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4)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4)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오필리스관의 넓은 메인 홀에는 그 빗줄기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간다.
테일리 일행이 들어오자 정문은 닫히고, 쏴아아 하고 직접적으로 홀을 비집고 들어오던 폭우의 소리는, 툭툭하고 외벽을 때리는 소리로 대체 된다.
시원스럽게 한 번 내리친 벼락이 홀의 전경을 잠깐 밝혀준다. 중앙에 앉아 있는 에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일리 일행을 맞이해줬다.
“에드… 로스테일러…”
이제는 파문당해서 자칭할 수조차 없는 로스테일러의 가문명이지만, 테일리에게는 여전히 웬수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다.
“당신이.. 왜 오필리스관에?”
테일리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이제는 반년 가까이 지난 일이라 감정의 골 자체는 제법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테일리에게 있어 에드 로스테일러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 사실은 아일라와 엘비라 또한 잘 알고 있다.
“…”
엘비라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해냈다.
언제나 깔끔했던 오필리스관의 대리석 바닥은 진흙이 잔뜩 묻은 발자국으로 가득하고,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장식장은 이미 제 위치를 지키고 있지 않다.
학생들의 무리가 지나쳐간 흔적, 그리고 그 위에 가만히 앉아 길목을 지키고 있는 남자 하나.
“아하하. 뭐랄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구나. 재밌네. 예상 못했어.”
엘비라는 깔깔대며 웃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미안하게 됐지만.”
그제서야, 홀 중앙에 앉아있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이 뒤로는 못 지나간다.”
그 이유에 대해 묻고자 한다면, 당연히 대답해 줄 이유가 없다. 그럴 기색도 마음도 없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입을 앙다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에드의 모습을 보면 충분하리만치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엘비라가 할 말은 뻔했다.
“아하하, 재밌네. 내가 지나가겠다고 하면, 막을 수는 있고?”
엘비라 에니스턴은 실베니아 아카데미 연금부의 1학년 수석이다.
사실 연금부 학생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마법식의 구조를 해석하거나, 물질의 성질과 근원을 탐구하고, 여러 약초와 마법 시약들의 효능을 분석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전투 상황에서 연금부 학생의 전력을 무시해도 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온갖 마법시약을 잔뜩 소지하고 있고, 마도구를 잔뜩 두르고 있으며, 전장 전체의 상황을 휘어잡는 연금부 학생들은… 전투 상황에서 변수를 창출해내고 힘의 차이를 뒤집어내는 조커 카드다.
통제 불가능한 익살꾸러기들이 넘쳐나는 연금부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이들을 관리하고 있는 교수들이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다. 괴짜가 많다는 소문이 무성한 마법부 학생들보다도 더 악질이다.
엘비라 에니스턴은 바로 그 연금부에서 최고의 독종으로 평가받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직접적인 근접 전투 능력과 마법 능력은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적어도 기초 마법 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2학년생에게 밀릴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엘비라는 깔깔대며 웃었다.
“다치기 싫으면 적당히 비키는 게 좋아.”
이미 테일리는 완전히 에드를 적대한 표정이다. 이번 사태와 별 접점도 없을 에드가 이런 곳에 앉아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열등생들의 평화적인 성명 시위 따위로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진 않다. 그런 직감이 일행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황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에드의 기초 마법 숙련도 자체는 제법 뛰어난 수준이라고 그 언젠가 직스가 말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 절대적인 화력의 부족과 머릿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
3 대 1이다.
이미 제 한몫을 하기 시작하는 검사 하나, 1학년 평균치 수준의 마법 정도는 구사할 줄 아는 마법사 하나, 그리고 학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연금술사 하나.
홀 중앙에서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테일리가 검을 뽑아들었다.
“의도가 뭐죠, 에드 로스테일러. 이 위층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말해요, 당장.”
에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일행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입을 열게 만드는 수밖에!”
그 말이 전투의 시작을 알린다.
테일리가 땅을 박차며, 아일라가 자세를 잡고 마나를 모은다. 엘비라도 온갖 시약이 가득한 연금용품 가방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에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 콰당탕!
의자가 바닥을 구르고, 에드의 손에 마력이 모여든다. 엘비라의 눈에는 그 마력의 흐름과 기조가 대번에 파악된다. 기초 바람 마법 ‘바람 칼날’이다. 그 대상은 누구인가.
