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5)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5)
– ‘갑자기 처리해야할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미안해.’
위화감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터다.
쪽지에 남겨진 말의 어조에서, 에드 로스테일러가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리거나 곤란한 일에 처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니카는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걱정은 접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당면한 위기나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행동에 낭비가 없고, 처리는 언제나 신속하다. 단순히 장작을 패거나 생활 도구를 만드는 일부터, 예니카의 과오 때문에 궁지에 몰린 학생회관 토벌대에게 개입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은, 일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어떻게든지 해결해낼 거라고 하는 모종의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그런 안일한 생각의 맹점을 찔린 후에야, 인간은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 ‘그 땐, 내가 꼭 도와줄게,’
에드의 캠프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고난이 오면 꼭 도움을 요청해달라는 말이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스스로의 강함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태생이 겸손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성품 탓에 구태여 드러내지는 않지만… 위기가 오면 반드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만큼은 충만했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피칠갑이 되어가면서까지 싸워대다가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있다.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힘을 내 줄 예니카를 두고도 끝끝내 혼자 싸웠다.
그 이유란 무엇인가.
어울리지도 않게 편지 같은 걸 남겨가면서까지 예니카를 오필리스관 밖으로 유도하고, 본인은 여기서 피를 흘려가며 싸운 이유는 무엇일까.
오필리스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니카만큼은 그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예니카 페일로버의 강함은 에드가 배려해주니 마니 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허나, 예니카는 이미 글라스칸 사건으로 인해서 이런 저런 징계를 잔뜩 맞은 입장이다. 여기서 더 사고를 쳤다간 학년 친구들 모두가 힘을 내서 받아준 경징계들을 제 손으로 무르는 짓이 되어버릴 터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가 저렇게 피범벅이 될 때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고서도, 자신은 끝까지 나서지 않고 참을 수 있었을 것인가. 절로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래서 에드 로스테일러는 예니카를 아예 전장 밖으로 내몬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예니카의 가슴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올라왔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어째서 이렇게 싸우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적어도 그가 세간의 평가처럼 불합리한 짓을 하거나 악행을 일삼을만한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잘 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여기서 이렇게 싸우는 동안 자기는 뭘 했나.
누군가는 비장한 마음으로 전투의 현장을 향해 나설 때, 예니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옷매무새가 어떻니, 머리가 헝클어졌니, 머리핀의 색깔이 어떻니 하면서 되도 않는 기대감에 설레어서 잠도 못 이루고, 연정에 빠진 소녀가 되어 행복한 상상의 나래나 잔뜩 펼치고 있었을뿐이다.
분노의 방향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 분노를 접어놓을 때다.
-쏴아아아아.
빗소리를 등지고 고개를 내리깐 채, 테일리 일행을 향해 조용히 묻는다.
“뭐하고 있었어?”
목소리엔 서리가 맺혀있다.
“예니카 선배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테일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 시점에서의 테일리가 예니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행히 사태에 휘말리지 않으셨나 보네요! 예니카 선배님. 지금 오필리스관은 타 학생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에요. 하지만… 그게 단순히 끝은 아닌 것 같아요. 에드 이 인간이 끝까지 길을 막아서는 걸 보면 분명 그 외에도 다른…”
“그래?”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예니카의 눈매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선은 일행들을 똑바로 향하고 있으리란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그 순간, 오필리스관 정문을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마력이 요동친다.
마법부 2학년 수석이 지닌 마나 감응력은, 졸업생들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옷깃이 휘날리고 바람이 피부를 때린다. 천장에 달린 자그마한 샹들리에들도 미친 듯이 흔들려, 이미 생명을 다한 메인 샹들리에 옆으로 추락할 기세다.
“뭐, 뭐야?!”
“예니카 선배! 뭐, 뭐하시는 거에요!”
고위 불 정령 타칸은 소환하지 않는다.
그 막대한 힘답게, 아직 현현 시에 맞이한 죽음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1학년 3인방을 상대로 고위 정령의 힘까지 빌릴 필요도 없다.
