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8)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8)
호의나 신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동반되는 법이다.
엘테 상회 6대 거상 중 하나인 슬로그가 로르텔에게 가담한 이유는 그가 차기 회주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멜버락 상회의 회주 시튼이 미소와 함께 로르텔의 계획에 가담해준 이유는, 엘테 상회의 내부 균열이 상업도시 올덱의 권력 구도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올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엘테 상회의 접수원 샤로가 로르텔에게 치근덕대는 것은, 로르텔이 혹시나 실수로라도 돈 될 만한 정보를 흘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회 일꾼 카단이 로르텔 앞에서 유독 호탕해지는 것은, 로르텔이 팁을 자주 건네주기 때문이다.
학회에서 기르는 애완조 티니가 로르텔에게 들러붙는 이유는, 로르텔이 주는 모이가 가장 고급이기 때문이다.
모든 호의에는 꼬리표처럼 그 이유가 따라 붙는다. 적어도 로르텔의 세계에선 그렇다.
대개는 그 이유를 잘 간파해내면, 상대의 의도나 심리까지도 전부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다.
피를 섞은 가족도, 사랑을 약속한 연인도, 긴 시간을 함께한 맹우도 없다. 그런 로르텔에게 이유 없이 호의를 내비치는 자란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기에, 역설적이게도 모든 인간관계에 냉소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는 것 같네. 어쨌든, 엘리스가 널 배신한 거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엘리스를 믿었다. 어찌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실책인가.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신뢰를 보내지 않았던 삶의 태도가 무색해지고 만다.
떠오르는 사람은 예니카 페일로버다.
호의와 사랑을 잔뜩 받고 자라, 본인도 호의와 사랑만으로 세상을 대하는 동화책 속의 공주님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바라보는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게 세파의 때가 묻지 않은 아리따운 소녀의 연심이구나 하고 납득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봤다면, 우중충하고 때탄 자기 모습을 망각하지 말았어야지.
낭만 넘치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풍경에 취해, 자기도 그런 낭만 넘치고 아리따운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 따윈 하지 말았어야지.
“셰니가 엘테와 접선하는 걸 봤다. 셰니는 엘리스한테 충성하는 메이드였지, 아마?”
1층 복도를 앞서서 달려 나가며 에드 로스테일러가 말한다.
“그래도 엘리스나 엘테가 네 행적을 학사에 보고하지는 않을 거다. 황금왕 엘테 본인도 이 사건이 엘테 상회와 접점이 있다는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이번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를 위해 로르텔이 매수한 사람은 다섯이다.
메이드장 엘리스, 쌍둥이 메이드 셰니/켈리, 열등생 대표 윌레인, 그리고 몰락 귀족 에드.
엘리스와 셰니, 켈리는 엘테 쪽으로 넘어갔다.
윌레인 또한 엘테에게 가담했으면 했지, 로르텔에게 가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 또한, 엘테에게 회유 당했어야 했다.
문득 걸음걸이가 멈췄다. 앞서 달려 나가던 에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돌아보더니 금세 미간을 좁혔다.
시간 없는데 뭐하고 있냐는 투다.
로르텔은 드디어 마음을 추스르고, 애써 여우 같은 미소를 짓고서는… 본인도 왜 내뱉는지 알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하게 됐어요. 에드 선배님. 지금은 약속한 금화 20닢을 드릴 수 있을지 보장할 수가 없어요. 보시는 것처럼, 지금 상황이 불안정한지라.”
그깟 배신 한 두 번이 대체 무어라고, 엘리스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로 가슴 속이 끈적하다.
로르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지금 심신미약 상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멍청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드 로스테일러는 엘테 쪽에 붙지 않고 로르텔의 편을 들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 의도를 읽고 꿰뚫어서 그를 이용해먹을 생각을 하는 게 최선일 테다.
그러나 멍청이 같이 이런 자백을 늘어놓고 만다.
이게 대체 무슨 머저리 같은 행동이란 말인가. 굳이 아군에게 자기편이 되어 줄 이유가 없다고 자수하는 꼴이라니.
“누가 물어봤냐? 바빠 죽겠는데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해.”
그러나 로르텔의 말을 탁 쳐내는 에드의 모습엔 일말의 고민도 없다.
