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7)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7) (유료 부분 시작)
“으-히익! 히이이익!”
상처 입은 테일리가 윌레인을 바닥에 매다 꽂았다. 클레비어스와의 연계 공격으로 법진의 마법을 베고 피해가면서 끝끝내 윌레인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오필리스관은 이미 난장판이다. 귀중하고 비싼 가구들과 예술품들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별집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외벽들은 이미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윌레인을 기절시켜서 묶어놓은 테일리는, 한숨을 푹 쉬면서 얼굴에 묻은 빗줄기를 닦아내었다.
오필리스관 4층의 복도 외벽은 완전히 무너져서, 아예 바깥이 다 드러나 빗줄기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일행들은 홀딱 젖어서 얼굴을 끊임없이 닦아내고 있었다.
“휴우, 이제 얼추 상황이 끝난 거겠지? 교직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자.”
“아니, 테일리. 척봐도 부자연스럽잖아.”
”
엘비라의 말에 테일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뭐? 무슨 소리야?”
“너도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잖아, 테일리. 이 오필리스관의 보호 법진은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어. 이 저택의 총 지배인인 메이드 장 정도는 되어야지 혼자서 저 많은 법진을 권한 장애 없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구.”
“그렇다면…?”
“아직 안 끝났어. 일을 이 사단으로 만든 흑막이 있어.”
그러나 오필리스관 4층 복도의 끝까지 도달했건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적대적 존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5층으로 향하는 계단뿐이다.
“이 사달을 낸 진짜 범인이 5층에 있겠지. 그 인간이 도주하기 전에 미리 잡아놓지 않으면, 우리가 이 개고생을 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완전히 일을 마무리 짓고 학사에서 상점이라도 받아야겠어.”
엘비라는 씩씩 대며 팔을 걷어붙이고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클레비어스는 이제와서 무슨 사건 해결이냐며 소리를 지르고 있고, 아일라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엘비라, 네 말 대로라면… 그 흑막이라는 인간은,..”
“그래, 이 오필리스관을 관리하는 메이드장 엘리스겠지. 뭘 가만히 있어? 5층에 있을 거 뻔 하니까 빨리 잡아서 이 보호 법진을 다 해제하라고 협박해야지.”
엘비라의 닦달에 테일리는 한숨을 푹 쉬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나몰라라 하고 있기도 그랬다.
확실히 이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에는 흑막이 존재하는 듯 하다. 이쯤 와서 생각해보면 메이드장인 엘리스가 그 범인일 것이 분명하다.
*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고, 근거 없는 신뢰란 없다.
로르텔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라서, 철 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방심하면 뒤통수를 맞는 상도의 세계를 살았다.
가족애, 형제애, 친우애, 전우애 따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로르텔이다. 그녀에게 있어 신뢰 관계라는 건 언제나 철저한 근거에 입각해 합리적으로 설계된 구조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조건 없이 서로를 신뢰 해주는 관계라는 것은 절벽 위에 핀 꽃이다.
존재하긴 하나, 손에 닿을 수 없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보물이다.
손이 닿을 리 없기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집착이란 감정은 아슬아슬한 결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동족을 늘리는 것뿐이다.
돈에 가치관을 꺾고, 신념을 팔아, 결국 조건 없는 신뢰나 호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사람들. 그게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어긋나있고 비틀려 있다는 자각이야 있지만, 그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한 번씩 그 강철과도 같은 심지가 흔들릴 때가 있다.
인생이 벼랑 끝에 몰려 있지만, 손에 쥔 금화 3닢을 다시 되돌려 주던 남자가 있다.
금화 20닢에 로르텔의 계획에 동참해주었지만, 애초에 액수 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얼굴이다.
그 남자의 행동 원칙은 환가성, 채산성, 경제성, 합리성 따위의 단어들과는 한없이 동떨어져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야 많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며, 의리나 연심 따위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이다. 냉철하기보다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직스처럼 감정에 휘둘리거나, 예니카처럼 마냥 착하기만한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돈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니, 로르텔은 그런 인간을 보면 동족으로 끌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샘솟고 만다.
끊임없이 코를 찌르던 동족의 냄새는 분명, 로르텔의 내면에서부터 샘솟은 확신이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그 확신.
– ‘아니.’
– ‘네 선택에는 네가 책임 져야지, 로르텔.’
그러나 시원스럽게 차였다.
놀라운 사실은, 답답하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홀가분했다는 점이다.
