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8)
예니카 페일로버 (1)
따스한 바람이 분다.
초목이 우거진 숲 속, 남들은 모르는 꽃밭에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어와 피부를 간질인다.
예니카는 그곳에 다소곳이 앉아 꽃을 따서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저런 매무새를 신경써야하는 교복은 방에 벗어두고, 고향집에서 입던 편한 베이지색 스커트를 걸친 채로 콧노래를 부르며 한 송이 한 송이 소중하게 엮어나간다.
문득, 숲 한켠에서 한 사내가 들어온다. 보기만 해도 호화로워보이는 백마를 타고 있다.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꽃 밭 한 쪽에서 잦아들고, 안장에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오는 그 남자는 에드 로스테일러다.
예니카는 활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에드는 반가운 얼굴로 꽃밭으로 들어온다. 열심히 꽃을 꺾어만든 화관을 에드에게 씌워주고, 손을 잡으면서 마주보고 웃더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하하하-
꽃잎이 휘날리고, 나비들이 춤을 춘다. 두 사람을 축복하듯 숲의 나무들도 어느덧 자리를 비키고 없다.
아하하하하하-
스텝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딱딱 맞아 들어가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류트 뜯는 소리, 하프 소리 따위가 울려퍼진다. 그야말로 동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 하하하-
.
.
.
.
짹- 짹-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오필리스관 창문을 넘어서 귓가를 간질였다. 아침을 알리는 소리였다.
예니카는 그대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간밤의 숙면 때문에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고, 피부는 좀 떠있었다. 그런 부스스한 모습으로 예니카는 베개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나는 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자괴감, 수치심 따위가 시간차를 두고 엄습했다.
*
재앙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있잖아, 클라라. 좋아한다는 거랑 사랑한다는 건 왜 그렇게 무게감이 다른 걸까?”
건너편에서 샐러드에 들어있던 토마토를 집어먹고 있던 클라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예니카의 절친과도 같은 두 사람은 열심히 놀리던 포크를 그대로 멈춰버린 채 자기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학생식당.
굳이 오필리스관의 고급진 식사를 놔두고 절친들과 밥을 먹기 위해 함께하는 예니카의 언동은 분명 평소와 같았다.
예니카의 징계위원회가 끝난지도 열흘이 지났다.
3대 학장은 물론이고 교장 오벨까지 직접 출두하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징계위원회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굵직굵직한 사건만 짚고 넘어가도 설명으로는 한 세월이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결정된 징계를 전부 달게 받겠다고 증언해버린 예니카의 완전 백기 선언에 2학년생들과 담당 교수들이 죄다 들고 일어나서 그녀를 옹호한 것이, 1차 심리.
학생 의회와 학사 본부를 향한 결사의 탄원서 총공격. 총합 매수 1417매로, 학사 건의함이 가득차서 따로 탄원서용 수거함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호위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족 치사 미수 혐의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는 페니아 황녀의 선언은 2차 심리 때였다. 학생들의 탄원 행렬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녀의 이 결단은 후일 학생회장 선출 때 페니아 황녀가 2학년생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만 그건 메인 시나리오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또한 이 때, 벨로스페르에 의해 지배당한 상태였으므로 그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까지 학사에 받아들여져 퇴학 자체는 무효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금전적 피해와 상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예니카의 죄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등장한 게 로르텔이었다.
네일관과 글록트관의 재건립 자금을 엘테 상회에서 저금리로 끌어오고, 상해에 대한 보조금을 완전 무상 지원하는 대신, 생활동에 유통되는 엘테 상회의 상품들 중 학업 용품의 통관세를 절반으로 줄여달라는 협상을 성사시켜 버린다. 그 와중에 예니카에 대한 선처 조항은 덤이었다.
이로써 생활동 내의 상업 시설에서 유통되는 상품들 중 학업 용품에 관해서는 엘테 상회의 상품들이 절대적인 경쟁 우위를 가지게 되었고, 실베니아 학사에 대해 단순 후원자가 아닌 제대로 된 채권자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전도유망한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에게 빚까지 지워두었다.
그야말로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여자이니, 협상안에 도장을 찍는 날엔 최고 학장 맥도웰도 로르텔 앞에서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천연덕스럽게 빙긋 미소 짓는 건 그녀의 천성이었다.
어쨌든 페니아와 로르텔이 엮여서 온갖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끊임없이 학생들은 예니카의 선처를 위해 발로 뛰어다녔고,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는 쾌거 그 자체였다.
근신 10일. 정학 20일. 글록트 장학 재단의 수혜자격 박탈. 다음 학기부터 오필리스관 입사 자격 박탈. 학년 수석 지원 혜택 박탈. 학사 명예 상훈 전부 반납. 유급은 없음.
