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83)
오른산으로 가기 위해선 바다를 건너야만 한다.
예전 아켄섬은 하나의 커다란 섬이었지만, 지금은 큼지막한 두 개의 선과 자그마한 여러 바위섬으로 갈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선착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공간계 마법을 활용하거나 비행 마법을 활용해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지만, 둘 다 마력 소모가 엄청났다.
설령 마력 소모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아켄섬 일대의 영공은 모두 예니카 페일로버가 다루는 정령들의 권역이다. 엄폐물 하나 없는 바다의 상공을 가로질러 가는 건 날 죽여 달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루시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날아서 이동해야 하는 구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그동안 나랑 엘비라가 보조할게. 다만, 북쪽 섬으로 넘어간 뒤로는 완전히 혼자서 행동해야 할 거야.”
출구를 앞에 둔 클레비어스는 루시를 향해 그리 이야기했다.
“북쪽해안까지 가는 길에는 생존자 중에서 전투력이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널 호위할 거야. 그 전까지는 최대한 마력을 아껴 두도록 해.”
클레비어스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도, 무서워서 주변 눈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어깨에 묻어난 책임감이, 그를 어엿한 한 명의 전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하수로 밖으로 나가는 출구 앞.
이곳에는, 생존자 중에서 추려 온 전투원들과 클레비어스, 엘비라, 그리고 로르텔이 나와 있었다.
“나는 못 따라가.”
로르텔은 그렇게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이곳에 남아서 남은 생존자 무리를 지휘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혼 도서관은 지금 이 아켄섬에 남은 생존자들의 마지막 보루다.
이곳 마저 정령들에게 발각당하면, 이제 정말 이 섬에 남은 생명체는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여기서 작별 인사야. 결과가 좋든 나쁘든.”
“…….”
“만나서 반가웠어, 루시.”
끝끝내 로르텔은, 루시가 알고 있는 에드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게 맞다는 듯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철혈의 여상이라는 평가에 걸맞은 모습이지만, 오히려 그 침착함이 주박처럼 로르텔의 정신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때때로 비탄과 절망에 빠져서 하소연하고, 한탄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건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갖은 시련 속에서 지나치게 단련이 되어 굳은살이 배기게 되면… 힘을 푸는 방법조차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로르텔, 너는….”
“난 살아남을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복수심이든, 단순한 삶에 대한 열망이든.
“그러고 보면, 너는 모르겠구나. 에드 선배님은 말야, 세상을 뜨기 전에 옥중에서 서신으로 유언을 남겼어. 주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라도 하듯이 말이야.”
“…….”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만, 결론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이야기였어.”
분명 예니카에게도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아마 비슷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로르텔에게 들은 설명에 의하면 이곳의 루시는 에드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니… 루시에게는 따로 유언을 남겼을 리는 없을 터.
“나는 그런 에드 선배님의 뜻에 동의해.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
“물론, 지금 상황이 썩 좋지는 않지만… 어쨌든 열심히 버티면 최소한 3년은 더 버텨 볼 수 있어. 그 정도 물자는 있어.”
사람들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상황이 나아질 기색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로르텔은 삶에 대한 열망을 절대로 내려놓지 않는다.
“그냥, 그 이야기를 꼭 해 두고 싶었어. 난 잘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야.”
로르텔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시는 지긋이 눈을 감은 채로, 잠시간 가만히 있다가 뒤를 돌았다.
지하 수로를 나가면, 정령들이 날뛰고 있는 아켄섬이다.
일단 북쪽 숲을 가로질러서 해안가로 나간 다음, 비행마법을 통해 오른산 쪽까지 나아간다.
거기서 오른산 꼭대기까지 도달해서, 예니카를 뚫고, 갈음의 제단에서 티르칼락스의 유해를 이용해 성위 마력을 끌어내서 루시를 수색하고 있을 에드에게로 손을 뻗는다.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지만, 루시는 망설이지 않았다.
조용히 바깥으로 나가는 루시와 호위대를 보며, 지하수로에 남은 생존자들은 조용히 기도 했다.
부디, 이 모든 재앙이 끝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북쪽 숲은 정령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야. 어지간해선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게 좋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가는 게 더 위험할거야.”
북쪽 숲은 그 권역이 너무 넓어서 돌아가려고 하면 너무 동선이 길어진다. 차라리 최단 거리로 가로질러서 가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북쪽 해안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마력을 아껴.”