중위 불 정령 올고아스, 중위 바람 정령 페시, 중위 물 정령 플란, 중위 땅 정령 타이크.
단 하나를 상대하는 데에도 한 파티를 꾸려야 할 중위 정령이 네 마리나 몸을 일으킨다.
그 외 수 많은 유체 정령과 하위 정령들이 요동치면서 몸을 일으켜, 그 광경은 마치 하나의 군단이다.
휘말리는 폭풍에 의해 1층의 창문이 하나 하나 깨져 나간다. 유리조각과 섞인 비바람이 마나의 폭풍에 휘말려 메인 홀을 적셔 댄다.
“정신 차려, 테일리! 적이야!”
가장 먼저 상황 판단을 끝낸 엘비라가 시약병들을 모두 주워 담는다. 찢어진 연금술 가방의 틈으로 하나 하나 집어넣고 있지만, 폭풍우와도 같은 빗줄기의 행렬이 시야를 가려서 녹록치 않다.
“있잖아. 사실 너희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별로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어.”
예니카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그닥 복잡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에드를 저 꼴로 만들었니?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을 뿐이다.
오필리스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테일리 일행이 무슨 생각으로 오필리스관에 진입했는지는 더 이상 예니카의 관심사가 아니다.
“예니카!”
그 비바람 속에서, 그제서야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지만, 소년은 목소리를 쥐어짜서 예니카의 이름을 외쳤다.
만신창이가 된 소년의 몸을 보자 예니카는 퍽 마음이 아팠다. 괜시리 더 힘을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예니카는 에드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1분만 기다려, 에드.”
넉넉잡아 1분이다.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필리스관을 때려 부수고, 후배들을 상처 입히고, 교칙을 어겨 오게 될 후폭풍 정도는 충분히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니카의 행동을 앞당기게 되는 것은 결국 과거의 자신이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고, 남에게 피해 주기 싫고, 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다 고꾸라진 모습은 필시 거울 속의 자신이다.
예니카를 생각해 홀로 일을 감당하려다 피칠갑이 되어 쓰러진 모습의 에드는, 반대편 거울에 비춰진 상이다.
그 모습은 예니카 페일로버의 역린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비탄스럽고 슬픈 일인지는 예니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그렇기에 에드 로스테일러를 방치할 수는 없다.
불타는 독수리와 바람 형태로 휘몰아치는 사자, 물로 이루어진 거인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말이 주인을 위해 몸을 일으킨다. 하나 하나가 너덧 명은 달려들어야 겨우 제압할 수 있는 중위 정령이다.
테일리 일행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자세를 잡았다.
“도주해야 돼, 테일리.”
엘비라가 정확하게 상황을 짚었다.
예니카가 어째서 저렇게 분노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유명한 2학년 마법부 수석을 상대로 어줍잖게 덤벼드는 건 자살 행위다.
1학년 A반 멤버 중에서도 마력의 섬세한 운용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로르텔 마저… 저 괴물 같은 정령사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 내고 당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여기를 뚫고 지나갈 수는 없어.”
예정에 없던 존재. 오필리스관 1층을 지키고 앉아 있는 몰락 귀족, 에드 로스테일러.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를 가지고도 그를 제압하는 데에 한참이 걸렸는데, 심지어는 2학년 수석까지 나타나서 중위 정령을 뿌려댄다. 비싼 약초 몇 개 때문에 이런 미친 상황에 몸을 들이밀 수는 없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 테일리는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오필리스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한 점거 사태 뿐만은 아닌 것 같다. 분명 그 뒤에 숨어 있는 뭔가 더 거대한 암흑… 흑막의 존재가 느껴진다.
테일리의 입장에서야 전부 남의 일 뿐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피해를 받는 학생들이 생긴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테일리의 정의감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시련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세는 무덤까지 끌고 갈게 될 자질이다.
명명백백한 사실, 필시 테일리는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될 자다.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거대한 벽은 이미 경험해보았다. 압도적인 전력 차는 과연 근성으로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일까.
허나, 그 불확실함은 테일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치 않다.
테일리는 언제나 자기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시련도 악으로 깡으로 이겨내오며 살아왔다.