그 결과에 2학년생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성을 외쳤다. 이 정도면 상상 이상의 선처였다. 자기들 딴에는 가슴이 울컥 해지는 청춘 드라마 한 편을 찍어낸 기분이었다.
다만, 군중을 뒤로한 채 그 환호성을 듣고 있던 예니카의 어깨는 여전히 주눅이 든 채였다.
적어도 참관인들 중 그 이유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어쨌든 그런 건 지나간 일이다. 이제 와서 왈가왈부 해봐야 의미도 없는 일이니, 클라라는 그저 근신 기간이 끝난 예니카가 주눅이 들지 않았으면 하는 기분뿐이었다.
전 날 밤, 클라라와 아니스는 오랜만에 만나는 예니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완벽히 시뮬레이션을 끝내 놓았다.
글라스칸 사건 따위는 절대 언급하지 않기. 괜시리 마음 써주는 행세를 하지도 말고, 기분이 어떠니 마니 하는 말도 절대 절대 하지 말기. 그냥 오랜 만에 만난 김에 같이 점심 먹으러 가기. 대화 주제는 최대한 신변잡기들로.
아예 무슨 대화를 할지도 생각해 놨다. 클레어 조교수가 모의 시험지를 배부하다가 넘어진 일. 방어 마법학 수련장 구석에 핀 나팔꽃이 벌써 외벽에 덩굴을 감기 시작한 일. 생활동의 베이커리에 나온 에그 타르트가 무척 맛있어서 호들갑을 떨었었던 일.
그런 주제들을 잔뜩 장착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온 아니스와 클라라였다.
“그냥… 사랑한다는 말은 뭔가? 좋아한다는 말에 비하면 엄청 무겁잖아? 사전적인 의미도 그렇고. 실제로 쓸 때도 그렇고. 그런데… 그 무게감이라는 건 결국 감정의 무게에서 비롯되는 걸 테고… 그럼 그 감정의 무게라는 것도 말야 사람에 따라 다른…”
“예니카, 잠깐만. 이것만 먹고.”
“응? 아하하. 미안해.”
클라라는 빙긋 웃으면서 토마토를 한 입 물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예니카를 스윽 바라보았다.
이미 목덜미 언저리부터 이마 구석까지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니스를 바라보니 그 쪽도 마찬가지였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의 재앙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예니카가 책 속의 철학자 같은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주제가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이다. love 와 like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예니카의 심정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걱정했다. 오필리스관 자기 방에 홀로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자꾸 머리 속에 아른거려서, 그 고독한 공간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또 괜시리 혼자 부담스러워 미안한 감정에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됐다.
일단 다행인 점은 예니카가 그런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것일 테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처음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마음이 아파서 주눅이 들어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는 회복된 거 같아 안심했다.
그러나, 이후의 고민거리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여기서 갑자기 사랑의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파급력을 가져올 대사건의 전조다.
-탁!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포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샌드위치를 입에 머금고 있던 예니카가 움찔 하고 놀랐다.
클라라는 비장한 눈으로 슬쩍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점심의 학생 식당에는 별로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점심때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주변에 듣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근신 기간 동안 누군가랑 제대로 대화를 나누었을 리도 없으니, 예니카의 이 화두는 오로지 아니스와 클라라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클라라는 다시 비장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아니스라는 듬직한 동료가 있다. 아니스와 눈을 맞춘 채 클라라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눈빛 교환만으로 수십 마디의 대화가 오간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소녀의 순정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클라라와 아니스는 지금까지 충분히 노력해왔고, 단 한 번도 실패 없이 모든 시련을 타파했다. 예니카가 상처받거나 힘들어 할 일이 생기려고 할 때마다, 이 두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의 풍파로부터 소녀를 지켜온 것이다.
예니카를 시기한 선배들의 해코지로부터 지켜냈고,
유독 동급생들에게 보호받는 예니카를 괜시리 고깝게 여기는 조교수들도 물리쳤으며, 천하의 나쁜 놈이 분명할 에드 로스테일러한테서도 잘 보호했다.
에드 같은 경우에는 최근 1학년생들 사이에서는 ‘싸가지는 없지만 생각보다 유능할지도 모른다’는 둥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섣불리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애초에 근본은 오만하고 사악하다는 점만은 분명 사실일 터다.
그런 위험인자를 예니카 주변에 접근 시킬 수는 없다.
“예니카는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이 대화는 내가 집도한다. 클라라는 그런 다부진 마음으로 화두를 던졌다. 표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아니스는 잠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줘야만 한다.