그 개운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로르텔은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그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에는 광원이 너무 많다. 그녀가 살던 상도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꽃내음 가득한 꽃밭을 거닐다 보면, 자기 몸에서도 향긋한 꽃내음이 나는 것 같다고 착각하고 만다. 자기는 시궁창 속을 거니는 시궁쥐라는 사실을 아무리 일깨워 보려해도 결국 마음이 꺾인다.
테일리와 아일라, 직스와 엘카 같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끝끝내 외면하고 있던 감정이 피어오르고 만다. 질투와 집착이다.
나도 언젠가, 근거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사실 꽃이 피어있던 절벽이란 그리 높고 가파르지 않았던 것 아닐까.
그런 헛된 꿈은 꾸지 말자. 나는 죽는 그 날까지 상도에 몸을 담으며 남의 뒤통수나 치고 살 악역이다. 그리 다짐했고 또 다짐했건만.
끝끝내 에드와 예니카를 보면서, 그 묻어놓고 살았던 갈망이 완전히 피어오르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곧 있으면 엘테님이 오필리스관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 결과는, 목에 겨누어진 레이피어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장 엘리스는 평생을 실베니아에 몸을 담았던 원로 직원이다. 그러나 격무와 지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끝없이 그녀를 괴롭혀, 학사 측에 근무 조정을 수도 없이 요청했으나… 그녀의 직무를 대리할만한 경력의 인간이 거의 없었다.
온갖 귀빈들이 잔뜩 모여 있는 오필리스관의 관리는 언제나 흔들림 없고 안정적이어야만 한다. 체계의 안정이라는 목표에 의해 끊임없이 자기희생을 거듭해온 것이 엘리스의 삶이다.
뒷거래를 하던 날, 그런 속사정을 털어놓는 엘리스를 마주하면서… 로르텔은 자기의 속사정도 털어놓고 말았다.
본래 상도의 세상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다. 서로의 고통을 보듬고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섣부르게 판단했고, 에드의 캠프나 학사에 방문할 때도 엘리스를 동행시키면서 많은 교감을 주고받았다.
“…그런 눈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좀 더 냉철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뭐, 제가 할 말은 아니군요.”
자기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가. 로르텔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서, 굳이 이해하려 하진 않았다.
“로르텔 아가씨는 황금왕 엘테에게 복수하리라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 시선에는 두 분이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사정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덧붙인다.
“저도, 마찬가지겠지만.”
– 쾅!
그 순간, 5층 입구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찾았다, 메이드장 엘리스야!”
“인질을 잡고 있어! 조심해 테일리!”
엘리스가 놀라며 입구 쪽으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로르텔은 재빨리 몸을 굴려서 그녀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났다.
“로르텔! 괜찮아?!”
엘비라가 소리를 질러서 로르텔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저기를 봐. 여기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장본인이 있어. 빨리 저 여자를 제압해야해.
그렇게 당장에 모든 죄를 엘리스한테 덮어 씌우고 도망가는 방법이 최선일테다. 그러나 로르텔은 입이 열리질 않았다.
“로, 로르텔! 얼굴이 왜 그래?”
대체 자기 표정이 어떻단 말인가. 로르텔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동급생들과,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있는 엘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참고 있다가, 로르텔은 1층을 향해 뛰쳐내려가기 시작했다.
황금왕 엘테가 오고 있다.
엘테 실각 계획은 거의 완성 단계다. 명분만 만들어내면 거의 끝난다.
허나 모든 계획의 구심점인 로르텔이 포획 당하면, 전부 말짱 도루묵이다.
로르텔의 심지는 단단하게 굳어 있을지언정, 몸은 한없이 유약한 소녀다. 조금 고문하면 얼마든지 모든 사실을 술술 털어놓게 만들 수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다행인 점은 엘테가 실베니아까지 직접 행차했다는 것이다.
자기 심복 중 누가 로르텔에게 붙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에, 직접 일을 처리하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엘테 상회 본점과 연락을 취할 수단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본점 쪽에는 로르텔에게 붙은 상회 임원들이 꽤 많다.
대대적으로 장부를 조작하고, 매물을 빼돌리고, 손해를 극대화해 그 책임을 엘테에게 넘기는 작업에 대한 계획은… 이미 꽤나 구체화 되어있다. 다만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해 엘테 본인이 본점에 있으면 무조건 들킬 뿐이다.
엘테는 이번 행차로 무조건 로르텔을 제압할 생각이다. 일단 자리를 비웠으면, 그 끝을 봐야하는 것이니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다.
