….”
“…그래, 네 시선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다소 과장하긴 했어. 우연도 있고, 또 내 통찰력도 있고 해서…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생을 살게 됐어. 자세한 과정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두고 싶어.”
“본 모습은 감춘 채 의태하고 살았던 이유는…”
“맞아… 난 마법계에 걸리면 곧바로 처형당할 대역죄인이야. 젤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일 뿐이지.”
역사 속에 나오는 전쟁 영웅 젤란은, 사실 마법계의 오랜 금기를 어긴 천하의 대역죄인이다.
그 충격적인 진실을 목도하고 나니, 왜 셀라하 황녀가 반드시 혼자서 오라고 말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무한테나 알릴만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때로는 다 늙어 빠진 대마법사 행세를 하면서 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귀한 집 자식으로 살기도 했지. 뭐어… 젤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 저런 모습을 많이 해서… 그 꼴초가 헷갈릴만도 해.”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이 본 모습이긴 합니까?”
“…글쎄? 어떨 거 같아?”
젤란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속뜻을 파악해내긴 쉽지않았다.
나는 잠시간 루시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젤란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어 간다.
금기의 도전자.
절단자 젤란.
“글록트의 유품을 찾으려는 건, 금기에 도전할 도구가 필요해서군요. 당신의 개인적인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성위마법의 대가였던 글록트 엘더베인의 유품만큼 세계의 섭리를 비틀어 꺾는데 도움이 되는 물건은 또 없을 테니까.”
“그건… 절반만 정답이네.”
“나머지 절반은?”
“나는 금기에 도전하기 위해 그 대마법사의 흔적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학구열’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럼?”
“….”
소녀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냥.. ‘관측’하고 싶은 게 좀 있거든. 학술적인 이유는 아니야.”
그렇게만 말하고, 소녀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자그마한 티 테이블 위에 놓여진 홍차를 한입 머금으며, 다시금 상황을 살핀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셀라하 황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실 쪽에서는 젤란의 진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래. 나 뿐만 아니라 아바마마도, 페니아, 페르시카, 그리고 린돈 오라버니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지.”
“…금기를 어기고 있던 대역죄인을 황실 차원에서 숨겨주고 있었단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마법사들 사이의 금기가 우리 클로엘 황실에 얼마나 영향을 줄거라 생각하지?”
셀라하 황녀는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부채로 자기 입술을 톡톡 두들기며 이야기 한다.
“우리는 황족이란다. 주문쟁이들의 금기 규정이니 하는 것들이 우리 황가의 권위를 흔들 수 있을 거 라고 생각했다면 너무 건방지구나.”
“…다만, 공론화 되어서 마탑과 괜시리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셨던거군요.”
“긁어 부스럼이지. 학자란 것들은 항상 시끄럽게 떠들어대거든. 왜. 젤란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해보려고? 미안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나뿐만 아니라 페니아까지도 곤란해질걸.”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진짜로 날 믿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불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셀라하처럼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셀라하는 젤란에 대한 비밀을 나와 공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라는 질문이 따라오고 만다.
“이런 중대한 비밀을 왜 제게?”
“뭐 중대하달 것도 없는 비밀이다. 다만, 젤란의 존재가 내 입장에서는 영 골치 아픈 것 또한 사실이니라. 그녀는 내가 관리하는 코헬톤 무법지대에서 온갖 말썽을 부리고 다니거든.”
“하핫. 학술적인 연구를 하다보니 생기는 부차적인 사건사고입니다…”
“입 다물고 있거라.”
셀라하는 짜증을 부리며 젤란의 입을 닫게 했다.
젤란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 대고는 다시금 홍차를 홀짝였다.
“젤란과는 약간의 약속을 했지. 네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을 소개해주면, 연구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라고.”
“그게 저입니까?”
“적임이지 않느냐? 마침 그대도 젤란의 도움이 필요했을 터. 상부상조하면 되는 것이니, 오히려 내게 감사할 입장이거늘.”
나는 그 말을 듣고나서 턱을 괸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셀라하 황녀님. 그 은덕 덕분에 많은 시간과 고생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솔직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거만하게 호호호 웃어보일거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셀라하의 반응은 점잖은 편이었다.
“…그렇게 정직하게 감사할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예?”
“아니, 됐다. 나도 좀 당황스럽구나. 그대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이야기 할 줄도 알다니. 그대는 항상 본 마음은 꽁꽁 숨겨두고 이리저리 이상한 말을 돌려서 하지 않느냐?”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아무리 그래도 황족을 상대로 도발하는 듯한 발언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을 삼켰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하던가, 내 표정만 읽고 내가 무슨 말을 삼켰는지 짐작이 가는지, 셀라하 황녀는 괜시리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정이 가려다가도, 항상 사람을 화가 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노라.”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혀 안 죄송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게 더 배알이 뒤틀린다.”
