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0)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1)
마법부 2학년이자, 예니카의 절친인 클라라는 아침부터 반파된 오필리스관 근처까지 나와 있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씨. 안녕하세요.”
큰 피해를 남긴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가 끝나진 않았다고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메이드들이 연관 되어 있는 듯 한 느낌이란 소문이 든다.
클라라는 그 소문이 마냥 뜬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세한 진상에 대한 것은 학사 감찰부에서 결론을 내릴 일이겠지만.
“헉.”
반파된 오필리스관의 피해 복구 현장.
그래봐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복구 작업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학사 직원들과 메이드들이 피해 규모를 파악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장미정원 쪽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뭔가를 분주히 메모하며 돌아다니던 벨 마이아와 마주치자, 클라라는 헛숨을 한 번 삼켰다.
벨 마이아는 평소와 달리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린 검붉은 색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께에 달린 푸른 장미 모양 브로치와 스커트 자락을 따라 내려오는 푸르스름한 프릴은 분명… 메이드 장에게만 허락된 복식이었다.
“예니카 아가씨의 친우분이시군요. 오필리스관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벨씨. 혹시 진급하셨어요?”
“엘리스님이 사정상 메이드장 직을 더 역임하실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선임 메이드인 제가 임시로 승계 받았습니다.”
오필리스관 내의 여론을 살펴보자면 결국 그 임시라는 타이틀을 떼고 정식으로 메이드장 직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 뻔했지만, 벨은 그런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 그렇네요. 뭔가 직위가 높아지신 것 같아서…”
“껄끄러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주 업무가 봉사이니 만큼, 필요하신 부분이 있으면 말씀 하십시오.”
“아뇨. 그냥… 개인적으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바빠보이시네요.”
“음…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벨은 체크 리스트를 살펴보고 반파된 오필리스관을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부분의 일은 일단락 됐고, 추가적인 지시도 필요하진 않을 것 같으니 저도 잠시 휴식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그래요?”
“상담하시고 싶은 일이라는 게 뭡니까?”
“그… 놀라지 마세요. 이건 정말 일급비밀이에요. 절대로 다른 곳에 유출하시면 안 되고, 놀란듯한 낌새도 보이시면 안돼요.”
클라라는 표정을 굳히더니, 벨에게 슬금슬금 다가와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벨은 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비밀이기에 이리 호들갑을 떠나 귀를 기울였다.
“예니카가… 에드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요.”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에, 예의상 놀라는 척이라도 해줘야 할까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예니카 같은 애가 그 양아치한테 홀딱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로서는 정말 복잡한 기분이에요.”
장소는 장미정원의 벤치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에 누가 지나가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돌아보던 클라라는, 이내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고민을 벨에게 털어놓았다.
“삼일 밤낮을 끙끙 앓으면서 생각해봤지만, 뭐… 요즘들어 에드 그 인간이 평판이 좀 나아진 것도 있고, 예니카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응원해주기로 했거든요. 너무너무 불안하긴 하지만.”
구구절절 한탄하는 클라라의 말을 들으면서, 벨은 그저 예니카가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 귀로 흘렸다. 친구의 인간관계를 저렇게까지 걱정해주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한 끗만 빗나가도 쓸 데 없는 오지랖이 되어버릴텐데, 클라라는 그 선을 잘 지켜가면서 예니카의 연심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단 예니카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친구로서는 예니카랑 에드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클라라 아가씨도 걱정이 많으셨겠습니다.”
“근데.. 본론은 그게 아니에요!”
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하자, 클라라는 다른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로르텔 케헬른! 그 이름 아시죠? 벨씨는 오필리스관의 선임 메이드셨으니까!”
“…네, 당연히 압니다.”
“요즘들어 예니카가 자꾸 그 이름을 입에 담더라구요. 1학년 애인데, 합동 전투 실습 때부터 해서 이래저래 많이 엮였나봐요. 그런데 뭔가 낌새가 심상치가 않아요.”
