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81)
“나는….”
루시 메이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루시를 보고 적대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일단은 설명부터 해야 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어. 너희들이 아는 내가 아니야.”
물론, 이 한마디만으로 모든 사실을 납득하고 검을 내릴 리가 없다.
클레비어스는 이를 악물며 루시를 쳐다보았다. 당장 루시가 뱉은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투였다.
“너, 그게 무슨….”
―쿠웅.
그때였다.
폐허가 된 트릭스관 일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궁대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그 진원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화아아아악!
폭발음과 동시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거대한 크기의 맹수가 몸을 일으킨다. 후두둑 하고 쏟아지는 흙먼지 틈으로 보이는 그 몸은 웅장할 지경이었다.
“이런 미친! 저, 정령이 반응했어!”
“빨리 짐 다 챙겨!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더 많이 몰려들 거야!”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일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자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한 그 거대한 형상의 맹수는… 중위 불 정령 ‘벨탄’이다.
형체만 겨우 남은 트릭스관의 외벽을 부수면서, 커다랗게 포효한다.
그러나, 벨탄의 모습은 루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묘하게 달랐다. 검붉은 마력을 두르고 있는 데다가, 온몸에 기괴한 문양을 잔뜩 달고 있다.
광폭화 상태인 데다가 더불어, 강제로 부여된 강화 마법을 잔뜩 달고 있는 형상이다.
일반적인 중위 불 정령이 꺼낼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아니다.
명백히 강제적으로 폭주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는 그런 정령들의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
―콰아앙!
벨탄을 중심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그대로 사방으로 뻗어져 나간 불은 일대를 뒤덮었다. 클레비어스가 엘비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집어드는 그 순간이었다.
―화악!
피어오르는 루시의 마력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시 입장에서는, 우연히 맞딱트린 이 두사람이야말로 이 세계에 대한 유일한 단서다.
본디 중위 정령의 공격 정도는 막을 필요조차도 없다. 그러나 현재 루시는 마력을 온전히 다룰 수가 없는 상태다.
눈살을 찌푸리며 불 마법을 전부 흐트려 없애 버리자, 여전히 멀쩡하게 서 있는 벨탄의 모습이 드러난다. 위용 어린 그 모습엔, 인간을 향한 적의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수많은 정령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몰려 오는 것이 보인다.
하나 하나가… 광폭화 마법에 걸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여기서 루시는 직감하고 만다.
이 정도 숫자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아켄섬에 있다고 하면 그건 아마도――
“도주해야 해! 지하 수로의 비밀 도서관에 생존자들의 아지트가 있어!”
어찌됐든, 루시는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를 지켜 냈다.
적은 아니다. 그 사실이 파악되자마자, 엘비라는 재빨리 외쳤다.
“지금 따돌리지 않으면 정령들이 더 몰려들어서 감당이 안 될 거야!”
루시는 곁눈질로 엘비라와 클레비어스를 바라본 다음, 재빨리 일대를 마력으로 덮었다. 기초적인 수준의 은신 마법이었으나, 마력의 흔적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령들을 따돌리기 위해, 세 사람은 폐허가 된 트릭스관 사이를 가로질러서 뛰었다.
* * *
자세한 이야기는 아지트로 돌아가서 나누자.
그 말에 루시는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입장에서도 루시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의문은 일단 안전해지고 난 다음에 해소하는 게 맞았다.
한참을 달려서야 도달할 수 있었던 생활동.
원래는 언제나 활기차고 사람들로 가득했을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생활동도, 폐허가 된 건물들만 가득했다.
마치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멸망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광장 여기저기에 완전히 부패해서 해골만 남은 시체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보도는 다 박살나고, 군데군데 잡초가 피어 있었다.
그 중간 중간을 거대한 중위 정령들이 광폭화된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는 익숙한 모습으로 건물들 틈을 우회하며 정령들의 시선을 피해 나아갔다.
한때는 라플라스 베이커리였던 건물의 반파된 외벽을 타고 오른 클레비어스가, 엘비라의 손을 잡아 끌어서 올려 준다.
루시는 마력을 가볍게 튕겨서 덩달아 올라가서 따라가고, 그대로 외벽 바깥 쪽을 타서 나아가다 무너진 우물 근처를 낮은 자세로 지나간다.