엘비라와 더불어서 생존자 무리의 전투 대원은 모두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몇 년씩이나 생존 생활을 반복해 왔는데,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는 벨브로크의 심장을 쥐고 있는 예니카에게서 무한히 마력을 공급받고 있는 정령들이다.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반드시 제압당할 터다.
수로에서 빠져나와서 북쪽 숲을 가로질러서 달려나가며, 일행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최대한 정령들을 자극하지 않아야만 한다.
―사아악.
최단 거리로 북쪽 숲을 가로지르는 루트.
학창시절, 루시도 자주 오갔던 길이라 눈에 충분히 익어있었다. 그러나 을씨년스럽게 늘어서 있는 식생이 알고 있는 풍경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세월의 흔적은 숲의 풍경도 미묘하게 바꿔 놓았다.
최전열에 클레비어스가 달려 나가면서 주변을 살피고, 그 뒤를 따라 루시와 엘비라, 그 외 열댓 명 정도의 전투원들이 숲을 따라 이동하는 형태.
한 명 한 명의 일행들이 모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루시는 그 심정을 구구절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인 양 다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일행들 사이에서는 섬을 돌아다니고 있는 정령들의 존재가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된 듯했다.
그리고, 그 경계가 마냥 뜬구름 잡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은 금방 증명되었다.
―화악!
―카아아아아아아악!
기괴한 형상으로 비틀린 수십의 정령이 하늘을 뒤덮는다.
감히 정령들의 본산과도 같은 북쪽 숲을 가로지르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분노에 일그러진 비명을 질렀다.
예니카와 함께 숲을 뛰놀던 정령들은, 기분 나쁜 숨을 흘리고 불길한 안광을 빛내며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투 준비해!”
엘비라가 지휘하며 소리를 지르자, 전투원들은 모두 자기 장비들을 꺼내 들며 표정을 구겼다.
거대한 두더지 형태를 한 불의 정령이 화염을 뿜어내자, 일대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푸르스름한 익룡 형태의 정령들이 땅에 착지하며 전투원 몇을 큼지막한 발로 낚아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아아아아악!”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며 전투원 하나가 상공으로 납치당하지만, 다른 전투원은 절망하는 기색조차도 없다.
이미, 여러 번 동료를 잃어 본 자의 표정이었다. 루시는 재빨리 손끝에 마력을 모으려고 했지만, 엘비라는 그런 루시의 팔목을 낚아챘다.
“말했잖아. 넌 마력을 아껴야 해.”
“…….”
동료 하나가 방금 익룡에게 잡혀 상공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발톱에 할퀴어져 출혈사하거나, 아니면 낙사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엘비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루시의 개입을 막았다.
현재 생존자 무리에게 있어서 루시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해줄지도 모르는 유일한 희망이다. 최대한 루시의 힘을 아껴 둔 채로 오른산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이 일행들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절대 망각해선 안 된다.
―콰앙!
최전열에서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폭발에 의한 소리가 아니다. 놀랍게도 검격에 의한 소리였다.
피의 흐름에 취한 클레비어스의 검격은 거대한 포탄과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번 한 번의 검격이 일대에 거대한 흔적을 남길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
“후욱, 후우….”
클레비어스의 걸쭉한 숨소리가 숲의 흙바닥에 가라앉았다. 자기 어깨를 스스로 찌른 클레비어스의 몸에서 피가 흐른다.
루시 메이릴은 완전히 혈검술에 취해버린 클레비어스와 정면으로 맞붙어 본 적이 있다.
당연히 루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그 폭발적인 위력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클레비어스는… 그때에 비해서 훨씬 더 능숙하게 혈검술을 다루고 있었다. 혈기에 취해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일도, 마주하는 모든 생명을 절단해 버리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기를 이겨 내는 것 자체는 쉽지 않은 일이다.
클레비어스는 어렵사리 이성을 움켜쥐고서, 어깨에서 다시금 검을 뽑아낸다. 한줄기 선혈이 튀고,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온 세상 가득한 정령들이 보인다.
목숨을 걸고 극한까지 혈검술을 발현해 낸 클레비어스는 고위 정령과도 일대일로 맞붙을 수 있는 신체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순수한 물량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자신의 피를 제물로 삼아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니만큼,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가면 결국 스스로 자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 혈검술의 최대단점이다.