한없이 섬세한 예니카의 마음에 어떠한 상처도 생기지 않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접근해야 한다.
바로 그 예니카 페일로버의 연애담이라니.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 대형 핵폭탄이 학생들 사이의 소문으로 퍼져나가면, 바로 내일 아침 회동 때 이미 전교생이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소녀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클라라는 이를 악물고 그런 일만큼은 막아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니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얼마 전에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인데…”
안 돼! 예니카!
너는 근신으로 지난 10일간 방구석에만 박혀있느라 아무도 제대로 못 만났잖아! 대체 세상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라는 비명을 내지를 뻔한 것을 클라라는 억지로 참아냈다.
“으, 응.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데?”
“그냥 멍하니 방에서 허공을 쳐다보면서 앉아 있다 보면, 문득 어떤 사람 얼굴이 떠오른대…”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오후에 클레어 조교수님 일 좀 도와주기로 했었지! 완전히 잊어버렸네! 미안! 먼저 갈게! 안녕, 다음에 또 봐!”
도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는지, 아니스가 자결을 선택했다.
전우가 사망했다. 모든 짐을 자신에게 맡기고.
클라라는 야속하다는 얼굴로 아니스를 쳐다보았으나, 귀까지 빨개진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니스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스는 이미 전투 불능이다.
평소 천진난만한 예니카다. 그녀의 저런 모습은 소녀의 심장에는 맹독으로 작용한다.
지금 이미 클라라도 한계 상태다. 그 상대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계기가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런 저런 질문을 와다다다 던지고 싶은 욕망을 혀를 씹어대며 참았다.
그 기개와 집념은 기골이 장대한 장수가 홀로 화살 밭을 뚫어내는 모습과도 같다.
소녀의 순정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아스라한 첫사랑의 기억은 아리따운 추억이 되어야지, 수치스러운 흑역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또…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을 자꾸 꾼대…”
“그, 그래?”
“응. 막 같이 춤을 추거나 꽃밭에서 놀거나 하는 꿈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입꼬리가 멋대로 춤추려고 한다. 클라라는 포크로 허벅지를 찍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건 네가… 아니, 그 사람이 생각할… 일..이네…”
“응, 그렇겠지… 그런데 신기한 건 말야… 계기라는 게 없는 거 같아서… 왜 있잖아. 누군가를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그런 거엔 이유가 다 있는 법이잖아.”
“으, 응…”
내뱉고 싶은 말들이 목청 끝까지 올라와있다.
순식간에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오버랩 되면서 상상 속으로 삼류 신파 소설 한 권을 휙 찍어냈지만, 그 모든 게 전부 오지랖이라는 사실을 클라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예니카는 자기 연애담을 숨기고 싶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섣불리 그 마음을 파헤치려 들었다가는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예니카의 절친으로서의 마음과 예니카의 연애담에 대한 소녀적 호기심이 정면 승부 중이다.
이 고통은 과연, 징계위원회를 위해 두 발로 뛰어다녔을 때 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니카 자신이다.
누누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소녀의 순정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클라라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서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산뜻한 미소.
“예니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는 거 아닐까? 누구를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그런 건 생각보다 불가사의한 일이잖아.”
“그래?”
“응. 그냥 은연중에 드러나는 태도만으로 그 사람이 확 싫어지기도 하고, 힘들 때나 기쁠 때 옆에 있어줬다는 이유만으로 확 좋아지기도 하고. 사람 심리라는 건 그렇게 중구난방이니까. 너무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는 일에 근원적인 이유를 찾는 일은 분명, 심리학자나 철학자 같은 학자들의 영역일 터다.
“그런 복잡한 건 뒤로 미뤄둬도 좋으니까,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너에게…. 아니, 그 사람에게 좋은 것 아닐까?”
“음… 맞아. 맞는 말 같아. 역시 클라라야.”
그렇게 하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심장에 나이프가 박힌 것 같다.
“그래도 말야, 예니카. 그 친구 입장에서는 자기의 민감한 고민이 친구들 사이에서 떠도는 걸 그리 유쾌하게 여길 것 같진 않아. 그러니 이런 상담을 남에게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소문이 퍼질 여지도 미리 차단해놓는다. 클라라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그, 그럴까? 하지만 걔는.. 그… 음… 그런 거 잘 신경 안 쓰는 애일지도…”
“아냐, 예니카.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민감한 고민을 친구들한테 멋대로 떠들고 다니는 건… 네 평판에도 좋진 않을 거야.”
“헉! 그건 클라라의 말이 맞네! 혹시 나한테 실망한 건 아니지, 클라라…?”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소녀다. 클라라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면서 평정심을 되찾는 작업을 한 번 더 진행해야 했다.
