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8)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혼자서 마력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던 루시가, 실수로 벽난로 옆에 있던 통을 넘어뜨려 버린 적이 있다.
난로를 떼다가 나오는 재들을 담아 놓는 통이다. 그 덕에 글록트의 오두막 안은 확 하고 피어오르는 재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난로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글록트는 물론이고, 목제 침대에 누워서 마력을 휘두르던 루시까지도 완전히 재에 범벅이 되어 버렸다.
화들짝 놀란 루시는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서 온몸에 묻은 재를 털어대고 있었고, 글록트는 콜록대며 얼른 바람 마법을 일으켜서 재를 날려 보냈다.
제아무리 무신경하고 감정 기복이 없는 루시라 할지라도, 이 정도쯤 되면 미안해진다.
쭈뼛거리면서 글록트에게 다가가 우물쭈물 시선을 보내자, 글록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다음 이리저리 옷을 털었지만, 여전히 몸 여기저기에 묻은 재는 완전히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 ‘덕분에 정신이 바짝 들었구나. 다만, 오두막 안에서 마력 연습을 할 때는 주의하라고 분명 말했었지….’
― ‘…….’
잠깐 질책을 하려던 글록트는, 루시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언제나 제 페이스대로만 세상을 살던 그 루시가,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글록트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다. 충분한 반성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에 더 추궁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글록트는 루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 ‘실수는 누구나 겪는 것이지.’
그렇게 위로해 보지만, 루시는 주눅이 들어서 시선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가끔은 따끔하게 혼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를 더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눅이 든 루시를 어떻게 풀어 줘 볼까 생각하던 글록트는, 이내 목소리를 한층 더 가볍게 한 후 말했다.
― ‘일단 재를 좀 털어 낼 만한 걸 찾아와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글록트는 오두막 아래에 설치된 지하실로 들어갔다. 창고 겸 개인 연구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혼자 남은 루시는 이리저리 옷을 털며 난장판이 된 오두막을 본다. 이쯤 되면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떻게 운을 뗄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정적 속에 기다리던 차, 지하실에서 올라온 글록트가 다시금 루시에게 다가왔다.
―툭.
그리고는, 루시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워 준다.
재투성이 머리칼 위에 상냥하게 올라온 것은, 챙 넓이가 거의 루시의 상반신만 한 마녀 모자였다.
― ‘선물이란다.’
― ‘…….’
루시가 멍한 눈으로 모자 챙을 잡으며 글록트를 올려다보았다.
― ‘지금 네게 주는 게 좋겠구나.’
― ‘이건….’
― ‘소중히 하렴. 언젠가, 이 모자는 네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될 거야.’
― ‘그건… 왜….’
– ‘…글쎄, 그건 언젠가 알게 될 테지.’
* * *
“그때 받은 모자가 이거야.”
은은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내부.
아켄섬을 떠나, 코헬톤 무법 지대로 향하는 이 마차에는 딱 네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절단자 젤란. 그녀의 조수 빌헬름.
그리고 루시와 나 에드 로스테일러다.
“그럼… 그 모자도 글록트의 유품 중 하나라는 이야기인가….”
“응.”
젤란의 말에 루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루시는 언제 어디서든 간에, 기묘할 정도로 저 마녀 모자를 챙기고 다녔다.
개인적으로 보호 마법과 상태 유지 마법을 몇 겹으로 걸었는지… 어지간한 난장판 속에서도 모자는 크게 상하는 일이 없었다.
루시의 입장에서는 글록트의 마지막 남은 흔적 중 하나이니, 끔찍이 아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루시가 따로 보관하고 있던 글록트의 유물들은 더 있다. 아켄섬 서쪽 해안 동굴에 감춰 둔 글록트의 묘 앞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가득했었다.
뭐, 대부분은 그냥 말 그대로 유품일 뿐이었다. 어떤 마법적인 효능을 가진 물건도 없었고, 그나마 가치 있는 물건이었던 ‘성위학 개론’은 나한테 있다.
