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1)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2)
온갖 인간군상이라고는 다 보고 자란 로르텔에게 있어서도, 루시 메이릴이라는 소녀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류였다.
종종 학사를 거닐다 보면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이는 거야 그냥 괴짜구나 하고 넘어갈 법하다.
그러나 섬 북서쪽의 오른산 꼭대기에서 고위정령을 두들겨 패는 모습이 목격 된다든가, 동쪽 만에서 집채만 한 상어 형태의 마물족을 손짓 한 번으로 없애 버리는 둥…
그 초월적인 강함을 이리 저리 휘두르고 다니는 모습이 왕왕 포착되어 로르텔의 귀에 들어오곤 한다.
그런 주제에 글라스칸 사건 때나 오필리스관 사건 때에는 구석진 곳에서 낮잠이나 자며 힘을 발휘할 생각도 하질 않으니,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로르텔의 정보력으로도 루시 메이릴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출신지는 어디이며, 실베니아에 입학하기 전에는 뭘 하고 살았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다.
게다가 지금 당장 도시 하나 정도는 홀몸으로 박살낼 수 있는 주제에 대체 뭐 하러 아카데미에 다니는지도 이해가 안 된다.
나태한 주제에 수업에는 꼬박꼬박 나오지만, 대부분은 졸고 있는 모습 밖에 안보이고, 심지어 담당 교수인 글래스트는 그런 루시에게 일절 손대지 않는다.
애초에 루시에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낌새 자체가 없다. 보다 못한 직스가 루시의 태도를 글래스트 교수에게 진지하게 보고한 적이 있으나 – ‘그 학생은 내가 가르치냐 마냐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본인이 필요한 성취가 있다면 자기 스스로 깨우치는 타입이니.’
학생을 이끄는 것을 업으로 삼는 교수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준이라니, 결국 직스와 로르텔은 루시의 괴짜 같은 행보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금 신경 쓰일 뿐이지, 루시가 로르텔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다. 아니, 애초에 대화 자체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항상 멍한 얼굴로 몸을 휘적휘적 거리며 학사를 거닐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야생 길고양이 같은 인간 아닌가.
한 때는 그 초월적인 강함에 이끌려 인맥을 터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보면 볼수록 도저히 통제 가능한 인간이 아닌지라 애먼 옛날에 포기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라는 소녀에게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확신했건만.
“무가아아악!”
– 휘익
에드는 루시의 몸을 통째로 들어 어깨에 들쳐 맨 채 바깥의 목재 쉼터에 던져놓고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미안. 깼구나, 로르텔. 오두막에 루시가 숨어들어와 있었네. 지금 치워뒀으니까 편히 쉬어라.”
시원스레 땀을 닦는 에드는 미뤄둔 청소라도 끝마친 듯한 표정이었다.
로르텔의 오두막 생활, 그 2일차 아침.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었다.
생전 처음 냇가에서 몸을 씻어보기도 하고, 젖은 옷을 말리느라 허름한 천만 덮은 채로 오두막 구석에서 부끄럽게 앉아 있어보기도 하고, 에드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요리해준 생선들을 먹으면서 묘한 푸근함도 느껴보고, 별하늘을 바라보면서 낭만에도 젖어보는 등… 한 줄로 요약하기는 힘든 온갖 파란만장하고 두근두근한 경험을 보낸 참이다.
쫓기는 신분인 주제에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웃겨서 대부분은 오두막 안에 틀어박힌 채로 있었으나, 그냥 지금 이 캠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올라와.. 딱딱한 나무 바닥임에도 간만에 숙면을 취했을 정도 였다.
허나, 이 은신 생활이 오로지 낭만뿐인 힐링 캠프였냐고 하면… 또 그렇게 말하기도 힘들다. 일단 도주 중인 신분이라는 것도 한 몫하지만, 가장 불편한 건 천적의 존재다.
“오전 중에 예니카가 들른다더라. 오늘도 불가에서 책 좀 읽다가 이런 저런 정령식 수련을 하려나봐. 필요한 거 있으면 걔한테 말해.”
