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3)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3)
“내일부터 2학기인가.”
직스 에펠슈타인은 방에서 홀로 단련하다가 문득 시간이 꽤 흘렀음을 자각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장대비가 내리치는 창밖을 보고 있으니 영 기운이 솟질 않는다. 며칠 간 계속된 우중충한 날씨 탓에 하루 일과의 시작과도 같은 조깅도 못했고, 야외에서 마력 단련을 할 여건도 안 나왔다.
방학을 틈타 최대한 단련을 해두려던 계획에도 차질이 좀 생겼다.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여러 기본기를 다져두려 했건만, 아직도 한참 모자란 느낌이다.
글래스트 교수가 진행하는 A반 커리큘럼은 영 요령이 없는 직스에게는 꽤 버거웠다. 뭘 시키든 압도적인 마력량으로 해결해버리는 루시는 논외로 치더라도, 로르텔의 섬세한 마력 운용과 요령 좋게 과제를 해결하는 순발력은 보고 배워야겠다 싶었다.
실전 전투 능력이야 직스가 앞서겠지만, 그런 문명 생활 속에서 필요한 요령과 솜씨는 로르텔에게 밀리는 편이었다.
“괜히 감정에 휩쓸리는 일도 최대한 없애야겠지…”
직스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인 분노에 휩쓸려서 토테를 두들겨 팬 행동에, 그의 동반자 엘카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엘카가 직스에게 화를 내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그 등쌀에 밀려서 토테에게 가 사과까지 했던 직스였지만, 역시 그 감정적인 기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음?”
문득 비 내리는 정원 한 구석에 익숙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빗줄기 사이를 헤치며 오필리스관으로 들어오고 있는 그는, 확실히 북쪽 숲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고 있는 별종 중의 별종이다.
“쫓겨난 입장 아니셨나? 억지로 오필리스관에 들어오면 메이드가 쫓아낼 텐데…”
괜한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봐 걱정되지만,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를 인간은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싶었다.
직스는 다시 몸을 이리저리 꺾으며, 창가에서 시선을 뗐다.
*
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오필리스관의 1층 메인 홀. 평소엔 그 입구가 굳게 잠겨있다.
기숙사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드나들 때마다, 그 때 입구를 담당하는 메이드가 간단히 신원 체크를 하고 들여보내준다.
오필리스관 입사생들에게만 지급되는 적색 브로치를 매고 있지 않으면 아예 신원 확인 자체가 불가능한데다가, 메이드들은 53명의 기숙사생들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속일 수도 없다.
“에드님, 맞으시죠? 메이드장님께 이야기는 전달 받았습니다.”
본래라면 나도 굳게 닫힌 입구 앞에 비를 맞고 서있어야 하는 입장이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오필리스관의 입구가 열렸다.
‘침구류 세탁 담당 켈리’
왜소한 몸집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위 메이드 복장. 그녀의 언니인 셰니와 함께, 오필리스관 점거 이벤트의 중간 보스를 담당하고 있는 자였다.
충성심 높은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이 이런 점거 사태 따위에 가담할 리가 없다. 그러나 메이드장 엘리스에 의해 거둬들여 키워진 셰니와 켈리는 다르다. 그녀들은 엘리스에 의해 설득되어, 그녀의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전위를 담당하는 셰니와 꽤나 숙련도 높은 기초 마법을 구사하며 복도를 통째로 장악하는 켈리. 3층에서 적으로 만나게 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화력 담당인 켈리만 잘 제압하면 생각보다 쉽게 돌파할 수 있다.
뭐 이런 건 테일리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네요. 곧 있으면 교대거든요.”
어쨌든 지금 시간대는 켈리가 입구를 관리하고 있는 시간대였다. 그녀는 미리 지시 받은 대로 나를 오필리스관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곧 있으면 다른 메이드랑 교대하고 제 일을 보러 갈 거에요. 셀라라는 아이인데, 신입 메이드라 굳이 무력을 쓰지 않아도 제압하실 수 있을 거에요. 무기 같은 것도 소지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런 애가 정문을 담당해도 되는 거야?”