“뭐가 있다면, 지하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봐.”
루시는 늘 그렇듯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발을 휘휘 내젓고 있었다.
“할아범이 떠났을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오두막을 살펴보지 않고 나왔거든.”
글록트가 죽을 때의 기억은 썩 유쾌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의외로 루시는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삶을 마무리할 시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학술에 큰 뜻을 품지는 않았다곤 했지만, 한 번씩 내가 없을 때 지하실에 들어가서 뭔가를 연구하곤 했어. 나는…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대마법사 글록트가, 수제자인 루시 메이릴에게 숨겨 가면서까지 연구했던 무언가가 있다.
루시의 성격상 그게 뭔지 별다른 호기심을 가지진 않았지만, 젤란과 빌헬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확실히 확인해 두고 싶군요.”
젤란의 조수라고 하던 빌헬름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마 학술적으로도 꽤 큰 가치가 있는 연구였을지도 모릅니다. 에드 교수님도 학술계에서 일하시는 만큼, 흥미가 동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선 루시를 살폈다. 루시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간만에 둘이서 어딘가로 떠난다는 사실에 퍽 흥이 사는 것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어울리지도 않게 흥을 내고 있었다.
물론 겉모습만 봐서는 흥이 난지 어떤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내 시점에서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미리 약속한 대로 라멜른 산맥 지대의 조사가 끝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유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해 줘야겠습니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젤란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유물 가공 기술자다.
나 또한 마공학 연구에 긴 시간을 들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유물은 쉽게 다룰 수가 없다.
“그래. 내가 못 다루는 유물은 없어. 그런데, 젊은이 자네도 마력학에 대해서는 상당한 실력자일 텐데. 대체 어떤 유물이길래 직접 가공할 수가 없다는 거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나는 품속에서 티르칼락스의 사체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작은 구슬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가치는 젤란쯤 되는 인물이면 순식간에 알아본다.
젤란은 미간을 확 좁히며 헛웃음을 지었다.
“터무니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네.”
“…….”
“이걸로 뭘 하려고?”
유물의 사용처는 중요하다. 그래야지 젤란이 적절하게 가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가감 없이 말하기로 했다.
“제가 계약한 정령 중에, 고위 바람 정령인 메릴다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고위 정령이라…. 정령학 분야에도 정통하구나.”
“이제 그 녀석의 힘을 다루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으니….”
그다음 내가 뱉은 말에, 젤란은 헛웃음을 넘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을 최고위 정령으로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지금은 최고위 바람 정령의 자리가 공석이니까요.”
그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최고위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얼마나 어이없는 발언을 한 것인지 자각 정도는 하고 있다.
“재밌는 사람이네. 젊은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냐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확실히 젤란도, 제정신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 * *
그 뒤로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조수인 빌헬름을 끼고 코헬톤 무법 지대를 돌아다니던 젤란의 무용담을 듣거나, 한 번씩 마차에서 내려 바람을 좀 쐬며 몸을 풀거나.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서 숙소에서 하룻밤씩 자거나.
그렇게 라멜른 산맥 지대까지 이어지는 지루한 마차길은 계속됐다.
퓰란이나 올덱도 제법 먼 곳이었지만, 라멜른 산맥 지대는 아예 아켄섬과는 제국 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 먼 옛날 루시가 글록트의 시체를 들고 아켄섬까지 혼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실감이 되고 만다.
제법 빠른 속도의 마차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씩이나 걸리는 거리다. 이만한 거리를 단 한 순간도 마법을 해제하지 않고 날아왔다고 하니,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정신력이다.
아마 루시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라멜른 산맥 지대로 돌아간 적이 없을 것이다.
오두막이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란 확신조차도 못 하겠지.
그렇게 마차 안에서 서로 간의 어색함을 다 털어 내 버린 채,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라멜른 산맥 지대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우리의 여정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산맥 초입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산행을 위한 물자를 잔뜩 구입한 후 우리는 등산을 개시했다.