예니카는 어젯밤 덱스관의 인원 파악 시간 전까지 집요하게 머물다 갔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부터 다시 북쪽 숲에 나오겠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로르텔이 머무는 3일 내내 캠프에 죽치고 앉아 있을 예정인 모양이었다.
가끔 문밖으로 눈을 마주치면 세상에서 가장 맑고 청량한 얼굴로 싱긋하고 웃어주는데, 로르텔도 이에 질세라 세상에서 가장 맑은 미소로 받아쳐주는 것이다. 서로 간에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어쨌든 상인으로서의 삶을 잠시 내려놓은 이 3일 간은, 오로지 예니카만이 로르텔의 주적이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는 캠프에 자주 오나 봐요, 선배님?”
“말해 뭣하겠냐. 그냥 자연재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로르텔은 그 특유의 직감이 울부짖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제 오늘 본 루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캠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틈만 나면 에드의 옆에 들러붙어 있다가 건조대에 있는 육포 몇 개를 주워 먹고, 오두막 옥상 같은 데에서 잠들어 있는가 하면, 장작을 패고 있는 에드 근처의 바위에 널부러져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던지곤 하는 것이다.
애초에 루시라는 인간의 특성상 이성으로 볼만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그거야 지금의 상황일 뿐이다.
에드조차도 일상의 풍경으로 여길 만큼 자연스럽게 캠프에 스며들어서,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옆에 앉아 두런두런 툴툴대고 있는 모습. 이건 꽤 위험한 것 아닌가.
말했듯, 남녀의 인간관계가 발전하는 계기는 보통 인식의 전환에서 온다. 만약 루시가 지금의 태도를 고쳐먹고, 에드를 상대로 연심이나 독점욕 따위를 느끼기라도 한다면… 이건 예니카와는 또 다른 부류의 재앙이 되고 만다. 오히려 더 피곤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상도의 세계에 살며 얻은 수많은 교훈 중 하나다. 재앙의 씨앗을 발견 했다면, 그 시점에서 제거하는 게 옳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고민이 된다. 어떻게? 라고 묻거든 대답을 흐릴 수밖에 없다.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나도 바쁜 와중이니까 이해 좀 해줘라.”
그리 말하고, 에드는 어디서 마련해온지조차 알 수 없는 벽돌을 잔뜩 들고와서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로르텔은 쭈뼛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열린 문 쪽으로 슬쩍 보이는 목제 쉼터에 시선을 던졌다.
완전히 흐트러져서 제 형상을 하고 있지 않는 옷매무새.
그렇게 대충 널부러져서 먹다만 육포를 입에 문채 쌕쌕대며 잠든 루시의 모습은… 확실히 연심이나 독점욕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애초에 그런 감정과는 벽을 쌓고 살아온 게 분명한 모습에… 로르텔은 스스로가 좀 과민 반응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됐든, 루시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 탓에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주의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너무 과민반응해서 스스로 피곤해질 필요도 없지 않을까.
에드와 루시의 접점은 명실공히 그들 사이의 문제지, 로르텔이 끼어들 문제는 아니다. 아직 연인 관계도 뭣도 아닌데 상대를 구속하려 드는 건 너무 피곤한 스타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느 정도 자기객관화가 끝나고 나자, 로르텔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오두막 벽에 몸을 기댔다.
익숙지 않은 연심에 불필요하게 예민해지고만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제 모습도 슬슬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해, 괜시리 손을 베베 꼬게 된다.
그저 무릎을 안고 턱을 거기에 올린 채, 벽돌을 들고 이리저리 연구를 하는 에드의 뒷모습을 슬쩍슬쩍 쳐다봤다.
푼수 같이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건 불가항력이라 어쩔 수 없지만, 괜히 이런 모습을 보여 노련하고 요망한 상인의 이미지를 잃고 싶진 않아 고개를 수그린다.
그 가면은 지금 시점에서 로르텔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어찌됐든 에드의 인간관계에 너무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간은 차고도 넘친다.