테일리, 아일라, 엘비라.
마법사인 에드가 셋 중에서 가장 의식해야할 상대는 바로 테일리다.
마법사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거리 유지다. 끊임없이 마력을 모아 마법을 영창할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마법사 대 마법사의 전투에서는 그 거리 유지의 중요성이 덜 강조되지만, 근접 전투에 능한 전사가 끼어있을 경우에는 바로 그 부분이 핵심이 된다.
검사에게 거리를 내준 순간 마법사의 승산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니, 에드가 가장 먼저 제압하려고 시도할 대상은 접근을 시도하는 테일리 맥로어다.
그 사이에 엘비라와 아일라의 지원사격이 에드를 덮치게 되면… 너무나도 간단하게 토벌대의 승리다.
– ‘휘익!’
그러나 바람 칼날이 향한 곳은 일행 방향이 아닌… 하늘이었다.
심리의 맹점. 그건 바로 천장에 있었다.
으리으리하고 커다란 메인 홀의 샹들리에를 지지하고 있던 연결쇠가 단 칼에 잘려나간다. 끼이익 대며 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거대한 샹들리에가 메인 홀 중앙에 쳐박힌다.
– ‘쾅!!’
– ‘후두둑.’
물론, 그 정도는 테일리도 충분히 반응해낸다.
앞으로 진격하던 몸의 기세를, 다시 역으로 땅을 박차서 상쇄 시킨다. 잠시 후 테일리가 가려던 자리에 메인 샹들리에가 내다 꽂히고, 흙먼지가 피어올라 홀의 시야를 가린다.
“꺄악!”
“아일라! 괜찮아?!”
“괜찮아, 테일리! 잠깐 충격 때문에 넘어졌을 뿐이야!”
굉음이 홀을 덮치고 지나가니, 오필리스관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방에 갇힌 학생들은 슬슬 불안에 떨기 시작할 것이다. 정말로 이 비싼 건물을 부숴서라도 탈출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겠지.
그 공포에 가장 먼저 굴복하는 것이 클레비어스다. 아직까지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지만.
“엘비라! 너는!”
“나는 신경 쓰지…!”
– ‘화악’
뒤로 올려 묶은 엘비라의 감귤빛 머리칼이 휘날린다. 몇 가닥인가가 바람 칼날에 베어져 나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그 칼날의 목표는 엘비라의 머리칼이 아닌, 그녀가 두르고 있던 연금술 용품 가방이다. 가죽은 찢겨져나가고, 안에 들어있던 온갖 마법 시약들이 우수수 쏟아져 흘러나온다.
-카가강! 캉!
커다란 샹들리에를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려 꽂아버리는 행위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봐야 몇 번 투닥대다가 제압해버릴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필리스관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들은 그 자체로 어딘가 절대 훼손해서는 안될 듯한 분위기를 내뿜지 않나. 저 비싸 보이는 샹들리에를 망설임 없이 부숴버리는 파격적인 행위라니. 어떻게 책임을 질 셈인가.
엘비라에게는 그런 에드의 행동이 무모해보였지만, 에드 로스테일러 입장에선 그리 과감할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면 이 오필리스관은 아예 반파될 예정이니, 그 때가서 메인 홀이 좀 망가져 있는 건 누구도 신경 쓰지도 않을뿐더러 책임 소재를 물으려 들지도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니, 저 으리으리한 샹들리에조차도 전투에서 변수를 창출해내는 도구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물론 엘비라의 입장에선,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일행의 진입을 막아내려하는 에드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낄 뿐이다.
‘어쨌든 저 쪽도… 진심이란 뜻이지? 위층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긴 하구나.’
엘비라는 바닥에 널부러진 시약들 쪽으로 다시 시야를 돌렸다.
온갖 하급 시약들이 가득 떨어져 있지만, 무엇하나 깨지지 않았다. 엘비라의 강화식이 부여된 시약 용기들이다. 엘비라 스스로가 강화식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그 강력한 강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엘비라가 그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 화르륵!
에드를 중심으로 뻗어져 나온 불의 기둥이 엘비라와 시약 사이를 갈라놓는다.
일자로 뻗어 나온 그 불의 벽은 기초 마법 ‘발화’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다만, 그 규모나 열기 자체는 보통이 아니다. 같은 발화 마법을 극단적으로 반복 숙달한 흔적이다.