다시 한 번 클라라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고 벨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봤는데, 아니 글쎄 개학식 때도 둘이 같이 결석했고, 어제 첫 수업 때도 공통 수업에 동시에 결석했대요. 예니카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제 생각에는 예니카가 궁지에 몰린 것 같아요.”
과연, 소녀에게 있어 연적의 존재는 재앙과도 같다만… 벨은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벨씨에 대해서는 예니카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예니카가 엄청 의지하고 있었다고 했고, 또 항상 도움이 되는 조언만 해주는…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걸요.”
“과찬이십니다.”
“거기다가 벨씨는 예니카는 물론이고 그 로르텔이라는 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의견을 묻고 싶어서 왔어요.”
“로르텔 아가씨는 유명하신 분이니, 클라라 아가씨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금의 딸 로르텔에 대한 소문은 학년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있을 것이다.
“잘 알죠. 다만, 단편적인 모습만 보면… 도저히 예니카에게 승산이 보이질 않아서…”
“예니카 아가씨도 충분히 매력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로르텔이라는 애가 그렇잖아요…”
클라라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르텔 케헬른은 여우같은 소녀다. 항상 품행이 방정하고, 행동거지가 단아하지만 기회가 오면 여지없이 새까만 속내를 드러내는 작은 악마다. 클라라도 잘 알고 있다.
상인으로서의 삶도 허투루 보내온 것은 아니니, 분명 인간관계를 조율하고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도가 텄을 것이다.
“제가 연애 경험이 출중한 건 아니지만…. 결국 남녀 관계라는 건 밀고 당기기잖아요…”
클라라의 한탄에 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천성 탓에 당길 줄만 알지 밀쳐낼 줄을 모른다.
한편 로르텔은 어떤가. 인간관계 속에서 완급 조절을 할 줄 모른다면 상인으로서는 1인분을 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천성의 매력이 있는 예니카라 할지라도, 로르텔의 노련한 줄다리기 앞에서는 퍼줄대로 퍼주기만 하는… 그런 다 잡은 물고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클라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예니카도 밀당을 하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
“어떻게 해서든 그런 방법을 예니카에게 주입시키고 싶어요. 한 살 어린 애한테 어른스러운 매력이 밀리는 것도 존심 상하는 일인데, 인연까지 빼앗기다니. 차라리 에드가 천하의 나쁜 놈이라 실연을 당했으면 그건 경험이라도 되지.., 인연을 약탈당한 경험은 상처밖에 안되잖아요!”
울분을 토하는 클라라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벨은 괜시리 반응하진 않았다. 저렇게까지 친구의 인생을 걱정해주는 심성만큼은 눈물이 흐른다.
“벨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벨씨는 항상 맞는 말만 한다고 들었어요!”
그 불타는 눈동자가 이번엔 벨을 향한다. 솔직히 말해서 난처할 뿐이었다.
“그,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벨은 에드, 예니카, 로르텔 셋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다. 다소 편파적인 입장에 서 있는 클라라에 비하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편인 셈이다.
“굳이… 예니카 아가씨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언행을 강요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럴까요?”
“그리고 클라라 아가씨의 그런 생각들이 편견일 수도 있잖습니까? 생각보다 예니카 아가씨가 강단이 있을 수도, 로르텔 아가씨가 인간관계에 미숙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드는군요.”
“…글쎄요… 그건 동의하기 힘든데…”
어쨌든 그네들의 연애사에 쓸 데 없이 참견하는 건 좋지 않다. 그게 벨이 내린 결론이었기에, 굳이 걱정이 잔뜩 쌓인 클라라의 등을 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에드 그 인간도 잘 모르겠어요! 어마어마한 벽창호인지, 아니면 기분 나쁘고 음흉한 늑대인건지!”
끝끝내 클라라의 적의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향한다.
“상식적으로 예니카가 그렇게 대놓고 눈빛을 쏴대는데 나몰라라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글쎄요. 에드 도련님에 대해서는… 벽창호나 늑대라기보단… 그냥 연애에 관심을 가지기가 힘든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북쪽 숲에서 캠프를 차리고 의식주를 모두 혼자 해결하고 있는 입장이다.