그러나, 테일리의 그런 무모함이 올바르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세계가 테일리를 주인공으로 인정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련은 극복되고, 테일리는 그 시련을 기반으로 성장하게 되는 세상의 흐름은…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이라는 시나리오의 흐름이 깨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상 계속 반복될 터다.
그러나, 다시 만나게 된 예니카라는 적은 ‘시나리오’ 바깥의 존재다.
이야기의 흐름 밖에서 튀어나온 적에, 테일리의 주인공으로서의 기질이 먹힐 것인가. 이런 압도적인 전력차 조차 시련에 강한 그 기질로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상에 시련이라는 것들은 드라마틱한 게임 시나리오처럼 녹록하지 않다.
전력 차가 압도적이라면, 패배하는 것이 맞다. 갑작스러운 힘의 각성이나 기연의 개입, 우연의 일치로 시련을 이겨내는 전개는… 대개는 시나리오 안의 이야기다.
“테일리! 정신 차려! 현실을 직시해! 마침 창문들도 다 깨졌으니까 그 쪽으로…”
“그러니까, 가랄 때 좀 가지…!”
몸을 일으키며 엘비라의 말을 끊은 것은, 에드 로스테일러였다.
*
“예니카! 됐으니까, 괜찮으니까 좀 진정 해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예니카의 모습은 가히 재앙 그 자체와도 같다.
펄럭대는 로브자락과 연분홍 빛 머리칼은 이미 완전히 비에 젖어서, 늪에서 기어 올라온 처녀 귀신같은 모습이다.
계획대로라면 테일리 일행을 위층으로 올려 보내고, 예니카와 장미 정자에 앉아서 신변잡기나 이야기 하다가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가 잘 마무리 되는 걸 끝까지 지켜보기만 할 예정이었다.
혹시나 예니카가 다른 곳으로 갈까봐 쪽지까지 남겨놓고, 금방 올 거라고 약속까지 해놓았다.
태생적으로 순진하고 착한 예니카이니만쿰, 그리 똑똑히 약속해놓고 사과까지 해놓았으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필리스관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예니카의 착한 심성이 오히려 나쁜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캠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시간도 보내면서 꽤나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니카는 친한 친구가 이렇게 두들겨 맞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가만히 놔두면 테일리 일행은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다.
“잘 들어라. 예니카는 내가 수습 할 테니까, 너희는 계획대로 2층으로 올라가라.”
“네?”
아일라 트리스가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까는 저희를 그렇게 기를 쓰고 막아놓고서는, 이제는 2층으로 올라가라고요?”
애초에 테일리의 스펙을 좀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술수를 부려보았을 뿐이다. 혹시나 2막 클리어 스펙이 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되니까.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얼른 올라가 봐.”
“아하하, 글쎄. 당신이 저 정령들을 막아내겠다고? 완전히 상처투성이인데 지금?”
이 상황까지 와서 깔깔대며 웃는 엘비라의 머리에 꿀밤을 쌔게 때려넣었다. 엘비라는 아악! 하고 머리를 싸매며 뒷걸음질을 쳤다.
“시약이나 잘 챙겨. 가방 찢어먹은 건 미안하게 됐다.”
엘비라의 갖가지 효능을 가진 시약들은 3층의 쌍둥이 메이드 공략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엘비라는 이 오필리스관 토벌대 중 가장 귀찮은 상대라서, 나는 가장 먼저 그 시약부터 봉하고 싸웠지만…. 이 이후에는 그 정도로 귀찮게 구는 상대는 없을 거다.
애초에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는 그렇게까지 난이도 있는 이벤트는 아니다. 전력은 충분해보이니 이 이후로는 어깨에 힘을 좀 풀고 가도 된다.
“뭐, 뭐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대체…!”
엘비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 쪽에 신경을 쓸 만한 정신이 남아있질 않았다.
깨진 창문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헤치며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휘몰아치는 정령들의 틈바구니에서, 그제서야 예니카의 눈이 똑바로 보인다. 차갑게 식어 있는 눈동자는 평소와 비교되어 이질감이 엄청나다.