“너, 지금 엘테한테 잡히면 인생 끝나는 거야. 후일을 도모하든 뭘 하든 일단 도망쳐야 할 거 아니냐고.”
복도 맞은편에 서서 질책하는 에드의 몰골은 아예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경이다.
필시 로르텔의 부탁대로 오필리스관의 1층을 지키다 이런 몰골이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런 노고를 피력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고 한 마디 툴툴거릴 법 하건만.
“아니면, 다른 뾰족한 대책이라도 있어?”
“…”
“있으면 네 뜻대로 하자.”
시원스럽게 로르텔의 뜻에 가담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어투에는 의심의 기색조차 없다.
정말로 이 남자는, 로르텔의 의견을 따라 손을 내어줄 것이라는 확신조차 들고 만다.
누누이 말했듯, 호의와 신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남자의 호의와 신뢰에는 그 어떤 이유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남자는 엘테의 회유에 넘어갔어야만 한다. 백 명에게 묻는다면 백 명 모두가 그렇게 했을 터다.
그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면 믿어서도 안 된다. 아직 상대를 완전히 간파하지도 못했는데, 함부로 속내를 공유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엘리스를 믿었다가 이 꼴이 된 게 방금 전 아닌가.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입이 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만두라고 내면의 목소리가 외치지만, 만신창이가 된 심정 탓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손을 거둘 수가 없다.
그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오는 것은, 엘테 상회의 내부 사정과 상회 내 세력 싸움의 전말이다.
“…상회 본점 쪽에서 계획하고 있던 시세 조작 계획이 있어요. 아마도, 아버지가 계획한 것이겠죠.”
“설명해봐.”
“작년 여름에 있었던 대대적인 동부산맥 마물족 토벌이 끝나고 장구류 시세가 폭락했거든요. 남아도는 장구류 매물을 전부 매입해서 독점한 뒤, 내부 거래를 반복해서…”
“통정거래구나. 짧게 설명해도 돼.”
에드는 시원스럽게 설명을 잘라내버렸다.
토벌대 주둔지를 중심으로 그 지역의 장구류 매물들을 독점한 뒤, 시장에서 그 매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반복한다.
핵심은 내부자 거래라는 점이다.
엘테 상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매수된 상인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를 반복하는 것이다.
A B C라는 세 상인을 매수했다고 치면, A 가 B에게 장구류를 금화 1닢에 팔고, B가 C에게 2닢에 팔고, C가 다시 A에게 3닢에 파는 식으로 조금씩 시세를 올려가는 행위다.
결국 금화와 장구류 매물은 엘테 상회의 손아귀 안에서 빙빙 돌았을 뿐이지만, 그 시세는 착실하게 올라간다.
그런 식으로 거품이 낀 시세를 수요가 뛰어 오르는 다음 마물족 토벌까지 유지한다. 그럼 말도 안 되는 이윤을 남기며 장구류들을 매각할 수 있다.
그런 주먹구구식 담합으로 시세를 조작하는 게 말이 되는가 싶지만, 의외로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다만, 막대한 양의 자본이 필요하기에 현실성이 없을 뿐이다.
“그 계획을 위해 아버지는 올도가르 공작가와 오페르 백작가 쪽에서 채권을 당겨썼어요. 다만, 만기일이 도래할 때 쯤 마물족 토벌 계획이 뒤로 밀려서 급전이 필요해진 상황이죠.”
“그 타개책이 현자의 봉서였고?”
“네.”
별로 설명한 것도 없는데 에드의 이해가 무척 빠르다. 마치 선행학습이라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현자의 봉서를 손에 넣기만 하면 비싼 값에 매입해줄 사람을 찾았다고… 실베니아에 입학생 신분으로 들어가 현자의 봉서를 탈취할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했죠.”
“그래. 알았다. 그 뒤로는 설명할 필요 없어.”
“네? 이거면 된다고요?”
에드는 로르텔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있을 시간도 아깝다며, 다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서 걸어 나갔다.
“그 뒤로는 구구절절 이야기 해봐야 뭐하겠어. 학사 재정을 궁지에 몰기 위해서 이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의 규모를 불린 거고, 그럼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에 현실성이 생길 테니 그걸 미끼로 엘테를 상회 본점에서 끌어내고, 그 틈을 타 본점에서 장구류를 매각해버릴 생각이었겠지.”