“신원 확인하고 입장 시켜드리는 게 그리 어려운 업무는 아니잖아요? 비상사태 때는 메이드 장에게 직통으로 상황을 알리는 마도구를 소지하고 있지만, 오늘 메이드장은 부름에 답하지 않을 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 내부에서 숨어 있다가, 시간이 되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메이드를 제치고 문을 활짝 열어버린다. 그럼 열등생들이 들이닥쳐서 윗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 때 즈음해서 메이드 장 엘리스가 오필리스관 보호 법진을 발동시켜 각 방의 입구를 모두 봉쇄시켜버릴테니, 나는 1층을 돌아다니면서 그 마법식이 잘 발동되었는지 체크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별 문제 없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1층 홀로 돌아와서 테일리를 기다린다.
정사대로라면 이번 이벤트의 돌파 멤버는 테일리, 아일라, 엘비라, 클레비어스다.
클레비어스는 시나리오 상 2층에서 만나 합류하게 되니까, 나머지 셋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메이드들은?”
한산한 홀을 보고 켈리에게 물었다.
“필수 인력을 빼고서는 대부분 회의실에 모여 있어요. 메이드장이 중요 안건이 있다고 집결 시켜 놓았죠.”
거기에 몰아넣어 놓고 입구를 봉쇄해버릴 생각이다. 역시 가장 윗대가리가 매수되어 있으니 계획은 일사천리다.
“그리고 미리 말씀하셨던 물건도 준비해놓았는데요.”
켈리가 낑낑대며 입구 근처에 가져다 놨던 대야 하나를 가져왔다. 안에는 걸쭉한 액체가 가득 차있었다.
“오, 고맙게 됐네.”
“대충 구석에 놔두면 되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홀을 한 번 올려다봤다.
호화로운 건물이니만큼 입구부터가 휘황찬란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메인 홀은 대리석 바닥이 깔끔하게 뻗어있고, 층고도 높아서 아직도 야외에 있는 기분이다.
으리으리한 샹들리에 하나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도 자그마한 샹들리에가 달을 장식하는 별들처럼 주변을 수놓고 있다.
홀의 중앙까지 걸어와 주변을 둘러보면 휑한 느낌마저도 든다. 벽을 따라 도열해 있는 장식장들과 더불어서 복도로 이어지는 석재 문은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벽이랑 바닥이 싹 다 대리석이네.”
확실히 고급스러운 곳이다. 테일리 입장에서 시나리오 진행할 때 이미 와봤던 곳이지만, 직접 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나는 구석의 장식장 문을 열어서 준비해왔던 물건 몇 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홀 안에 있는 이런저런 물건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충 가늠해보았다.
정사에서도 1층 보스전은 별 거 없었다. 시간만 좀 끌릴 뿐.
핵심은 테일리가 2층 보스 전을 진행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 뒤로는 아마 잘 진행될 것이다.
2층 보스는 ‘음침한 클레비어스’다.
아직 제대로 일이 커지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지레 겁먹어서 벽을 부수고 나온 클레비어스를 추격하는 이벤트다. 자기는 도망칠 거라면서 난리를 피우는 클레비어스를 제압한 뒤, 파티에 합류시켜서 데리고 올라가는 시나리오였지.
그러니, 클레비어스가 벽을 부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시간을 끌면 끝이다. 그 타이밍을 부드럽게 연결시켜주면 된다.
나는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1막 보스 전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다, 나비효과라는 놈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기에… 세상 모든 변수를 다 통제해내겠다는 결심은 결국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1층 보스전이 잘 마무리 되면 일단 장미 정원으로 나가서, 혹시 모를 비상 전력인 예니카와 함께 끝까지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다. 혹시라도 다른 이변이 나타나면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이번 기회에 테일리의 스펙도 좀 확인해 볼 수 있겠군.”
혹시라도 클리어 스펙에 못 미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특히, 2막 최종 보스 ‘탐구자 글래스트’는 지독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상대다. 그가 구사하는 성위 마법과 저주식들은 온몸을 송곳으로 찔러대는 듯한 고통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만들어 아예 마음을 부숴버린다.