셀라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숨을 머금은 뒤, 다시금 이어서 말했다.
“코헬톤 무법지대를 지나갈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주마.”
학기 중이라서 영 바쁘다.
그러나, ‘황명’이라는 명분이 주어지게 되어버리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업섹 된다.
“둘이서 알아서 필요한 거 주고 받고, 찾고 싶은 거 다 찾은 다음 제발 내 영토에서 나가거라. 더 이상 젤란의 이상한 연구 때문에 시달리는 건 사양하마. 한시 빨리 일을 마무리 짓도록.”
그것이, 셀라하 황녀가 직접 내린 황명이었다.
*“소개하지, 이 쪽은 내 조수 빌헬름이야. 꽤 든든한 친구라서 말이 잘 통할거야.”
셀라하 황녀의 마차에서 내려온 뒤, 젤란은 자기가 대동하고 다니는 조수를 소개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우락부락한 남성은 점잖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나도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구만.”
저렇게 앳된 모습으로 그리 이야기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황명도 떨어졌겠다,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지? 내가 글록트의 유품을 찾아내고 나면, 에드..라고 했던가… 그래, 젊은이의 부탁은 뭐든지 다 들어주지.”
“일단 라멜른 산맥지대까지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요.”
“뭐, 금방이지. 시간이란 것은 쏜살 같은 법이거든.”
그리 말하고선 나름 호쾌하게 웃는 것이, 마차 안에서는 황족 앞이라 예의를 차린 모양이다.
“그래. 루시 메이릴이라고 했나. 이름은 들어봤지.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는 그 이름 말이야.”
젤란의 시선이 내 허리춤을 감싸안고 있는 루시에게로 간다.
“…무슨 장신구처럼 매달려 있군 그래.”
“나는 이 자세가 좋아.”
“뭐… 존중하지. 어쨌든 네 안내를 좀 받아볼까. 대마법사 글록트 엘더베인이 마지막까지 머물었다던 그 거처의 위치를 말이야.”
“…싫어.”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루시의 짧은 거절에, 젤란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녀 나름대로 당황스러움을 표현하는 방식인 듯 하다.
“호오?”
“넌 숨기는 게 너무 많아.”
글록트 엘더베인은 루시 메이릴에게 있어서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마지막 거처를 뒤지겠다는데, 쉬이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없다.
제 아무리 협조하겠다고 말한 입장이지만, 최소한의 할 이야기는 있는 것이다.
“어떻게 영생의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금기를 어기고 있는건지, 그리고 할아범의 유물을 통해 ‘관측’하고 싶은 게 뭔지… 아무것도 밝히질 않았잖아.”
확실히, 젤란은 수상한 부분만이 가득한 마법사다.
그런 젤란을 상대로 루시가 쉽게 마음을 열고 아는 정보를 술술 풀어내줄 리도 만무하다.
“전부 털어내놓지 않으면, 난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을 거야.”
“…네가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 이 금발의 젊은이가 부탁한다 해도?”
그 말에, 루시는 움찔 몸을 떨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내게 눈빛으로 묻고 있다. 젤란의 말대로 나 또한 루시에게 정보를 내어주기를 청하고 있는 것일까. 그 사실이 궁금한 것이다.
정말로 내가 진심을 다해 부탁하면, 젤란의 태도와는 별개로 글록트에 대한 정보를 내어줄 수도 있다.
루시의 불안한 눈빛이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저 또한 루시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루시는 내 허리춤을 꽉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괜시리 동의해준 게 기쁜 모양이었다.
“서로 간에 도움을 받고 싶다면, 가진 패는 전부 내보여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젤란의 옆을 보좌하고 있던 조수 빌헬름이다.
그러나 젤란은 그런 빌헬름의 표정이 어땠냐는 듯이, 흔쾌히 웃어보였다.
“젊은이 말이 맞구만.”
그 조막만한 몸으로 기지개를 하더니, 다시금 로브 모자를 휙 뒤집어 쓰며 이야기 했다.
“말했듯, 내가 글록트의 유물에 눈독을 들이는 건 학술적인 이유가 아니야.”
목소리가 괜시리 아련해진 것은, 원하지 않은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말이지. 실패자야.”
소녀는 이어서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은, 전부 실패했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원이자 숙원이 있었는데… 그 또한 실패했어.”