가끔씩 벨이 식자재나 허브, 약재 같은 것을 좀 나눠주긴 하지만…. 어쨌든 근본적인 생존은 혼자 힘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아카데미의 커리큘럼까지 모두 소화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하루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서 살고 있을 터.
여자한테 한 눈 팔려서 며칠만 정신을 팔아도 당장에 식량이 떨어져 굶어야 되는 상황이다. 거기다가 슬슬 가을이고, 머지않아 겨울이 올테니 준비해야할 일도 잔뜩일 테다.
“그럴 리가 없어요. 뭐, 여복이 많은 거야 그 인간이 타고난 행운이라 하더라도… 분명 속내를 들춰보면 자기 인기에 취해서 헤벌레- 하고 있을 걸요. 상상만 해도 소름 돋아!”
“…”
벨은 딱히 대꾸는 하지 않고, 주먹을 부르르 떨며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클라라를 가만히 내버려뒀다. 어쨌든, 한탄하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해결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벨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에드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당장에 먹고 살기도 바빠보이는 형국인데, 여복이 많다고해서 그걸 꼭 달갑게 여길 수 있을 상황일까. 오히려 묵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만다.
결국 그 소년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생각해보면 하나 같이 고양잇과 생물들만 떠오른다.
로르텔 케헬른은 생선 가게를 앞에 둔 음흉한 도둑 고양이가 떠오른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호랑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순진한 새끼 고양이가 떠오른다.
루시는… 그냥 고양이다.
어찌됐든 그네들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을 에드의 고생이 훤하게 보여서, 벨은 닿지도 않을 격려만 마음속으로 보낸 것이다.
어쨌든, 시간을 내서 에드의 캠프를 한 번 찾아가기는 해야할 것만 같다.
클라라가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니 한 번 확인을 해주고 싶은 것도 있고… 메이드장 엘리스로부터의 전언도 있다.
썩,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
간만에 날씨가 좋다. 나는 캠프 옆 냇가에서 얼굴을 한 번 씻어 내리고, 생활계 스킬들을 한 번 체크하기로 했다.
[ 생활 능력 상세 ]등급 : 중급 장인 전문 분야 : 목공 손재주 Lv 13 설계 Lv 8 채집 능력 Lv 11 목공 Lv 12 사냥 Lv 8 낚시 Lv 6 요리 Lv 6 수선 Lv 5 고급 제작 기술 슬롯이 뚫렸으니만큼, 이 쪽 기술을 습득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이미 무슨 스킬을 습득할지는 다 정해놓았다.
정령술과의 궁합이 좋은 정령식 주입, 그리고 생활 편의 용품과 전투 용품을 만들기 좋은 마공학을 익힐 예정이다.
정령식 주입은 정령과 계약해서 정령식이 들어간 제작품을 하나라도 만들어내면 저절로 습득이 되고, 마공학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마공학품을 한 번이라도 분해 조립하는데 성공하면 해금 된다.
전투계 스킬이나 마법계 스킬들에 비하면 해금 방식이 간편해서 금방 습득할 수 있다. 제작계 스킬들의 강점인 셈이다.
쓸 데 없이 정령 슬롯을 낭비하고 싶진 않지만, 미리 미리 정령식 주입을 단련해놓고 싶다면 하급 정령이라도 하나 잡아서 계약하는 게 좋을까…
이 경우에는 내가 다루지 못하는 속성인 땅이나 물계열 정령이 좋을 듯 하다.
정령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면 정령계 스킬의 숙련도도 탄력을 받아 오르기 시작할 테고, 마법계 스탯이 잘 받쳐주게 된다면 고위 정령과도 계약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니카의 도움을 좀 받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몸 상태는 썩 좋진 않다. 이리저리 뻐끈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은 무리해서 안하고 있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때 무리 좀해서 노동력에 손실이 생긴 셈이다.