에드의 발화 마법으로 인한 불의 벽은, 메인 홀을 마치 케이크를 자르듯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놓았다.
두 겹, 세 겹, 네 겹으로 이루어진 불의 벽. 내다꽂힌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구현된 화염이 메인 홀의 공간을 각각의 방처럼 분리해놓는다.
‘이건… 안 좋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전장 구축.
에드 로스테일러의 판단은 빠르고도 정확하다.
토벌대의 핵심 전력은 엘비라다. 그러나 연금부 학생들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마도구나 시약 따위에 의존하지 않으면 직접적인 전투력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일은 엘비라의 시약과 마도구들을 사용 불가 상태로 만드는 것.
가득찬 연금 용품 가방이라 할지라도, 내용물을 쏟아버리고 불의 벽을 세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엘비라의 전력은 반감된다.
보통 연금부 학생들은 혹시 몰라서 반지 형태나 목걸이 형태를 한 비상용 마도구를 두르고 다니지만,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엘비라는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설마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건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그럴 리는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아무튼, 저런 규모로 발화 마법을 사용하면 평범한 에드의 마력량으로는 오래 유지하긴 힘들 터.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읏…’
샹들리에를 추락시켜버리는 충격적인 광경에 정신을 놓은 아주 잠깐의 틈. 그 틈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노려오는 그 결단력에, 가방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허용하고 만 것은 큰 실책이다.
‘다행스럽게도 밑천은 남아있지만…!’
엘비라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유리 세공품을 꺼냈다. 토끼 모양의 마도구다. 따로 연구할 게 있어서 미리 빼놓았던 마도구가 있긴 있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바닥에 내려쳐서 깨뜨리는 것으로, 엘비라가 인공으로 구현해낸 사역마가 현현한다.
– ‘크르르’
토끼다. 그러나, 흉포한 어금니와 번뜩 거리는 두 눈동자는 초식동물의 것이 아니다. 그 덩치는 이미 이리나 승냥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엘비라는 재빨리 마력을 긁어모아, 사역마가 불의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도록 화염 저항식을 구현해 토끼의 가죽에 새겼다.
대강대강 난폭하게 만들어낸 법진이기에, 필시 사역마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한 번 쓰고 버릴 사역마이니 상관없을 터. 토끼의 등가죽에서 핏물이 튀어나오고 고통의 비명을 외치지만, 엘비라는 억지로 화염저항식을 부여해 넣었다.
– 화악!
또 한 번의 바람 칼날.
엘비라는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에 날아든 방향은 아일라 쪽이다.
“꺄아아악!”
– 카앙!
테일리의 ‘원소 베기’가 바람 칼날을 토막내버린다.
“정신 차려, 아일라!”
화염의 벽으로 가득한 홀. 샹들리에의 거대한 몸체와, 추락하면서 피어오른 흙먼지.
이리저리 공간을 토막 낸 불의 벽들 사이로 유영하는 에드의 모습을 제대로 쫓을 수 없다.
“크윽…!”
발화 마법으로 인해 구현된 불의 벽은 어느 정도 사용자의 통제대로 움직인다. 매연을 뱉는 일도, 불필요하게 규모가 커지는 일도 없지만… 그 열기만큼은 진짜다.
테일리는 검성의 도를 타고난 자다. 맘만 먹으면 불이든 바람이든 베어버릴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 성장세가 미약해서 넓은 범위를 한 번에 장악하지는 못한다.
불의 벽을 뚫어내며 나아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상대가 끊임없이 장소를 이동해대는 통에 대번에 제압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안 든다.
거기다가, 이가 갈릴 정도로 분노가 솟아오르는 일이지만… 에드는 노골적으로 아일라를 노리고 있다.
아일라 트리스는 마법 지식에는 빠삭할지언정, 전력으로서는 그리 강대하지 않다. 이제 막 기초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1학년생 수준일 뿐이다. 이미 숙련도가 충분히 쌓인 에드의 기초 마법을 막아낼 만한 방어 마법진을 구현해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테일리가 옆에서 보조해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제압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 큰일로 발전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탓에 아일라를 동행시켜버린 자신의 판단이 후회됐다.
과감하게 불 속으로 뛰어들어 에드를 제압하려 든다면, 아일라가 완전히 무방비하게 될 터다.