그리고 물량을 위시로한 소모전에 있어서는, 예니카 페일로버를 이길 수 없다.
“클레비어스는 오래 버텨 봐야 5분이야.”
누구보다도 클레비어스의 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엘비라다.
이 시점에서 클레비어스가 혈검술을 발현해 낸 것이 가지는 의미를 대번에 눈치챈다.
“루시, 넌 여기서 전투를 해선 안 돼. 클레비어스가 막는 동안, 우리는 뛰어야 해.”
루시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비라를 잠시간 쳐다보았다. 덩달아서 마른침을 삼키거나 식은땀을 흘릴 성격은 아니다.
그래도, 사태의 심각성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콰아아앙!
피의 마력이 담긴 검격이 한 줄기 하늘을 갈랐다.
수십 마리의 정령들이 시체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려오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정령들이 피어올라 북쪽 숲의 하늘을 채운다.
엘비라는 그대로 루시의 손목을 잡고 북쪽 숲 안쪽으로 뛰었다.
뚫려 있는 길이 아닌, 풀숲이 가득 차 있는 숲 한가운 데를 가로지르는 방향이었다. 몇몇 일행들이 따라붙으려다가 말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엘비라가 루시는 따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대원들이 할 일은, 루시가 북쪽섬으로 향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시선을 끄는 것 밖엔 없다.
그렇게 루시는 한참 동안 엘비라와 함께 숲을 가로질러서 달렸다.
달리고 달리면서 살핀 북쪽 숲의 광경은, 루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역시 많이 달랐다.
북쪽 숲의 외곽 숲길은 완전히 불타서,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풍경이 되어 있었다.
중앙 호수에 있는 메릴다의 수호목 또한,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북쪽으로 더 달리고 달리다 보면… 드디어 익숙한 그 풍경이 나온다.
“…….”
오두막, 캠프파이어, 그리고 목재 창고.
그 앞으로 허름하게 세워져 있는… 목재 쉼터.
이 캠프에서 생존 활동을 시작한 한 사내가, 가장 먼저 만들어 낸 목공품.
그리고, 한때 루시가 가장 좋아하던 낮잠 명소.
그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저 허름한 캠프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루시가 그렇게 캠프 쪽으로 시선을 뺏긴 순간이었다.
“저 캠프는…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아직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캠프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면서, 엘비라는 다시금 루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장 강한 정령들이 상시 보호하고 있는 성역 중의 성역이야. 저 안으로 잘못 침범했다가 목숨을 잃은 생존자들이 두 자릿수가 넘어.”
“…….”
“차라리 나을 수도 있어. 저기만 피해서 돌아가면, 나머지 구간은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정령들밖에 없거든.”
풀숲을 계속해서 가로지르며, 엘비라는 이를 악물고 이야기했다.
“잘 들어, 루시. 잃은 사람이 많은 시대야.”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다. 루시가 가슴에 새기고 살아온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생존자 무리에 합류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소중한 연인, 친구, 가족… 뭐가 됐든 잃은 사람들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고.”
“…운이?”
“그래. 나는 클레비어스를 잃지 않았거든.”
클레비어스 본인이 이곳에 없기 때문일까.
엘비라는 가감 없이 본인의 감정을 이야기해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야. 하지만, 정작 클레비어스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어. 걔는 쓸데없이 남 눈치를 많이 봐서, 꼭 생존자를 다 살려야겠다는 기묘한 의무감 같은 게 있거든.”
올려다본 북쪽 숲 상공에는, 검격을 휘두르며 정령들 틈바구니를 뛰어다니는 검귀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출혈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
“이번 일로 인해 클레비어스를 잃게 되면, 나도 로르텔이나 다름 없게 될 거야. 난… 그런 슬픔과 비탄에 빠지는 건 절대 사양이야.”
로르텔 본인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못 할 말이다.
그러나, 루시에게 상황의 진정성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이만한 말이 없다.
루시는… 엘비라가 클레비어스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클레비어스를 잃기 싫어. 그러니까… 부디 힘내 줘…. 나도, 기댈 사람이 너밖에 없어.”
“모든 일이 잘 풀릴거라고 백 프로 확신할 순 없어.”