그렇게 수많은 정령들이 우글거리는 생활동을 지나서 북쪽숲 초입에 들어서자, 거대한 지하수로 입구가 보인다.
지하수로 입구는 수많은 나무 덤불로 가려져 있었다. 그 거대한 입구를 일일이 이렇게 가리는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글래스트 교수와 추격전을 벌였던 그 지하수로가 펼쳐져 있다.
이대로 복잡한 지하수로 안으로 들어가서, 부서진 외벽 안으로 들어가면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 연구실이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에드 로스테일러가 생전에 연구실 삼아 쓰던 비밀 도서관이 나온다.
본래 세계의 루시가, 에드와 함께 글래스트의 불사조 반지를 가지러 왔던 곳이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곳은 이 아켄섬 내부의 폭주 정령들로부터 도망친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도서관 초입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학생들이 클레비어스를 보고 반응했다.
“서.. 선배님. 살아서 돌아오셨군요. 탐색 성과는 어떠셨… 허….”
“루… 루시… 메이릴…?!”
그러다가, 루시를 보고 모두 굳어 버린다.
클레비어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일단 비켜 달라는 의사를 표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학생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서는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래도 클레비어스는 이 아지트에서도 나름의 인정을 받는 위치인 듯했다.
그렇게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를 따라 도서관 내부로 진입한다.
루시는 주변을 살폈다. 도서관 내부 시설들은 이미 어디론가 치워져 있었고, 내부는 생존자들의 체류를 위한 시설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저기 피워진 모닥불과 천막들.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환자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도 보이고, 지병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 혹은 교직원이고, 생활동에서 지내던 상인들의 모습도 몇몇 보였다.
그들은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를 따라 내부로 진입하는 루시를 보더니, 멀리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저… 저길 봐….’
― ‘이… 이런 미친….’
― ‘뭐야, 무슨 일이야? 아니… 루시 메이릴이잖아….’
― ‘살아… 있었다고…? 분명… 루시 메이릴은 3년 전에….’
― ‘뭐라고? 루시 메이릴이 왔다고?’
― ‘희… 희대의 천재 마법사잖아…. 루시 메이릴이라면… 섬을 막고 있는 마법진을 부술 수 있는 거 아니야…?’
웅성거리는 인파들 사이로 묘하게 희망적인 분위기가 퍼져 나간다.
긴 시간 절망 속에서 겨우 버티던 인간들이, 새로운 빛을 발견한 그런 느낌이다.
루시 메이릴은 숨을 휙 몰아쉬며, 그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 뒤에는, 아지트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그쪽에서 들으면 될 거야. 아마 너도 구면일 테지만… 생각과는 많이 다를 거야.”
도서관 내부의 사서를 위한 방.
그곳은 개조 되어서 우두머리를 위한 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일까.
루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엘비라와 클레비어스를 지나쳐서 방문을 열었다.
끼익 대며 낡은 목재문이 열리고,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작은 회의용 탁자, 여기 저기에 세워진 칠판엔 섬 내부의 정보가 잔뜩 정리되어 있는 모습.
그리고 아지트에 모여 있는 구성원과, 남은 물자 따위가 적혀 있는 서류들 사이…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여성.
로브 모자를 휙 내려 쓰면서 고개를 든 그 익숙한 얼굴의 여성은… 루시 메이릴의 얼굴을 보고 잠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는….”
적갈색 머리칼 사이사이로 새치가 돋아 있었다. 고생한 흔적일까.
갑자기 살아서 나타난 루시 메이릴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랄 만하건만, 소녀는 잠시 숨을 머금은 것만으로 금세 평정을 되찾는다.
소녀는―― 아니, 로르텔 케헬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이고 냉철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설명을 좀 들어 볼까.”
에드 로스테일러 사망 후 3년.
모종의 이유로 지옥이 되어 버린 아켄섬을, 로르텔은 홀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 * *
“그래,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루시는 일단 로르텔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은 이쪽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에드 로스테일러가 죽지 않은 세계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 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묻고 싶겠지….”
로르텔은 노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자 무리를 이끌고 몇 년 씩이나 아지트를 책임졌을 것이다.