“테일리! 차라리 내가 홀 밖으로 나갈게…! 그 전까지만…!”
아일라도 지금 본인이 짐덩어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민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에 주눅 들기보다는 당장의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일라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게 낫다.
– ‘캬아아아아악!’
불 저항식이 완전히 부여된 거대 토끼가 샹들리에를 향해 돌진한다. 마력 부담도 거의 없고, 간이로 구현해낸 사역마인 만큼 그리 큰 성과를 기대하긴 힘들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도 에드의 움직임을 봉인하고, 그 위치를 드러내게 만들 것이다.
“테일리! 일단 거리만 좁힐 수 있으면 제압할 수 있겠어?!”
화염의 틈바구니에서 엘비라가 소리쳤다. 지금 당장은 대부분의 마도구와 시약들을 잃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만 만들어내면 에드를 제압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냐 없냐를 따질게 아니라, 해내야지!”
“그래, 맘에 드네!”
엘비라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로브를 몸에 두르고서, 화염의 벽 사이로 뛰어들었다.
“엘비라!”
테일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엘비라는 그대로 두꺼운 화염의 벽을 뚫고 건너편에서 바닥을 굴렀다. 불 붙은 로브를 얼른 털어서 던져버렸다. 귤색 머리칼 한 쪽에 불이 붙어 있었지만, 얼른 털어서 불을 꺼버리니 그을린 머리칼만 남았다. 오른 팔뚝에는 화상을 조금 입은 것 같지만, 당장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닥에 마법 시약들이 널부러져있다. 잠깐 동안의 이별이었지만, 꽤나 그리웠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전술적인 우위는, 공간을 장악하고 시야를 가리는 데에서 온다.
투척이 요구되는 마법 시약들이나, 조준이 요구되는 마도구들을 사용해서 대번에 제압하려 들었다간 오히려 시간만 끌린다. 그렇다면, 전력의 차이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제법 준비를 많이한 모양이지만, 이 쪽에는 근접 전투가 가능한 전사가 있다고..!
”
꽤나 귀중히 여기던 마법 시약을 하나 챙겨 들어서, 홀 중앙의 샹들리에 쪽에 집어던졌다.
-쨍그랑!
-화아아아아아악!
일행들 틈으로 묵직한 마법의 기운이 스며든다. 밤나비꽃과 갈버섯을 저며서 만든 시약에 ‘방출’ 마법식을 부여해놓았다. 효능자체는 워낙에 유명해서 다들 잘 알고 있다.
마력 발산의 억제. 마력으로 인해 구현된 부산물들의 일시적인 제압. 즉, 마법사의 천적과도 같은 약품이다.
그 원리는 마력의 흐름을 불규칙하게 꼬아서 운용을 난해하게 만드는 것에 있으므로, 마나감응에 숙달될 만큼 숙달된 중위 이상의 마법사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효력 자체도 길어봐야 몇 분이므로, 단기 결전이 아니고서는 크게 활약하긴 힘들다.
그러나 상대는 기초 마법만을 구사하고 있으며, 필요한 것은 단기 결전이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는지, 테일리도 공격 자세를 취했다.
홀을 가득 매운 화염의 벽들이 사그라들어간다.
샹들리에의 건너 편, 피어오른 먼지와 잿가루 사이에서 피를 뒤집어 쓴 남자가 하나있다.
한 손에는 사냥용 단검이 들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자기 몸채만한 토끼의 시체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받치고 있다.
그 토끼의 피를 뒤집어 쓴 사내는, 시체를 발로 밀어서 차냈다. 바닥을 구른 토끼는 이내 잿가루가 되어서 사라져버렸다. 시간을 끌만큼 끌어줬으니, 제 역할은 다했다. 구현해내느라 들인 노력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사내의 오른 어깨에는 토끼의 이빨에 의해 다친 상흔이 남아있고, 피를 뒤집어 쓴 교복은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표정변화도, 미동도 없이 서서 일행들을 지켜본다. 그 안광에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에드 로스테일러!”
테일리가 소리치며 달려 나가고, 그 틈을 타 엘비라는 이리저리 섞여 있는 시약병의 문구를 하나 하나 확인했다.
밤나비꽃 시약을 사용했으니, 잠깐 동안은 이 홀에 마력을 이용한 개입에 방해가 온다. 마법사인 아일라와 에드에게는 치명타다. 아일라는 전력으로서는 미약한 수준이었으니, 제법 이득을 본 교환이다.