스탯과 정신력, 모두 충분히 잘 단련되어 있지 않으면 상대하기 힘들다.
나는 준비해온 물건들을 장식장에 전부 집어넣었는지 잘 확인하고, 그 문을 탁 닫았다.
*
이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메인 홀 장식장 사이에 숨어있자니, 8시 좀 넘어서 신입 메이드와 켈리가 정문 담당을 교대했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바깥에서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는 소리도 덩달아 벽을 타고 넘어왔다.
– ‘더 이상 이런 대우는 못 참겠다!’
– ‘여기는 배움의 땅이다! 적어도 성적에 있어서의 평등은 보장해줘라!’
– ‘우리의 목소리에 대답하라!’
열등생과 일반학생들의 외침이 정문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잠긴 오필리스관 앞에 모여들어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최전선에 있는 사람은 열등생 대표 윌레인이다.
짧게 깎은 연노란색 머리에 뿔테안경, 두르고 있는 갈회색 로브는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필리스관은 실베니아 특권층 학생들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곳이다. 학생들은 그 상징 앞에 모여 앉아서 공분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끝났어야 할 계획이다. 본인들의 불만을 모여 앉아 표출하고, 특권층 학생들에게도 그 억울함을 피력하는 선에서 마무리 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오필리스관의 문은 굳게 닫혀있기 때문이다.
“으, 으아아! 이게 뭐야! 메이드장님께 보고해야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신입 메이드가 덜덜 떨며 지급 받은 마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당황하는 틈을 타 다시 홀로 나와서, 등 뒤에서 급습해 스카프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우, 으악! 뭐, 뭐에요! 누구에요!”
나는 그대로 눈을 가린 메이드를 번쩍 들어 올려서 어깨에 얹어놓고, 스카프를 풀지 못하도록 손목을 한데모아 꽉 잡아 쥐었다. 그 뒤, 한 손으로 정문의 자물쇠를 해제 한 뒤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꽤나 큰 오필리스관의 문이 끼익 대며 열렸다.
– ‘….오오오?!’
– ‘뭐, 뭐야!’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학생들의 무리가 당황했으나, – ‘오필리스관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자!’
대표 윌레인이 소리를 지르자 군중은 얼떨결에 오필리스관의 복도로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 ‘관리실은 4층이다! 4층을 점거하고 성명문을 발표하자!’
–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자!’
– ‘최소한의 대우!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의 대우만을 원한다!’
– ‘가자!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자!’
나는 메이드를 제압한 채 우루루 몰려들어오는 학생들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너, 너는… 에드 로스테일러?”
선두에 선 3학년 윌레인이 나를 보고 반응했다. 과연, 3학년들도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
“로르텔이 매수했다는 게 바로 너였나…!”
“네. 제가 1층을 확인하고 지키는 파수꾼 담당입니다.”
“네가 어째서…”
나는 준비해왔던 대사를 술술술 뱉었다.
“윌레인 선배님이 평소부터 외쳐왔던 말들엔 저도 마음 깊이 동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간 오필리스관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생활했지만… 쫓겨나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특권 속에 살아왔는지 통감했습니다.”
“에드… 로스테일러….!”
“저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윌레인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다 옳았다는 것을…! 다만, 쫓겨나기 전까지는 특권층에 속해있었던 제가 이런 말을 해봐야 와닿을 리가 없으니, 행동으로 직접 증명한 겁니다!”
그 말에 윌레인은 감복한 듯이 손을 떨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온갖 특권 속에서 살다가, 이제야 그 아늑한 요람 밖으로 튕겨져 나온 인간이다. 그런 인간일수록 자기가 누리던 권리가 얼마나 컸는지 더 통감하는 것이다.
“그래! 너는 정말… 우리들의 정당한 권리 반환 요구에 큰 기여를 했다! 네가 이렇게 올바른 인간인지도 모르고, 그간 소문만 듣고 함부로 판단했어…!”