어쨌든, 예니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이유는 그 타고난 성품 탓이다.
그러나 인맥 좋다는 게 뭔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예니카와 이미 친해질 만큼 친해져있는 상태인 것이다.
세상사 살다보면 결국 사람만한 자산이 없다.
혈연, 학연, 지연 …! 갑갑한 인생사에서 막힌 길을 뚫어주는 고맙디 고마운… 인맥 삼신기.
아무리 돈 많고 능력 있고 집 좋은 양반들이 끝끝내 겸손을 떨고 주변인에게 잘해주는 것도, 결국 인맥이라는 것은 어떻게 돌아와 보답할지 모르기 때문 아닌가…!
지금 그 인맥이라는 녀석의 덕을 똑똑히 볼 때가 됐다.
예니카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온갖 정령들이 홀을 가득 매우고 있지만, 자신의 주인님이 적대하지 않는 적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 틈바구니를 헤치고 예니카의 앞까지 똑바로 왔다.
“에드, 무리하지 말고 비켜 서있어.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 할게.”
“예니카.”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설명해줘두 돼. 일단 빨리 일만 마무리하고, 치료부터….”
나는 예니카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똑바로 말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이제 적당히 해도 된다.”
본디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무례함의 상징이다. 말도 없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똑바로 쳐다보는 행위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는 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러나, 감정이 격화되어 귀가 닫힌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내 말을 똑똑히 들으라는 제스쳐를 취할 필요 또한 있다.
“어, 응?!”
그제서야, 예니카는 평소 같은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더니.
“에, 에드! 어깨에 손! 어깨에 손 올려져있는데!”
“예니카… 일단 정령부터 돌려보내줘라. 바람이 너무 드세서 서있기가 힘들어…”
“어, 응?! 헉, 맞아. 몸 가누기도 힘들 텐데. 미안해..! 어떻게 해… 나 바본가 봐….”
그 뒤로부터는 순식간이었다.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이 삽시간에 사그라들더니, 주인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온갖 정령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오필리스관 메인 홀에는 다시 비가 내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
테일리 일행이 벙찐 상태로 이 쪽을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 영 신경 쓰여서, 나는 얼른 그들에게 손을 휘적였다.
모두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다가 2층에서 헤매는 클레비어스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귀찮아질 것이다.
“빨리 올라가… 아마 시간 별로 없을 거다…”
그리 말하며, 나는 겨우 가누던 몸의 힘을 풀었다.
하릴 없이 쓰러지는 내 몸을 정신없이 받쳐 든 예니카가 쩔쩔 매고 있었다.
*
-쏴아아
“나 너무 속상해.”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그 기세를 더해간다.
옆에서 무릎을 안고 앉은 예니카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썩 좋진 않다.
난장판이 된 오필리스관 1층의 메인 홀. 테일리 일행은 2층 계단으로 향하고, 예니카와 나만이 그 외벽에 기대고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둘 다 완전히 젖을 대로 젖은 꼴이라, 영 우스운 모습이긴 했지만… 시원하게 비를 맞고 나면 왠지 모를 해방감이나 고양감이 들 때 또한 있다.
어쨌든, 테일리의 스펙 자체는 무난하게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원소베기의 범위나, 움직임의 민첩함, 검격의 정확도 따위를 통해 가늠해 보건데… 정규 이벤트는 전부 잘 끝낸 모양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만 생각해보면 영 성이 차진 않는다. 근데 그거야, 내가 육성에는 완전히 도가 튼 입장이라 그럴 뿐이지… 충분히 클리어 스펙 자체는 채운 것만으로 만족 해야겠지.
어쨌든 이 이후부터 당분간은 정신력의 문제다. 시나리오는 가면 갈수록 인간의 정신을 극한으로 내몬다.
글래스트 교수가 구사하는 성위 마법은 시간의 틈새 안에 테일리를 가둬서 수 백 수 천 번의 죽음을 경험하게 만들 것이다.