검술에 능한 테일리와, 마도구와 시약을 사용하는 엘비라만이 전력으로서 유의미 해지는 잠깐의 순간.
바로 지금이,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치명타를 박아 넣을 타이밍이다.
-콰앙!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달려드는 테일리를 막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장식장을 발로차서 쓰러뜨렸다.
그 위에 놓여있던 대야가 쏟아지며, 가득 담겨있던 걸쭉한 액체가 홀 전체에 흘러져 나간다. 미리 켈리에게 시켜서 가져다 놓았던…
“이 냄새는… 기름이야! 테일리!”
– 카앙!
에드는 홀 구석에 있던 촛대를 차서 넘어뜨렸다. 기름을 타고 다시 불이 피어오른다. 어두웠던 홀에 다시 새로운 광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피어오르는 불이 다시 공간을 장악해 나간다.
‘발화’ 마법으로 인한 마법의 불꽃이 아니다. 진짜로 기름을 이용해 일으킨 화재다. 떨어져있던 샹들리에의 목재 부분과 더불어서, 외곽을 따라 도열해있던 장식장들도 불에 타오르기 시작한다.
“진짜 미쳤어?! 여긴 오필리스관이야!”
엘비라가 소리 쳤다.
발화 마법으로 인해 구현된 불의 기둥과 달리, 지금 타오르는 불꽃은 세상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태우는 자연재해다.
복도로 불이 번져 나가면,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변을 확인했으나, 엘비라는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급박하게 들이닥쳐서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다.
그러나, 홀을 가득 매우고 있던 장식장의 수가 많이 줄어있다. 지나치게 가연성이 좋은 가구나 귀중품들을 대부분 미리 치워놓고, 그 수를 최소화 시켜 놓은 데다가, 자꾸 시야를 가리던 매연도 비상용 계단 쪽 채광창을 전부 열어두어서 내보내고 있었다.
전술했듯, 메인 홀의 바닥과 벽은 모두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문과 복도로 향하는 문까지 전부 고풍스러운 석재다. 굳게 닫아놓고, 매연이 나갈 곳을 잘 확보해놓고, 냄새만 잘 차단한다면 이 정도 규모의 화재는 복도 쪽에선 눈치조차 못 챌 것이다. 으리으리한 크기의 홀에서 장식장 몇 개가 불탈 뿐인 일이다.
이 홀 안에서 화재가 더 퍼지지 않게 미리 대처를 해뒀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까지도 전부 설계한 거야…!’
엘비라는 이를 악물고 시약병들을 챙겨들었다. 화염이 퍼져나가고, 새빨간 빛이 홀을 가득 메운다. 그 중심에서 간헐적으로 피칠갑을 한 금발의 몰락 귀족이 슬쩍 보인다.
불을 지를 계획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된다.
애초에 마력으로 통제 가능한 발화 마법이 아니라 이런 화재였다면, 엘비라가 밤나비꽃 시약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유도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래봤자, 당신은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하잖아!”
테일리가 피어오르는 불꽃 속에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테일리의 움직임을 제약하던 가장 큰 변수는 아일라의 존재였다. 안전거리에서 아일라를 노릴 방법이 사라졌다면, 접근하는 테일리를 압박할 수단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피어오르는 불꽃의 열기는 대단하지만, 검성의 도를 타고난 테일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 화염을 베어내버린다.
엘비라는 등줄기를 타고 피어오르는 위화감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상대는 평범한 2학년 마법부 학생 하나일 뿐이지만, 이 쪽은 검성식을 구사하는 근접 전사에 연금부 수석까지 있다. 그 전력의 차이는 강조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다.
그러나 대처가 너무 매끄럽다.
마치 상대의 수를 모두 꿰뚫고 있는 것만 같다.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는 이렇게 나올 거라고 전부 간파하는 듯 한 움직임.
엘비라의 마도구를 먼저 무력화하고, 테일리가 거리를 좁히기 부담스럽게 만들며, 아일라라는 구멍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전략에 오점이 없고, 행하는 데에 일절 낭비가 없다.