뭐 어쩌겠나… 필요한 희생이었다.
어쨌든 시나리오 최중요인물 중 하나인 로르텔의 퇴장은 막았고, 아직까지 별다른 엘테 쪽의 대처가 보이질 않는 걸 보면 작전도 어느 정도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나머지는 엘테 상회 본점 쪽에서 치고 박고 싸울 일이니, 우리는 상황이 잘 흘러가서 긍정적인 소식을 담은 전서구가 날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안녕, 에드! 비 그치고 나니까 날씨가 좀 쌀쌀해졌네!”
“오, 안녕. 예니카.”
예니카는 여전히 매일 캠프에 찾아들었다. 이런저런 식재료들을 들고 와주는 건 덤이다.
“로르텔은 괜찮대?”
“그래. 오두막 안에서 쉬고 있어.”
예니카에게는 일의 전말을 전달해두었다.
당분간은 은신해있어야 하는 로르텔의 처지를 설명해두니, 예니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대고는 매일 같이 찾아와서 로르텔이 괜찮은지를 봐주는 것이다.
허나 지금은 개학시즌이고, 2학기 수업 커리큘럼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로르텔은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수업에 나갈 예정이 없고, 나는 교복이 엉망이 되어서 직스의 교복을 빌려 사이즈에 맞게 수선해야만 했다. 수선이 끝나기 전까지는 수업에 나가기가 영 힘들었다.
나와 로르텔은 상황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수업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허나, 예니카는 그런 사정이 없는데도 하루 종일 캠프에 앉아 마법서를 읽고 있는 것이다.
“예니카, 너는 수업 안 나가?”
“응? 머리가 너무 아프고 몸에 힘도 잘 안 들어와서 북쪽 숲에서 좀 바람을 맞으면서 쉬려고.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니까 몸조리 잘하라고 말씀 해주시더라구.”
“그래? 괜히 나 도와주다가 다친 데 있는 건 아니고?”
“아냐 아냐. 절대 아냐. 에드는 에드 할 일 해. 나도 삼림욕 좀 하다가 때 되면 돌아갈게.”
그렇게 말하는 예니카의 몸은 아픈 데라곤 없이 완전히 멀쩡해 보인다.
하루 종일 캠프 파이어 옆의 나무 등걸에 앉아 책을 읽다가, 때때로 오두막 쪽을 도끼눈을 한 채로 쳐다보는데, 거의 감시나 다름 없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예니카는 로르텔을 완전하게 신용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럴만도 하다. 로르텔의 과거 전력이 워낙 화려하니까.
“그렇군요, 에드 선배님. 뭐, 자세한 사정까지 설명은 못해주신다니 아쉽습니다만… 빚은 잘 갚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해가 질 때쯤 한 구석에서 장작을 패고 있자, 지난밤의 상황을 묻고자 찾아온 직스가 일을 도왔다. 일의 전말을 묻기에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저희가 오필리스관을 때려 부순 부분에 대해서는 흐지부지해진 것 같습니다. 애초에 건물 자체가 반파 됐으니 저희가 좀 부순 건 티도 안났겠지만요.”
“학생들 징계는?”
“그 윌레인이라는 선배가 대부분 덤터기를 쓴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자잘한 경징계를 받은 학생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메이드장은 아직 취조 중인데, 입을 열지를 않는 모양입니다.”
로르텔에 대한 언급은 없는 걸 봐서 메이드장 엘리스는 아직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다. 엘테와 로르텔 중 이기는 쪽에 붙으려거든 섣불리 증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전이 확보된다면 되도록 빨리 접선해야겠군.
“그래. 어쨌든 이번에는 신세 좀 졌다.”
“뭘요. 다음에도 뭐 일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럼 이만.”
손을 흔들며 숲을 떠나는 직스를 마중하고, 도끼를 대충 근처에 내던진 채 한숨을 푹 쉬었다.
오두막 내부에 숨어있는 로르텔은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겠지.