* [ 새로운 완성품 ]
수제 벽돌 진흙을 틀에 퍼 담아서 모양을 잡은 뒤, 충분히 말려서 발화 마법으로 구워낸 벽돌.
제작 난이도 : ●●○○○ [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제작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석공 스킬을 익혔습니다. 재주 스탯으로 인해 숙련도의 상승폭이 증가합니다. ] [ 새로운 완성품 ]
벽돌재 벽난로 직접 만든 수제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 접합부를 진흙으로 처리한 탓에 튼튼하진 않으나 난로로서의 제 역할은 충분히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실내에서 활용하려거든 배연관을 붙여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작 난이도 : ●●◐○○ [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제작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타닥, 타닥.
오전 시간을 통째로 쏟아 부었지만 굴뚝까지 만들 만한 시간은 없었다. 오후나 밤 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완성품 자체는 꽤나 흡족한 수준이라, 오랜만에 기분이 썩 좋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오두막에 입주해서 살 날이 머지않았다.
안정적인 주거 환경이라. 이 얼마나 꿈같은 말인가.
“어머나, 냄새가 독특하네요. 바질을 넣은 건가요?”
“저번에 벨이 좀 나눠줬지. 근데 냄새만 맡고도 그걸 알 수가 있나?”
“제가 후각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콧노래를 부르는 로르텔과, 도끼눈을 뜬 예니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불가에 둘러서서 점심 식사를 할 준비를 마쳤다.
보관 상태가 아슬아슬한 생선들 살을 저며서 필레로 만든 다음, 석쇠에 굽고 여러 향신료를 친 음식이었다.
요리 스킬 숙련도도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데다가, 이런저런 다양한 식자재도 얻어다 쓸 수 있는 환경이 마련이 되니 식생활도 급이 올라간 느낌이다.
여전히 야생 식단이라는 점은 똑같지만… 어쨌든 그 맛은 나날이 나아지고 있으니 긍정적인 일이다. 오두막 건설이 끝나면 자그마한 한해살이 채소 정도는 직접 키워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꼬챙이로 한입 베어 물으니 제법 육즙이 잘 스며서 군침이 쭉쭉 올라온다.
“오늘 오전이 되어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계획은 잘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네요.”
로르텔은 조신한 움직임으로 살짝 입을 가려 음식을 씹고서는,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예니카는 뭔가 심통찮은 기분인지, 입을 비죽 내민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승전보만 기다리면 되는 거겠죠.”
“그래. 좋은 일이다만, 방심은 하지 말아야지.”
“물론이죠. 에드 선배님.”
빙긋빙긋 웃으며, 로르텔은 모처럼 발랄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뭐어,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요. 뒤처리 해야 할 것도 남아있고, 에드 선배님 보수도 챙겨드려야 하고.”
“금화 20닢 정도는 네 지갑 사정에 별로 큰돈도 아니지 않나?”
“아무리 작은 돈도 철저하게 상환해야죠. 상인인걸요. 혹시 현금 말고 현물로 받고 싶은 건 없어요, 선배님? 지점 창고에 남아도는 재고들이 허락하는 선에서요.”
“글쎄. 괜히 현물로 받다가 덤터기나 쓸 것 같으니 됐다.”
“어머나. 선배님.”
로르텔은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베베 꼬고서는 까르르 웃었다.
“선배님 상대로는 장난질 안한다니까요.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흠… 당장에 생각나는 거라 해봐야.. 건설자재들이나… 아니면, 그렇지. 남아도는 마공학 용품들?”
“마공학 용품이요?”
제작계열 고급 스킬 슬롯을 뭘로 채워넣을지는 이미 고민이 끝났다. 마공학과 정령식 주입이다.
그 중에서도 마공학 계열 스킬은 최대한 많은 마공학 용품들을 접해봐야 그 숙련도가 쭉쭉 늘어나니, 그걸 유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결 편해진다.
“실용성은 됐고, 그냥 남아돌고 싼 용품들 위주로.”
“흐음…”
로르텔은 턱에 손을 얹고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나중에 재고 확인해보고 말해줘.”