젤란은 괜시리 우수에 찬 눈으로, 내 허리춤을 꽉 감아안고 있는 루시를 바라본다.
“이 금발의 젊은이를 끔찍이 아끼고 있구나. 루시 메이릴. 아마도 네 삶의 이유는 이 남자겠지.”
낯부끄러울만도 할 말이건만,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얠 위해 살기로 했어. 굳이 말하자면, 삶의 이유를 강매 당했어.”
“표현이 좀 그렇다, 루시…”
“괜찮아. 싫지 않았으니까.”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그저 담담하게 본인은 그렇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 하지만 나는 루시 메이릴 너와는 달라. 난 이제 남아 있는 삶의 이유 같은 건 없어. 전부 잃었고, 전부 실패했으니까.”
그 말에, 루시는 잠시간 표정을 구긴다.
상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루시다. 루시의 눈에 젤란은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이것저것 많이 잃어 본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젤란은, 자신이 그 무엇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고 이야기 한다.
“나는 아인족을 이 제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결국 내 손으로 그 아인족을 모두 잡아죽여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지. 전쟁의 물결에 떠밀려, 제국의 마법사로서, 학살을 자행하는 아인족 앞에 서야만 했거든.”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젤란은 말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인족의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제국은 나를 아인족을 학살한 전쟁영웅이라 칭하고 있더군.”
문득, 클레드릭 수도원에 있는 아인족 수녀들이 생각났다.
젤란이 맡겨뒀다고 하는 그 아인족의 어린 생존자들은,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죄책감이었던 것일까.
“글록트가 다루는 성위마법이 극에 달하면,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미래와 과거의 흐름을 모두 관측할 수 있게 된다고 했지.”
거기서 ‘관측’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나왔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른 자는 기껏해야 대현자 실베니아 정도다. 그녀는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수 천 수 만개의 과거와 미래 흐름을 전부 관측해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덜한 경지일지라도… 다른 미래와 과거의 흐름을 관측할 수 있게 된다면…
“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나는 말이야. 그렇게 수만가지로 갈라지는 흐름 중에서 하나 정도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낸 미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젤란이 아인족을 학살하지 않았던 세계.
그런 가능성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젤란은, 그 ‘만약’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그러나, 젤란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다 안 다는 듯이, 은은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소녀는 괜시리 하늘에 떠 있는 태양에 손을 뻗어 본다.
“마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 같아. 허황된 걸 알면서도 공연히 쫓게 돼.”
“…”
“그래서, 그냥 그런 미래가 있을 수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그게 내 생애에 남은, 마지막 비원이야.”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글쎄, 어떨까.”
젤란은 팔을 내리고, 루시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대답이 되었니? 깐깐한 고양이 아가씨.”
모든 의문을 다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대답은 되었는지…
가만히 젤란의 눈을 바라보던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의 눈에는, 여유 넘쳐보이는 젤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공허해 보였던 탓이다.
*“있잖아.”
떠날 채비를 마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루시와 나는 젤란과 헤어져서,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학사 거리를 걸었다.
내 소맷깃을 잡고 따라 걷던 루시가, 문득 나를 불러세웠다.
“…왜?”
“안아줘.”
그 말에, 나는 루시의 상태를 살폈다.
“걷기 힘드냐? 확실히 오늘 좀 많이 걷긴 했지. 다리 아프면 업히는 게 차라리…”
“그게 아니라, 그냥 안기고 싶어.”
예전에는 좀 부끄러운 기색이라도 보였던 거 같은데, 몇 달 같이 지내다보니 루시의 요구는 좀 더 과감해진 기분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루시의 표정을 한 번 살피려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루시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노을진 학사.
인적 드문 거리.
나는 조용히 몸을 숙여서 루시를 꽉 안아주었다.
루시는 내 등을 감싸 안더니, 속삭이듯 이야기 했다.
“고마워.”
“그래, 안좋은 기억이 떠올랐구나.”
나도, 루시의 생각에 동감한다.
같은 전쟁영웅 동료 아니랄까봐….
생기가 넘치는 듯 하면서도, 공허한 그 젤란의 눈동자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글래스트 교수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루시 메이릴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다. 오히려 뒷맛이 씁쓸한 기억이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잠들 듯이 쓰러져, 싸늘하게 죽어가던 글래스트 교수의 기억.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죽음의 사슬로 옭아매던 우둔한 학자.
루시에게 있어선, 그 사무치던 고독과 싸우던 시절을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고독은 극복했다.
옆에는 나 에드 로스테일러가 있다.
그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듯이, 루시는 그저 조용히 내게 안겨있었다.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기울어져가는 그림자 속에서,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루시를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