제 아무리 로르텔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부담이 잔뜩 쌓여 올 수밖에 없을 터.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선 모두 대답해 줄게.”
“……에드 로스테일러는….”
가장 먼저 핵심을 꿰는 그 질문에, 로르텔은 잠시간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에드 선배님은 3년 전에 죽었어. 성창룡 벨브로크를 토벌하다가….”
“성창룡한테… 죽은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로르텔은 싫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무기력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성창룡 벨브로크를 토벌하다가 크게 다친 틈을 타… 제국 황실의 신흥 린돈파 세력한테 음해를 당해서 처형됐어. 벨브로크로 인한 재앙의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거든.”
루시는 로르텔의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벨브로크를 잡다가 죽었다기에, 직접적으로 벨브로크의 공격에 의해 사망한 줄 알았건만….
“…그게… 무슨 소리야…?”
“린돈을 꼭두각시로 세운 제국 황실의 관료들은 로스테일러 가문을 치워 버릴 명분이 필요했던 거야. 벨브로크로 인한 재앙으로 제국 본토가 불타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넘긴 거지. 에드 선배님은 벨브로크가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
“참 웃기지? 벨브로크로 인해서 세계가 불타는 와중에도, 그런 시답잖은 권력 투쟁이나 해 대는 꼴이.”
로르텔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녀에게는 벌써 3년 전의 이야기일 터다.
상처가 아물만큼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완전히 그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다.
“…클로엘 황제가 가만히 있었어?”
“죽었어. 벨브로크가 강림하던 날에….”
“…페니아 황녀나… 셀라하 황녀….”
“아켄섬에 있었던 황족은 전부 죽었어.”
사실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
벨브로크는 손짓 한 번으로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 도서관이 꽉찰 만큼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다른 학년 수석들은….”
“루시.”
로르텔이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지는 로르텔의 말에 루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게 더 빠를거야.”
로르텔이 거쳐 왔던 지옥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실감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섬을 장악하고 있는 정령들은 뭐야…? 예니카 페일로버는…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로르텔은 한숨을 흘린 채, 허름한 소파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란 뜻이었다.
“…이미 예니카 선배님은… 제국 차원에서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야.”
루시가 소파 쪽으로 나아가서 앉자, 로르텔은 그대로 다시 책상에 걸터앉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루시가 궁금해할 이야기를 하나, 하나씩… 풀어 주기 시작한다.
* * *
성창룡 벨브로크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부활했다.
더 빨리 부활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빨랐다.
그래도 루시가 원래 알고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늦게 부활했다.
루시가 알고 있는 한, 성창룡 벨브로크가 아켄섬에 강림한 것은 크레스톨 대축제 기간 중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해수면을 뚫고 올라온 그 재앙의 성창룡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나 이곳 세계에서는 달랐다. 크레스톨 대축제 기간이 끝난 뒤로도 한참이 지나고, 학기가 끝날 무렵에나 부활한 것이다.
원래 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대처할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곳의 에드 로스테일러는 결국 성창룡 벨브로크를 막지 못했다.
어째서냐.
원래 세계의 에드와 이곳의 에드의 대처에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이곳의 에드는 성창룡을 막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로르텔의 설명을 들어 보면… 문제는 에드의 대처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로르텔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느껴지는 위화감. 무언가 중요한 고리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
――이곳 세계에서는… 대현자 실베니아의 개입이 없었다.
루시의 세계에선… 대현자 실베니아가 최종 전투에서 개입해 왔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성창룡 벨브로크의 봉인을 약화시켜서, 강제로 강림시킨 것 또한 실베니아다.
그렇기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교장 오벨이… 봉인을 미약하게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실베니아의 그런 부자연스러운 개입을 감지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시가 봤던 세계의 성창룡은… 바닷속에서 올라오는 봉인의 쇠사슬에 칭칭감긴 상태였다. 오벨이 끌어안고 있는 봉인의 파편 때문에, 성창룡은 온전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실베니아가 개입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봉인은 완전히 그 기한을 다해, ‘온전한 벨브로크’가 강림한 것이다.