“아뇨, 지금 생각해볼게요. 웬만한 건 다 암기하고 있는 터라.”
“그걸 다 암기하고 있다고?”
“매일 같이 재고 변동 흐름을 보고 받고 있다 보면, 별다른 변동 없이 항상 일정한 항목들은 저절로 암기가 되기도 하거든요.”
글쎄. 지금 당장 주고받을 것도 아니니 그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로르텔은 생각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내 요청을 고려해주었다.
“근데 굳이 인기 없고 싼 용품들을 요청하신 이유가 있어요?”
“글쎄. 그리 유용한 용도로 활용하진 않을 거고, 괜시리 비싼 거 요청했다가 빚을 지거나 부담 되는 것도 웃기잖아.”
“아하~. 그런 이유라면 뭐… 가만 있어보자…”
로르텔은 방긋 웃더니, 잠시 양해를 구하고 생각에 잠겼다. 1, 2 분이면 되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한참을 생각에 잠긴 통에 나는 다시 음식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예니카. 생각난 김에 말하자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우으응?!”
생선살을 먹던 예니카가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자기 불러서 놀란 것인지, 목이 멘 듯 해 얼른 물을 건네주었다.
“푸하아!”
“…”
“부탁이라니?”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굳이 고민까지 필요한 일일까 싶어서 시원스레 이야기를 털었다.
“요즘 정령계 마법을 좀 익히고, 하급 정령이라도 계약을 좀 해보고 싶은데. 그거 관련해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에드가 정령을?”
“응.”
예니카는 땋인 머리를 베베 꼬면서 음~하고 생각을 하더니, 이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타칸이 에드 얘기를 엄청 많이 했어. 에드 탓에 잘린 목이 아직도 뻐근 거린대.”
“…”
“그, 그런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에드. 타칸이 좀 뒤끝이 심하긴 해도, 내가 똑똑히 이야기 했단 말야. 에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감정 가지지 말라고 확실히 화냈어!”
예니카가 화를 내는 광경이래 봐야 발을 동동 굴리며 볼을 부풀리는 모습밖에 떠오르질 않으니, 당연히 미덥지 못하다.
고위 정령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만… 그렇다고 화풀이까지 하진 않겠지.
“아직도 타칸은 제 힘을 완전히 다 복구 못했거든. 그래도 광폭화 상태를 막아준 게 에드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툴툴대기만 하지 사실 별다른 감정은 없을 거야. 어쨌든 그럼 에드도 정령 감응이 꽤 쌓여있겠네.”
“그렇지.”
타칸뿐만 아니라, 예니카의 명을 받는 온갖 정령들을 다 두들겨 팬 결과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예니카도 잘 알고 있을 터다.
애초에 예니카는 그 당시의 일에 아직도 상당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라, 더 이야기 하고 싶어 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 보여…?”
예니카는 문득 그렇게 말을 하더니 양팔을 펼쳐보였다.
“…응?”
“음… 아직 현현되지 않은 정령을 보는 감각은 미약하구나… 내 손 잡아볼래, 에드?”
“손? 갑자기 손을?”
“…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기에,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예니카의 손을 맞잡았다.
“허, 억. 에드, 새, 생각보다 손이 크네.”
“네가 작은 거야.”
그리 말하고, 눈을 잠시 감았다 뜨자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쉰 세 마리… 평소보다는 좀 적긴 해…”
토끼, 매, 사슴, 호랑이, 독수리, 강아지, 참새… 하나 하나 읊기도 힘든 수많은 동물들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각자 크기도 다르고 몸을 이루고 있는 원소도 달라 엄청난 진풍경이다.
예니카의 어깨엔 바람으로 이루어진 참새 한 마리가 올라타 있고, 오른팔은 앙증맞은 새끼 보아뱀 한 마리가 휘감겨 매달려 있다, 발치엔 흙먼지가 떨어져나오는 강아지가 몸을 감고 앉아 있고, 불타는 사슴 한 마리는 예니카의 볼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
“…평소에도 이런 상태였냐?”