1층에 있는 로르텔 본인의 방에 몰래 숨겨둔 전서구가 있다. 전서구를 보내고, 아켄섬 어딘가에 몸을 숨길 은신처만 찾아내면 된다.
로르텔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이를 악물었다.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끝끝내 닿지 않는 갈망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애초에 손끝에 닿지도 않았으면 집착할 일도 없었다.
어쩔 수가 없다. 제 아무리 냉혈한 척 해봐야, 애정의 결핍은 사람을 천천히 좀먹어 들어가는 극독이다.
그 잠복기에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것도 저것도 다 낭만 넘치는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탓이다. 차라리 냉혈한 상도의 세계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잠복기는 훨씬 더 길었을 터다.
배신당하고 뒤통수 맞는 일은 지겹도록 많이 겪어봤다. 이제와서 어울리지도 않게 마음이 무너져서야 행동의 일관성이 안 맞는다.
그럼에도, 로르텔은 이를 악문 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달려야 한다. 1층 메인 로비에 엘테가 먼저 도착하면, 방으로 돌아갈 길이 아예 막혀버릴 것이다.
*
– 쾅!!
예니카의 마법이 벽에 작렬하면서, 그 붕괴음이 한 차례 울려 퍼졌다.
“….?”
무너져 내린 벽. 그 내부를 보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까지 혼자 체력단련을 하고 있는 직스가 있다.
갑자기 벽이 무너져 내린 꼴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뭡니까. 에드 선배님? 지금 이건….”
“넌 지금 바깥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인데 방에서 안 나오고 뭐하고 있냐…? 소리 안 들렸어?”
“뭐… 섣부르게 행동 안하려고요. 어차피 건물 좀 무너진다고 해서 죽을 것도 아니고.”
태생적으로 강한 직스이니만큼 위기를 위기로 느끼질 않는다. 교직원들이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 하는 생각에 자기 할 일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몇 몇 학생은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자기 보신이 가능할 정도의 스펙이라면, 굳이 비를 맞아가면서 밖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에드 선배님. 제 방 벽을 그렇게 부숴버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잘 때 너무 춥지 않겠습니까?”
“네가 바깥 상황을 몰라서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어차피 이 건물은 싹 다 처음부터 보수 공사 해야 돼.”
“그렇게 심각한 상황입니까?”
직스는 팔굽혀펴기 자세를 풀고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체 세상 누가 이놈이 마법사라고 생각을 하겠나…?
“예니카 선배님도 계셨군요.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글라스칸 사건 때는… 좋지 않은 인연이었습니다만.”
“응… 그건… 미안하게 됐어.”
예니카는 우물쭈물한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 사건은 예니카에게 있어선 역린과도 같은 일이지만, 직스는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모른 척 할 정도의 위인은 못 된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이다.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 예니카. 이미 징계도 다 끝난 일이잖아.”
“응… 맞아. 고마워, 에드.”
대충 그런 말을 주고받는 걸 보서야, 직스는 자기가 쓸 데 없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뒤로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두 분은 그래도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응?”
“저도 눈치야 있습니다. 에드 선배님은 유독 1학년생들한테는 거리를 두는 편이시지 않습니까. 뭐, 조금만 얕보이면 바로 맞먹으려 드는 친구들이 많으니… 선배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처세라고는 생각합니다.”
직스는 몸을 이리저리 휘어 꺾고서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마저 풀었다.
“그래도 예니카 선배님을 편안히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로운 일면을 확인한 기분이라 신선하군요. 혹시 연인사이십니까?”
“아니!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에 예니카는 호들갑을 떨면서 팔을 붕붕 내젓다가, 문득 너무 강렬하게 부정했다고 생각했는지 힐끔 내 얼굴을 쳐다보고서는…
“에, 에드. 기분 나빴어?”
“아니. 괜찮아. 이건 그냥 직스의 질문이 무례한 거지.”
“헉, 그렇습니까.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마친 직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제서야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것이다.
“그래서, 벽까지 부숴가면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부탁 하나만 하자. 나중에 빚은 갚으마.”
“애초에 빚을 지고 있는 쪽은 저 아닙니까.”
직스는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오두막을 짓는 일과, 그 외 자잘한 육체노동을 틈날 때마다 도와줬던 이야기를 하자.
“그거야 그냥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도와드렸던 거고,”
그렇게 툭 받아치고 나서 외투를 걸쳐 입었다.