봉인의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었던 벨브로크와 온전히 모든 힘을 다 드러낼 수 있었던 벨브로크. 그 차이는… 아마 막대할 것이다.
이쪽 세계의 벨브로크는 좀 더 뒤늦게 부활하긴 했으나… 애초에 원래 에드의 예상보다 더 빨리 부활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심지어 이곳은 강림하자마자 섬을 반으로 갈라 버리고, 온전한 힘을 다 펼쳐 내는 그 벨브로크다.
그 언젠가 무한한 시간의 반복 속에서 보았던 그 온전한 벨브로크의 힘. 이곳 세계에서는… 그 힘이 완전히 개화한 것이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기적적으로 그런 벨브로크에 대응해 냈다.
아직은 부족한 전력. 부족한 물자. 부족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희생을 딛고 일어서… 결국 검성 테일리를 벨브로크의 심장 속으로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학년 수석 다이크 엘펠란이 사망했고, 웨이드 캘러모어도 끔찍하게 최후를 맞이했으며, 교장 오벨도 시간을 끌다 사망했다.
클로엘 황제는 백성들을 지키다 죽었고, 셀라하 황녀는 그런 클로엘 황제를 지키다 사망했다.
페니아 황녀는 황제의 뜻을 품고 병사들을 지휘하다 마물족에 의해 사망했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상처투성이인 상태로 연인 엘카를 아지트로 데려오다 과다출혈로 사망.
성녀 클라리스 또한 벨브로크의 브레스가 섬을 훑고 지나갈 때 휩쓸려서 사망.
테일리가 벨브로크의 체내로 침투할 수 있게 틈을 벌리는 과정에서… 루시 메이릴은 벨브로크의 브레스에 정통으로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생존자들을 지키다 비늘의 폭풍에 맞아 빈사 상태.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 본인도… 빈사 상태 직전까지 몰려서 의식을 잃고 만다.
그러나, 테일리는 성창룡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다.
말했다시피, 너무 일찍 부활한 성창룡이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테일리의 스펙은 성창룡을 일격사 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일격사는 아니더라도… 치명타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다.
검성 테일리는 벨브로크의 반격에 오른팔을 잃고 말았지만… 적어도 벨브로크에게 다시 회생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긴 했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벨브로크는 그대로 날개를 펼쳐서, 아켄섬을 떠나 내륙 쪽으로 도주했다.
빈사 상태의 벨브로크다. 어딘가에 처박혀 몸을 회복하기 전에, 추격해서 섬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켄섬 내부에 있던 전력들은 거의 다 희생당했고, 살아남은 자들도 빈사 상태였다. 외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학사 차원에서 클로엘 황실 쪽에 도움을 요청했을 땐… 그들은 믿을 수 없는 대처를 했다.
―인간은 어리석다.
권력욕에 눈이 팔린 자들은… 세계의 위기 앞에서도 제 밥그릇을 챙기고, 정치싸움 이권싸움에 달려든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란 것일까.
아켄섬의 모든 전력이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 린돈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든 황실 관료들은, 아켄섬으로 찾아와 로스테일러 가문 소속의 후계자들을 모두 처형해 버린다.
클로엘 황제가 죽었고, 그 후계자도 거의 다 사망해 버린… 혼란의 시국.
린돈 황태자를 꼭두각시로 앞세워 권력을 잡으려거든, 재앙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로스테일러 가문을 지금 제압해 두어야만 한다. 마침 에드의 뒷배들도 모두 성창룡의 재앙에 의해 무력화된 상태다.
에드 로스테일러도, 타냐 로스테일러도 모두 빈사 상태인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지금이라면 저항할 수 없다. 오로지 지금뿐이다.
그렇기에… 얼토당토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 빈사 상태의 에드 로스테일러를 아켄섬에서 바로 처형해 버린다.
그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벨브로크는 거의 빈사 상태다.
제국 본토에서 난동을 부리며 몸을 숨길 장소를 찾으러 다니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황실 관료들은 자기들끼리 토벌대를 조직해서 다 죽어 가는 그 괴물을 마무리 지어 버리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거란 환상에 빠진다. 제 아무리 재앙의 성창룡이라도, 죽기 직전의 상태라면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경쟁자 없이 이 제국의 실권을 모두 움켜쥘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피칠갑이 된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린돈파 황실 관료들에 의해 삶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같은 날.