“평소에는 각자 퍼져있는데, 내가 북쪽 숲을 오면 항상 이렇게 모여들거든. 자, 이 뱀. 얘는 선명하게 잘 보이지? 유체 정령에서 하위 정령이 된지 얼마 안 된 애거든.”
“애초에 너 계약한 정령이 몇 마리인데?”
“응? 글쎄.. 여기 모인 애들이 다 계약한 애들은 아닌데… 음… 고위 정령은 한 마리, 중위 정령은 여섯 마리, 그리고 하위 정령은… 일일이 세지 않고 있어. 세자리수는 확실히 넘어 갈 것 같긴 해.”
정령 감응과 정령 이해 스킬의 최저 달성치를 찍으면 주는 정령슬롯이 기껏해야 두 칸이다.
정말로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체질을 타고난 소녀답다.
대충 보이는 정령들만 해도 열댓마리가 넘어가는데, 아직 내 눈에는 감지가 안 되는 정령까지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다는 거냐.
“어쨌든 정령학에 관심이 있으면, 내가 잘 알려줄 수는 있어. 근데 나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감각적인 측면이 더 발달해 있는 느낌이야… 단순 마법 이론이라면 나보다는 아일라 걔가 훨씬 더 조예가 깊을 거야… 그래도 실전 정령술은 감각을 발달시키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테일리의 동반자 아일라는 전력으로서는 애매하지만, 마법지식에는 조예가 깊다.
학술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이 다른 것처럼, 예니카는 감각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타입의 정령술사인 것이다.
진입장벽이 두터운 정령학을 익히려거든, 결국 같은 정령술사에게 도움을 받는 게 최고다.
정령학 쪽에서는 예니카만큼 극도로 감각이 발달한 사람은 없다. 적어도 이 실베니아 안에서는.
“어쨌든, 첫계약을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정령 감응 수준이 올라온 모양이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완전히 문외한이었는데, 엄청 성장이 빠르구나. 에드는 좀 재능이 있긴 한 것 같아.”
그렇게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예니카도 잘 알고 있겠지… 무엇보다, 타칸의 목을 베어버린 게 가장 컸다.
“그거 외에도 감각적인 부분에 대해서 예니카 네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단순히 학술적인 정령학 수업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응! 그런 건 걱정 하지 마!”
예니카 페일로버는 일부러도 만들기 힘든 인맥이다. 이 정도로 든든한 학우가 있으면, 그 덕을 볼 수 있어야지.
어디 가서 이만한 수준의 정령사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을 수나 있을까보냐. 빨아먹을 수 있으면 최대한 빨아먹….는 다는 표현은 좀 그렇겠지.
어쨌든 예니카는 순수한 선의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내가 에드의 스승님이네!”
예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에헴! 하고 웃었다.
딴에는 위엄 있게 웃어 보이겠다고 양팔을 허리에 얹고 으흠 으흠 자신만만하게 콧김을 내뱉지만, 위엄보다는 앙증맞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 예니카의 기분을 초치는 것도 좀 그래서, 오오오 하면서 박수를 몇 번 쳐주었다.
“걱정 붙들어 매! 책임지고 내가 에드의 정령 마법 감각을 끌어올릴 테니까! 금방 중위 정령하고도 계약할 수 있게 만들어 줄게!”
에헴! 하고 웃는 모습이 퍽 고마워서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댔다.
“그럼,.. 아직 정령이랑 직접적인 교감은 힘든 모양이네?”
“가끔 보이는 하위 정령들한테 내 목소리는 닿는 모양인데, 정령들이 나한테 하는 말은 잘 안 들리는 편이야.”
“그래? 음… 에드가 다루는 마법 수준을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정령 감응이랑 마나 감응은 꽤 괜찮은 수준까지 올라온 거 아니야?”
“…그렇긴 해.”
“이건… 단순히 정령들이 에드에게 말을 걸지 않는 거 아닐까? 명확하게 들리진 않아도, 어렴풋이라도 정령들의 이야기가 들리긴 해야할 텐데…”
예니카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기 어깨에 앉아 있는 참새에게 검지를 내밀었다.