“괜, 찮아… 예니카…”
“응, 어쨌든 진지하게 상담해줘서 고마워. 나도 정학 기간 보고하러 이만 오필리스관에 돌아가야겠다.”
“으, 응… 나는 좀 앉아있다 갈게… 생각할 게 있어서…”
“응! 오랜만에 만나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징계기간 끝나면 또 보자, 클라라!”
그렇게 활기차게 인사하고, 예니카는 학생 식당을 떠났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클라라는 탁자 위에 얼굴을 박았다.
내가 해냈어, 아니스.
온 몸의 힘이 빠졌다. 클라라는 한동안 그 상태로 기운을 회복하고 있어야만 했다.
* [ Name : 에드 로스테일러 ]
성별 : 남 나이 : 17 학년 : 2 종족 : 인간 업적 : 없음 체 력 7 지 력 7 재 주 9 의 지 력 8 행 운 6 전투 능력 상세>> 마법 능력 상세>> 생활 능력 상세>> 연금 능력 상세>>
나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쇠톱과 망치, 대못 따위를 잔뜩 안은 채로 북쪽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손에 들어왔던 금화를 이용해 오두막을 만들 도구들을 좀 샀다. 밑 작업과 준비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다.
글라스칸 토벌전이 치러졌던 그 날. 단 하룻밤 만에 지력스탯이 2단계가 올라갔다.
몇 달 동안 마법 공부한답시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쥐꼬리만큼도 안 올라가던 능력치였는데, 그야말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대 발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령 이해와 정령 감응을 한 번에 10레벨을 찍어버리는 쾌거를 이루어냈으며, 정령 슬롯도 개방되어서 정령식의 사용을 꾀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데다가, 심지어 고위 바람 정령과의 계약 여지까지 생겼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고위 정령과 계약하는 건 능력치 상으로 무리지만, 어쨌든 북쪽 숲에 있는 메릴다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 마법 능력을 잘 가다듬으면 고위 바람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될 터다.
어디 그 뿐인가.
– ‘페니아 황녀님의 추천장은 확인했습니다. 글록트 재단 쪽에서 제공해줄 수 있는 상여 혜택은 이것저것 많은데요. 저희 쪽은 학생 의견을 최대한 배려해서….’
– ‘장학금.’
–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일단 혜택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어보시고…’
– ‘장학금.’
– ‘저희 재단은 학업 부분에 대한 지원, 생활동 시설 사용 시 우선 혜택, 학사 봉사 점수 가산점, 특히 상위 기숙사로의 입주 자격 등을 지원하기도…’
– ‘중립국.. 아니, 장학금.’
무슨 혜택을 뭐 어떻게 주든 간에 학적부에 이름을 올려놓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페니아 황녀는 내 공을 인정해 약속대로 학사 회의와 글록트 장학 재단 쪽에 추천장을 넣어준 모양이었다. 굴러들어온 떡을 안 받아 먹을 이유가 없으니, 이를 악물고 다음 학기 학비부터 면제 받았다.
이로써 단련 시간을 더 벌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재앙과도 같은 밤이 지나고 무대의 두 번째 막이 올랐다.
나는 품에 가득 안은 목공 도구들을 고쳐 안고, 북쪽 숲으로 나아갔다.
2막의 흐름도 이미 머리 안에 다 들어있다.
엘테 상회와 학사 간의 신경전, 현자의 봉서를 둘러싼 매입 전쟁 따위가 떠오른다.
2막의 재밌는 점은 시종일관 최종보스 분위기를 뿜어내는 ‘황금왕 엘테’가 페이크 보스라는 점이다. 엘테는 중후반부 그의 양녀 로르텔에게 뒤통수를 맞고 퇴장, 숨어 있던 진정한 보스 ‘탐구자 글래스트’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확 넘어가는 것이다.
1학년을 담당하는 선임 교수 글래스트. 쉽지 않은 난이도의 상대지만, 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테일리가 잡아야할 중간보스가 아직 한참 남았다. 2막에는 1막과는 달리 중간보스가 무려 셋이나 있다.
‘바람잡이 토테’, ‘메이드 장 엘리스’, ‘황금의 딸 로르텔’.
각 장과 사건이 진행되면서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꼽아보라면 로르텔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다.