대충 성큼성큼 걸어 나가면서 핵심만 내뱉지만 이야기는 싹 다 본질을 꿰뚫고 있다. 상황을 파악하는 속도가 일반적이지 않다.
로르텔은 벙찐 눈으로 에드를 쳐다보았지만, 에드는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다.
결국 통정거래를 통한 시세 조작의 핵심은 서로 간의 신뢰다.
A, B, C 세 명의 상인이 서로 간에 돈과 매물을 주고받으면서 인위적으로 시세를 불리는 행위.
그러나 A, B, C 세 명 중 하나라도 중간에 배신하면 성립할 수 없는 구조다. 적당히 시세가 올라 갔을 때 쯤 먼저 재고를 다 털어버리고 잠적해버리면 나머지 둘만 엿을 먹는 구조다.
예시로 A, B, C를 들었지만… 상회와 시장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거진 수십 명이 넘는 중견급 이상의 상인이 엮여있을 터.
지난 반년 간 그 중 3분의 1 정도를 회유 했으니, 타이밍만 잘 잡으면 대대적인 장구류 매각을 통해 한 번에 시세 폭락을 유도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거품을 쌓아올린 가격이니 만큼, 그 가격을 폭락시키기는 어렵지 않다. 가격은 올라가는 게 어렵지, 경쟁적으로 매물을 매각하기 시작하면 떨어지는 속도는 순식간이다.
장구류를 잔뜩 들고 있는 엘테 상회 입장에서는 그 가격 폭락은 막대한 손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흑자의 폭이 줄었을 뿐일 테지만, 지금 당장 단기적으로는 상회 장부에 막대한 양의 적자를 기록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다. 보이지도 않는 거시적인 그림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여러 손해로 인해 상회 내에서 좁아져만 가는 엘테의 입지는 이번 손실로 인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그 외에 자잘자잘한 장부 조작 혐의나 손실 책임 따위를 덧붙이기까지 한다면, 실각의 명분으로는 이보다 충분할 순 없다.
방금 그 말만으로, 이 모든 그림이 에드 로스테일러의 머리 안에 그려질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의 순발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그림을 로르텔의 간략한 설명만으로 그려낼 수 있을 리가 없건만.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겠군.”
그러나 에드의 말은 여전히 핵심을 찌른다.
“어떻게 해서든, 상회 본점에 지금 당장 장구류를 매각하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본디 상회 내부 자산을 그 정도 규모로 매각하려거든 회주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회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업무 처리의 신속성을 위해 휘하의 6대 거상 중 원로가 그 결재권을 승계 받는다.
엘테 상회 6대 거상 중 하나인 슬로그. 차기 회주의 자리를 약속 받고 로르텔의 계획에 가담한 늙은 여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장구류 매각 안에 확인 도장을 찍어버리게 된다면… 그 책임은 통탄스럽게도 엘테의 것이 되겠지.
분노한 엘테가 슬로그를 처벌하려 해도, 이미 실각 명분이 선 시점에서 그의 패배다.
본래 이 모든 계획은 ‘현자의 봉서 쟁탈전’ 이벤트에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다.
분노한 엘테가 로르텔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비명을 지르지만, 흔들거리는 마차 한 구석에서 로브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흘리는 로르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벤트는 마무리 된다.
그 뒤로는 봉서를 훔쳐 비밀 연구실로 달아난 글래스트 교수를 추격, 섬멸 하는 것으로 2막 종료. 사실 이 쪽이 더 메인이벤트이고 규모도 크다.
“제 방에 가면 전서구가 있어요. 상회 본점의 제 내부 세력에 직통으로 연결된 연락책이죠.”
“그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상회 본점에서 매각 계획이 실행 될 때까지 잘 숨어 있으면 네 승리겠네.”
“다만, 아버지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거에요. 오늘 밤 안에 저를 포획해서, 모든 계획과 내부의 배신자를 실토하게 만들 생각이겠죠.”
함부로 자리를 비웠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엘테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직접 실베니아까지 달려왔다. 심복 중에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파악이 되질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알리는 일 없이 최소한의 규모로 행차했겠지만, 그럼에도 상회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다.
서로 간에 모든 걸 다 배팅했다. 이 추격전은 부녀의 희비를 가르는 마지막 승부처다.
“뒷문으로 나가서 외벽을 따라 돌아 네 방 창문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저도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 말 잘 통하네.”