귀여운 모습을 한 참새는 예니카의 검지에 얼른 옮겨 앉았다.
“카리스! 한 번 에드한테 얘기 해볼래?”
[ 예니카 아가씨! 이 남… 지 못하… 니까요! ]오…! 진짜로 어렴풋이 들린다…!
좀 더 마력의 감각에 정신을 몰아넣자, 명확하게 그 목소리가 전달되기 시작했다.
[ 애초에 저희들 이야기가 들리려면 좀 더 감응 수준을 올릴 필요가 있어요! ]“그런가? 근데 에드의 성장세는 생각보다 빠른 걸.”
[ 이 남자의 일과를 생각해보시라구요! 마법 수련을 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예니카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덱스관 203호 창문에서 이루어진 지난 주간 정기 보고 회의 때 보고된 바에 의하면, 식량 창고의 물자도 떨어져가는 와중이고, 당장에 오두막 공사에 정신을 집중해야하는 상황이라 다른 데에 정신을 팔수가으아그가가각 ]예니카가 참새의 머리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력의 흐름을 뒤틀자, 순식간에 참새 형상의 정령은 역소환 되어서 사라졌다.
“….들렸어?”
“어렴풋이?”
잠시 침묵.
“…근데, 주간 정기 보고 회의는 뭐냐?”
“응, 북쪽숲은 정령이 많이들 모여 사는 공간이잖아. 그러니까, 다른 외부적인 변동 같은 걸 굳이 나한테 보고하거나 뭐 어쨌든 그런 체계 같은 거를? 보고 해서 나한테 뭔가 정령들이 불안해질 것 같으면 알리는? 그런 와중에 아주 조금 에드에 대한 내용도 섞여 들어오는 일도 있지만 별로 그 비중이 대단치는 않고,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으로 슬쩍슬쩍 에드의 안부를 전해주는…? 지나가다 만난 이웃의 안부를 알리는 것 같은 그런 가벼운 느낌?”
“….그래?”
뭔가 횡설수설한 말투가 묘하게 신경 쓰이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결국 정령계 마법의 수련 방식이다.
“어쨌든, 정기적으로 에드의 정령 감응 같은 걸 체크해줄게. 아마도 이런 감각 영역은 학사 내에서는 내가 가장 트여있을테니까. 애초에 정령 쪽 감각이 발달한 사람 자체도 흔치 않고.”
“그래, 그건 고맙게 됐다.”
어쨌든 숙련된 정령술사의 도움이 있다면 정령계 마법은 정말 일취월장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를 잘 둬서 이런 부분은 참 좋게 됐다.
결국 신경 쓰이는 부분은 마공학 쪽인데…
“어머, 이야기 끝나셨어요?”
여전히 빙긋빙긋 웃는 모습으로 로르텔이 이야기를 치고 들어왔다.
“그래.”
“그래서, 마공학 용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자면요. 생각보다 남아도는 재고가 많아서 충분히 제공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쪽도 나름 희소식이다.
“거기다가 대부분은 사용연한이 지나거나 일정 기간 이상 매각된 기록이 없어서 사실상 죽은 자산 취급을 받는 것들이거든요.”
“오, 그럼 최대한 염가에 매각해줄 수 있냐? 약속했던 20닢이랑 최대한 퉁쳐서 계산 좀 두들겨 봐.”
“염가에 매각이라뇨. 선배도 참 섭섭한 말씀을 하시네요. 어차피 액수도 크지 않고, 사실상 죽은 자산이나 다름없으니 무료…”
거기까지 이야기 하고 로르텔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와 예니카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르텔을 쳐다보고 있자, 이내 그 여우같은 미소를 다시 띄운다.
“무료…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상인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힘들겠죠?”
“그렇지. 네 입장도 이해는 한다.”
“그래도 최대한 염가에 매각해 드릴게요. 악성 재고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계속요. 다만, 돈을 주고받는 계약이니 계약서도 작성해야 하고… 또, 그 때 그 때 팔아치울 때마다 매각 증서도 써주시는 게 좋겠어요.”