“분위기를 보건대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
원작 정사대로라면 끝까지 로르텔에게 협조해서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를 마무리 했어야할 엘리스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엘테와 내통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내 입장에선 당장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아예 답이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가 끝나고 이어지는 현자의 봉서 쟁탈전.
대현자 실베니아가 남긴 성위마법의 연구 기록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는 학사와 상회. 그 틈바구니에서 로르텔이 계획한 엘테 실각 계획은 꽃을 피운다.
엘테가 실베니아에 장기간 체류 하는 동안, 엘테 상회 본점에서는 그를 실각시키기 위한 세력이 집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만큼 타이밍이 좋을 순 없다.
엘테는 제국 북서부의 대농장에서 나오는 곡물 매물을 독점하려다 실패했고, 대양 너머 테론 왕국의 콜렛 상회와 면직물 독점 유통 계약을 체결했지만 그 가격이 폭락해서 또 실패했다.
아무리 식견이 뛰어나고 굳은살이 배긴 상인일지라도, 오랜 세월을 사업 전선에서 노니다 보면 분명 실패도 하고 손해도 본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그런 헤프닝이 세 번 네 번씩 겹쳐 일어나는 일도 생긴다. 그것은 상회 내의 입지 하락으로 이어져, 철저한 실력주의를 표방하며 상회를 이끌던 엘테 본인의 위치조차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긴 세월동안 준비한 계획일까. 거기까지는 나도 잘 알 수 없다.
허나, 지금 시점에서 로르텔이 꾸민 엘테 실각 계획은 이미 완성단계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명분만 만들어 내면 되는 상황까지 왔건만, 계획의 구심점인 로르텔이 꼬리를 밟혀버렸다.
매사에 일처리가 확실하고 언제나 이성적인 로르텔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지점에서 실수를 범했는가.
– 쿵!
1층 메인홀.
휘황찬란한 옷을 두른 엘테를 중심으로, 상업도시 올덱에서 고용해왔을 용병의 무리가 열댓명이다.
엘테가 몰고 온 무리 치고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적다. 나는 거기서 확신했다. 엘테는 이 상황을 절대로 큰 사건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학생들인가? 어서 대피하게.”
테일리를 막아선 것은 나 혼자였지만, 이번 손님맞이에는 종업원이 두 명 더 껴있다. 2학년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와 1학년 차석 직스 에펠슈타인. 학생의 신분이지만, 현역을 상대로도 아쉬울 게 없는 실력을 지닌 유망주 중의 유망주다.
예니카는 내 뒤에 서서 힐끗힐끗 주변을 보고 있고, 직스는 근처 기둥에 대충 기대고 서있었다.
“혹시… 엘테 상회의 회주, 엘테 케헬른님 아니십니까?”
나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엘테를 불렀다. 용병들의 중심에 서있던 그 거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번 길을 비키라 이야기했다.
“이럴수가!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륙을 호령하는 거상 엘테님이라니. 그런 귀하신 분이 어찌하여 이런 변방에 있는 실베니아까지 행차하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황금의 딸 로르텔.
황금왕 엘테.
메이드 장 엘리스.
결국 이야기의 흐름을 꿰차고 있는 것은 이 셋이다.
엘테를 실각시키고 유년 시절의 복수를 하며 회주의 자리를 공석으로 만드려는 로르텔.
그런 로르텔의 계획을 저지하고, 현자의 봉서 매입 계획을 성공시키려 드는 엘테.
그 둘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는 엘리스.
결국 이야기가 비틀린 근본적인 원인은 엘리스의 돌발행동이다. 그 원인은 아직 불명이지만, 어쨌든 메이드장을 제압하겠답시고 5층까지 뛰어올라갈 필요는 없다.
나머지 이야기가 정사대로 잘 흘러가고 있으니, 테일리 일행이 메이드장을 제압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스펙도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파티 멤버도 든든하다.
그렇다면, 내가 맡아야 할 부분은 엘테 쪽이다.
“…저희는 이 건물 내부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붕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교직원들이 오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통과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학사에서 따로 지시를 받았나?”
“아니요. 저희가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돌발 상황 아닙니까? 저희 실베니아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상점 제도가 확실하거든요.”
딱 좋은 핑계다. 그러나 그 의도 또한 엘테는 읽고 있을 것이다.
“…엘테님처럼 고귀한 분이 행차하셨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먼저 학사 쪽에 이야기를 해서 신분에 합당한 대접을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엘테는 이 상황을 절대로 크게 벌리고 싶지 않다.