적당히 식량 좀 나눠주면서 시간 때우다가 승전보가 들려오면 원래 생활로 복귀하면 된다.
그 전까지는 별 사고가 없어야 할텐데.
나는 평화롭기를 기원하면서, 슬슬 가을의 냄새가 나는 숲 가운데 앉아 휴식을 취했다.
상처는 대부분 아물어서,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
조용한 오두막 내부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로르텔은 투박한 벽에 기대고 앉아서 조용히 시간이 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가 마무리 되었지만, 아직 로르텔이 해야할 일은 많이 남았다.
첫 번째는 전임 메이드 장 엘리스를 다시 회유하는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메이드 장 엘리스는 조사관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한다. 엘테와 로르텔 중 누가 승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아예 조용히 있을 예정인 것이다.
두 번째는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에 대한 기본 골자를 마련해놓는 것이다.
엘테의 실각은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졌지만, 어쨌든 현자의 봉서를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그 기회를 날릴 수는 없다. 계획을 성립시키면 엘테 상회 내에서 로르텔의 지위는 회주조차도 함부로 건들이기 힘든 유력자 반열에 들 것이다.
당장에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어쨌든 엘테 상회 본점으로부터 답장이 날아와야만 행동할 수 있다. 지금은 북쪽숲에 숨어 사는 신분이니, 안전이 확보되고 나서야 다시 실베니아의 학생으로서 수업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대략 3일 동안은 아무리 바빠도 상인으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이 오두막에서 지내야하니 다소 답답하긴 하지만, 일거수 일투족을 확인하며 불편한 건 없는지 체크해주는 에드 덕에 마음만큼은 푸근하다.
호화롭고 화려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오두막에서 야생의 삶을 보내야하는 신분이 되었음에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역시 함께 지내는 소년의 덕이 크겠지.
에드 로스테일러의 옆에 있으면 심장이 뛴다.
그가 내비치는 조건 없는 호의와 대가 없는 신뢰는 푹신한 침대에 푹 파묻힌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그 감각이, 평생을 차가운 길바닥 위에서 살아온 로르텔에게는 황금보다도 귀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다.
그 상대가 예니카 페일로버라면 더더욱이다.
동화 속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소녀다, 조건 없는 호의나 신뢰를 주고받는 관계란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흔한 것일 터다.
가족이 됐든, 친구가 됐든, 차고도 넘칠 것이다. 같이 있기만 해도 이 사람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가슴 따뜻한 관계가 길바닥의 돌 만큼이나 흔하게 남아돌다니 이런 사치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남아 돈다면, 하나 정도는 양보하란 말이야.
그렇게 심술궂게 이야기 해봐야 알아들을 턱이 없다.
그렇다면 지저분한 진흙탕 속의 싸움만이 남아있을 터다. 애석하게도 로르텔의 전문 분야다.
뿐만 아니라 3일 간의 동거라니, 이 얼마나 아찔할 정도로 완벽한 어드밴티지인가.
“흐음…”
다만, 남녀관계의 진전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잡아쥐는 일이야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그 방식이 애틋한 남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작용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렇다. 험난한 상도의 세계를 살아오며 이해관계만으로 인간을 저울질하고 살아왔기에, 애정관계에 있는 남녀가 어떤 식으로 관계를 진전시키는지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젬병이구나… 하고 자기를 객관화 해보지만, 그렇다고 로르텔답지 않게 기죽진 않는다.
“내 방식대로.”
그리 읊조리고, 자기 방식을 떠올려 본다.
결국 인간의 호의를 가장 쉽게 끌어당기는 방법은 돈이다.
이 허름한 오두막을 금화로 묻어버리면, 어찌됐든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기를 쳐다봐주지 않을까.
“현금이 모자란데…”
안 그래도 이런 저런 사업에 손을 뻗친 와중이다. 로르텔의 개인 자산에도 영향이 미쳤다. 그래도 미네 지방의 별장이나 외곽의 토지 증서들을 매각하면 비슷한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도 있을 법 하긴 하다.