아켄섬에 왔던 린돈파 황실 관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진실을 알고 이성을 잃은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에 의해.
“예니카 선배님은, 더 이상 루시 네가 알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야.”
최고위 어둠 정령은 인간의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어둠을 좀먹고 파고든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잃은 예니카 페일로버의 마음속 어둠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어둠보다도 더 큰 광기가 예니카 페일로버의 가슴속을 좀먹는다.
새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칼과 붉게 물든 눈동자. 폭주하는 마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광기 어린 예니카는… 아켄섬 오른산의 꼭대기에 있는 ‘갈음의 제단’에서… 테일리가 베어 낸 벨브로크의 심장 조각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무한히 마력이 샘솟는 그 성창룡의 심장 조각은, 아직도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으로 쿵쿵 뛰어오르고 있었다.
벨브로크의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마력과 글라스칸의 광폭화 마력으로 인해 폭주하는 정령 감응에 이르기까지.
이 섬이 통째로 예니카 페일로버의 권역 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언젠가, 글라스칸 토벌전 때보다도 훨씬 더 막대해진 규모의 마법진.
에드 로스테일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를 죽음으로 보답했다.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제국은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배신의 칼날을 꽂아 넣었고.
언제나 제 본분을 다했던 사내는, 그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런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세상의 위기 앞에서도 권력에 눈이 멀어 버린 제국의 실권층들을 모두 증오한다.
글라스칸의 광기에 휩싸여, 세상을 향한 증오를 온몸으로 표출한다.
적어도… 이 섬만큼은….
에드 로스테일러가 사랑했던, 그 캠프가 남아 있는… 이 아켄섬만큼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내를 위한 성역으로 삼는다.
에드가 잠든 이 섬은, 에드의 안식을 위한 묘지다. 이 거대한 열도를 모두 떠나간 에드를 위한 안식처로 삼는다.
그 누구도 사내의 안식을 방해하게 만들 순 없다.
눈에 보이는 방해꾼은 모두 제거한다.
에드를 구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속죄와 더불어, 끝끝내 그를 버린 세상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
그렇게 예니카는… 황실 관료들을 모두 학살한 학살범으로.
아켄 열도를 통째로 집어 삼켜 버린 악마로.
그리고, 실의에 빠진 한명의 소녀로.
아켄섬 오른산 꼭대기의 제단에서. 생전의 에드 로스테일러가 쓰던 큼지막한 지팡이를 꽉 끌어안은 채로…
폭주하는 정령들의 여왕으로, 군림해 온 것이다.
소녀는 갈음의 제단에서, 늘 그렇듯 지팡이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희끗하게 물들어 버린 머리칼과 더불어,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 그곳엔 여전히 세상을 향한 증오만이 불타고 있다.
‘장의사’ 예니카 페일로버.
현상 수배 전단지에 쓰여진 이름이었다. 바닷물에 떠내려 온 걸 생존자가 챙겨온 것이다.
초상화에 그려진 예니카의 불그스름한 눈빛이 섬뜩하다.
그 아래에 쓰여진 포상금은, 가히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루시는 그 이름을 내려다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말았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부재는, 그녀에게 있어서 세계의 종말과 같았던 것이다.
“루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겠지. 하지만….”
로르텔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네가 우리의 마지막 구세주야. 이성을 잃은 예니카 선배님을 어떻게든 하려면, 일단 무력으로 어떻게든 제압해야 해. 지금은 아예 대화가 통하질 않아.”
루시는… 뭐라 대답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전성기 때의 루시라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루시는… 너무나도 힘에 제약이 많았다.
완전히 광기에 물들어 버린 예니카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있잖아.”
가만히 로르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상황 설명엔… 너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네….”
로르텔 케헬른.
그녀 또한, 에드의 죽음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인간은 아니다.
생존자들의 대표로, 이 아지트를 책임지고 있지만….
그녀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죽음에 정말 아무런 영향이 없었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차가운 이성의 화신 같은 인물이지만….
적어도 에드가 연관되어 있을 때는 절대로 이성을 유지하는 법이 없는 그녀다.