라멜른 산맥 지대는 대륙 북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이만한 고도의 산을 등반하는 데에는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물론 목표는 정상이 아니라 중턱에 있는 오두막이지만.
루시는 오랜만에 돌아온 라멜른 산맥 지대의 풍경이 썩 반가운지, 가볍게 마력을 휘둘러서 침엽수 꼭대기에 올라서 주변을 살피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은 척척 진행됐다.
젤란과 루시는 체구가 왜소하지만, 마력을 다루는 게 능숙해 산행에 큰 체력을 소모하지 않았고.
나와 빌헬름은 애초에 긴 산행에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었다. 뭐, 정 힘들면 마력을 좀 동원하면 되기도 하고.
때때로 정령을 소환해서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중턱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면서 거의 이틀가량의 산행을 계속했다.
어디 뭐 산짐승들한테 당할 만한 전력도 아니고, 물자도 충분하다. 큰 무리 없이 이어지는 산행은 고행이라기보단 오히려 관광에 가까웠다.
듣던 대로 라멜른 산맥 지대는 정말 아름다웠다.
루시가 유년 시절을 뛰놀았다고 하는 이 산맥지대. 쭉쭉 뻗은 침엽수림 사이에서 통통 튀어 다녔을 어린 루시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
그러나, 넓어도 너무 넓다.
소문에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넓은 산맥 지대다.
글록트의 보물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돌았음에도, 탐사대들이 그 오두막을 찾아낼 엄두조차 못 내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알프스 산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산의 행렬이 쭉쭉 이어진다. 만약 정상이 목표였다면, 이 초가을에 눈을 헤쳐 나갈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산꼭대기 여기저기에 덮여 있는 만년설은 아득히 아래에서 올려다보아도 정말 두터워 보였다.
“거의 다 왔어.”
그리고, 루시의 입에서 드디어 희소식이 나왔다.
빠른 마차를 타고 일주일가량 달려와서, 거의 사흘가량 산행을 한 끝에 도달한 곳이다. 어째서 글록트는 이런 외진 곳에 은둔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렇게 쭉쭉 이어지던 침엽수림은… 어느 순간 끝이 났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들판이 나왔다. 넓이는 그렇게 넓지 않다. 정말 이 거대한 산맥 속에 아주 조그맣게 박힌 한 톨 점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 가운데에… 허름한 오두막이 서 있다.
“오오, 드디어…! 저기가…. 대마법사 글록트가… 은퇴 후에 은둔한 곳인가….”
마법 사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라면 모두 침을 줄줄 흘릴 것이다. 그 위인의 마지막 거처가 바로 저기에 있었으니까.
* * *
“애초에 오두막을 건설할 때 마법적인 처리를 이것저것 많이 해 두었군. 하긴 노인 혼자서 오두막 하나를 세울 순 없으니까… 마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겠지.”
이 높은 고산 지대에 몇 년을 방치되어 있었을 터인데, 글록트의 오두막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오두막을 건립할 때 걸어 두었던 형상 유지 마법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 대마법사가 직접 시전한 마법이니 그럴 만했다.
젤란은 천천히 나아가서 허름한 문의 문고리를 슥 돌려 보았다.
그렇게 문을 당기자, 끼익 하고 자연스럽게 열린다.
오두막 내부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크게 어질러져 있진 않았다.
루시가 떠난 날 그대로인 것이다.
“…….”
문득 손목에 힘이 들어오는 느낌이 나서 살펴보니, 루시가 내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면, 예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돌아오는 느낌이다.
“…괜찮냐, 루시.”
“괜찮아.”
걱정이 되는 와중이었으나, 루시는 기특하게도 그런 대답을 해 주었다.
“네가 있잖아.”
내 팔뚝을 꽉 감싸 쥐며, 루시는 고독을 훌훌 털어 낸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다. 공허니 허무니 하는 것들과는 작별한 지 오래다.
그렇기에,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두막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글록트의 오두막.