“아닙니다, 저는 막돼먹은 인간이었습니다, 윌레인 선배님. 저는 윌레인 선배의 말에 감복해서 제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 모든 건 다 윌레인 선배님의 공덕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윌레인을 재촉했다.
“어서 윗층으로 올라가십시오. 윌레인 선배님! 4층의 관리실을 장악하고, 성명문을 발표하는 겁니다!”
“그, 그래! 잘 부탁한다!”
윌레인은 이 사건이 끝나고 모든 책임을 덤터기 쓰는 입장이다.
학생들을 선동하고, 교칙 위반을 종용한 총 책임자 취급을 받아 중징계를 받게 된다.
이만한 숫자의 학생들에게 전부 중징계를 때렸다간 학교가 돌아가질 않으니, 그 본보기 삼아 매를 맞는 것이다.
단순히 윌레인의 점거 행동에 가담하기만 한 인간들은 그 선동과 유혹에 넘어갔을 뿐이고, 직접적으로 파괴 행동을 일삼은 것도 아니니 윌레인에 비해 나름 경징계로 끝나게 된다. 괜시리 징계를 받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긴 하지만, 금화 20닢과, 정사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감당 못할 리스크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윌레인의 말에 감동해서 행동했소! 윌레인의 뜻을 따랐소! 하고 외쳐대는 것이 핵심이다. 나에게 오는 책임 소재를 최대한 흐지부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윌레인도 오필리스관을 반파시킬 마음 따위는 없다.
그냥 점거하기만 하고, 정식으로 성명문을 발표하는 선에서 평화적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겠지만… 세상 일이 다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거… 미안하게 됐지만… 어차피 내가 뭘 하든 간에 중징계를 당할 입장이니… 나 한 명 정도는 업혀가도 괜찮겠지…?
“어서 가십시오, 윌레인 선배님!”
“그래, 잊지 않으마! 에드! 넌 최고의 후배야…!”
미안하게 됐다!!!
굳세어라…! 윌레인…!
어두운 복도 사이로 은은한 마법진의 빛이 가득하다. 각 객실의 입구마다 새겨진 보호 법진이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 ‘밖은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거 이대로 가만히 방 안에 있어도 되는 거 맞아?’
– ‘거기 누구 없어요? 문이 안 열리는데요? 이거… 부숴도 되나? 비싸보이는데…’
– ‘창문으로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오는 게 보이던데, 이게 무슨 일이람 대체!’
– ‘기, 기다리면 복구 되겠지? 별 대단한 일 아니겠지?’
복도를 가로지르다보면 객실 안에서 혼란에 빠진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층은 대부분 3학년생들이다. 방 하나 하나를 체크하며 혹시 누락된 마법진이 없나 꼼꼼히 확인했다. 정사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면 당연히 누락된 마법진은 하나도 없을 터. 그래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대략 15분 정도 들여서 확인을 끝마치고, 다시 1층 홀로 나와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활짝 열린 정문 밖으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신입 메이드는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 상급자를 찾아 떠난 거겠지만, 애석하게도 보고할만한 상급자들은 죄다 4층 회의실에 갇혀있다.
항상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던 대리석 바닥은 진흙 묻은 신발을 신고 우루루 지나간 탓에 완전히 더러워져 있고, 장식장이나 진열대 몇 개는 아예 쓰러져 있었다.
“어머나, 생각보다 더 화려하게 시작했네요.”
그리고 장대비를 뚫고 들어와 옷을 탁탁 털고 있는 소녀가 있다.
“역시 에드 선배님. 믿고 맡기길 잘했어요.”
빙그레 웃으면서 젖은 로브를 털고, 그 모자를 내리자 새하얀 피부가 더 도드라진다.
“으엑- 양말까지 다 젖었네. 이래서 비 오는 날을 싫어해요, 저는.”
“밖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구나, 로르텔.”
“저까지 방 안에 갇혀버려서야 상황이 잘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이 안되잖아요. 학생들이 잘 모여들었는지도 밖에서 확인해야하고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비가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으에엑. 안까지 완전히 다 젖었네.”