그러나 탐욕어린 눈을 한 에드 로스테일러가 상상이 되어버려, 이내 고개를 가로 젓는다.
결국 돈으로 일궈낸 관계성이니 만큼, 애틋해질 수가 없다.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고, 탐욕만으로 미소지어주는 에드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기도 좀 그렇다.
오늘 하루 에드의 일과만 보아도, 에드는 그야말로 지옥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1분 1초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아득바득 이를 악문 채 살아가는 것이다.
호의를 받고,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이전에… 이유없이 그저 도와주고 싶은 애틋한 마음도 들고 만다.
그러나 그게 동정으로 내비칠까봐 한 켠으로 걱정되고, 결국 돈 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로 나아가게 될까봐 조심스러워져서… 로르텔은 발 끝을 맞댄 채 베베 꼬고만 있는 것이다.
“하… 학비 정도는 도와줘도 괜찮지 않나?”
어줍잖은 동정으로 비춰지지 않는 선에서 그 정도 돈을 내어주면?
애초에 대가 없는 호의라는 걸 내던져 본 적이 없는 소녀이니 만큼 무슨 대사를 치며 돈을 건네야 할지도 상상이 안 된다. 떠오르는 대사라고 예시를 들어 본들…
차, 착각하지마세요. 따, 딱히 선배를 위해서 내드리는 게 아니니까요.
로르텔은 손발이 오그라져 승천할 것만 같아서 애꿎은 오두막 벽을 퍽퍽 두들겼다.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거지만, 왠지 모르게 대사가 무척 고전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평생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살아온, 그런 가면 속의 삶 아니었나. 이런 어줍잖은 일로 가면이 벗겨져서야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내밀고 다닌다.
심호흡 한 번으로 평정을 되찾는다. 요염하고 요망한 태도로 상대의 폐부를 꿰뚫는, 얼어붙은 거상의 기질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
애초에 남녀 관계의 선이라는 걸 어디서 어떻게 조율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내지르고 보면 될 일이다.
어쨌든 지금 에드는 로르텔을 전혀 여자로 보질 않고 있다. 관계의 진전이라는 것은 결국 인식의 전환에서 올테니, 그런 인식부터 뜯어고쳐야 할 터.
로르텔은 마음속으로 어떤 ‘방안’을 떠올리고,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안’이라는 것이 얼마나 급발진이었는지 지금 시점에서 깨닫는 건 무리였다.
상술했듯, 로르텔은 인간 내면을 쥐고 흔드는 짓은 잘하는 주제에, 순박하고 애틋한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예니카조차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구체적으로는…”
다만, 구체적인 실행안을 생각해보려거든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래도 3일 동안은 오두막에서 나가지 않고 꽁꽁 숨어있어야만 하는 신분이니, 생각할 시간이야 널리고 널렸다.
천천히 계획을 수립해나가면, 예니카정도는 순식간에 제쳐버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로르텔은 무릎을 끌어 안았다.
“… 자리 좀 비켜줄래? 거기 내 자리라서.”
다만, 예상치 못한 건수가 있었다면, 새로운 소녀의 존재다.
“…응?”
“하암…”
그 커다란 마녀 모자와, 소매가 남아도는 교복, 시원스레 허리를 넘어 엉덩이까지 뻗어 내려온 양갈래 백발은 익숙하다. 글래스트 교수의 수업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A반 3인방 중 하나다.
대체 언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는지, 천장으로 들어온 건지 공간계 마법으로 들어온 건지 알 수 조차 없는 소녀의 동선은 주변인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든다.
“…루시…? 너 여기서 뭘…”
“거기가 볕이 제일 잘 든단 말야.”
그렇게 말하고는 로르텔을 북북 밀어내고서는, 담비 가죽을 몇 개 휙 던지고 드러누워서… 쌔근쌔근 몸을 안은 채 잠든 것이다.
“…”
로르텔은 혼란스러운 탓에 잠시 본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얘는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