“보통 단순 매매계약에 그렇게까지 하냐?”
“뭐어, 저희는 특별한 타협이 들어가 있잖아요. 싸게 드린다니까요? 아하하. 다만…”
로르텔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매번 계약을 갱신해야하니까, 생활동 쪽에 있는 엘테 상회 지점에는 주기적으로 찾아와주셔야겠죠. 뭐어, 오신 김에 차도 한 잔 하고 가시고, 이런 저런 신변잡기 이야기도 좀 하고 가면 좋기도 하겠죠? 매물 변동을 생각하면 계약 갱신은 잦을수록 좋을 테니, 일주일에 한 번… 아니 3일에 한 번은 어때요?”
“계약이 그렇다면 좀 번거로운 건 어쩔 순 없지. 덤터기 씌울 생각만 하지 마라.”
“어머머,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엘테 상회의 장수 비결은 양심이랍니다.”
안정적으로 마공학 용품을 제공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는 건 꽤 중요하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그 때가서 잘 조율하면 되겠지. 나도 아예 마공학 용품을 볼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근데… 그 정도는 공짜로 줘도 괜찮지 않아…?”
거기서, 예니카가 치고 들어왔다.
“에드가 이번에 엄청 많이 도와줬잖아. 장부에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액수라면 그 정도는 계약서니 뭐니 너무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잖아.”
예니카가 묘하게 딱딱한 어조로 이야기 하자, 로르텔은 그에 대비되는 단정적인 어조로 받아친다.
“저는 상인인걸요. 은인 같은 분이라 할지라도, 공짜로 매물을 드리는 일은 없답니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윤리거든요.”
“거짓말! 그냥 명분 만들기잖아!”
“명분이요? 무슨 명분이요?”
새침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예니카를 바라보는 로르텔의 표정은 과연, 정말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소녀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로르텔이 그런 소녀일리가 없다.
사실 가격 협상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긴 한 것 같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에 관한 건을 가지고 로르텔을 더 구워삶으면 어찌됐든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계약을 체결할 방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은 예니카치고는 꽤 예리한 지적이다. 틈만 나면 한 푼의 금화라도 더 벌기 위해 악을 쓰는 로르텔의 심성을 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럼 이야기를 어떻게 결론을 짓는 게 맞을까 싶어서 잠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나, 로르텔 아가씨까지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일동 고개를 돌려서 풀숲 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벨씨?”
“으읏…”
“… 왜 그러세요?”
나와 로르텔, 그리고 예니카가 둘러 앉아 있는 캠프 파이어의 광경을 보더니 벨은 갑자기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눈을 지그시 감은 것이다.
“아뇨, 죄송합니다. 멤버만 봐도 벌써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 같아서.”
“…예?”
“상황이 영 평화롭지는 않은 것 같군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가장 먼저 시선이 차갑게 식은 사람은 로르텔이다.
오필리스관의 관계자를 만나고 싶지 않은 입장일 터. 애초에 위치를 들키고 싶지도 않았을 테다.
사실, 이 시간까지 멀쩡한 시점에서 이미 로르텔의 승리나 다름없다. 장구류의 매각안은 벌써 통과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엘테가 로르텔을 제압하려거든 지난밤에 진즉 이 오두막에 찾아왔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서 사리고 있는 입장이건만, 오두막 밖에 나와서 불꽃을 쬐는 여유 정도는 충분히 부릴만 했다. 사실상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인고로.
그래도, 벨이 입고 있는 복식은 로르텔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모양이다.
깔끔하고 단정한 선임 메이드 복장에 비해서 훨씬 화려한 복식. 메이드 장의 복장이었다.
엘리스를 이어서 벨이 메이드장 직위를 물려 받았다는 것은, 오필리스관 사태도 그럭저럭 정사대로 잘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벨은 평소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 일행의 맞은 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우중충한 소식을 전달해드리게 되어서 죄송스럽습니다만…”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벨이 할 말이 무엇인지 예상이 되어서, 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타닥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땔깜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