로르텔은 여우같이 웃으며 로브를 벗어서 털었다. 그 안에 입고 있던 평상복, 새하얀 원피스 스커트까지 싹 다 젖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풀어헤쳐진 적갈색 머리칼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려서 말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물기를 다 털어낸 로브를 말아들었다.
“학사 직원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금방 진압 되어버릴테니, 그 전까지 빨리 일을 진행시켜야겠죠.”
“그래, 고생해라.”
로르텔은 빙그레 웃고, 옷을 잘 갈무리해서 홀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마 이대로 5층까지 올라가서 엘리스와 이후 계획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오필리스관 방호 마법을 폭주시키고, 열등생 대표 윌레인에게 그 마법진의 주도권을 넘겨주어서 사태를 격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겠지.
그렇게 오필리스관에 덕지덕지 발라진 온갖 방호 마법의 보호를 받는 ‘열등생 대표 윌레인’이, 4층의 보스가 된다. 끝도 없이 폭주하는 마법진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윌레인을 재빨리 제압하는 시나리오다.
“에드 선배님. 좀 뜬금 없는 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로르텔은 홀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내게 말을 건넸다. 이어지는 질문은 의외였다.
“선배님은, 사람 죽여 본 적 있어요?”
뒤돌아선 로르텔의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하지만, 그 낌새는 지금 날씨처럼 우중충하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로르텔은 아하하 하고 웃으면서 내 쪽으로 몸을 다시 돌린다. 흠뻑 젖은 적갈색 머리칼이 한데 모여서 어깨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없는데.”
“저도 없어요. 아하하.”
그리고 로르텔은 자백하듯이 말을 이었다.
“근데… 비슷한 건 많이 해봤어요.”
로르텔의 과거사는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엘테 상회에서 그녀가 저질러온 온갖 암행과 협잡, 술수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를 파멸로 이끄는 행위들이었을 테다.
그건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의 인생을 끝장낸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다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로르텔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일단 살아남아야 했거든요.”
가시밭길 같았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보니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스럽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처음 한 두 번이면 금세 없어진다.
문득, ‘거상’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받아들고 나니, 그 과정에서 짓밟은 인간이 한 트럭이다.
기회만 생기면 자기 심장에 비수를 박아 넣을 인간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그렇게까지 되고 나니, 그제서야 나는 잘못된 삶을 산 게 아닐까 반문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남의 삶을 짓밟았고,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먼저 남의 뒤통수를 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며 살아왔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에드 선배님. 선배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아봤자, 이미 몸에 묻은 때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 선행을 베풀어봤자 그것은 위선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이고, 평생을 바쳐 쌓아올린 부를 전부 포기할 정도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다.
애초에 이제와선 뒤돌아 갈수도 없다.
상업의 길에서 벗어나기엔 온갖 상회와 귀족가, 유력자들의 추한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았다. 로르텔의 이름에 이용가치가 없어지는 순간, 그 말로는 정해져있다.
결국, 선로 위의 폭주 기관차처럼 종착역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위선을 떨기엔 너무 멀리 왔다.
상인으로, 악인으로, 흑막으로. 처음 발을 들였던 늪에 조금씩 잡아먹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온 몸이 어둠속으로 침전하고 있다.
누구에게 구해달라고 말할 텐가, 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동정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테다.
그렇기에, 홀리듯 동족을 찾아 헤맨다.
“선배님이라면, 그런 사람을 동정하겠어요?”
이미 머리끝까지 시궁창에 박혀서, 긍정 받을 수도 동정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감정은 선인과 악인을 불문하고 찾아온다.
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거든, 자기와 같이 진흙탕 속을 구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함께 이 늪의 밑바닥까지 침전해줄 사람을 찾아내야만 겨우 구원받을 수 있다.
“아니.”
물론, 그 사람이 나는 아니다.
“네 선택에는 네가 책임져야지, 로르텔.”
그 말에 로르텔은 잠시 무표정하게 있다가, 겨우 미소를 흘렸다.
“선배님 말이 맞아요.”
로르텔 케헬른은 평생토록 이성과 합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소녀다.