이쪽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사할만한 전략은 무엇인지, 상대의 심리적 약점은 어디인지, 급기야는 엘비라의 가방 안에 어떤 약품들이 들어있는지까지… 전부 다 꿰뚫린 기분. 마치 알몸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엘비라의 강렬한 위화감은 그 기세를 더 해갔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그 마력의 운용을 틀어막으면 대개는 우왕좌왕하다가 목을 내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펙의 차이를 전장 조율과 약점 공략을 통해 메꾸는 상대의 전투 방식은… 마법사라기보다는 책사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이상하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이깟 화염 따위 테일리 앞에선 종잇장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의 준비 자세와 공격 타이밍만 있다면 화염을 베어버리고 에드에게로 향하는 길을 뚫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시야가 탁 트이고 상대의 움직임까지 한 눈에 들어오니, 엘비라의 지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잠깐의 틈이 핵심인가. 하지만, 에드 로스테일러는 더 이상 마법을 구사 할 수 없는 상태….
“안 돼, 테일리!”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엘비라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에드와의 거리를 좁히며, ‘원소베기’를 이용해 불을 베어 내버리려는 테일리의 움직임은…. 이제 와서 멈추기엔 이미 그 기세가 충만하다.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는 것은, 아직 ‘남은 수’가 있다는 뜻이다…!
마법을 이용하지 않고도 공격할 수 있는… 테일리 일행이 모르는 물리적인 원거리 공격 수단이 남아있다!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테일리의 검격에 불꽃이 썰려나가고, 모습을 드러낸 에드 로스테일러의 손에는… 단궁 하나가 들려있다. 필시 쓰러져있는 장식장에 미리 넣어두었던 것일 터.
“활을… 다룰 줄 안다고…?”
조준은 이미 끝나있다.
테일리는 화살 한 발 가지고는 제압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고난 반사 신경으로 검을 휘둘러 화살을 튕겨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움직임을 제약하기는커녕 반격의 기회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러니 테일리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제약하기 위해선, 테일리 본인을 조준 해서는 안 된다. 그 조준이 향하는 곳은 홀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테일리의 동반자다.
“아일라…!”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활시위에 들어간 힘이 풀리고, 화살은 목표를 향해 사정 없이 전진한다.
1학년생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것 중 하나인 기초 방어 마법.
자기 몸에 닥치는 ‘물리력’을 최소화 시키는 호신용 마법이고, 아일라 또한 구사할 줄 아는 마법이지만… 공교롭게도 엘비라의 밤나비꽃 시약이 미치는 효력은 모든 마법사에게 공평하다.
방어 수단이 없는 아일라에게 화살이 날아든다. 테일리는 초인에 가까운 반사 신경으로 몸을 돌려 아일라에게 달려들지만, 이미 날아들기 시작한 화살보다 빠를 수는 없다.
– 휘익, 콱!
그러나 화살이 아일라에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후우…”
유리 구슬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무 개가 넘어가는 엘비라의 마도구 중 하나인 ‘갈퀴손’.
시야 안에만 있으면,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작은 크기의 물건까지는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발생시켜주는 유리구슬이다.
아일라의 복부로 날아들던 화살은, 그대로 물리력을 잃고 엘비라의 손에 날아와 잡혔다.
“마무리 해, 테일리!”
그 모습을 확인 하자마자, 분노로 이글거리는 테일리의 눈빛이 에드를 향한다.
엘비라도 더 이상 손대중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무리 테일리 일행의 진입을 막고 싶어도 그렇지, 샹들리에를 무너뜨리고 불까지 질러대는 건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열등생들의 단순한 점거시위일 뿐 아니었나.
그 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오필리스관 위층으로 못 가게 막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일라에게 화살을 날린 건 정말 선을 넘은 행동이다. 단순히 마법으로 위협하는 것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짓이다.
연약한 아일라의 몸에 이런 화살이 박혔다간 정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명백히 범죄 행위다.
그리 생각하면서, 엘비라는 화살을 쥔 손에 힘을 풀려고 했다. 그리고 화살의 끝에 시야가 도달한 순간… 다시금 숨을 집어 삼켰다.
화살촉이 절제되어있다.
본디 그 끝이 뾰족한 철로 이루어져있어야 할 화살촉은 잘려있고, 건초더미 따위를 넓게 동여매둬서 최대한 물리력이 상쇄되도록 만들어두었다.
명백하게 살상력을 없애놓은 흔적.
급박한 상황에서 화살촉의 상태까지 확인하기는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인가.