그러나, 마치 하룻밤 만에 돌아온 것처럼, 벽난로 근처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몸을 말고서 한숨을 푹 흘린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 * *
글록트의 오두막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빌헬름의 마법으로 내부의 먼지를 다 날려 보내는 것이다.
빌헬름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내부를 깔끔하게 만든 뒤, 오랫동안 방치된 주방에 있는 상한 식재료 따위를 모두 갈무리해서 뒷마당 땅에 묻었다.
그리고 우리가 챙겨 온 식료품 물자들을 주방에 채워 넣고, 간단한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젤란은 내부 청소가 끝나자마자 루시가 말한 지하실로 들어가서 글록트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와 루시는… 그저 벽난로 옆의 흔들의자에 같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젤란의 유물 수색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후부터는 젤란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렇게 루시를 무릎에 앉힌 채, 한참 동안 벽난로의 온기를 쬐고 있을 무렵이었다.
해는 진즉에 져서 밤이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약간 싸늘해질 때 즈음… 지하실에서 젤란이 올라왔다.
“글록트의 유물을 찾았어. 다만… 상상이랑은 좀 다르네.”
“예?”
“잠시 내려와 볼래?”
발화 마법을 광원으로 삼아 지하실로 내려가자,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가 나온다.
거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코너를 꺾으면, 글록트가 개인적으로 쓰던 연구실이 나온다.
“내가 알고 있던 대마법사 글록트는, 금기를 어기는 것을 혐오하는 사람이었어. 언제나 마법에 대한 경의를 가지고, 세계의 섭리와 운명을 존중하던 마법사였지.”
“…….”
젤란의 말에 루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하실 내부로 쭉 나아가면서, 젤란은 말을 이어 갔다.
“루시 메이릴. 네 입장에서는 조금 충격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마법사 글록트는 사실… 말년에는 금기에 대해 연구했던 것 같다.”
영생 추구, 사자 소생, 시간 여행.
온 세계의 마법사가 금기시 여기는 세 가지 영역.
평생토록 그 금기를 지키며 살아온 대마법사 글록트가, 사실은 그 금기 분야에 손을 뻗었었다는 말인가.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어….”
루시는 젤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기억에 있던 글록트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계의 섭리를 존중하는 마법사였다.
성위 마법의 힘을 다룰 수 있었음에도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갈 뿐.
그렇게 살 만큼 살다가 떠난, 미련 없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루시 메이릴은 글래스트 교수의 사자 소생 마법으로 글록트를 되살리지 않았다.
평생토록 마법사로서의 긍지를 지키며 살아온 그를, 금기를 통해 되살려 봐야 모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젤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도… 조금 의문스러워. 내가 알고 있는 글록트라는 인물은 절대로 금기에 손을 댈 만한 자가 아니야. 그런데… 이 지하 연구 시설에….”
젤란이 발화 마법에 마력을 더 주입하자, 그 광원이 점점 더 커져 간다.
그에 따라 글록트의 연구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루시 메이릴은 그저 나태하고 무관심해서, 관심조차도 두지 않았던 곳이다.
그곳에는… 수많은 유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때 글록트가 연구하다가 말았던 갖가지 마공학 용품들도 있었다.
“3대 금기 분야 중 하나인, ‘시간 여행’에 손을 댄 흔적이 역력하네. 중앙부에 있는 저 큼지막한 수정구슬을 봐. 성위 마력을 집속시키기 위한 장치야. 마력 흐름을 유도하기 위한 마공학 용품을 살펴보면 그 목적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겠네.”
루시는 미간을 좁혔다.
글록트는 절대로 금기를 어기지 않는 마법사다. 그것을 평생의 긍지로 삼아 온 자다.
글록트가 저런 것을 만들 리가 없다.
그러나, 마법 지식이 출중한 루시의 눈에도… 그 마공학 용품의 구조는 몇 번을 봐도 똑같았다.
성위 마력을 집속시켜, 시간의 연결선을 뛰어넘기 위한 장치.