“알아. 하지만, 말했듯이 희망을 걸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
엘비라는 숲 사이를 뛰다 말고, 우뚝 멈춰 서서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 또한 가만히 멈춰 서서 엘비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숲을 뛰느라 지친 탓에, 한동안 거친 호흡 소리만 오갔다.
“곧 숲 출구야. 절벽지대가 나오면, 거기서는 네가 스스로 오른산 쪽으로 넘어가야만 해. 상공을 비행하는 동안은 내가 보조해 줄게. 잠깐 동안은 정령들의 접근을 막을 순 있을 거야.”
“너희들, 일 마무리하고 다시 영혼 도서관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어?”
“…해 봐야지.”
엘비라는 팔을 걷어붙이고, 어렵사리 웃었다. 억지로 지어낸 것 치고는 꽤나 자신감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지간한 정령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어. 아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숲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지간한 정령 정도는 막아 낼 수 있다.
그렇게 말한 엘비라의 말도 허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부터 꽤나 실력 있는 편이었고, 이런 극한 상황에서 몇 년씩이나 단련된 덕분에 전투 능력도 꽤 출중해졌다.
혈검술을 사용하고 있는 클레비어스만큼은 아닐지라도, 엘비라 정도의 전력이라면 어중이 떠중이 수십을 모아 놓는 것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예외가 더 가득한 법이다.
―우우우우웅.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몇 번이고 그 소리를 들어 보았던 루시는 알 수 있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상대다. 그 사실을 학사의 모두가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건. 학사 전체를 뒤덮은 최고위 정령의 그 위용을 모두가 확인했었으니까.
엘비라와 클레비어스가 트릭스관을 탐사하다가 들킨 탓일까.
아니면 어렴풋이나마 루시의 존재를 예니카가 눈치챘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그 거대한 정령의 모습이… 북쪽 숲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절벽 지대 너머의 풍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함선에서부터 나오는 뱃고동 소리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령의 울음소리다.
광기에 잡아먹혀서, 광폭화 마법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거대한 최고위 정령의 울음소리다.
최고위 물 정령 ‘프리데’는… 수천의 정령 군세를 이끌고 나타나는 군단장과도 같은 존재다.
―화아아악.
―촤아아아아아아아악!
바다에서부터 그 거대한 몸집을 끌어올리자, 거대한 파도가 절벽지대 일대를 덮친다.
거대한 고래의 형상은 역시 루시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군데 군데 기묘한 광폭화 마법의 문양들이 잔뜩 새겨져 있고, 눈은 섬뜩하고 붉은 안광으로 덮여 있다.
불길한 검붉은색 마력의 기운이 일대를 뒤덮고, 프리데와 함께 등장한 수천 마리의 비행 정령들이 오른산 일대를 향해 날아오른다.
일대를 뒤덮는 파도를, 루시가 얼른 마력을 일으켜서 막아 냈다. 덩달아 휩쓸려 온 거대한 암초가 방어 마법진을 덮쳤지만,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었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재앙이다. 최고위 정령이란 그런 존재였다.
* * *
“루시!”
파도가 몰아치는 충격 속에서, 엘비라가 외쳤다.
“완전히 현현하기 전에 넘어가야 돼! 저 최고위 정령이 일대를 장악하면, 우린 아무것도 못해!”
왜 지금 시점에서 프리데가 현현되었는지는 모른다.
이 아켄섬을 성역으로 남겨 놓기를 바란 예니카는, 이런 불필요한 충격으로 일대를 훼손하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었다.
분노에 차 테오르피스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오른산 일대가 화산재로 덮여 버렸다.
그런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가! 네 마력을 감지하기 어렵게 만들어 볼 테니까!”
엘비라는 그렇게 외쳤다. 아마 이곳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마공학 용품과 시약을 이용해 프리데의 시선을 끌어 볼 심산인 듯 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던가.
루시는 잠시간 엘비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비라는 이빨을 꽉 깨물고 외쳤다.
“걱정 마, 네가 그렇게 죽고 못살던 귀족 나리가 했던 말. 나도 꽤 동감하는 편이야.”
“…….”
“나는 살아남을 거야.”
이 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숨을 붙이고 있는 자들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로 점철된 자들뿐이었다.
엘비라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최고위 정령 프리데는 아무리 벨브로크의 심장을 쥐고 있는 예니카라 할지라도 그리 쉽게 소환할 수는 없다.