정말로 말이 잘 통한다. 마치 윤활유가 잔뜩 발린 것처럼 부드러운 의견 교환이다.
이해가 빠르고, 의견 조율이 능동적이며, 위기에 강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손목을 잡아끌며 복도를 달려 나가는 에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로르텔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오필리스관 뒷문이 보인다. 정문처럼 으리으리 하진 않지만, 나름 고급스럽게 새겨진 문양과 그림들이 건물의 품격을 대변한다.
“잘 들어라, 로르텔. 지금 네 위치가 들켜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최대한 목격되지 않은 상태로 은신처에 잘 숨어들어야 해.”
“미네 지방 쪽에 따로 매입해둔 별장이 있어요. 그 쪽까지만 마차를 타고 나갈 수 있으면…”
“내가 엘테라면, 아켄섬 외부로 향하는 다리 두 개에 모두 사람을 대기시켜놨을 거다. 백프로 꼬리를 밟히겠지.”
에드의 말이 정확했다.
로르텔의 마차를 끄는 마부는 믿음직한 사람이지만, 어쨌든 그 마차의 외관은 나름대로 화려하다.
다리를 대놓고 통과했다간 반드시 미행이 붙을 것이다.
“생활동에서 대기하고 있을 마부에게 이야기해서, 그냥 빈 마차만 아켄섬 밖으로 내보내. 그리고 적절한 지역에서 마차를 버리고 도망치라고 지시해. 그럼 네가 아켄섬 외부에 있다고 멋대로 착각할 거다.”
“그럼 저는…?”
“북쪽 숲에 내가 짓다만 오두막이 있어. 거기서 딱 3일만 버티면 되겠네.”
등잔 밑이 어둡다. 실베니아 바로 옆에 있는 숲이라면, 여기에 있으리라 쉽게 생각하지 못할 터.
“네 전서구는 내가 네 방으로 가서 날려보내마. 대충 ‘지금 당장 매각하라’는 메시지만 써서 전달하면 그 외 복잡한 일은 상회 본점 쪽에서 다 처리하겠지?”
“…네, 맞아요.”
마치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동료 상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드의 움직임과 일처리엔 일절 낭비가 없다.
제 몸처럼 딱딱 맞춰주며 일을 해결해주는 에드를 보고 있노라면, 진짜로 모든 걸 믿고 맡겨도 괜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고 만다.
그런 낭만적인 관계는 성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마음이 다시 한 번 귓가에 속삭인다.
이번엔 정말 될 지도 몰라.
누누이 말했듯, 집착이란 감정은 아득한 절벽 위의 꽃을 대상으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결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
에드는 뒷문을 열어보려다가, 문 틈새로 밖을 보더니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잘 들어라, 로르텔. 후문 쪽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에드는 재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너는 위치나 동선을 들켜서 좋을 게 없어. 내가 밖에 나가서 처리하고 네 방 쪽으로 뛸 테니까, 그 동안 너는 눈치 보다가 시야에 사람이 없어지면 생활동 쪽으로 도주 해. 알아들었어?”
로르텔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드는 불만인 듯이 미간을 좁히고 로르텔을 닦달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거 맞아?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냐?”
“네, 네… 잘 알아들었어요.”
에드는 로르텔의 양 어깨를 잡아 쥐더니, 그대로 로르텔의 몸을 당겨서 옆 벽으로 밀어 넣었다. 로르텔은 화들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동공이 떨렸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문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로르텔을 밀어 넣은 것 뿐이었다.
“일단 북쪽숲까지만 들어가면 추격의 여지는 없을 거다. 그 뒤로는 너한테 달렸어.”
그리 말하고, 에드는 후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몸을 꺾었다.
“에드 선배님.”
반사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로르텔은 자기가 당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끝끝내 묻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모든 호의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간파하는 것으로 대개는 그 인간의 심리나 행동 원칙까지 한 눈에 들어오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그 속내를 물어보는… 막 상인이 된 초보조차도 안할 실수를 범하면서까지… 로르텔은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해도 에드 로스테일러의 입장에선 무조건 엘테 쪽에 붙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금전적인 이득이든, 승산이나 영향력이든 뭘 봐도 현재 상황에선 로르텔이 열세다.
굳이 선악 구도로 이분해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로르텔은 악인이면 악인이지 절대로 선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는 로르텔의 편에 붙었다.