미래가 되었든, 과거가 되었든… 글록트는 한번 시간을 뛰어넘었던 적이 있는 것이다.
“정황을 보건대, 생전의 글록트 엘더베인은… 한 번 시간의 선을 조절한 적이 있어. 즉, 금기를 어기고 시간 여행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거야.”
“…….”
“마력 회로 장치를 봐. 사용한 흔적이 역력해. 소모품이 보충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딱 한 번만 사용한 모양이지만 말이야.”
시간을 뛰어넘어서 어딘가에 다녀온 적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루시 몰래.
그렇다면, 과거인가. 아니면 미래인가.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 무엇이 그가 평생토록 지켜 온 자신의 신념을 꺾고 그런 여행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 모든 진실은 미궁 속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글록트 엘더베인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 * *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어. 둘 중 무엇부터 듣고 싶냐고 물으면, 나쁜 소식부터 듣고 싶다고 말하겠지? 뭐, 한 번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젤란은 주방에 있는 테이블 앞에 차려진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우리들에게 이야기했다.
“밤을 새서 지하실의 유물을 확인해 본 결과, 내가 원하는 대로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관측할 수 있는 충분한 장비가 있는 것 같아. 다만, 너무 노후되어서 조금 수리할 필요가 있어 보여.”
“…….”
“그 희대의 대마법사가 설계한 물건들답게 구조가 참신하고 놀라워. 하나하나 연구해 가고, 파악해 가며 수리하기는 쉽지 않아 보여. 그나마 다행인 건 마공학에 조예가 있는 자가 여기에 둘이나 있다는 거지.”
빌헬름과 나 에드 로스테일러.
나름대로 마공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위 마법을 다루는 물건들이니 뭐가 어떻게 작동되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잘 모르겠어. 아주 위험한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다만, 적절히 잘 도와준다면….”
젤란은 포크를 내려놓고, 내게 고개를 쑥 내밀며 이야기했다.
“책임지고, 네가 최고위 정령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난 최고위 정령을 다루려고 하는 네 계획이 너무 흥미로워서 버틸 수가 없거든. 그러니, 서로 윈윈하는 느낌으로 가자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성위 마력이라는 게 알다시피 워낙 예측불허한 힘이잖아. 그러니, 성위 마력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자네 힘이 필요하다는 거지.”
젤란은 다시금 목재 의자 등받이에 그 왜소한 몸을 기댄 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자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젊은이.”
애늙은이 같은 말투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로 저 조막만 한 소녀의 내면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늙은이다.
“그러니… 한 번 같이 힘 좀 내보자고. 나는 젊은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으니까.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조금 궁금해졌어.”
“…….”
“그 긍지 높은 대마법사 글록트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신념을 꺾고 금기를 어겼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겸사겸사 그 진실을 확인도 해 보고 싶어졌지. 안 그래, 깐깐한 고양이 아가씨?”
루시는 젤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세상에는 굳이 몰라도 되는 사실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루시는 심정적으로 글록트를 완전히 떠나보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마법사였고, 후회 없이 웃으며 떠났다. 그것으로 루시 안에서의 이야기는 완결되었다.
굳이 그것을 들쑤실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래.”
루시는 그렇게 짧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도통 알 수 없다.
그저 젤란은 흡족하게 웃을 뿐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곧바로 유물들을 수리해서 확인해 보도록 하자고.”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 기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지금 시점의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오두막 바깥에서 들이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라멜른 산맥 지대 중턱의 허름한 오두막.
문명과는 한없이 동떨어져서, 그 누구의 연락도 닿지 않는 장소.
젤란은 목재 침대 위에 누웠고, 빌헬름은 식당 테이블 위에 야영용 간이 침낭을 깔았다.
나는 품에 루시를 안은 채 벽난로 옆의 흔들의자에 몸을 뉘었다.
오두막 안에서… 그렇게 우리 넷은 각자 자리를 잡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 일어날 일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