나는 그 사실을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의 모든 시나리오가 끝이 나는 그 날까지, 단 한 번도 이 소녀는 이성을 잃거나 무언가에 집착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울리지도 않게, 괜한 소리를 했네요. 미안해요. 우훗.”
이내 그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되찾은 로르텔이, 감상적인 모습을 얼른 지워버린다.
“저는 그럼, 제 할 일을 하러 가봐야겠네요. 시간이 많진 않으니까.”
그리 말하고 로르텔은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충 널부러져있던 의자를 아무거나 하나 세워서 앉았다.
이제부터는 가만히 앉아, 테일리가 들이닥치기를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2막 시점에서의 테일리, 아일라, 엘비라가 어느 정도 스탯이고, 어떤 스킬을 구사할 줄 알며, 어떤 전략으로 싸우는지는 훤히 알고 있다.
절대적인 머릿수와 스탯의 차이만으로는 나를 쉽게 뚫어낼 수는 없을 터다. 완전히 제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적당히 시간 좀 끌다가 져주면, 테일리는 얼른 2층으로 올라가버리겠지.
그래도 치고 박고 싸우는 과정에서 몇 대 정도 맞거나 상처가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
뭐… 필요한 희생이다…
*
“이런 늦은 밤에 웬 마차람…?”
오필리스관에서 조금 떨어진 장미 정원, 정자 한구석에 앉아 예니카는 대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미 정원 앞으로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마차가 지나갔다. 그렇게 호화로운 마차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차 위에 그려져 있던 황금 모양의 왕관이 인상적이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행차하는 걸까.
– ‘갑자기 처리해야할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미안해.’
에드가 남겨놓은 쪽지를 고이 접어서 품속에 넣은 채로, 아리따운 장미들 사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생겼다.
“따, 따로 준비한 게 있는 걸까…?”
장미 정원의 정자는 매일 같이 봤던 곳이다. 오필리스관 정문을 나와서 교수동을 향해 걷다 보면 항상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늦은 밤이라서 오필리스관의 전경이 다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빗줄기 사이로 흐릿하게 그 모습이 보인다.
뭔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수많은 학생들이 오필리스관으로 가는 듯하더니, 방금은 엄청나게 커다란 마차도 오필리스관 방향으로 사라졌다.
예니카는 호기심이 동했지만, 굳이 움직이진 않았다. 괜히 움직였다가 에드와 엇갈릴까 싶어서.
지난 3일 간 잠도 설쳐가면서 에드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뭘까하고 깊이 고민했다.
혹시나? 그건가? 아닐까… 너무 과민반응인가. 아니면 굳이 여기로 불러낼 이유가 있나? 그런 혼잣말을 하루종일 하고 있으니, 절친들을 걱정시키고 말았다.
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메릴다를 통해 들려오는 에드의 동향은 계속 귀에 담고 만다.
애초에 에드가 생활하는 캠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메릴다가 이야기하기를, 루시 뿐만 아니라 페니아 황녀, 벨 마이아, 직스, 심지어는 로르텔마저도 에드의 캠프에서 나오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메릴다라고 해서 24시간 밀착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니, 그 외에도 추가적으로 들락거리는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이 여학우라는 사실은 예니카에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이었으나… 거기다 대고 뭐라 참견할 입장은 또 못 된다.
그렇다면, 참견해도 될 입장이란 건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또 머리에 피가 몰리고 만다.
“괘, 괜히 하고 나왔나. 아, 안 어울리나?”
간만에 고향집에서 보내준 주황색 감꽃 머리핀을 하고 나왔다. 괜시리 머리도 한 번 더 빗질하고, 옷매무새도 구김 없이 하고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축제 때 쓰던 코스모스 핀이 더 예뻤던 것 같기도 하다. 입고 있는 옷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밤이라 어두운 탓에 눈에 띄질 않으니 차라리 밝은 색이 더 나을 것 같다.
“지, 지금이라도 바꿔 끼우고 올까…?”
에드와 엇갈릴까봐 학생들의 인파나 커다란 마차 행렬에도 꼼짝 않고 앉아있었던 예니카다. 이제 와서 그깟 머리핀 하나 때문에 얼른 방에 갔다 오는 것도 웃길 일이다.