로르텔의 그 질문에, 에드는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인상을 잠시 찌푸리더니.
“…그냥? 왠지 그래야 될 거 같아서?”
얼버무리는 듯한 어조로 대충 그리 말하고서는… 후문을 박차고 나갔다.
-쏴아아아아
-쿵, 쿵.
열린 문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넘어 들어오고, 오필리스관 전체에는 전투로 인한 파열음 따위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5층에서 벌어지고 있을 메이드장 엘리스와 테일리 일행의 전투로 인한 소음인 듯 했다.
-쿵, 쿵, 쿵
격렬한 전투로 인한 소음은 오필리스관의 마지막 싸움을 장식할 것이다. 로르텔은 테일리 일행이 승리할 것임을 직감했다. 제 아무리 오필리스관의 메이드장이라 할지라도, 테일리가 검성식을 구사하기 시작한다면 힘이 부치기 시작할 것이다.
벽에 밀어붙여진 그 상태로, 로르텔은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속내가 보이질 않는다. 모든 호의와 신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 그의 이유랄 것이 보이질 않는다.
금전적인 이득도 없고, 사상적인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다른 이유라 할 게 뭐가 있다는 것인가.
– ‘혹여나 그 아이의 미려한 외관에 혹하기라도 하였느냐?’
문득 엘테가 했던 추궁에 등줄기가 훅 하고 달아오르고 만다. 그러나 이윽고 고개를 붕붕 휘젓게 된다. 전술했듯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은 감정에 휘둘려 행동하는 타입은 아니다.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한테는 항상 예니카 페일로버가 붙어 있지 않는가.
그러나 느껴진 한 줄기 위화감의 정체는, 딱히 둘이 연인 관계는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에드를 바라보는 예니카의 열렬한 눈빛은 분명 대번에 그 정체를 눈치 챌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시 그 애정은 단방향으로만 통하고 있는 것이다.
– 쿵, 쿵, 쿵
오필리스관에 퍼져나가는 전투음을 배경삼아 서 있다가, 로르텔은 그대로 벽을 타고 미끄러져서 앉았다. 가뜩이나 뛰어서 힘든데 심적으로 궁지에 몰리기까지 하니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다.
그대로 복도 구석에 주저 앉아, 한참동안 허공을 쳐다본다.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줬다.
대체 그 한 문장이 뭐라고 가슴 안에 걸쭉하게 남아 호흡이 가빠지게 만드는가.
문득 피어오르는 위화감은, 건물이 흔들리고 있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정도의 전투음이 오필리스관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을 정도면, 진동이 퍼지거나 건물의 파편 따위가 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평화로이 빗줄기만 주룩주룩 흐르는 창밖의 광경에, 로르텔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 쿵, 쿵, 쿵.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소리는 로르텔 본인의 심장소리였던 것이다.
*
-쏴아아
비 내리는 오필리스관. 그 빗줄기도 제법 얇아져, 곧 있으면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꼭대기 층에서는 테일리 일행과 메이드 장 엘리스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1층에서는 엘테를 막아선 직스와 예니카가 실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휘황찬란한 전투와는 떨어진 후문. 어둑어둑한 밤공기 사이로 비를 맞으며 서있는 메이드 하나가 보인다.
언제부터 서있었던 걸까. 아무도 후문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충성하는 주군 엘리스를 위해 가만히 서서 도망자를 포획할 준비를 하고 있다.
비에 젖은 메이드복은 완전히 눌러 붙고, 연보랏빛 머리칼도 풀어 헤쳐져 있다.
천천히 뒤로 도는 그 모습을 살펴보면, 3층의 보스로서 테일리의 앞을 가로막았어야할 쌍둥이 메이드 중 하나인 셰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다.
“에드 도련님이 거기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그녀는 엘테를 안내한 후, 곧바로 후문을 틀어막고 로르텔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을 지우지 않고, 셰니는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애석하게도 셰니의 능력치와 패턴은 지긋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동생 켈리와 함께 합을 맞춰야 비로소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의 보스다. 따로 따로 떨어져있어서야 절반 이하의 능력밖에 보여줄 수 없다.
마지막 관문 치고는 좀 싱거운가.
나는 빗줄기를 맞으며 셰니와 대치했다.
이제 이 고생스러운 점거 사태도 막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