히든 히로인으로서의 역할이야 나중 이야기고, 적어도 2막 시점에서의 로르텔은 정말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악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해와 타산 속에서 살며, 기회가 오면 채가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그런 탐욕에 물든 상인의 모습으로 사태를 조율하고 이익을 저울질하는 잔악한 악당의 역할. 급기야는 자기를 입양해서 이용해왔던 양아버지까지 역으로 이용해 제압해버리는 모습을 보이니, 어두운 현실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삶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어쨌든 글라스칸 토벌전을 통해 얻은 교훈은 있다. 이야기가 정사대로 잘 흘러가는지 어떤지는 신중하고 꾸준하게 판단해야 된다는 점이다.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것이니, 적어도 그 과정에서 내가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입는 일만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나는 내 인생 챙기기도 바쁜 사람이다.
“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오필리스관 근처를 지나가고 있자니 저 멀리 예니카가 보였다.
생각해보면 근신 기간이 끝날 때가 다 됐다. 정학 기간은 남아있을테지만,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을 테지.
그러고 보면 예니카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둔 것이 없다.
“흐음…”
이제와서 괜시리 친한 척을 하기도 좀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놓고 예니카에게는 거리를 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예니카는 모든 역할을 다 마무리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시나리오에 더 이상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으니, 그 비중은 선임 메이드 벨 마이아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세계에서 잘 살아가려거든, 나 자신을 단련하고, 좋은 학위를 얻고, 더 윤택한 생활환경을 마련하는 둥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허나, 많고 많은 자산 중에서 ‘인맥’이란 자산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특유의 힘이 있다.
생각해보면 예니카는 엘테 상회에서조차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빚을 지워두려 할 정도로 전도 유망한 인물이다. 실베니아를 졸업하고 학위까지 생기면 정말 뭐라도 되긴 될 인물인 것이다.
더군다나 시나리오 메인 무대에서도 이미 내려와 있는 인물이니, 이쯤 되면 슬슬 적극적으로 접점을 만들어놔도 괜찮은 거 아닐까?
괜히 마음 쓰이는 부분이 있다고 하면, 지금 에드 로스테일러란 인물에 대한 평가다. 메인 등장인물 중에서는 뭔가 나를 쓸 데 없이 고평가하는 인물도 좀 생긴 모양이고, 1학년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도 천하의 상놈에서 싸가지는 없는데 뭔가 있긴 있는 인물쯤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허나, 2학년들도 그렇게 생각해 줄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인지라… 예니카는 오늘도 내 험담을 잔뜩 듣고 왔을 것이다. 언제 나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예니카는 그런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느낌이 있어서… 대개는 호의적으로 대응해주는 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사 하고 좀 친하게 지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예니카정도 되는 인맥을 만들어놓을 기회가 그리 쉽게 오진 않을 텐데.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필리스관 쪽으로 힘없이 걸어가는 예니카를 향해 나아갔다.
“안녕, 예니카. 근신 끝났나 보네.”
그리 시원스럽게 인사를 먼저 건넸다.
갑작스럽게 인사를 받는 것은 예니카에게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어찌됐든 2학년생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우상이다.
발랄하게 인사를 받아주면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작별을 고한 뒤 본인의 용무를 보러 돌아갈 것이다. 일련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나는 예니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음! 어!”
그러나 예니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떡갈나무 지팡이를 꽉 안으면서 뒷걸음질을 좀 치더니.
“응, 에드! 응!”
뭔가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빙글빙글 동공을 돌려대고서는, 이내 뭔가 과부하가 온 것 같이 달아오른 표정을 하고서.
“나! 오필리스관에! 볼 일이 있네! 다음에 봐! 안녕!”
행여나 내가 뭔가 말이라도 더 걸까봐 무서운지 후다닥 도망쳐버린 것이다.
……
이젠 하다하다 희대의 성녀 예니카에게마저 손절을 당하는구나. 이건 이거대로 엄청난 업적이다.
과연, 소문이라는 게 무섭다. 그래도 이해는 한다.
아무리 심지가 굳어있는 소녀라 할지라도, 오랜 시간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문이나 풍문엔 휘둘릴 수밖에 없다. 군중의 힘이란 그토록 강력한 것이다.
촌스럽게 상처받거나 우울해 하진 않지만, 좋은 인맥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 날아가버린 건 아무래도 손실처럼 느껴지고 만다. 뭐 아쉬워한들 어쩌겠나.
나는 그리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는 날아가버린 1급 인맥 후보를 향해 묵념했다.
구질구질하게 굴진 않으마. 잘 먹고 잘 살아라, 예니카…
나는 오두막 건설용 자재들을 고쳐 쥐고, 내 갈길을 나아갔다. 어쨌든 기초적인 설계 작업도 끝났으니, 생산계 스킬들을 더 단련할 좋은 계기다.
모처럼 시간이 더 생겼으니… 단련, 또 단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