이 사건의 흑막이 로르텔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나서는 안 된다.
제 아무리 척진 사이라 할지라도, 로르텔은 엘테 상회 소속이자 엘테 본인의 양녀다.
이 사건의 배후에 엘테 상회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엘테 상회는 반파된 오필리스관의 복구비용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적을 함정에 빠트리려다가 되레 자기가 덤터기를 쓰게 되는 꼴이다. 메이드장 엘리스가 캐치하지 못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엘테 입장에서는 로르텔을 그저 나락으로 보낸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만사 오케이가 되는 게 절대 아니다.
로르텔은 학사의 손이 아닌 엘테 본인의 손으로 처리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 엘리스나 셰니/켈리, 윌레인, 그리고 나까지 회유해서 입을 막아야 한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
“너는, 로르텔의 편이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그는 내가 어느 정도 진상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지금 당장 그 아이가 약속한 금화의 갑절을 주마. 길을 비키거라.”
괜한 감정싸움도, 어줍잖은 타협도 없다. 시간이 촉박하기에 상대가 거절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조건의 최대치를 부른다.
“감사합니다. 허나 받기로 약속한 금화가 없는데, 거기에 몇 갑절을 하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하.”
엘테는 짧게 웃었다.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그 아이와 의리를 지킨다고 해서 너를 특별 취급이라도 해줄 것 같으냐? 혹여나 그 아이의 미려한 외관에 혹하기라도 하였느냐?”
그 말에 직스는 오호, 하고 웃어 보이고 예니카는 히끅대며 나와 엘테를 번갈아 보았지만, 엘테 본인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그 아이는 여우의 피를 타고났다. 남의 등이 보이면 곧장 칼을 찌르는 자다. 어렸을 적부터 쭉 키워온 애비인 내가 누구보다도 똑똑히 잘 알고 있지. 급기야 먹여주고 재워준 나한테까지 그 칼날이 향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습니까?”
“양부까지도 배신하는 인간이다.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금화에 의리를 지키기보다, 눈앞의 확실한 이익을 취하거라. 그게 당연하고도 합당한 행동이다.”
그리 이야기하고서는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본다. 당장 용병에게 지시를 내려 강행 돌파를 하지 않는 것은, 역시 일을 키우고 싶지 않기 때문일 테지.
“아니면, 그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느냐?”
“굳이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야 합니까?”
“그래, 말이 통하질 않는군.”
로르텔에게 그리 애틋하다 할 만한 감정은 없다.
다만, 정사의 흐름이 어쨌니 하는 이야기가 통할 리도 없다. 그러니 결국 ‘그냥’이라는 이유로 퉁치고 만다.
이유는 없는데 그냥 믿는다.
그런 어이없어 보이는 언동에 엘테는 혀를 찰 테지만, 이 쪽엔 이 쪽의 사정이 있을 뿐이다. 거기다 대고 이해를 바랄 수도 없다.
나는 조용히 목소리를 내리깔고 예니카와 직스에게 말했다.
“상황을 보고 올게. 그 동안 시간을 끌어줘.”
고개를 끄덕이는 직스와, 어딘가 불안한 얼굴을 하는 예니카를 뒤로 한 채, 나는 얼른 메인 로비의 문을 박차고 내부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로르텔을 찾아내서 상황을 전달…
“….”
…하려고 오필리스관을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미 문 반대편 구석에서 동공을 늘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로비에 엘테가 들이닥친 바깥 상황을 다 확인한 모습이다.
“….못 나가고 있었냐?”
“그….”
평소처럼 여우같은 미소는 없다. 로르텔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지, 그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 여유 넘치던 그 모습도 사라져 있다. 아마도 테일리를 막느라 피칠갑이 되어버린 내 모습에 당황한 모양이다.
“상황 설명할 시간은 줄어서 좋네. 일단 뒷문으로 돌아서 나가자. 뛸 기력은 남아 있냐?”
핏물과 섞여 붉어진 빗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면서 자꾸 간질거린다. 나는 얼른 손을 털어내버리고, 비를 맞아서 산발이 된 앞머리도 대충 쓸어올렸다.
“뒤쳐지지 말고 잘 따라와.”
시나리오 메인 인물과 필요 이상으로 엮이는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돌발 상황 아닌가. 이야기 흐름을 원래대로 꺾고 나서 다시 거리를 두면 될 일이다.
애당초 여기까지 엮였으면 후진도 못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르텔을 데리고 발걸음에 속도를 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