물론 운이 나쁘면 화살대의 충격만으로도 실명하거나 다칠 수는 있겠지만, 그 마저도 조준 방향은 급소가 거의 없는 하복부와 허벅지 사이였다. 운 나쁘게 정통으로 맞았어도 멍이 좀 드는 수준이었을까.
‘봐주고 있었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엘비라는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테일리! 조심해! 아직도 뭔…”
아직도 뭔가가 남아있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 ‘콰앙!’
2층에서 벽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떤 겁쟁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에드는 테일리의 검격을 맞고 벽에 매다 꽂혀있었다.
“….뭐?”
조용히 벽에 기대어 앉아, 피칠갑이 된 몸을 추스르는 에드를 보면서… 엘비라는 또 다시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
“미쳤어요?!”
샹들리에가 무너져 내려있다. 장식장들은 대부분 불타있다. 난장판이 된 메인 홀 벽에 기대 앉아서, 사역마의 탓에 피투성이가 된 옷을 털고 앉은 에드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는 테일리.
그 모습을 보면서, 엘비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드는 테일리에게 결국 접근을 허용했고, 마법사와 근접 전사의 당연한 상성에 의해 결국 제압당했다.
고생 좀 했지만 끝끝내 제압하긴 했다.
그러나, 엘비라는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전투 내내 엘비라의 마음은… 계속해서 꿰뚫린 듯한 느낌만이 들었다.
전투 상황이나 구도가 모두 에드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난 듯한 느낌.
만약 정말로 에드 로스테일러가 테일리 일행을 제압하려 했다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냅다 샹들리에부터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냥 자기 실력을 과신한 멍청이 마법사였다면 다를 수도 있지만, 전투 중간에 느껴졌던 에드의 모습과는 그 괴리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언가, 의도가 들어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테일리와 아일라는 급박한 상황 탓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지만, 엘비라는 평소의 철없는 모습과는 달리 완전히 표정이 굳어있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는 테일리의 뒤에서, 엘비라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했다.
패배한 입장이건만 그에게선 일절 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벽에 기대고 앉아서, 테일리의 외침이 끝나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윽고 테일리가 숨을 몰아쉬면서 기운을 고르고 있자, 그 때서야 고개를 들고 말한 것이다.
“다 끝났냐?”
상황이 이렇게까지 와서도, 그 평온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끝났으면 올라가라. 그만 떽떽대고.”
가지 말라고 잡는 모습조차 없다.
“뭐라고요…?”
그리 반문하는 테일리를 밀어내고, 엘비라는 에드 앞에 똑바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빗줄기가 외벽을 때리는 소리가 가득한 오필리스관 메인 홀.
“왜 봐줬어?”
폐부를 찌르는 그 질문에, 에드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테일리와 아일라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엘비라?”
“봐줬다고? 이 사람이? 우리를?”
엘비라는 테일리와 아일라의 질문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에드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대답해.”
다시 잠시간의 침묵. 그러나 엘비라는 그 침묵을 허용할 마음이 없다.
에드의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겠다는 투로, 벽에 기대고 앉은 그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평생이라도 추궁하겠다는 일념으로.
하지만, 당연스럽게도 그 추궁이 평생을 갈 수는 없다.
– 쾅!!
오필리스관 정문이 다시금 열린다.
외벽을 때리던 은은한 빗소리가, 잠시 정문을 타고 들어오는 폭우의 소리에 묻혀버린다.
벼락이 한 번 내리꽂힌다.
잠시간 밝게 빛나는 세상은, 로브 모자의 물기를 털어내며 갈무리하는 소녀의 모습을 똑바로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잠시 드러난 감꽃 머리핀은 소녀가 밤을 새서 고민해 고른 것이다.
그 소녀의 순정을 누가 어리숙하다 욕할 수 있을까.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행복한 상상을 하는 건 본인의 자유다.
다만 상상과 현실의 괴리는 때때로 잔혹하다.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정자에 나타나줄거라 생각했던 소년은 웬걸, 괴한의 무리들에게 습격당해 피칠갑을 한 채로 쓰러져있다.
열린 정문.
쏟아지는 빗줄기를 배경으로 어둠속에서 나온 소녀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있다.
평소처럼 발랄하고 활기찬 눈빛은 간데 없고, 오로지 음영만이 가득하다.
“…뭐해?”
추궁하는 그 어조 또한, 무겁게 깔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