그 과정이 완전히 마무리 되기 전에 섬을 넘어가야만 한다.
루시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인 채 비행 마법을 몸에 감쌌다.
중위 마법을 열댓 번만 써도 마력이 부족한 상태다. 비행 마법 같은 고급 마법을 오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루시는 최대한 마력을 끌어내서, 바다의 표면에 최대한 붙은 채로 저공비행했다.
바람에 옷깃이 휘날리고, 모자의 챙도 펄럭거렸다.
모자를 꽉 눌러쓰며 북쪽 섬으로 넘어가는 동안 엘비라가 있는 절벽지대 쪽에서 거대한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로 인해 일대의 정령들이 모두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몇몇 하위 정령들이 재빠르게 저공 비행 하는 루시를 확인했지만, 루시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대로 원소 마법을 날려 몇몇 정령을 제압하며, 이윽고 반대쪽 섬의 해안 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콰가가가각!
급하게 날아오느라 제대로 힘을 제어를 못 해, 모래사장 바닥을 몇 번 굴렀다.
루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몸을 일으켜서, 모래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반쯤 초토화되어 있는 오른산을 올려다 본다. 온갖 광폭화된 정령들이 산 주변을 배회하며 지키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지만, 루시는 한숨을 휙 흘리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전부 떨쳐 버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내 몸을 감싸고, 오른산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우우웅.
세기말, 그 자체라고 봐도 좋을 풍경이었다.
오른산을 오르다 보면, 아켄 섬이 전경이 얼추 보인다.
―콰앙! 콰광!
―콰가가가각!
정령들을 제압하며 산을 뛰어올라가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 저 멀찍이 보이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끔찍하다.
북쪽 숲 언저리에서 날뛰던 검귀의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숲의 한가운데에서, 피 칠갑이 되어 쓰러진 채… 끊임없이 몰려오는 정령들의 무리를 올려다보는 클레비어스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절벽 지대를 가득 채우던 그 광휘의 마법도 더 이상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홀로 절벽 끝에 서서, 프리데의 그 불길한 안광과 마주했을 연금술사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심지어 정령들의 무리는… 지하수로 입구 언저리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생존자 무리를 이끌고, 글래스트 교수가 남겨 놓은 연구시설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로르텔의 뒷모습도… 충분히 상상되었다.
끔찍한 세계다.
이런 세계의 존재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래할 수 있는 세계였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부재가 어떤 의미였는지.
늘 일상처럼 곁에 있었던 그가.
무릎 위에 올라가 치근덕거리면 한숨을 푹 흘리며 루시의 머리를 꾹꾹 누르듯 쓰다듬어 주는 그의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루시는 어렵지 않게 실감하고 만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보고 싶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다시금 그를 만나게 되면, 체면치레 따위는 하지 않고 품에 뛰어들 듯이 안겨, 자기가 어떤 세상을 보고 왔는지.
내 삶에 그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대의 부재가 얼마나 큰 공허처럼 다가왔는지. 낯 부끄러운 말들일지언정 구구절절 설명하고만 싶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그대의 삶은 가시밭길로 점철되어 있었고, 삶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을 시련이 수십 수백 번은 더 넘게 찾아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살아 있어 주었다.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 루시라는 공허한 소녀에게 삶의 의미로서 남아 주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에드 본인에게 있어서는 그저 호흡하듯 당연히 행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허나 루시 메이릴이라는 한 소녀에게 있어서는, 그 자체로 얼마나 큰 구원이며 희망이었는지… 에드 본인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그렇기에, 루시는 그저 짧은 그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오른 산을 뛰어올라 가며, 계속해서 그런 생각만이 들었다.
다시금 에드를 만난다면, 그대에게 꼭 전하리라 결심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그런 네가 보고 싶었어.
―콰앙! 화악!
허억 허억 숨을 내쉬며, 루시는 오른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른다.
그렇게, 루시는 기어이 오른산의 꼭대기에 도달하고 만다.
신입생들의 반배정 시험 때 보았던 유적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내부 깊숙이 들어가면… 거대한 크기의 비석과 함께 ‘갈음의 제단’이 보인다.
큼지막한 크기의 갈음의 제단.
그곳엔, 에드의 죽음을 기리는 한 장의사가… 공허한 밤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