예니카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는 인물. 그 사실을 루시 또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에.
루시의 질문은, 로르텔의 폐부를 찌른다.
그러나, 로르텔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 언젠가, 에드의 죽음에 대한 헛소문이 퍼진 적이 있다. 학생회장 선거전 때의 이야기다. 루시 본인도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 때, 에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로르텔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당시의 로르텔을 직접 본 직스 에펠슈타인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로르텔은 절대로 광기 같은 것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이성을 잃는 일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내부에서부터. 잔잔하게… 돌아 버린다.
겉보기로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번씩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 광기는… 대화하는 상대를 흠칫하게 만든다. 얼마나 그 속내가 망가져 있는지, 순식간에 실감이 되어 버리는 때가 온다.
차라리 겉보기에 척 드러나는 예니카라면, 위험을 감지할 수라도 있다.
그러나, 로르텔은… 그런 예니카와는 완전히 다른 기질의 소유자였다.
“린돈파 관료들은 거의 다 사망했지만… 아예 잔류 세력이 없는 건 아니거든….”
고개를 숙인 로르텔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 톤은 여전하지만….
“―전부 찢어 죽여 버리려면, 일단 이 섬을 나가야지.”
말하는 내용은… 완전히 망가져 버린 내면을 대변하고 있었다.
“감찰부 알베톤, 기사단 서기 벨로르크, 블로루엔 후작, 재상 펠로시, 황태자 린돈, 집사장 델로스, 서기장 에일튼….”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하나하나 다 외우기도 힘들 정도의 숫자이건만, 대체 몇 번이나 그 이름들을 되뇌어 왔던 것일까.
그 많은 이름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암기해 버렸다는 사실부터가, 소름이 흐른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찢어 죽여 버려야 할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언제까지 이 섬에 갇혀 있어야겠니?”
“…너….”
“난 말야 루시, 에드 선배님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그 인간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껴. 구역질이 나.”
이윽고 고개를 든 로르텔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시원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청량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난 바쁘니까, 빨리 이 섬을 나가야 해. 할 일이 많아.”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던 로르텔이었으나….
그녀도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부재.
그것은… 예니카 페일로버와 로르텔 케헬른을 복수귀로 만들어 놓았다.
그야말로, 끔찍한 세계였다.
* * *
“준비됐어. 젊은이.”
밤늦은 시간이었다.
글록트의 오두막 앞에는, 다시 작동 준비를 마친 ‘세계 관측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에드는 성위 마력을 끌어모으며, 다시금 관측기를 작동시키려 했다.
어떻게 루시가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렸는지 그 명확한 원리는 아직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 봐야만 했다.
피어오르는 마력은, 이윽고 다시 주변을 물들여 가기 시작했다.
“젊은이. 조심해.”
그 때, 젤란이 에드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듯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간섭은… 성립할 수가 없는 일이야. 마력은 상호작용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지?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간섭이 일어났다는 것은….”
에드가 고개를 돌려 젤란 쪽을 돌아보았다. 젤란은 얼른 이어서 말했다.
“…그쪽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이쪽 세계를 관측했다는 이야기야.”
“…예?”
젤란은 왜소한 체구를 일으켜서, 에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관측했어….”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그 사실이 믿기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나비가 날아든다.
바람에 휘날리듯, 이리저리 날개짓을 하던 나비는… 폐허가 된 생활동의 광장 한구석에 내려와 앉는다.
허황된 풍경을 쫓 듯,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비를 향해 손을 뻗고 마는 것이 사람이란 생물이었다.
그렇게 바람을 따라 노니던 나비가, 폐허가 된 생활동 광장의 분수대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소녀의 방향으로 향한다.
사이즈가 널널하게 남아도는 교복은 이미 여기저기 해어지고 구겨져 있다.
뒤집어쓰고 있는 마녀 모자도 완전히 낡고 해어져있다.
소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쓰고 있는 마녀 모자의 챙이 너무 넓은 탓이다.
그런 소녀의 손가락 끝에 잠시간 앉아 있던 나비가, 날갯짓을 반복해 하늘 위로 날아간다.
힘찬 날갯짓이 반복되며, 머나먼 곳으로… 천천히 떠나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