그러나 예니카는 손거울을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빠, 빨리 갔다오면 괜찮을지도.”
일단 결심했으면 시간 낭비 말고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터.
예니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로브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빗속으로 다시 나왔다.
애써 말끔히 정리한 머리칼이 로브 자락에 쓸려 망가질까봐 고민 됐지만, 그럼에도 예니카는 얼른 달렸다.
머리가 좀 헝클어지는 건, 방에서 얼른 다시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
“정말로 오필리스관에 진입하는 게 맞는 판단일까?”
“내가 방에 널어놓은 약초들이 다 얼마짜리인 줄 알아?! 테일리!”
“그래도, 학사 직원들이 직접 대처하는 걸 기다리는 게 나을텐데…”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오필리스관 정문 앞에서 테일리와 아일라, 엘비라는 티격태격 대고 있었다.
“약초들을 제 때 수거해서 보존 마법을 걸지 않으면 성질이 변한단 말이야! 그 섬세함의 차이가 실험 결과를 좌우하는 건데! 네가 그 심오함을 아니, 테일리?”
엘비라는 볼을 부풀리면서 테일리를 닦달했다.
엘비라는 학사 몰래 해안가 절벽에 만든 비밀 실험실에서 시약 실험을 하고 있었기에 오필리스관 사태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방에 두고 온 약초가 너무 신경쓰여서, 결국 대충 보이는 사람들을 다 잡아끌고 와서 오필리스관에 진입하는 걸 도와달라고 땡깡을 놓은 것이다.
테일리와 아일라는 그 희생양이었다.
“그래봤자 열등생 무리들이니까 우리 셋이서 다 제압할 수 있어! 그 행동대장격인 윌레인만 두들겨 패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 엘비라는 성큼성큼 오필리스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일라… 쟤 좀 말려봐…! 혼자서 오필리스관으로 들어가려 하잖아!”
“그, 그냥 우리는 모른체 하면 안될까? 엘비라는 연금부 수석이니까, 자기 몸 간수는 잘 하겠지.”
“위험한 건 엘비라가 아니라 열등생 애들이야! 엘비라는 눈 돌아가면 아무 시약이나 닥치는대로 뿌려대잖아!”
그 말에 아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완전히 성격이 파탄난 엘비라는 수틀리면 정말로 열등생들을 상대로 온갖 폭발시약을 던져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일리의 말이 맞다. 위험한 건 엘비라가 아니라, 열등생들이다.
테일리와 아일라는 허겁지겁 엘비라를 따라 오필리스관 정문 쪽으로 나아갔다.
“엘비라! 멈춰! 멈추라니까!”
“잔말 말고 따라들어와! 4층에 있는 내 방까지 같이 뚫고 들어가줘야겠어!”
“그럼… 네 방까지만 가면 되는 거지? 그럼 아무것도 안하는 거지?”
“그렇지. 나는 약초들만 멀쩡하면 되니까.”
테일리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싸매며 한숨을 흘렸다.
“알았어. 그럼 엘비라 네 방까지만 가자.”
“가는 길에 막는 놈들이 있으면 다 뚫어내는거야, 알았지? 테일리.”
“제발 사람들 다치게만 하지 말자, 엘비라.”
테일리는 그리 말하고 아일라에게 눈빛을 보냈다. 테일리의 동반자인 아일라는 덩달아 한숨을 푹 쉬고, 둘에게 따라 붙었다.
이윽고 오필리스관 앞까지 도달하고, 엘비라가 재빨리 정문을 걷어찼다. 쾅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넓디 넓은 1층 메인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홀의 중앙, 덩그러니 놓인 목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가 있다. 셋 모두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빗소리가 가득한 오필리스관 1층 홀,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2막 3장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정사와는 다른 1층 보스.
파문 당한 몰락 귀족, 에드.
그 언젠가 타칸을 잡을 때처럼, 팔을 걷어 붙이고 손을 모아쥔 채 앉아,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