루시가 구사하는 최고위 마법은 실제로 한 번 테일리를 죽음 직전으로 내몰 것이고, 가주 크레핀이 소환하는 악신 메뷸러는 당하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최악의 악몽 속에 적을 가둬버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인간의 정신력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시련 속에서도, 테일리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테지.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런 시련들은 사양이다.
나 편할 대로, 내 이득이나 따져가면서 챙길 거만 챙기고, 꿀만 빨자고 생각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다. 역시 세상사 모든 일이 맘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왜 자꾸 말도 안하고 다치구 그래. 이런 일 있으면 상담해달라고 말했잖아…”
“그럴 만한 사정이 좀 있긴 했어. 다음에 다 이야기 해줄게..”
당장 치료사를 찾아가자고 손을 끄는 예니카를 설득해서, 메인 홀 1층에서 사건이 끝날 때까지만 앉아 있기로 했다.
장소가 장미 정원에서 오필리스관 메인 홀이 되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면서 혹시 모를 변수가 있지 않을까 체크하는 일 만큼은 계획대로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예니카와 나란히 앉아서, 반파된 메인홀 밖으로 투둑투둑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저런 변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1층은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고, 테일리의 스펙 자체도 무난하게 잘 커가고 있는 것 같긴하다.
일 자체는 계획대로 흘러 갔구나…
“그 애들도 정말 너무 심하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릴 이유가 있냔 말야. 다음에 만나면 진짜 화낼 거야.”
샹들리에를 떨구고, 불을 질러대고, 급기야는 화살까지 쏴 댄 내 행보를 모르는 예니카의 입장이니 만큼 그런 대사가 나오는 것도 이해는 된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준다는 점은 고마운 일이지만, 거기다 대고 해명을 해야 하는 입장도 썩 편치는 않다.
뭐, 일단 나중으로 미루면 될 일이지.
“어쨌든… 에드… 어디가서 자꾸 다치지 마. 응? 알았지. 약속해.”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몸을 추스르고 휴식을 취했다. 계획이랑은 좀 틀어졌지만, 어쨌든 1층 보스로서는 제 역할을 다했으니…
슬슬 좀 쉬고, 내 캠프 일이나 좀 챙겨도 되겠지.
나는 그 안도감에 빠져서, 빗소리를 들으며 몸을 추슬렀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진 느낌이다.
이후 예니카가 늘어놓는 말을 듣기 전까진.
“근데, 에드. 나 장미정원에서 앉아 있다가 엄청 큰 마차를 봤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자세히는 못 봤는데… 황금 모양 왕관이 그려져 있더라구.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거… 엘테 상회 마차 아니야?”
“옛날에 책에서 읽은 적 있긴 해. 그 황금 모양 왕관 말야… 분명히… 엘테 상회의 회주… ‘황금왕 엘테’의 문양이지?”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가 끝나고, 이후에 벌어지는 ‘현자의 봉서 쟁탈전’에서 로르텔에게 뒤통수를 맞아 퇴장하는 페이크 보스 ‘황금왕 엘테’.
그가 예정보다도 훨씬 더 빨리 실베니아에 도착해있단 사실은.
내가 인식하는 범위 바깥에서…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에.
다시금, 호흡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
“더 다친 데는 없지, 테일리?”
“응, 아일라도 괜찮아 보이네. 엘비라는? 시약은 충분해?”
“남아돌아. 걱정 하지마.”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오필리스관. 2층 계단.
3인의 토벌대는 계단을 오르며, 서로의 전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가다듬었다.
오필리스관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 그 사실은 확실하다.
적어도 1층에서부터 그들을 막아선 에드 로스테일러의 낌새만 보아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
도저히 속내를 꿰뚫어 볼 수가 없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상대하는 건 너무나도 피곤했고, 심지어는 예니카 페일로버까지 적으로 참전할 뻔 했다.
아직 뭐가 뭔지 잘 파악이 되진 않지만, 어쨌든 더 이상 방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위층에서부터 테일리 일행을 막아서는 적들은 1층만큼 번거롭고 까다롭거나… 아니면 그 이상일 수도 있지 않나. 상상만 해도 소름이 오른다.
그럼에도 뒤돌아갈 마음은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행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방심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